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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by 【고동엽】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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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제1부 : 슐라이어마흐
제1장 서론
제2장 슐라이어마흐의 삶과 그의 경력
제3장 계몽주의에 대한 슐라이어마흐의 반응
제4장 신학적 방법
제5장 교리적 헌신
제6장 평가 및 결론


◎제2부 : 리츨
제1장 서론
제2장 고전적 자유주의
제3장 알브레히트 리츨의 삶과 경력
제4장 리츨의 신학적 방법
제5장 평가
◎제3부 : 아돌프 하르낙
◎제4부 : 월터 라우셴부시
⊙. 참고문헌

제1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흐

Friedrich Schleiemacher, 1768-1834
종교적 감정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제1장 서론
19세기 신학자들은 인간 생활 안에 종교라는 어떤 특정의 자리를 정함으로써 계몽 사상에 의해 초래되었던 곤경을 넘어서고자 했으며, 또한 그 결과로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흐는 '감정'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특별한 경험, 곧 직관적 삶을 종교의 중심으로 격상시킬 것을 대안으로 제안했다.


그가 기독교 신학에 끼친 영향력은 뉴턴이 물리학에, 프로이드가 심리학에, 그리고 다윈이 생물학에 끼친 것과 같다고 하겠다. 현대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슐라이어마흐를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인정한다.
슐라이어마흐가 이러한 영예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신학에 있어서 새 시대를 창도했기 때문이다. 슐라이어마흐에게 중요한 것은 현대 사상과의 갈등 속에 있던 기독교의 교리를 풀어 주기 위하여 그가 취한 방법과 접근법이었고, 그것은 그 이후 200년 간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을 위해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그의 동조자들뿐 아니라 그의 반대자들도 신학적 지식을 이룩하는 데 쓰이는 바, 그가 형성시켜 놓았던, 이 새 방법 때문에 그를 자유주의 신학의 원조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의 슐라이어마흐 연구는 그가 가졌던 특정한 교리적 견해들보다는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더 초점을 맞출 것이다.

제2장 슐라이어마흐의 삶과 그의 경력
슐라이어마흐는 프러시아의 브레스라우(Breslau, Prussia: 오늘날 폴란드의 브로크로브)에서 1768년 11월 21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개혁 교회의 목사로서 프러시아 부대의 군목으로 시무하고 있었다. 어린 프리드리히가 열 살때, 그의 아버지 슐라이어마흐는 모라비아교도(Moravians)로 알려진 경건주의자들의 사역을 통하여 감정적으로 깊은 은혜를 받았다. 슐라이어마흐의 가정은 프러시아 개혁 교회를 떠나지 않았지만, 매우 열정적이고 복음적이며 신앙적인 생활을 했다.
열네 살 때 프리드리히는 경건주의 풍의 학교로 보내져 그 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후에는 목회 훈련을 위하여 경건주의 신학교에 갔다. 한편 그는 초등 교육기 언젠가부터 정통 개신교의 핵심적 교리들 가운데 어떤 부분에 대하여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그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에 의한 의로운 형벌을 감당했다는 속죄의 대속(代贖)교리에 대해 회의를 피력했다.


슐라이어마흐가 정통적인 개신교 신학으로부터 이탈해 가는 모습은 그가 할레(Halle)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기간에도 계속되었다. 거기서 그는 칸트의 회의주의에 심취하며 계몽주의 철학을 널리 섭렵해 갔다. 1790년 슐라이어마흐는 개혁 교회의 목사로서 안수를 받았고, 이후 그는 교회 기관의 여러 직책과 귀족 명가의 직임을 맡았다. 그 가운데 1796년부터 1802년 동안 베를린의 차리테(Charite) 병원의 원목직을 수행했는데 이 몇년 동안 새로운 운동인 로만티시즘(Romanticism)이 베를린의 상류 사회 문화를 휩쓸고 있었고 슐라이어마흐는 그것에 매료되었다. 로만티시즘(혹은, 낭만주의)은 계몽주의 철학의 냉랭한 합리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 직관 등을 매우 강조하였다. 슐라이어마흐가 살았던 시기에 이 운동을 이끌어 가던 가장 위대한 지도자는 아마도 저 위대한 시인 요한 볼프 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였을 것이다.
그의 최초의 역작, 『신앙에 관하여: 신앙을 멸시하는 교양인들에게 쓰는 담화』(On Religion: 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ts, 1799)를 쓴 것은 친구들에게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 젊은 사상가는 신앙을 '멸시하는 교양인들'(독일의 젊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진정한 신앙은 교리와 무관하며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Gef hl)에 관한 문제라고 설득하려 했다.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이거나 신조적 명제에 복종하는 것과는 다른,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라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 슐라이어마흐의 『담화』는 신앙(종교)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현대적 연구서였고, 저자는 이 책 때문에 하루 아침에 젊은 천재라는 명성을 얻었다.


1804년에 슐라이어마흐는 할레대학교의 교수와 대학예배를 위한 설교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1809년 친한 친구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마침내 가정생활의 행복을 바라던 그의 깊은 열망을 이루었다. 슐라이어마흐는 트리니티교회에서 매주일 설교했고, 당시 베를린의 지도층 인사들의 자녀들 수백명에게 견진례를 베풀었다. 그 중에는 독일을 통일하여 독일 제국을 건설한 미래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가 포함되어 있다.


그의 대작(magnum opus)은 1821-1822년 처음 나오고 1830년에 개정한 『기독교 신앙』(Christian Theology)이라는 제목의 조직 신학이었다. 전통주의자들에게 이 『기독교신앙』은 계몽주의 시대의 반(反)초자연주의적 정신을 용인한다는 합의 각서와 같은 것으로 마치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으나 슬쩍 위장하여 인간에 대하여 말하려는 시도의 표현이었다. 진보주의자들에게는 유행이 다 지난 권위주의적 교의서로부터의 해방이며, 동시에 과학과 갈등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기독교 신앙형태로의 전이(轉移)를 뜻했다.
슐라이어마흐는 1834년 2월 12일 폐렴으로 사망했는데, 그는 가족과 함께 성찬식에 참여하는 중에 임종을 맞았다.

제3장 계몽주의에 대한 슐라이어마흐의 반응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은 주로 그가 살던 때의 문화적 상황과 지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나온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은 기독 교회의 국교제도를 폐지하기에 이르렀고 대신 '이성의 여신'( Goddess of Reason)을 등극 시켰다. 이성은 감각적 경험의 세계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칸트의 제한은 신앙과 이성을 연관지었던 어떠한 종교사상에도 심각한 문제를 안겨 주었다.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은 어떤 부분에서 본다면, 칸트가 설정한 이성의 한계를 받아들이면서도, 반면 그의 종교 비판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슐라이어마흐 신학의 문화적 맥락을 형성시켜 주었던 새로운 상황은 낭만주의 운동이었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의 생동감이라든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정의 힘과 상상력 같은 것을 회복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합리주의 때문에 상실되었다고 생각했다.

제4장 신학적 방법
슐라이어마흐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인 어떤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인간경험에 기초하는 신학을 시도하려고 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실천 이성에 두려 했던 칸트의 시도나 절대정신이 역사를 통하여 진행하는 것을 탐색하는 새로운 사변적 합리주의에 신학의 기초를 놓으려고 했던 헤겔의 노력과 함께, 계몽주의의 여파속에서 신학을 시도했던 세 번째 주요한 노력이다.
슐라이어마흐는 직관을 통하여 하나의 대안적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곧 실재 전체에 대한 의존 감정에 주목했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증거나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교의 또는 교회적 의식(儀式)이나 절차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 속에 있는 '근본적이고, 쉽게 식별이 되는 통합적 요소'-즉 유한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무한한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흐가 종교를 '감정'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독일어의 Gef hl이라는 말은 영어로 감정(sensation)이라는 말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고 심오한 의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느낌'이라는 말은 의식 중에 '성찰-이전적' 상태, 곧 뚜렷한 사고나 감정 이전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흐는 주장하기를, 진정한 종교의 핵심은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존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종교적 감정(그것을 종종 '경건'이라고 불렀다)이 인간의 경험 안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며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종교의 자치권을 확립하고 그것을 더 이상 환원시킬 수 없는 보편적 인간의 경험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그 위치를 설정한 후, 슐라이어마흐는 신학 자체로 관심을 돌린다. 가장 광범위하며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학은 종교, 다시말해서 경건에 대한 인간의 성찰일 뿐이다.


그의 위대한 조직 신학적 저서인 『기독교 신앙』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신학을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감정을 말로 표현하려는 시도라고 정의했다. 그 본질에 있어서 기독교는 인간의 보편적 경건, 또는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의식 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음을 표현하는 한 형태이다. 그는 경건의 한 구체적인 형태를 식별하여 그것을 기독교적인 '하나님-의식' 또는 기독교적 '자아-의식'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그가 의미하는 바 '기독교의 종교적 감정'-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형성되고 성취된 기독교의 '하나님-의식'이나 '자기-의식'이라는 경험이 기독교의 본질이다. 신학적 방법에서 그가 이룬 혁신은 이른바 "믿는 주체로 돌아가라"(turn to the believing subject)는 데 있다.


현대신학에 대한 그의 기여들 가운데 하나는 교리들의 문화적, 역사적 성격을 강조한 점이다. 슐라이어마흐는 종교적 경험이 주된 것이고, 신학은 그 다음으로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독교 공동체들의 변화하는 양상과 관련하여 항시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교리의 형태는 어떤 특정의 시기에 국한된 것이므로, 그것에 대한 영속적 가치를 주장할 수 없다. 어느 시대에건 살아있는 종교적 의식의 함의를, 비판적 성찰에 의거하여 새로이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이다.
무엇보다도 슐라이어마흐는 종교를 인간 경험에 있어서 환원될 수 없는 한 요소로서 보아 그 독특성을 주장했고, 예수 그리스를 '하나님-의식'의 지고한 표현으로 보아 그의 독특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계몽주의와 결정적으로 결별하고 있다.

제5장 교리적 헌신
그는 모든 교리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의 종교적 '자아-의식' 즉, 그리스도인들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추출되어야 한다"고 썼다. 분명히 슐라이어마흐는 성경이 초자연적으로 영감되었거나 무오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그것이 그리스도 자신의 '하나님-의식'의 순수한 모델이 나타날 때마다, 기독교 신학을 위한 하나의 상대적 권위를 가진다. 그러나 신학을 위한 진리의 궁극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후자 곧 그리스도인들의 자의식 안에 재현된 '하나님-의식'이다.

제1절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돌리는 그의 모든 속성들이 하나님 안에만 특별하게 있는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절대 의존 감정이 하나님과 관련되는 방식에 있어서 특별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한 진술은 하나님-그 자체(God-in-himself)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어떤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흐가 재구성한 하나님 이해는 전통적 기독교 사상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들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죄와 악의 창시자라는 사실은 피조물의 의존성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 문제를 하나님이 아닌 그 외의 다른 대리자의 몫으로 돌리게 되면, 그의 전능성이 제한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이 죄라는 것을, 구속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정하셨다고 한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중보 기도의 효과를 부정했다. 하나님에게 일의 진행 과정을 바꿔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과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음을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의존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끝으로, 삼위일체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을 『기독교 신앙』 맨 뒤에 나오는 짤막한 결론 부분으로 가지고 냉담하게 진술하기를, 그것은 "종교적 의식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기를 거절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라고 하지만,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을 멀리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위대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슐라이어마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초인격적인 능력인데, 피조성이 그 존재에 부과하는 모든 차별성을 뛰어 넘는다.

제2절 기독론
슐라이어마흐는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식' 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기독론으로 그것을 대치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애초부터 절대적으로 막강한 '하나님-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외에는 나머지 인간들과 완전히 같다.
그러므로 구속자는 인간본성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일정한 힘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된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이다.
슐라이어마흐에 의하면, 예수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신성'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이상성이다. 곧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이상이며, 완전한 경건의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구속 사역은 그가 이러한 하나님-의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재생산성(Vorbildlichkeit)이다.

제6장 평가 및 결론
20세기에 벌어진 논쟁은 주로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적 방법론에 집중되어 왔다.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이 순전히 인간의 경험이라는 지평 안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어떤 말씀을 하시거나, 어떤 행동을 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하여 인정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초월성의 상실쪽으로 향하는 현대 기독교의 사상적 경향을 창도하였다.
그의 신학적 방법의 약점은 그의 신론에 심각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의 신론은 내재성에 대해 지나치게 강조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행동을 자연과 거의 동일시한 나머지 구속이 하나님의 행동인 것만큼 악과 고통 역시 하나님의 행동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나님과 이 세계를 상호 연관지으면서 그 둘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는 면에서 슐라이어마흐의 신론을 만유재신론적(panentheistic)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예수의 신성이 그의 본질적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보는, 곧 하나님과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그가 기능하는 한 방법이라고 하여, 오늘날 '기능적 기독론'으로 알려져 있는 사상의 원형이 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상의 오류는 그것이 기능적 기독론이므로 하나님의 '자기-표현'인 예수의 궁극성과 최고성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흐의 신학자적 위대성은 부인할 수 없다. 좋든 싫든, 그의 영향은 현대신학에 고루 퍼져 있다. 그것은 특히 19세기 말엽쯤에 가서 개신교 사상을 장악하게 된 '자유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신학의 학파들에게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제 그 신학의 가장 위대한 주창자에게로 가야겠다.

제2부 알브레히트 리츨과 고전적 자유주의

Albrecht Ritschl, 1822-1889
윤리적 문화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제1장 서론
역사적으로보면, '자유주의'는 금세기 초 개신교의 학문적 신학을 장악했던 어떤 특정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처음 독일에서 슐라이어마흐와 헤겔의 제자들과 추종자들 가운데서 일어났으며 알브레히트 리츨의 학파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가장 뚜렷한 대표자는, 곧 알브레히트 리츨과 아돌프 하르낙(Adolf Hamack) 그리고 월터 라우셴부시(Walter Rauschenbusch) 이 세사람으로 드러난다. 다른 나머지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리츨을 주로 다룰 것이다.

제2장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
슐라이어마흐와 마찬가지로, 이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신조들을 현대적 지식의 빛 안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계몽주의 이후로 문화속에서 일어난 몇몇 발전들을 기독교신학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고 그것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학 속에 융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기독교 신학은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클로드 웰치(Claude Welch)가 말했듯이, '현대 사상의 주장들을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두 번째 특징은 개개 기독교 사상가가 전통적 신조들을 비판하고 재구성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실천적, 윤리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넷째,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기초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두려고 했다.
끝으로, 아마 무의식 중에 앞에서 말한 특징들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특징으로서,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에 의하여 시작되고 19세기 초의 위대한 독일 사상가들에 의해 지속된 바, 초월성을 간과하고 신적 내재성 쪽으로 계속 흘러갔다.
계몽주의 이전의 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거룩하시고 초월적인 하나님과 죄악되고 유한한 인간들 사이의 분리를 강조했고, 성육신은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큰 틈에 다리를 놓은 극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계몽주의에서 시작되고 자유주의에서 그 절정에 다다른 신학자들은, 예컨대, 합리적이고 직관적이며 또는 도덕적인 능력과 같은 것에서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속성으로부터 신학을 세워 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수를 이 죄악 세상에 진주(進駐)한 그리스도로 보기보다는 모범적 인간으로 보았다.


제3장 알브레히트 리츨의 삶과 경력
19세기 말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 인물은 알브레히트 리츨이다. 1875년부터 1925년까지 미친 영향력 때문에 리츨 학파 하면 개신교 자유주의와 거의 같은 말이 돼 버렸다. 이렇게, 슐라이어마흐가 신학의 한 시대를 세웠지만 어떤 학파를 창도하지는 않은 반면, 리츨은 한 시대를 연 것은 아니었지만, 한 학파를 세웠다.
알브레히트 리츨은 1822년 프러시아 개신교회의 한 주교(主敎)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에 음악의 소양을 보였고, 유년기부터 대단한 지적 능력을 보였다. 청년 리츨은 본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튜빙겐과 할레 대학 등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종래 학문적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본으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슐라이아마흐, 칸트 그리고 헤겔의 영향을 받은 신약학자 바우르(F. C. Baur)의 영향을 받았다.
리츨은 1846년 본에서 처음 강사직을 얻었고, 1864년에 괴팅겐으로 이주하여 1889년 죽을 때 까지 거기에 남아 있었다. 25년 간 괴팅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독일의 지도적 신학자라는 명성을 확립했다. 당대의 개신교 목사들과 교사들의 한 세대 전체가 그의 강의와 저술들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1870년에서 1874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출간된 『칭의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 교리』(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라는 제목의 세 권짜리 논문이었다.

제4장 리츨의 신학적 방법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유물론(materialism)과 실증주의(positivism)와 같은 사상적 세력에 포위를 당해 있었다. 리츨은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있는 갈등은 지식에 있어서 '과학적' 유형과 '종교적' 유형이 있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지식은 순수한 이론적 객관성, 곧 사물 자체에 대한 비(非)주관적 인식을 추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반면, 종교적 지식은 실재에 대한 가치 판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적 지식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최고의 선을 성취하기 위한 사물의 가치와 관련한 것이다.


리츨의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보통 형이상학적 요소에 대한 얼마간의 논의를 섞어 넣는다. 리츨은 신학이 형이상학에 기대려고 하는 어떠한 의존도 맹렬히 배격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증명들은 과학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을 성취하도록 도움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도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에서만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리츨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인간의 최고의 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발견된다는 집단적 가치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신학은 교회 안에서 가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집단적 종교 경험 및 도덕적 경험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최고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가치 판단에 근거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요약하면, 리츨에게 있어서 신학은 단순한 외적 형태나 표현들과 구분되는, 기독교의 진정한 정수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자 한다. 또한, 그것은 모든 교리들을 그들을 통어하는 힘인 그 핵심과의 조직적인 관계 속에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신학의 근거와 규범은 무엇인가? 리츨에 따르면, 그것은 성경 전체가 아니라 건전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통하여 결정된 '사도적 사상 체계'(apostolic circle of ideas)이다. 리츨의 신학적 방법은 칸트 철학과 뚜렷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은, 칸트의 기본적인 인식론을 견지하는 한편 그의 회의론을 개량하고자 했던, 괴팅겐의 철학자 헤르만 로츠(Hermann Lotze)를 통하여 리츨에게 전수되었다. 리츨은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삭제하고 종교를 가능한 한 윤리학과 밀접히 연관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칸트를 따랐다. 그러나 리츨은 하나님이 그가 행한 일을 통하여 정말로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칸트와 달랐다. 칸트에 대한 대안으로서, 리츨은 로츠에게 크게 의존하여 어떤 사물은(이 경우에는 하나님) 그것이 이룬 결과(이 경우에는 계시와 구원)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상을 지지했다.

제1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리츨의 신론은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그리고 그러한 결과들에 부응하는 가치판단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리츨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주된 긍정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는 덧붙이기를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인격적일 것과 초월적인 분 혹은 '세속을 초월 하신 분'(supramundane)이기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이 나라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라고 파악한다. 그러므로 신앙이 아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이다. 이것 외에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리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선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자신의 최고 목표이며 선이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신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강조는 역사를 초월하는 그의 초월성보다는 역사 안에 계신 신의 내재성으로 기울었다.

제2절 죄와 구원
리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죄론과 구원론이 가지는 내적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최고의 선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신학은 죄를 그 나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죄는 일차적으로 이기성이다. 죄는 물려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리츨의 신학적 저작 전반을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초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종교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 종교적인 초점은 하나님이 죄인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는 구원의 순간, 곧 칭의이다. 윤리적 초점은 하나님이 그와 화해된 남자와 여자들에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라고 부르신다는 주장에 있다. 리츨에게 있어서, '구원'은 이 두 가지 초점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피안적인 종교가 아니라 사랑에 감화된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세계를 변혁시키는 종교이다.

제3절 기독론
칼케돈 신조(chalcedon, AD 451)를 따르는 고전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인격으로서 구별되는 두 성품, 곧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 현재도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리츨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신조를 완고하게 거부했다. 이유는 그것은 종교적이기보다 과학적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에 대한 진정한 종교적 평가는 그의 역사적 행위, 종교적 확신 그리고 윤리적 동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그가 가졌을 것으로 가정하는 그의 타고난 기질이나 능력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리츨은 예수의 신성을, 그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구현이 되도록 주셨던 독특한 '소명'-그는 이 소명을 완전하게 성취했다-이라고 해석했다. 리츨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와 그의 사역이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히 아신 바 되고 그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의미에서만 '선재'한 것이었다.
리츨 신학에서 중심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의 성취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기서 리츨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소명적 순종'(vocational obedience)의 개념을 소개한다. 리츨의 주된 관심사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도덕적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비록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로 삼는, 여하한 속죄의 교리도 명백히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부정하지 않았다.

제5장 평가
지속적 중요성을 가지는 현대 신학자라는 리츨의 명성은 20세기 중반에 주로 신정통주의 사상가들인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와 같은 이들의 비평 때문에 위축되어 한풀 꺽여 버리게 되었다. 가장 최근의 비평가들은 리츨이 탈(脫)계몽주의 시대의 과학, 철학과 갈등하고 있던 기독교 신앙을 그 불필요한 갈등으로부터 구해주었고 '교의를 도덕화' 시키는 데 공헌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의 영향력이 미친 결과로, 당대의 모든 기독교 목사들과 교사들은 '사회 복음'(social gospel)을 전개하였다. 그의 신학적 방법에 있어서 중심적인 문제는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여하한 논의도 단호하게 배제하려 했지만 자기 자신도 그런 식의 논의를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리츨이 신학적 연구를 가치 판단의 영역에만 국한시켰던 것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다. 예컨대, 그러한 제한을 가지고 있으면 신적 초월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초월의 문제에 덧붙여서, 리츨이 신학을 가치 판단의 영역에만 제한했던 것은 신학이 가지고 있는 공공의 성질에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리츨의 신학은 주관주의라는 비난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이유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고대 기독교 교리를 그토록 명백히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내어버릴 수 있었을까? 부분적이겠지만 그 이유는, 이미 확인한 바대로, 그가 부당하고 비일관적인 방법으로 존재론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사물의 외양과 결과 (또는 영향) 이면에 있는 본질 혹은 존재에 관한 논의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바르트를 위시한 그 밖의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리츨에 대하여 '문화적 개신교'라고 하는 다소 혹독하지만 그렇게 불려 마땅한 꼬리표를 붙여 주었다.


그의 견해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인간의 종교적, 윤리적, 이상으로 환원시켰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설명들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리츨의 설명은, 신약 성경 자체로 소급되는 바, 교회의 성육신을 중요하게 보는 기독론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제3부 아돌프 하르낙

리츨 학파에서 두 사람이 각별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그들이 그가 제시한 신학적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창의적인 방법으로 그들 나름의 신학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독일의 학자 아돌프 하르낙과 독일계 미국인 교수 월터 라우셴부시이다.
아돌프 하르낙은 금세기 초 개신교적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뛰어난 대중적 대변자였을 것이다. 그는 1888년부터 퇴임한 1921년까지 베를린대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교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독일 국민에게 선포하는 빌헬름의 대국민 포고문을 썼던 하르낙은, 황제의 전쟁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1930년 죽었다.
하르낙이 가장 폭넓은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1899년부터 1900년의 기간 동안 베를린대학교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이 출간되었기 때문이었다. 1901년에 이 강의는 미국에서 『기독교는 무엇인가?』(What is Christianity?)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열여섯 번의 강의에서 하르낙은 진정한 기독교의 중심적 알맹이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는 이것을 '복음'이라고 부르면서, 신약 성경과 기독교 세계의 역사적 전통 안에서 그것이 전달될 때 문화적 껍데기에 싸여 전해졌다고 보고 그 껍데기로부터 그것을 분리해 내려고 했다.
교회사 전체를 통하여, 교회는 희랍적 개념인 로고스를 그리스도와 동일시 하는 등의 낯선 철학적 개념과 같은 껍데기로 씌어져 있었다.

제4부 월터 라우셴부시

하르낙은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구체적인 정치적 사안에 적용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월터 라우셴부시는 이와 대조적으로 바로 그러한 일을 하는 신학자로서 그가 가진 거의 대부분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그 일을 위하여 썼다.
라우셴부시는 독일의 루터교 목사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미국으로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례교 목사가 되었다. 그는 뉴욕에 있는 로체스터(Rochester)신학교에 다녔는데, 그의 부친은 독어로 강의하는 반의 교수였다.
1891년 라우셴부시는 독일에서 몇 달 간 신약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윤리적 하나님의 나라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는 리츨 학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97년에 그는 로체스터신학교의 교회사 교수가 되었고, 그의 저술과 강의들을 통하여 1918년에 그가 죽을 때까지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개혁을 촉진시켰다. 가장 영향력을 크게 끼친 책이면서 그로 하여금 대중적 각광을 받도록 했던 것은 1907년에 출간된 『기독교와 사회적 위기』(Christianity and Social Crisis)라는 책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과업은 술취함이나 간통과 같은 죄악을 없애는 것이기보다는 "모든 인간 관계들을 새롭게 바꾸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화해시킴으로써 인간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키는 것"이라고 썼다. 1912년에 라우셴부시는 그의 두 번째 주요 저서인 『사회 질서의 기독교화』(Christanizing the Social Order)를 펴냈다.
라우셴부시는 구원을 '영혼의 자발적인 사회화'라고 정의하였다. 미국의 사회 복음 운동은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을 가장 실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을 그 사회 복음과 함께 크게 휩쓸고 지나갔다. 그 이후의 몇 십 년 간은 새로운 형태의 개신교 신학인 신정통주의(neo-orthodoxy)가 지배하게 된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그 외의 모든 불만의 근저에는 하나님 나라가 역사 안에 내재한다고 하는 그들의 강조가 하나님을 이 세상 속에 해체시켜 버리고 말것이라는 신정통주의자들의 두려움이 있었다.
구(舊)자유주의의 이러한 내재주의적 충격에 대한 신정통주의의 반응으로 20세기 신학은 시작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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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르틴 레데커 저, 주재용 옮김, 『슐라이에르마허 생애와 사상』,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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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Vitis님의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 Vi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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