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신앙 이해에 대한 한 연구
이승구
개혁자 칼빈에 대해서는 성령의 신학자, 성경의 신학자 등 여러 명칭이 부여되었었다. 그는 16세기적 맥락 가운데서 개혁 신학을 참으로 잘 정리한 사람이요, 우리의 믿는 바 신앙의 내용과 방식 모두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제시한 신학자요, 목회자였다. 특히 그가 1536년 출판한 이래 1559년 결정판을 내기까지 계속해서 그 내용을 가다듬은 {기독교 강요}는 우리들이 믿고 알아야 할 바를 잘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대해서는 모두 다 일관성 있는 신앙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칼빈의 입장과 관련해서 현대 칼빈 연구가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와 확신이 신앙에서 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된다. 이 논쟁을 소개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결국 이 논쟁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필자 나름대로 신앙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정리하여 이 논쟁의 해결에 간접적인 기여를 하기 원한다. 이 논문을 통해서 나는 현대에 나타나고 있는 칼빈의 신앙론에 대한 오해들에 반해서, 다음 네 가지 요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1) 칼빈은 신앙의 인지적 내용을 강조하였다. 칼빈에게는 이 인지적 내용에 관한 한(限) 신앙의 내용은 다른 지식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확실한 지식으로 여겨졌다;
(2) 칼빈이 말한 구원 신앙의 내용에는 그리스도와 구속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만 이 아니라, 창조와 섭리의 내용까지도 이미 포함된 것이다;
(3) 칼빈은 이런 내용에 대한 신뢰와 이를 통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다;
(4) 칼빈은 이상적 상황에서 신앙은 확신을 동반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확신은 우 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고,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흔들릴 수도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제 이 네가지 요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자. 이는 다음 같은 질문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칼빈이 제시한 신앙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칼빈은 고전적인 입장에 충실하 게 신앙의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그것은 신앙은 "확실한 지식(동의[assensus]를 동반한 지식[notitia])"이라는 것과 신뢰(fiducia)라는 것이다.
1. 칼빈이 말하는 신앙의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성격
첫째로, 칼빈에 의하면 신앙은 확실한 지식이다(an assured knowledge). 칼빈은 신 앙의 지식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말한다: "신앙은 무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칼빈에 관한 한, 지식이 없으면 신앙도 없다"고 단언하여 말하는 다우이의 말은 매우 옳은 것이다. 그 지식은 결국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칼빈은 바른 신지식은 바른 예배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바울의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생각하든 지와 상관없이, 지식과 진리가 결 여된 종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거룩하거나 합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알려지신 후에야 바르게 경건한 방식으로 경배 받으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진리의 중요성에 대한 명백한 강조를 찾아 볼 수 있 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 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은 우리에게 경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대해서 바른 지식을 지닌 이는 반드시 하나님을 바르게 경 배하게 되는 것이다. 바른 지식에 대한 이런 칼빈의 강조를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칼빈이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 일반적 의미의 지식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유용한 것인지, 오히 려 칼빈의 의도를 놓치는 것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브라이언 게리쉬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그는 칼빈이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는 대조적으로 신앙에 대해서는 "스키엔티아"(scientia)라는 라틴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노티티아"(notitia)를 사용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과 관련해서 칼빈 자신이 "스키엔티아"(scientia)라는 용어를 사 용한 예가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지식(scientia)이 모든 지식(notitia)보다 우월하다고 옳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확실성은 지식(scientia)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의 지성의 현명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칼빈은 "스키엔티아"(scientia)와 "노티티아"(notitia)를 동의어로 사용하며, 전 혀 구별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지식을 다른 지식보다 더 우월한 것 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와 연관해서 칼빈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강요}의 내용을 참조하라고 초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자신이 이 주석에서 말하고 있은 것과 {강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게리쉬의 강한 주장은 그 근거를 상실한다고 판단된다. 물론, 신앙은, 우리가 곧 살펴 볼 바와 같이, 지식 이상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지 식을 그 중요한 한 구성 요소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불만은 이 점을 잘 지적하면 서, 칼빈에 대해서 "신앙은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부르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라고 말하 는 대신에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부르는 지식일 뿐만이 아니라(not only such knowledge)'라고 했으면 정확할 것이다"고 하며, 또한 "교리의 단순한 수납은 신앙이 아니 지만, 교리의 수납도 신앙의 한 부분이다"고 정확히 말하고 있다. 칼빈에게서, 하나님의 호 의(好意)에 대한 지식(the knowledge of the benevolence of God)이란 좁은 의미의 하나님 의 은혜와 호의에 대한 지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주어진 포괄 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망라(網羅)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페터 부룬너처럼 칼빈에게서는 "당신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자신(God in himself)은 신앙과 연관성을 지닐 수 없고, 오직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toward us) 만이 신앙과 연관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제한적 인 이해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이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한 하나님 자신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 세기에 살던 칼 빈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장 확실한 지식 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시대착오적으로 근자의 개혁파 인식론자들의 용어를 빌어서 표현 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신지식은 매우 강한 인식론적 권리(epistemic rights)를 가진 것이었 다는 말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바른 신지식이 없으면 바른 종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바른 신지식이 없으면 영적 자양분의 공급도 없다. 칼빈은 "영적 자양분의 공급은 기 독교 교리를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2. 칼빈이 말하는 신앙 내용의 포괄적 성격
이 신앙 내용, 신앙의 내용이 되는 지식에는 실질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 전부가 포함되어 있다. 창조, 섭리, 구속, 그리고 극치에 이르는 모든 기독교적 지식이 포함되는 것 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바바라 피트킨이 칼빈의 신앙에 관한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에 이르는 지식으로부터 본래의 또는 더 심화된 경건에로 전진해 감에 있어서 섭 리적 신앙은 매우 중요한 두 번째 걸음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동시에 동감과 반감을 갖게 된다. 물론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도 가져야 한다고 말하 는 것은 매우 옳으며, 이에 대해서 동감하게 된다. 피트킨은 칼빈이 섭리에 대한 신앙을 얼 마나 강조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구속 에 대한 믿음에 이미 포함되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섭리는 "자연에 대한 믿는 관 점"(believing view of nature)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섭리와 구속은 생각 속 에서도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비록 편의상 논의나 이해를 위해서 따로 나누어 고찰한 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파커가 이중적 신지식(duprex cognito Domini)에 대해서 말하 는 바와 같이, "각각의 존재는 다른 것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하나님과 전체로서의 그의 경륜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 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를 반영해 주는 거울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우주적 섭리는 온 세상에 미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들에게서 특별 히 빛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의 맥락 가운데서 찾아져야만 하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칼빈의 주해를 살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칼 빈의 신앙론에 대한 피트킨(Pitkin)의 매우 좋은 연구가 구원 신앙(saving faith)과 섭리 신 앙(providential faith)이 각기 나뉘어 질 수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나는 그녀가 우리의 신앙은 구속과 섭리 모두에 대한 믿음를 포함하고 있어 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는 점을 알고 그 점을 높이 산다. 그녀는 심지어 "이 구별 [구원 신앙과 섭리 신앙의 구별]을 주장하는 것은 신지식(神知識)의 한 요소를 다른 요소와 대립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나는 특히 그녀가 이 두 측면의 구별은 "자연 신학(a natural theology)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녀가 구원 신앙(saving faith)과 섭리 신앙을 날카롭게 나눈 후에 그 둘을 연관시키는 방식 은 구원 신앙의 성격과 섭리 신앙의 성격도 오해하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런 이유에서 나는 피트킨이 "이중적 신앙 개념"(a twofold notion of faith)이라고 말하는 것 에 대해 불편하다. 그녀는 칼빈의 "이중의 신지식"(duprex cognitio Dei)에서 너무 지나치게 나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칼빈에게는 창조자로서의 신지식과 구속자로서의 신지식이 모 두 구원 신앙 안에 포함되어 있다. 노블(T. A. Noble)이 잘 말하고 있듯이, "구속자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를 우리의 창조자로 [바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 서 나는 칼빈이 피트킨 식으로 "이중의 신앙"이라고 말할 때 그에 동의하려는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오히려 다음에 인용하려고 하는 랜달 쟈흐만(Randall C. Zachmann)의 진술이 칼빈의 견해에 좀더 가까운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우리의 확 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와 세상을 통치 하시는 우리 아버지로 알므로 우리가 그 지식을 확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 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진 사람들만이 창조자를 그 들의 아버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트킨의 분리 후의 연관을 찾으려는 시도에 안스러움을 표현하 면서, 섭리도 기독교 신앙의 한 지식의 내용(fides quae creditur or notitia)임을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칼빈은 섭리를 포함한 이런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강조하지 않는 이들을 어리석 다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은 "알려진 그리고 확실 한 진리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신앙하면 먼저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쉐퍼드(Shepherd)가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이 "지식은 하나님의 선행적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지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지식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 선하심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우리 자 신에 하나님께 던져 드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그는 또한 말하기를 "하 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은 신앙을 세우기에도 적절하며, 찬양을 일으키기에도 적적하다" 고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께 서 무엇인가를 약속하시면 이로써 그는 자신의 호의를 증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 랑의 증거를 가지지 않은 약속은 없는 것이다."
3. 칼빈이 말하는 신앙의 신뢰적 성격: 반응으로서의 신앙 고백과 신앙의 삶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하나님의 이런 사랑에 반응하는 신앙은, 우리가 이제까지 논 의해 온 바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지식이나, 단순히 지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우이가 옳게 말하는 바와 같이, "지식이란 말이 ...... 칼빈의 신학에서 순전 히 인지적(認知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식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지성주의적 신앙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신지식은, 우리가 신지식의 인지적 측면에 대해서 말한 바를 잊지만 않는다면, 실제로 "실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신앙은 확실하고 유효한 확신이지, 빈 개념만인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머리에만 있기보다는 가슴에 더 있는 것이고, 이해이기보다는 정향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에 유의해야 하니, 이는 신앙이 지식임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앞에서 했던 말들을 잊지 말아야 한 다. 칼빈의 신앙 개념은 에베소서 1:13에 대한 주석 가운데서 그가 말하는 것 가운데 잘 요 약되어 있다: "신앙의 출발점은 지식이다. 그러나 그 완성은 대립되는 의심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확실하고도 안정성 있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 둘[지식과 확신] 모두가, 내가 말한 바 와 같이, 성령의 역사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이들은, 피트킨(Pitkin)이 잘 요약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물들을 어떻게 섭리적으로 배열하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놀람과 경외에로 나아갈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바른 신앙의 고백이 나온다. 바로 이런 뜻에서 칼빈은 "그 누구도 입으로 시인하지 않고 마음으로 믿을 수는 없 는 것이다"고 말하며, "열과 빛이 없는데도 불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신앙의 고백은 항상 순종의 행위와 동반되어야만 한다. 그 래서 칼빈은 다음 같이 말한다: "그에 상응하는 삶이 없이는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아무런 무 게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백이란 말 뒤에 선한 양심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른 곳에서 칼빈은 이렇게도 말한다: "선한 양심으로 그것을 증명하 지 못하거나 사랑으로 그 자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모든 신앙 고백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물론 우리가 믿고 순종해야만 하지만) 신앙은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신앙이 생기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외적 예정으 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모든 이가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택의 예 정이 신앙의 궁극적 원인(the ultimate cause)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의 유효적 원인(the effective cause)은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신앙의 유효한 원인은 우리 정신의 지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리므로 칼빈에게는 "부르심 이 은밀한 선택의 증거(proof)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부르심이 영원한 은혜의 증 거가 되어야 한다." 그의 {강요} 가운데서는 이것을 이렇게도 표현한다: "이제 택자들 사 이에서 우리는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로 여긴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면 다음과 같은 것이 그 결과의 하나라 는 것은 매우 자명한 것이다: "우리에게서는 신앙의 시작도 이를 위한 준비도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증거로 우리를 밝혀 주시기 전 에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한 이유를 들어" 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칼 빈은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신앙의 원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만을 들어보기로 하자:
사람 안에 뛰어난 것이(excellence)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자연에 의해서 주어져서 자연이나 유전에 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해 얻어 져서 하나님을 우 리가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오직 순수하고 자유로운 그의 자비에게서만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도움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의지가 준비되 고, 그 후에 그 나름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바르게 선택할 수 있은 능력이 우리에게 내려지며, 그후에는 우리가 우리 나름의 선택을 한다고 말하지 않 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이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늘 지껄이는 말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 는 모든 선한 것은 그가 만드신 바(his creation)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전인이 그 의 손으로 선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스 스로 구원을 만들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그 증명이다.
모든 이들은 그 구원을 순전히 은혜로 얻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선택에 따라서 값없 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분가분리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셨을 때, 그것은 마치 우리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새겨진 도장으로 확인해 주시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심에 대한 도장[印號]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신 앙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한 풍성한 증언이다.
이 모든 구절들은 모두 우리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만 기원한다는 것과 그 기 원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의존해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구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에 의하면, "항상 (하나님의) 자비가 논리적으로 신앙에 앞선다"고 말하는 쉐퍼드의 말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 에게 있어서 신앙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 '신앙의 확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이제 칼빈의 신앙론에서 근자에 많이 논의된 문제 중 하나인 신앙의 확신에 대한 논의에로 나가 보기로 하자. 이 신앙의 확신 문제에 대한 칼빈과 후기 칼빈주의자들, 특히 웨스트민스 터 회의에 참여한 신학자들의 차이를 강조한 켄달 박사(Dr. R. T. Kendall)에 반해서 죠엘 비키 박사(Dr. Joel R. Beeke)는 이렇게 말한다:
칼빈이 신앙은 확신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신앙과 확신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별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 앙고백서는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은 신앙이 확 신하는 면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려고 한 것이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8 장 은 자의식적이고 경험적 현상으로서의 확신이 무엇인지를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것이 다.
그러므로 비키 박사는 칼빈의 진정한 의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정한 의도를 생 각하면서 그 둘을 비교해 보면, 그 둘 사이의 모순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비키는 칼빈과 후기 칼빈주의자들의 차이가 종류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라고 본다. 그 정도의 차이는 그들이 교회의 사역자들로서 생각하고 사역하는 상황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비키가 요약적으로 잘 말하고 있듯이, "종교 개혁 이후의 목회적 맥락 가운데서 칼빈주의는 아주 열심히 교리에 살을 입히고, 확신의 근거를 제시했던 것이다." 또는 그가 다른 논문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앙과 확신에 대한 칼빈과 칼빈주의자 들 사이의 차이는 주로 양적인 것이고 방법론적인 것이다"; "그것은 질적인 것이거나 내용 적인 것의 차이가 아니라, 강조점과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연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키 자신의 독특한 견해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연속선상에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사실 이는 근자에 들어 바질 홀, 브라이언 암스트롱, 알 티 켄달 등을 중 심으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일이 나타나기 전에, 조금 다른 형태 로 제시되었었으며 당대에는 주도적이었던 옛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의 해석자들 은 무조건 칼빈과 후대 칼빈주의자들을 동일시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특히 윌리엄 커닝햄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서, 커닝햄은 칼빈이 "구속의 범위에 대한 정확한 교리에 대해서 그렇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 은 듯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커닝햄은 칼빈이 여러 곳에서 보편구속론을 아주 명백히 거 부하고 있다는 것도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후대의 칼빈주의 자들은 이런 입장을 잘 표현하면서 아주 명확히 제한 구속론을 말한다. 그러므로 커닝햄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이런 표현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비키가 잘 지적하고 요약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들 사이에 적대적인(anti-thetical) 차이로 이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은 "초기 종교 개혁의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그로부터 작업하였다."고 해석한 것이다. 커닝햄은, 오늘날 그 차이를 강조하는 이들 과는 달리, 칼빈이 결코 후대의 칼빈주의자들과 적대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보지 않는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관계에 대한 근자의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하 고 있는 이는 흥미롭게도 감리교 계통의 듀크 대학교의 종교개혁, 특히 루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 스타인메츠(David C. Steinmetz) 밑에서 바로 이런 문제, 특히 칼빈과 칼 빈주의자들의 그리스도와 예정론에 대한 이해 문제로 박사 학위를 하고, 계속해서 종교개혁 이후 정통주의 신학의 발전에 대한 연구를 하며, 풀러신학교에 있다가 칼빈신학교의 박사 과정이 시작되면서 박사 과정 담당 교수(the P. J. Zondervan Chair for Doctoral Studies)로 옮겨가 지난 10년간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리쳐드 멀러 교수라고 할 수 있다. 비키는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관계 문제에 대한 멀러 교수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980년대에 이 새로운 재평가에 대한 관심이 특히 리쳐드 멀러(Richard A. Muller) 교수에 의해 불붙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개혁파의 문서들은 소위 개혁파 정통주의가 종교개혁의 첫 세대들의 성경주의를 질식시킨 "예정론적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유력하게 밝혔다. 멀러는 종교개혁 이후 시기의 신학자들은 개혁신학적 체계를 명료화하기 위해서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그 내용 에 있어서는 종교 개혁의 첫 세대의 사상과 본질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논의하였다. 멀러에 의하면, 종교 개혁 이후의 정통주의는 중세 스콜라 사상의 내용과 자주 이견(異見)을 나타내 보였으며, 단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 조직적 구조만을 유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이후의 스콜라주의적 정통주의(post-Reformation scholastic orthodoxy)라는 용어에 있어서 '스콜라주의적'이라는 말은 그들이 사용한 신학 방법론을 지칭하는 것이며, '정통주의' 라는 말은 그 내용과 교의적 의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개혁파 스콜라주의적 정통주의는 어떤 방법론에서는 칼빈과 다르다고 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적 가르침과 강한 연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종교개혁은 그들의 신앙 고백적이고 신학적 규정화 (codification)가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이 다소 긴 인용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관계에 대한 멀러의 입장과 공헌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40년대 이후 주로 바르트주의적 정향의 신학자들을 중심으 로 해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차이점을 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 반해서 이전 칼빈주의자들의 해석과 같이, 서로 다른 정황 속에 있는 이들이 다소 상이한 표현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근본적 생각과 사상의 정향에 있어서는 근본적 일치가 있음을 말하려는 일단 의 학자들이 나타났으며, 멀러가 그 중요한 대변자 중 한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신앙과 확신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켄달 등을 중 심으로 해서 칼빈은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한 것으로 본 것에 반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등에 반영된 후대 칼빈주의자들은 확신이 없어도 신앙이 있다고 할 수는 있다는, 즉 확신은 신앙의 본질의 속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신앙과 확신 문제에 대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이 처한 목회적 상황의 차이로 말미암아 그 표현 방법에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하에서 나는 왜 신앙과 확신 문제에 있어서 나 자신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의 우호적 연속성을 말하는 멀러와 비키 등의 입장에 동의하는지를 칼빈의 신앙에 대한 확 신에 대한 논의의 성격을 밝힘으로 드러내어 보려고 한다. 첫째로, 칼빈에게 있어서도,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확신은 하나님 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확신의 정도는 인간의 정신의 한계 이상의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약속하신 것을 확 언해 주시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다른 어떤 방도로 우리 에게 확신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확 신시키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하실 때마다, 그는 간접적으로 우리의 불신을 책망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심령에서 왜곡된 의심을 뿌리채 뽑아낼 의도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확신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신앙은 우리의 전생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의 '호의적 태도'에 따라 방향 지워진다는 지식 가운데서 안전함을 얻는다." 따라서 신앙과 구원의 확신은 말씀 가 운데서 찾아져야만 하며,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 리는 "신앙의 확신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quot; 알게 된다. 이렇게 칼빈에 게서 구원과 신앙의 확신은 오직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베풀어주시는 은혜 의 하나이다. 둘째로, 칼빈에게서도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에게서와도 같이, 확신은 또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나온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바르게 이해하기만 하면, 예정 은 결코 신앙을 흔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가장 잘 확언시켜 줄 수 있는 것 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예정 교리를 바 르고 옳게 검토한 이는 상당한 위로의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우리는 쉐퍼드가 "칼빈은 확신이란 선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말할 때, 그에게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셋째로, 칼빈은 신자가 이처럼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예정에 대 한 믿음 가운데서 확실한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은 흔들리고 떨 수도 있다는 의견을 가진 것이다. 칼빈은 이점에 있어서 아주 분명한 태도를 표한다: "우리는 신앙이 확실하고 확신에 차 있어야만 한다고 가르치지만, 의심에 조금도 물들어 있지 않은 확신, 전혀 흔들리 지 않는 확신을 상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진술을 잘 생각해 볼 때 칼빈은 이상적 신앙은 확신을 가진 신앙이지만, 이런 신앙조차도 어느 정도의 흔들림이 있을 수 있으며, 따 라서 확신이 가지지 못한 신앙도 그 신앙의 내용이 분명하고(여기서 앞서 논의했던 신앙의 지식에 대한 강조가 다시 나타난다) 그것을 확실히 믿고 있다면 그것도 신앙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 같은 쉐퍼드의 관찰은 옳은 것이다: "칼빈은 모든 신자들 이 모두 다 동일한 정도의 확신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확신은 각기 다른 사람 들에게 부여된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른 것이다." 모든 이의 신앙의 확신의 정도가 다 다 르다는 점에 대해서는 짜흐만(Zachmann)도 동의한다. 그러므로 쉐퍼드와 짜흐만은 신앙의 확신 문제에 대한 논의에 직접 의식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칼빈 자신의 입장 을 칼빈에게 충실하게 제시하므로, 이 문제에 관한 한 칼빈에게는 분명한 확신을 지닌 신앙 만이 신앙으로 여겨졌다는 켄달 등의 의견에 반하는 해석을 하는 이들로 여겨질 수 있다. 칼빈은 {강요}에서나 여러 곳에서 확신하는 신앙도 불신과의 계속적인 심한 투쟁을 하고 있 으며, 의심과 불안의 색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칼빈은 어떤 천주교도들이나 현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불신과 혼합된 확신" 을 말하거나, 신앙이 그런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천주교도들 이나, 현대주의자들과는 달리, 칼빈은 불신과 회의를 어디서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하 지 않는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바는 오직 믿는 우리는 확신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우리 자 신의 불신에 대해서도 "죄 용서를 위해 간구해야만 하며," 하나님께서 이런 죄에 대한 용 서를 위한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리라고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회의나 불 신은 틸리히나 불트만 등이 말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믿음 가운데 있는 회의인 것이 다. 그들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그런 불신과 회의를 있을 수 있는 정당한 것으로 보느냐, 아 니면 용서받아야만 하는 문제와 죄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에게 의심과 불신으 로 물든 확신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며, 그러나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회개하고 더 온전하게 되어야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칼빈은 이런 회의와 불신 등을 해결한 이른 바 단련된 신앙(연단을 받은 신 앙, faith that is tested)이 참 신앙이라고 본다. 믿음 가운데서도 있는 이런 회의와 불신을 잘 통과하고 그 모든 것을 잘 극복한 신앙이 굳게 설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피트킨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참된 확신은 회의와의 투쟁 가운데서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 에 반해서 유기자들은 그들 자신의 속고 있는 과신(過信, overconfidence)만을 주장할 뿐이 다." 칼빈은 이런 입장을 분명히 하는 자신의 입장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이라고 결 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확신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를 제시하고 있은 것이 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떨며, 주저하고, 의심하는 양심은 항상 불신의 분 명한 증거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또 한편으로는 아주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신자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분명한 위로를 소유하는 것을 금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려움과 신앙은 같은 정신 가운데 머물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러하 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와, 또 우리를 그리스도와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와 묶으신 그 교제를 용감하게 두 손으로 꼭 붙들어 야만 한다.
여기에 균형이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칼빈은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쉐퍼드가 잘 요약한대로, "가장 확신한 신앙도 불안과 불신의 위협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확신은 신앙의 발달 정도에 따른 것이 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확신감은 신앙 의 활동의 성장과 쇠퇴에 따라서 증진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의 씨앗 자 체는 변하거나 요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확신이 약화되고 하는 것은 "육체의 흔적" 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 안에 나타나는 그런 "불신도 분명히 죄 이다. 그러나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죄가 신앙을 전복시키도록 하지 않 으시는 것이다"는 쉐퍼드의 말은 칼빈의 생각을 잘 정리하고 있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쉐퍼드는 같은 사상을 다음과 같이도 표현한다: "죄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러 나 그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 안에 있는 회의가 그의 확신을 결코 전복시키 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우이가 옳게 말하고 있듯이, "겉으로는 회의할지 모르지 만, 그것이 내면적이거나 주도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첫째로 ...... 육체의 이 연약함에도 불구 하고 택자들은 위험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 자 신의 힘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 ...... 하나님의 선하심이 영원하므로, 신자들의 연약함과 깨어지기 쉬움이 생의 마지막까지 또는 심지어 죽음에서도 영원한 구원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말 을 통해 보면, 칼빈은 신자들의 연약성과 확신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죽음에서도, 죽음 이후에까지라도 미치는 확신을 확언하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확신관은 그렇게 기계적인 것이 아님도 드러난다. 그는 현존하 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잘 보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확신이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이전부터 준비된 그러나 루터가 기이한 섭리 가운데서 시작한 종교개혁 을 체계화했다고 할 수 있는 칼빈이 신앙을 과연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논의 에 근거해서 우리는 서론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첫째로, 칼빈은 신앙을 신앙의 지식(notitia, scientia)으로부터 이해한다. 그리고 이 신앙의 지식은 그것의 인지적 성격에 관한 한(限) 다른 지식(notitia, scientia)와 다르지 않 다. 오히려 칼빈은 이 신앙의 지식을 다른 지식보다 더 확실한 지식으로 여긴다. 오늘날 유 행하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 에 대한 신뢰의 차이를 칼빈은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에서 가르치신 대로 하나 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 성경에 따라 진술된 명제를 믿는 것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둘째로, 칼빈이 말하는 구원 신앙의 내용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 지식뿐만이 아니라, 창조와 섭리에 대한 지식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구속에 대한 인식에 이미 섭리에 대한 인정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 둘을 나누어 말하는 것은 논의를 위한 편의상의 조 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이 창조주와 섭리자로서의 하나님이 시지, 그 둘을 어떻게든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로, 칼빈은 신앙의 지식에 대한 신앙의 신뢰(fiducia)를 강조한다. 신앙은 분명 히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지식이나, 지식만으로는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신앙 고백과 삶으로 나타나는 신뢰이다. 칼빈이 말하는 믿는 바 주께 대한 전적인 신뢰는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감 이상의 신뢰이다. 넷째로, 칼빈은 신앙이 이상적인 경우에 확신을 동반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확신 도 신앙의 정도와 성숙에 따른 것이며, 우리는 끝까지 확신을 더해 가는 신앙의 증진을 경 험한다는 것도 강조한다. 그러므로 아직 확신이 강하지 못하고 의심에 사로잡히는 연약한 신앙인도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그리스도로 인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형성 되지 않은 신앙"(fides informata)도 신앙이라고 말하는 천주교도에 대해서는 칼빈이 확신한 신앙(assured faith)만이 신앙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앙에는 회의와 의심이 필연적으로 동반 되며 그런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라고 말하는 현대주의자에 대해서도 칼빈은 신앙의 확신 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확신은 자기 확신이나 속고 있는 과신(deluded overconfidence)이 아님에도 유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 대해서 칼빈은 신앙하 는 이들에게도, 그것도 가장 확실한 확신을 가진 이들에게도, 그 안에 남아 있은 육체(부패 한 인간성)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회의와 불신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전복시킬 수는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 실존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충실하면서도, 성경이 제시하는 신앙의 모습에 충실하게 신앙을 제시하는 칼빈을 찾 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이 신앙의 확신을 강조하는 것만을 보고, 후대의 칼빈주의자들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해석은 칼빈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칼빈의 말을 너무 단면적으로, 탈문맥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칼빈이 살던 16세기의 천주 교회와의 논쟁이라는 구체적인 맥락 가운데서 칼빈의 말을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 나 그렇게 바로 이해된 칼빈의 의도는, 적어도 그 의도에 관한 한,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제 시에 충실한 것이기에, 오늘 여기에 사는 우리들의 신앙에 대한 진술에도 도움이 될 수 있 는 것이다. 칼빈이 제시한 신앙의 성격 중 현대에 무시되는 요소들이 오늘날 칼빈 연구자들 에 의한 칼빈 신앙 이해에 대한 해석에서도 왜곡되는 것은 흥미롭지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지닌 성향과 정향에 따라서 칼빈의 신앙 이해를 해석해 보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칼빈을 그가 살던 시 대에로 되돌려 보내서 16세기의 맥락 가운데서 칼빈을 바라보고, 그 이후에 다시 우리 상황 에로 돌아와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칼빈이 말하고 강조한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신앙의 의 미를 물어야 할 것이다.
<미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이 논문 작성을 위한 기본적인 연구는 필자가 2000년 여름 기간 동안 Research Fellow로 초빙된 H. Henry Meeter Center for Calvin Studies, Calvin College and Calvin Theological Seminary, Grand Rapids, MI, USA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힌다.
2000년 여름 방학 동안의 연구비를 주신 미터 센터 운영 위원회와 각기 소장(Director)과 사서(curator)로 있는 Dr. Karin Maag과 Mr. Paul Fields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 논문의 한 부분은 2000년 8월 17일 미터 센터에서 발제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로 다음 글과 그 안에 인용된 문헌들을 참조하라.
졸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 작성 동기를 통해 살펴 본 신학의 과제," in {개혁신학 탐구} (서울: 하나, 1999), 117-45, 특히 124-26을 보라.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3. 2. 2. 이하 이로부터의 인용은 Institutes로 하기로 한다.
Edward A. Dowey, Jr.,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Expanded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172. Comm. Acts. 17:22-23. Cf. Institutes 1. 2. 2. Brian A. Gerrish, Saving and Secular Faith: In Invitation to Systematic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9), 6, 12, 27. Ibid., 6. Comm. Eph. 3:19. Comm. I Cor. 2:12도 보라. James M. Bulman, "The Place of Knowledge in Calvin's View of Faith," Review and Expositor 50 (1953): 323-29, reprinted in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of Calvin's Theology, vol. 7 of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and London: Garland Pub., 1992): 289-95. Ibid., 326 = 292. Ibid., 329 = 295. Peter Brunner, Vom Glauben Bei Calvin (T bingen: Mohr Paul Siebeck, 1925), 67. cited in Dowey, 153. Cf. Alvin Plantinga, "Reason and Belief in God," in Faith and Rationality, ed. N. Wolterstorff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3); 16-93; "Is Belief in God Rational," in Rationality and Religious Belief, ed. C. F. Delancy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9); 7-27; Nicholas Wolterstorff, "Thomas Reid on Rationality," in Rationality and the Calvinian Tradition, edited by Hendrik Hart, Johan van der Hoven and Nicholas Wloterstorff (Let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9) 43-69; Kelly James Clark, Return to Reason (Grand Rapids: Eerdmans, 1990), 한역, {이성에로의 복귀: 개혁파 인식 론이란 무엇인가?} (서울: 여수룬, 1999). Comm. I Tim. 4:6. Barbara Pitkin, What Pure Eyes Could See: Calvin's Doctrine of Faith in Its Exegetical Context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58. 이는 이 책에 서의 피트킨의 주된 주장의 하나이다. Dowey, 133, n. 414. 또한 이 각주에 나타난 있는 이 점에서 빌헬름 니젤(Wilhem Niesel)에 대한 그의 좋은 비판을 보라. T. H. L. Parker, Calvin: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Knox, 1995), 13. Comm. Acts 2:23. Pitkin, 158f. Ibid., 160. Ibid., 159. 다음과 같은 다우이의 말도 참조하라: "엄격하게 말해서, 피조계 안에 있는 이런 계시의 요소들에 대한 칼빈의 평가가 그의 '자연 신학'에 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Dowey, 83). 왜냐 하면, 칼빈에게는 모든 것이 신앙의 관점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우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타락 이후에는 오직 특별 계시의 관점에서만 피조계 안에 있는 계시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Ibid.). 다른 말로 하자면, 피트킨이 말하고 있듯이, "칼빈에게 는, 모든 신지식이 그리스동의 중재를 통해 오기 때문이?quot;(Pitkin, 160, 그녀 자신의 강조). 오직 "믿음으로 고쳐진 눈을 통해서 성경의 안경을 통해 볼 때만, [자연과 역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는) 본래의 계시적 기능에로 회복되는 것이다"(Pitkin, 160f.). 빌헬름 니젤도 이와 비슷하게 말한 다(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40-53). 그러나 그가 이런 표현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칼 빈적이기 보다는 바르트주의적임에 유의하라. T. A. Noble, "Our Knowledge of God according to John Calvin," Evangelical Quarterly 54 (1982), 13, reprinted in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of Calvin's Theology, 331. Dowey, xi, 257 등도 보라. 그러나 다우이가 "신앙론은 {강요} 제 1 권 제 1장-9장만큼이나 기독 교 강요의 인식론적 서론이 된다"(xvii, 1952년 판 서문 중에서)고 말할 때나, "그리스도가 신앙의 범위(the scopus fidei)이다"고 할 때(xvi, 1964년 판 서문 중에서), 그는 칼빈보다는 바르트와 같 이 들리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또한 55, 187f., 211, 218 등도 보라. 또한 xviii-xvi, 89f., 105, 108, 155 등에서 (비록 빌헬름 니젤보다는 좀더 균형감을 가지 고 있지만) 그래도 나타나고 있는 다우이의 칼빈의 성경 이해에 대한 진술의 바르트주의적 성향 을 보라. 칼빈의 성경관과 관련해서 다우이는 월필드(B. B. Warfield), 칸져(K. S. Kantzer), 데이 비스(R. E. Davies)에 반해서 두메르그(E. Doumergue), 리드(J. K. S. Reid), (약간의 비판과 함 께) 맥네일(John T. McNeill), (자신의 해석과 함께) 베르너 쿠루쉐(Werner Krusche), 그리고 하 루투니안 (Joseph Haroutunian)의 편을 든다. 비록 칼빈이 말하는 '구술'(dictation)의 의미에 대 해서는 결과적으로 월필드에게 동의하나, 전반적으로는 위와 같은 태도를 표한다(101). 성경관과 예정에 대한 견해에서 다우이는 전반적으로는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차 이를 강조한다(Dowey, 90, 218). 그러나 때때로 다우이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게 대해 공정한 진술을 하는 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다우이는 "그 [17] 세기에 발전한 것에 대해서는 칼빈과 칼 빈 이전의 뿌리가 있었다"고 말한다(xiv). 이런 공정한 언급을 하는 다른 곳으로 163도 보라. Randall C. Zachmann, The Assurance of Faith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96. Ibid., 97. See also 161. See again Institutes 1. 6. 1. 예를 들어 다음 표현을 보라: "교리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이 어리석게도 혼동된 신앙(a confused faith)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많이 있다"(Comm. John 1:12). Comm. Titus 1:1: faith "contains nothing but known and ascertained truth." Victor A. Shepherd, The Nature and Function of Faith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Macon,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83), 17, n. 70. Institutes 3. 2. 7. Comm. Psalm. 103:8. Institutes 3. 2. 32. 칼빈의 신앙관을 16 세기 맥락 가운데서 놓고 신앙의 이런 측면을 잘 설명하고 있은 논의로 다음을 보라. Richard A. Muller, "Fides and Cognito in Relation to the Problem of Intellect and Will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2 (November, 1990); 207-24, reprinted in his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und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59-73. Dowey, 3. See also 191f. 특히 "칼빈의 (신앙에 대한) 정의에서 신뢰(fiducia)를 놓치 고서 그것이 없는 것 때문에 칼빈이 루터의 신앙 개념을 지성화한 증거라고 한" 알브레흐트 리 츌(Albrecht Ritschl,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III, 128)에 대한 옳은 비판 을 주목하라(192). Cf. Dowey, 24-31. Comm. Rom. 10:10. Institutes 3. 2. 8. Comm. Eph. 1:3. 또한 Comm. Eph. 3:12도 보라. Pitkin, 162. Comm. Rom. 10:10. Comm. I Pet. 3:16. 또한 Comm. 2 Pet 3:16도 보라. 선한 양심과 기독교적인 삶의 관 계에 대한 좋은 논의로 Zachmann, 198-203을 보라. 특히 201쪽에 나오는 아주 간명한 요약을 보라: "...... 선한 양심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 보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동 기에서 행동하는 이들은 선한 양심을 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빈에게서의 양심 문제에 대해서 매우 좋은 연구서인 그의 책 가운데서 Zachmann이 양심의 잘못된 사용에 대해서는 명확 한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는 인간의 양심이 모든 문제의 최종 판관(判官)이 될 수 없 다는 것만을 시사하고 있다. Comm. I Tim. 1:19: "Every profession of faith which does not prove itself by a good conscience and manifest itself in love is insincere." Comm. I Thess. 1:11: "God works or produces faith in us." Comm. John 17:6. Comm. II Pet. 1:3. 칼빈의 "인과성의 용어"(the language of causality) 사용은 때때 로 아리스토텔레스적 4 중의 인과성 개념(the fourfold causality of Aristotle)에 정확히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칼빈이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적 4중의 인과성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1:5-8에 대한 주석과 Institutes 3. 14. 21을 보라.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Richard A. Muller, Christ and the Decree (Durham, NC: The Labyrinth Press, 1986), 24. 그러 나 상당히 많은 경우에 칼빈은 이 용어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Comm. I Tim. 2:4: "...... calling is proof of secret election." Comm. I Thess. 5:24: "Our calling should be evidence of eternal grace." Institutes 3. 21. 7: "Now among the elect we regard the call as a testimony of election." Comm. John 6:45. Institutes 3. 2. 21. Comm. I Cor. 4:7. 또한 Institutes 3. 21. 1도 보라. Comm. Eph. 2:10. Comm. Eph. 1:11: "All have obtained salvation mere grace, because they have been freely adopted according to eternal election." 이 구절은 칼빈이 "모든"(all)이라는 말을 어 떻게 사용하는 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문맥을 따라 생각해 보면 이 "모든"은 결국 선택된 모든 이들, 구원받은 모든 이들이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말하는 것 일 수 없음이 자명한 것이다. 다른 문맥에서 칼빈과 성경이 말하는 "모든"이란 말도 이렇게 문맥 내에서 바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Comm. John 6:40. Shepherd, 11. 이점을 밝히고 강조하는 점에서 쉐퍼드는 좋은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신앙론에 대한 쉐퍼드의 다른 점에서는 좋은 논의에 대 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그는 칼빈의 이중 예정론을 비판하면서 그 것이 칼빈의 비일관성(inconsistency)의 한 예가 된다고 말한다(Shepherd, 84f.).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그의 이런 비판은 결국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바르트주의적 이 해에서 온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로, 칼빈의 기독론에 대한 그의 바르트주의적 이해로부터 칼빈 의 기독론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Shepherd, 86, 87f., 89, 93, 95f., 223). 셋째로, 그는 바르트 주의적 종교 이해를 가지고서 바르트주의적 종교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102). 비록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피트킨(Pitkin)도 지적하기를 "그가 칼 빈의 생각에 비취고 있는 빛은 상당히 부적절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Pitkin, 4). 그녀는 또한 쉐퍼드의 이해에 대한 심각한 결점을 지적하는 권위의 하나로 B. A. Gerrish, Grace and Gratitude: The Eucharistic Theology of John Calvi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62, n. 47을 언급하고 있다. Joel R.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Calvin and Calvinists," The Master's Seminary Journal, 5/1 (Spring, 1994), 69. 또한 Sinclair Fergusson, "The Westminster Conference, 1976," The Banner of Truth, 168 (1977), 20도 보라. Beeke, "Faith and Assurance in Heidelberg Catechism and Its Primary Composers: A Fresh Look at the Kendall Thesis," 66. 또한 그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박 사 학위 논문을 출판한 {신앙의 확신}, Assurance of Faith: Calvin, English Puritanism, and Dutch Second Reformation (New York: Peter Lang, 1991), 21, 33-34, 78-79, 83, 86-87, 112ff., 143, 157, 167-68, 174ff., 185ff., 282, 283, 312, 316, 328-29, 345-49, 365-76; 그리고 그의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8; 또한 Richard Lovelace, "Evangelicalism: Recovering a Tradition of Spiritual Depth," The Reformed Journal 40/7 (September, 1990), 21을 보라.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8. 이렇게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차이를 강조하는 글들 중 대표적인 것들로 다음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Basil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in John Calvin, ed. G. E. Duffield (Appleford: Sutton Courtenay Press, 1966), 19-37; Brian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xviii, 38-42, 128-33, 158ff.;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4); idem, "Living the Christian Life in the Teaching of William Perkins and His Followers," in Living the Christian Life (London: The Westminster Conference, 1974), 45-60; idem, "The Puritan Modification of Calvin's Theology," in John Calvin, ed. W. Stanford Reid (Grand Rapids: Zondervan, 1982), 199-214; B. J. van der Walt, "Was Calvin a Calvinist or was/is Calvinism Calvinistic?," in Our Reformed Tradition (Potchestroom: Institute for Reformation Studies, 1984), 367-77; Philip Holtrop, The Bolsec Controversy on Predestination from 1551-1555 (Lampeter: Mellen, 1993). 이들 외에도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이런 분리와 차이를 강조하는 학자들로 비키는 다음 같은 분들을 들고 있다: Karl Barth, John Beardslee, M. Charles Bell, Ernst Bizer, James Danne, Johannes Dantine, Edward Dowey, Jr., Otto Gr ndler, Walter Kickel, Donald McKim, Philip McNair, J rgen Moltmann, Charles Munson, Wilhelm Niesel, Normann Pettit, Pontien Polman, Jack Rogers, Holmes Rolston III, Hans Emil Weber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7, n. 5). 이에 Victor A. Shepherd, The Nature and Function of Faith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Macon,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83), 19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Robert Dabney, Charles Hodge, John MacLeod 등의 해석을 보라 또 한 William Cunningham, "The Reformers and the Doctrine of Assurance," British and Foreign Evangelical Review (1856), reprinted in The Reformers and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Edinburgh: T. & T. Clark, 1862), 113, 116, 118도 보라. Cunningham, The Reformers and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401. Cunningham, 369. 여기서 커닝햄의 칼빈 해석의 비일관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에 비추어 앞서 인용한 말을 좀더 뉴앙스 있게 표현했어야 칼빈에게 공정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커닝햄은 이로써 칼빈과 후대 칼빈주의자들이 다르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후대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의 견해를 더 명확히 하고 그 논리적 함의에 따라 진전시켜 나간 것으로 말하면서 칼빈의 글에는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글에서와 같은 명확한 표현은 나타나지 않 는다고 말하려는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로부터 커닝햄의 칼빈 해석이 일관성이 없다든지, 문 제가 있다고까지 말하지는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모든 학자들의 칼빈 해석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8, 46: "a positive outworking of early Reformation principles." 그의 학위 논문을 10여년 후에 수정하여 출간한 책이 Christ and the Decree: Christology and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from Calvin to Perkins (Labyrinth Press, 1986; Grand Rapids: Baker, 1988)이다.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Drawn Principally from Protestant Scholastic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5);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 2 (Grand Rapids: Baker, 1993). Richard A. Muller는 자신의 이름이 "멀러"로 발음되기를 원한다는 정보를 칼빈 에서 공부하셨던 나의 친구 김재영 목사님께서 주셨었다.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6f., n. 4. 앞서 언급한 멀러와 비키 외에도, 다소 다른 문제들을 취급하지만 근본적으로 칼 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우호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글들로 다음을 보라.
Robert W. A. Letham, "Saving Faith and Assurance in Reformed Theology: Zwingli to the Synod of Dort"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Aberdeen, 1979); Donald W. Sinnema, "The Issue of Reprobation at the Synod of Dort (1618-19) in the Light of History of This Doctrine"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St. Michael's College, 1985); Martin I. Klauber, "The Context and Development of the Views of Jean-Alphonse Turettini (1671-1737) on Religious Authority"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1987); Stephen R. Spencer, " Reformed Scholaticism in Medieval Perspective: Thomas Aquinas and Francis Turretini on the Incarnation (Ph. D. Dissertation, Michigan State University, 1988); Beeke, Assurance of Faith (1991). Comm. II Cor. 1:22. See also Comm. Eph. 1:13. Cf. Institutes 3. 2. 15. Ibid. Comm. Phil. 2:13: "...... faith is secure in the knowledge that the whole course of life is directed according to the 'benevolent attitude' of God himself." Comm. Matt. 8:13. Comm. John 4:22. Comm. 1 John 2:3. 또한 자주 인용되는 Institutes 3. 8. 4; 3. 19.2; 3. 24.5. 또한 Comm. Acts 15:11도 보라.
칼빈에게 있어서 확신과 선택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한 좋은 논의로 Letham, "Saving Faith and Assurance in Reformed Theology," 137-41. Institutes 3. 24. 9. 또한 Institutes 3. 24. 6도 보라. Institutes 3. 24. 4. Shepherd, 50. Institutes 3. 2. 17: "Surely, while we teach that faith ought to be certain and assured, we cannot imagine any certainty that is not tinged with doubt, or any assurance that is not assailed." Shepherd, 26. Zachmann, 183-87. 다음을 보라. Institutes 3. 2. 4; 3. 2. 15, 17, 18, 20. 또한 Comm. Ps. 22:2; 22:16 도 보라. 천주교도들의 이런 개념에 대한 칼빈의 강한 비판으로 Institutes 3. 2. 24를 보 라. 현대주의자들의 견해를 위해서는 특히 Paul Tillich의 여러 저작을 보라.
Comm. Ps. 143:2. Pitkin, 139. 칼빈에게서 환란과 회의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좋은 논의로 Pitkin, 138-41을, 섭리가 우리에게 감취어져 있고 불가해한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연약성 때 문이라는 좋은 지적에 대해서 Pitkin, 156을 보라. Comm. Eph. 3:12. Institutes 3. 2. 24. Shepherd, 27: "...... even the most assured faith is afflicted with anxiety and unbelief." Cf. Institutes 3. 2. 23-24. 또한 Comm. John 20:3도 보라.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55. Comm. John 13:9. Shepherd, 27. Shepherd, 38. 이는 로마서 8:9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언급하면서 하는 말이다: "...... sin no longer lords it over him: yet sin is not absent from him." Shepherd, 28: "Doubt in believers never overturns assurance." Dowey, 198. Comm. II Tim. 2:19. Comm. Ps. 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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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이승구
개혁자 칼빈에 대해서는 성령의 신학자, 성경의 신학자 등 여러 명칭이 부여되었었다. 그는 16세기적 맥락 가운데서 개혁 신학을 참으로 잘 정리한 사람이요, 우리의 믿는 바 신앙의 내용과 방식 모두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제시한 신학자요, 목회자였다. 특히 그가 1536년 출판한 이래 1559년 결정판을 내기까지 계속해서 그 내용을 가다듬은 {기독교 강요}는 우리들이 믿고 알아야 할 바를 잘 정리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대해서는 모두 다 일관성 있는 신앙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논의가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에 대한 칼빈의 입장과 관련해서 현대 칼빈 연구가들 사이에는 적지 않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신앙의 내용에 대해서와 확신이 신앙에서 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된다. 이 논쟁을 소개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결국 이 논쟁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필자 나름대로 신앙에 대한 칼빈의 이해를 정리하여 이 논쟁의 해결에 간접적인 기여를 하기 원한다. 이 논문을 통해서 나는 현대에 나타나고 있는 칼빈의 신앙론에 대한 오해들에 반해서, 다음 네 가지 요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1) 칼빈은 신앙의 인지적 내용을 강조하였다. 칼빈에게는 이 인지적 내용에 관한 한(限) 신앙의 내용은 다른 지식과 다르지 않고, 오히려 더 확실한 지식으로 여겨졌다;
(2) 칼빈이 말한 구원 신앙의 내용에는 그리스도와 구속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만 이 아니라, 창조와 섭리의 내용까지도 이미 포함된 것이다;
(3) 칼빈은 이런 내용에 대한 신뢰와 이를 통한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강조한다;
(4) 칼빈은 이상적 상황에서 신앙은 확신을 동반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 확신은 우 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이고,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흔들릴 수도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제 이 네가지 요점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자. 이는 다음 같은 질문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칼빈이 제시한 신앙의 성격은 어떤 것인가? 칼빈은 고전적인 입장에 충실하 게 신앙의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한다.
그것은 신앙은 "확실한 지식(동의[assensus]를 동반한 지식[notitia])"이라는 것과 신뢰(fiducia)라는 것이다.
1. 칼빈이 말하는 신앙의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성격
첫째로, 칼빈에 의하면 신앙은 확실한 지식이다(an assured knowledge). 칼빈은 신 앙의 지식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말한다: "신앙은 무지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고, 지식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칼빈에 관한 한, 지식이 없으면 신앙도 없다"고 단언하여 말하는 다우이의 말은 매우 옳은 것이다. 그 지식은 결국 상호 밀접하게 연관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들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칼빈은 바른 신지식은 바른 예배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바울의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얼마나 만족스럽게 생각하든 지와 상관없이, 지식과 진리가 결 여된 종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거룩하거나 합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르게) 알려지신 후에야 바르게 경건한 방식으로 경배 받으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진리의 중요성에 대한 명백한 강조를 찾아 볼 수 있 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 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은 우리에게 경외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존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대해서 바른 지식을 지닌 이는 반드시 하나님을 바르게 경 배하게 되는 것이다. 바른 지식에 대한 이런 칼빈의 강조를 전제로 할 때, 우리는 칼빈이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 일반적 의미의 지식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유용한 것인지, 오히 려 칼빈의 의도를 놓치는 것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자면, 브라이언 게리쉬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그는 칼빈이 아퀴나스(Thomas Aquinas)와는 대조적으로 신앙에 대해서는 "스키엔티아"(scientia)라는 라틴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노티티아"(notitia)를 사용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신앙과 관련해서 칼빈 자신이 "스키엔티아"(scientia)라는 용어를 사 용한 예가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지식(scientia)이 모든 지식(notitia)보다 우월하다고 옳게 주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확실성은 지식(scientia)이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나 이것은 우리 자신의 지성의 현명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칼빈은 "스키엔티아"(scientia)와 "노티티아"(notitia)를 동의어로 사용하며, 전 혀 구별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특정한 지식을 다른 지식보다 더 우월한 것 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와 연관해서 칼빈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강요}의 내용을 참조하라고 초청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자신이 이 주석에서 말하고 있은 것과 {강요}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게리쉬의 강한 주장은 그 근거를 상실한다고 판단된다. 물론, 신앙은, 우리가 곧 살펴 볼 바와 같이, 지식 이상의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지 식을 그 중요한 한 구성 요소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불만은 이 점을 잘 지적하면 서, 칼빈에 대해서 "신앙은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부르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라고 말하 는 대신에 '우리가 흔히 지식이라고 부르는 지식일 뿐만이 아니라(not only such knowledge)'라고 했으면 정확할 것이다"고 하며, 또한 "교리의 단순한 수납은 신앙이 아니 지만, 교리의 수납도 신앙의 한 부분이다"고 정확히 말하고 있다. 칼빈에게서, 하나님의 호 의(好意)에 대한 지식(the knowledge of the benevolence of God)이란 좁은 의미의 하나님 의 은혜와 호의에 대한 지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주어진 포괄 적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망라(網羅)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페터 부룬너처럼 칼빈에게서는 "당신님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자신(God in himself)은 신앙과 연관성을 지닐 수 없고, 오직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toward us) 만이 신앙과 연관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제한적 인 이해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이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 님을 우리에게 계시하신 한 하나님 자신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 세기에 살던 칼 빈은,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현대인들과는 달리,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장 확실한 지식 의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시대착오적으로 근자의 개혁파 인식론자들의 용어를 빌어서 표현 하자면, 그에게 있어서 신지식은 매우 강한 인식론적 권리(epistemic rights)를 가진 것이었 다는 말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바른 신지식이 없으면 바른 종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바른 신지식이 없으면 영적 자양분의 공급도 없다. 칼빈은 "영적 자양분의 공급은 기 독교 교리를 통해서만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2. 칼빈이 말하는 신앙 내용의 포괄적 성격
이 신앙 내용, 신앙의 내용이 되는 지식에는 실질적으로 기독교의 가르침 전부가 포함되어 있다. 창조, 섭리, 구속, 그리고 극치에 이르는 모든 기독교적 지식이 포함되는 것 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바바라 피트킨이 칼빈의 신앙에 관한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에 이르는 지식으로부터 본래의 또는 더 심화된 경건에로 전진해 감에 있어서 섭 리적 신앙은 매우 중요한 두 번째 걸음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 동시에 동감과 반감을 갖게 된다. 물론 기독교 신자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도 가져야 한다고 말하 는 것은 매우 옳으며, 이에 대해서 동감하게 된다. 피트킨은 칼빈이 섭리에 대한 신앙을 얼 마나 강조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은 하나님의 구속 에 대한 믿음에 이미 포함되어져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섭리는 "자연에 대한 믿는 관 점"(believing view of nature)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섭리와 구속은 생각 속 에서도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비록 편의상 논의나 이해를 위해서 따로 나누어 고찰한 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는 파커가 이중적 신지식(duprex cognito Domini)에 대해서 말하 는 바와 같이, "각각의 존재는 다른 것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이 하나님과 전체로서의 그의 경륜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 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진술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를 반영해 주는 거울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우주적 섭리는 온 세상에 미치는 것이나, 그리스도의 지체들인 우리들에게서 특별 히 빛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의 맥락 가운데서 찾아져야만 하고, 그 역도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칼빈의 주해를 살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칼 빈의 신앙론에 대한 피트킨(Pitkin)의 매우 좋은 연구가 구원 신앙(saving faith)과 섭리 신 앙(providential faith)이 각기 나뉘어 질 수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나는 그녀가 우리의 신앙은 구속과 섭리 모두에 대한 믿음를 포함하고 있어 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한다는 점을 알고 그 점을 높이 산다. 그녀는 심지어 "이 구별 [구원 신앙과 섭리 신앙의 구별]을 주장하는 것은 신지식(神知識)의 한 요소를 다른 요소와 대립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나는 특히 그녀가 이 두 측면의 구별은 "자연 신학(a natural theology)을 함의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 녀가 구원 신앙(saving faith)과 섭리 신앙을 날카롭게 나눈 후에 그 둘을 연관시키는 방식 은 구원 신앙의 성격과 섭리 신앙의 성격도 오해하도록 하는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런 이유에서 나는 피트킨이 "이중적 신앙 개념"(a twofold notion of faith)이라고 말하는 것 에 대해 불편하다. 그녀는 칼빈의 "이중의 신지식"(duprex cognitio Dei)에서 너무 지나치게 나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칼빈에게는 창조자로서의 신지식과 구속자로서의 신지식이 모 두 구원 신앙 안에 포함되어 있다. 노블(T. A. Noble)이 잘 말하고 있듯이, "구속자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만 우리는 그를 우리의 창조자로 [바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 서 나는 칼빈이 피트킨 식으로 "이중의 신앙"이라고 말할 때 그에 동의하려는지에 대해서 자신이 없다. 오히려 다음에 인용하려고 하는 랜달 쟈흐만(Randall C. Zachmann)의 진술이 칼빈의 견해에 좀더 가까운 것이라고 판단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라는 우리의 확 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와 세상을 통치 하시는 우리 아버지로 알므로 우리가 그 지식을 확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온전한 것이 아 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받아들여진 사람들만이 창조자를 그 들의 아버지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트킨의 분리 후의 연관을 찾으려는 시도에 안스러움을 표현하 면서, 섭리도 기독교 신앙의 한 지식의 내용(fides quae creditur or notitia)임을 강조해야만 할 것이다. 칼빈은 섭리를 포함한 이런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강조하지 않는 이들을 어리석 다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은 "알려진 그리고 확실 한 진리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신앙하면 먼저 지식을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쉐퍼드(Shepherd)가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이 "지식은 하나님의 선행적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 지식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지식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우 중요하다. 그 선하심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우리는 결코 우리 자 신에 하나님께 던져 드리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그는 또한 말하기를 "하 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은 신앙을 세우기에도 적절하며, 찬양을 일으키기에도 적적하다" 고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지식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다: "하나님께 서 무엇인가를 약속하시면 이로써 그는 자신의 호의를 증언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 랑의 증거를 가지지 않은 약속은 없는 것이다."
3. 칼빈이 말하는 신앙의 신뢰적 성격: 반응으로서의 신앙 고백과 신앙의 삶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하나님의 이런 사랑에 반응하는 신앙은, 우리가 이제까지 논 의해 온 바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확실한 지식이나, 단순히 지식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다우이가 옳게 말하는 바와 같이, "지식이란 말이 ...... 칼빈의 신학에서 순전 히 인지적(認知的)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식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지성주의적 신앙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신지식은, 우리가 신지식의 인지적 측면에 대해서 말한 바를 잊지만 않는다면, 실제로 "실존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칼빈은 "신앙은 확실하고 유효한 확신이지, 빈 개념만인 것은 아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머리에만 있기보다는 가슴에 더 있는 것이고, 이해이기보다는 정향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에 유의해야 하니, 이는 신앙이 지식임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앞에서 했던 말들을 잊지 말아야 한 다. 칼빈의 신앙 개념은 에베소서 1:13에 대한 주석 가운데서 그가 말하는 것 가운데 잘 요 약되어 있다: "신앙의 출발점은 지식이다. 그러나 그 완성은 대립되는 의심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확실하고도 안정성 있는 확신이다. 그리고 그 둘[지식과 확신] 모두가, 내가 말한 바 와 같이, 성령의 역사이다." 이런 신앙을 가진 이들은, 피트킨(Pitkin)이 잘 요약하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물들을 어떻게 섭리적으로 배열하셨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유를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놀람과 경외에로 나아갈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에 근거한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바른 신앙의 고백이 나온다. 바로 이런 뜻에서 칼빈은 "그 누구도 입으로 시인하지 않고 마음으로 믿을 수는 없 는 것이다"고 말하며, "열과 빛이 없는데도 불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신앙의 고백은 항상 순종의 행위와 동반되어야만 한다. 그 래서 칼빈은 다음 같이 말한다: "그에 상응하는 삶이 없이는 우리가 말하는 것은 아무런 무 게도 가지지 않는다. 그래서 [베드로는] 고백이란 말 뒤에 선한 양심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른 곳에서 칼빈은 이렇게도 말한다: "선한 양심으로 그것을 증명하 지 못하거나 사랑으로 그 자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모든 신앙 고백은 참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물론 우리가 믿고 순종해야만 하지만) 신앙은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행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신앙이 생기게 하시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외적 예정으 로부터 흘러나온다.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무차별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모든 이가 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선택의 예 정이 신앙의 궁극적 원인(the ultimate cause)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의 유효적 원인(the effective cause)은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이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신앙의 유효한 원인은 우리 정신의 지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리므로 칼빈에게는 "부르심 이 은밀한 선택의 증거(proof)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부르심이 영원한 은혜의 증 거가 되어야 한다." 그의 {강요} 가운데서는 이것을 이렇게도 표현한다: "이제 택자들 사 이에서 우리는 부르심을 선택의 증거로 여긴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라면 다음과 같은 것이 그 결과의 하나라 는 것은 매우 자명한 것이다: "우리에게서는 신앙의 시작도 이를 위한 준비도 전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칼빈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의 증거로 우리를 밝혀 주시기 전 에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충분한 이유를 들어" 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칼 빈은 수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신앙의 원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예만을 들어보기로 하자:
사람 안에 뛰어난 것이(excellence)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자연에 의해서 주어져서 자연이나 유전에 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해 얻어 져서 하나님을 우 리가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오직 순수하고 자유로운 그의 자비에게서만 흘러나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서 도움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의지가 준비되 고, 그 후에 그 나름의 힘을 사용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바르게 선택할 수 있은 능력이 우리에게 내려지며, 그후에는 우리가 우리 나름의 선택을 한다고 말하지 않 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이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늘 지껄이는 말들이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 는 모든 선한 것은 그가 만드신 바(his creation)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전인이 그 의 손으로 선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스 스로 구원을 만들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값없이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그 증명이다.
모든 이들은 그 구원을 순전히 은혜로 얻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선택에 따라서 값없 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분가분리적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셨을 때, 그것은 마치 우리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새겨진 도장으로 확인해 주시는 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다. 왜냐하면 성령의 증거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심에 대한 도장[印號]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신 앙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대한 풍성한 증언이다.
이 모든 구절들은 모두 우리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만 기원한다는 것과 그 기 원뿐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의존해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구절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에 의하면, "항상 (하나님의) 자비가 논리적으로 신앙에 앞선다"고 말하는 쉐퍼드의 말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칼빈 에게 있어서 신앙은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4. '신앙의 확신'에 대한 칼빈의 견해
이제 칼빈의 신앙론에서 근자에 많이 논의된 문제 중 하나인 신앙의 확신에 대한 논의에로 나가 보기로 하자. 이 신앙의 확신 문제에 대한 칼빈과 후기 칼빈주의자들, 특히 웨스트민스 터 회의에 참여한 신학자들의 차이를 강조한 켄달 박사(Dr. R. T. Kendall)에 반해서 죠엘 비키 박사(Dr. Joel R. Beeke)는 이렇게 말한다:
칼빈이 신앙은 확신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신앙과 확신에 대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구별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칼빈과 웨스트민스터 신 앙고백서는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칼빈은 신앙이 확 신하는 면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려고 한 것이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 18 장 은 자의식적이고 경험적 현상으로서의 확신이 무엇인지를 묘사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것이 다.
그러므로 비키 박사는 칼빈의 진정한 의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정한 의도를 생 각하면서 그 둘을 비교해 보면, 그 둘 사이의 모순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비키는 칼빈과 후기 칼빈주의자들의 차이가 종류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라고 본다. 그 정도의 차이는 그들이 교회의 사역자들로서 생각하고 사역하는 상황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 비키가 요약적으로 잘 말하고 있듯이, "종교 개혁 이후의 목회적 맥락 가운데서 칼빈주의는 아주 열심히 교리에 살을 입히고, 확신의 근거를 제시했던 것이다." 또는 그가 다른 논문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앙과 확신에 대한 칼빈과 칼빈주의자 들 사이의 차이는 주로 양적인 것이고 방법론적인 것이다"; "그것은 질적인 것이거나 내용 적인 것의 차이가 아니라, 강조점과 방법의 차이일 뿐이다." 이와 같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연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비키 자신의 독특한 견해도 아니고,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렇게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을 연속선상에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사실 이는 근자에 들어 바질 홀, 브라이언 암스트롱, 알 티 켄달 등을 중 심으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일이 나타나기 전에, 조금 다른 형태 로 제시되었었으며 당대에는 주도적이었던 옛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전의 해석자들 은 무조건 칼빈과 후대 칼빈주의자들을 동일시하는 이들은 아니었다. 특히 윌리엄 커닝햄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서, 커닝햄은 칼빈이 "구속의 범위에 대한 정확한 교리에 대해서 그렇게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 은 듯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커닝햄은 칼빈이 여러 곳에서 보편구속론을 아주 명백히 거 부하고 있다는 것도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후대의 칼빈주의 자들은 이런 입장을 잘 표현하면서 아주 명확히 제한 구속론을 말한다. 그러므로 커닝햄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이런 표현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 해석하기를, 비키가 잘 지적하고 요약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이 그들 사이에 적대적인(anti-thetical) 차이로 이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은 "초기 종교 개혁의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그로부터 작업하였다."고 해석한 것이다. 커닝햄은, 오늘날 그 차이를 강조하는 이들 과는 달리, 칼빈이 결코 후대의 칼빈주의자들과 적대적인 입장을 가졌다고 보지 않는다.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관계에 대한 근자의 논의에서 가장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하 고 있는 이는 흥미롭게도 감리교 계통의 듀크 대학교의 종교개혁, 특히 루터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 스타인메츠(David C. Steinmetz) 밑에서 바로 이런 문제, 특히 칼빈과 칼 빈주의자들의 그리스도와 예정론에 대한 이해 문제로 박사 학위를 하고, 계속해서 종교개혁 이후 정통주의 신학의 발전에 대한 연구를 하며, 풀러신학교에 있다가 칼빈신학교의 박사 과정이 시작되면서 박사 과정 담당 교수(the P. J. Zondervan Chair for Doctoral Studies)로 옮겨가 지난 10년간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리쳐드 멀러 교수라고 할 수 있다. 비키는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관계 문제에 대한 멀러 교수의 공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980년대에 이 새로운 재평가에 대한 관심이 특히 리쳐드 멀러(Richard A. Muller) 교수에 의해 불붙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6세기 후반과 17세기 개혁파의 문서들은 소위 개혁파 정통주의가 종교개혁의 첫 세대들의 성경주의를 질식시킨 "예정론적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을 지지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유력하게 밝혔다. 멀러는 종교개혁 이후 시기의 신학자들은 개혁신학적 체계를 명료화하기 위해서 스콜라주의적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그 내용 에 있어서는 종교 개혁의 첫 세대의 사상과 본질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논의하였다. 멀러에 의하면, 종교 개혁 이후의 정통주의는 중세 스콜라 사상의 내용과 자주 이견(異見)을 나타내 보였으며, 단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그 조직적 구조만을 유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개혁 이후의 스콜라주의적 정통주의(post-Reformation scholastic orthodoxy)라는 용어에 있어서 '스콜라주의적'이라는 말은 그들이 사용한 신학 방법론을 지칭하는 것이며, '정통주의' 라는 말은 그 내용과 교의적 의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개혁파 스콜라주의적 정통주의는 어떤 방법론에서는 칼빈과 다르다고 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종교개혁적 가르침과 강한 연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종교개혁은 그들의 신앙 고백적이고 신학적 규정화 (codification)가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이 다소 긴 인용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관계에 대한 멀러의 입장과 공헌을 잘 요약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40년대 이후 주로 바르트주의적 정향의 신학자들을 중심으 로 해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차이점을 적대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 반해서 이전 칼빈주의자들의 해석과 같이, 서로 다른 정황 속에 있는 이들이 다소 상이한 표현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근본적 생각과 사상의 정향에 있어서는 근본적 일치가 있음을 말하려는 일단 의 학자들이 나타났으며, 멀러가 그 중요한 대변자 중 한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신앙과 확신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켄달 등을 중 심으로 해서 칼빈은 확신이 신앙의 본질에 속한 것으로 본 것에 반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등에 반영된 후대 칼빈주의자들은 확신이 없어도 신앙이 있다고 할 수는 있다는, 즉 확신은 신앙의 본질의 속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신앙과 확신 문제에 대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이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은 그들이 처한 목회적 상황의 차이로 말미암아 그 표현 방법에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는 것이다. 이하에서 나는 왜 신앙과 확신 문제에 있어서 나 자신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의 우호적 연속성을 말하는 멀러와 비키 등의 입장에 동의하는지를 칼빈의 신앙에 대한 확 신에 대한 논의의 성격을 밝힘으로 드러내어 보려고 한다. 첫째로, 칼빈에게 있어서도, 후기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확신은 하나님 의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확신의 정도는 인간의 정신의 한계 이상의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가운데서 약속하신 것을 확 언해 주시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다른 어떤 방도로 우리 에게 확신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확 신시키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우리에게 제시하실 때마다, 그는 간접적으로 우리의 불신을 책망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의 심령에서 왜곡된 의심을 뿌리채 뽑아낼 의도만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확신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 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신앙은 우리의 전생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의 '호의적 태도'에 따라 방향 지워진다는 지식 가운데서 안전함을 얻는다." 따라서 신앙과 구원의 확신은 말씀 가 운데서 찾아져야만 하며,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우 리는 "신앙의 확신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quot; 알게 된다. 이렇게 칼빈에 게서 구원과 신앙의 확신은 오직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베풀어주시는 은혜 의 하나이다. 둘째로, 칼빈에게서도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에게서와도 같이, 확신은 또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나온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바르게 이해하기만 하면, 예정 은 결코 신앙을 흔들어 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을 가장 잘 확언시켜 줄 수 있는 것 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대로 예정 교리를 바 르고 옳게 검토한 이는 상당한 위로의 열매를 거둔다." 그러므로 우리는 쉐퍼드가 "칼빈은 확신이란 선택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고 말할 때, 그에게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셋째로, 칼빈은 신자가 이처럼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예정에 대 한 믿음 가운데서 확실한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그들은 흔들리고 떨 수도 있다는 의견을 가진 것이다. 칼빈은 이점에 있어서 아주 분명한 태도를 표한다: "우리는 신앙이 확실하고 확신에 차 있어야만 한다고 가르치지만, 의심에 조금도 물들어 있지 않은 확신, 전혀 흔들리 지 않는 확신을 상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진술을 잘 생각해 볼 때 칼빈은 이상적 신앙은 확신을 가진 신앙이지만, 이런 신앙조차도 어느 정도의 흔들림이 있을 수 있으며, 따 라서 확신이 가지지 못한 신앙도 그 신앙의 내용이 분명하고(여기서 앞서 논의했던 신앙의 지식에 대한 강조가 다시 나타난다) 그것을 확실히 믿고 있다면 그것도 신앙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 같은 쉐퍼드의 관찰은 옳은 것이다: "칼빈은 모든 신자들 이 모두 다 동일한 정도의 확신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확신은 각기 다른 사람 들에게 부여된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른 것이다." 모든 이의 신앙의 확신의 정도가 다 다 르다는 점에 대해서는 짜흐만(Zachmann)도 동의한다. 그러므로 쉐퍼드와 짜흐만은 신앙의 확신 문제에 대한 논의에 직접 의식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칼빈 자신의 입장 을 칼빈에게 충실하게 제시하므로, 이 문제에 관한 한 칼빈에게는 분명한 확신을 지닌 신앙 만이 신앙으로 여겨졌다는 켄달 등의 의견에 반하는 해석을 하는 이들로 여겨질 수 있다. 칼빈은 {강요}에서나 여러 곳에서 확신하는 신앙도 불신과의 계속적인 심한 투쟁을 하고 있 으며, 의심과 불안의 색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칼빈은 어떤 천주교도들이나 현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불신과 혼합된 확신" 을 말하거나, 신앙이 그런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천주교도들 이나, 현대주의자들과는 달리, 칼빈은 불신과 회의를 어디서도 있을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하 지 않는 것이다. 칼빈이 말하는 바는 오직 믿는 우리는 확신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우리 자 신의 불신에 대해서도 "죄 용서를 위해 간구해야만 하며," 하나님께서 이런 죄에 대한 용 서를 위한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리라고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회의나 불 신은 틸리히나 불트만 등이 말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믿음 가운데 있는 회의인 것이 다. 그들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그런 불신과 회의를 있을 수 있는 정당한 것으로 보느냐, 아 니면 용서받아야만 하는 문제와 죄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에게 의심과 불신으 로 물든 확신이 있을 수 있다고 하며, 그러나 그것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 회개하고 더 온전하게 되어야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더구나 칼빈은 이런 회의와 불신 등을 해결한 이른 바 단련된 신앙(연단을 받은 신 앙, faith that is tested)이 참 신앙이라고 본다. 믿음 가운데서도 있는 이런 회의와 불신을 잘 통과하고 그 모든 것을 잘 극복한 신앙이 굳게 설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피트킨이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참된 확신은 회의와의 투쟁 가운데서 그 자체를 드러낸다. 이 에 반해서 유기자들은 그들 자신의 속고 있는 과신(過信, overconfidence)만을 주장할 뿐이 다." 칼빈은 이런 입장을 분명히 하는 자신의 입장이 스스로 모순을 범하는 것이라고 결 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확신에 대한 균형잡힌 견해를 제시하고 있은 것이 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편으로는 "떨며, 주저하고, 의심하는 양심은 항상 불신의 분 명한 증거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또 한편으로는 아주 분명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신자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분명한 위로를 소유하는 것을 금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두려움과 신앙은 같은 정신 가운데 머물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그러하 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와, 또 우리를 그리스도와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와 묶으신 그 교제를 용감하게 두 손으로 꼭 붙들어 야만 한다.
여기에 균형이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칼빈은 우리는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또 가져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쉐퍼드가 잘 요약한대로, "가장 확신한 신앙도 불안과 불신의 위협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확신은 신앙의 발달 정도에 따른 것이 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비키의 다음과 같은 말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확신감은 신앙 의 활동의 성장과 쇠퇴에 따라서 증진되기도 하고 약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신앙의 씨앗 자 체는 변하거나 요동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확신이 약화되고 하는 것은 "육체의 흔적" 이 우리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 안에 나타나는 그런 "불신도 분명히 죄 이다. 그러나 신자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죄가 신앙을 전복시키도록 하지 않 으시는 것이다"는 쉐퍼드의 말은 칼빈의 생각을 잘 정리하고 있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쉐퍼드는 같은 사상을 다음과 같이도 표현한다: "죄가 더 이상 그를 지배하지 못한다; 그러 나 그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 안에 있는 회의가 그의 확신을 결코 전복시키 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우이가 옳게 말하고 있듯이, "겉으로는 회의할지 모르지 만, 그것이 내면적이거나 주도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칼빈은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첫째로 ...... 육체의 이 연약함에도 불구 하고 택자들은 위험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왜냐 하면 그들은 그들 자 신의 힘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이렇게 말한다: " ...... 하나님의 선하심이 영원하므로, 신자들의 연약함과 깨어지기 쉬움이 생의 마지막까지 또는 심지어 죽음에서도 영원한 구원을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말 을 통해 보면, 칼빈은 신자들의 연약성과 확신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죽음에서도, 죽음 이후에까지라도 미치는 확신을 확언하고 있음 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확신관은 그렇게 기계적인 것이 아님도 드러난다. 그는 현존하 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잘 보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상황 가운데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확신이 과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결론
이 논문에서 우리는 이전부터 준비된 그러나 루터가 기이한 섭리 가운데서 시작한 종교개혁 을 체계화했다고 할 수 있는 칼빈이 신앙을 과연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논의 에 근거해서 우리는 서론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첫째로, 칼빈은 신앙을 신앙의 지식(notitia, scientia)으로부터 이해한다. 그리고 이 신앙의 지식은 그것의 인지적 성격에 관한 한(限) 다른 지식(notitia, scientia)와 다르지 않 다. 오히려 칼빈은 이 신앙의 지식을 다른 지식보다 더 확실한 지식으로 여긴다. 오늘날 유 행하는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명제 에 대한 신뢰의 차이를 칼빈은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성경에서 가르치신 대로 하나 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 성경에 따라 진술된 명제를 믿는 것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한 부분으로 여기는 것이다. 둘째로, 칼빈이 말하는 구원 신앙의 내용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적 지식뿐만이 아니라, 창조와 섭리에 대한 지식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구속에 대한 인식에 이미 섭리에 대한 인정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그 둘을 나누어 말하는 것은 논의를 위한 편의상의 조 치일 뿐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는 구속주로서의 하나님이 창조주와 섭리자로서의 하나님이 시지, 그 둘을 어떻게든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셋째로, 칼빈은 신앙의 지식에 대한 신앙의 신뢰(fiducia)를 강조한다. 신앙은 분명 히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지식이나, 지식만으로는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신앙 고백과 삶으로 나타나는 신뢰이다. 칼빈이 말하는 믿는 바 주께 대한 전적인 신뢰는 슐라이어마허의 절대 의존감 이상의 신뢰이다. 넷째로, 칼빈은 신앙이 이상적인 경우에 확신을 동반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 확신 도 신앙의 정도와 성숙에 따른 것이며, 우리는 끝까지 확신을 더해 가는 신앙의 증진을 경 험한다는 것도 강조한다. 그러므로 아직 확신이 강하지 못하고 의심에 사로잡히는 연약한 신앙인도 그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과 그리스도로 인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형성 되지 않은 신앙"(fides informata)도 신앙이라고 말하는 천주교도에 대해서는 칼빈이 확신한 신앙(assured faith)만이 신앙이라고 한다. 따라서 신앙에는 회의와 의심이 필연적으로 동반 되며 그런 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라고 말하는 현대주의자에 대해서도 칼빈은 신앙의 확신 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확신은 자기 확신이나 속고 있는 과신(deluded overconfidence)이 아님에도 유의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런 이들에 대해서 칼빈은 신앙하 는 이들에게도, 그것도 가장 확실한 확신을 가진 이들에게도, 그 안에 남아 있은 육체(부패 한 인간성)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회의와 불신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전복시킬 수는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 실존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충실하면서도, 성경이 제시하는 신앙의 모습에 충실하게 신앙을 제시하는 칼빈을 찾 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이 신앙의 확신을 강조하는 것만을 보고, 후대의 칼빈주의자들과의 차이를 강조하는 해석은 칼빈의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칼빈의 말을 너무 단면적으로, 탈문맥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칼빈이 살던 16세기의 천주 교회와의 논쟁이라는 구체적인 맥락 가운데서 칼빈의 말을 해석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그러 나 그렇게 바로 이해된 칼빈의 의도는, 적어도 그 의도에 관한 한,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제 시에 충실한 것이기에, 오늘 여기에 사는 우리들의 신앙에 대한 진술에도 도움이 될 수 있 는 것이다. 칼빈이 제시한 신앙의 성격 중 현대에 무시되는 요소들이 오늘날 칼빈 연구자들 에 의한 칼빈 신앙 이해에 대한 해석에서도 왜곡되는 것은 흥미롭지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지닌 성향과 정향에 따라서 칼빈의 신앙 이해를 해석해 보는 일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칼빈을 그가 살던 시 대에로 되돌려 보내서 16세기의 맥락 가운데서 칼빈을 바라보고, 그 이후에 다시 우리 상황 에로 돌아와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칼빈이 말하고 강조한 "확실한 지식"으로서의 신앙의 의 미를 물어야 할 것이다.
<미주>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이 논문 작성을 위한 기본적인 연구는 필자가 2000년 여름 기간 동안 Research Fellow로 초빙된 H. Henry Meeter Center for Calvin Studies, Calvin College and Calvin Theological Seminary, Grand Rapids, MI, USA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힌다.
2000년 여름 방학 동안의 연구비를 주신 미터 센터 운영 위원회와 각기 소장(Director)과 사서(curator)로 있는 Dr. Karin Maag과 Mr. Paul Fields에게 감사를 표한다. 이 논문의 한 부분은 2000년 8월 17일 미터 센터에서 발제되었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논의로 다음 글과 그 안에 인용된 문헌들을 참조하라.
졸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 작성 동기를 통해 살펴 본 신학의 과제," in {개혁신학 탐구} (서울: 하나, 1999), 117-45, 특히 124-26을 보라.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60), 3. 2. 2. 이하 이로부터의 인용은 Institutes로 하기로 한다.
Edward A. Dowey, Jr.,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Expanded Edition (Grand Rapids: Eerdmans, 1994), 172. Comm. Acts. 17:22-23. Cf. Institutes 1. 2. 2. Brian A. Gerrish, Saving and Secular Faith: In Invitation to Systematic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9), 6, 12, 27. Ibid., 6. Comm. Eph. 3:19. Comm. I Cor. 2:12도 보라. James M. Bulman, "The Place of Knowledge in Calvin's View of Faith," Review and Expositor 50 (1953): 323-29, reprinted in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of Calvin's Theology, vol. 7 of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ed. Richard C. Gamble (New York and London: Garland Pub., 1992): 289-95. Ibid., 326 = 292. Ibid., 329 = 295. Peter Brunner, Vom Glauben Bei Calvin (T bingen: Mohr Paul Siebeck, 1925), 67. cited in Dowey, 153. Cf. Alvin Plantinga, "Reason and Belief in God," in Faith and Rationality, ed. N. Wolterstorff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83); 16-93; "Is Belief in God Rational," in Rationality and Religious Belief, ed. C. F. Delancy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9); 7-27; Nicholas Wolterstorff, "Thomas Reid on Rationality," in Rationality and the Calvinian Tradition, edited by Hendrik Hart, Johan van der Hoven and Nicholas Wloterstorff (Letham, 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9) 43-69; Kelly James Clark, Return to Reason (Grand Rapids: Eerdmans, 1990), 한역, {이성에로의 복귀: 개혁파 인식 론이란 무엇인가?} (서울: 여수룬, 1999). Comm. I Tim. 4:6. Barbara Pitkin, What Pure Eyes Could See: Calvin's Doctrine of Faith in Its Exegetical Context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9), 158. 이는 이 책에 서의 피트킨의 주된 주장의 하나이다. Dowey, 133, n. 414. 또한 이 각주에 나타난 있는 이 점에서 빌헬름 니젤(Wilhem Niesel)에 대한 그의 좋은 비판을 보라. T. H. L. Parker, Calvin: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Knox, 1995), 13. Comm. Acts 2:23. Pitkin, 158f. Ibid., 160. Ibid., 159. 다음과 같은 다우이의 말도 참조하라: "엄격하게 말해서, 피조계 안에 있는 이런 계시의 요소들에 대한 칼빈의 평가가 그의 '자연 신학'에 속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Dowey, 83). 왜냐 하면, 칼빈에게는 모든 것이 신앙의 관점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우이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타락 이후에는 오직 특별 계시의 관점에서만 피조계 안에 있는 계시를 바르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Ibid.). 다른 말로 하자면, 피트킨이 말하고 있듯이, "칼빈에게 는, 모든 신지식이 그리스동의 중재를 통해 오기 때문이?quot;(Pitkin, 160, 그녀 자신의 강조). 오직 "믿음으로 고쳐진 눈을 통해서 성경의 안경을 통해 볼 때만, [자연과 역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는) 본래의 계시적 기능에로 회복되는 것이다"(Pitkin, 160f.). 빌헬름 니젤도 이와 비슷하게 말한 다(Niesel, The Theology of Calvin, 40-53). 그러나 그가 이런 표현에 부여하고 있는 의미는 칼 빈적이기 보다는 바르트주의적임에 유의하라. T. A. Noble, "Our Knowledge of God according to John Calvin," Evangelical Quarterly 54 (1982), 13, reprinted in The Organizational Structure of Calvin's Theology, 331. Dowey, xi, 257 등도 보라. 그러나 다우이가 "신앙론은 {강요} 제 1 권 제 1장-9장만큼이나 기독 교 강요의 인식론적 서론이 된다"(xvii, 1952년 판 서문 중에서)고 말할 때나, "그리스도가 신앙의 범위(the scopus fidei)이다"고 할 때(xvi, 1964년 판 서문 중에서), 그는 칼빈보다는 바르트와 같 이 들리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또한 55, 187f., 211, 218 등도 보라. 또한 xviii-xvi, 89f., 105, 108, 155 등에서 (비록 빌헬름 니젤보다는 좀더 균형감을 가지 고 있지만) 그래도 나타나고 있는 다우이의 칼빈의 성경 이해에 대한 진술의 바르트주의적 성향 을 보라. 칼빈의 성경관과 관련해서 다우이는 월필드(B. B. Warfield), 칸져(K. S. Kantzer), 데이 비스(R. E. Davies)에 반해서 두메르그(E. Doumergue), 리드(J. K. S. Reid), (약간의 비판과 함 께) 맥네일(John T. McNeill), (자신의 해석과 함께) 베르너 쿠루쉐(Werner Krusche), 그리고 하 루투니안 (Joseph Haroutunian)의 편을 든다. 비록 칼빈이 말하는 '구술'(dictation)의 의미에 대 해서는 결과적으로 월필드에게 동의하나, 전반적으로는 위와 같은 태도를 표한다(101). 성경관과 예정에 대한 견해에서 다우이는 전반적으로는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차 이를 강조한다(Dowey, 90, 218). 그러나 때때로 다우이가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에게 대해 공정한 진술을 하는 때도 있다. 예를 들자면, 다우이는 "그 [17] 세기에 발전한 것에 대해서는 칼빈과 칼 빈 이전의 뿌리가 있었다"고 말한다(xiv). 이런 공정한 언급을 하는 다른 곳으로 163도 보라. Randall C. Zachmann, The Assurance of Faith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96. Ibid., 97. See also 161. See again Institutes 1. 6. 1. 예를 들어 다음 표현을 보라: "교리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이 어리석게도 혼동된 신앙(a confused faith)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많이 있다"(Comm. John 1:12). Comm. Titus 1:1: faith "contains nothing but known and ascertained truth." Victor A. Shepherd, The Nature and Function of Faith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Macon,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83), 17, n. 70. Institutes 3. 2. 7. Comm. Psalm. 103:8. Institutes 3. 2. 32. 칼빈의 신앙관을 16 세기 맥락 가운데서 놓고 신앙의 이런 측면을 잘 설명하고 있은 논의로 다음을 보라. Richard A. Muller, "Fides and Cognito in Relation to the Problem of Intellect and Will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Calvin Theological Journal 25/2 (November, 1990); 207-24, reprinted in his The Unaccommodated Calvin: Studies in the Foundation of a Theological Tradition (New York 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159-73. Dowey, 3. See also 191f. 특히 "칼빈의 (신앙에 대한) 정의에서 신뢰(fiducia)를 놓치 고서 그것이 없는 것 때문에 칼빈이 루터의 신앙 개념을 지성화한 증거라고 한" 알브레흐트 리 츌(Albrecht Ritschl, 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III, 128)에 대한 옳은 비판 을 주목하라(192). Cf. Dowey, 24-31. Comm. Rom. 10:10. Institutes 3. 2. 8. Comm. Eph. 1:3. 또한 Comm. Eph. 3:12도 보라. Pitkin, 162. Comm. Rom. 10:10. Comm. I Pet. 3:16. 또한 Comm. 2 Pet 3:16도 보라. 선한 양심과 기독교적인 삶의 관 계에 대한 좋은 논의로 Zachmann, 198-203을 보라. 특히 201쪽에 나오는 아주 간명한 요약을 보라: "...... 선한 양심은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해 보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동 기에서 행동하는 이들은 선한 양심을 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루터와 칼빈에게서의 양심 문제에 대해서 매우 좋은 연구서인 그의 책 가운데서 Zachmann이 양심의 잘못된 사용에 대해서는 명확 한 논의를 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그는 인간의 양심이 모든 문제의 최종 판관(判官)이 될 수 없 다는 것만을 시사하고 있다. Comm. I Tim. 1:19: "Every profession of faith which does not prove itself by a good conscience and manifest itself in love is insincere." Comm. I Thess. 1:11: "God works or produces faith in us." Comm. John 17:6. Comm. II Pet. 1:3. 칼빈의 "인과성의 용어"(the language of causality) 사용은 때때 로 아리스토텔레스적 4 중의 인과성 개념(the fourfold causality of Aristotle)에 정확히 상응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칼빈이 정확히 아리스토텔레스적 4중의 인과성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서 에베소서 1:5-8에 대한 주석과 Institutes 3. 14. 21을 보라. 이에 대한 좋은 논의로 Richard A. Muller, Christ and the Decree (Durham, NC: The Labyrinth Press, 1986), 24. 그러 나 상당히 많은 경우에 칼빈은 이 용어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 자유롭게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Comm. I Tim. 2:4: "...... calling is proof of secret election." Comm. I Thess. 5:24: "Our calling should be evidence of eternal grace." Institutes 3. 21. 7: "Now among the elect we regard the call as a testimony of election." Comm. John 6:45. Institutes 3. 2. 21. Comm. I Cor. 4:7. 또한 Institutes 3. 21. 1도 보라. Comm. Eph. 2:10. Comm. Eph. 1:11: "All have obtained salvation mere grace, because they have been freely adopted according to eternal election." 이 구절은 칼빈이 "모든"(all)이라는 말을 어 떻게 사용하는 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 문맥을 따라 생각해 보면 이 "모든"은 결국 선택된 모든 이들, 구원받은 모든 이들이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말하는 것 일 수 없음이 자명한 것이다. 다른 문맥에서 칼빈과 성경이 말하는 "모든"이란 말도 이렇게 문맥 내에서 바르게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Comm. John 6:40. Shepherd, 11. 이점을 밝히고 강조하는 점에서 쉐퍼드는 좋은 기여를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는 칼빈의 신앙론에 대한 쉐퍼드의 다른 점에서는 좋은 논의에 대 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그는 칼빈의 이중 예정론을 비판하면서 그 것이 칼빈의 비일관성(inconsistency)의 한 예가 된다고 말한다(Shepherd, 84f.). 그러나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그의 이런 비판은 결국 하나님의 의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바르트주의적 이 해에서 온 것으로 여겨진다. 둘째로, 칼빈의 기독론에 대한 그의 바르트주의적 이해로부터 칼빈 의 기독론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Shepherd, 86, 87f., 89, 93, 95f., 223). 셋째로, 그는 바르트 주의적 종교 이해를 가지고서 바르트주의적 종교 비판을 시도하고 있다(102). 비록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피트킨(Pitkin)도 지적하기를 "그가 칼 빈의 생각에 비취고 있는 빛은 상당히 부적절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Pitkin, 4). 그녀는 또한 쉐퍼드의 이해에 대한 심각한 결점을 지적하는 권위의 하나로 B. A. Gerrish, Grace and Gratitude: The Eucharistic Theology of John Calvin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3), 62, n. 47을 언급하고 있다. Joel R.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Calvin and Calvinists," The Master's Seminary Journal, 5/1 (Spring, 1994), 69. 또한 Sinclair Fergusson, "The Westminster Conference, 1976," The Banner of Truth, 168 (1977), 20도 보라. Beeke, "Faith and Assurance in Heidelberg Catechism and Its Primary Composers: A Fresh Look at the Kendall Thesis," 66. 또한 그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박 사 학위 논문을 출판한 {신앙의 확신}, Assurance of Faith: Calvin, English Puritanism, and Dutch Second Reformation (New York: Peter Lang, 1991), 21, 33-34, 78-79, 83, 86-87, 112ff., 143, 157, 167-68, 174ff., 185ff., 282, 283, 312, 316, 328-29, 345-49, 365-76; 그리고 그의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8; 또한 Richard Lovelace, "Evangelicalism: Recovering a Tradition of Spiritual Depth," The Reformed Journal 40/7 (September, 1990), 21을 보라.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8. 이렇게 칼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차이를 강조하는 글들 중 대표적인 것들로 다음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Basil Hall, "Calvin against the Calvinists," in John Calvin, ed. G. E. Duffield (Appleford: Sutton Courtenay Press, 1966), 19-37; Brian Armstrong, Calvinism and the Amyraut Heresy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9), xviii, 38-42, 128-33, 158ff.; R. T. 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4); idem, "Living the Christian Life in the Teaching of William Perkins and His Followers," in Living the Christian Life (London: The Westminster Conference, 1974), 45-60; idem, "The Puritan Modification of Calvin's Theology," in John Calvin, ed. W. Stanford Reid (Grand Rapids: Zondervan, 1982), 199-214; B. J. van der Walt, "Was Calvin a Calvinist or was/is Calvinism Calvinistic?," in Our Reformed Tradition (Potchestroom: Institute for Reformation Studies, 1984), 367-77; Philip Holtrop, The Bolsec Controversy on Predestination from 1551-1555 (Lampeter: Mellen, 1993). 이들 외에도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사이의 이런 분리와 차이를 강조하는 학자들로 비키는 다음 같은 분들을 들고 있다: Karl Barth, John Beardslee, M. Charles Bell, Ernst Bizer, James Danne, Johannes Dantine, Edward Dowey, Jr., Otto Gr ndler, Walter Kickel, Donald McKim, Philip McNair, J rgen Moltmann, Charles Munson, Wilhelm Niesel, Normann Pettit, Pontien Polman, Jack Rogers, Holmes Rolston III, Hans Emil Weber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7, n. 5). 이에 Victor A. Shepherd, The Nature and Function of Faith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Macon, Georgia: Mercer University Press, 1983), 19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Robert Dabney, Charles Hodge, John MacLeod 등의 해석을 보라 또 한 William Cunningham, "The Reformers and the Doctrine of Assurance," British and Foreign Evangelical Review (1856), reprinted in The Reformers and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Edinburgh: T. & T. Clark, 1862), 113, 116, 118도 보라. Cunningham, The Reformers and the Theology of the Reformation, 401. Cunningham, 369. 여기서 커닝햄의 칼빈 해석의 비일관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에 비추어 앞서 인용한 말을 좀더 뉴앙스 있게 표현했어야 칼빈에게 공정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커닝햄은 이로써 칼빈과 후대 칼빈주의자들이 다르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후대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의 견해를 더 명확히 하고 그 논리적 함의에 따라 진전시켜 나간 것으로 말하면서 칼빈의 글에는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글에서와 같은 명확한 표현은 나타나지 않 는다고 말하려는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로부터 커닝햄의 칼빈 해석이 일관성이 없다든지, 문 제가 있다고까지 말하지는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모든 학자들의 칼빈 해석의 문제와 연관되는 것이다.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8, 46: "a positive outworking of early Reformation principles." 그의 학위 논문을 10여년 후에 수정하여 출간한 책이 Christ and the Decree: Christology and Predestination in Reformed Theology from Calvin to Perkins (Labyrinth Press, 1986; Grand Rapids: Baker, 1988)이다. Muller, Dictionary of Latin and Greek Theological Terms, Drawn Principally from Protestant Scholastic Theology (Grand Rapids: Baker, 1985); Muller, Post-Reformation Reformed Dogmatics, Vol. 1 & 2 (Grand Rapids: Baker, 1993). Richard A. Muller는 자신의 이름이 "멀러"로 발음되기를 원한다는 정보를 칼빈 에서 공부하셨던 나의 친구 김재영 목사님께서 주셨었다.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46f., n. 4. 앞서 언급한 멀러와 비키 외에도, 다소 다른 문제들을 취급하지만 근본적으로 칼 빈과 칼빈주의자들의 우호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글들로 다음을 보라.
Robert W. A. Letham, "Saving Faith and Assurance in Reformed Theology: Zwingli to the Synod of Dort"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Aberdeen, 1979); Donald W. Sinnema, "The Issue of Reprobation at the Synod of Dort (1618-19) in the Light of History of This Doctrine"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St. Michael's College, 1985); Martin I. Klauber, "The Context and Development of the Views of Jean-Alphonse Turettini (1671-1737) on Religious Authority" (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 1987); Stephen R. Spencer, " Reformed Scholaticism in Medieval Perspective: Thomas Aquinas and Francis Turretini on the Incarnation (Ph. D. Dissertation, Michigan State University, 1988); Beeke, Assurance of Faith (1991). Comm. II Cor. 1:22. See also Comm. Eph. 1:13. Cf. Institutes 3. 2. 15. Ibid. Comm. Phil. 2:13: "...... faith is secure in the knowledge that the whole course of life is directed according to the 'benevolent attitude' of God himself." Comm. Matt. 8:13. Comm. John 4:22. Comm. 1 John 2:3. 또한 자주 인용되는 Institutes 3. 8. 4; 3. 19.2; 3. 24.5. 또한 Comm. Acts 15:11도 보라.
칼빈에게 있어서 확신과 선택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한 좋은 논의로 Letham, "Saving Faith and Assurance in Reformed Theology," 137-41. Institutes 3. 24. 9. 또한 Institutes 3. 24. 6도 보라. Institutes 3. 24. 4. Shepherd, 50. Institutes 3. 2. 17: "Surely, while we teach that faith ought to be certain and assured, we cannot imagine any certainty that is not tinged with doubt, or any assurance that is not assailed." Shepherd, 26. Zachmann, 183-87. 다음을 보라. Institutes 3. 2. 4; 3. 2. 15, 17, 18, 20. 또한 Comm. Ps. 22:2; 22:16 도 보라. 천주교도들의 이런 개념에 대한 칼빈의 강한 비판으로 Institutes 3. 2. 24를 보 라. 현대주의자들의 견해를 위해서는 특히 Paul Tillich의 여러 저작을 보라.
Comm. Ps. 143:2. Pitkin, 139. 칼빈에게서 환란과 회의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좋은 논의로 Pitkin, 138-41을, 섭리가 우리에게 감취어져 있고 불가해한 이유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연약성 때 문이라는 좋은 지적에 대해서 Pitkin, 156을 보라. Comm. Eph. 3:12. Institutes 3. 2. 24. Shepherd, 27: "...... even the most assured faith is afflicted with anxiety and unbelief." Cf. Institutes 3. 2. 23-24. 또한 Comm. John 20:3도 보라.
Beeke, "Does Assurance Belong to the Essence of Faith," 55. Comm. John 13:9. Shepherd, 27. Shepherd, 38. 이는 로마서 8:9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언급하면서 하는 말이다: "...... sin no longer lords it over him: yet sin is not absent from him." Shepherd, 28: "Doubt in believers never overturns assurance." Dowey, 198. Comm. II Tim. 2:19. Comm. Ps. 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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