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례전으로서 성찬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평택대학교 최윤배 교수
1. 서론
몇 년 전 우리나라의 일부 장로교회에 내에서는 그 동안 약 500년 동안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에서 중요한 전통으로 유지해왔던 제도로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은 입교 후에 성찬에 참여하도록 되어 있는데, 유아세례를 받고 입교를 아직 하지 않은 사람이나 세례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성찬을 허용하는 발언을 하여 어려움을 당한 목회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이 같이 성례전, 특히 성찬을 경시하는 현상을 볼 때, 필자는 시대적 상황에서 온 문제라기보다는 성찬에 대한 신학적 인식의 부족으로 빚어진 문제로 판단되어, 본고에서 칼빈의 성례전 중에서 성찬에 집중하여 신학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물론 칼빈의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작품과 성례전문제로 중요한 논쟁을 벌였던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와 같은 종교개혁 진영, 특히 츠빙글리와 루터파의 베스트팔(Westphal) 사이의 논쟁들이 담긴 문서도 직접 살펴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겠지만, 우리는 본고에서 칼빈의 사상이 무르익었을 때 집필된 『기독교 강요』(1559) 최종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방법상으로, 역사신학적 방법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주로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이 논문을 진행시키고자 한다. 우리는 칼빈의 성례전에 대한 정의, 목적, 특징을 먼저 다루고, 성찬을 집중적으로 취급한 뒤에 결론에 이르고자 한다.
1.1. ‘성례’의 어의(語義)와 정의
칼빈은 ‘성례’라는 단어의 역사적(歷史的) 변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성례’에 해당되는 라틴어 ‘사크라멘툼’(sacramentum)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바(엡1:9; 엡3:2-3; 골1:26-27; 딤전3:16), ‘비밀 또는 신비’의 뜻을 지닌 헬라어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으로부터 번역된 단어인데, 고대교부들은 ‘비밀’이란 말을 쓸 경우, 위대한 일을 격하시키는 듯해서 이 말을 피하려고, 신성한 일에 관계된 ‘비밀’을 ‘성례’로 번역했다. 라틴 사람들이 ‘성례’(sacraments)라고 부르는 것을 헬라 사람들은 신비(mystries)라고 불렀는데, 이 두 말의 뜻은 동일하다. 성례라는 말은 숭고하고 영적인 것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표현했던 표징들(signs)에도 사용되었다. 또한 칼빈은 라틴 문인들이 ‘사크라멘트’에 부여한 뜻과 고대교부들이 여기에 부여한 뜻이 다르다고 말한다. “고대교부들이 ‘사크라멘툼’이란 말을 표징에 적용했을 때, 라틴 문인들이 사용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어 거룩한 표징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더 깊이 연구해보면, 고대교부들은 이 말을 현재와 같은 뜻으로 옮긴 것은 ‘믿음’이란 말을 사용할 때 나타난 것과 동일한 유비(喩比)를 따른 것이다. 믿음은 약속을 지키는 성실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들은 그것을 사람이 진리에 대하여 지니는 확신이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와 같이 ‘사크라멘툼’은 군인이 자기의 사령관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행동이었는데, 고대교부들은 사령관이 군인들을 입대시키는 행동으로 만들었다. 즉, 주께서는 ‘사크라멘타’(sacramenta)에 의해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신다.(고후16:16; 겔37:27)”
칼빈은 성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례는 우리의 신앙의 약함을 지탱시켜주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선의(善意)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印)치시는 외적 표징(sign)이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주님과 그의 천사들의 면전과 사람들 앞에서 주님에 대한 우리의 경건을 인증(認證)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르게, 더 간단하게 정의하면, 우리는 성례를 주님에 대한 우리의 경건의 상호 인정과 더불어 외적 표시에 의해 확증된 우리를 향한 신적 은혜의 증거라고 부를 수가 있다.”
1.2. 성례의 특징들
칼빈이 정의한 성례의 뜻을 참고하면서, 칼빈이 주장한 성례의 몇 가지 특징들을 살펴보자. 첫째, 칼빈이 이해한 성례에는 ‘하나님의 적응’(accomodatio Dei) 사상이 나타난다. “성례의 수단을 통해서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무지와 우둔함에 대비하시고, 그 다음에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하신다. … 우리의 믿음은 작고, 연약하기 때문에, 만약 믿음이 각종 수단들이 사용되어 사방에서 괴어 주고, 지탱되지 않으면, 믿음은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 여기서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그의 무한한 자비로 자신을 우리의 능력에 조절하시고(temper), 주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인도하시고, 영적 축복들의 거울을 육체를 가진 우리에게 제공하시기 위해서 이 지상적인 요소들을 통해서까지 자신을 낮추신다.(condescend) 왜냐하면, 피조물로서 우리는 항상 땅 위에 기어 다니고, 육신에 집착하며, 영적인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심지어 이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성례도 육신에 속한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 온다. 교사가 어린 학생의 손을 잡아 인도하듯이, 성례도 우리의 우둔한 능력에 알맞도록 가르치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우둔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성례를 통하여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에 대한 자신의 선하신 뜻과 사랑을 말씀에 의한 것 보다 더 명백하게 확인하신다.”
둘째,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선포에 기초하기 때문에, 말씀은 표징을 설명해야 하며, 성례의 말씀이 성례를 선행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의 선포 없는 성례를 주장한 로마 가톨릭교회에 반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논적들이 보통 ‘성례는 말씀과 외적 표징으로 구성된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씀을 의미도 없이 믿음도 없이 성례의 요소를 성별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마술적 주문처럼 단순한 소음으로 속삭이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말씀이 선포될 때, 말씀은 가시적인 표징이 뜻하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교황의 독재 하에서 행해진 일은 이 신비들에 대한 무서운 모독행위였다. 그들은 사제가 축성문(祝聖文)을 중얼거리는 동안 신자들은 아무 뜻을 몰라도 멍하니 보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강조한 성례의 말씀을 인용한다. “성례에 사용되는 물질에 말씀을 첨가하라. 그러면 성물(聖物)이 되리라.”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사도들도, 비교적 순결했던 교회도 성례의 말씀을 주장하여, 성례의 표징과 성례의 교훈과 말씀이 분리시키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여러분은 성례가 믿음을 일으키는 설교말씀(말씀선포)을 얼마나 요구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칼빈은 성례전의 서두에서 성례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다른 또 하나의 도움”이며, 복음 선포와 관련되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 간주하면서도, 성례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셋째, 칼빈은 성례를 인(印)치심 또는 인장(印章; σϕραγίδα; seals)으로 간주한다. 인치심으로서 성례문제를 중심으로 칼빈은 재세례파와 논쟁했다. “반대자들은 이 비유를 우리가 만들어 냈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분명히 할례를 ‘인(印)’이라고(롬4:11) 부르기 때문이다. 거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칭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그 믿음의 언약에 날인(捺印)하는 인으로 삼기 위해서였다고 명백하게 주장한다.” “정부문서나 그 밖의 공문서에 찍는 인장을 아무것도 쓰지 않는 종이에 찍었을 경우, 그 날인은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이므로 인장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러나 문서에 찍으면 반드시 거기에 쓰인 내용을 확인한다.” “성례는 가장 분명한 약속을 한다. 이 점에서 성례가 말씀보다 더 나은 것은 그것이 약속을 우리 앞에 사생화(寫生畫)를 그리듯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넷째, 칼빈은 성례를 언약의 표징, ‘보이는 말씀’(visibile verbum), ‘믿음의 기둥’, ‘거울’ 등으로 비유한다. “주께서 자신의 약속을 ‘언약’(창6:18; 창9:9; 창17:2) 이라고 부르시며, 성례를 언약의 ‘증거’(tokens)라고 부르신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의 눈앞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성례는 ‘우리의 믿음의 기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건물이 기초 위에 서 있지만, 기둥으로 괴어야만 확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삼고 그 위에 서 있지만, 성례를 첨가할 때는 기둥으로 받친 것 같이 더욱 튼튼하게 서 있게 된다. 또 성례를 거울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우리가 그 거울 속에서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믿음은 성령의 고유한 사역일지라도,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는 사실과, 믿음이 성령의 고유한 사역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인정하지 못하는 자들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만약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면, 믿음을 일으키고, 유지하며, 완성하는 힘과 능력을 가진 성령은 무용지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을 강화시키고, 증진시키는 일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그의 내적 조명으로 우리의 마음을 성례가 제공하는 강화 작용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며, 바로 이 때문에 믿음이 증진되고, 강화된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성례의 효과는 성령에 의해서 일어난다.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킨다고 해서 성례에 어떤 비밀한 힘이 영구히 내재하여 그 자체만으로 믿음을 증진시키거나 강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interior ille magister)이신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 성령의 힘이 아니면, 마음속에 침투하고, 감정을 움직이며, 우리의 영혼을 열어서 성례가 들어오게 할 수 없다. 성령이 없으면, 시각장애인의 눈에 비치는 태양의 빛이나 청각장애인의 귀에 울리는 음성과 같이 성례는 아무 성과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성령과 성례를 구별하여,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을 남긴다. 이 임무는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내용이 없고 빈약한 것이 되지만, 성령이 그 속에서 역사하고, 힘을 나타내실 때에는 위대한 효력을 발휘한다.” “우리 귀에 들리는 말씀과 눈에 보이는 성례가 헛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시며, 완고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당연히 순종해야할 주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준비시키신다. 끝으로 성령께서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에 전달하신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례가 우리에 대한 하늘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우리의 눈앞에 제시할 때, 그것들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굳게 서며, 더욱 강하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에 그 확인을 새김으로써 효력이 나타나게 하실 때이다.” 또한 칼빈은 말씀과 성례와 성령이 상호 밀접한 관계 속에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한 가지만(성령의 역사) 말하는데 비해 우리는 세 가지를 인정한다. 첫째, 주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가르치시며, 지시하신다. 둘째, 말씀을 성례로 확인하신다. 끝으로,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오게 하신다.”
일곱째, 성례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도구)이다. 칼빈은 피조물이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될 수 없다는 주장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피조물 자체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주장에도 반대하여, 피조물은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에 내려오며, 그 피조물들에 많은 능력을 주기 때문에 그만큼 능력이 감소된다고 항의한다. 우리는 피조물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물의 주요, 심판자이시며, 따라서 그 분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수단과 도구(means and instruments)를 사용하셔서 만물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적인 은혜를 나타내시기 위해서 친히 제정하신 도구들(instruments)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일 사이를 구별하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례의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성례를 마술처럼 간주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이 사람들은 성례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효력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는데, 그들과는 성례에 일종의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칼빈은 성례를 구원의 선행조건으로 간주하지는 않지만, 성례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상호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믿음과 관계없이 받아들인 성례는 교회를 가장 확실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약속과의 관련이 없이는 성례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약속은 믿는 자에게 은혜를 제시하는 동시에 불신자에게는 진노가 있을 것을 경고한다. … 마치 성례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처럼 성례에 참가해야만 구원의 보장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
여덟째, 성례와 성례의 본체(matter)는 상호 구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례에서 본체와 표징(sign)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서 상호 분리시켜서는 안 되지만, 상호 구별은 해야 한다. 칼빈은 특별히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이 문제를 설명한다. “이 점을 바르게 이해할 때 어거스틴이 자주 말한 것과 같이 성례와 성례의 본체와의 구별이 생긴다. 이 구별의 의미는 진상(truth)과 외형(figure)이 성례전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두 가지가 긴밀하게 결합되어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결합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본체와 표징을 구별하여, 한쪽에 속한 것을 다른 쪽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은 무엇을 성례의 본체로 이해하는가? “모든 성례의 본체(matter) 또는 (만약 당신이 더 좋게 말한다면) 실체(substance)는 그리스도라고 나는 주장한다. 성례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견고성을 지니며, 그를 떠나서 성례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 우리가 성례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배양, 강화, 증진시키며, 그를 더욱 완전히 소유하고, 그의 풍부한 은혜를 즐기게 되는 것과 정비례하여 성례가 우리들 사이에서 효과를 나타낸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는 성례가 제시하는 것을 참된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실체가 없는 표징이 아니라, 본체와 표징을 함께 가지기 위해서 거기에 포함된 말씀을 믿음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 성례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나눠가짐으로써 우리는 유익을 얻으며 따라서 그만큼 성례에서 유익을 얻는다.” 칼빈은 성례에서 표징과 실체 사이를 구별하지 못함으로써 파생되는 두 가지 큰 오류를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지적한다. “문자를 따라 그리고 표징을 본체인양 받는 것이 노예적인 연약함의 특색인 것 같이 표징에 무익한 해석을 붙이는 것은 바른 길을 떠난 오류의 특색이다.” 표징의 의미와 가치를 지나치게 무시하는 것이 오류이듯이, 표징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참여케 하는 믿음과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도 오류이다. 동일한 성례에 참여하면서도 믿음과 성령의 역사가 없는 자에게는 성례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한다. 동일한 성례를 통해서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이 주어지지만, 어떤 사람에는 죽음이 주어진다. “우리는 오늘 눈에 보이는 음식을 받지만 성례와 성례의 힘은 서로 다르다. … 주의 떡 조각이 유다에게 독이 된 것은 그가 악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선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례에서 표징과 실체를 구별하여 각각에 정당한 가치와 위치를 부여하기를 촉구한다. “성례가 모든 사람에게 무분별하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자기 백성에게만 특히 주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오며, 성례가 우리 사이에서 자리를 얻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 표징은 그 창시자이신 분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증명하는 자체의 효력을 가졌다. … 성례에 대한 이 교리가 가르쳐질 때 성례의 위엄이 높이 칭찬을 받고 그 효과가 분명하게 알려지며, 그 가치가 풍성하게 선포된다. 또 이 모든 일에서 최선을 다하여 성례에 돌리지 않을 것을 돌리거나 성례에 속한 것을 빼앗는 일이 없게 된다. 동시에 칭의의 원인과 성령의 능력이 그릇이나 수레 안에 있듯이 물질 속에 들어 있다고 하는 저 그릇된 교리가 제거되고, 어떤 사람들이 간과하는 저 최고의 능력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점이 또 하나 있다. 즉, 목사가 설명하며, 외적인 행동으로 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성취하시며 또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을 보잘것없는 인생에게 넘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직책, 즉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제시하며 그의 안에서 하늘 은혜의 보고를 제시하는 직책을 가졌다는 것을 확정된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성례는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아홉째, 칼빈은 교회의 정규적이며, 영구적인 성례를 세례와 성찬에 국한시키면서도, 넓은 의미에서 성경에 나타난 일시적인 성례에 대해서도 말한다. “성례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그 성격을 논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의 신실성을 사람이 더욱 확실히 믿도록 만드시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모든 표징을 포함한다. 어떤 때에는 자연물로 표징을 삼으시고, 어떤 때에는 기적으로 나타내신다.”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되는 성례의 표징으로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영생의 보증으로서 생명나무(창2:9; 창3:22), 노와와 그 후손들에게 주어진 무지개(창9:13-16) 등이 있고, 두 번째 경우에 해당되는 성례의 표징으로서 아브라함이 바라본 연기가 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창15:17), 기드온에게 승리의 약속으로 주어진 양털(삿6:37-40), 히스기야에게 뒤로 10도 물러간 일영표 사건(왕하20:9-11; 사38:8) 등이다.
열 번째, 구약의 성례와 신약의 성례는 하나님의 경륜과 형식상으로 서로 다르지만, 본질과 내용상으로는 동일하다. “하나님의 부성적인 자비와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증거하는 점에서는 양쪽이 동일하다. 그러나 우리의 성례는 더 분명하고, 더 빛나는 증거를 한다. 양쪽이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지만, 우리의 것은 더욱 풍부하고 완전하게 나타내 준다.” 칼빈에 의하면, 구약의 할례가 유대인들에게 허락된 성례이기에, 신약에서 세례로 대치되어, 폐지되었을지라도, 할례는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성례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구약의 할례도 그리스도를 약속했고, 그리스도를 가르쳤으며, 구약의 할례 속에서도 장차 오실 그리스도가 임재하셨기 때문이다. “주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시는 그 경륜(dispensation)에 따라 각 시대에 맞도록 다양하였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는 할례를 명하셨다.(창17:10) 후에 모세의 율법에서 결례(레11장~15장)와 희생과 다른 의식들(레1장~10장)이 첨가되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유대인들의 성례였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것들이 폐지되고,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가지 성례가 제정되어 현재 기독교회가 사용하고 있다.(마28:19; 마26:26-28)” “세례는 우리가 깨끗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증하며, 성찬은 우리가 구속을 얻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2. 칼빈의 성찬론
2.1. 성찬의 신비에 대한 올바른 태도
칼빈은 성찬문제를 논의할 때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에 대해서 말했다. 칼빈은 성찬의 신비와 중요성 때문에, 자신의 지적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했다. “나는 이 문제를 논할 때마다 모든 것을 말하려고 애쓴 후에도 이 문제의 중요성에 비해서 말한 것이 아직도 적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지성은 나의 혀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지성조차 문제의 위대성에 정복당하고 압도된다. 그러므로 이 신비 앞에서는 오직 경탄할 수밖에 없으며, 지성도 생각을 할 수가 없고, 혀도 표현할 수가 없다. 비록 그럴지라도 나는 어떻게든지 나의 견해를 요약하겠다. 그것은 바른 견해라고 믿으며, 경건한 사람들의 찬성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찬의 신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경탄할 것을 원했다. “주님의 살과 피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바울이 너무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설명하는 것보다 경탄하는 편을 택했는데, 그런 참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없는 미친 짓이라고 하겠다.” 칼빈은 성찬의 신비를 이해하기보다는 경험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 일이 어떻게 생기느냐고 묻는다면, 이것은 너무도 고상한 비밀이어서 나의 지성으로 이해하거나 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조금도 망설임 없이 고백할 것이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나는 이 비밀을 이해하기 보다는 경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진리를 아무 이의(異議) 없이 받아들여 그 진리에서 안식을 얻으려 한다. 그는 그의 살은 나의 영혼의 양식이며, 그의 피는 영혼의 음료라고 선언하신다.(요6:58이하) 나는 나의 영혼을 그에게 드려 그런 양식을 받아먹게 한다. 거룩한 만찬에서 그는 떡과 포도주가 상징하는 그의 몸과 피를 받아먹으며 마시라고 나에게 명령하신다. 나는 참으로 그가 친히 주시며 또 내가 받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2.2. 성찬의 표징(signum), 실체(substantia), 효과(effectum)에 대한 올바른 이해
칼빈은 성찬의 표징에 대한 두 가지 극단적 이해를 경계한다. 그 중에 하나는 표징 자체를 지나치게 경시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표징 자체를 과도할 정도로 찬양하는 경우이다. 전자에는 주로 츠빙글리가 해당되고, 후자에는 주로 로마 가톨릭교회가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표징을 경시함으로써 신비와 거기에 붙어 있다고 할 수 있는 그 표징을 서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 표징을 과도하게 찬양함으로써 신비 자체를 모호하게 만드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표징은 실체를 지시하는 도구이며, 효과를 일으키는 성령의 도구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표징들은 떡과 포도주인데, 이것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받는 보이지 않는 양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 즉,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과 같이 영혼은 그리스도에게서 양식을 받는다.”
칼빈은 성찬의 표징(상징, 의미, 표시)과 실체와 효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성찬의 거룩한 신비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하나는 물질적인 표징들인데,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표징들은 우리의 약한 능력에 따라 우리에게 불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영적 진리인데, 이 영적 진리는 상징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나타난다. 이 진리의 성격을 잘 아는 말로 설명하고자 할 때, 나는 대개 세 가지를 지적한다. 의미/표시(signfication), 의미에 의존하는 실체(matter), 의미와 실체로부터 나오는 힘(power) 또는 효과(effect)이다. 의미는 소위 표징 안에 함축되어 있는 약속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나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체(matter) 또는 본체(substance)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구속, 칭의, 성화, 영생 등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밖의 모든 은혜들을 효과로 이해한다.” “나는 물론 떡을 떼는 것이 상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본체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 다음에도 우리는 상징을 보여줌으로써 본체도 보인다고 바른 추론을 한다. … 경건한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은, 주께서 정하신 상징을 볼 때마다 참으로 거기에 상징된 본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 손에 그의 몸의 상징을 쥐어 주시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그 몸에 참여한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보이는 표징은 보이지 않는 것을 주신다는 확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몸의 상징을 받았을 때, 그 몸 자체도 받았다는 것을 똑같이 확신해야 한다.”
2.3. 성찬의 기능과 목적
칼빈에 의하면,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를 받아, 영생과 복된 삶과 즐거운 삶을 느끼며, 누리게 된다. 여기서 칼빈은 루터가 사용한 ‘즐거운 교환’ 사상을 사용한다. “경건한 영혼들은 이 성례에서 큰 확신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 거기서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 분의 것은 모두 우리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증거를 얻는다. … 이것은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인애로 말미암은 놀라운 교환(mirifica communicatio)이다.” “성찬의 신비에서는 떡과 포도주라는 상징들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우리에게 제시된다고 나는 말한다. 즉 참으로 우리에게 의를 얻어 주시려고 모든 순종을 완수하신 그리스도의 그 몸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며, 둘째는 그의 본체에 참여하게 된 우리가 그의 모든 은혜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능력도 느끼게 하시려는 것이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찬에서 떡을 통해서 참된 영적 양식인 그리스도의 살이 제공되고, 잔을 통해서 참된 영적 음료인 그리스도의 피가 제공된다. “이 성례에서 더 이상의 생각이 없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 그 가장 중요한 기능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며(요6:55), 그것을 먹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6:54) 선언하신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 성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시면서 그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다.(요6:48, 50)”
2.4. 선택된 신자들이 믿음과 성령을 통해서 참여하는 성찬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과 그의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를 받는다. … 그의 몸을 우리에게 주셔서 먹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에게 참가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칼빈은 믿음이 있는 신자들만이 성찬에 참여를 허락한다. 그 이유는 불신자들은 예전적(禮典的)으로 또는 의식적(儀式的)으로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을지라도,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복음 6:56절에서 그의 몸을 예전적으로 먹을분만 아니라, 실제로 먹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신다. “그 뜻은 곧 그리스도께서 먹는 사람 안에 거하시게 하기 위해서 먹는 사람도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내 안에 거하지 않고, 나도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내 몸을 먹거나 내 피를 마신다고 말하지도 말고 생각지도 말라는 말이 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듯이, 선택된 자들만이 성찬에서 그 은혜에 참여할 수가 있다. “어거스틴은 ‘성례는 선택된 사람들에게서만 그 상징하는 결과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물론 그들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떡에 의해서 상징된다는 것을 감히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악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된다.”
칼빈은 특별히 믿음으로 먹는다는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논의한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시며, 이 떡에서 신자들은 영생을 위한 영양을 얻는다는 것은 신앙이 전연 없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참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치된 의견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으며 피를 마신다는 것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께서 저 고귀한 강화(講話)에서 자기의 살을 먹으라고 우리들에게 권고하신 말씀(요6:25이하)은 더 명확하고 더 숭고한 무엇을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에게서 받는 생명을 단순한 지식으로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에게 참여하는 것을 ‘먹는다’ 또 ‘마신다’는 말로 표현하셨다. 몸에 영양을 주려면 떡을 보는 것보다 먹어야 하는 것 같이 영혼도 그리스도의 힘으로 영적 생명을 얻으려면 그에게 참으로 그리고 깊이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 그들에게는 먹는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뿐이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살은 믿음에 의해 우리의 살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의 살을 먹으며, 이렇게 먹는 것은 믿음의 결과라고 말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라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먹음이 곧 믿음이요, 나에게는 먹음이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말로는 사소한 차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 믿음에 의해서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믿음의 은사를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고, 성령은 선택된 자에게 주어지시는 영이시기 때문에, 성찬에서 성령의 역사는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살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양식이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 일같이 생각되지만, 우리는 성령의 은밀한 능력이 우리의 지각을 멀리 초월한다는 것과 성령의 광대하심을 우리의 척도로 재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를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즉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성령께서 참으로 결합하신다는 것을 우리의 믿음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무익하고 허무한 표징을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약속하신 것을 성령이 효과적으로 실현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또 그 영적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찬이 의미하는 실재를 제시하시며 보여 주신다. 비록 신자들만이 그 실재를 받아 유익을 얻지만, 그들이 이 크고 너그러운 은혜를 진정한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는다.”
칼빈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신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몸과 영과 영혼이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연결의 줄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이 줄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와 하나가 된다. 그리스도의 영은 수로와 같아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성질과 소유는 그 수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참여하는 일을 말할 때, 그 힘을 전적으로 성령에 관련시킨다. 한 구절이 여러 구절을 넉넉히 대표할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그의 영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한다.(롬8:9) 그러나 사도는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일, 즉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가하는 일을 배제하지 않고, 오직 성령만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완전히 소유하며 우리 안에 모시게 하신다고 가르친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고 그리스도에 붙어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참된 믿음인데도 그들은 거기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그리스도의 물질적 임재를 조작하고, 그런 임재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이런 교묘한 궤변으로 인하여 떡이 하나님으로 생각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참으로, 실제적으로, 영적으로 참여한다. “그들은 떡 밑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삼키지 않는다면, 성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되는 것은 성령의 무한한 능력으로 되는 일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중대한 해를 가하게 된다.” “그들은 우리가 먹은 방법에만 주의한다고 함으로써. 영적으로 먹는데(spiritual eating) 대한 우리의 주장이 모두 참으로 또 실제로 먹는 것(true and real eating)과는 반대된다고 거짓되게 떠든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넣어둠으로써 육적(carnal) 방법으로 먹고, 성령의 비밀한 능력이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의 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인 방법으로 먹는다.”
“성찬의 신비에 있는 그리스도의 살 자체는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똑같이 영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로 해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없으며, 그것은 맛을 모르는 사람이 포도주를 맛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추론한다. 만일 생명과 힘이 없는 그리스도의 몸을 불신자에게 준다면, 당연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부당하게 쪼개는 것이다.” “제공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서로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에게 이 영적 양식을 제공하며, 이 영적 음료를 주신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먹고, 어떤 사람들은 거만하게 거절한다. 거절을 당한다고 해서 그 양식과 음료가 본성을 잃어버릴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살이 비록 맛은 없지만, 살이라는 비교에 그들의 견해는 지지를 받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믿음의 미각이 없이 그리스도의 살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인한다. (어거스틴과 함께) 바꿔 말하면, 사람은 믿음의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만큼 성찬에 얻어갈 뿐이다. 이같이 성찬은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들은 외형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더라도 빈손으로 돌아간다.”
“온 세계가 변할 수 없는 성찬의 완전성은 이것이다. 곧,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신자들에게서와 같이 무가치한 사람들에게도 참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비가 굳은 바위 위에 떨어지더라도 돌에 빈틈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만 흘러내리는 것과 같이 악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 완고한 마음으로 물리쳐 은혜가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믿음이 없어도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씨가 불 속에서도 싹이 틀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합당치 못한 말이다.”
2.5. 잘못된 성찬개념: 화체설, 공재설, 상징설 또는 기념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영적 실체는 결코 물질적인 요소들과 그 자체와 동일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것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영적 실체는 물질적인 것들과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주장은 로마교회의 교리의 화체설이나 루터의 공재설도 아니며, 또한 쯔빙글리의 상징설과도 다르다. 성찬의 요소들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관계에 관한 칼빈주의의 개념의 여가적 선례를 찾아보면 부처의 교리에 가장 근접함을 알 수 있는데, 적어도 1530년부터 1535년경까지 채택된 형식에 그러함을 발견할 수 있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transsubstantiation)과 종교개혁자 루터의 공재설(consubstantiation)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몸의 공간적 또는 육체적 임재, 즉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遍在性) 사상을 비판한다. “먼저 우리는 성찬에 그리스도가 임재하시는 데 대해서 로마 교황청의 재주꾼들이 조작한 임재를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에 임재해 있어서 손으로 만지고 이로 씹으며 삼킬 수 있다고 한다.” 칼빈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재림 시까지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제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거부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인간의 몸에 공통된 일반적인 특색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으며, 이미 하늘에 받아들인바 되어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 돌아오실 때까지(행3:21) 하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끌어다가 썩을 요소 밑에 둔다거나 그 몸이 어디든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연 합당치 못한 행위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저 가공적인 화체설(transsubstantiation)이 생겼고, 그들은 지금 다른 신조보다 이 사상을 위해서 더욱 맹렬하게 싸운다. 이 공간적 임재를 처음으로 조작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의 본질과 혼합함으로써 생겨나는 여러 가지 불합리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떡이 몸으로 변한다는 허구로 도망할 수밖에 없었다. 떡이 재료가 되어 몸이 생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형상 밑에 숨기 위해서 떡의 본질을 없애신다는 것이다.” 칼빈은 세례나 성찬에서 신비한 영적인 ‘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성격을 문제 삼는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라는 지상적이고도 물질적인 것 자체가 그 본질을 완전히 상실하는 변화를 주장한다.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에 있어서 지상의 표징이 하늘의 것과 부합하지 않으면 성례의 본질은 말살된다. 따라서 만일 참된 떡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몸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신비의 진리는 우리에게서 소멸된다. 성찬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약속, 즉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하신 약속(요6:51)의 볼 수 있는 증거에 불과하므로, 보이는 떡은 저 영적인 떡을 나타내는 매개(intermediary)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들의 오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싸여 사람의 입으로 위(胃)로 옮겨진다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공상을 하게 된 데에는 원인이 있었는데, 즉, 그들 사이에는 성별(聖別, consecration)은 요술의 주문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떡이 성물이 된다는 원칙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이것은 마치 세례의 물은 그 자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말씀이 첨가될 때에 즉시 우리를 위해 이전(以前)과 다른 것으로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비슷한 다른 성물의 예를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광야의 반석에서 솟아난 물은(출17:6) 성찬의 포도주가 우리에게 표시하는 것과 같은 것을 조상들에게 표시하는 표이며 표징이었다. 이것은 바울이 그들은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고전10:4) 그리고 그곳은 짐을 나르는 짐승들과 가축도 물을 마시는 곳이었다. 이 예를 통해서 지상적인 요소들을 영적으로 사용할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그 요소들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는 그 요소들이 약속을 확인하는 인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자주 반복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방법으로 우리를 자신에게까지 들어 올리려고 계획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오라고 부르기는 하면서도 그 그리스도가 떡 밑에 숨어 보이시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완고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칼빈이 비판하는 루터의 공재설을 살펴보자. 만일 루터주의자들의 말이 “진상은 그 표징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근거로 이 신비에서 떡이 제시될 때, 몸도 함께 제시되는 것이라는 뜻이라면, 나는 강하게 반대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떡 속에 둠으로써 몸의 본성과 반대되는 편재성(ubiquity)이 몸에 있다고 하며 또 ‘떡 밑에’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몸이 떡 밑에 숨어 있다는 뜻으로 말함으로, 우리는 숨겨져 있는 이 궤변을 잠깐 폭로할 필요가 있다. …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보이지 않고 무한하며 떡 밑에 숨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내려오셔야만 그 몸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내려오셔서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 올리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가능한 색깔로 숨기지만,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공간적 임재(the local presence of Christ)를 고집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는가? 그들은 공간적인 결합과 접촉이나 조잡한 형태의 포괄관계가 아니면, 살과 피에 참여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눈과 마음을 가진 채 하늘로 들려 올라가서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 속에서 그를 찾는다면, 상징들이 완전하신 그에게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떡이라는 상징 하에 그의 몸을 먹게 되며, 포도주라는 상징 하에 그의 피를 따로 마시게 되어 결국에는 그를 완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비록 그의 살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몸으로 승천하셨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 즉 아버지의 권능과 존귀와 영광으로 다스리신다. 이 나라는 공간 가운데 위치가 한정되거나 경계로 제한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어디서든지 뜻대로 권능을 행사하시며, 아무런 방해도 받으시지 않는다. … 요약하면,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백성을 먹이시며, 자신의 영의 힘으로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나눠주신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이런 모양으로 성찬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이다.”
화체설과 공재설에 대한 칼빈의 핵심적인 비판은 화체설과 공재설은 승천이후에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간성을 훼손하는데 있다. “우리는 성찬에서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지만,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거나 떡 속에 포함시키거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국한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하게 될 경우 분명히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하게 된다.) 끝으로 그의 키를 낮게 하거나 여러 조각을 만들어 동시에 여러 곳에 분배하거나 그가 하늘과 땅에 가득한 무한한 부피를 가진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런 일들은 분명히 진정한 인성(人性)에 배치된다. 우리가 결코 빼앗겨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제한이 있다. ①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해서는 안 된다. - 그리스도를 끌어내려 이 세상의 썩을 요소들 밑에 두거나 지상의 피조물에 고착시킨다면 그리스도의 하늘 영광을 감하게 된다. ② 인성에 합당하지 않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에 돌려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무한하다고 하든지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신다고 한다면, 이 둘째 제한을 어기게 된다. 이런 불합리한 생각만 제거한다면, 성찬의 거룩한 상징들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표시되는 바같이 주의 몸과 피를 참으로 그리고 실체적으로 참여하는 일(the true and substantial partaking)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든지 기꺼이 받아들인다. 즉, 신자들은 상상력이나 이해력만으로 받지 않고, 다름 아닌 영생을 위한 영양으로서 본체를 즐긴다는 뜻을 표현해야 한다. 사탄의 무서운 마술이 여러 사람의 정신에 착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세상이 이 견해를 싫어하거나 편견 때문에 변호의 길이 막힐 까닭이 없다. 확실히 우리가 가르치는 것은 모든 점에서 성경과 일치한다. 불합리한 점, 막연한 점, 모호한 점이 전혀 없다. 그것은 진정한 경건과 건전한 교훈을 부인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거기에는 거슬리게 하는 것이 전혀 없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성찬제정의 말씀(마26:26-28; 막14:23-24; 눅22:19-20; 고전11:24-25) 자체를 통해서 화체설과 공재설의 잘못을 지적한다. “화체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라는 대명사는 떡의 형상(form)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성별(聖別)은 말씀의 내용 전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이는 대명사가 가리킬 수 있는 본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까지 말에 대해서 양심적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을 몸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들의 이 허구는 떡이었던 것이 지금은 몸이라고 하는 진정한 의미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손으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을 자기의 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는 떡을 집으셨다. 그러므로 그 떡을 아직 보이고 계신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따라서 떡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그 형상에 옮기는 것처럼 불합리한 것이 없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칼빈은 일부 루터주의자들은 문자주의에 입각하여 성찬제정의 말씀을 해석한다고 비판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다’(est)라는 말을 ‘본질이 변화된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여 더욱 무리하고 난폭하게 곡해된 주해로 도망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씀에 대한 존경심이 있는 체하는 것은 거짓이다. ‘이다’를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하는 것은 어떤 민족이나 언어에서도 들은 일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에 떡을 남겨 두고 떡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생각이 매우 다르다. 그들 중에 온건한 편인 사람들은 ‘이것이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문자대로 고수하지만, 후에 그 엄격한 태도를 버리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함께, 떡 안에, 그리고 떡 밑에(with the bread, in the bread, and under the bread) 있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 … 더 대담한 사람들은, 올바르게 말한다면, 떡은 몸이라고 서슴지 않고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문자론자임을 확실하게 증면한다. 그렇다면 떡이 그리스도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아니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그렇지 않다고 할 것이다.”
칼빈은 “떡은 성례적인 의미에서 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일을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으면서,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석하는데, 그 이유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찬제정의 말씀을 굳이 알레고리와 비유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전유(傳諭)를 통해 비유적으로 해석할 것을 촉구한다. “상징은 그 의미하는 것과 본질이 다르지만, 후자는 영적이며, 하늘의 것이요, 전자는 물질적이며 지상적이므로, 상징은 성별에 의해서 대표하게 된 그 본체를 상징하는 단순한 빈 표일 뿐만 아니라, 그 본체를 나타낸다. 그러면 그 이름을 본체에 붙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사물들은 그것들이 항상 명확하고 틀림없이 의미하는 사물들의 이름을 차용하며 이것들에 실재성을 부여 한다. 그들이 심히 유사하며 근사하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쉽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살과 피의 본질로 우리의 영혼을 살리시려고 외형적인 상징과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신다고 말한다. … 살은 살이고 영은 영이어야 한다. 만물은 각각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상태와 조건대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육의 조건은 일정한 장소에 있어서 크기와 형태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으로 그리스도께서 살을 취하셨으며, 어거스틴의 말하는 것과 같이 그 살에 부패하지 않는 성질과 영광이 주어졌고, 그 살에서 자연과 진리가 제거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늘에서는 보이지만, 땅에서는 무수한 떡 조각 밑에 보이지 않게 숨어 있다고 추론하는가?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성찬에서 주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신체적으로 먹는다는(physical eating) 개념을 연역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선입견에 끌려서 성경 전체가 큰 소리로 반대하는 이 궤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성찬과 관계하여 그리스도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루터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칼빈은 승천 이후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계신다고 주장한다. “부활하신 때부터 그리스도의 몸이 유한하며, 마지막 날까지 하늘에 보관되어 머무신다는 것은(행3:21, 참조)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치신다. 나는 그들이 이 점을 증명하는 구절들을 거만하게 회피하는 것도 안다. 그리스도께서 떠나가시겠다(요14:12, 28; 요16:7), 세상을 떠나시겠다(요16:28)고 말씀하실 때마다 그들은 이 떠나신다는 것은 죽을 성질의 상태가 변한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논법대로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말과 같이) 자기의 부재중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성령을 다시 보내시지 않을 것이다. 부재중이라고 하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뒤를 잇지 않으시며, 그리스도께서도 죽을 생명의 상태를 취하려고 하늘 영광에서 다시 내려오시지 않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령의 강림과 그리스도의 승천은 반대 현상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을 보내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육으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다.”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승천 이후의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거부하고, 승천 이후 그리스도의 임재는 육체적 임재가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통한 임재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신체의 임재에 대한 것이다. 그의 위엄과 섭리와 형언할 수 없으며, 불가시적인 은혜에 관해서는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실행하셨기 때문이다.(마28:20) … 그리스도의 위엄의 임재에 관해서 항상 우리는 그를 모시고 있으나, 육의 임재(the presence of the flesh)에 관해서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옳다. 교회는 육의 임재에 따라서는 그를 수일 동안 모셨을 뿐이며, 지금은 믿음으로 그를 가졌으며,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어거스틴의 위의 말을 칼빈은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한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역시 간단히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위엄과 섭리와 형언할 수 없는 은혜의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 사이에 계신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혜 안에 그의 몸과 살에 참여하는 놀라운 일을 포함시킨다. 다만, 우리는 이 참여는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지 물질적 요소 밑에 포함되어 있는 위조(僞造)된 몸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참으로 우리 주께서는 사람이 만지며, 볼 수 있는 살과 뼈를 가지셨다고 증거하셨다.(눅24:39; 요20:27)”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한 위격이며, 둘이 한 그리스도이다.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 때문에 어디든지 계시며,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하늘에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영적으로 함께 계시기 위해서 자기의 신체적 임재를 철회하셨다는 것이다. 이 구절에는 그가 살의 본질과 성령의 권능을 구별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된다. 어거스틴은 자주 같은 종류의 표현을 사용한다. ‘믿음과 건전한 교훈의 표준에 따라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신체적으로 계실 것이다. 그는 영적으로 그들에게 와서 계실 것이며, 세상에 있는 교회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시리라고 하셨다.(마28:20; 요17:12)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가 신체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구원하기 시작하신 제자들에게 하신 것이다. 영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신체적으로는 그들을 떠나려고 하셨다. ‘신체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눈에 보이게’ 임재하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궤변이다. 왜냐하면 그는 몸과 신적 권능을 대립시키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함께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의 은혜를 하늘로부터 우리 위에 부어 주신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에게서 나실 때, 우리의 참 육신을 취하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보속하실 때, 우리의 육신으로 수난을 받으신 것과 같이 부활하실 때도 동일한 참 육신을 받으셨고, 그 육신을 하늘로 가지고 가셨다는 것을 성경 전체가 어느 교리보다도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가? … 몸이 공간 안에 있다는 것, 자체의 부피와 형태를 가졌다는 것이 몸의 진정한 본성이다. 자, 이제 사람의 마음과 그리스도를 떡에 고착시키는 이 미련한 허구는 사라져라!” 칼빈에 의하면, 루터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성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중적으로 만든다. “그들이 이렇게 지껄이는 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중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는, 그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서는 본래 그대로 보이지만, 성찬에서는 특별한 섭리에 의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몸이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동시에 각처에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께서 성찬 때에 떡 밑에 숨어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필요성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편재성(ubiquity)이라는 해괴한 생각을 도입했다. 그러나 성경의 확고하고 분명한 증거들에 의해서 우리가 증명한 것 같이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적인 몸의 한도에 따라 국한되어 있었다. 또 하늘로 올라가심으로써 모든 곳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한 곳으로 옮기실 때에는 전에 계시던 곳을 떠나신다는 것을 밝혔다.”
“어떤 사람들은 투쟁열에 취해서 그리스도 안에는 양성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것과 분리할 수 없는 그의 육신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들의 생각은 마치 양성의 결합으로 하나님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어떤 중간적 존재가 합성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참으로 유티케스가 그렇게 가르쳤고, 세르베투스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는 양성이 있지만, 그 양성은 각각 그 고유의 특징을 본래대로 유지하며, 아무 손상을 받음이 없다고 분명히 추론한다.”
“신성이 하늘을 떠나서 신체라는 감옥에 숨었다는 뜻이 아니라, 신성은 비록 만물에 충만했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취해서 육체로 거하셨다는 뜻이다.(골2:9) 즉, 본래대로 그리고 어떤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거하셨다는 뜻이다. 스콜라학파의 상투적인 구별을 언급하는 것을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즉, 그리스도 전체는 어디든지 계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전체는 어디에나 있지 않다고 한 것이다. 이 발언의 힘을 스콜라학자들 자신이 정직하게 고려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라는 어리석은 공상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전체는 어디든지 계시지만, 우리의 중보자는 그의 자신의 백성과 함께 계시고, 성찬에서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전체는 그러한 방법으로 계시지만, 그의 전체성 속에서 계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했듯이 그의 육신 안에서 그는 그의 심판시 나타나실 때까지 하늘에 계속해서 계시기 때문이다.” “성찬에서 살이 떡 속에 있지 않으면 살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큰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성령께서 비밀히 역사하실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 올리신다면 우리는 그의 임재를 똑같이 즐길 수 있으리란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임재의 방법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두고, 우리는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로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의 천상적인 위엄에 합당하지 않거나 그의 인성의 실재성과 양립할 수 없는 불합리한 생각들만을 물리친다. 그런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필연적으로 충돌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천국 영광에 들어 가셔서(눅24:26) 모든 지상적인 상태를 초월하셨다고 가르치며, 동시에 진정한 인성에 있어서 고유한 일들이 그의 인성에도 있다고 엄밀하게 밝힌다.”
2.6. 성찬의 올바른 집례와 참여
교황 우르반 4세(Urban IV)는 그의 교서에서(Transitus, 1264) 그리스도의 성체(聖體)와 성혈(聖血)의 대축일을 결정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찬에 사용된 물질 자체를 숭배했는데, 칼빈은 이런 행위는 물질숭배 행위라고 비판한다. “경건한 사람이 성찬에서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하늘로 높이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약한 마음을 도와 영적 신비들의 높은 곳을 볼 수 있도록 높이 올라가게 하는 것이 성찬이 하는 일이라면, 외형적인 표징에서 그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바른 길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들이 떡 앞에 엎드려 거기서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것을 미신적인 경배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우리 앞에 놓인 상징들에 우리의 겸비한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을 니케아 회의가 금지한 것은 확실히 이 폐해를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옛날에는 성별하기 전에 회중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마음을 높이 들어 올리라(sursum corda)고 권고하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칼빈은 성찬식과 관련된 미신적인 의식(儀式)들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징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린다고 하면서도 성찬제정의 정신과는 전연 이질적인 의식들을 만들어 냈다. 이 경배들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만약 성찬에서 그렇게 한다면, 나는 표징에서 머물지 않고, 하늘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 합당한 경배라고 말한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성찬을 ‘사랑의 유대’(the bond of love)라고 부른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한 편으로는 순결하고 거룩한 생활을, 다른 편으로는 사랑과 평화와 화목을 권하고, 고취하는 가장 유력한 방법으로 성찬을 제정하셨다.”
칼빈은 말씀이 없으면 성찬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성찬에서 받는 은혜에는 모두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거나 고백을 연습하거나 의무에 대한 열의를 일으키는 모든 일을 위해서는 설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교황 독재 하에서 일어나는 것같이 성찬을 말씀 없는 행사로 만드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짓이다. … 침묵에는 남용과 과오가 따른다.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고, 신비한 뜻을 설명함으로써 받는 사람이 유익되게 받게 된다면, 이것이 진정한 성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칼빈은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는지 살펴보기를 촉구하면서도, 교황제도 하에서 처럼 가혹한 기준이나 완전주의를 비판한다. “믿음의 흔적도 없이 사랑하겠다는 열의도 없이 돼지같이 성찬에 뛰어드는 이 같은 사람들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바울은 각기 자기 자신을 살핀 다음에,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셔야 한다고 명령한다.(고전11:28) … 믿음과 사랑에 관한 의무들을 우리가 지금 완전히 행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목표로 정성껏 노력하며 향상시켜 일단 출발한 우리의 믿음이 매일 자라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타당성은, 첫째로 만사를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는 믿음에 있으며, 둘째로는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리기에는 충분한 사랑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없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불완전한 것을 키우시며 더 좋은 것으로 만드신다. … 성찬을 헛되고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 정도의 완전성을 성찬을 받는 사람에게서 요구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일 뿐만 아니라, 너무나도 운둔한 짓이다. 이는 성찬은 완전한 사람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 약한 사람들을 위해서 곧 약한 사람들을 각성시키며, 고무하고, 자극하며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훈련시키기 위해, 아니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성찬의 합당한 집례와 관련하여, 칼빈은 성찬의 외형적인 집행은 교회의 자유에 맡긴다. 가령, 신자들이 떡을 손에 쥘 것인가 신자들끼리 나눌 것인가? 무교병 또는 유교병으로 할 것인가? 흰 포도주 또는 붉은 포도주로 할 것인가? 칼빈에 의하면,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시행했던 복잡한 의식들을 일소하고, 성찬식을 교회 앞에 자주(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집행한다면 합당한 집행이다. 먼저 공중기도, 다음에 설교가 있고, 떡과 포도주를 식탁에 놓은 후에, 성찬제정에 대한 목사의 말씀이 반복되어야 한다. 다음에 목사는 성찬에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낭독하는 동시에 주께서 금지하신 사람들을 성찬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 후에 목사는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도록 합당치 못한 우리를 주의 자비로 받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여기서 시편을 노래하든지 무엇을 읽든지 해야 한다. 목사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적당한 순서로 신자들이 가장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성찬이 끝난 후에 진지한 믿음과 신앙고백 그리고 사랑과 그리스도인다운 행위에 대한 권고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이 순서들이 끝나면 교회는 조용하게 산회해야 한다. 칼빈은 그 당시 1년 1차례 시행되던 성찬 시행관습을 통렬히 비난했다. “일 년에 한 번 성찬에 참여하라고 하는 관습은 누가 처음으로 시작했든 간에 분명히 마귀가 만든 것이다. … 주의 식탁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서 진설해서 성찬이 선언하는 약속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먹이게 하는 것이 옳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로 성찬에서 불경한 평신도들에게는 떡만 제공하고, 잔은 제공하지 않았다. 그들은 피의 상징은 삭발하고, 기름부음받은 소수의 사람들의 특별소유이기 때문에, 불경한 평신도의 몫이 아니며, 이 거룩한 잔을 모든 사람들에게 준다면, 불상사가 생길 위험성이 있으며, 또한 성찬에서 떡 하나만으로도 떡과 잔을 넉넉히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한 가지만 행하는 반쪽 성찬은 성찬제정 말씀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성찬의 절반을 하나님의 백성의 대부분에게서 도둑질하는 또는 강탈하는 다른 규정이 같은 곳에서 생겨났다. …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는 모든 사람이 마시라고 했다.(마26:27) 사람들은 감히 새로운 반대되는 법으로 그 명령을 폐지하고 모든 사람이 마시면 안 된다고 명령한다. … 주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려고 떡과 따로 잔을 제정하셔서 자신은 우리의 양식과 동시에 음료로도 완전무결하시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절반을 빼앗긴다면, 그가 주시는 영양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사도들이 ‘희생을 드리는 자’로서 잔을 받았다는 이유로 평신도들에게 잔을 허용하지 않는 주장에 대해, 칼빈은 다섯 가지 측면에서 반박하는데, 그 중에서 그는 교회사적으로 두 가지가 사용된 성찬이 올바른 성찬이었다고 증명해 나간다. 그는 크리소스톰의 말을 인용하여, 교회에서 성찬 참여에서 성직자들과 평신도 사이에 차별이 없다고 주장한다. “구약 율법에서와 같이 사제가 일부분을 먹고 회중이 다른 일부분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한 몸과 한 잔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성찬에 속한 것은 모두 사제와 신도에게 공평하게 나눠진다.”
3. 결론
우리나라의 일부 장로교회는 물론 기독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성찬의 중요성이 약화된 것은 성찬에 대한 신학적 인식의 부족으로 진단하면서 필자는 본고를 시작했다. 칼빈에 의하면, ‘성례’(sacramentum)라는 단어의 의미가 역사적(歷史的)으로 다양하게 변천했다. 그러나 칼빈은 “성례는 우리의 신앙의 약함을 지탱시켜주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신의 선의(善意)의 약속을 우리의 양심에 인(印)치시는 외적 표징(sign)이다. 그리고 우리 편에서는 우리가 주님과 그의 천사들의 면전과 사람들 앞에서 주님에 대한 우리의 경건을 인증(認證)하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르게, 더 간단하게 정의하면, 우리는 성례를 주님에 대한 우리의 경건의 상호 인정과 더불어 외적 표시에 의해 확증된 우리를 향한 신적 은혜의 증거라고 부를 수가 있다.” 라고 분명하게 정의한다.
칼빈이 이해한 성경에 근거를 두 성례전은 세례와 성찬으로서, 그 특징은 매우 다양하다. 칼빈이 이해한 성례전의 특징은 하나님의 적응, 말씀의 우선성, 인치심, 언약의 표징, ‘보이는 말씀’, 신앙, 성령의 효과 등 다양하지만, 특별히 성례전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칼빈은 우리가 성찬에 대해 가져야할 태도는 성찬의 신비성과 중요성 때문에, 성찬에서 지성적인 한계를 넘어, 신앙으로 고백하며,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찬에서 세 가지 요소, 즉 성찬의 실체(substantia)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실체를 지시하는 표징(signum, 빵과 포도주), 실체와 표징을 결합하여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은혜를 현재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으로서 효과(effectum)를 말했다.
성찬의 기능과 목적과 관련하여, 성찬은 믿음을 강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이다.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를 받아, 영생과 복된 삶과 즐거운 삶을 느끼며, 누리게 된다. 성찬의 효과는 신앙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선택된 자들에게만 일어난다. 칼빈은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화체설과 루터의 공재설과 츠빙글리의 상질설 또는 기념설을 비판했다. 칼빈에 의하면, 화체설은 물질을(빵과 포도주) 본체(예수 그리스도)와 혼동한데서 생긴 것이며, 공재설은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서 인성과 신성을 명확하게 구별 짓지 못함으로써, 편재설과 육체적 먹음이라는 오류를 범했고, 츠빙글리는 성찬의 은혜와 효과를 경시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성찬의 본체, 표징, 효과를 밀접하게 성령론적으로 결합시켜서 성찬 에서 그리스도 자신과 그리스도의 은혜가 실제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임재한다고 주장하여, 소위 ‘영적 임재설’,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론적 임재설’을 주장한 셈이 된다.
성찬의 집례와 참여를 중심으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성찬을 겨우 1년에 1회 정도베푼 문제와 포도주를 평신도들에게 허락하지 않는 문제를 칼빈은 비판했다. 칼빈은 성찬이 1주일에 1회 정도 베풀어지기를 원했다. 성찬의 집례의식과 절차 문제는 교회의 자유에 맡기고, 성찬 참여자에 대한 엄격주의를 경계하고, 성찬 참여에서 신앙의 법칙과 사랑의 법칙을 다같이 적용하여, 믿음의 법칙만을 강조하는 엄격주의와 사랑의 법칙만을 강조하는 관용주의 내지 자유방종주의를 피했다.
칼빈의 성례론, 특히 성찬론에 대한 긍정적인 또는 부정적인 다양한 평가들을 우리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가 살펴본 칼빈의 성찬론은 성찬에 사용되는 물질 자체나 표징과 상징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물질의 우상화에 이를 수 있는 객관주의적 성례전주의자들과, 성찬 속에 약속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하나님의 은혜의 실재성을 무시하는 일부 주관주의적 영성주의자들(spiritualists) 사이에 서서(via media), 성찬에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과, 성령으로 주어지는 신앙을 통한 성찬의 효과와 신자의 신앙결단이라는 양쪽 요소가 통전적(holistic)으로 잘 결합되어 나타나는 균형 잡힌 성례전 내지 성찬에 대한 이해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마르틴 부처의 성찬론과 마찬가지로 칼빈의 성례론, 특히 성찬론은 대부분의 기독교회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성경적인 동시에 교회일치적인 이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1. 박경수, “성만찬론에 나타난 칼뱅의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 한국칼빈학회(편). 『칼빈연구』제3집.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pp. 207-229.
2. 이양호. 『칼빈: 생애와 사상』.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97.
3. de Greef, W. The Writings of John Calvin: An Introductory Guide, 황대우․김미정 역, 『칼빈의 생애와 저서들』. 서울 : SFC출판부, 2006.
4. Niesel, W. Die Theologie Calvins, München: Chr. Kaiser Verlag, 1957.
5. Wendel, François. Calvin: sources et évolution de sa pensée religieus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50.
6. Calvin, John. 『기독교 강요』제IV권(CO, 라틴어, 영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한글판 참조)
출처 :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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