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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의 배경

by 【고동엽】 2021.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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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의 배경 (1) 정승원 목사/ 예손교회, 합동신학대학 교수(조직신학)현대신학의 학문적, 사회적 배경으로 우리는 17세기 말에서 시작해서 한세기동안 유럽을 휩쓸었던 계몽주의 (Enlightenment)를 들 수 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것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던 교회(구․신교)의 통치와 권위로부터 나와 인간의 것으로 깨우쳐진(enlightened)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것은 하나님이 중심이었던 세계관이 인간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의 지적, 도덕적 능력이 높게 평가되기 시작했고, 상대적으로 교회의 권위가 축소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이성이 계시를 대신하였고 자연주(naturalism)가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를 대신했다는 것이며,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경이 인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이성이 종교적 교리나 계시를 살피고 검증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계몽주의가 전적으로 반(反)기독교적 혹은 반(反)유신론적으로 시작했으며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기독교적이었으며 유신론적이었다. 그래서 어정쩡한 이신론(deism)이 나온 것이다. 신을 인정하되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을 다스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그 이성이 다스릴 세계를 허락하고 이제 더 이상 상관하지도 상관할 수도 없는 신을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계시보다 이성이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신론을 기독교내에 존재하면서 초자연적인것을 부인하고 계시를 부정하는 현대신학자들의 모태(母胎)적 양상(樣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계몽주의 사상의 기초를 놓은 대표적 인물은 아마도 수학자이며 철학자였던 데카르트(Rene Descartes)일 것이다. 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이성의 우월성을 잘 나타 내 보이는 말이다. 즉, 인간의 이성이 무엇인가를 의심할 때 (여기 데카르트가 말하는 cogito는 의심 내지는 비판의 의미가 들어있다) 그 의심의 주체인 인간의 존재가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신적 계시가 아니라 이성(理性)이 인식론적 출발점이 되었고,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존재론적 출발점이 되었음을 알리는 말이다. 계몽주의는 이런 사상적 변화뿐만 아니라 과학적 변혁에 의해 그 힘을 한층 더 싣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이 기존의 중세 시대의 우주관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평평한 지구를 중심에 놓고 위에는 천국이요 밑은 지옥이라고 가르친 교회의 권위는 추락했었다.


이렇게 시작한 과학의 존재는 바로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는 근거요 인간 이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된 것이다.19세기 역사학자이자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는 당시 계몽주의 시대의 과학의 발달과 교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풍자했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들이 밤 속에 숨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뉴톤 (Newton)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이러한 풍자는 그 당시 사람 들에게 과학의 존재가 어떠했으며 교회가 얼마나 초라해졌는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달이 인간 문명과 삶의 질에 진보 를 가져왔다고 낙관했을지 모르나, 사실은 그때부터 하나님의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는 또 다른 암흑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자연에 대한 깨달음이 또한 과학의 작은 발전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 것은 마치 아버지가 인터넷을 모른다고 아버지 권위 자체를 무시하는 어리석은 아이의 행실과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초 현대 신학이 태동하기에 아주 적합한 환경으로 무르익기 시작했던 것이다.우리는 그 적합한 환경으로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자율성(autonomy)이다.


이제는 인간 외에 어떠한 외부의 권위나 기준에도 순복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법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리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인간을 자유케 할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이 최종 준거점 (reference-point)이 되었다는 것이다. Theo-nomy(God-law)가 아니라 auto-nomy (self-law)가 된 것이다. 둘째로 이성이다. 물론 헬라 철학 이후부터 시작해서 이성이 중세 시대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계몽주의의 이성은 주어진 질서와 원리에 부합하는 이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이성이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의 자리를 차지한 이성이었다.


자연과 인간의 세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도 다스리는 이성인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율성과 이성은 바로 현대신학이 태동하기에 아주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된 것이다. 현대 신학 배경 (II)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계몽주의는 현대 신학이 태동하기에 적절한 환경을 조성했다고 한다면 칸트는 현대 신학의 사상적 틀을 만들어 주었다고 하겠다. 슐라이어막허를 소위 현대 신학의 아버지ꡓ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아마 칸트는 ꡐ현대 신학의 할아버지 정도 될 것이다. 그는 슐라이어막허 보다 약 40년 앞서 태어났는데 슐라이어막허로 시작되는 현대 신학에 누구보다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칸트가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인간의 인식론과 신앙에 대해 새로 짠 틀 때문이었다.


그의 인식론은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일컫는다. 칸트 전에는 인식적 과정에 있어서 인간 외의 사물을 주체로 놓고 인간을 객체로 놓았지만 그는 이 과정의 순서를 역으로 놓았다. 즉, 인간의 마음이 경험을 통해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물체들을 정하고 인식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마음대로 모든 것을 정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인간의 마음에 상응하는 범주 (category)내지는 조건 (condition)이 주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범주나 조건이 벗어난 것을 그는 물자체 (物自體, ding an sich)라고 부른다. 이 물자체는 인간의 인식에 벗어난 것,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식론에 있어서만 아니라 윤리에 있어서도 그는 어떤 ꡒ범주ꡓ를 정한다. 그의 유명한 윤리 개념 정언명령 (正言命令, categorical imperative)이 바로 그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로 믿어 왔던 어떤 순수 이성을 비판하고 대신 어떤 정해진 범주로부터 주어지는 윤리적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이중적 세계를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그에게는 본체적 세계 (noumenal world)와 현상적 세계(phenomenal world), 두 세계가 있다.


경험과 순수 이성, 다른 모든 현상들은 현상적 세계에 국한 되 고 종교와 영혼 불멸과 자유와 물자체와 神은 본체적 세계에 속한다. 본체적 세계란 인간이 인식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현상적 세계를 위해서는 꼭 있어야 하는 그런 초월적 범주 세계인 것이다.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파헤치고 종교와 神의 영역을 따로 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잃어 버렸던 계시와 기독교의 권위를 다시 찾으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정 반대이다.


계몽주의는 계시와 神을 버렸다고 한다면 칸트는 계시와 神을 가두어 놓고 죽이려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게 가두어 놓아야 인간은 더 자유스러울 수가 있고 인간의 자율성은 더 철저하게 자율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이 현대 신학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자율성과 자유를 유지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논하게 하는 사상적 근거가 된 것이다.우리는 다음과 같이 몇가지로 어떻게 칸트가 현대신학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1. 칸트가 神, 물자체, 인간 자체, 도덕적 가치, 자유 등을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본체적 세계에 국한시킨 것에 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리에게 그 본체적 세계를 알 길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神, 도덕, 자유 등에 관해 이야기 조차 할 수 있는가? 또한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속한 神이라면 그런 神은 어떤 도덕적 개념이나 자유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즉, 그런 神은 극히 추상적 개념 일 뿐이요 인간 세계에 어떠한 것도 자의적으로 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神의 개념은 단지 현상적 세계에 속한 인간 경험의 가능성과 의미를 위해 존재할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빈 개념일 뿐이다. 현대 신학에서 주로 찾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하나님 이다.


2. 인간이 알 수도 다다를 수도 없는 칸트의 하나님은 전적 타자 (wholly other)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일단 현상 세계에 내재하면 그는 전적으로 자연적 객체가 되어 버린다. 현상 세계에는 초자연주의가 용납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가 없어진다. 한 예로 이러한 초월적 신 개념은 바르트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즉, 하나님은 동시에 감추어진 자요 또한 전적으로 나타난 자라는 바르트의 신관의 사상적 원천이 된다.


3. 칸트의 도덕이나 윤리는 (정언명령 같은) 실재적으로 우리가 체험하고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험을 초월해서 있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적 (formal) 규범일 뿐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이나 우리 속에 있는 도덕적 규범은 진짜 존재해서가 아니라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에 따라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나 도덕적 규범을 마치 있는 것으로 보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인간으로 하여금 전혀 믿지 않는 하나님과 윤리적 규범을 따라 실천하도록 하는가? 그 근거는 어떤 세계에 속한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자율성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규범이나 윤리관이 바로 현대 신학에서 자주 논하는 윤리관이요 종교관이다.


4. 칸트에게는 특별 계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러한 초월적 계시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 (autonomy)이 부인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율성이란 인간에게 어떤 도덕적인 규범이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현상적 세계의 순수 이성의 역할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에게는 성경의 특별 계시라는 개념이 거부된다.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알 수 없는 것이 어떤 계시를 통하여 알려 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 그 계시가 현상 세계에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성에 의해서 증명되어야 받아 들인다는 것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어떤 초월적 의미, 초자연적 계시를 논하지만 결코 인간의 자율성을 포기하면서까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자율성을 꾸며 주는 시녀 역할만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성경을) 단지 인간 이성으로 걸러내고 결국 그것을 내재적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5. 칸트의 도덕적 규범은 우리를 초월해서 오는 것이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계시의 개념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런 개념은 결코 언어적 계시가 아니다. 언어라는 것이 초월적인 것을 담을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모든 자유 주의자들이 갖고 성경관이다.


언어로 되어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율성을 위해서 만들어 낸 초월적 세계는 어떤가? 그것은 언어로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보다 더 초월적이고 의미가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6. 칸트는 인간의 자유 의지의 결과 외에는 어떤 도덕적인 책임이란 없다고 한다. 인간은 본래 선하다고 주장하며 악의 근원은 신비로 돌린다. 그러므로 원죄는 역사적일 수가 없다고 한다. 만약에 인간이 원죄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 자유 의지에 의해서 도덕적 규범을 범한 것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책임은 형식적 (formal) 책임이다. 즉, 의미 없는 것이다. 느껴도 되고 안 느껴도 되고, 뉘우쳐도 되고 뉘우치지 않아도 되고, 생각을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러한 의미 없는 도덕관이다. 선 혹은 악의 절대적 근원은 본체적 세계에 속해 있어야 하고 현상적 세계에는 절대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 근원은 역사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 신학자들의 죄나 악의 개념으로 연결이 된다.


죄나악의 근본 책임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것은 신비나 일시적인 상황이나 무존재(nonbeing)으로 돌린다. 현대 신학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해 치는 것으로 생각되는 ꡐ죄ꡑ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7. 칸트의 하나님은 본체적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의 은혜나 도움은 인간이 먼저 받을 자격이나 능력이 있어야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나를 아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도움이나 은혜에 자격을 갖추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처럼 또한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처럼 행위를 강조한다. 선을 베풀고 정의를 위해 싸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자기 실현 (자율성 확인)을 위하는 것 뿐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들어 설 여지가 전혀 없다.8. 칸트에게는 그리스도란 인간의 도덕적 완성의 개념을 의미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원전 부터 하나님안에 있었고 그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해석하며 그를 창조주로 보기도 하며 모든 만물이 도덕적 존재를 위해 그에 의해 지음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그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 완성의 가능성을 위해서 인간을 사랑하신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도덕적 완성의 본형(archetype)으로 본다. 우리는 이 도덕적 완성의 본형이 우리 안에 성육신 될 것을 믿음으로 (도덕적 능력과 실천적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받을 만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타자이면서 전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 개념은 현대 신학에 많이 나온다. 우리와 동일시 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상 (union with Christ)과 형식적으로 비슷하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정반대이다. 즉,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인간 스스로 자유와 자율성과 도덕적 성취를 의미한다.9. 결론적으로 칸트의 사상은 현대 신학에 커다란 영향을 줬다.


특별히 그의 이원론적 세계관은 현대 신학 구석 구석에 배어 있다. 두 가지 역사 개념 (Historie와 Geschichte), 나-그것/나-너 (I-it/I-thou) 관계, 역사적 예수와 믿음의 그리스도 구분, 이성과 믿음의 구분, 초월적 세계와 내재적 세계의 구분, 변증법 (dialectical method), 육체와 영의 구분 등등에 영향을 주었다. 현대 신학에 숨어 있는 이러한 칸트의 사상을 발견함에 따라 우리는 현대 신학의 오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신학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의 지위를 높이며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인간학에 불과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현대신학 배경 (III)헤겔 (G. W. F. Hegel, 1770-1831)현대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준 인물로 칸트외에 또 한 인물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헤겔일 것이다. 비록 헤겔은 슐라이어막허와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후대 많은 현대 신학자들에게 칸트못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을 진단할 때 칸트 아니면 헤겔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헤겔 역시 칸트와 마찬가지로 계몽주의의 합리주의에 의해 거부된 기독교의 초월적 계시와 초자연적 세계를 회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칸트와는 달리 헤겔은 좀 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의 대안이 좀 더 구체적이라는 것은 바로 그의 철학이 역사를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이 전통적 기독교를 세우기는 커녕 기독교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것처럼 헤겔의 철학 역시 전통적 기독교를 파괴한다고 하겠다.


헤겔은 칸트의 본체적 (noumenal)/현상적 (phenomenal) 세계의 구분을 거부한다. 한마디로 구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본체적 세계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말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체적 세계란 철학의 체제에 전혀 어떤 역할 조차 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또한 만약에 우리가 본체적 세계를 거부한다면 남는 것은 현상적 세계 뿐일 것이다. 본체적 세계가 부정된 후 남은 현상적 세계는 단순한 현상적 세계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헤겔은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연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초자연적인 것 내지는 본체적인 것, 예를 들어, 신(神), 자유, 물자체(物自體) 등의 본체적인 것들이 현상 세계 (헤겔에게는 '역사')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비록 헤겔은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는 거부했지만 새로운 개념의 합리주의 (rationalism)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전의 합리주의처럼 실재 (reality)를 어떤 자연의 구조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사고(思考)의 구조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실재적인 것은 합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실재적이다" 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말은 또한 인간의 합리적 사고 구조가 단지 허구적 추론이 아니라 바로 이미 존재하는 절대적 구조와 상응되는 것이며 이 절대적 구조 (실재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표출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는 우리가 말할 수도 알 수도 없지만) 바로 절대적 지식이 분명 주어졌다는 신념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 부분적인 지식은 독립된 지식이 아니라 바로 존재하는 총체적, 절대적 지식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절대적, 합리적, 총체적 구조로서의 실재(reality)는 바로 헤겔 철학의 핵심인 "정신" (Geist)의 개념과 바로 직결된다. 그는 이성(reason)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에 동의하였지만 인간의 경험이 지식을 얻는 유일한 혹은 중요한 길이라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실재는 동적 (動的)이고 진행적인 과정이라고 믿는다. 즉, 절대적인 합리적 사고의 구조란 부동(不動)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계속적 과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실재의 부분인 우리의 사고 체계도 똑같이 동적이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 사고의 체계나 실재의 구조는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그 둘은 하나의 동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한마디로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 것처럼) 실재의 정신 (spirit)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존재하는 실체이며 움직이는 주체이며 운동이며 과정이라는 것이다. 역사란 바로 이 정신이 과정을 통하여 객관적 형태를 띠며 완전한 자기 실현 (자기 인식)에 도달하는 모습을 말한다. 이 역사속에서 진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사실들로서가 아니라 한 전체의 부분으로서 과정속에 포함되는 것이라 가르친다.


이 정신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 대신 헤겔이 만들어 놓은 절대적 '관념' (Idea)인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 정신이 역사를 통하여 자기를 계시한다는 것이다. 이 역사속에 나타나는 예술, 문학, 종교, 과학들은 바로 이 정신 (혹은 神)의 사회적 표출이며 이러한 표출을 통하여 자신을 실현하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절대적 정신으로 동일시 하는 헤겔에게는 기독교 (종교)와 철학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헤겔이 회복하려는 기독교의 초월성은 다름 아닌 그가 만든 절대적 관념인 '정신'이 실현되는 세계일 뿐, 우리가 믿는 삼위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초월성이며, 오히려 내재적 추론 (postulate)일 뿐이라 말할 수 있다.현대신학배경(4)헤겔의 철학에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절대적 '관념' (Idea), 혹은 절대적 '정신'(Geist)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한 절대성(the Absolute)이 있는지 없는지를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초월적 절대성이 어떤 윤리적 당위성으로 (칸트의 경우처럼) 표현되든지, 그 절대성이 역사의 사건에서 구체화 (헤겔의 경우처럼) 되든지, 또 어떤 다른 경우든지 그 절대성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는 우리가 믿는 신앙과 헤겔의 절대적 정신은 형식적으로는 비슷하다. 우리에게는 절대적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의 절대성이 그의 계시로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에 헤겔은 그 절대성이 역사속에 (인간 思考도 포함하여) 나타남으로 우리는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우리 기독교 지식 체계와 헤겔 철학의 지식 체계를 비교해보면 비슷한 것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둘 다 절대성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지식 체계가 더 믿을 만 하고 어느 것이 더 초월적인가? 인간의 사고 체계와 상응되어야 하는 헤겔의 절대성인가? 아니면 인격적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인가? 당연히 기독교 지식 체계인 것이다.)우리에게 분명히 절대적 지식이 주어졌다는 확신을 헤겔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약 우리에게 절대적 지식이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둘 중에 하나라고 한다,첫째, 우리는 전혀 어떤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한다. 왜냐면 '전혀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 라는 사실도 지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둘째로, 절대적 지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부분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분적 지식이란 바로 절대적 지식과 비교해서 부분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지식은 이러나 저러나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이다.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헤겔은 절대적 정신의 실재(reality)는 동적(動的)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지식을 얻는 것도 이러한 동적 실재와 상응하는 비판적 과정을 통하여 얻는다고 한다. 이러한 동적인 지식 과정을 변증법적(dialectical)이라 한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현재 믿음들을 가지고 시작하고, 그 다음 그 믿음들을 부정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가 가진 지식이나 믿음의 가치도 발견하고 그 부정으로 통하여 얻은 지식의 가치를 또한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완전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헤겔의 정(正)반(反) 합(合)의 원리이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그 절대적 정신은 자창적(self-creative)이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믿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하시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처럼 헤겔은 그 절대적 정신을 그렇게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헤겔의 철학의 모습을 우리는 여러 현대신학 구석 구석에 발견할 수 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는 헤겔의 이러한 절대적 정신의 개념은 구세주와 같은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과 그의 계시를 믿지 않고서도 어떤 구체적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전통적인 기독교 진리를 달리 해석할 길이 열렸다고 좋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헤겔의 철학의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지면상 세가지 문제를 지적해 보겠다. 먼저 헤겔은 진리 체계란 총체적이라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진리 체계가 총체적인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왜냐면 우리는 진리를 전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진리 체계가 총체적이다' 라고 합리적으로 전제는 했지만 그것을 알 길은 없는 것이다. 알 길이 없는 것을 전제하는 것은 사실 일종의 신념 내지는 믿음인 것이다. 헤겔은 자신의 신념을 우리보고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믿지 말고 관념 철학敎' 교주 헤겔 자신의 말을 믿으라는 것이다.또 다른 문제는 헤겔은 자신의 절대 정신을 하나님처럼 정의하여 우리 인간과 차별화시킨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그 절대 정신이 인간과 통합된다고 말한다. 즉, 역사 속에서 자기 실현화 된다고 한다. 이것은 세상과 헤겔의 하나님(절대 정신)은 서로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 (역사) 없이는 그 하나님은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그 하나님은 세상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 하나님(절대 정신)이 없다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은 사실 헤겔 자신의 이성의 자율성을 절대화하려는 몸부림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자기 만든 지식 체계, 지식 방법, 사고 구조 속에 모든 것이 (그 절대 정신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헤겔 철학은 소설과 같은 허구가 아니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겔은 마치 자신의 철학은 칸트 철학과는 달리 구체적이라 주장하지만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의 절대적 정신은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또한 비록 역사 속에 나타나는 사건을 빌미로 구체성을 주장하지만 그 역사의 사건이 정말 그가 말하는 절대적 정신의 표출인지, 우연인지, 성삼위 하나님의 섭리인지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어떻게 알 수 있다 말인가? 그러한 역사적 사건은 사실 구체적 이라기 보다는 단지 우리 머리 속에 그려지는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하겠다.이러한 문제 많은 헤겔 철학이 좋다고 좇아 다닌 사람과 신학으로 우리는 스트라우스 (D. F. Strauss), 바우어 (F. C. Bauer), 포이에르 바하 (L. Feuerbach), 키에르케고르 (S. Kierkegaard), 막스 (K. Marx), 틸리히 (P. Tillich), 세속신학, 희망의 신학, 해방신학, 민중신학, 과정신학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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