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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 강요 지상강좌 (1-30)

by 【고동엽】 2021. 11. 6.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 강요 지상강좌(1-30)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


'제1강좌' 생명의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기독교 강요 1.1.1-1.5.15)




1. 오직 하나님의 “손”으로 이끄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안다.
“우리가 가진 거의 모든 지혜, 말하자면 진실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1.1.1).
초판 이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교리사에 있어서 가장 명구(名句)라고 할 만한 본 구절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부성적인 사랑(fatherly love)을 베푸셔서 천지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시고 운행하시는 섭리를 포함한다.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류의 타락 이후 처음 사랑을 버리지 아니하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여 베푸신 긍휼과 자비를 아는 지식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자신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오셨으므로 우리 모습의 연약함으로 그 분의 사랑을 거두지 아니하신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그 뜻 가운데서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매사에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랑에 있어서도 알파요 오메가가 되신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함으로부터 비롯된다. 타락 전의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을 순수하게 보존함으로써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그 위의 것들을 다스리라는 문화 명령을 받은 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류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는 존재로 전락(顚落)하여서 생각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 모두 허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류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원을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전가하심으로써 인류에게 다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하셨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렇듯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은 동시에 작용해야 온당(穩當)하다. 원래의 형상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는 타락한 형상의 비참함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참함을 깨닫지 않고는 구원으로 회복된 형상의 복됨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세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스스로 이를 수 있는가? 칼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의 원래의 형상, 타락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으로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이렇듯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타락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 그리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이 세 가지 지식은 동시에 작용해야 온당(穩當)하다. 원래의 형상의 고귀함을 알지 못하고는 타락한 형상의 비참함을 알 수 없다. 이러한 비참함을 깨닫지 않고는 구원으로 회복된 형상의 복됨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 세 가지의 지식을 동시에 묵상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에 스스로 이를 수 있는가? 칼빈은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창조, 타락, 구속에 있어서의 원래의 형상, 타락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으로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만 주어진다.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낮아져서 그 분을 묵상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한 명확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1.1.2).
주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로 바라보게 하는 “유일한 표준”이 되신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없다. 현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철학자들은 인성의 고귀함이나 심오함을 내세워 스스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앎으로 그 분으로부터 지식을 얻을 때이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의 “손”으로 이끄심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설파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지식에 있어서조차 진리이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전반부).




2. 하나님을 앎으로 그 분을 영화롭게 함이 우리에게 즐거움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함께 역사하므로 참 경건(true godliness, pietas vera)이 없는 곳에 참 지식(true knowledge, notitia vera)도 없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의 은혜를 깨달아 그 분의 사랑을 감사하고 흠모하는 것이다. 참 경건은 하나님의 계시를 위로부터 내려 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과 교제하며 교통하고 위로는 예배를 올려 드리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하나님께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리는 성도의 삶이 곧 경건이다(1.2.2).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으로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sense of divinity, sensus divinitatis)”과 “종교의 씨앗(seed of religion, semen religionis)”과 “양심(conscience, conscientia)”을 각각의 영혼에 부여 받았다. 이러한 은혜는 타락한 인류에게도 계속되었으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하나님 형상의 “불씨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불씨들조차 물을 부어서 꺼뜨리는 삶을 살고 종국에는 영원한 멸망에 든다. 그러나 거듭나서 “성령의 고삐”에 매인 사람들은 이러한 불씨들에 기름을 부어서 활활 타게 만들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마주 보는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간다(3.1.1; 4.1.1, 4).
그러므로 순서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이나 참 지식을 얻음에 있어서는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먼저이다. 먼저 그 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음으로써 아는 것이 경건한 지식의 출발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 분께서 계신 것뿐만 아니라 무엇이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에게 적합하고 마땅한지를 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분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 지를 안다”(1.2.1).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된다. 우리에게 유익하다 함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구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거룩한 지식은 곧 우리에게 유익함이 된다. 우리 인생의 제일 큰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또한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데 있음이 자명할진대(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우리의 지식도 참으로 그러하다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스스로 아시되 우리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바대로 안다. 모든 피조물은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되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얻었다. 피조물은 알지 못한다. 사람은 알려짐으로써 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아신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 안다고 하는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주의자들이나 로크와 같은 경험주의자들이 되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흄과 같은 회의주의자들과 칸트와 같은 불가지론자들이 되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알되, 하나님께서 아신 바 되시므로, 곧 알려짐으로써 안다.
피조물의 본래적 특성은 하나님에의 의존성에 있다.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바, 하나님께서 아신 바대로 자신을 알게 된다. 그런데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는 달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주어짐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만한 지식이 있다. 우리에게는 피조성(被造性)과 하나님의 형상성(形象性)이 동시에 있다. 우리는 알되, 오직 알려짐으로써 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도록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Coram Deo) 내어 놓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서 자신을 내어 놓지 않으면 참 평강이 없어진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내어 놓아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을 알게 하자.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아신 바 된 그 지식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도록 하자. 오직 그 지식만이 절대적이며 유일한 참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호 6:3).
모든 피조물들은 “눈부신 하나님의 영광의 극장”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훈장”으로서, “거울”로서 하나님을 찬미한다(1.5.1, 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들 위에 인류를 “하나님의 권능과 선하심과 지혜의 표본”으로 지으셨다. 인류는 하나님 영광의 최고의 도구이다. 젖 먹는 어린 아이의 말 없는 웅변은 모든 피조물의 찬미를 압도한다(1.5.3).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화려한 미와 위대한 은사들로 그를 장식하셨다”(1.14.20). 그리하여서 영광의 극장의 최고 배우가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질에 대한 헛된 사색을 멈추고 그 분이 하신 일을 목도하며 찬미로 나아가자! “그 분을 찾기 위하여 꼼꼼히 따지기보다 그 분을 더욱 경배하도록 하자!”(1.5.9).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7, 후반).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2)


'제2강좌' 성경: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기독교 강요 1.6.1-1.7.5)




1.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사람의 공동체인 사회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지으셔서 자신의 눈부신 영광을 드러내는 극장으로 사용하신다(1.5.8). 존재하는 것들은 다 하나님의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같이 그 분의 영광을 자랑하는 ‘훈장(勳章)’이요(1.5.1), 그 분의 어떠하심을 비추는 ‘거울’이며(1.5.1), 그 분의 권능을 표현하는 ‘그림’과 같다(1.5.10).
그러나 타락한 인류는 일반적인 자연적인 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무능해지고 부패해져서 하나님의 계심과 어떠하심을 앎에 있어서 두더지보다 더 눈이 멀어있기 때문이다(2.2.18).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 거듭나지 않고서야 그 누구도 하나님을 알되 그 분께 감사하고, 그 분을 영화롭게 하며, 그 분께 예배드리는 참 지식에 이를 수 없다(롬 1:21-2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으니 이러한 구원 지식을 자신의 말씀으로 예비하셔서 베푸신다.
기독교 강요의 삼위일체를 다룬 장에서 칼빈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이심, 곧 신격(deitas, deity)을 논함에 있어서 성자께서 영원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이심과(1.13.7) 성령께서 그 말씀의 작용이심에 특히 주목한다(1.13.15). 이러한 말씀의 기록물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원저자(auctor originalis, original author)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인간 저자들을 감동시켜 기록하게 하셨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성령의 기관(器官)들(organa, organs)’로서 성령의 구술에 따라 성령이 증거하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리하여서 동일한 성령의 역사(役事)로 감화된 하나님의 백성이 동일한 말씀을 받아들여서, 즉 수납(受納)하여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고 머리이신 그 분께로 날마다 자라가게 된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에게 ‘말씀의 빛’을 더하셔서 그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 하셨다(1.6.1).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이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영원히 퇴색하지 않는 확실한 신앙 곧 모든 이성적인 주견(主見)들을 넘어서는 신앙을 부여하셨다”(1.6.2).
그러므로 성경의 제자가 되지 않고는 구원의 교리에 대한 어떤 맛도 볼 수가 없다. 성경은 율법과 복음을 포함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인간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맡긴 것”이었다. 복음은 이 율법의 끝이자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 이러한 교리에 대한 참된 이해의 출발은 오직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임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은 순종으로부터 태어난다(Omnis recta cognitio Dei ab obedientia nascitur)”(1.6.2).
순종은 성령의 감화에 따라 말씀에 복종함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성령의 통치에 있다. 성령이 임재하면 성도는 다스림을 받는다. 그 다스림이 통치이며, 그 다스림의 장(場)이 하나님의 나라 혹은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통치(government)라는 말은 어원상 ‘항해(gubernatio)’에서 기원한다. 성도는 마치 배와 같아서 오직 성령의 키로만 움직인다. 오직 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불가항력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 은혜로 말씀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조명과 감화가 없는 곳에 말씀을 들음과 배움과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


첫째로, 성경은 ‘안경’과 같다(1.6.1). 성경은 혼란한 우리의 지식을 바로 잡아주고 하나님을 보게 하며 그 분의 진리를 읽게 한다. 여기서 안경이라 함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현미경과 같다. 현미경이 없을 때에는 아무도 세포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존재를 믿지도 않았다. 성경의 안경을 통해서 보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그 분께서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믿지도, 보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지 흐릿한 것을 더욱 맑게 보게 하는 그 이상의 작용을 한다. 성경의 안경을 쓰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영생을 믿고 확신에 거하는 것은 차치하고 그것이 있다는 자체도 인정하는데 이르지 못한다.
둘째로, 성경은 미로(迷路, labyrinthus, labyrinth)로부터 벗어 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실(絲)’과 같다(1.6.3).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므로(딤전 6:16) 그 분의 광채에 이르기 위해서는 성경의 길안내를 받아야 한다. 전속력으로 달리다가 매번 벽에 부딪혀 평생 미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어나가기 보다는 늦는 것 같지만 자신의 허리에 묶인 성경의 실을 감으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미로를 벗어나는 것이 참 생명의 지혜이다.
셋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이다(1.6.4). 성경에는 숭고한 경건의 비밀이 평범하고 겸손한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섭리를 베푸셔서 성령의 감화를 받은 자는 누구든지 성경을 통하셔서 자신의 진리를 배우게 하신다. 성경은 “신적인 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 그리하여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체의 지성을 능가하는 그 무엇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르친다(1.8.1).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그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부른 것들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으로 대체하여 읽을 수 있다.
“성경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성경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성경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성경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성경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성경 ‘여호와의 법’은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 19:7-10).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의 학교에서 즐거이 배우자, 힘써 배우자!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시 93:5).




2.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증거하심
권위(auctoritas, authority)는 저자(auctor, author)로부터 나온다. 성경의 권위는 그 저자가 하나님이심에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마치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듣는다. 성경의 권위는 교회의 승인이나 해석이 아니라 그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1.7.1).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 함은 교회가 말씀 위에 섰음을 뜻한다(엡 2:20). 교리가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이다. 교리가 바로서야 교회가 바로 선다. 교리가 넘어지면 교회는 넘어진다.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다르지 않다. 교리는 규범된 규범(rule ruled)이며 성경은 교리를 규범하는 규범(rule ruling)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절대 말씀보다 앞설 수 없다(1.7.2). 교회는 품속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어머니와 같다. 교회는 “우리가 복음을 믿는 믿음을 준비하도록 이끄는 안내”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교회가 스스로 복음을 한정하거나 창출할 수 없다. 성경 말씀은 계시의 기록으로서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지 교회의 승인이나 해석을 통해서 비로소 진리로서 공인되는 것이 아니다(1.7.3).
성경은 오직 성령의 내적이며 은밀한 증거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진리로서 확증된다. 성경에서 우리는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경의 최고의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것 안에서 인격으로 말씀하신다는 사실로부터 일반적으로 도출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께서 자신의 말씀의 합당한 증인이 되시는 것처럼 그 분의 말씀도 성령의 내적인 증거에 의해서 인쳐지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여 질 수 없기 때문이다”(1.7.4).
성경의 확실성(certitudo, certainty)은 오직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서 얻어진다. 성경은 인간의 사역으로써 기록되었지만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흘러 나왔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겸손하여져서 가르칠만하게 된” 독자만이 성경의 진리를 믿음으로 수납한다(1.7.5). 오직 성령으로 진리의 빛에 조명되고, 감화된 성도만이 기경된 옥토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진리는 스스로 존재한다. 그 진리가 이른 비와 늦은 비로서 내린다.
칼빈은 자신의 ‘갑작스런 회심(subita conversio, sudden conversion)’을 말하면서 그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심령에 말씀을 ‘가르치실만하게(docilis, teachable)’ 하셨다는 한 가지 표현만을 남긴다. 오직 성령의 은밀한 내적 역사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만이 하나님께서 가르치실만한 심령이 되어서 말씀을 배우고 그 배운 바 확신에 거하게 된다.
성령으로 수납된 말씀을 육체로 결론지을 수 없다. 철학적 논리나 체험적 통계로 말씀의 진위가 판단될 수 없다. 누가 힘을 다하여 애씀으로써 여호와의 도를 일점일획이라도 확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내적 확신(fiducia, assurance)을 갖게 될 때 우리에게 확실한 구원의 지식, 생명의 지식으로서 작용한다(1.8.13). 이것이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음을 우리는 충실하게 고백한다.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3)


'제3강좌' 말씀과 성령: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기독교강요 1.8.1-1.9.3)




1. 성경의 자증성(自證性)
하나님께서는 삼위로 계시므로 스스로 사랑이시며, 스스로 진리이시며, 스스로 계시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계시하시므로 길이 되신다. 또한 사랑의 진리이시므로 생명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를 위한(pro nobis)’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다(요 14:6).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으로서 “신적인 그 무엇을(divinum quiddam) 호흡하고 있다.” 워필드(B. B. Warfield)는 이를 설명하면서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함(딤후 3:16)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에 진리 자체를 불어넣어 주셨다는 사실까지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호흡으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셔서 사람을 생령으로 지으신 창조의 사역(창 2:7)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성경에는 신적인 그 무엇이 숨 쉬고 있기 때문에 단지 말의 기교를 넘어서는 ‘진리의 힘’이 있다. 그곳에는 ‘천국의 장엄한 비밀’이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문체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없이는 성경 말씀의 올바른 이해에 이를 수 없다.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믿음으로 수납된다. 이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고전 2:5).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바(롬 10:17), 그 들음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된다(고전 2:4).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니,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에 스며들며 우리 골수에 새겨진다(1.8.1). 성경은 특별한 섭리로 기록되었으며 특별한 섭리로 작용한다. 그리하여서 그것이 진리임을 스스로 증거한다.
“성경은 외부적인 버팀목들로 지지(支持)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지탱하며 서 있다”(1.8.1).
성경에는 천지를 지으시고, 지키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곳에는 지음을 받은 인간으로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가르침들이 가득 차 있다(1.8.2). 모든 성경의 교리는 본질상 비밀(mysterium)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비밀이시며, 성경은 그 분의 존재와 경륜의 계시를 전체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셔서 처음이자 나중이 되시듯이, 그 분의 말씀도 스스로 존재하시며(自存) 스스로 증거하신다(自證).
첫째로, 성경은 ‘고전성(古典性, vetustas, antiquity)’에 있어서 자증한다(1.8.3). 시간에 속한 것은 영원에 속한 것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무(無)로부터 세상을 지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시간 속에서(in tempore, in time)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cum tempore, with time)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시간조차도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시간 안에서 규정되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의 말씀의 기록인 성경도 그 기원이 시간 가운데 있지 아니하다.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은 시간 너머로부터 존재하시며 그렇게 계시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에 갇혀 있는 피조물에 의해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증거하신다.
둘째로, 성경은 그것을 기록한 인간 저자의 어떠함을 통하여서 자증한다. 모세의 경우에서 보듯이 성경의 기록자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적들을 전달하는데 머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들이 그것들을 체험한 바대로 기록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다. 그리고 그는 하늘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막대기로 치자 물이 솟았으며 기도를 하자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렸다(1.8.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감동시켜 성경의 기록자로 사용하심으로써 기록된 말씀이 스스로 진리임을 증거하게 하셨다(1.8.6).
셋째로, 성경의 저자들이 예언의 영을 받아서 이미 된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될 일도 기록하였음은 성경의 자증성을 확증한다(1.8.7-8). 사람은 이미 된 것으로만 증거를 삼으나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될 것으로도 증거를 삼으신다. 예컨대 하나님께서는 미래에 될 부활로 현재의 성도의 삶에 대한 증거를 삼으신다. 오직 성경은 자증하므로, 그곳에는 미래의 일이 현재의 일에 대한 보증으로 합당하게 기록된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9).
넷째로, 성경은 자체의 감화력으로 어떤 핍박 가운데서도 순수하게 보존되어 왔으며 땅 끝까지 확장되어 가고 있다는 측면에서 자증한다. 성경은 마치 가지를 치면 더 자라서 급기야는 손이 닿을 수 없을 만큼 성장하는 ‘종려나무’와 같다. 만약 성경이 절대적 진리로서 경건한 사람들의 ‘등불’이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겨와 같이 미풍에도 날리어 가고 말았을 것이다(1.8.12). 역사상 그토록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뿌린 것은 성경의 ‘내적 감화로 말미암아’ 확신에 이른 성도들이 그 진리의 ‘확실성’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됨은 사람의 권함이나 지혜로부터가 아니라 오직 스스로 말씀하시는 말씀의 증거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성경이 진리임을 확증함에는 이성적인 추론이 아니라 ‘마음의 경건과 평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말이 합당하다(1.8.13).
경건(pietas, godliness)은 하나님께 내리받은 대로 올려드림이다. 우리 몸의 신진대사가 원활할 때 건강하듯이 하나님께 받은 것을 마땅히 올려드릴 때 우리의 영혼이 복되다. 평강(pax, peace)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리에 우리는 우리 자리에 옳게 매김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성경의 자증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넘어서고자 함은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범했던 지적 교만의 죄를 짓는 것이다.




2. 그리스도, 말씀과 성령의 고리
우리가 받은 ‘진리의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에서 부어주시는 영으로써 오직 그 분께서 가르치시고 말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며 알게 하신다. 성령께서 ‘오직 들은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장래의 일을 알리신다(요 14:26; 15:13). 그러므로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경험을 한 후(고후 12:2)에도 여전히 자신이 들은 말씀에 착념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는 곧 그 분의 영이 모든 성도들에게 능력으로 역사함에 있다고 역설하였다(고후 13:3~4). 실로 성도가 받은 보혜사 성령은 말씀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롬 8:9).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은 새롭고 듣지 못한 계시들을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종류의 교리를 조작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이 받아들인 복음의 교리로부터 멀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에게 권한 바로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치는 데 있다”(1.9.1).
어느 시대이건 말씀을 통하지 않고 중보자 없이(im-mediator), 직접(immediately),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신비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최종적 계시로서 여기지도 않는다. 칼빈은 동시대 신비주의자들을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이 말씀이 없는 성령의 역사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이었다.
말씀을 떠나서 성령의 능력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허망하고 거짓된 것들에 매인다. 사도들이 전한 것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갈 1:6~9). 오직 성경의 모든 예언은 보혜사 성령을 받은 우리에게 더욱 확실하여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일점일획이라도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다(벧후 1:19~20).
“성령께서 성경의 저자(autor, author)시다. 그 분께서는 변화하실 수도 자신과 다르실 수도 없으시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는 성경에 한번 자신을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계심이 마땅하다”(1.9.2).
성령께서는 신적인 그 무엇을 호흡하셔서 우리에게 진리를 불어 넣어주신다.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는 영이다(롬 8:15~17).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마다 그 분과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히 2:11) 그 분을 앎으로 하나님을 아는 영생의 지식을 얻는다(요 17:3; 마 11:27).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이(사 59:21) 영원한 언약 가운데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로 묶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조명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을 수 없다. 성령이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ex ore ipsius Christi)” 말씀이기 때문이다(요 16:25, 주석).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것들을 심중에 듣게 하셨다.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부름을 받았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녀에게 있어서, 성경의 문자는 단지 문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소성시키며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시 19:7). 그리고 말씀으로 지혜를 깨달은 바대로 그들이 전하고 가르치는 ‘영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리에 서게 한다(고후 3:8).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말씀을 수납함으로써 성도는 ‘확실한 경건의 경험(certa experientia pietatis)’을 하게 된다(1.13.14).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러한 경험은 신비주의적인 체험과는 다르다. 이러한 경험은 성도에게 ‘교사(magistra)’가 된다(1.10.2). 그리하여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심을 확증하게끔 가르친다(고후 13:5). 오직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말씀께서 친히 말씀하심으로써 성도는 하나님의 음성(vox Dei)을 듣고 확신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어떠한 고리를 사용하셔서 자신 안에서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연결시키시기 때문이다”(1.9.3).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4)


'제4강좌' 삼위일체 하나님: 한 본질 안에 세 위격이 세 인격으로 계심(기독교강요 1.10.1-1.13.29)




1.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심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1.13.1). 하나님께서는 본질(ouvsia, essentia, essence)에 있어서 한 분이시다. 즉 한 실체(substantia, substance)시다. 하나님께서는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esse). 그런데 한 분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적 존재(subsistentia, subsistentia)로 존재하신다(subsistere). 하나님께서는 세 위격(u`postasij, hypostasis)과 세 인격(proswpon, persona, person)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위격에 있어서는 구별되시나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시다. 각각의 위격은 고유한 특성(proprietas, proprium, property)에 있어서 서로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각 위격은 하나님의 전 실체를 가진다. 그러므로 삼위께서는 실체에 있어서는 동일본질(o`moousia)이시다. 삼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하나님이 없는, 단지 공허하고 무가치한 하나님이라는 이름만이 우리 머릿속에 떠다닐 것이다”(1.13.2, 6).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는 아들을 아버지의 ‘위격의(thj u`postasewj)’ 형상이며 영광의 광채라고 말씀함으로써 성부와 성자가 위격에 있어서 구별됨을 분명히 드러냈다(1.13.2).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제2위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삼위일체로서 ‘더욱 친밀하게’ 알리셨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영원하신 말씀께서 성부와 함께 계신 성자로서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였다(요 1:1 주석).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믿음과 세례가 하나라고 하였다(엡 4:5). 그런데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표로서 거행되는 세례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삼위일체 진리를 확증하셨다(1.13.16).
한 분 하나님께서는 삼위로 계신다.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자를 ‘내 목자, 내 짝된 자’로 부르심을 기록하였다(슥 13:7).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그 분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요 5:32), ‘나를 보내신 이’라고(요 8:16) 부르셨음을 기록하였다. 성자께서는 자신께서 홀로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내신 분이 지금 증언하시는 분으로서 함께 계심을 말씀하셨다(요 8:16, 18). 태초에 아버지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셨음도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 존재가 구별됨을 확증한다(요 1:3; 히 11:3).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빛이 있으라(창 1:3)는 말씀 전에 말씀으로 계셨다(1.13.8). 아버지의 품 속에 계신 독생자께서는 영원히 그 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시는 분으로서 성육신하셨다(요 1:18; 17:5). 성부와 성자의 위격이 구별되듯이 성령의 위격도 구별된다. 주님께서는 자신께서 보내실 영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부와 성령이 구별됨을 지시하셨다(요 15:26). 그런데 그 영을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성령과 자신을 또한 구별 지으셨다(요 14:26). 그리하여서 그 영을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셨다(요 14:16). 이렇듯 한 분 안에 삼위가 구별되니 갑바도기아 교부 나지안주스 그레고리우스가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휩싸이지 않고는 한 분을 생각할 수 없고 곧바로 한 분으로 이끌림을 받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1.13.16).
하나님께서 한 분이심을 부인하면 삼신론자가 되며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심을 부인하면 단일신론자가 된다. 초대 교회의 아리우스와 마케도니우스는 각각 성자와 성령의 신격(qeothj, deitas, deity)을 부인하였다. 반면에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위격적 존재이심을 부인하고 양태설(樣態設)을 취하였다(1.13.4, 5).
위격에 있어서 성자께서는 아버지로부터 나셨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시간이나 지위에 있어서 전후나 고하가 없다. 다만 우리가 먼저는 성부를, 다음으로는 그 분의 지혜로서 성자를, 마지막으로는 그분의 능력으로서 성령을 생각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러한 순서(ordo)로 다룰 뿐이다(1.13.18).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2조 3항에서 규정하듯이,
“실로 아버지께서는 아무로부터도 아니시니 분명 나시지 아니하셨으며 나오시지도 아니하신다; 그러나 아들께서는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나셨다; 또한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각각의 위격은 본질에 관해서 하나님이시나 관계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불린다. 성자는 자신에 관해서 스스로 계시나, 아버지에 관해서 나셨다. 따라서 성자는 자신에 관해서 하나님이라고, 아버지에 관해서 아들이라고 불리신다. 또한, 아버지는 자신에 관해서 하나님이라고, 아들에 관해서 아버지라고 불리신다. 성령께서는 자신에 관해서 스스로 계신 하나님으로서, 성부와 성자에 관해서는 나오신(출래하신, 발출하신) 분으로서 불리신다(1.13.9).




2.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일하심
세 위격은 고유한 특성에 따라서 고유하게 역사하심으로 구별된다. 제 2위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나타나시기 전에 ‘영원 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나신 말씀’이셨다. 그 분께서는 ‘스스로 영원하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말씀(sermo)’이셨으며 성부께서 만물을 짓기 전에 가지신 ‘지혜(sapientia)’이셨다(잠 8:22~31).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중보자로 삼으셔서 천지를 창조하였다(창 1장). 그 분께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만물을 붙드신다(히 1:2~3). 구약의 선지자들은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후 될 일을 미리 예언하였다(벧전 1:10~11; 벧후 1:21). 칼빈은 아들의 하나님이심을 특히 그 분께서 말씀으로서 역사 가운데 말씀하신 분이심을 강조한다(1.13.7). 창조 중보자 그리스도는 그가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에 이미 구속 중보자로서 예언되셨다. 구약 시대 때 그 분께서는 ‘임마누엘(사 9:6)’로서,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5~6; 33:15~16)로서 선포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시대에 이미 ‘의가 흘러나오는 참다운 여호와’로 증거되셨다(1.13.9). 주님께서는 여호와의 사자의 모습으로 야곱에게, 모세에게,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에게 나타나셨는데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그 분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이미 그 당시에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이루어 가고 있었음을 합당하고 지혜롭게 지적했다(1.13.10).
신약 시대 사도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셨음을 증언하였다(딤전 3:16). 특히 이사야와 시편의 말씀들이 거듭해서 인용되었다. 요한은 이사야의 성전 환상을 성자의 영광으로 돌렸다(요 12:41). 사도 바울은 행위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예수께서 걸림돌이 되나 그 분을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서 선포한다(롬 9:32~33). 그 분께서 아버지와 동등하시나(요 5:18) 자기를 비어 종이 되셔서(빌 2:6~7) 구원을 이루셨다. 그 분께서 ‘허물을 도말하는 자’로서 예언되신 분이셨다(사 43:25).
칼빈은 성자의 위격적 존재를 다루면서 그 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심을 강조하였다. 한편 그 분의 사역의 특성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특히 그 분 자신께서 ‘구원 자체(ipse salus)’이심을 부각시킨다. ‘견고한 망대’로서(잠 18:10) 구원을 위하여 부를 이름(욜 2:32)이 예수 외에 다른 이름이 아님이 선포되었다(행 4:12). 칼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주시요 모든 은사의 조성자가 되심으로써 성도들은 그 분과 교통함으로써 자라가게 됨을 특히 성자의 위격을 다룸에 있어서 중요하게 여겼다(1.13.11~13).
한편 성령의 위격을 다룸에 있어서 칼빈은 그 분께서 창조와 섭리의 영이심을 먼저 지적한다. 성령께서 만물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시는 분이심이 설명된다. 그리고 성령께서 구원의 영이심을 강조한다. 성령께서는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을 지으셔서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은 구원의 전체 과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시는 사역을 감당하신다. 일체의 선이 다 성령으로부터 온다. 그 분께서는 모든 은사의 ‘원천(origo)’이시며 ‘조성자(autor)’이시다(고전 12:11).
성령의 위격적 특성은 그 분께서 ‘말씀하시는 분(qui loquitur)’이시라는 사실에서 확증된다(사 6:9; 행 28:25~2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6)
성도는 성령의 ‘입 기운’으로 말씀을 들음으로써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한 성령의 경험을 거부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역하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영을 부인함은 하나님 자신을 부인함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1.13.14~15).
아버지는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서 일하신다. 칼빈에게 있어서 존재적 혹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서로 지향하며 역동적으로 관련된다. 아버지는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않으시고, 아들은 나셨으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출래하신다, 발출하신다). 이러한 삼위의 위격적 존재는 삼위의 위격적 사역으로 전개된다.


“아버지께 일하심의 시작 그리고 모든 것들의 기초와 원천이, 아들께 지혜와 계획 그리고 일들을 행하심에 있어서의 경륜이, 성령께 행위의 능력과 작용이 돌려진다”(1.13.18)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은 건덕(建德)을 위하여 지혜롭게 가르쳐져야 한다(1.13.3, 29).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무리 고상한 지식이라도 마치 유모가 아이에게 “옹알이 하듯이(quodammodo balbutire)” 낮추어서 맞추어 주신다.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의 은혜 가운데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1.13.1). 그 분께서 원하시면 깨닫지 못할 자 없으며, 그 분께서 막으시면 알 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오직 스스로 계시며, 스스로 역사하시며, 스스로 알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할 일이다.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5)


'제5강좌' 피조물: 하나님의 영광의 눈부신 극장(기독교강요 1.14.1-22)




1. 창조주 하나님의 손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에 갇히지 아니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역사 속에 계시지만 그 너머에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공간이 아닌 곳에도 계신다. 시간을 다 더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원히 계심에 닿을 수 없고 공간을 다 모은다고 해서 하나님의 어디에나 계심을 채울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영이심은(요 4:24) 그 분께서 스스로 계심을 의미한다. 지어진 것은 모두 물(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니 영이시다(1.13.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하심(aeternitas)’과 ‘스스로 계심(auvtoousia)’과 ‘능력(virtus)’ 가운데 우리에게 ‘긍휼(misericordia)’과 ‘심판(iudicium)’과 ‘의(iustitia)’와 ‘거룩하심(sanctitas)’으로써 역사하신다(1.10.2).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해서 유일하며 진정한 증거가 되신다’(1.11.1). 가톨릭은 우상을 무식한 사람들의 책으로서 신앙 교육상 필요한 것으로 인정한다(1.11.5). 그러나 우상은 하나님을 거역하는바 그 분께서 지으신 것을 경배함으로써 그 분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단순히 우상만을 예배하든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든지 그곳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1.11.9).
형상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하거나 서로 다르지 않다(1.11.12).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그 분 자신에 주목하지 않고 그 분 자신이 만든 것을 섬긴다. 그리하여서 지으신 분을 망각하고 그 분께서 행하신 표적만을 좇는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공장(工場, idolorum fabrica)’과 같다.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1.11.8).
창조주 하나님을 진실하게 알지 못하고 그 분을 예배치 않으면서 단지 그 분께서 지으신 것들만 바라고 붙드는 것이 곧 우상숭배이다(1.12.1). 이사야 선지자는 형상으로 하나님을 비길 것으로 여기는 자들을 질책하면서,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깨닫지 못하였느냐”(사 40:21) 라고 반문하였다. 창조주께서는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지어진 것 자체가 아니시며 그것의 기(氣)나 정신(精神)으로 대체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심(euvdokia)에 따라서 만물을 지으셨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는 극장으로서, 그 분의 은총을 기념하는 훈장으로서, 그 분의 어떠하심을 비추는 거울로서, 그 분의 섭리를 그러내는 그림으로서 지어졌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과 함께 만물을 지으셨으므로 시간과 공간을 연장한다고 한들 그 분의 무한하심에 이를 수 없다. 만물이 존재함은 오직 하나님의 ‘뜻(voluntas)’에 의해서이다. 물론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다(1.14.1).
모든 피조물의 지어짐이 이러하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두고 평생을 묵상하여도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시선을 어디로 향하든 하나님께서 빚으신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지 않을 사람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의 모든 좋은 것을 지으신 후 사람을 창조하셔서 함께 안식에 들어가셨다. 이렇듯 창조의 순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paternus Dei amor, fatherly love of God)’을 여실히 계시한다. 천지를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복리(utilitas, 福利)’를 귀하게 여기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을 황량하고 공허한 땅에 두셨다면, 만약 빛이 있기 전에 아담을 지으셨다면, 그 분께서는 아담의 복리에 충분하게 주신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셨을 것이다. 실로 그 분께서는 사람의 필요를 위하여 해와 별들의 운행들을 주장하셨으며, 생물들로 땅과 물들과 공중을 채우셨고, 음식에 족하도록 과일들을 풍부하게 맺게 하셨다. 그리하여서 하나님께서는 미리 바라보고 부지런히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의 책임을 떠맡으셔서 우리를 향하여 자신의 놀라운 자비를 보이신다’(1.14.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에게 영광을 받기 위해서 자신의 ‘섭리(providentia)’와 ‘부성적인 배려(paterna sollicitudo)’ 가운데 먼저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예견하시고 예지하신대로 모든 것을 지으셨다. 이제 그 하나님의 창조의 ‘손(manus)’이 섭리하심으로 그 분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자녀들을 성실하게 보호하시며 가르치고 양육시키신다(1.14.22).




2.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과 부요함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늘과 땅을 무로부터(ex nihilo)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종류대로 생물들과 무생물들을 지으시고, 각각에 적합한 특성을 부여하시고, 그 특성에 맡는 기능을 맡기셔서 정한 곳에서 정한 일을 정한 법칙대로 행하게 하셨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은밀한 손에 의해서 배양되며 새 힘으로 공급받고 종이 멸절되지 않도록 보호받는다. 창조주께서는 마치 웅대하고 화려한 저택과 같이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식양에 따라서 마련된 장식들로 우주를 채우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유려한 아름다움과 그토록 위대하고 다양한 은사들로 사람을 장식하셔서 자신의 작품들 중에서 최고의 표본을(praeclarissimum specimen) 제시하셨다.’
“그러므로 이 가장 아름다운 극장에 드러나 표현된 하나님의 작품들을 즐기는 것을 부끄러워 말자!”(1.14.20).
하나님께서는 또한 자신의 ‘일꾼(minister)’으로서 천사를 창조하셨다. 창세기의 기사는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만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 2:1) 라는 말씀 가운데 천사의 창조도 6일 중에 이루어졌음이 천명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천사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마니는 선한 것들의 기원이 하나님이신 반면에 악한 것들은 사탄으로부터 지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타락한 천사는 처음부터 그렇게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하게 지으셨다. 그러므로, ‘죄는 본성으로부터가(ex natura) 아니라 본성의 부패로부터(ex naturae corruptione) 나온다’(1.14.3).
천사와 관련해서 우리는 건덕에 도움이 되는 교훈에 만족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께서 말씀하신 것을 자신의 백성이 받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일체의 ‘공허한 사색(vana spectulatio)’을 피하여야 한다.
‘신학자의 임무는 수다스럽게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들(vera), 확실한 것들(certa), 유익한 것들(utilia)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확증하게 하는데 있다’(1.14.4).
천사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경영자들이며 수행자들이다.’ 그들의 손이 우리를 붙들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며(시 91:11-12) 우리를 둘러 진 치고 건지신다(시 34:7). 그들의 섬김으로 광야의 인생길 가운데 이스라엘의 진이 보호되었다(출 14:19; 23:20). 천사들은 그리스도의 나심을 고지했으며(눅 1:26-38) 그 분의 나심을 찬양했다(눅 2:13-14). 천사들은 예수를 수종들고(마 4:11) 그 분의 기도에 힘을 더하였다(눅 22:43).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자신의 은혜를 베푸실 때 천사들을 일꾼으로 사용하신다(1.14.6).
천사들은 하나님의 일을 수종들며 동시에 그 분의 영광을 찬미하는 도구로 사용된다(1.14.5).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0-21).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히 1:14) 단순한 성질이나 영감이 아니라 ‘실체(substantia)’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의 손으로 율법을 주셨다(행 7:53; 갈 3:19). 천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며 그들의 머리로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수종든다(엡 5:23; 히 1:6). 주님께서는 마지막 날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실 것이다(마 25:31; 눅 9:26).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천사들의 머리(caput)되신다(1.14.9).
천사들은 ‘하나님의 손’으로서 사용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분께 붙들려 은혜 받게 돕는다. 결국 천사들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사역을 돕는 일꾼들로서 사용된다. 만군의 주께서 서 계시는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섬긴다(창 28:12; 요 1:51). 천사들의 직임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를 돕는데 있다(1.14.12).
타락한 천사인 마귀는 본래는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스스로 타락하여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요 8:44).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벧후 2:4) 심판하심은 그들이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이기 때문이다(유 6). 그러나 타락한 천사들도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된다. 심지어 타락한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때도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의 허용이 없고서야 되지 않는다(1.14.16-19).
사람과 천사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 가운데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sapientia), 권능(potentia), 의(iustitia), 인자(仁慈, bonitas)’가 빛나고 있다. 지어진 모든 것들 가운데서 우리는 지으신 분의 어떠하심을 ‘마치 거울들을 통해서(sicut in speculis)’ 보듯이 본다. 모든 만물이 이토록 수려하고 조화롭거늘 ‘그 예술가(artifex)의 위대하심’은 어떠하랴!
“실로 하나님의 권능으로부터 나오는 많은 기적들은 그 분의 선하심의 표들만큼이나 많고, 그 분의 지혜의 증거들만큼이나 많도다. 그 수는 사물들이 작든지 크든지, 그 사물들만큼이 되도다!”(1.14.21).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6)


'제6강좌' 사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격적 찬미의 도구(기독교강요 1.15.1-8)




1. 원(原)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originalis)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영혼(anima)과 육체(caro)로 지으셨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iustitia)와 지혜(sapientia)와 인자하심(bonitas)을 드러내는 가장 고상하고 놀라운 표본’이다. 사람의 육체는 ‘흙’이거나 ‘티끌이나 재’에 불과하다(창 2:7; 18: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생기를 불어 넣어 주심으로써 생령이 되게 하셔서(창 1:27) 불멸하는 영혼이 거주하는 ‘집’이 되게 하셨다(욥 4:19).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의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상(非常)한 섭리를 높이 찬양함이 마땅하다(1.15.1).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본성의 완전한 탁월함(integra naturae humanae praestantia)’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의 모든 부분에서 빛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의 고유한 좌소(座所, propria sedes)’는 영혼에 있다. 영혼에는 지식(혹은 진리)과 의와 거룩함이라는 하나님의 형상의 정수가 새겨져 있다(골 3:10; 엡 4:24). 하나님의 형상이 이러함은 영원하신 말씀 안에 계셨던 ‘생명’이 곧 ‘사람들의 빛’(요 1:4)이었다는 사실로부터 확증된다(1.15.4).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의 영혼에 새겨진 ‘신적인 그 무엇(divinum aliquid)’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은 그 분의 본질(ouvsia, essentia)이 유출(流出)되거나 분여(分與)되어서 주입(注入)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신성을 담지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므로 칼빈의 동시대인이었던 오시안더(Andrea Osiander)가 영혼과 육체가 동등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다고 믿고 그것을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 유비되는 것으로 여긴 것은 분명한 오류이다(1.14.2).
사람은 ‘본체의 유입(substantiae influxus)’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되,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본질(consubstantiales, o`moousioi)’로 만들지는 않는다. 구원의 마지막인 영화(榮化, glorificatio) 상태에 이른 하나님의 백성도 여전히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할 뿐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신성 자체가 아닐 뿐만 아니라 신화(神化, deificatio)의 과정에 있는 그 무엇도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에 따라 사람에게 맞추셔서 새겨주신 고유한 영적인 형상이다. 그것은 사람의 사람됨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영화는 사람이 사람인채로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의 본질의 전이(轉移, tradux substantiae Dei)’라고 보는 범신론적 사고는 기독교 진리와 부합될 수 없다(1.15.5).
하나님의 형상을 신성과 혼동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개념 외에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개념을 별도로 다룬다. 그러나 성경의 용례는 형상(~l,c,, eivkwn, imago)과 모양(tWmd., o`moiosij, similitudo)을 구별하지 않는다. 창세기 1장 26절에서 사용된 형상과 모양은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병행하는 말들이 한 의미를 지시하며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히브리어의 흔한 표현법이다. 성경에서는 형상과 모양을 서로 바꾸어서도 사용하고(창 5:3), 형상을 대표로 칭하기도 하고(창 1:27; 9:6; 골 3:10), 모양을 대표로 칭하기도 한다(창 5:1; 약 3:9 ‘o`moiosij’). 그러므로 형상과 모양은 동일한 대상에 대한 두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신의 고유한 본성인 영에 속한 속성들을 인성 가운데 부여해 주셨다. 그리하여서 사람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으로서 대권을 행사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짐으로써 이성적이고 영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온전함(integritas)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올바른 오성을 충만하게 소유하였고 이성의 한계 내에 자신의 정서를 종속시켰으며 모든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탁월함(sui excellentiam)을 자신을 지으신 분에 의해서 수여된 놀라운 은사들로 돌렸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primaria sedes divinae imagines)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들에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1.15.3).
타락 전 인류는 이렇듯 온전한 상태에서 조성되어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신의 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담은 자기가 원하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posse non peccare, to be able not to sin)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로 타락하였다. 아담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 즉 자유의지(arbitrium liberum)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그 가운데서의 순종을 통하여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다. 자유의지 가운데서의 순종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찬양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생기(hm'v'n.)로 생령이 되게 하신 것은 생기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미토록 하기 위함이셨다(창 2:7; 시 150:6).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한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인류에게 자신의 형상을 주셔서 그 가운데서의 순종을 통하여서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드시지 않으신 것은 오직 그 분의 ‘계획(consilium)’ 속에 감추어져 있다(1.15.8).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서 온전하게 짓기로 작정하셨으며 그렇게 하셨다. 최초의 인류는 온전하였으므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의지로 순종할 수도 불순종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가톨릭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나누어서 형상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인류의 자연적인 상태로서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모양이 덧붙여져야 한다고 보는 것은 지극히 잘못되었다. 그들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상실한 것은 오직 이러한 덧붙여진 은사(donum superadditum)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타락 후에도 인류는 하나님께서 처음 인류를 짓고자 하신 그 상태 즉 형상을 그대로 유지한다. 그들은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상실한 이 덧붙여진 은사를 원의(iustitia originalis)라고 부른다. 이러한 가톨릭 신학자들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가 온전했음도 그들이 전적으로 타락했음도 그들이 전적인 은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도 모두 부인된다. 그들은 구원을 처음부터 그렇게 작정된 불완전한 인류가 완전해지는 일종의 진화적 과정으로 여길 뿐이다(1.15.4).




2. 영혼,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한 좌소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다. 영혼은 ‘불멸적이나 피조된 실체(substantia immortalis, creata)로서 사람의 보다 고상한 부분’이다. 영혼은 ‘육체와는 분리되는 본질적인 그 무엇(essentiale quiddam)’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여러 은사들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으며 그것은 ‘신적인 그 무엇(divinum aliquid)’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것들은 영혼이 ‘불멸하는 본질(immortalis essentia)’을 가짐을 증언한다. 영혼은 육체의 밖에서도 영원히 사는 실체이다(1.15.2).
영혼은 단순히 관념이거나 모종의 힘이거나 작용이 아니다. 그것은 ‘형체(形體)가 없는 실체(substantia incorporea)’이다(1.15.6). 성경은 영혼이 실체임을 반복해서 제시한다.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 죄가 머무는 곳이다(고후 7:1). 영혼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벧전 1:9) 영혼에 거슬리는 육체의 정욕을 다스려야 한다(벧전 1:9). 하나님께서는 영혼까지도 멸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마 10:28; 눅 12:5). 그러나 그 분께서는 우리의 ‘영의 아버지’가 되시며(히 12:9)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다(벧전 2:25). 영혼의 실체와 실재를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오류가 분명하게 지적된다(행 23:8). 사람의 불멸성이 영혼의 실체에 있다(1.15.2).
칼빈은 1534년에 재세례파의 영혼수면설을 반박하면서 쓴 글(Psychopannychia)에서 영혼은 언제든지 실체로서 활동함을 분명하게 주장하였다. 그곳에서 칼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으므로 사람의 사람됨이 영혼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서 사람의 영혼은 육체로 말미암아 살아서 활동하게 되므로 사후 영혼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단지 잠잔다는 주장을 반박하였다.
사람의 실체가 본질적으로 영혼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구원의 은혜도 영혼을 살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최초의 인류가 받은 ‘산 영’은 이제 ‘살려주는 영’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회복된다. 구원이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형상(perfectissima Dei imago)’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자녀 된 자로서 그와 함께 후사됨에 있다(롬 8:9, 15, 17).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부음 받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한 좌소로서 영혼의 속성은 이성, 양심, 그리고 의지로 나타난다. 영혼은 이성적, 도덕적, 그리고 자율적인 인격적 실체이다.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과 종교의 씨앗 그리고 양심이 영혼에 새겨져 있다. 영혼은 감각하고, 인식하며, 이해하고, 의지한다. 영혼의 근본적인 기능은 ‘오성’(intellectus)과 ‘의지’(voluntas)로 이루어진다. 오성은 선악과 정사를 분별하며 의지는 오성의 판단에 따라서 행함으로 나아가고자 결단한다. 인류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오성도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도 모두 상실했다. 하나님 자신과 그 분의 뜻을 아는 지식조차도 스스로 얻을 수 없으니 ‘지식에 까지(eivj evpignwsin)’ 새롭게 하심을 입어야 한다(1.15.6-7).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7)


'제7강좌' 섭리: 영원히 현재(顯在)하는 하나님의 손(기독교강요 1.16.1-1.18.4)






1.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manus invisibilis Dei)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창조주’(creator)시라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만물의 ‘통치자’(moderator)시며 ‘보존자’(conservator)이시다. 지으신 분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신다. 지으신 분의 뜻이 없으면 참새 한 마리도 그저 떨어지지 않는다(마 10:29). 천지가 여호와의 ‘말씀’과 ‘입 기운’으로 이루어졌다(시 33:6). 우주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으로’(arcana Dei inspiratione) 생기를 얻는다. 인생도 그러하니,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모든 사람을 굽어보신다(시 33:13). 우리가 살고 움직이는 것은 오직 그 분을 ‘힘입어’ 그러하다(행 17:28).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는 만물의 창조와 운행에 미치니,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시 104:27~31).


주께서 자신의 영의 역사로 새 기운을 불어 넣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부성적인 호의’(paternus favor)를 거두지 아니하시고 돌보신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specialis Dei cura)이 없다면, 하늘의 별이 흩어질 것이며 땅의 수목이 뽑혀질 것이다. 그러하다면, 지상의 뭇 인생들이 다 스러질 것이다(1.16.1).


하나님의 섭리는 그 분의 눈에 못지않게 그 분의 두 손에도 속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지켜보시기만 하지 아니하시며 친히 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기를 원하시되 자신을 위하여 친히 준비하신다(창 22:8). 그 분께서는 자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시 115:3). 삼위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6) 그 때나 이제나 영원토록 함께 일하신다(요 5:17). 하나님께서 ‘현재(顯在)하는 자신의 손으로’(praesenti Dei manu) 천지와 그 중의 생물들과 사람들에게 힘과 양분을 주셔서 보존하시고 자라게 하신다(1.16.2-5).


하나님의 섭리는 특별히 인생에 미치니 사람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그 분 자신이시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리이다”(렘 10:23).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하나님의 섭리는 통상 자연의 운행에 미친다. 하나님께서는 태양을 머물게도 하시며(수 10:13), 구름과 바람과 화염으로 자신의 사역자 삼으시며(시 104:3~4),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시 136:25). 그 분께서는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시 147:9) 인생의 머리카락이라도 세신 바 되셨다(마 10:30).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으면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질 수 없다(1.16.6-7).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획과 의지까지도 자신의 섭리로 다스린다. 우연히 일어나듯이 보여도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이 없지 아니하다; 운명에 묶여 필연적으로 일어나듯이 보여도 하나님의 지금 일하심을 통하지 않고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의 뜻(voluntas)은 만물의 최고의 원인이며 제일의 원인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연과 운명을 모두 넘어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euvdokia)에 따라서 모든 일을 뜻하시고, 뜻하신 즉 이루시고, 이루신 즉 선하시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밀한 손’(secreta manus Dei)의 작용으로 말미암는다(1.16.8-9).








2. 변개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한 뜻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계획하시고 행하심에 있어서 ‘최고의 이유’(optima ratio)를 가지고 계신다. 만사에 있어서 ‘가장 의로운 원인’(iustissima causa)은 하나님의 뜻이다. 맹인이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다(요 9:3).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을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함’(modestia)이다.


“비록 혹은 그 분의 부성적(父性的) 호의와 자비 혹은 그 분의 엄하심과 심판이 하나님의 섭리의 전체 과정에 종종 밝게 빛나지만 모든 일들의 원인들은 숨겨져 있다”(1.17.1).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으니 ‘나타난 일’은 우리와 우리 후손에게 속하나 ‘감추어진 일’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다(신 29:29). 하나님의 놀라운 뜻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이 섭리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그곳에서는 오직 선한 것만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의의 유일한 법칙이며 가장 의로운 원인으로 여기고 겸손히 고백하며 그 분을 찬미해야 할 것이다(1.17.2).


하나님의 섭리가 이러하므로 우리는 모든 책임을 면제 받게 되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리고 그저 눕고, 졸고, 쉴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기도로 자신의 일을 이루심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이차적인 손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일을 이루심에 있다. 모든 것을 정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와 열심을 요구하신다(1.17.3-5).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이미 정하시고 미리 아신다.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이 우주와 사람과 교회 위에 충만하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끝까지 다 정하시고 나그네와 같은 우리를 이끄신다. 다만 우리 심중의 계획을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잠언 기자의 고백은 마땅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주께서 모든 일을 행하신다(시 39:9). 주시는 분도 취하시는 분도 여호와시다(욥 1:21). 자신의 백성에게 인애와 자비를 베푸심으로써 견인(牽引)하시는 은혜는 오직 하나님 “그 분의 손”의 역사로 말미암는다(1.17.6-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이루시되 사람들을 자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저자’(主著者, praecipuus autor)이시며 사람들은 ‘그 분의 일꾼들’(eius ministres)이다. 하나님의 뜻이 제 일 원인이다. 그 분께서는 사람들을 ‘이차적 원인’(causa inferior)으로 사용하신다. 죄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에 빠진 인류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돌려드릴 수 있겠는가? 열심히 행하되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행위자는 얼마나 더 비참함을 느끼게 될 것인가? ‘여호와는 내편이시라’(시 118:6). 주께서 만사의 처음이요 끝이라는 고백과 그 분이 자신을 위하신다는 고백이 없이 행하는 자는 얼마나 곤고할 것인가? 경건한 사람의 위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니면 어떤 일도 이루시지 아니하시되 그 뜻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심에 있음을 믿는 고백에 있다. 우리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찬미함은 그 분의 뜻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그 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충실하심을 믿기 때문이다(1.17.10-11).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불변하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으나 실상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셨으니 그 분의 뜻은 처음부터 여일(如一)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후회하심에 대한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창 6:6; 삼상 15:11; 렘 18:8; 욘 3:4, 10; 사 38:1, 5; 왕하 20:1, 5). 그러나 사울을 세우심에 대한 후회를 언급한 동일한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께서 사람이 아니시므로 자신의 뜻을 변개치 않으심을 분명히 하셨다(삼상 15:29).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실 자를 용서하시고 징계하실 자들을 벌하심으로써 자신께서 ‘영원히 정하신 바’(aeterna ordinatio)를 성취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상황들을 조건으로 삼으시되 일의 끝을 이미 정하신 바대로 이루신다. 하나님께서 간혹 자신이 행하신 일에 대해서 후회하신다고 하시는 말씀을 사용하신 것은 그렇게 표현하심으로써 우리 인생의 능력에 맞추어 주셔서 깨닫게 하기 위함이시다(1.17.12-14).


만사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고 그 뜻은 항상 동일하다. 우리에게는 그 뜻이 다양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뜻을 변개치 않으신다. 하나님의 은밀한 뜻이 아니라면 사람도 천사도 아무 일을 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무리와 이방인들의 손을 통하여서 자신의 유일하신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셔서 죽음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자신의 아들을 내주셨다(행 2:23).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미리 알게 하신 것’을 행악자들의 손을 통하셔서 이루게 하셨다(행 3:18).


하나님께서는 사탄이라도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voluntas)과 그 분의 ‘가르침’(praeceptum)을 구별해서 보아야 한다. 간혹 그 분께서는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자신의 뜻을 마치 포기하시기라도 하시는 듯이 말씀하시나 실상 그 분의 뜻은 언제나 동일하시다(1.18.1-3). 그러므로 우리가 구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기경하셔서 우리가 그 분의 말씀을 배울 수 있도록 감화하심이 아니겠는가?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는 우리의 마음이 겸손히 하나님께서 가르치실 만한 상태(docilitas, teachableness)가 되어서 성경에서 가르쳐진 것은 무엇이든지 비난하지 않고 수납하는 것을 함의(含意)하기 때문이다”(1.18.4).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8)


'제8강좌' 원죄: 죄책과 오염의 전가
일반은총: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기독교강요 2.1.1~2.5.19)






1. 원죄(peccatum originale, original sin): 죄책과 오염의 죄과


우리 자신에 대한 참 지식은 창조의 때에 부여받은 하나님의 형상의 고귀함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고귀함을 상실한 비참함의 간격(間隔)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는 데서부터 비롯된다(2.1.3). 모든 사람은 ‘맹목적인 자기애’(caesus sui amor)가 있어서 스스로 옳으며 스스로 유능하다고 여긴다(2.1.2). 이러한 망상적인 자기도취(自己陶醉)에 빠져서 아담과 하와는 최초의 죄를 범하였다. 그리고 그 유혹 가운데 그들의 후손들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바에 따라서 매사에 실족하게 되었다(롬 14:22).


하나님께서는 처음 인류에게 자유의지(arbitrium liberum)를 주셔서 그들이 ‘뜻을 다하여’(기꺼이, libenter, willingly) 자신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신께 영광올리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그들에게 부과된 ‘복종의 시험’(obedientiae examen)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그들의 ‘교만’(superbia)으로부터 배태(胚胎)된 ‘불순종’(inobedientia)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롬 5:19). 사람이 사람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게 되니 그 분의 말씀에 충실하지도 그 분께서 베푸신 모든 은총을 감사하지도 않게 되었다. 죄는 본질상 이러한 ‘불충’(infidelitas)과 ‘배은망덕’(ingratitudo)에 똬리를 틀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을 떠난 일체의 ‘야심’(ambitio)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길이거늘(2.1.4)!


죄는 모방에 의해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적으로 유전된다. 우리는 모두 죄 중에 잉태되었으며 그 가운데 출생하였다(시 51:5). 최초의 인류가 창조주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음이 ‘영적 생명’(vita spiritualis)이었으므로 그 분으로부터 ‘멀어짐’(alienatio)이 ‘영혼의 죽음’(interitus animae)이 되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우주에 사망의 ‘저주’(maledictio)가 편만하게 되었다(2.1.5).


원죄는 죄과(culpa)로 인한 오염(corruptio)과 죄책(罪責, reatus)을 포함한다. 죄과로 인한 죄책은 사망의 형벌을 뜻한다. 그리고 죄과로 인한 오염은 전적인 무능과 전적인 부패를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순수하게 지으셨다. 죄는 본성이 아니라 본성의 타락으로부터 왔다. 죄는 사람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유의지 가운데 지은 죄행(罪行)으로부터 말미암는다(2.1.1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작품이(operi suo) 아니라 자신의 작품의 부패를(operis sui corruptioni) 미워하신다”(2.1.11).
















타락 후 모든 사람에게 임한 죄의 ‘전염’(contagio)은 영혼과 육체의 ‘실체’(substantia)로부터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죄가 언약적으로 전가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영혼을 각각 선하게 창조하신다. 원죄는 이러한 영혼에 전가된 유전적이며 선천적인 죄이다. 원죄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사망의 죄책이 ‘타락한 본성으로부터’(ex natura) 부과되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은혜로’(ex supernaturali gratia) 말미암지 않고는 그 형벌로부터 무죄방면이 되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2.1.7). 첫 언약의 머리인 아담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이후 모든 사람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 되었다(엡 2:3). 육으로 난 것은 단지 육이므로(요 3:6) 사람의 영이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 앞에는 생명의 문이 닫혀 버린다(요 3:5; 롬 8:10). 아담 안에서 죽은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게 된다(고전 15:22). 이렇듯 원죄는 최초의 죄 자체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형벌을 모두 포함한다(2.1.6).


모든 사람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와 같다. 사형수로서 언도를 받았음에도 사람은 육체에 속한 삶 동안 여전히 사망의 죄를 짓고 있다.


“이 부패는 우리 안에서 없어지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육체의 일(opera carnis)을 하는 열매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원죄를 단지 ‘원의의 결핍’(carentia iustitiae originalis)이 아니라 행악하는 ‘욕정’(concupiscentia)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어떤 것이라도, 오성으로부터 의지에 이르기까지 또한 영혼으로부터 육체에 이르기까지 전부(ab intellectu ad voluntatem, ab anima ad carnem usque), 이 정욕으로 더럽혀져서 가득 차 있다’(2.1.8).


“사람 전체가 마치 홍수를 만난 듯이 머리로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압도되어 죄를 면한 부분은 하나도 없으며, 사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모두 죄로 돌려야 한다”(2.1.9).








2. 자유의지(arbitrium liberum):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측면에서만 최고의 고귀함이 있다. 사람은 그 자신의 선행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으로써 지고한 복을 받았다. 타락 후 인류는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멀리했으므로 이제 그들이 스스로 서보고자 하는 것은 갈대로 자신을 높이 들고자 하는 것보다 더욱 어리석다(2.1.1).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전적으로 무능해지고 부패해져서 오직 죄를 짓고자 하는 뜻 밖에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상실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행위를 선한 것으로 받으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지게 된다.


자연의지는 단지 노예의지에 불과하다. 그것은 죄의 종으로서 사망에 매인 사람들이 자연이성의 분별력에 의지하여 일을 행하고자 하는 뜻이나 의향에 불과하다. 반면에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의지이다. 자유의지는 노예나 사생자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만이 가지는 그 분의 친자녀의 의지이다(롬 6:15~23; 8:9~17).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의의 종(servus iustitiae)으로서 의에 매인 오직 은혜로 거듭난 중생자의 의지라고 할 것이다(2.2.4~6, 12).


“자유의지는 은혜를 통하여서 세워진다”(liberum arbitrium constitui per gratiam).


주의 영을 받은 사람은 진정한 자유자로서(고후 3:17)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라는 주님의 음성을 붙든다(2.2.8). 반면에 비중생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조(自嘲)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自慢)에 빠질 뿐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자신들의 능력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계명을 첨삭(添削)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으니, 우리의 의는 이러한 노예의 의지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는 자녀의 의지를 지님에 있다(마 5:17~20). 진정한 자유의지는 주님의 영을 받아서 무엇이든지 구하면 그 분께서 친히 행하심을 믿고 행하고자 하는 의지이다(요 14:13~14).


자유의지는 할 수 없다함도 아니요 스스로 할 수 있다 함도 아니며 주님의 은혜로 능치 못함이 없다고 함이다. 그러므로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humilitas)을 꼽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의지를 누린다(2.2.11).


자유의지는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 그 분의 의를 분별하여 선택하고 그대로 따르고자 하는 의향을 의미한다. 자유의지는 원함과 행함을 모두 함의한다(롬 7:18~19). 오직 이러한 의지는 성령의 ‘격동으로’(spiritus impulsu) 말미암는다. ‘영은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중생으로부터 기인한다’(spiritus non a natura est, sed a regeneratione(2.2.26~27).


타락 후 모든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non posse non peccare). 그러나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나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짓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원적 노예의 멍에’(iugum voluntariae servitutis)를 메고 자유롭게 죄를 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연성’(necessitas)과 ‘강제(coatio)는 구별해야 한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으나 자진해서 짓는다(2.4.1). 그러므로 죄에는 사망의 형벌이 따른다(2.3.5).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나 거듭난 사람은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libenter) 선을 행하게 되니, ‘사람의 의지는 자유에 의해서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2.3.14).


펠라기우스는 죄가 필연적이라면 죄가 아니며 자원적인 것이라면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노예의지를 가지고 죄의 종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이나 자원해서 죄를 짓는다(2.5.1).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선행을 행하게 하시거니와 ‘우리의 공로들’(merita nostra)이 아니라 우리에게 베푸신 ‘자신의 은사들’(dona sui)에 대해서 상급을 주신다. 그러므로 은혜 가운데 상급을 얻기 위해서 경주를 경주함이 마땅하다(2.5.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그것으로 곧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지게 되나 그 의지대로 행하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셔서 우리가 그 분께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명령이 우리의 능력의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할 만한 일만을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 자신을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자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율법으로 명령하신다. 그러나 여기에 달콤함(suavitas)이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조차 명령하셔서 스스로 은혜의 약속을 이루신다(2.5.4~11). 그러므로 오직 은혜로 의지를 갖게 되며 오직 은혜로 이룸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 안에서 하신 일이 모두 우리의 것이 되도다(2.5.15)!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으니 그 표는 우리가 스스로 행함이 아니요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분이 우리를 움직여 이루시는 분이심을 확신함에 있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진정한 겸손 가운데 다음 말씀을 믿음으로 수납한다(2.5.12).


“내가 오늘날 내게 명한 이 명령은 내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1~14).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9)


'제9강좌' 율법: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기독교강요 2.7.1-2.8.59)






1. 율법의 본질: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regula vivendi pie et iuste)


율법은 삶의 규범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율법에는 자신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voluntas Dei)이 계시되어 있다. 예컨대, 율법 가운데 우리에게 거룩함을 명령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이 우리의 거룩함에 있음을 드러내신다(살전 4:3). 뿐만 아니라 율법에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계시되어 있다. 우리에게 거룩함을 명령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으로서 율법 가운데 계시되신다. 율법은 그것의 수여자(largitor)이신 하나님의 ‘영원성, 능력, 지혜, 선, 진리, 의, 자비’를 계시한다. 이렇듯 율법을 통하여 우리는 언약 백성의 소명을 확인하게 되고 동시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어떠하심을 깨달아 알게 된다. 이 앎이 하나님을 만남에 다름 아니므로 시편 기자는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궁구(窮究)하였으며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침상을 적시도록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1536년 기독교 강요 1장).


율법은 삶의 규범을 가르치는 십계명과 함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가르쳐주신 ‘종교의 양식’(forma religionis)을 포괄한다. 율법의 의는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신 4:1; 5:29-33; 6:1-3; 8:1)는 선포로 나타난다. 율법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quid possint homines)이 아니라 해야 할 것(quid debeant)을 계시한다. 아무도 율법의 의를 다 충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율법을 좇아 살기 위해서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하다. 율법은 ‘은혜 언약’(foedus gratuitum)에 정초해서만 작용한다(2.7.1). 그러므로 그것은 언약의 법(lex foederis)이라고 불림이 마땅하다.


율법은 세상의 법과는 달리 단지 형벌의 두려움을 고지하여 죄를 억제하는 기능에만 머물지 않는다(2.5.7). 율법은 규범적 사역과 정죄적 사역을 함께 감당한다(2.8.1). ‘본래’(orginaliter)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규범으로서 수여되었다. 그러나 마치 태양이 길을 비추는 본연의 작용을 하나 동시에 어둡고 후미진 곳을 들추어내듯이 율법은 삶의 길을 제시하는 가운데 죄를 드러내는 사역을 ‘우연히’(accidentaliter) 감당하게 된다.


율법은 항상 교육적인 역할을 감당한다.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길’을 가르친다(1.6.2). 율법을 통하여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고(1.9.3),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한다(2.12.4). 율법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니는 특별한 학교’(peculiaris schola)(1.6.4)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학교의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이시다(3.1.4). 그러므로 칼빈이 신명기 5장 2절 주석에서 말하듯이, 율법의 가르침(paedagogia)은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으로 받아야 하며, 가장 높은 영광을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언약에 올려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완전한 규범으로서 율법을 주셨다. 율법에는 명령(praeceptum)과 함께 약속(promissio)이 포함되어 있다(2.5.7, 10, 12).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teloj)이 되신다(롬 10:4).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fines)이 되심은 곧 그것에 대한 ‘완성’(complementum)이 되심을 뜻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폐하지 아니하시고 다 이루시리라 말씀하셨다(마 5:18). 주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려 하심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plhrwsai) 오셨다(마 5:17). 새로운 복음이 없듯이 새로운 율법은 없다. 주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심은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써 거듭난 성도들을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자리에 세우심에 있다. 오직 자신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써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제 성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일점일획이라도 업신여기지 않고 다 지켜 행할 자리에 서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셨음은 자신의 영을 부어 주셔서 그저 주시는 은혜의 언약으로 ‘옷 입은’(vestita) 율법을 성도들이 즐겨 지키는 자리에 세우심에 있다(2.7.2, 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이는 율법은 어떤 신학적 기능도 감당할 수 없다. 율법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헛되다. 율법이 죄를 깨달아 회개에 이르게 하는 기능을 하게 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율법의 규범대로 행하여 상급을 받게 됨은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자신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써 우리의 불완전한 복종도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받으시기 때문이다(2.7.4).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막 12:30)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자 어디에 있는가? 성령의 소욕을 거스른 육체의 소욕으로부터(갈 5:17) 전적으로 자유로운 자가 어디 있는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다고 하였는데(갈 3:10; 신 27:26), 누가 모든 것을 지켜 행함으로써 은혜에 머물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율법은 항상 저주한다’(lex semper accusat)라는 루터란들의 고백은 적실한가? 율법은 은혜의 법으로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로써 역사하니 그 분의 영의 부으심에 따라서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마다 그 분의 은혜로 율법을 지키는 자리에 서게 된다. 거듭난 사람에게 율법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니라 삶의 규범으로서 본질적으로 작용하며 빛과 같이 속을 밝히고 꿀송이 같이 단맛으로 영혼을 깨우는 역사를 수행한다(2.7.5). 주님께서 대답하신 바와 같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 19:25-26).




2. 율법의 삼중적 용법(usus triplex)


‘율법의 제 일 용법’


창세기 15장 6절 설교에서 칼빈은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세심히 살펴보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해서 절망에 이르게 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찾게 한다고 전하는데, 이는 율법의 제 일 용법의 핵심을 설명한 것이다.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있어서 ‘율법은 하나님의 의-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유일한 의를 보임으로써 모든 사람의 불의를 경고하고, 드러내고, 정죄하며, 마침내는 저주한다.’ 율법은 사람들이 연약함과 추함을 깨닫게 해서 도피처인 중보자 그리스도에게로 피하게 하는 신학적인 작용을 한다(2.8.3).


칼빈은 이러한 율법의 작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저울’(trutina)과 ‘거울’(speculum)이라는 두 가지 은유를 사용한다. 그리하여서 율법이 정죄의 기능을 감당하는 동안에도 삶의 규범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닫게 하는 율법의 고유한 직분을 수행함을 강조하고 있다(2.7.6-7). 율법은 ‘거룩하고’, ‘정당하고’, ‘선한’ 것으로서, 우선은(initially) 그 명령으로 사람들을 좌절케 하지만 동시에(simultaneously) 그 약속으로 사람들을 위로해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찾게 한다(2.5.4-11, 2.7.1-5). 율법의 제 일 용법은 죄로 인해 생긴 인간의 ‘우연한 속성’(adventitia qualitas)에(2.1.11) 관련되나, 그것은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본질에 기반하고 있다. 율법의 제 일 용법은 율법 안에서부터 그리스도 안으로 사람을 옮기는 작용을 뜻한다.


“율법의 명령 안에서, 하나님은 아무도 채울 수 없는 완전한 의에 대해서는 상을 주시는 자로서 반대로 악행을 행한 사람에게는 엄한 심판을 내리는 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자비로 가득한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와 같은 불쌍하고 무가치한 죄인들을 향해서도 빛난다”(2.7.8).


‘율법의 제 이 용법’


율법의 제 이 용법은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죄를 억제하게 하는 기능이다. 이 용법은 ‘원인(causa)이 아니라 결과(effectum)에 있어서 외부적인 행위(exteriori opere)’에만 연관된다(2.7.10). 율법이 작용하는 방법에 있어서 제 이 용법은 제 일 용법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제 이 용법도 ‘교사’(paedagogus)로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가르치는 율법의 규범적 사역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율법의 용법을 일반법의 용법과 동일시하는 우(愚)는 피해야 한다(2.7.11).


‘율법의 제 삼 용법’


율법은 ‘영혼 속에 이미 하나님의 영이 살며 다스리고 있는 신자들 가운데’ 여전히 작용한다. 율법의 제 삼 용법은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 작용하는 용법’(usus in renatis)을 지칭한다. 이와 관련하여 율법의 가르치는 사역(doctrina)과 권고(勸告)하는 사역(exhortatio)이 주목된다. 가르치는 사역으로서 율법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규율을 알려서 그들이 ‘주님의 뜻’(voluntas)을 좀 더 순수하게 알아 가는 날마다의 진보가 있도록 하는 역할을 계속한다. 율법은 신자들을 가르치는 기능을 계속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고 ‘그 뜻에 순응하고 적응해 가는’(componatet ac commodet) 과정을 말한다.


권고하는 사역과 관련해서 율법은 ‘성도들이 그것을 수시로 묵상함으로써 순종에 이르게끔 경성하게 하고(excitetur) 그 안에 더욱 굳건하게 서게 하며(roboretur) 배도(背道)한 반역의 길로부터 돌이키게 한다(retrahatur).’ 권고의 사역은 지식적(noetic) 교훈의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의 작용은 오히려 의지적(volitional)이다. 기독교인의 삶에 있어서 율법이 계시하는 약속은 성도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중보자 그리스도가 여전히 활동하신다는 데 있다. 율법은 성도들을 위한 ‘채찍’(flagrum)과 ‘계속 찌르는 가시’(assiduus aculeus)로서 그들의 영혼을 소성(蘇醒, quickening)하게 하는 작용을 감당한다(2.7.12). 이러한 역사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성도마다 율법 가운데서 그것의 완성자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의의 완전한 모범’과 ‘올바른 삶의 표준’을 배우고 그 분의 중보로 경주를 경주하는(고전 9:24-26) 의지의 결단에 이른다(2.7.13). 그러므로 중보자가 없다면 율법에는 어떤 ‘즐거움’(oblectatio)도 어떤 ‘달콤함’(suavitas)도 없다. 오직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혜로 율법은 본연의 규범적 사역을 감당하게 되니, 이것이 율법의 가장 주요하고 고유한 목적에 가깝다(2.7.12).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은 결국 마땅한 빚을 갚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땅한 행위에 대해서도 상급으로 보상을 주신다(2.8.4).




3. 율법 해석의 원리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자신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셔서 사람이 ‘신적인 순수함의 모범을 좇아서’(ad divinae puritatis exemplar) 자신의 형상으로서 온전히 빚어져 가기를 원하신다. 율법이 교훈하는 전체 경건의 직분은 하나님 사랑(신 6:5; 11:13)과 이웃 사랑(레 19:18; 마 22:37-40)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경건의 열매이면서 동시에 ‘경건의 최종 증거’(approbatio)가 된다(2.8.53).


우리의 덕행은 모두 주 안에서 이루어진다. ‘명령하시는 것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옵소서’(Da quod iubes et iube quod vis) 라는 어거스틴의 기도문이 언약의 백성에게 작용하는 ‘은혜의 율법’(lex gratiae)이 작용하는 원리가 된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은 사람이 그 분의 영을 받아서 은혜로 율법을 지켜 행하게 된다(2.8.57).


그러므로 언약의 법으로서 율법을 해석함에는 우선적으로 율법의 ‘입법자’(legislator)시며 ‘수여자’(largitor)이신 하나님의 ‘본성’(natura)을 살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므로 그 분의 율례와 법도도 사람의 속을 규율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최고 해석자’(optimus legis interpres)로서 위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가르치셨다. 율법도 신령한 것이니(롬 7:14) 신령하게 해석해야 한다(2.8.6-7). 둘째로, 율법 해석에 있어서 언어의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야 한다. 금지하는 규율일지라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컨대 살인하지 말라는 법은 힘자라는데 까지 이웃을 먹이고 살리라는 규범으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은 ‘제유법’(提喩法, synecdocha)에 따라서 광의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2.8.8-10). 셋째로, 첫째 돌판의 계명들과 둘째 돌판의 계명들을 조화롭게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의 의무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는 함께 역사한다. 진정 하나님의 뜻이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데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만이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눅 10:27).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어떠하심을 깨닫는 자마다 이웃을 위한 사랑이 곧 예배에 다름 아님을 바로 인식할 것이다. 그리하여서 모든 성도의 삶이 예배임을 확신할 것이다(2.8.11-12).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0)


'제10강좌' 복음, 신구약: 언약 가운데 약속하시고 이루심(기독교강요 2.9.1-2.11.14)


1. 신구약의 유사점(similitudo)


신약과 구약은 ‘그 자체’(re ipsa) 혹은 ‘실체’(substantia)에 있어서는 동일하나 ‘경륜’(administratio, oecomonia, dispensatio)에 있어서는 다양하다. 실체에 있어서 동일함은 신구약 공히 ‘중보자의 은총’(mediatoris gratia)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됨을 뜻한다. 다만 구약의 조상들은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믿되 아직 육체로 오신 그 분을 직접 마주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도 중보자가 없는 언약의 은총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신구약의 유사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어느 시대에 속하였건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생의 소망 가운데 그 분의 자녀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둘째로, 그들을 하나님께 묶어 놓은 언약은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그 분의 자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셋째로,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중보자’(mediator)로 알고 있었고 ‘그 분을 통하여서’(per quem) 하나님의 약속에 참여하리라고 믿었다(2.10.1-2).


옛 언약(testamentum vetum) 곧 구약도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은총에 기초를 두었으며 그리스도의 ‘중재’(intercessio)에 의해서 확립되었다. 복음은 아들 안에서 다 이루신 아버지의 사랑을 증언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이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미리 역사하였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eivden) 기뻐하였다(요 8:56). 마리아와 사가랴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두고 그 분께서 아브라함과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에 따라서 오셨다고 찬미하였다(눅 1:54-55, 72-73).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구약의 ‘목적’(finis)도 ‘항상 그리스도와 영생에’ 있었다(2.10.4).


신약과 구약의 백성이 누린 언약(foedus, pactum, testamentum)의 은혜는 실체에 있어서 동일했다. 이는 그들이 ‘성례들의 의미’(sacramentorum significatio)를 공유했다는 측면에서도 파악된다. 구약 백성들에게도 신약의 세례와 성찬에 해당하는 ‘상징들’(symbola)이 부여되었다. 유대인들은 바다를 건넘으로써, 뜨거운 태양을 가리는 구름 속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들도 또한 ‘다 같은 신령한 음식’과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먹고 마셨다(고전 10:1-4). 이로써 유대인들은 광야 생활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받았다(2.10.5). 주님께서 만나를 주심은 단지 그들의 배를 불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신령한 은혜를 끼치기 위함이었다. 주님의 살을 먹지 아니하면 어떤 육적인 만나로도 영생에 이를 수 없다(요 6:54). 광야의 백성들이 만나를 먹었으나 죽은 것은(요 6:49) 그들이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먹었기 때문이다(2.10.6).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도 모두 ‘말씀의 조명’(illuminatio verbi)으로 하나님과 굳게 결합되어서 영생의 복을 누렸다. 그들에게도 ‘영적인 언약’(spirituale foedus)이 역사하였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이 말씀이니라”(벧전 1:24-25; 사 40:8).


베드로는 성도들이 거듭난 것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며 그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고 전하였다(벧전 1:23). 은혜의 언약의 말씀은 항상 동일하여 마르지도 시들지도 않는다(2.10.7).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생명’(vita terrena)이 아니라 ‘더 좋은 생명’(melior vita)인 ‘영적인 생명’(vita spiritualis)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맺으신 언약들 가운데서 반복하여 약속하셨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2).


하나님의 백성이 됨이 곧 영생을 의미하였다(출 6:7).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람마다 그 분께서 구원하시리니(합 1:12; 사 33:22; 신 33:29),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여호와께서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심으로써(출 3:6)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마 22:32) 친히 선포하셨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눅 20:38).


구약의 백성들도 지상의 삶을 마지막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들의 ‘본향’인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히 11:9-10, 13-16).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들의 죽음’을 ‘귀중한 것’으로 보시니(시 116:15), 그들이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히 11:13). 그들은 성도들의 죽음을 생명에 이르는 문으로 여겼다(2.10.13-14). 그들은 마음을 성소로 들어 올려 ‘현세의 그림자’(in praesentis vitae umbra)에 숨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았다(2.10.17). 구약의 백성들도 그리스도를 ‘언약의 보증’(pignus foederis)으로 여겼으며 미래의 복이 전적으로 그 분께 있음을 믿었다. 그들은 역사 가운데 부여하신 언약이 단지 지상의 복에 머물지 않고 ‘영원한 영적 생명’에 대한 약속임을 확신했다. 다만 그들은 아직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친히 목도하고 만지지는 못했다(2.10.23).




2. 신구약의 차이점(differentia)


신약과 구약의 차이점은 일치점에 근거해서 논의되어야 한다. 신구약의 약속의 실체는 동일하다. 다만 구약은 언약의 약속을 땅에 붙은 은총들로써 더욱 빈번히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에 맞추어 복을 주시면서 구약의 ‘낮은 훈련 방식’(inferior exercitationis modus)을 버리셨다(2.11.1). 하나님께서는 고대 백성들에게 반복적으로 지상의 약속을 베푸시면서 그들을 ‘후견인’(tutor)과 ‘교사’(paedagogus) 아래에서 단련시키셨다. 그들은 아직 ‘초등학문’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갈 4:1-3).


구약의 언약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되었으며 그 분께서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히 7:22). ‘옛 언약이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구별되어 수립된 이후에야 비로소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신 자신의 잔을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고 명명하셨다(눅 22:20). 구약은 ‘현재하는 실재’(veritas praesens)가 아니라 그것의 ‘모양’(figura), ‘형상’(imago), ‘모형’(typus), ‘그림자’(umbra)를 계시하였다. 그러나 신약은 이러한 예표(adumbratio)에 대해서 ‘몸 자체’(corpus ipsum)를 계시하였다(2.11.4).


구약시대에는 율법이 그 자체로 ‘초등교사’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갈 3:24). 그런데 이제는 율법의 약속이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서 완성되었으므로 세례 요한 이후로는 오직 복음이 선포되었다(눅 16:16; 마 11:13). 이제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율법이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서 그리스도가 증거된다. 그 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새로운 시대에 역사하는 복음의 의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서 그 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데 있다(엡 4:13). 비록 구약시대의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그들은 ‘어린이들’로 인정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눅 10:24; 마 13:16). 새 언약은 그 자체로 영적인 교훈을 가르치고 영생을 전파하나(고후 3:6-11) 옛 언약은 아직 지상의 것, 문자적인 것에 더욱 붙들려 있었다(2.11.5-8).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영을 내려 주심으로써(롬 8:15; 갈 4:6) 복음의 굴레를 벗고 자유의 복음으로 살게 하셨다(갈 4:22-31). 새로운 시대의 성도들은 자유자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기꺼이(libenter) 순종하는 자리에 선다. 그들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갈 5:6)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운다(마 11:29). 그들은 이제 죄의 멍에를 벗고 의에 매여 사는 의의 종들이 되었다(롬 8:12-23). 그들은 새로운 시대에 합당한 ‘약속의 자녀’가(롬 9:8) 되었다(2.11.9-10).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담이 허물어졌다(엡 2:14). 평안의 복음이 택함 받은 모든 백성들에게 임하였다(엡 2:16-17). 열방이 그 분의 소유가 되었으며(시 2:8) 그 분께서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땅에서부터 땅까지를 간단(間斷)없이 다스리신다(시 72:8; 슥 9:10)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골 3:11, 후반).


만세 전의 비밀이 여기에 있으니(골 1:26; 엡 3:9), 그리스도께서 때가 찬 경륜을(엡 1:9) 다 이루시고 자신의 의를 다 전가해 주심으로써 ‘여호와의 분깃’인 그 분의 백성들이(신 32:9) 오직 그 분의 은혜로 살게 하셨다(2.9.11-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경륜대로 각 시대에 역사하신다. 청년에 대한 치료법과 노년에 대한 치료법이 다르듯이 하나님의 구원 경륜도 구약과 신약에 따라서 다양하다. 하나님의 맞추심(accommodatio)의 은혜가 시대에 따라서 다양하게 역사한다. 그러나 그 실체는 언제나 동일하다(2.11.13-14).




3. 복음과 율법


칼빈은 요한복음 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복음(euvaggelion)을 정의하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은혜의 엄숙한 선포이다(solenne de patefacta in Christo gratia praeconium). 이런 이유로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Dei potentia in salutem omni credenti)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사절(使節)의 직분(legatio)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그 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자신과 화목케 하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부성적인 사랑의 보증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주제가 됨이 마땅하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셨고, 죽으셨고,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으셨고, 마침내 하늘로 취해지셨다고 전하는 기사들이 복음이라는 이름을 특별히 받게 되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은총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시작’이시다(막 1:1). 그 분께서 오셔서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그 분 안에서 ‘예’가 된다(고후 1:20). 그러므로 복음은 예수의, 예수에 관한, 예수로부터의 복된 소식이다(2.9.2).


옛적에 선지자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폈으며(벧전 1:10) 그 분을 보고 기뻐하였다(요 8:56).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그 분을 아는 빛으로 말미암는다(고후 4:6). 따라서 아들께서 나타내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아버지를 알 자가 없다(요 1:18).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대속의 주가 되시니 복음을 들음으로써 영생의 지식에 이르게 된다(2.9.1).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양자를 분리시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지만(롬 1:16), 그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롬 3:21). 복음은 율법을 폐지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약속을 확인하고 실현했으며 ‘그림자’(umbra)에 ‘몸’(corpus)을 부여했다(2.9.4). 이 복음은 이전에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서 믿음의 백성들이 들었던 것이다(골 1:4-5). 율법에는 복음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2.10.3). 율법에 계시된 언약의 약속이 복음에 의해서 계시되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요 복음의 더 좋은 소망으로 인도하는 길이었다(히 7:19; 시 110:4; 히 7:11, 19; 9:9; 10:1).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복된 소식으로서 율법을 통한 언약의 약속을 실현하며, 확인하며, 인준한다(2.11.4).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1)


'제11강좌' 그리스도의 중보의 필연성 : 성육신(기독교강요 2.6.1-4;2.12.1-2.13.4)


1.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의 의의와 필연성


기독교강요에서 기독론에 전적으로 할애된 부분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보의 필연성(2.6), 그 분의 인격과(2.12~14) 사역(2.15~16), 그리고 그 분의 공로의 의의와 가치를(2.17) 다룬 장들이다. 칼빈은 이러한 장들 사이에 율법의 본질과 용법, 율법과 복음의 관계,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일치와 차이를 다룬 장들(2.7~11)을 두었다. 이로써 그는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복음, 구약과 신약의 실체(substantia)가 되심을 전제하고 자신의 신학체계를 세워가고 있다.


기독교강요는 전체 기독교 교리가 기독론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각인시킨다. 기독론은 신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신론은 기독론에서 확증된다. 신론의 핵심 주제인 삼위일체론을 다루면서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격(deitas)에 문의(問議)하여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륜적 삼위일체론의 역동적인 관계를 고찰한다. 그리하여 위격적 연합에 따른 양성적 중보의 기초를 이미 신론에서 구축한다. 한편, 기독론의 의의는 인간론에 의해서 예기되며 기독론의 가치는 구원론에 의해서 실현된다. 전적 타락의 교리는 전적 은혜로 인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필연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의를 성도에게 전가하심이 구원론의 요체(要諦)로서 제시된다. 이러한 구원론적 특성에 기초하여 교회론이 개진되는 바,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그 분과 교제하고 교통하며 자라가는 성도들의 연합체(societas)로서의 교회의 본질과 속성과 직분이 강조된다. 이렇듯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의 총화(總和, summa)로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제시하고 있다.


칼빈은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구속자로 오셔야 할 필연성을 ‘중보자가 없이는’(absque mediatore)라는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수사학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첫째로, 타락으로 말미암아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써 구원에 이를 길이 없게 되었다. 이제는 아들을 믿는 믿음 외에는 아버지의 ‘부성적인 호의’(paternus favor)를 맛볼 길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를 더 이상 ‘자신의 작품으로’(pro suo opere) 여길 수 없게 되셨으므로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의 인격 가운데’(in filii sui unigeniti persona) ‘구속자로’(redemptor) 나타나시고자 하셨다. 이 세상이 자신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아들을 보내셔서 그 분 안에 영생의 지식을 두셨다(요 17:3). 오직 보내심을 받은 아들께서 아버지의 능력이 되신다(고전 1:24; 롬 1:16). 오직 그 분께서만 구원의 문이 되신다(요 10:9). 그 분께서 생명 자체시다(요 11:25; 14:6). 그러므로 아들을 알지 못하는 자로서 아버지께 이를 자 아무도 없다(2.6.1).


둘째로, ‘중보자가 없이는’ 택(擇)함도 없으며 사(赦)함도 없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중보가 신구약 전체 구속사에 미침이 부각된다.


“중보자가 없이는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한 자비를 보이실 수 없으시다. 율법 아래에(sub lege) 산 믿음의 조상들에게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두어야 할 목표(obiectum)였다”(2.6.2).




구약 백성은 ‘그리스도의 인격에’(in Christi persona) ‘복되고 즐거운 교회’의 ‘토대’(fundatum)를 두고 율법의 규례대로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지금 계신 분으로서 장차 육체로 오실 분이라고 믿었다. 그 분께서 모든 민족이 축복을 받게 될 ‘씨앗’(semen)’이셨다(갈 3:14). 처음에 선민을 택하신 것도 중보자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았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 아들로 위를 잇게 하사(왕상 15:4) 우리 또한 그 분과 함께 상속자 되게 하셨다(롬 8:17). 그러므로,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시 2:12).


“주의 오른쪽에 있는 자 곧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인자에게 주의 손을 얹으소서”(시 80:17).


구약 백성의 간구도 이러했으니, 오직 구원의 의가 이 땅에 중보자로 오실 그리스도께 있음을 그들은 믿었다(2.6.2).


셋째, ‘중보자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하나님께 이르는 오직 한 길은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 ‘파할 수 없는 견고함으로’(in solida firmitate) 성도의 믿음을 지키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이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신(골 1:15) 그리스도를 ‘보고 자신을 믿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다 성취하여 그것의 ‘마침’이 되셨으므로(롬 10:4) 오직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 성도들은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대로 행하는 자리에 서고자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최고의 맞추심(God’s accommodation par-excellence)이 되시는 소이이다.


“하나님 자신은 무한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그 광대무변한 영광에 압도되지 않도록 아들 안에서 유한하게 되시고 우리의 작은 척도에 자신을 맞추셨다”(2.6.4).




2.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심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중보자 되심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최고’(magnopere)며 ‘최선’(optimum)의 일이었다.


대속의 작정에 따라서 성육신이 필요한 것은 인류의 전적인 타락으로 말미암았다. 첫째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로 올라갈 힘이 없으므로 그 분께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셔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성과 사람의 인성이 서로 연합되었다. 오직 그 분만이 하나님과 ‘충분히 가까운 친밀함’(satis propinqua vicinitas)과 ‘충분히 견고한 일체성’(affinitas satis firma)을 지니신 사람이 되셨다(딤전 2:5). 그 분만이 사람이시되 죄가 없으셨으므로(히 4:15) ‘평화를 회복할 중재자’(pacis restituentis interpres)가 되셨다(2.12.1).


그리스도께서 구원 중보자가 되심으로써 우리가 그 분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된다(롬 8:17).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우리 구원의 ‘보증’(‘arrha)이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동일하신 분’(idem)이 되심은 ‘자신께서 고유하게 가지셨던 것’(quod proprium)을 우리에게 속하게 하려 하심이셨다. 그러므로 구속자가 하나님으로서 사람이심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다’(apprime utile)(2.12.2).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서 구원주가 되셔야 함은 신인양성의 중보 사역을 이루기 위함이셨다.


우리 주님은 아담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복종하시기 위해서 참 사람으로 나타나셨고, 아담의 인격을 입으셨고, 그의 이름을 취하셨다. 이는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위해서 무름의 값(satisfactionis pretium)으로 제시하시면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 값을 동일한 육체 가운데서 지불하고자 하심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공통된 본성을’(communem naturam)을 지니심이 우리를 자신과 하나로서 그리고 그 분의 승리를 ‘우리의 것’(nostra)으로서 삼으시는 ‘연합체의 보증’(pignus societatis)이 된다(2.12.3).


제 2위 하나님께서는 타락 전에도 천사와 사람들의 ‘머리’(caput)가 되셨으므로, 사도 바울은 그 분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 1:15)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분께서 사람이 되심은 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죄의 값을 치르고자 하심이었다. ‘피가 없이는’(sine sanguine) 사함이 없다(레 17:11; 히 9:22).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쓸데없듯이(마 9:12) 타락이 없었다면 성육신이 없었을 것이다. 이를 교훈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은 성육신(요 1:14) 전에 타락을 먼저 전한다(요 1:9~11). 오직 육체의 피흘림이 ‘속죄의 표징’(piaculi signum)이 된다(2.12.4).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심은 불완전하게 지음 받은 인류를 완성하기 위함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최초의 인류는 그리스도의 창조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골 1:15~16). 이제 타락한 인류는 그리스도의 구속 중보로 말미암아 그 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골 1:18). 그러므로 타락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없었을 것이다(2.12.6~7).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역할’(partes mediatoris)을 다하기 위하여 참 인성을 취하셨다. 예수님의 육체는 단지 ‘환상’(spectrum)이 아니었다. 그 분께서는 ‘천상적인 육체 가운데’(coelesti carne) 오시지도 않으셨다. 그 분은 ‘사람의 씨로부터’(ex hominis semine) 난 사람이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해서 다음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째,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나셨다. 둘째, 그 분께 영원한 ‘왕좌’(thronus aeternus)가 약속되었다. 셋째,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우리의 본성’(natura nostra)을 지니심으로 우리에게 ‘자비하고 충성스러운 중재자’(misercors ac fidelis intercessor)가 되셨다. 넷째,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모든 것이 우리에게 속하였다’(2.13.1).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참 본성 가운데 자신을 비우셨음’(exinanitum)은 육체 가운데 죽임을 당하심으로써 우리를 대속하기 위함이셨다(빌 2:7~8; 벧전 3:18). ‘그 분께서 몸과 영혼 가운데’(carne et anima) 사람으로 나시지 않았다면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심과 부활하심이 무의미할 것이다(고후 3:14; 고전 5:12~20).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이 되심은 그 분께서 ‘우리의 본성과 연합체’(ad naturae societatem)가 되심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창세기 3:15의 여인의 후손이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파악된다(2.13.2).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semen)로서 오셔서(갈 4:4)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하신 분이심을(갈 3:16) 가르침은 분명하나 더불어서 그리스도와 인류의 하나됨이 강조되는 것이다(2.13.3).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 ‘악이나 부패’(vitio et corruptela)가 없으셨다. 그 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녀를 통하여서 다윗의 씨로부터 나셨다’(quod per eam ex semine Davidis genitus fuerit Christus)(2.13.3). 그 나심은 아담의 타락 전의 출생과 같이 순결하고 오염이 없었다. 이러한 ‘순수한 출생’(generatio pura)은 성령에 의해서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았다(요 17:19). 성령으로 잉태되심은 성령으로 조성되셨음(formatio)과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셨음’(sanctificatus est a spiritu)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원죄에 속한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취하셨으나 성령의 역사로 순결하게 받으셨다. 이러한 잉태는 삼위일체론적이며 기독론적인 신비를 담고 있다.


“무한한 본질의 말씀이 인간의 본성과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룬다고 해서 우리는 그 분께서 그 속에 갇혀 계신다고 공상하지 않는다. 놀랍도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 오셨지만 하늘을 떠나지 않으셨도다! 놀랍도다, 그 분께서 처녀의 태중에 계셨으며, 지상에 다니셨으며, 십자가에 달리고자 하셨으며, 처음과 같이 항상 우주에 편만하셨도다!”(2.13.4).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2)


'제12강좌' 위격적 연합을 통한 양성의 교통: 선지자, 왕, 제사장
(기독교강요 2.14.1-2.15.6)


1. 위격적 연합과 위격적 사역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verbum carnem esse factum). 이는 말씀이 육신으로 ‘변했다거나’(versum) ‘섞여서 혼합되었음’(confuse permixtum)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육신은 ‘가장 위대한 신비’였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성으로만 계셨다. 그러나 ‘때가 차매’(갈 4:4) 동일한 말씀의 위격 가운데서 그 신성이 마리아의 태로부터 성령으로 조성된 인성과 연합되었다. 신성과 인성은 위격 안에 있으나(en-hypostasis) 위격은 아니다(an-hypostasis). 성(性, natura)은 위격(hypostasis)과는 달리 실체(substantia)가 아니므로 그 자체로 개체적 존재성은 없다. 그러므로 양성은 각각 고유한 속성(proprietas)을 유지한 채로 오직 위격 안에만 있으며 오직 위격을 통하여서만 교통한다(2.14.1).


이렇듯 칼빈은 위격적 연합(unio hypostatica)을 통해서만 양성의 교통이 있음을 명백하게 주장함으로써 이후 그의 후예들에 의해서 전개된 개혁주의 속성교통론의 교리적 기초를 확고하게 수립하였다.


“영원 전에 아버지로부터 나신 말씀이 위격적 연합으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sermo ante saecula ex patre genitus, unione hypostatica naturam humanum susceperit).


위격적 연합은 ‘두 본성으로 한 인격을 이루는 것’(personam unam constituit ex naturis duabus)으로 정의된다(2.14.5).


칼빈은 위격과 성을 구별하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양성의 연합 가운데서 한 분이심(unitas in unione, unity in union)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초대 교회의 네스토리우스가 ‘이중의 그리스도’(Christus duplex)를 생각한 것은 위격과 성을 혼동하였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였다. 칼빈은 또한 양성의 연합 가운데서도 각각의 성은 고유한 속성을 유지함을 분명히 주장하였다. 초대 교회의 유티케스는 이러한 진리를 거슬러 양성이 섞여서 전혀 다른 ‘제 3의 무엇’(something third, quid tertium)이 된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고 비판하였다. 이렇듯 양성을 ‘분리하는 것’(distrahere)과 양성을 ‘혼합하는 것’(confundere)이 모두 거부되었다. 이로써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고(inconfuse), 변화되지 않고(immutabiliter), 분할되지 않고(indivise), 분리되지 않고(inseparabiliter) 연합한다는 칼케돈 신경(451)의 교리가 충실히 계승되었다(2.14.4).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칼빈은 양성이 서로 간에 자체로 교통한다는 루터란들의 속성교통론을 단호히 거부하였다(2.14.1).


칼빈은 성육신한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양하게 기술된 성경의 본문들을 위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communicatio idiomatum)이라는 관점에서 일관성 있게 읽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하신 본질’(essentia aeterna)로서 신성에 고유한 속성만을 표현하는 말씀들도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성자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계셨으며(요 8:58),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영광을 받으시며(요 17:5),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일하시는 분이라는(요 5:17) 말씀들이 예시된다.


둘째로, 인성에 고유한 속성만이 표현된 말씀들도 양성의 위격적 연합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성자의 낮아지심과 육체 가운데 오심이 주로 거론된다. 성자께서는 ‘아버지의 종’이시다(사 42:1). 그 분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시며(요 8:50), 자신의 뜻을 행하려고 하시지 않으시며(요 6:38), 지혜와 키가 자라 가시는 분으로서(눅 2:52),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분이시다(눅 24:39).


셋째로, 신성에 고유한 속성과 인성의 고유한 속성을 함께 표현하는 본문들을 통하여서 위격적 연합에 따른 속성교통이 설명된다. ‘하나님이(신성) 자기 피로(인성) 사신 교회’(행 20:28); ‘영광의 주를(신성) 십자가에 못 박지(인성)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신성)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인성)’(요일 1:1); ‘그가’하나님이’(신성)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인성)’(요일 3:16).


하나님께서는 피가 없으시며, 수난을 받을 수도 없으시며,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죽으실 수 없으시다. 고난당할 수 있음(passibility)은 인성의 속성에 속한 것이다. 그런데 인성은 실체가 아니므로 고난의 주체가 될 수 없다. 고난당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 분의 위격 가운데 인성은 항상 신성과 함께 있다. 성육신 이후 중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든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으로서 계시며, 일하신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고 죽으셨다. 고난당하심은 인성에 따른 것이었다. 다만, 말씀들에 의해서, 고난당하심이 신성에 따른 것은 아니었지만 위격적 연합에 따른 양성의 교통에 의해서 신성에 ‘돌려진다’(transferuntur). 마리아가 ‘주의 어머니’로 불리는(눅 1:43) 소이(所以)도 여기에 있다(2.14.4). 결론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에 따라서(ad humanitatem),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나셨으며 고난을 당하셨다고 진술될 수 있다.


“동일하신 그 분 자신께서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셨으므로, 양성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한 성에 속한 것을 다른 성에 주시고자 하셨다”(quia ipse idem erat Deus et homo, propter duplicis naturae unionem alteri dabat quod erat alterius)(2.14.2).


신인양성의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참 실체’(vera substantia)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씀들이 요한복음에 반복해서 예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로부터 권능을 받았으니 죄를 사하시는 분이시다(요 1:29). 그 분께서는 아버지의 임명을 받아서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요 5:21~23), 세상의 빛(요 9:5; 8:12), 선한 목자며 유일한 문(요 10:11, 9), 참 포도나무(요 15:1)가 되신다.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시고(빌 2:6~8) 높아지셔서(빌 2:9~11)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히 2:9) 자신의 나라를 하나님께 바치리라는 말씀(고전 15:24)은 그 분의 왕국이 유한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중보자로서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의 위격적 사역이 마지막에 어떠할 것인지를 드러낸다.


“진실로 처음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는 끝도 없을 것이다”(2.14.3).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양성의 위격적 연합은 단지 동력적(動力的)으로나 가현적(假現的)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은 그가 단지 성령으로 인하여 처녀의 태중에서 나셨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는 약간의 신적인 요소가 인간적 요소에 가미된 ‘혼합체’permixtum)”이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세르베투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한 ‘관념’(idea)에 지나지 않았다. 성육신은 이 관념의 ‘형상화’(figuratio)에 다르지 않았다고 보았다(2.14.5-8). 세르베투스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가운데서 그 분의 양성적 중보를 다루는 것이 지극히 모순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2. 그리스도의 삼중직(munus triplex)


중보자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 왕, 제사장으로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으며 다 이루신 의를 여전히 전가해 주신다. 그 분의 계속적 중보는 다 이루신 자신의 의를 여전히 전가해 주심에 다르지 않다. 그 분께서는 지금도 삼중직을 계속 수행하신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 직분을 감당하셨으며 지금도 감당하신다. 구약의 백성들은 선지자들을 통하여서 ‘유익한 가르침과 구원에 충분한 것들’을 들었지만 메시아가 오셔서 그 분으로부터 ‘지식에 충만한 빛을’(plenam intelligentiae lucem) 받을 것을 소망하였다.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믿었다(요 4:25). 그 분께서 오시면 ‘증인’으로서(사 55:4), ‘모사’로서(사 9:6; 28:29) ‘영원한 의’를 드러내실 것이라고(단 9:24) 예언되었다(1.15.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진리의 성령의 역사로 가르치는 중보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신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자마다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마 17:5).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 받으신 것은(사 61:1~2; 눅 4:18) 가르치는 역할을 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몸으로 복음이 계속 전파되는 일에 성령의 능력이 작용하게 하려 하심이셨다.’ 여기에서 칼빈은 ‘교리의 완전함’(perfectio doctrinae)이 그 분 안에 있으므로 ‘그리스도 자신 외에서’(extra ipsum) 지식을 구하는 것은 ‘복음의 단순성을 넘어서는’(ultra evangelii simpliciatem) 것이라고 경고한다(2.15.2).


둘째로, 그리스도의 왕직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의 ‘힘’(vis)과 ‘영원성’(aeternitas)에 대해서 주목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왕직의 이러한 특성을 그 분의 ‘인격’persona)에서 찾는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구원과 관련해서 교회와 교인들 전체에게 미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가 영원하듯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도 영원하다(단 2:44; 눅 1:33).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영원성은 성도들을 ‘복된 불멸에 대한 소망으로’ 인도한다(2.15.3).


그리스도의 왕권은 세상적 개념과는 달리 단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성령의 선물들로써’(donis spiritus) ‘내적이며 외적으로’(intus et extra) 채워주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우리와 교통되게 하심에 있다. 지금 그 분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권능으로 무장시키시고, 자신의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장식하시고, 자신의 부요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러한 일이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음’이 곧 그 분의 통치(gubernatio)이다(2.15.4).


그리스도의 왕직과 관련해서 칼빈은 특히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하늘의 생명’(vita coelestis)이 우리에게 내려졌음을 강조한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거처로 택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하늘 보화를 그를 통하여 풍부하게 흐르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대사’(legatus)가 되셔서 교회와 성도의 ‘머리’(caput)로서 다스리심은 영원하다(엡 1:20~23). 그리스도의 통치로 다스림을 받음은 그 분의 은혜대로 선물을 받음에 다르지 않다(엡 4:7).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다 이루신 것을 다 전가해 주시면 구속의 중보직은 끝이 난다. 그 때 그 분께서는 자신의 나라를 하나님께 바치며(고전 15:24) 하나님께서 만유의 주가 되게 하신다(고전 15:28). 이로써 아들은 창조와 타락 전의 영광을 누리며 제2위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대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종국적으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중보는 영원하다(2.15.5).


셋째로,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으로서(시 110:4; 히 5:6; 7:15) ‘자신의 거룩하심으로’(sanctitate sua)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다’(conciliet). 주님께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심은(요 17:19) 오직 대속의 역사를 이루기 위함이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속죄물’(piaculum)이 되셨다. 그 분께서 ‘제사장’(sacerdos)으로서 자신을 ‘제물’(sacrificium)로 드리셨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만 우리를 위한 ‘사함’이 되신다(히 9:22).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화목의 법에 따라서’(aeterna reconciliationis lege)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hostia)이 되시고 ‘영원한 중재자’(aeternus deprecator)로서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연합체’(societas)가 되게 하신다(히 7~9).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하신 제사장으로서 친히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중보자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다 이루신다(2.14.15). 그곳에 계신 그 분께서 우리 안에 계시도다! 아멘.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3)


'제13강좌' 그리스도의 구속자 직분: 비하(卑下)와 승귀(昇貴)(기독교강요 2.16.1-18)


1. 구속자 그리스도


‘구속자의 직분’(redemptoris munus)이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졌다. 그분께서 ‘종내 구원의 종점까지 줄곧 이끄심으로 말미암아’(per continues progressus ad ultimam usque salutis metam) 우리를 구속하신다. 그분께서 자기 백성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오셨다(마 1:21; 눅 1:31). 버나드가 노래했듯이, ‘예수의 이름은 입에 꿀이요 귀에 음악이며, 마음에 기쁨이요, 동시에 약이 된다.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강화(講話)는 향기가 없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그리스도께 구할 ‘목표’(scopus)는 ‘그분 자신 안에 있는 의(iustitia)와 해방(liberatio)과 생명(vita)과 구원(salus)’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푸는 방식과 방법’(placandi modus ac ratio)으로서 주님의 ‘무름’(satisfactio)이 요구된다(2.16.1). 죄로 인하여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분과 원수가 되어 있었다(롬 5:10; 갈 3:10, 13; 골 1:21~22).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꺼이 또 그저 베푸시는 자신의 관용’(sponte ac gratuita sua indulgentia), 즉 ‘거저 베푸시는 호의로’(gratuito favore) 우리의 구원이 역사한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부성적 사랑’(benevolentia et caritas paterna)을 받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다(2.16.2).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자신의 것’(quod suum in nobis)를 찾으려고 하신다. 그분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요일 4:19). 그리하여서 ‘우리에게 거저 베푸시는 순수한 사랑으로써’(mera et gratuita nostri dilectione) 우리를 자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하시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에게로 눈과 마음을 고정해야 한다(2.16.3).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여 사랑하셨다(엡 1:4~5).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어거스틴의 말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지 않은 것으로 그분을 거역했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남은 자신의 형상의 불씨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시고 사랑하셨다(2.16.4).




2. 그리스도의 비하(humiliatio)


통상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은 성육신, 고난, 죽으심, 장사되심을 포함한다. 성육신과 고난에 관해서는 위격적 연합을 통한 사역의 장에서 다루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죽으심부터 논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호의와 자비를 베풀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그분 자신께서 복종하신 전체 여정(旅程)에(toto obedientiae suae cursu)’에 미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의 인격을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해방의 값을 치르기 시작하셨다”(ex quo induit personam servi, coepit ad nos redimendos pretium liberationis solvere).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redemptio)로 주셨다(마 20:28). 그분께서 우리의 ‘화목자로’(reconciliator) 세움을 받았으며(롬 3:25)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화목케’(reconciliatos) 되었다(롬 5:10). 그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려고 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요 1:29; 빌 2:7~8). 그분께서 제물로서 제사장이 되셨듯이 양으로서 목자가 되셔서 목숨을 버리셨다(요 10:15; 롬 4:25). 사도신경은 그리스도의 나심으로부터 죽으심까지를 고려하여 대속의 사역을 적합하게 고백한다. 그곳에 ‘완전한 구원의 총화’(perfectae salutis summa)가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순종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이 되게 하셨다(롬 5:19; 고후 5:21).


“우리를 위한 생명의 질료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다”(in morte Christi statuitur nobis vitae materia).


도수장의 양과 같이 잠잠히 순종하심(사 53:7; 행 8:32; 마 27:12, 14), 여기에 그리스도의 ‘필적할 수 없는 사랑의 본’(本)(amoris incomparabilis specimen)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한 ‘죽음의 종류’(genus mortis)는 우리를 구속하는 ‘값을 무르기 위해서’(satisfaceret) 우리의 ‘정죄를 자신에게 옮기는 동시에 자신 가운데 우리의 죄를 수용하심으로써 우리를 해방하시는 죽음이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무름’(satisfactio)이 되셨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지셨다. ‘무죄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죄하기 때문에 죽음이 마땅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다 전가 받으셨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사 53:12).


그가 도둑질하지 않은 것이라도 우리를 위하여 무르셨다(시 69:4). 그가 우리를 위하여 ‘갚으심’(compensatio)으로 ‘죄의 값’(piaculum)을 대신 치르셨다(2.16.5).


그리스도께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심은 이미 율법에 희미하게 예시되었다(신 21:23). 그분께서 ‘속죄’(twmva)를 위한 ‘제물’(~va)이 되셔서(사 53:10) 우리의 ‘오점과 형벌’(macula et poena)을 감당하셨다. 그분이 우리의 불의를 ‘전가’(imputatio)받으셨다. 그리하여 우리를 위하여 ‘저주’(damnatio)가 되시사 ‘죄의 값’(piaculum)을 치르셨다(갈 3:13~14; 벧전 2:24). 그분이 우리의 ‘구속이며 속전이며 대속물’이셨다.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무르는 제물’(satisfactoria peccati hostia)이 되었다. 그분의 흘리신 피가 ‘배상금’(litatio)이요 ‘우리의 때를 씻는 대야’(lavacrum)가 되었다(2.16.6).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구속의 값’(pretium redemptionis)을 치르셨다. 그가 죽으심은 죽음에 삼키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함이셨다(벧전 3:22).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사망의 권세를 물리쳐서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 주셨다(히 2:14~15). 이것이 그분의 죽음이 맺은 ‘처음 열매’(primus fructus)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의 의의 전가를 받아서 죄를 죽이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한다(롬 6:4~5; 갈 2:19; 6:14; 골 3:3). ‘이중적 축복’(duplex beneficium)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를 결박했던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며 우리의 육을 죽이는 것이다’(liberatio a morte cui mancipati eramus et carnis nostrae mortificatio)(2.16.7).


칼빈은 지옥강하(降下)를 교리의 요점으로서 중요하게 다룬다. 이곳에는 ‘신비’(mysterium)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사도신경에 이 교리가 포함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사도신경에는 ‘믿음의 완전한 개요’(absoluta fidei summa)가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지옥강하의 교리가 경시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혜택이 많이 상실될 것이라고 하였다(2.16.8).


가톨릭과 루터란들과는 달리 칼빈은 지옥강하를 유형적이거나 인격적인 이동으로는 이해하지 않았다. 그는 벧전 3:19의 옥들의 영들에게 전파됨을 영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힘으로 그들에게 비추셔서 그들이 소망으로 맛보았던 은혜가 세상에 나타났음을 깨닫게 하였다고 하였다(2.16.9). 나아가서 지옥강하를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값’(pretium)으로서 자신의 ‘몸’(corpus)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더 위대하고 훌륭한 값 즉 ‘저주 받고 버림받은 사람의 영혼이 겪는 무서운 고통들’(diros in anima cruciatus damnati ac perditi hominis)을 당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보았다(2.16.10).


칼빈은 지옥강하 교리가 그리스도께서 영혼으로 ‘고통들을 당하심으로써’(implicitum doloribus) 우리가 악마의 권세와 사망의 두려움 그리고 지옥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음을 가르친다고 강조하였다(2.16.11). ‘참으로 그리스도의 영혼이 형벌에 참여하지 않았다면’(nisi poenae fuisset particeps anima) 그분께서는 우리의 몸만을 위한 구속자가 되셨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무한한 고통을 당하셨다. 여기에서 칼빈은 그리스도의 영은 그분의 인성에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아폴리나리우스는 지옥강하의 교훈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2.16.12). 칼빈에 의하면 지옥강하 교리는 주님께서 사망으로 인한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으나(요 12:27~28; 13:21; 마 26:37~39; 눅 22:43~44; 마 27:46) 그 고통에 매이지 않고 사망을 이기셨음을(행 2:24) 가르치므로 유익하다. 본 교리를 통하여서 우리에게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공로는 그분께서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으로 당한 고통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칼빈의 입장은 개혁주의 신학자들 특히 바빙크에 의해서 충실히 계승되었다.




3. 그리스도의 승귀(elevatio)


중보자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은 부활, 승천, 보좌 우편에의 재위, 재림을 포함한다.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다. 부활의 권능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죄가 말소되고 죽음이 말살되었으며, 그의 부활에 의해서 의가 회복되며 생명이 소생했다’(롬 4:25; 빌 3:10~11; 벧전 1:21).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부활을,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죽음을 묵상해야 한다.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교훈에 머물게 되고 죽음이 없다면 부활은 허탄한 사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고전 15:17; 롬 8:34). 둘째,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는 ‘중생하여 의에 이른다’(regeneremur in iustitiam). 그리하여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된다(롬 6:4; 골 3:3).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도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2.16.13).


승천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자신의 왕국이 참으로 상서롭게 시작되었다’(regnum suum vere auspicatus est). 승천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부어주신다(요 16:7; 행 2:33). 그분이 떠나심은 우리 속으로 오시기 위함이셨다(요 14:18~19; 16:14). 그리하여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이루시고자 하셨다(마 28:20; 요 14:16). 승천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이루시고 ‘더욱 현재(顯在)하는 능력으로’(praesentiore virtute)천지를 주관하시게 되었다.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를 항상 마음에 모시게 되었다(2.16.14).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이 통치의 시작이라면 보좌 우편에 계심(sessio)은 다시 내려오실 때까지 계속적으로 다스리심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caput ecclesiae supra omnia)로서(엡 1:20~22; 빌 2:9; 고전 15:27) 다스리신다(2.16.15).


승천과 재위의 은혜는 무엇인가? 첫째, 주께서 승천하심으로 아담 이후 닫힌 문을 여셨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하늘 성소에 계신다. 그분이 화목주로서 역사하심으로 우리가 보좌에 가까이 갈 길을 얻었다(히 7:25; 9:11~12; 롬 8:34). 셋째,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서 성령을 내려주셔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시고 각종 은사를 주셔서 성도의 삶을 살게 하신다. 그리하여서 종국적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심을 완성하신다’(ecclesiae suae aedificationem consummrit)(2.16.16).


승귀의 마지막은 재림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virtutis suis) 승천하신 때와 같이 보이는 모습으로 하늘로부터 내려오신다(행 1:11; 마 24:30). 그 때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모두 변화되어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고전 15:51~52; 살전 4:16~17).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심이 우리에게 ‘놀라운 위로’(egregia consolatio)가 됨은 그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영예에 동참하는 사람들’(honoris consortes)로 삼으시기 때문이다(마 19:28). 그때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심판의 보좌에서 실행됨을 볼 것이다. 심판의 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가 심판하고 계시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그리고 전적인 공로로 말미암아 낱낱이 사해짐을 세세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아멘의 찬송을(고후 1:20) 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찬송의 입술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삶 가운데 영원히 닫히지 않을 것이다(2.16.17-18).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4)


'제14강좌'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 사랑의 시작은 의(義) (기독교강요 2.16.19-2.17.6)


1. 성부의 사랑과 성자의 공로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과 사역을 다룬 후 구원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장이(2.17) 전적으로 속죄론에 할애된다. 속죄론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 자체나 보좌 우편에 재위하심으로써 행하시는 전가 자체가 아니라, 의의 전가-가치를 다룬다.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심이다. 속죄론은 제물 자체나 제사 자체가 아니라 제사의 대상인 제물의 가치, 즉 제물의 제사-가치를 대상으로 삼는다.


속죄(atonement, at-one-ment)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죄의 값을 치르고 하나가 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칼빈과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속죄의 의의와 가치를 ‘satisfactio’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이 단어는 본래 ‘빚 갚기’ ‘보석금 내기’ 그리고 ‘사죄’ ‘사과’ ‘탄원’이라는 어의를 가진다. 이로부터 ‘만족’이라는 뜻이 파생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뜻을 포괄하는 성경적 개념으로서 ‘무름’(la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무름은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의 공로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다 이루심을 전제하고 전가를 지향한다. 그것은 대리적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우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다(사 53:10; 눅 2:14; 갈 1:4; 골 1:19~20). 속죄의 일차적 동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적 사랑에 있다. 그리스도의 무름은 만세 전에 있었던 삼위 하나님의 협약(pactum salutis)에 기초한다. 그것은 아들의 공로에 따라서, 아버지의 죄사함(expiatio)과 용서(propitiatio)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우리가 화목(reconciliatio)에 이르는 대속(redemptio)의 원리를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친히 자신의 몸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위한 무름의 값’(satisfactionis pretium iusto Dei iudicio)을 치르셨다(2.12.3).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이시자 제물로서 우리를 위한 ‘무름’이 되심으로 ‘영원한 화목의 법에 따라서’(aeterna reconciliationis lege) 우리가 그 분과 ‘연합체’(societas)가 되었다(2.15.6).


우리의 구원을 위한 삼위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성자의 대리적 무름에 있다. 하나님의 자비는 아들을 주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자리에 세우심으로써 그 공로를 조건 없이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심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아들의 ‘공로’(meritum, promeritum)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주’로서(행 3:15) 우리의 ‘인도자’(dux)요 ‘통치자’(principium)되심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정하심대로’(ad Dei ordinationem) 그 분의 모든 뜻을 이루심에 있었다.


이렇듯 그리스도의 무름을 다루면서 칼빈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공로를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공로의 ‘제1원인’(causa prima)이라고 하였다. 성도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 시초부터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말미암는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공로의 시초는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mero beneplacito) 중보자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저 베푸시는 호의’(gratuitus Dei favor)와 ‘그리스도의 순종’(obedientia Christi)은 서로 대립되거나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역사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에는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쏘씨누스를 위시한 궤변론자들의 주장은 지극히 허망되다. 칼빈은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자신의 논지를 부각시킨다. 어거스틴은 성자 하나님께서 ‘인성으로’(natura humana) 구속사역을 성취한 것이 성부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을 참으로 기쁘게 하시는 것 외에 어떤 다른 공로도 그리스도에게는 없다’ 라고 단언한다(2.17.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사랑이 ‘지고한 원인, 혹은 기원’(summa causa vel origo)이 된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와 화목하시기를 원하셨다(골 1:19~20; 고후 5:19). 그리하여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엡 1:4~5) 그저 주시는 은혜 가운데(엡 1:6) 우리를 서로 화목하게 하려 하셨다(엡 2:15~16).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사 그 아들을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i`rasmoj)로 보내셨다(요일 4:10; 요일 2:2).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 구원의 질료’(salutis nostrae materia)로 삼으셨다. 구원의 공로는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께 있다. 믿음은 ‘형상인’(formalis causa)으로서 ‘이차적이며 부수적’(secunda et propior)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호의로’(favore suo)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우리와 화목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성자께서 ‘자신으로부터 얻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에 있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자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시사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다(고후 5:21). 성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자의 의가 역사하게 되었다. 성부께서 성자의 의로써 사랑하셨다. 성부께서 친히 ‘의의 원천’(fons iustitiae)이 되셨다. 그러므로,


“사랑의 시작은 의(義)이다”(principium amoris est iustitia)(2.17.2).




2.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satisfactio vicaria)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빚진 형벌을’(poenam nobis debitam) ‘무르셨다’(satisfecit). 그리스도의 ‘의’(iustitia)가 우리의 공로로 여겨졌다. 아들의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의인 삼으심에 아버지의 ‘호의’(favor)가 나타났다(롬 5:19). ‘그리스도의 순종으로’(obedientia)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되었다(2.17.3).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마 26:28; 눅 22:20). 오직 그 분의 피로 우리가 깨끗하게 된다(요일 1:7).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히 9:22, 28). 그 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mediator novi testamenti)로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셨다(히 9:15). 그 분께서 자신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히 9:12). 그 분께서 징계를 당하시고 땅에서 끊어지셨으니(사 53:5, 8) 우리가 아버지와 화목을 누리게 되었다. 그 분께서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으므로(갈 3:13; 벧전 2:24) 우리가 참 자녀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로 말미암은 죄를 사하고, 용서하며, 무르는 힘을(vim expiandi, placandi et satisfaciendi) 우리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분의 은총은 너무나 희미해질 것이다”(2.17.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변개치 아니하신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는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불순종의 값(pretium)에 대한 무름(satisfactio)을 요구한다(고전 6:20). 그 무름의 ‘속전’(avntilutron)을 주님께서 자신을 ‘화목제물’(i`rasthrion)로 드림으로써 치르셨다(롬 3:24~25; 딤전 2:6).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율법 가운데 우리의 행위들에 대해서 약속하신 것을(레 18:5) 얻게 된다”(nos consequi per Christi gratiam quod Deus operibus nostris in lege promisit).


우리의 죄 값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불’(solutio), 즉 ‘보상’(compensatio)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remissio peccatorum)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gratia)를 입고 계속해서 살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마다 그 분을 양식으로 먹고 산다(요 6:55, 57). 그 분께서 ‘생명의 실체’(vitae substantia)가 되시기 때문이다(2.17.5).


성부께서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세상을 위하여 내주셨다(롬 8:32; 요 3:16). 그리고 자신의 뜻을 이룬 아들을 높여서 지극히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빌 2:9). 아들의 영광은 아버지의 뜻을 이룸에 있었다.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로서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림에 있었다(요 17:19).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칼빈은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보여주는 ‘일람표와 같이’(vice tabulae) 성경의 순수한 가르침을 그 속에 다 포함한다고 보았다(2.16.18).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를 이루기 위함이셨다. 오직 우리의 의는 그 분의 ‘예’를 ‘아멘’으로 받음에 있다(고후 1:20). 우리의 순종은 아멘의 순종 외에는 없다.


“우리는 전체 구원과 그것의 모든 부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행 4:12).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작은 한 부분이라도 다른 곳으로부터 끌어오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우리는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서 그것이 ‘그 분 안에’ 있음을 배우게 될 것이다(고전 1:30). 만약 우리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구한다면, 그것들은 그 분의 기름부음 가운데 발견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능력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분의 주권에; 순결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잉태에; 온유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나심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심으로 그 분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히 2:17) 우리의 고난을 느끼셨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분의 수난에 있다; 형벌로부터의 방면(放免)을 구한다면, 그 분의 징계에; 저주로부터 사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십자가에(갈 3:13); 무름을 구한다면, 그 분의 희생 제물에; 정결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피에; 화목을 구한다면, 그 분의 지옥 강하에; 육신의 죽음을 구한다면, 그 분의 무덤에; 삶의 새로움을 구한다면, 그 분의 부활에; 영생을 구한다면, 또한 그곳에; 하늘 왕국의 유업을 구한다면, 그 분의 하늘로 들어가심에; 만약 보호, 안전, 모든 축복의 부요함을 구한다면, 그 분의 왕국에; 떨림 없는 심판을 구한다면, 그것은 그 분께 주어진 능력에. 요약하면, 모든 종류의 선함으로 충만한 곳간이 그 분께 있으니, 다른 곳이 아니라, 이 샘으로부터 우리를 가득 채우도록 하자”(2.16.19).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5)


'제15강좌' 성령: 성도의 그리스도와 연합의 띠(기독교 강요 3.1.1-3.1.4)


1. 성령의 우주적, 일반은총적, 특별은총적 역사


기독교 강요에서 성령론에 전적으로 할애된 장은 오직 제3권 1장 한 장 밖에 없다. 성령의 신격(deitas)이 이미 삼위일체론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1.13.14-15), 이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개인 구원의 과정에서 작용하도록 역사하는 성령의 ‘은밀한 사역’(arcana operatio)에 대해서만 논의된다. 칼빈이 제목을 붙였듯이 기독교 강요 제3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식과 그것으로부터 우리에게 나타나는 열매들과 그것에 따르는 효과들’을 다룬다. 이는 조직신학의 구원론에 해당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2권 마지막 장을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의 구원론적 의의와 가치를 다루는 속죄론에 할애하였다. 그리고 제 3권에서는 그 공로가 어떻게 성도들에게 적용되는지를 논의한다. 성령의 부으심은 이러한 구원론의 서장(序章)에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100년 전, 칼빈 출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글을 통해서 워필드(B. B. Warfield)가 강조했듯이,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로서 성령의 우주적, 일반은총적, 특별은총적 역사를 기독교 강요 전권을 통하여서 요소요소 강조하였다. 첫째, 성령의 우주적 역사는 창조와 섭리에 미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천지를 무로부터 창조하셨다(1.14.20). 그리고 창조하신 것을 섭리로 보존하신다.


둘째, 성령의 일반은총적 역사는 ‘인류의’ 창조와 보존에 관계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을 받은 것은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말미암는다(1.15.5). 사람의 영혼은, 창조가 그렇듯이, 무로부터 실체가 시작되는 것이지 이미 존재하는 어떤 본질을 주입받아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창 2:7 주석).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류에게조차도 ‘영의 선물들’(dona Spiritus)을 수여하셔서 만물의 영장으로서 고급스러운 문화적, 사회적 삶을 살게 하셨다(2.2.15-16). 이러한 성령의 일반은총적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심판의 때에 자신들의 무지를 하나님 앞에서 변명할 수 없다.


셋째, 성령의 특별은총적 역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시는 구원의 은총과 관련된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오직 택함 받은 백성에게만 미침으로 이를 교회적 은총이라고 부를 수 있다. 기독교 강요 제3권에 제시된 성령의 사역이 이에 해당한다.


워필드의 이러한 분류는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수작(秀作)을 남긴 크루쉐(Werner Krusche)가 ‘성령과 우주’, ‘성령과 사람’, ‘성령과 교회’ 라는 제하에 성령의 사역을 다룬 것과 일맥상통한다. 칼빈은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의 신격을 다루면서 그 분을 창조주 영(Spiritus Creator)과 중생주 영(Spiritus Regenerator)으로 부르면서 전자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보존하실 뿐 아니라 창조 전의 혼돈의 덩어리도 돌보신 분으로서의 특성을, 후자는 고유한 생명력으로 생명을 주심으로써 생명을 살리시는 분으로서 특성을 제시한다고 강조하였다(1.13.14-15). 워필드와 크루쉐가 간파한 처음 두 가지 성령의 역사와 나머지 세 번째 성령의 역사는 각각 창조주 영과 중생주 영의 능력(virtus)과 작용(efficacia)에 돌려진다.


2.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보혜사 성령


칼빈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분의 공로를 우리의 공로로 삼는 역사를 성령의 ‘은밀한 작용’(arcana efficacia)이라고 부른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밖에’(extra nos)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안에’(in nobis) 계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in unum) 되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시며(엡 4:15)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시므로(롬 8:29) 우리가 그 분께 ‘접붙임’을 받고(롬 11:27) 그 분으로 ‘옷’ 입어야 한다(갈 3:27).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한 분으로서 증언하시듯이 성도의 구원을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7-8). 물은 ‘씻음’(ablutio)을, 피는 ‘희생제물’(sacrificium)을, 성령은 ‘인’(印, sigillum)을 뜻한다.


성도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고 거룩함에 이른다(벧전 1:2). 성령의 은밀한 사역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전체 구원 과정 가운데서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사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전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11) 말하고 있다. 이렇듯,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의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능력의 영으로서 그것을 우리에게 전가시키신다.


성령은 아버지 그리고 아들로부터(Filioque) 출래하신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은혜를 아버지로부터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 은혜를 ‘자신으로부터’(a se ipso)부여하신다(요 14:16 주석). 성부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지만 아들에게 성령의 ‘전적인 충만을’(totam plenitudinem)주셔서 자신의 은혜를 나누어 주는 ‘수종자와 청지기’(minister ac despensator)삼으셨다. 그러므로 성령을 ‘아버지의 영’ 혹은 ‘아들의 영’이라고 부른다. 한 성령의 교통으로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은혜가 함께 역사한다(고후 13:13).


성경은 아들의 영을 특히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부르는데(롬 8:9, 11), 이는 그리스도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부와 같은 영에 참여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분의 중보자로서의 성격 때문에 그러하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특정됨은 그 역사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엡 4:7) 전가되기 때문이다. 또한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살리는 영(Spiritus vivificans)으로서(고전 15:45) 우리를 그 분과 함께 한 자녀요 상속자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롬 8:17). 그리스도의 영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자신과 함께 그 분의 기업으로 삼으시는 ‘성결의 영’이시다(살후 2:13; 벧전 1:2; 롬 1:4). 그 영은 낮아지심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대속 사역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심으로써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영이시다(3.1.2).


3. 성령의 이름들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 무익할 것이다(3.1.2; 3.3.19; 3.11.1).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몸의 머리가 되시며 신부의 신랑이 되신다(엡 5:30).


보혜사 성령은 그 구원 역사를 표상하는 각각의 이름에 따라서 다양한 속성이 계시된다. 첫째, 성령은 ‘양자의 영’(spiritus adoptionis)이라고 불려진다(롬 8:15; 갈 4:6).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증거하시고 우리가 그 분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둘째, 성령은 ‘우리의 기업에 대한 보증이며 인’(arrhabo et sigillum nostrae haereditatis)이라고 불려진다(고후 1:22; 엡 1:14). 성령의 감화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셋째, 성령은 ‘의로 말미암은 생명’(vita propter iustitiam)이라고 불린다(롬 8:10).


넷째, 성령은 ‘물’(aqua)이라고 칭해진다. 성령은 은밀한 중에 물을 주어 의의 싹을 돋게 하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갈한 자에게 물을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한다(사 44:3). 목마른 자들은 물을 마셔야 하리니(사 55:1), 주님께서 자신께 와서 마시라고 하신다(요 7:37). 주님께서 생수의 강, 성령의 강의 근원이 되신다(요 7:38). 물은 또한 씻음의 상징이 된다(겔 36:25). 다섯째, 성령은 은혜를 시냇물과 같이 부어 생기를 돋게 하므로 ‘기름’(oleum) 혹은 ‘기름 부음’(unctio)이라는 이름을 가진다(요일 2:20, 27). 여섯째, 성령은 사악한 육욕을 태워버리고 헌신과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므로 ‘불’(ignis)이라고 불림이 합당하다(눅 3:16). 일곱째, 성령은 모든 은사가 위로부터 내려오는 ‘샘’(fons)이라고 불려진다. 여덟째, 성령은 ‘주의 손’(manus Dei)으로 칭해진다(행 11:21). 성령의 작용으로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선한 어떤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성령 자신의 은혜의 열매들이다’(si qua sunt in nobis bona, fructus sint gratiae ipsius). 성령을 칭하는 이름들은 이렇듯 무수한 그 열매들의 수만큼이나(갈 5:22-23) 많다(3.1.3).


4. 성령과 믿음, 그리스도


성령의 특별은총적 역사가 작용함은 오직 성도의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믿음은 성령의 선물이다. 믿음은 성령이 행하는 ‘주요한 일’(praecipuum opus)이다. 성령께서는 믿음을 주실 뿐만 아니라 믿음 가운데 구원사역을 행하신다. 성령께서는 오직 믿음으로써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in evangelii lumen) 인도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힘과 사역을 표현하는 말씀들은 대체로 믿음과 관련된다.


믿음은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음으로,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엡 1:13) 믿어 거듭난 사람마다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났다(요 1:12-13). 오직 이를 알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마 16:17). 믿음은 오직 ‘성령으로부터 생긴다’(prodire a spiritu).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이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살후 2:13). 성령이 ‘내적 교사’(internus doctor)로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하는 줄 알게 하신다(요일 3:24; 4:13).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아무도 자신의 가난함과 벗음과 눈 먼 것을 보지 못한다(계 3:17). 곧 성령은 ‘하늘나라의 보고(寶庫)을 여는 열쇠’(clavis coelestis regni thesauri)와 같다.


성도는 성령의 감화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믿음과 함께, 성령을 부어주신다(행 2:33).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아들을 증언하고 아들이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한다(요 14:17, 26; 15:26; 16:13). 그리스도 자신께서 ‘자신의 영으로’(suo spiritu)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이끄시지 아니하면 아무도 진리를 알 자 없다(요 6:44; 12:32; 17:6). 그러므로 성령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자신께서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라고 불림이 합당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고(눅 3:16) ‘자신의 복음에 대한 믿음에’(in evangelii sui fidem) 이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신다(고후 5:17). 그리하여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되게 하신다(고전 3:16-17; 6:19; 고후 6:16; 엡 2:2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주심으로써 그 영을 받은 사람들 속에 사시며 여전히 중보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속에 사심이 성령의 임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영 가운데 일하심이 곧 보혜사 성령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구원 사역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3.1.4).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6)


'제16강좌' 믿음:감화(persuasio)와 확신(fiducia)(기독교강요 3.2.1-3.2.43)


1. 믿음, 그리스도를 아는 것




구원의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의 손’을 잡지 않고 하나님의 도성에 이를 자 아무도 없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시며(quo), 사람으로서 우리가 걸어가는 길이시다(qua).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다(벧전 1:21). 하나님께서는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므로(딤전 6:16),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우리 마음에 비추어야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후 4:6).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빛’이시므로 오직 그 분을 따르는 자만이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 그러므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가는 길은(시 36:9)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 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14: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분의 본체의 형상’이시므로(히 1:3), 오직 그 분 자신과 그 분께서 행하신 일을 알고자 힘써야 하며(고전 2:2) 그 분만을 증언해야 한다(행 20:21). 왜냐하면 우리가 그 분을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이기 때문이다(행 26:17-18).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심이다(눅 10:22). 그리하여 우리가 그 분을 앎이다(3.2.1).


믿음이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지 교회를 높이면서 그것의 권위와 판단에 맹종하는 것이 아니다(3.2.3). 믿음의 근거는 ‘무지’(ignoratio)가 아니라 ‘지식’(cognitio)이다. 이러한 지식은 하나님 자신과 그 분의 ‘뜻’(voluntas)을 아는 생명의 지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의와 성결과 화평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으므로(고후 5:18-19)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느낌’(sensus)에 따라서 교회의 지시대로 이끌리기만 한다면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로 믿을 수 있다고 하는 가톨릭의 ‘맹목적 신앙’(fides implicita)이라는 개념은 허구이다. ‘아는 것이 없이’(nisi intelligere) ‘믿는 것’(credere)은 맹목적 인정이지 참 신앙이 아니다. 사도께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말씀 하셨을 때(롬 10:10), 이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인정하여 아는 것’(agnotio explicita)을 의미한다. (3.2.2).


그러므로 아무 것도 모르는 가운데 믿는 맹목적 신앙이 먼저 있고 이후에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연약한 믿음도 ‘참 믿음’(vera fides)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기를 원하신다(롬 12:3). 처음부터 무지하든지 알고 믿든지 하는 것이지, 모르고 믿은 후 어느 순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구체적으로 어떤 사실을 다 알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경건한 정서’(情緖, pius affectus)에 감화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인정하는 사람이 참 믿음의 성도이다(3.2.4-5).


‘그리스도를 아는 참 지식’(vera Christi cognitio)이 없이는 구원에 이를 자 아무도 없다. 복음은 ‘믿음의 말씀’에 대한 ‘좋은 교훈’ 즉 ‘믿음의 가르침’(doctrina fidei)으로서(딤전 4:6)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율법의 의를 성취하신(롬 10:4; 갈 3:25)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다. 복음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께 듣고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그 분을 배우게 된다(엡 4:20-21). ‘듣는 것’(audire)이 ‘믿는 것’(credere)으로 표현된다. 들어서 배우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다(사 54:13; 요 6:45). 그리하여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생명에 이를 것을 선포하였다(사 55:3; 시 95:7). 이렇듯, 말씀을 기록함은 듣게 함이요, 들어서 믿게 함이다(요 20:31). 믿음과 말씀은 마치 태양과 그 광선이 분리될 수 없듯이 나눠질 수 없다.


“믿음을 떠받쳐서 지탱하는 기초(basis)는 말씀이다. 말씀이 없다면 믿음은 쓰러진다. 그러므로 말씀을 제거한다면 믿음은 결단코 남을 수 없다.”


믿음은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롬 1:5; 빌 1:3-5; 살전 2:13).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신 것’(quid est)과 그 분의 ‘어떠하심’(qualis est)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떤 분이 되고자 하시는지 즉 우리를 향한 그 분의 뜻을 깨닫게 된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divinae ergo nos voluntasis notitia)에 다름 아니다. 오직 이 지식은 그 분의 말씀에서만 얻게 된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거역될 수 없는 진리’(inviolabilis veritas)를 계시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신실하시며(롬 3:3) 거짓이 없으시다(딛전 1:2). 믿음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분의 말씀 곧 진리를 인정하고 확신함이다. 믿음은 ‘진리에 대한 감화’(de veritate Dei persuasio)이다(3.2.6).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분께서 진리이심과 사랑이심을 계시한다. 시편 기자는 누차 주님의 ‘긍휼과 진리’(misericordia et veritas)를 함께 노래했던 바(시 25:10; 36:5; 40:40-41; 89:14, 24; 92:2; 98:3; 100:5; 108:4; 115:1; 117:2; 138:2), 이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보증’(unicus pignus)으로 바라봄에 있었다. 그러므로 다음으로 믿음의 바른 정의를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저 주신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는 것으로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진다”(3.2.7).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하며 그 위에 지탱되며, 유지된다. 이 약속은 그리스도의 순종-‘예’-으로 성취되었다(고후 1:20). 모든 약속은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한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으며 완성되었다. 값없이 주신 은혜의 약속을 바라보지 않는 믿음은 견고하게 설 수 없다. 그 약속을 그리스도 안에서 붙들지 않는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전혀 인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말씀’으로(롬 10:8), 그 진리이자 성취이신 그리스도께 부착(附着)해야 한다(3.2.29-32).




2. 믿음, 성령의 감화


믿음은 지각적인 인식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照明)’으로(illuminando)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것이다. 믿음은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롬 1:5). 그러므로 두뇌가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믿어서 의에 이르게 된다(롬 10:10). 믿음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원천으로(요 4:14; 7:38) 받아들이는 것이다(요 6:29).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기초하며 ‘그 분의 영’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서 ‘경건한 정서’(pius affectus)에 잠기는 것이다(3.2.8, 36).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과 그 선하심이 실재함에 대한(de eius veritate) 확실한 감화이다”(3.2.12)


오직 거듭나는 사람들은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다’(벧전 1:23).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오직 선택된 사람들에게만 단번에 영원히 부여된다(살전 1:4-5; 딛 1:1).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믿음이 아무리 연약하다고 하더라도 확고한 보증과 인침이 주어진다(엡 1:14; 고후 1:22).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믿음은 없으며(마 15:13), 참 믿음을 가지고 종국에 파선(破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딤전 1:19; 3:9). 오직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주의 선하심을 맛보게 된다(롬 8:15; 갈 4:6). 하나님의 선하심은 오직 아들의 사랑으로써 역사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사랑의 영’(spiritus amoris)을 주심으로써 그 영을 부음 받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셨다(롬 5:5). 그러므로 사랑에 이르지 못하는 ‘형식적 신앙’(fides informis)이 사랑과 함께하는 ‘내실적 신앙’(fides formata) 외에 따로 있지 않다.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오직 ‘사랑’으로 나오는 ‘거짓이 없는 믿음’ 밖에 없다(딤전 1:5). 가톨릭은 사랑의 공로가 함께 역사하는 믿음 외에 사랑과는 무관한 초보적인 믿음이 따로 있다고 하나 이는 전혀 비성경적이다(3.2.9-12).


믿음은 ‘경건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sana pietatis doctrina)이다. 믿음은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골 2:3)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다. 믿음은 성경의 전체 교훈을 아우른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 기도가 드려지고, 구원의 전체 과정이 이루어지며,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3.2.13). 믿음을 지식이라고 할 때, 이는 감각적인 지식을 초월한다. 마음이 믿음에 도달한 때에도 그 믿는 바를 감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감화되어’(persuasus) ‘그 감화의 확실성’(persuasionis certitudo)에 이를 때 감각한 것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된다. ‘믿음의 지식’(notitia fidei)은 ‘이해’(apprehensio)가 아니라 ‘확실성’(certitudo)에 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자주 ‘지식’(cognitio, scientia) 혹은 ‘인식’(agnitio)으로 불릴 때(엡 1:17; 4:13; 골 1:9; 3:10; 딤전 2:4; 딛 1:1; 몬 6: 벧후 2:21; 요일 3:2), 그 진리는 합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로 확정된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고후 5:7).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 분의 사랑 안에서 터가 굳어지고, 그 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충만한 은혜에 이름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엡 3:17-19). 그러므로 참 지식은 우리의 이해력이 아니라 성령의 감화력에 의지할 때에만 온전히 수납된다(3.2.14). 믿음은 성령의 은밀한 사역을 통하여 이르는 ‘확실하고 확고한’(certa ac firma) 감화이다. 믿음으로 말씀의 객관적 ‘확실함’(certitudo)에 대한 주관적 ‘확신’(fiducia)에 이른다. 성경에 있어서, 이러한 ‘확신’은 항상 믿음으로부터 기인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수납하고(시 12:6; 18:30; 잠 30:5) 그 분의 선하심을 의심치 않고 신뢰하게 된다(골 2:2; 살전 1:5; 히 6:11; 10:22). 그러므로 믿음에서 확신이 생기고, 확신에서 ‘담대함’(audacia)이 생긴다고(엡 3:12) 사도는 말한다(3.2.15).


성령께서 믿음의 ‘저자’(autor)이며 ‘원인’(causa)이다. 성령의 ‘조명’(illuminatio)이 없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이를 수 없다. 성령은 우리를 정결케 하며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운다. 그리고 아는 바대로 지키며 살게 한다(딤후 1:14). 성경은 우리가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 한다(갈 3:2). 이는 성령과 함께, 성령으로써, 믿음을 ‘하나님의 고유한 선물’(singulare Dei donum)로서 받게 된다는 뜻이다(3.2.33). 오직 성령으로써만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찰한다(고전 2:10-16). 성령이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로서 우리의 마음을 비추지 않으면 아무도 하늘의 비밀을 알만한 날카로운 시력을 얻을 수 없다(3.2.34). 믿음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고전 2:4-5). ‘믿음의 역사’(opus fidei)는(살후 1:11) ‘하나님의 역사’(opus Dei)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자신의 아들을 주심으로써 그 아들의 영을 받은 자마다 모든 좋은 것들에 참여하게 하심에 있다(3.2.35).


우리가 받은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으로서(고전 2:12) 우리가 그 분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롬 8:16).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사역을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서 부어주시는(행 2:33) 보혜사 성령 곧 ‘그리스도의 영’을 받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롬 8:9)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며(요 14:17),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심을 안다(요일 3:24; 4:13). 그 사심은 영원하다(3.2.39).




3. 믿음의 삶


진정한 성도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견고한 감화로’(solida persuasione) 흔들림 없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깨닫고 그 분의 사랑과 관용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과 ‘화평’(securitas)을 누린다(롬 5:1). ‘믿음의 최고 요체’(cardo)는 하나님 앞에서 화평을 누리고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하는데 있다(3.2.16). 믿음은 여호와를 온전히 바라며(시 27:14) 그 분의 말씀 가운데 요동치 않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희미하게 본다(고전 13:12). 그러나 믿음으로써, ‘확실하게’(certe), 하나님을 본다. 작은 창을 통해서 들어온 빛이 넓은 집을 비추듯이, 성령 가운데, 복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 그리하여서 우리가 주의 형상으로 변해간다(고전 3:18).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믿음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아니하니 재(灰) 아래서도 명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르거나 죽지 않듯이, 사탄도 믿음이 거하는 속마음의 자리에 까지는 내려오지 못한다(3.2.17-21).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timor)과 ‘떨림’(trepidatio)이 있다고 하나 그것이 ‘믿음의 화평’(securitas fidei)을 해치지는 못한다. 오히려 성도는 경건한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룬다(빌 2:12).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reverentia)와 함께 그 분의 은혜에 대한 ‘감미로움’(dulcedo)과 ‘달콤함’(suavitas)을 누리는 것이다(3.2.22-23, 26-28).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께 속한 모든 선한 것들’에 뿐만 아니라 ‘그 분 자신’께 동참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안에 계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분과 함께 ‘연합체’(societas)가 된다(3.2.24).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한 자녀는 그 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소망하며, 사랑한다. 소망은 바라는 것들 곧 믿음의 ‘실체’(hypostasis)이다. 그러므로 소망이 없으면 믿음은 무너진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니(롬 8:24), 이는 믿음 자체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히 11:1). 믿음과 소망은 같이 있으되(벧전 1:21) 오직 사랑과 함께 역사한다(3.2.41-43).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7)


'제17강좌' 중생으로서의 회개: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삶(기독교강요 3.3.1-3.5.10)


1. 육의 죽음과 영의 삶




복음은 믿음의 말씀이다.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복음의 총화’(總和, summa evangelii)가 ‘회개’(poenitentia)와 ‘죄사함’(remissio peccatorum)이다. 이 두 가지로 성도는 ‘새로운 생명’(vita novitas)과 ‘값없는 화목’(reconciliatio gratuita)을 얻는다. 죄사함을 얻고 은혜를 받음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말미암는다. 회개는 믿음을 따를 뿐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온다(3.3.1).


회개는 ‘죽음’(mortificatio)과 ‘삶’(vivificatio)의 두 요소가 있다. 자신과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과 의에 대해서는 사는 것이다. 이러한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분리되지 않는다. 오직 ‘참 회개’(poenitentia vera)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사심에 연합함으로써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회심’(conversio)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회개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회심’ 혹은 ‘되돌아옴’(reditus)을, 헬라어는 ‘바뀜’(mutatio)을 의미한다. 회개는 전체적으로 회심으로 이해되며, 회심은 믿음의 주요 부분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다음을 회개의 좋은 정의로 삼을 수 있다.


“실로, 회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의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하며 진지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게 된다. 회개는 우리의 육과 옛사람에 있어서의 죽음과 영에 있어서의 삶으로이루어진다”(3.3.5).


첫째로, 회개는 삶에 있어서의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다. 이는 외면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영혼 자체의 ‘변화’(transformatio)를 의미한다. 새로운 믿음을 가지고(겔 18:31), 마음과 뜻을 다하여(신 6:5; 10:12; 30:2, 6, 10)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다(신 10:16; 30:6; 렘 4:1, 3-4). 이는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약 1:8)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바라는 것이다(3.3.6).


둘째로, 회개는 ‘하나님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데서’(ex serio Dei timore) 생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바라보고 미리 자신의 죄를 숨김없이 다 내어놓는 것이다(렘 4:4; 행 17:30-31). 오직 세상의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고후 7:10) 하는 것이다(3.3.7).


셋째로, 회개는 육에 대해서는 죽고 영에 대해서는 사는 것이다. 진정 육체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대로 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맺는 삶을(눅 3:8; 행 26:20; 롬 6:4) 지향한다(3.3.5). 회개의 열매는 행악을 그치고 선을 행함으로 나타난다(시 37:3, 8, 27; 사 1:16-17). 참 회개는 성령의 감화를 받아서 자기를 부인함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사람’을 입는(엡 4:22-24) 것이다(3.3.8).


회개의 두 요소인 죽음과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참함으로’(ex Christi participatione) 말미암는다.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 분과 함께 죽었으므로 그 분과 함께 다시 살게 된다(롬 6:6, 8, 11). 다시 산 자로서 우리는 주의 영으로 새롭게 되므로 새사람을 입는다. 그리하여 지식에까지 새로움을 받는다(고후 3:18; 엡 4:23-23; 골 3:10).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시키는 ‘중생’(regeneratio)으로 해석된다(3.3.9).




2. 계속적인 회개의 삶


구원에 이르는 참 회개로 중생한 사람은 옛사람에 대해서는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난 삶을 산다. 그는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으로서의 삶을 산다. 이제는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므로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그 분의 영의 소욕대로 산다. 다만 거듭난 사람의 삶이 아직 완전하지는 않으니, 이는 그 안에 탐심을 촉발시키는 ‘부싯깃’(formes)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도의 지상의 삶 동안에 계속된다. 죽을 육의 몸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 성도는 여전히 ‘정욕’(concupiscentia)에 매여 산다. 이러한 육체의 소욕은 단지 ‘연약함’(infirmitas)에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죄’(peccatum)가 된다(3.3.10).


중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지배’(peccati regnum)는 끝이 나지만 ‘죄의 질료’(peccati materia)는 여전히 남아 있다. 죄는 지배력을 잃으나 여전히 성도들 가운데 남아있다. 죄의 형벌인 사망의 ‘죄책’(reatus)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죄를 짓는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롬 6:6) ‘죄의 법’(lex peccati) 즉 사망의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에게도(롬 8:2) 여전히 죄의 여적(餘滴)이 있다(3.3.11). 사람의 ‘욕심’(cupiditas)과 ‘육욕’(libido)은 ‘무질서한 것들로서’(inordinata) 하나님의 ‘질서’(ordinatio, avtaxia)에 반한다. 그러므로 죄이다(3.3.12).


어거스틴과 암브로시우스가 말한 바와 같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법은 폐지되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죽을 육신 가운데 남아서 역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의 삶 동안에 죄를 아예 없애지는 못할 것이로되 다만 죄가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롬 6:12). 죽음의 죄책은 옛사람과 함께 죽었으나 죄는 여전히 남아서 역사한다(3.3.13).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것들’ 가운데 놓여있다. 그러나 여전히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강함’이 함께 역사하는도다(3.3.14)!


성도의 삶 가운데 맺는 회개의 열매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거룩함’(sanctimonia)과 ‘순결함’(puritas)이다. 내면적인 감동이 없는 외면적 회개로서의 참 회개란 없다. 참 회개는 한 마음을 품고(약 4:8), 그 마음을 찢고(욜 2:13)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다(3.3.16-17). 거듭남에 이르는 단회적 회개와 거룩함에 이르는 반복적 회개는 구별된다. 그러나 양자는 모두 죄사함이라는 열매를 함께 맺는다(막 1:4; 눅 3:3).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행 3:19, 전반).


회개의 제 일 원인은 하나님의 ‘긍휼’(misericordia)에 있다(사 55:6-7). 회개함으로써 공로를 얻어 마땅한 죄사함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계속적 회개’(poenitentia perpetua)로 거룩함에 이르는 죄사함을 받음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3.3.18-20).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singulare donum)이다. 하나님께서 ‘생명 얻는 회개’(행 11:18)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엡 2:10). 하나님의 예비하신 뜻은 성도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않고(사 63:17) 성령의 조명에 따른(마 12:31-32; 막 3:28-29; 눅 12:10) 계속적 회개로써(히 6:4-6), 영생에 이름에 있다. 그러므로 ‘구원에 이르는 회개’(고후 7:10)는 구원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 줄곧 역사한다(3.3.21-25).


성도의 삶은 계속적 회개의 삶이니 그것에는 다음과 같은 ‘경향’(affectio)이 있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말미암은 ‘간절함’(sollicitudo)이 있다. 둘째, 자신의 옳다함을 버리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정결함에 이르고자 하는 ‘변명’(excusatio)이 있다. 셋째, 마음속으로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노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에 대해서 뉘우치는 ‘분함’(indignatio)이 있다. 넷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근심하며 떠는 ‘두려움’(timor)이 있다. 다섯째, 마땅한 의무를 기꺼이 순종하려는 ‘사모함’(desiderium)이 있다. 여섯째, 진정 수렁에서 건짐을 받은 사람으로서 다음 일을 행하고자 하는 ‘열심’(zelus)이 있다. 일곱째, 엄격히 죄의 값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구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징벌’(vindicta)이 있다. 버나드가 말했듯이, ‘회개는 마치 쓴 쑥에 꿀을 섞어 먹음과 같으니 달게 해서 먹으면 쓴 것이 약이 된다’(3.3.15).




3. 가톨릭의 궤변


오직 주님의 자비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사 61:1; 눅 4:18)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벗겨 주신다(마 11:28). 회개는 ‘죄사함의 원인’(causa remissionis peccatorum)이 아니다(3.4.3). 크리쏘스톰이 말했듯이, ‘회개는 죄를 씻어내는 약이며 하늘의 선물이자 놀라운 능력이며, 율법의 힘을 능가하는 은총이다.’ 가톨릭 신학자들은 회개가 ‘마음의 통회’(contritio cordis), ‘입의 고백’(confessio oris), ‘행위의 보속’(satisfactio operis)으로 이루어진다고 궤변을 주장한다(3.4.1).


첫째로, 마음의 통회 자체가 회개의 은총을 받기 위한 공로가 되지 못한다. 회개에 있어서, 마음을 찢는 그 자체에서 능력을 찾는 것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찬미함이 더욱 합당하다(3.4.3).


둘째로, 죄가 제사장 앞에서 고백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변역하리니”(히 7:12), 사람 앞에서 죄를 고백함이 합당치 않다. 심지어 구약의 제사장도 죄의 고백을 듣는 직분이 없었다(신 17:8-9). 서로 죄를 고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은(약 5:16) 죄를 듣고 사하는 권세를 특정인에게 위임한 것이 아니다. 오직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듯이 죄의 고백도 그러해야 한다. 열쇠의 권한은 주님의 교회에 주신 선포하는 권능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제에게 사죄권을 부여함이 아니다(3.4.4-6, 14-15). ‘죄를 고백하는 유일한 방법’(una confitendi ratio)은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죄를 사하시고, 잊고, 지워버리시는 분이 주님이시므로, 그 분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그 분께 고백하자. 그 분께서 의사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처를 그 분께 보여드리자. 상처 입으시고 징계를 받는 분이 그 분이시므로, 그 분께 평화를 간구하자. 중심을 헤아리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 자신 앞으로 속히 가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자. 종국적으로, 그 분께서 죄인을 부르시므로, 우리는 지체 없이 그 분께 나아가자”(3.4.9).


셋째로, 죄사함에 이르는 회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생명의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회개로 말미암아 ‘죄과’(罪科, culpa)는 용서함 받았으나 여전히 ‘벌’(poena)이 보류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갚아야 된다는 가톨릭의 사상은 은혜의 교리 자체를 뒤집어 놓는 것이다. 죄사함은 값없는 용서로 인한 것이다(사 52:3; 롬 3:24-25; 5:8; 골 2:13-14; 딤후 1:9; 딛 3:5). 그리스도께서만이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유일한 대속물로서 우리를 위한 ‘무름’(satisfactio)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로부터 나오는 ‘보속’(補贖, satisfactio)이 가당치 않다(3.4.25-26). 우리가 스스로 갚아서 구원에 이른다면 어디에서 양심의 평화를 찾을 것인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얻고 화목에 이르게 될 뿐(골 1:14, 20), 아무 것으로도 먼저 드려서 갚음을 얻을 수 없다(3.4.27). 사제가 열쇠의 권한을 가졌으므로 이러한 보속을 대신 감당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3.4.20-23). 죄를 가져가신 분께서 벌을 친히 감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구속’(avpolutrwsij)을 이루심은(롬 3:24; 고전 1:30; 엡 1:7; 골 1:14) 자신을 죄의 값 즉 ‘속전’(avntilutron)으로(딤전 2:6) 드리셨음으로 말미암는다(3.4.30). 가톨릭의 연옥설과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설에 기초하므로 전혀 비성경적인 사설(邪說)에 불과하다(3.5.1-10). 우리에게 공로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그저, 값없이 구하는 공로 밖에 없다. 전적으로 의지(依支)하는 공로, 전적으로 기대는 공로, 그것은 사실 공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다!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8)


'제18강좌' 그리스도인의 삶: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기독교강요 3.6.1-3.10.6)


1.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를 다룬 이 부분은 별도의 한 작은 책으로서 ‘황금의 소책자’라고 인구에 회자된다. 이곳에서 칼빈은 성경 말씀으로 ‘삶을 형성하는 방법’(ratio vitae formandae)을 ‘간단하게’(breviter) 제시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논술의 명석함과 정연함을 가지고 장황하게 삶의 윤리를 논하지만 생명에 이르는 ‘보편적인 준칙’(regula universalis)을 가르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에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새로움’(novitas)이 포함되어 있다. ‘중생의 목표’(scopus)는 이 새로움으로 하나님의 의와 그것에 대한 성도들의 순종 사이의 ‘조화와 일치’(symmetria et consensus)를 이루어내는데 있다(3.6.1).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에게는 ‘의에 대한 사랑’(amor iustitiae)이 없으나 성령의 역사로 그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서 하나의 ‘규준’(norma)으로서 수립될 수 있으므로 그것에 대한 ‘열의’(studium)를 가지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도 거룩하라고 가르친다(레 19:2; 벧전 1:15-16). 우리가 하나님께 결속되는 끈은 거룩함이다(3.6.2).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셨을 때(고후 5:18), 그 분을 ‘본’(exemplar)으로 세우셔서, 그 분을 우리의 생활에 드러내고자 하셨다. 우리가 양자된 유일한 ‘고리’(vinculum)가 그리스도시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분 안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을 인치고자 하셨다(히 1:3). 여기에 성경이 교훈하는 은총의 인과관계가 ‘그러므로’(ex quo)라는 수사의 반복으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 분의 자녀로서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지극한 배은망덕에 대해서 변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말 1:6; 엡 5:1; 요일 3:1).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씻음으로 정결케 하셨으며 세례를 통하여서 그 정결함으로 자신과 교통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다시금 더러운 것들로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온당치 않다(엡 5:26; 히 10:10; 고전 6:11; 벧전 1:15, 19). 그 분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지체들로서 어떤 흠이나 점으로 우리 자신을 흉하게 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엡 5:23-33; 고전 6:15; 요 15:3-6).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자신께서 승천하셨다. 그러므로 세상 것들에 대한 사랑을 버려두고 진심으로 하늘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다(골 3:1-4). 성령께서 우리를 성소들로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하여서 빛나도록 하되 죄의 더러움으로 우리를 더럽히는 어떤 것도 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하늘의 불후(不朽)함과 사라지지 않는 면류관을 받도록(벧전 5:4)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날까지 그것들을 순수하고 흠 없이 지키도록 온 힘을 기울여 노력해야 한다”(살전 5:23; 빌 1:10)(3.6.3).


그러므로 참다운 성도는 유창한 말과 헛된 사색에 사로잡혀 궤변을 일삼으며 욕망에 젖어서 썩은 옛사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엡 4:22, 24), 그리스도를 ‘선생’(magister)으로 삼는 ‘제자’(discipulus)로서 마땅한 처신을 해야 한다. 따라서 그 삶이 성경의 가르침 즉 ‘교리’(doctrina)에 부합되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이 교리로부터 출발한다. 교리는 종교의 전체를 담고 있다. 교리는 우리의 마음속 가장 싶은 곳으로 들어와서 일상생활에 스며든다. 그리하여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복음의 열매를 맺게 한다(3.6.4). 복음은 성도의 삶 가운데 지속적으로 역사한다. 그러나 아무도 지상의 삶 가운데 ‘복음적 완전’(evangelica perfectio)에 도달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성실함’(integritas)을 요구하신다(창 17:1; 시 41:12). 지상의 삶의 가치는 ‘선 자체에’(ad ipsam bonitatem) 이르도록 쉬지 않고 주의 길을 가는 것에 있다. 이는 육체의 연약함을 벗어 버리고 ‘그 분과 충만한 사귐에 이르기 까지’(in plenum eius consortium) 계속되어야 한다(3.6.5).




2.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성도의 삶은 삶 그 자체를 예배로 드리는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 12:1). 이 명령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롬 12:2).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은(갈 2:20) 심령이 새롭게 됨으로써(엡 4:23) 오직 성령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 ‘기독교 철학’(christiana philosophia)의 요체는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라는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부인함(abnegatio nostri)에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nostri non sumus):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우리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위를 좌우하지 말게 하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을 좇아서 유익한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지 말자.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에 속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자.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dei sumus):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의지가 모든 우리의 행위를 다스리도록 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합당하게 드려서 오직 진정한 목표를 바라며 노력해 가도록 하자(롬 14:8). 자기 자신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받고 이성의 지배와 다스림을 벗어 버린 채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는 얼마나 복된 것인가! 자기 유익을 구함은 역병과 같아서 가장 신속하게 우리를 파멸로 인도할 것이니, 구원의 유일한 정박지(碇泊地)는 아무 것에도 지혜롭고자 아니하며 스스로 어떤 것도 뜻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의 이끄심만 따름에 있다”(3.7.1).


자기를 부인하는 삶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그 분의 영광에 합한 것을 구하는 삶이다.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그 분께서 주시는 것으로만 살고자 소원한다(3.7.8-9). 자기애에 빠져 있는 자신을 치료하는 유일한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에 대한 염려를 내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을 추구하고, 그 분의 기뻐하심에 따라서 모든 일에 열심을 다하는 것이다(3.7.2).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계명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먼저 온갖 경건치 못한 것들과 정욕에 사로잡힌 것들을 내버려야 한다. 그리고 오직 ‘하늘의 기업’(coelestis haereditas)을 바라며 이 땅의 나그네 삶을 근신과 정절과 절제와 공평으로(딛 2:11-14) 살아가야 한다.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투쟁욕과 이기심은 가장 무서운 역병과 같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받은 자로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남을 낫게 여기는(빌 2:3)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먼저 받은 자로서 형제를 사랑하고 우애하며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한다(롬 12:10). 나는 나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자기부인이 없는 곳에는 교만과 억측만 있을 뿐 진정한 겸손은 배태되지 않는다(3.7.4).


‘사랑의 규범’(regula dilectionis, caritatis)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고전 13:4-5) 청지기와 같이 공공의 선(bonum commune)을 위하여 자신의 은사를 쪼개어 나누는데 있다(벧전 4:10). 모든 사람을 향하여,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헤아려서, 선을 행함이 마땅하다(히 13:16). 더욱이 믿음의 가정들을 향하여, 그들 안에 임재하신 그리스도의 영을 바라보고, 더욱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직무’(munus caritatis)는 외면적인 행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긍휼과 박애의 의식’(miserticordia atque sensus humanitatis)을 품을 것을 요구한다. 사랑은 단지 바깥에 있는 타인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에 속한 ‘지체들간의 교통’(inter membra communicatio)에 다름 아니다(3.7.5-7). ‘경건의 법칙’(pietatis regula)은 운명이라는 소경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 즉 섭리 안에 두는 것이다(3.7.8).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여호와를 즐거이 인정하자. 자기를 부인한 경건한 마음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니,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짊(crucis tolerantia)이다. 그리스도의 삶 전체가 모두 십자가의 일부분이었다. 주님께서 친히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 5:8).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자녀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얻도록 하셨다(롬 8:29).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함이 그 분의 영광에 함께 이르는 길이다(행 14:22; 빌 3:10-11). 역경의 고난이 곧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체’(societas)를 이룸에 대한 보증이다(3.8.1). 십자가를 짊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생 순종함이다. 십자가의 시련을 통하여서 우리는 아버지의 깊은 뜻과 자비를 경험하게 된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버리심을 두고 기도하였듯이 다윗도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심에 대해서 근심하였다고 노래하였다(시 30:6-7). 고난은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이룸으로써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의 자리에 온전히 서는 것이다(3.8.2).


‘자신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caecus amor sui)은 피할 수 없는 병과 같으나 고난은 오래 참음으로 연단을 이루는(롬 5:3-4) 약(藥)과 같다. 징계는 아버지의 사랑이 온전히 머무는 참 자녀의 표가 된다(잠 3:11-12; 히 12:8). 징계는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함이다(고전 11:32). 그러므로 의를 위한 고난 받음이 ‘특별한 위로’(singularis consolatio)가 된다.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이(행 5:41) 그 분을 구주로 모신 우리에게 합당하다. 우리의 산 소망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있으므로(딤전 4:10) 우리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즐거워할 일이다(벧전 4:12-13).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애통하심이요 우리를 위하여 모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그 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우리가 그 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서 그 분과 함께 영광에 이른다(롬 8:17). 그러므로 고난 앞에서도 우리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그칠 수 없다. 우리는 ‘십자가의 수난’(crucis amaritudo)을 ‘영적 기쁨으로’(spirituali gaudio) 조절해야 한다(3.8.3-11).




3. 미래를 묵상하며 현재를 사는 삶


성도에게는, 지상의 삶을 마치면 영생의 ‘면류관’(corona)이 마련되어 있다. ‘미래의 삶에 대한 묵상’(meditatio futurae vitae)이 없다면 ‘십자가의 훈련’(disciplina crucis)을 감내(堪耐)할 자 아무도 없다(3.9.1). 인생은 연기나 그림자 같으니(시 102:3, 11), 삶의 공과(功過)를 누가 스스로 헤아려 기뻐하고 슬퍼할 것인가? 그러나 ‘지상의 삶의 비참한 조건’(misera tessestia vitae conditio)이 전혀 헛되지만은 않으니, 이는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후에 받을 하늘나라의 영광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영원한 영광의 기업’(aeternae gloriae haereditas)을 주시기 전에 지상의 삶 가운데 그 분의 부성적 사랑을 체험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현세의 삶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은총이다(3.9.2-3).


지상의 삶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천상의 삶에 비할 바 못된다. 천상이 고향이라면 지상은 타향임에 틀림없다. 세상의 삶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면 천상의 복지(福地)에 비해서 지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육신에서 놓여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면, 육신의 삶이 수형(受刑)의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비록 지금은 우리가 주님과 떠나 있으나(고후 5:6) 현세의 삶이 ‘초소’(哨所, statio)와 같으니 육신의 질곡 가운데서 한탄이 있을지라도(롬 7:24) 아직 머무는 것이 유익함이 있다(빌 1:23-24).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육체의 장막을 벗고 나면 우리가 하늘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죽음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완전한 것을 입고자 함이다(고후 5:2-3).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학교’(schola Christi)에서 배우자. 그 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자로서 소망의 삶을 살자. 비록 우리가 ‘도살당할 양’(롬 8:36)과 같을지라도, 끝내 우리의 눈물을 씻겨 주심으로(계 7:17; 사 25:8) 우리의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실(고전 15:19)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러므로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 오직 ‘부활의 권세’(resurrectionis potentia)를 믿고 의지하는 자만이 그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모든 것을 이기는 은혜를 체험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위로’(unica nostra consolatio)가 된다(3.9.4-6).


지상의 ‘나그네 삶’(peregrinatio)을 살 동안에(레 25:23; 대상 29:15; 시 39:13; 119:19; 히 11:8-11, 13-16; 13:14; 벧전 2:11) 우리는 육의 무절제를 억제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힘써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든 것들을 ‘선물’(dona)로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fines)대로 그것들을 사용하여야 한다. 만물은 단지 유용할 뿐만 아니라 아름다움과 향기를 지니고 있다(창 2:9; 시 104:15).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단지 동물적인 삶을 사는 것에 그치게 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 받은 대로 마땅한 ‘즐거움’(oblectatio)을 얻게 하셨다(3.10.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시되 언젠가는 청산해야 할 것으로 위탁하셨다(눅 16:2). 그러므로 있는 자도 없는 자 같이 사용할 것이다(고전 7:29-31). 과도히 욕심을 부리지 않고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절제의 삶이 요구된다.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고유한 ‘소명’(vocatio)을 주셨다. 소명에 따른 삶은 지상에서는 낮고 천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빛날 것이며 아주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3.10.3-6).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19)


'제19강좌' 이신칭의(以信稱義): 죄사함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기독교강요 3.11.1-3.13.5)


1. 의롭다 칭하며 받아주심


이신칭의(iustificatio fide)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轉嫁)하심으로써 성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하심이다(3.11.2). 칭의된 성도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에 ‘옷 입혀져’(vestitus) 그 분과 교제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3.17.8). 성도는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그리스도를 붙잡고 소유하게 된다.


믿음에는 ‘이중적인 은혜’(gratia duplex)가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무죄하심으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단지 심판주가 아니라 호의를 베푸시는 아버지로서 그 분을 두게 된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거룩하게 됨으로써 흠 없고 순결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전자의 은혜를 칭의, 후자의 은혜를 성화라고 부른다. 칼빈은 행위가 결여된 참 믿음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먼저 회개와 중생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논한 후 이어서 칭의를 다룬다. 믿음으로 값 없는 죄사함을 얻음이 모든 구원 과정의 기초가 됨으로 칼빈은 칭의를 ‘종교가 축으로 삼는 문지도리’(cardo religionis)라고 불렀다(3.11.1).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iustificatur) 사람이 ‘의롭다고 여겨진다’(iustus habetur). 의롭다고 칭하여 ‘받아주심’(acceptio)에는 은혜를 주심이 함께 한다. 따라서 칭의는 ‘죄사함’(remissio peccatorum)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ustitiae Christi imputatio)를 포함한다(3.11.2).


칭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책’(reatus, 형벌)을 없는 것으로 해주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중재’(intercessio)로 말미암은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심으로써 의롭지 못한 우리를 그 분 안에서 의롭게 여기심을 뜻한다. 곧 칭의는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를 법정적(法定的)으로 선포하심에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이 구약의 아브라함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전하였다(갈 3:8).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신다(롬 3:26).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아무도 정죄할 수 없다(롬 8:33-34). 죄사함은 죄를 ‘방면함’(absolutio)이니 이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인한 보상, 배상, 속상 즉 ‘무름’(satisfactio)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이 사람을 힘입어’(행 13:38) 우리가 죄사함을 얻었다(3.11.3).


로마서 주석에서 칼빈은 믿음을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시어 들여서 그 분의 의와 교통할 수 있게끔 하는 도구’라고 정의한다(롬 3:22, 주석).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중생의 시작으로부터 영생의 삶에 동참하는 때까지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교제’(communio cum morte Christi)라고 역동적으로 파악한다(롬 6:7, 주석). 칭의는 단회적이다. 그러나 그 의는 구원의 전체 과정을 통하여서 역사한다. 이런 측면에서 칭의는 ‘우리 자신과 구속주 사이에 서로 유사한 것을 찾고 이에 응답하는’ 과정이라고 불린다(롬 6:10, 주석). 이는 칭의의 선물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질’(qualitats)이 아니라, ‘그저 전가해 주신 의’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만 역사하기 때문에 그러하다(롬 5:17, 주석).


칭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뻐하신 뜻대로 예정된 자들이 독생자의 그저 주시는 은혜를 찬미토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하셔서 자신의 자녀로 ‘받아주심’(acceptio)이다(엡 1:5-6). 칭의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 즉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의 복’,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의 복이다(롬 4:6-8).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분 안에서 ‘의’가 되게 하려하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하심이다(고후 5:18-21). 이렇듯 칭의는 하나님께서 죄책을 사함과 함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죄인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심을 포함한다(3.11.4).




2.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믿음의 의’(iustitia fidei)는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tio cum Deo)이며 오직 이 화목 가운데 ‘죄사함’이 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심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그 분께서 얼굴을 가리셨기 때문이다(사 59:1-2).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은 죄에 대한 진노를 거두시고 원수 된 자들을 자녀로서 자신과 화목하게 하심이다(고후 5:8-11).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먼저 하나님의 영을 받고 이후에 그 영의 역사에 따라 행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의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되어 교통됨으로써 우리가 값 없이 의롭다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침을 받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가는 자리에 서게 된다. 곧 칭의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의 ‘교통’(communicatio)에 다름 아니다(3.11.21-23).


오시안더(Andrea Osiander)는 칭의를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서 찾지 않고 그 분의 신성이 우리의 본성과 혼합됨으로써 야기되는 본질적인 변화라고 본다. 오시안더는 칭의를 하나님의 ‘본질’(essentia)과 ‘속성’(qualitas)의 ‘주입’(infusa)으로 인하여 사람이 신의 본성에 참여함으로 보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본질을 우리 안에 주입하심으로써 갖게 되는 이러한 의를 오시안더는 ‘본질적 의’(iustitia essentialis)라고 불렀다. 이렇듯 칭의를 자질의 변화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의롭다 하심’을(롬 4:4-5; 8:33) ‘의롭게 만드심’으로 이해한다(3.11.5-6). 그리하여서 칭의와 성화의 구별이 모호해진다. 또한 믿음을 단지 형상인(形相因)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그 자체를 자질을 얻는 또 다른 자질로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을 혼동하게 된다(3.11.7). 칭의는 신성을 주입 받아서 신화(deificatio, 神化)가 됨이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양성적 중보로 다 이루신 의를 전가 받아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그 분의 신성을 주입받는 것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의’가 되심은(렘 51:10; 23:6; 33:16) 그 분의 신성을 부어주심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사 ‘자기 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이다(행 20:28). 그리스도께서는 신인양성에 있어서 ‘의로운 종’이 되신 것이지(사 53:11) 단지 신성에 있어서만 그러하신 것이 아니었다(3.11.8).


하나님의 아들께서 ‘한 사람’으로 오셔서(롬 5:19) 종으로서 순종하심으로써(빌 2:7) 우리가 그의 안에서 의가 되게 하셨다(고후 5:21).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떡과 영생하는 음료가 되심으로(요 6:48, 55) 우리가 그 분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중보자의 신인양성 위격 가운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열려있는 샘’(nobis expositus fons)이 되셨다. 그러므로 신성만의 중보를 주장하는 오시안더의 입장은 용납될 수 없다(3.11.9, 12). 우리가 그리스도를 옷 입으며 그 분의 몸에 접붙임을 받기 때문에 그 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으로 그 분의 의와 교통한다. 칭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질을 주입받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음으로써 의롭게 여겨지는 것이다. 칭의는 의의 ‘본질적 내주’(essentialis habitatio)가 아니라 의를 전가하심으로 의롭다 하심이다(3.11.10-11).


칭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 그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나오는 의가 아니다(롬 4:2-8). 복음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의를 가르친다(롬 1:17; 3:21, 24, 28).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니 이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롬 3:24).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자의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롬 4:5).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기 때문에(갈 3:21-22)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3.11.19).


행위가 귀한 것은 사실이지만 행위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심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와 별도로 믿음을 의롭다 보신다(롬 4:6).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 의롭게 한다(갈 5:6). 이는 믿음이 사랑으로 말미암는다거나 믿음과 사랑이 함께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라 참 믿음에는 사랑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일을 헤아리는 자는 자신의 공로를 빚으로 헤아리기 때문에(롬 4:4) 순수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3.11.20).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한다(롬 10:3). 그리하여서 여전히 자신의 행위를 자랑함으로써(롬 4:2) 하나님께서 그저 주시는 은혜를 믿는 믿음에서 멀어져 있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3.11.13).


로마 가톨릭 궤변론자들은 칭의에 있어서 믿음의 의와 행위의 의가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행위’(opera)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면 사람은 이러한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가 그 믿음으로 선행을 함으로써 의에 이르게 된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간접적으로만 전가됨을 주장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의뢰함이지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공로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지 않고 양자 모두 선행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으로 이해한다. 다만 칭의에는 하나님의 공로가 합력적으로 역사하나(meritum de congruo) 성화에는 합당하게 역사한다는(meritum de condigno) 측면에서만 다르다고 본다. 즉, 하나님께서는 칭의에서는 조력하실 뿐이며 성화에서는 계수하실 뿐이라고 본다. 롬바르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게 함과 동시에 선행을 함으로써 의에 이른다고 가르침으로써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에 자신이 서 있음을 분명히 했다(3.11.15).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행위의 공로와는 별개로 즉 행위의 공로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과 그것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아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한다(갈 3:11-12; 합 2:4). 율법의 의에는 행위가 필요하나 믿음의 의에는 행위가 필요 없다. 율법의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롬 10:5). 그러나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온전할 수 없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만(롬 10:6) 구원에 이른다(3.11.17-1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순종만을 간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서 의의 조건을 찾으신다. 그리하여 독생자를 보내셔서 다 이루게 하셨고 그 의를 다 전가해 주시는 중보를 계속하게 하셨다(3.11.14, 16).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말미암는다. 믿음에 행위를 더함은 믿음을 부정함이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3. 법정적 칭의


버나드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우리가 쉴 곳이 어디에도 없다고 하였다. ‘구주의 자비가 나의 공로다’ 라고 그는 외쳤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공로가 넉넉지 못함을 아는 것이 공로로서 넉넉하다.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공로로서 넉넉하므로, 공로가 없음이 심판을 받기에 넉넉하다’(3.12.3).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인생이 아무도 없다(시 143:2). 사람 앞에 옳다함을 받는 것으로는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다(눅 16:15). 자책할 아무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고전 4:4). 칭의는 ‘인간의 법정’(humanum forum)이 아니라 ‘하늘 심판대’(coelestis tribunal)에서 옳다함을 받는 것이다. 주께서 헤아리시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자가 없다(시 130:3). 사람은 다 악을 짓기를 물을 마심과 같이 한다(욥 15:15-16). 누가 하나님 앞에 순결함을 자랑하며(욥 25:5), 밝음을 자랑하겠는가(욥 3:9)? 그러므로 행위를 두고 하나님 앞에 변론할 자 아무도 없다(3.12.1-2).


하늘 심판좌 앞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한낱 더러운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 여호와께서는 심령을 감찰하신다. 그러므로 사람 보기에 정직하거나 깨끗한 행위라도(잠 21:2; 16:2) 모두 더럽고 가증스러울 뿐이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겠는가(욥 14:4)?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겸손’(humilitas)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해야 한다. 오직 교만한 자는 버려지나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은 남아 보호를 받는다(습 3:11-12). 그러므로 ‘모든 교만’(arrogantia)과 ‘자존감’(securitas)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고 바라는 자만이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된다(3.12.3-8).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신다(롬 3:25-26).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주 안에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 이상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오직 우리의 ‘의’가 주님의 소유물임을 자랑해야 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믿음조차 선물로 주신다(엡 2:8-9).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만약 우리의 행위의 공로가 조건이 된다면 믿음의 의는 무가치하게 될 것이다(롬 4:14). 자신의 공로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참 평강이 있다(3.13.1-3). 믿음이 없으면 약속이 무용하다. 오직 하늘의 ‘기업’(haereditas)은 믿음으로부터 온다. 믿음은 진리를 확신함에 있다.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는 함께 역사한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구원협약에 따라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심 아닌가? 우리로서는 모두 멸망의 나락에 빠질 수밖에 없으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으시니(마 19:25-26) 스스로 모든 일을 다 이루심으로 인한다. 오직 믿음의 의는 그저 주시는 전가의 의니 아무도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롬 8:35). 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된다’(3.13.4-5). 그러므로 전적인 은혜로다! 아멘.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20)


'제20강좌' 성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로 거룩해짐 (기독교강요 3.14.1-3.18.10)


1. 성도의 선행(bona opera)


사람은 ‘의’(iustitia)에 따라서 네 가지 종류로 분류된다. 첫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우상숭배에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둘째,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고 성례에도 참여하나 명목적으로만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 있다. 셋째, 마음의 불법을 숨기고 외식하는 위선자가 있다. 넷째,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거룩함’(vera sanctimonia)에 이끌리는 사람이 있다.


첫 번째 종류는 육에 속한 사람으로서(창 6:3) 마음이 거짓되고(렘 17:9), 그 계획하는 바가 온통 악하며(창 8:21), 생각이 허무하고(시 94:11),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시 14:2), 두려워하지도 않는다(시 36:1; 롬 3:18). 이들의 행실은 심히 악하여 음행과 우상숭배와 당 짓는 것과 투기를 일삼는다(갈 5:19-21).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 여러 재능들을 선물로 주셔서 덕스럽게 하시지만, 그들의 부패한 마음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모두 가증스러울 뿐이다(3.14.1-3). 두 번째와 세 번째 종류의 사람도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는 첫 번째 종류의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들의 행위 역시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성실을 돌아보시고(렘 5:3) 참 믿음으로 순결한 영혼의 헌신을 받으시기 때문이다(행 15:9). 거룩한 것에 기름이 묻으면 어찌 얼룩이 지지 않겠는가(학 2:11-14)?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외식하는 자와 그 행위를 의롭다 하시겠는가(3.14.7-8)?


하나님 앞에서 의와 불의가 구별되는 것은 ‘행위의 법’(lex operum)이 아니라 ‘믿음의 법’(lex fidei)으로 말미암는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히 11:6).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믿음이 없으면 선행도 죄로 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교통이 없는 곳에 결단코 성화는 없다”(quando sine Christi communicatione nulla est sanctificatio).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값 없이 우리를 부르셨듯이 그 부르심에 따라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함도 오직 그 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엡 2:10; 딤후 1:9).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롬 4:17)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셔서(고후 5:17) 선한 일을 행하게 하셨다. 온 천하의 모든 것이 다 그 분의 것이듯이(욥 41:11) 우리의 선행도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을 행함은 불가능하니 그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 여호와께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던 자를 긍휼히 여기사(호 2:19) 자신의 의로써 구원을 베풀지 아니하시면(사 59:15-16) 의인도 없을뿐더러 행위의 의도 없다. 오직 택하심을 받은 성도만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는다(벧전 1:2). 이렇듯 ‘순종함’도 은혜의 선물이다(3.14.1-6).


네 번째 종류는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순결한 생활을 하며 마음을 다하여서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삶을 사는 성도들도 여전한 육체의 연약함 가운데 계속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오직 선만을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전 7:20; 왕상 8:46). 그러므로 계속해서 허물을 사함 받고 죄가 가려지는 복을 평생 받아야 한다(시 32:1; 롬 4:7). 하나님 앞에서 한 번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는 이제 자신의 선행의 공로로 상급을 받는다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궤변에 불과하다. 오직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만이 성도의 구원 전 과정에서 역사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영원한 중보자(perpetuus mediator)가 되심으로 그 분의 죽음이 영원한 작용(efficacia perpetua)을 하기 때문이다. 즉 죄 씻음(ablutio), 무름(satisfactio), 속죄(expiatio), 그리고 종국적으로 우리의 모든 불법을 가리는 완전한 순종(obedientia)을 실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롬 4:3). 믿음의 의는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자랑할 공로가 없다(엡 2:8-9).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성도에 관하여서도, 우리는 율법의 ‘행위’(opus)가 아니라 그 ‘계명’(mandatum)을 헤아려야 한다. 율법의 가르침은 선하나 그것을 행함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기 때문이다(3.14.7-11).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는 칭의와 성화에 모두 미친다. 양자를 분리하면 우리는 단지 ‘불구(不具)가 된 믿음(mutila fide)’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롬 3:22, 주석).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선행에는 의를 얻기에 고유한 가치는 없지만 은혜를 받아들이는 공로가 있다고 본다. 행위의 의는 완전하지 않으나 그 불완전함이 은혜를 받는 ‘잉여 행위’(opera supererogationis)에 의해서 보충된다고 한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은혜’(gratia acceptans)에 공로가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전적인’ 은혜 아닌가?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진대, 어떻게 갚고 남는 행위의 공로를 기대할 것인가? 우리가 먼저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먼저 우리를 받아들이는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에 이른다. 그러므로 굳이 행위의 보속(補贖)이라는 개념을 염두에 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편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편의 무름에 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도 단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여야 한다(눅 17:10). 우리가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서 다 행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해야 할 것을 행한 것에 불과하다. 하물며 그것의 일부를 불완전하게 순종하는데 그치는 지상의 삶 가운데서 어느 성도가 잉여 공로를 말할 것인가? 우리의 선행조차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크리소스톰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노예의 소유물과 다름없다. 마땅히 그것은 주인에게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위의 의를 믿어서도 안 되며 그것을 자랑해서도 안 된다(3.14.12-16).




2. 행위의 공로 없음


성도의 영생에 있어서 행위는 아무런 공로가 없다. 굳이 철학자의 논법을 들어서 설명해 본다면, 구원의 동력인(causa efficiens)은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사랑 즉 자비이시다. 구원의 형상인 혹은 도구인(causa formalis sive instrumentalis)은 믿음이다. 구원의 질료인(causa materialis)은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라는 말씀은 이러한 세 가지 원인들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구원의 목적인(causa finalis)는 여호와의 일을 인정하고 그 분께 영광을 올려드림에 있다.


사도 바울은 성부의 은혜가 동력인, 성자의 공로가 질료인,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은 믿음이 형상인, 이로써 삼위 하나님께 찬미를 돌림이 목적인이 됨을 말씀 가운데 수차 증언하였다(롬 3:23-26; 엡 1:3-14). 그러나 이러한 원인들이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causa inferior)으로 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주 우리의 행위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은총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택한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심은 오직 은혜를 원인으로 삼는다. 하나님께서 행위를 요구하시되 오직 은혜로 이루신다.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칭의, 성화, 영화 사이에는 시간상 전후가 있으며 각각의 과정에서 성도의 거룩함이 요구되지만 오직 이전의 은혜가 이후의 은혜의 원인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사랑하시되 자신의 것으로서 사랑하신다(3.14.17, 20).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증언한다(엡 3:19).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의 선물’(dona Dei)로서 그 분의 선하심을 깨닫게 하며 소명의 표(vocationis signa)로서 그 분의 택하심을 돌아보게 한다. 오직 은혜, 전적 은혜를 노래한 어거스틴에 귀 기울이자.


“저는 제 손의 일들을 천거(薦擧)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것들을 보시고 공로보다 더 많은 죄를 발견하실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가지 저는 다음을 말하고, 바라고, 간구합니다.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제 속에서 제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보시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을 정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주님께서는 그것에 면류관을 씌우실 것입니다. 저에게 선행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3.14.19-20).


의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 ‘그리스도와의 교제’, 그리고 ‘믿음’에 국한된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새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어떤 선행을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분에 대한 빚을 갚는데 불과하다. ‘우리에게 아무 공로가 없음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 충분한 공로이다.’ 선행의 공로는 오직 하나님의 편에 있다. ‘행위에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선행은 하나님을 즐겁게 하고 우리에게는 ‘무익하지 않다’(nec infructuosa). 사람이 ‘보상’(remuneratio)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께서 그런 ‘값’(pretium)을 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선행은 현세의 삶 가운데 보상을 받으며 믿음은 영생으로 천상에서 열매를 맺는다고 구별하는 것은 허망하다. 우리는 오직 그 분 앞으로 나아감으로(사 55:1) 모든 것을 받아서 풍족히 누리게 된다(마 25:29; 눅 8:18).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 위에도 영예를 더하시니, 은혜로 주신 것들을 조건으로 상급을 더하신다(1.15.1-4).


로마 교회 신학자들은 사랑을 행하는 믿음(fides formata, 내실적 믿음)만이 성도를 의에 이르게 하는 공로가 있다고 하여서 ‘모든 경건의 개요’(pietatis totius summa)인 ‘이신칭의’(iustificatio fidei) 교리를 폐기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선천적인 능력으로 자유의지 가운데 선행의 공로를 쌓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로 거듭난 사람 외에 아무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행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자유의지는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신 자에게만 선물로 주시기 때문이다(엡 2:10; 요일 3:8-9). 진정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아서(롬 11:19) 그 분의 자녀와 상속자로서 거듭난 사람(롬 8:17; 갈 4:5-7), 오직 은혜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만이 그 분의 생명을 몸에 나타내며(고후 4:8-10) 그 분의 형상을 본받아(롬 8:29) 지식과 의지에 있어서까지 새로워져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 분을 좇는다(마 16:24; 눅 9:2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한 ‘의’(iustitia)와 ‘구원’(salus)이 되셨다. 그 분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의와 구원에 이를 ‘능력’(facultas)을 주신 것이 아니셨다. 그 분께서는 친히 생명으로서 생명의 의를 이루셨으므로 믿음으로써 그 의를 전가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요일 5:12, 24; 6:40)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딛 3:7; 롬 5:1-2). 그러므로 성도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로를 얻을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공로를 얻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외계적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심으로 그 속에 사심으로써(요일 3:24) 성도를 자신과 함께 하늘에 앉히시고(엡 2:6) 자신의 사랑의 나라의 상속자가(골 1:13) 되게 하신다(3.15.5-8).




3. 행위도 의롭다 받으심


칼빈은 성화를 선행이라는 측면에서 다룬다.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 있지만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그런데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 즉 칭의는 성화의 출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sapientia)와 의로움(iustitia)과 거룩함(sanctificatio)과 구원함(redemptio)’이 되시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거룩함은 분리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나눌 수 없듯이(고전 1:13) 칭의와 성화도 나눌 수 없다. 그리스도께 ‘참여함’(participatio)은 의와 함께 거룩함도 포함한다(3.16.1).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삼으신 것은 우리를 거룩하게 부르셔서 그렇게 살도록 이끄시기 위함이다(살전 4:3, 7; 딤후 1:9). 죄에서 자유하게 하심은 의에 순종하게 하려 하심이다(롬 6:18).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을 정결케 하여(요일 3:3; 고후 7:1) 주님의 본을 따라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벧전 2:21; 요 15:10; 13:15).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생명의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롬 6:4, 6). 그러므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다(요일 4:14; 요 13:34).


거룩함은 이웃 사랑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에 미친다. 그러므로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마 5;16). 주님께서 우리를 헤아리심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경외케 하려 하심이다(시 130:4).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영적인 예배의 제물로 드리자(롬 12: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심은 우리 편에서는 값 없는 은혜지만 주님 편에서는 ‘가장 거룩한 피’(sacratissimus sanguis)를 흘리셔서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다(3.16.1-4).


복음의 약속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뿐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그 분을 기쁘시게 할 것으로 만든다. 거듭난 사람의 행위도 완전치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행위의 가치 그 자체를 헤아리시기 보다는 자신의 긍휼하심과 선하심으로 그것을 자신의 영광의 자리 편으로 끌어당기신다(3.17.3).


“오직 믿음에 의해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게 된다”(sola fide non tantum nos, sed opera etiam nostra iustificari)(3.17.10).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받으심’(acceptio)으로 우리의 행위도 인정을 받게 된다(행 10:35; 벧전 1:17; 2:15). 이는 주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사시므로 우리 안의 선한 일을 사랑으로 포용하시지 않을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신께서 주신 행위조차도 받으신다”(3.17.5)


주님께서 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의 언약을 이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써(신 7:9; 왕상 8:23; 느 1:5) 자신의 은혜로 성도의 삶을 친히 인도하시겠다고 계시하셨다. 율법에는 이미 ‘복음적 약속’(evangelica promissio)이 언약 가운데 지시되어 있다. 복음은 율법의 폐지가 아니라 성취를 전한다(3.17.6-7). 성도들의 행위가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은 즉 의로 인정됨은(롬 4:22) 그것이 그리스도의 ‘완전함’(perfectio)으로 덮이고 그 분의 ‘순결하심’(puritas)으로 깨끗하게 되기 때문이다(3.17.8).


율법 자체에서 의를 이룸이 불가능하다. 아무도 하나님의 법을 자체로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롬 2:13). 믿음의 행위는 은혜의 열매이지 율법의 의를 이룸이 아니다. 다만 믿음이 행위로 공표되기 때문에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불린다(약 2:14-26). 그러므로 행위자에게 값 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그 행위도 아무 가치가 없다(3.17.11-15).


행위의 의에 ‘값’(preces)이 있다고 말할 수 없듯이, 믿음에도 보상이 따르는 공로는 없다. 믿음은 단지 ‘도구’(instrumentum)에 불과하다(3.18.8). 오직 값은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종들의 삯(servorum stidendium)이 아니라 아들들의 기업(filiorum haereditas)이다’(3.18.2).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주 안에서 마지막까지 이루신다(빌 1:6). 다만 의롭다 하신 이를 영화롭게 하시기 위하여 거룩함에 이르게 하신다(롬 8:30).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상’(praemium), ‘보상’(merces),‘보수’(retributio)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내리는 ‘복’(beatitudo)이다(3.18.1, 4). 하나님께서는 행위에 대한 값을 은혜로 치르신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나 그것에 대한 상급을 마치 빚을 갚듯이 하신다(잠 19:17). 우리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켜야 한다(마 19:17). 그런데 그 생명이 우리에게 구원의 선물로 수여되지 않았는가(3.18.6-7, 9-10)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21)


'제21강좌' 그리스도인의 자유: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유(기독교강요 3.19.1-3.19.16)


1. 칭의의 부록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으로 요약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교리는 ‘칭의의 부록’(appendix iustificationis)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교리에서 절정에 이른다(3.19.1).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영적’(spiritualis)이다. 육적인 자유는 육을 추구하는 자유로서 방종하나, 영적인 자유는 영생의 순종에 이른다(3.17.1). 성도의 참 자유는 수고하고 무거운 세상의 짐은 주님께 다 내려놓고 그 분의 멍에를 메고, 그 분께 배우며, 그 분의 짐을 지고, 그 분을 좇는 삶을 사는데(마 11:28-30; 16:24) 있다(3.18.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의 영으로서 각 성도의 속에 사신다(갈 2:20). 그리하여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의를 모두 전가하셔서 자신과 함께 한 형제와 상속자가 되게 하신다(롬 8:14-17; 갈 4:6-7; 히 2:11). 성도의 자유는 단지 현상의 양태가 아니라,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존재의 양상을 지시한다(빌 3:10-11). 그러므로 각자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을 성도의 자유의 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갈 6:17). 예수의 흔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활의 성도가 예수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의 죽으심을 자신의 몸에 짊어짐이 아니겠는가(고후 4:10)?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써 우리는 그저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채무자가 되셔서 죄의 값을 다 갚으셨다. 그저 다 갚으셨으므로 전혀 우리 편의 채무가 남아있지 않다. 어거스틴이 갈파한 바와 같이,


“신실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채무자(debitor)가 되셨다.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음으로써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약속하심으로써 그리하셨다”(3.18.7).


주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써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도 의롭다 여김을 받는 자리에 우리를 세우셨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무름(satisfactio vicaria)이 우리의 자유를 위한 값으로 지불되었다. 그 분께서 다 이루시고, 다 주셨으므로, 더 이상 보속할 빚이 남아있지 않다. 모든 빚이 다 속상되었다. 다만 우리가 스스로 빚진 자로서 남는 것은 이제 육체가 아니라 주의 영으로 은혜 가운데 살고자 함이다(롬 1:14; 8:12-13). 빚이 없으나 빚진 자로 사는 자는 복되다. 왜냐하면 그는 빚진 자로서 빚이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죄의 빚을 무름 받고 스스로 의의 빚을 진다. 의의 빚은 자유의 빚, 은혜의 빚이다. 그것은 사실 빚이 아니다. 이는 의의 종이 종이 아니라 자유자인 것과 같다(롬 6:18). 또한 이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는 자가 멍에로부터 해방된 자인 것과 같다(마 11:29). 주님의 멍에는 은혜의 멍에요, 쉼의 멍에요, 자유의 멍에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 분의 ‘쉬운’ 멍에를 메고 그 분의 ‘가벼운’ 짐을 지는(마 11:30) ‘영광의 자유’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다(롬 8:21).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깨닫지 못하면 복음의 진리나 내적 평화가 심중에 깃들 수 없다(3.19.1).




2. 세 가지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도가 지상의 삶 가운데서 누리는 구원의 은혜에 상응한다. 칭의의 은혜로 성도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이를 첫 번째 자유라고 한다. 성화의 은혜로 성도는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감동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된다. 이를 두 번째 자유라고 한다. 두 번째 자유 중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되 연약한 사람을 위하여 삼가는 자유가 세 번째 자유로서 특정된다. 세 번째 자유는 규범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되 그 상대적 가치를 헤아려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자유이다. 이러한 세 가지 자유는 마치 칭의와 성화가 그러하듯이 구별은 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①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칭의의 확신’(fiducia iustificationis coram Deo)을 얻는데 있어서 행위의 공로를 헤아리는 율법의 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받아들이며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의지함으로써 그 양심이 자유롭게 된다. 칭의는 값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므로 그 은혜를 받는 자는 행위에 대한 보상 혹은 보속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가 없으면 성도는 ‘전체 율법에 대한 채무자’(debitor universae legis)가 된다. 그러므로 양심은 끊임없는 압박과 저주에 시달리게 된다. 스스로 율법의 의를 만족시켜 구원에 이를 자 아무도 없다. 다만 율법을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에 이른 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경건하고 올바른 삶의 규범으로서 본질적인 작용을 수행한다. 전체 그리스도인의 삶이 ‘일종의 경건의 묵상’(quaedam pietatis meditatio)이 되어야 할진대(살전 4:3, 7; 엡 1:4), 오직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그 삶을 살게 된다(3.19.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다(갈 5:1). 이 자유를 확신하지 아니하고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이다(갈 5:4). 모세의 율법에 계시된 모든 순종의 의와 의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성취되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할례를 받으심으로써 ‘율법 전체를 행한 의무를 가진 자’로서 우리의 자리에 서셨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신의 할례를 폐하셨다(갈 5:2-3). 그러므로 오직 성령의 감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운데 성도는 참 소망을 누린다(갈 5:5-6).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불필요한 일들에 있어서’(in rebus non necessariis) 구속(拘束)되지 않고 ‘완전한 평온’(plena securitas)을 얻는다(3.19.3).


②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자유


두 번째 자유는 ‘자발적으로’(ultro) 율법에 순종하는 성도의 어떠함을 제시한다. 이는 율법의 제 3용법에 상응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volntas Dei)을 계시한다. 성도는 양심상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의 필연성에 강요되어서’(legis necessitate coactae)가 아니라 자원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성경은 ‘경성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에 이를 것’(alacri promptitudine in obedientiam Dei)을 가르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비록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하나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로서 완전한 순종을 보여서 하나님께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완전한 것은 악한 것에 다름없으니 불완전한 것을 의롭게 보시는 분의 자비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그 분 앞에 기도나 예배를 드리거나 그 분께 헌신함으로써 그 분을 기쁘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가 불완전함을 인식하되 그것조차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유롭게 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자원하여 순종하게 된다(3.19.4).


율법의 준엄성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자비를(말 3:17) 의뢰하는 사람은 ‘쾌활하며 생동력이 넘치게’(hilares et magna alacritate) 그 분의 이끄심을 좇는다. 성도는, 비록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전적으로 합하는 일을 수행할 수는 없어도, 그 분께서 ‘자신의 순종과 기꺼운 마음’(suam obedientiam et animi promptitudinem)을 기쁘게 받으심을 확신한다(3.19.5).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백성은 더 이상 죄가 왕노릇하지 못하기 때문에 의의 종, 의의 병기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다(롬 6:12-14). 그러므로 사도는 거룩한 조상들의 행위를 믿음으로 헤아린다(히 11).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만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의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3.19.6).


③ 구원에 무관한 것들로부터의 자유


세 번째 자유는 그 자체로 구원에 무관한 ‘중립적인 것들’(adiaphora)과 관련된다. 어떠한 경건의 의무에 절대적으로 매이지 않는 외부적인 사물에 대해서는 경우에 따라서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것이 자유롭다. 예컨대 육식을 하는 것과 의복을 입는 것이 이러한 자유의 대상이 된다. 만약 이러한 자유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의 양심은 어디에도 쉼이 없을 것이며 끝없는 미신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양심은 한번 올가미에 얽어 매이면 이후에는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는 깊이 뒤엉킨 ‘미로’(labyrinthum)로 들어가게 마련이다. 만약 성찬의 보(褓)를 아마포로 사용할 수 있는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이후에는 대마포에 대해서 불안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삼 부스러기에 대해서도 의심이 일 것이다. 만약 조금 더 맛있는 음식이 불법으로 보이면 값싼 빵을 먹든지 상용 음식을 먹든지 하나님 앞에서 평화롭게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판단을 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uti)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an Deus velit) 먼저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voluntas)에 맞게 행하거나 금하거나 해야 한다(3.19.7).


‘외적인 것들’(res externae)에 대한 ‘자유의 논거’(libertatis ratio)가 하나님께 있다면 그것들의 용(用), 불용(不用)에 절대적으로 얽매일 필요가 없다. 다만 ‘미신적인 편견’(superstitiosa opinio)이 개입될 때에는 그 자체로 정결한 것들도 불결하게 된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


그러므로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고 믿음 가운데 자유를 누려야 한다(롬 14:22-23).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법’(usus)에 따라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사용하여야 한다. 선택의 자유가 있는 의식(儀式)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것들은 ‘덕을 세우기 위해서’(ad aedificationem) 유익해야 한다(3.19.8).


‘그리스도의 자유의 법칙’(lex libertatis christianae)은 어떤 형편에도 만족할 줄 알고 빈부(貧富)와 고하(高下)간에 대처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기반하고 있다(빌 4:11-12). 그러므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나 무절제한 낭비, 허영과 교만을 버려야 한다. 오직 모든 일을 정결한 ‘마음과 양심’으로(딛 1:15) 행해야 한다(3.19.9). 중립적인 것들에 관해서는 행하는 것이나 행하지 않는 것이 그 자체로 하나님 앞에서는 다르지 않다. 다만 그것으로써 ‘연약한 사람들’(infirmi)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19.10).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scandalum, offendiculum)과 관련해서 두 가지 형태의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연약한 사람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것을 ‘주어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scandalum datum)이라고 한다. 이는 혹은 경박함, 혹은 방자함, 혹은 무분별함으로 무슨 일을 그것 자체의 고유한 질서와 자리를 벗어나게 행하여 무식한 사람들과 연약한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게 될 때 생긴다. 이러한 것은 ‘피해야 할 것들’(cavenda)이다. 사도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했다(롬 14:1). 그리고 부딪힐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말라고 했다(롬 14:3).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8:9).


오히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감당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그들을 세우도록 해야 한다(롬 15:1-2). 자유하나 사랑으로 종노릇하므로(갈 5:14) 아무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전 10:29, 32).


또 다른 형태로서 바리새인적인 교만함으로 그렇지 않다면 사악하지도 부적절하지도 않게 행해졌을 일이, 악의로 혹은 영혼의 못된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로 바뀔 때이다. 이것을 ‘받아들여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scandalum acceptum)이라고 부른다. 이는 ‘무시하여도 될 것들’(negligenda)이다(마 15:14). 연약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규범을 주신 목적을 생각해야 하지만(telelogically) 바리새인들에게는 규범 자체를 더욱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deontologically). 왜냐하면 이러한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악의로 스스로 걸림이 되기(마 15:12) 때문이다(3.19.11).


성도는 사랑을 추구하되 ‘이웃의 덕을 세우는데’(in proximi aedificationem) 특히 유의해야 한다. 자유하나 스스로 매임이 이를 위함이다(고전 9:19-20, 22; 갈 2:3-5).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되, 다만 사랑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를 수는 없다. 즉 이웃을 위하여 하나님께 거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자유는 사랑 아래 종속되어야 한다. 또한 마찬가지로 사랑 자체는 믿음의 순수성 아래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연약한 자들을 언제든지 연약한 채로 두고 그저 사랑하고자 하지 말며, 교리의 젖을 먹여서(고전 3:2) 그들이 자라도록 해야 한다(3.19.1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주님의 피 값으로 사신 선물이다(벧전 1:18-19). 우리의 영혼이 여전히 예속되어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다 할 것이다(갈 2:21). 우리의 양심은 세상의 법과 규칙이 아니라(갈 5:1, 4)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다. 우리에게는 이중적 통치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하나는 ‘영적인 통치’(regimen spiritualis)이다. 이로써 양심은 경건과 하나님에 대한 예배에 이르는 훈련을 받는다.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통치’(regimen politicum)이다. 이로써 사람들 가운데서 서로 섬겨야 하는 시민법적 직분들에 관한 교육을 받는다.


양심(conscientia)은 하나님의 법정 앞에서 올바른 지식(scientia)을 가지고 사리를 분변하는 지각(sensus)이다.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숨은 속을 드러내는 ‘일천 명의 증인들’(melle testes)과 같다. 양심이 증인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송사하거나 변명하게 되므로(롬 2:15-16), 이는 ‘일종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간자’(medium)가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양심의 법정’(forum conscientiae)에서 내려지는 선고에 따라서 하나님을 찾고(벧전 3:21) 거짓이 없는 사랑을 행하게 된다(딤전 1:5). 이러한 양심에 따라서 먹기도 하고 먹지 말기도 해야 할 것이다(고전 10:28-29). 양심은 하나님께 상관된다. 그것은 ‘마음의 내적인 순수함’(interior cordis integritas)이다. 양심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정치적 자유를 무한히 누림을 의미하지는 않는다(3.19.14-16).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22)


'제22강좌' 기도: 믿음의 주요한 훈련 (기독교강요 3.20.1-3.20.52)


1.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함
‘믿음이 성령의 주요한 작품’(praecipuum opus)이라면(3.1.4) 기도는 ‘믿음의 주요한 훈련’(praecipuum exercitium)이다(3.20의 제목). 기도는 자신 속에 내주하신 그리스도의 영을(롬 8:9) 양자의 영으로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는 성도가(롬 8:16) 그 영의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롬 8:26)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롬 8:15; 갈 4:6) 그 분과 나누는 대화(colloquium)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에게 하늘 보화들을 열어 보여주시며 오직 그 아들을 바라고, 믿고, 의지하며, 그 안에서 안식하는 자에게만 그것들을 수여하신다. 이것은 어떤 삼단논법으로도 이끌어 낼 수 없는 ‘은밀하며 감춰진 철학’(secreta absconditaque philosophia)이다. 오직 이 철학은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자신의 빛으로 빛을 보게 하신 사람만이 볼 수 있다(시 36:9).




우리 자신에게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풍성하게 넘치며(골 1:19; 요 1:16) 그것이 산곡에 흘러내리는 샘물과 같이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믿음이 없이 드리는 기도는 그저 헛될 뿐이다. 왜냐하면 기도로 캐낼 ‘하늘 보화’(coelestis thesaurus)는 오직 그리스도께만 속하여 우리가 우리 공로로 스스로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아들을 믿는 자만이 모든 선한 것들을 주장하시는 ‘주’(dominus)시요 ‘수여자’(largitor)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한다. 그러므로 복음으로 난 믿음으로 기도함으로써 우리 심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훈련을 받게 되는 것이다(롬 10:14-17). 기도를 통하여서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없음’(nostra inopia)을 아들의 ‘충만’(plenitudo)으로 채우신다(3.20.1).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으로 제시한 보화들이 기도로 ‘채굴된다는 것을’(effodi) 우리는 믿음으로 직각(直覺)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서 자신의 앞에 놓인 보화를 향하여 손을 내뻗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헛되지 않으니, 아들을 믿는 자마다 하늘의 성소에서 자신과 교통하는 길을 여셨다. 우리는 연약하며 무능하고 허물이 커 단지 죄에 눌려 쓰러져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구원의 요새’(unicum salutis praesidium)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invocatio)이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그 분의 ‘섭리’(providentia), ‘능력’(virtus), ‘선하심’(bonitas)이 현재 작용하기를 바라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그 분 자신의 ‘전적인’(totum) ‘현존’(praesentia)을 간구한다(3.20.2).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시 121:4). 그 분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우리의 필요를 먼저 아신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의 간구를 듣고자 하시니, 이는 우리를 훈련시켜 더 큰 유익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시 145:18).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시 34:15; 벧전 3:12). 기도는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믿음으로써 자라가는 도구이다. 기도를 통하여 성도는 하나님께 구하여 얻는 법을 깨달아 날마다 그 분께 더욱 가까이 가게 된다. 그러므로 믿음의 훈련이 결여된 기도로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은 없다(3.20.3).




2. 기도의 직분과 법


기도를 통하여서 성도는 자신의 믿음이 잠자거나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해야 하므로, 그것은 하나의 ‘직분’(officium)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사랑하며, 예배하는 열망’(semper quaerendi, amandi, colendi desiderium)을 더욱 불타게 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거룩한 구원의 닻으로 믿고 그 분을 피난처로 여기는 습관을 갖게 된다. 둘째, 우리 양심이 수치스럽다고 가책하는 욕망이나 소원이 영혼 속에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를 통하여서 우리는 모든 소원과 모든 마음을 먼저 하나님의 면전에 토로하게 되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의 은총을 영혼의 진정한 감사로 받기 위해서이다. 기도로써 우리는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5-16).


넷째,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하신 소원을 이루심으로써 우리가 ‘감화되어’(persuasi) ‘더욱 뜨겁게 그 분의 선하심을 묵상하도록 하기 위해서’(ad meditandam eius bonitatem ardentius)이다. 다섯째, 우리가 ‘더욱 큰 기쁨으로’(maiori cum voluptate) 기도를 통하여서 이루신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 우리가 연약한 가운데서 ‘쓰이는 용도자체와 경험’(usus ipse et experimentum)이 확증하는 바에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길을 여시고, 우리를 단지 말씀으로만 달래시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도움으로’(praesenti ope) 도우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3.20.3).


이와 같이 기도는 성도의 성화를 위하여 필연적이다. 기도자는 다음과 같은 ‘기도의 법’(lex orationis)을 따름이 합당하다. 첫째,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colloquium)이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이성의 맹목적인 추구를 그치고 그 분께 마땅한 마음과 정신을 가져야 한다. 허무한 인간 본성의 한계에 붙들려 드리는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 안에서 제한할 뿐이다(3.20.4). 기도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마음의 감동’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진정한 성전이 자기 자신이므로 기도는 ‘영과 진리로’(요 4:24) 드려야 한다(3.20.29-30).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서 듣게 되는 ‘친밀한 위로의 말씀’(familiare alloquium)을 세속적인 것으로써 불순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오직 우리의 담대함은 아버지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여 들음을 얻는데 있다(요일 5:14). 세상의 찌기 위에 앉아서 넋두리하듯 드리는 한탄이 기도가 아니다(렘 48:11; 습 1:12). 성경은 기도함으로 우리의 속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라고 한다(사 37:4; 시 62:8; 145:19).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기도의 ‘교사’(magister)요 ‘인도자’(dux)로 주셔서 친히 간구하게 하심으로써(롬 8:26) 우리가 그 영 가운데 깨어서(고전 14:15) 기도하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여호와를 바라며(시 25:1) 연약함 가운데서도 성령의 감화를 좇아 구할 것이다(3.20.5).


둘째,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무능함’(inopia)을 절감하고 ‘진지하나 강렬한’(serium, imo ardentem) 간구를 드려야 한다. 기도를 단지 부과된 일을 요식적으로 행하듯 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갈망하며 얻기를 구하지 않는 기도는 허탄할 뿐이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이니(마 6:9; 눅 11:2), 그것이 곧 우리에게 가장 유익함이 된다(3.20.6). 우리는 항상 연약하여 넘어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더라도(약 5:13) 더욱 그때를 ‘주를 만날 기회’로 여겨야 한다(시 32:6).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끄시는 성도의 ‘견인’(perseverantia)을 믿기에 우리는 ‘항상’(엡 6:18), ‘쉬지 말고’(살전 5:17)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를 만나주시고 가까이 하신다(렘 29:13-14; 시 145:18). 다만 진실함과 간절함이 없이 정욕으로, 시기로 구하는 것은 받지 않으신다(사 29:13; 약 4:3). 성령을 근심시키는 행실 가운데 드리는 기도를 하나님은 즐거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요일 3:22).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는 자기의 악행을 버리고 진정 낮은 자리에서 ‘거지의 품성과 마음씨’(mendici personam et affectum)를 가져야 한다(3.20.7).


셋째,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고 자신의 가치를 일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즉 자기신뢰를 전적으로 버려야 한다. 오직 구할 것은 주님의 긍휼이요, 주께서 주님 자신을 위하여 들으시길 바라야 한다(단 9:18-19). 주님을 토기장이로, 우리를 진흙으로 여기고(사 64:5-9)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빚으시길(렘 14:7) 간구해야 한다(3.20.8). 기도의 문을 여는 ‘열쇠’(clavis)는 상한 심령이다.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함은 기도의 열매는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이끄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태로부터 지은 모든 죄를 기억치 말라고 기도드려야 한다(시 25:7, 18; 51:5). 주님께서는 죄를 안고 살면서 병이 나음이 무익함을 아시고 중풍병자를 온전히 구원하셨다(마 9:2). 구약의 조상들도 ‘피의 속죄’(sanguinis expiatio)로 기도를 거룩하게 구별하였다(창 12:8; 26:25; 33:20; 삼상 7:9).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사하시고 정결케 하신다(요일 1:9). 기도는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한다(3.20.9). 그러므로 자신의 공로를 헤아리지 않고 날마다 이끄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하여 경건한 삶에 힘쓰고 오직 그 분의 ‘관용’(clementia)을 붙드는 자가 구하는 바를 얻게 된다(3.20.10).


넷째, 기도하는 자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사랑에 소망을 갖고 그 분을 굳게 믿어야 한다. 기도는 회개와 믿음에 부착한다. 믿음이 기도에 선행(先行)한다.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막 11:24; 마 21:22; 약 1:5-6; 5:15)이 ‘기도의 본질’(precationis natura)에 가장 부합한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인 언사(言辭)가 아니라 믿음에 따라서 응답하신다(마 8:13; 9:29; 11:24).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는(요일 5:14)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롬 10:14, 17). 기도는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토로함에 다르지 않다(3.20.11).


이러한 네 가지 법에 따라서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을 아우르는 묵상’(tam naturae Dei quam verbi meditatio)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음성을 들으시며(시 50:15; 65:1-2; 삼하 7:27) 그것을 가장 기뻐하신다(시 147:10-11).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명령에는 주시고, 찾게 되고, 열어주시는 약속이 함께 있다(마 7:7-8).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므로 기도는 성경에서 가장 자주 가르쳐지는 ‘경건의 직무’(officium pietatis)가 된다(3.20.13).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에 소망을 두고 담대히 보좌로 나아갈 것이다(히 4:16; 엡 3:12). 주님께서 우리의 도움이 되시니 주야로 그 분의 자비를 구할 것이다(시 5:3; 33:22; 56:9).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기 전에 미리 들으시나 우리의 간구를 기다리시니, 이로써 우리를 자신의 영광의 도구로 삼으시기 위함이시다. 기도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공로를 헤아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의 은총을 구할 뿐이다. 오직 주의 인자하심에 위로를 찾고(시 119:76) 하나님의 언약에 용기를 얻어서(창 32:11-12) 여호와의 이름 가운데서 전적인 구원을(욜 2:32; 롬 10:13) 구하는 것이다(3.20.12, 14).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향한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오직 상한 심령으로, 가난한 심령으로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familiare colloquium)로 나아가는 자가 복되도다(3.20.15-16)!




3.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림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재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주셨다. 성령의 임재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시며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언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의 ‘대언자’(advocatus)시며(요일 2:1) ‘중보자’(mediator)로서(딤전 2:5; 히 8:5; 9:15) 우리를 위하여 친히 중보하신다. 그러므로 오직 그 분의 이름으로 구하여 그 분을 통하여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는다(요 14:13-14; 16:26).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아들의 순종으로 성취되니 우리는 단지 아멘 하여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는다(고후 1:20). 기도는 그리스도의 ‘예’에 ‘아멘’ 하여 그 분의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 것이다(3.20.16).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의 흉패를 자신의 가슴에 달고(출 28:9-21) 친히 하늘 성소에서 간구하신다. 이제는 그 분의 육체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생명의 길로(히 10:20) 우리가 나아간다(3.20.18). 예수께서 생명의 길이시요 생명의 문이시다(요 14:6; 10:7).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인치심으로(요 6:27) 그 분을 우리의 목자와(마 2:6) 머리로(고전 11:3; 엡 1:22; 4:15; 5:23; 골 1:18) 삼으셨으므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를 드리실 분은 주님 밖에 없으시다. 성도들 상호간은 서로 위하여 기도는 하되 서로가 서로에게 중보자가 되지는 못한다(3.20.19). 그리스도는 ‘구속의 중보자’(mediator redemptionis)요 성도들은 ‘중재의 중보자’(intercessionis)라고 하는 궤변은 도무지 가당치 않다. 우리의 유일하신 대언자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로서(롬 8:34) 유일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요일 2:1; 딤전 2:5).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분은 우리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사(요일 2:2) 땅에서 죽으시고 하늘로 올리우신(히 7:26) 한 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3.20.20). 천사들은 부리는 영에 다름 아니니(히 1:14)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중보할 수 없다. 거룩한 삶을 살았다고 여겨지는 성자들이 그들의 의로 중보할 여지는 전혀 없다. 노아, 다니엘, 욥도 자기의 생명만 건질 뿐이다(겔 14:14).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 가운데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만을 받으신다.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도무지 아버지께 나아갈 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3.20.21-27).




4.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주님께서는 친히 ‘기도의 방법’(ratio)과 ‘양식’(forma)을 가르쳐 주셨다(마 6:9-13; 눅 11:2-4).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알지 못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와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를 아들을 통하여 ‘판에’(in tabula) 새기듯 가르쳐 주셨다(3.20.34-36).


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심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를 우리의 것으로 삼고자 하심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자만이(요 1:2; 요일 3:1) 아버지의 부성적인 사랑을 의지하여(시 27:10; 마 7:11; 사 49:15)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은 우리가 모두 한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버지께서 만유 안에 만유가 되셔서 편재(遍在)하시므로 ‘하늘에 계신’ 이라고 호칭한다(3.20.36-40).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기도로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한다. 여호와의 이름은 ‘영광의 표지들’(notae gloriae)로서 그 분의 능력, 선하심, 지혜, 공의, 자비, 진리를 함유한다. ‘나라에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통치’(gubernatio)가 편만하기를 구함이다. 성령의 임재가 다스림이다. 성령으로 만물이 창조되고 운행되며, 그 은밀한 역사로 감화된 성도가 마땅한 주의 자녀의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우주가 운행되며 우리의 마음과 영이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3.20.41-43).


이어지는 간구로서 우리의 유익을 위한 첫째 기도는 ‘일용할 양식’에 관한다. 먹고 마시는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전 10:31). 이를 위해서 우리는 떡을 구해야 한다. ‘오늘날’ 이라고 함은 주님의 섭리가 시시각각 끊이지 않음을 믿고 구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것으로 구하라고 했으니, 이기적인 물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신 8: 3; 마 4:4).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다음 기도가 가르쳐진다. 죄사함에는 의의 전가가 함께 있다. 죄를 안고는 의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조건적이므로 우리도 남의 허물을 헤아리지 않겠다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기도한다. 이는 십자가의 그늘에 거하는 백성으로서 사망의 권세에 놓이게 하지 말라는 간구이다. 시험이 없지는 않으나 성령의 능력으로 시험을 이겨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자리에 서게 해 달라는 애통함이다(3.20.46).


우리의 최고의 교사이신 그리스도께서 기도의 ‘공식’(formula)을 가르쳐 주셨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 들어야 한다(마 17:5). 완전한 기도, 기도의 ‘완전함’(perfectio)이 아들의 음성으로 제시되었다. 모든 기도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라는 간구로 귀결된다. 그리고 오직 양자의 영을 받은 자만이 외치는 다음 음성으로 마치는 것이다. ‘아멘’(Amen)(3.20.47-49).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23)


'제23강좌' 예정: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에 따른 영원한 작정(기독교강요 3.21.1-3.24.17)


1.‘영원한 선택’(aeterna electio)의 은혜




‘생명의 언약’(foedus vitae)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하나님으로 인함을 믿는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pia mens)으로 인류의 창조와 더불어 예정의 섭리 또한 찬미할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定)하심’(Dei nutus)에 달려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은 ‘구원’(ad salutem)으로 예정하셨으며 어떤 사람들은 ‘멸망’(ad interitum)으로 예정하셨다. 오직 택함 받은 사람만이 예정 교리의 ‘유용성’(utilitas)을 깨닫고 ‘가장 달콤한 열매’(suavissimus fructus)를 맛본다.


예정 교리에는 세 가지 유용성이 있다. 첫째, 예정의 교리를 알기 전에는 영원한 선택이 하나님께서 ‘값 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샘’(ex fonte gatuitae misericordiae)에서 나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둘째, 이 가르침으로 인하여 ‘값 없는 선택’(ad electionem gratuitam)에 따라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선택의 은혜는 행위의 공로와는 무관하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5-6).


선택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빚을 지셨기 때문에 치르시는 ‘값’(merces)이 아니다. 셋째, 예정의 교리를 맛본 사람만이 ‘진정한 겸손’(vera humilitas)에 이르게 된다. 영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으로서 그 분의 손으로부터 앗아갈 자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또한 그 분 아버지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요 10:28-29).


예정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깊이 감추어 두신 ‘가장 고상한 지혜’(sapientia sublimita)이다. 이 지혜의 ‘영원성’(aeternitas)을 그 자체로 풀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호기심’은 단지 미로(迷路)로 이끌릴 뿐이다. ‘하나님 자신의 은밀한 뜻’(voluntas sua arcana)은 오직 그 분 자신의 말씀으로만 드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이로운 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경외해야 할 것이다(3.21.1).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알려 주는 것 이상으로 알려고 하는 어리석고, 경박하고, 위험한 ‘호기심’(curiositas)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길을 막고 우리를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만들 뿐이다(욥 12:24). 어거스틴은 예정의 진리는 우리가 ‘왕의 침실로’ 나아가게 되는 지식과 지혜의 보화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종의 유식한 무식’(aliqua docta ignorantia)을 견지해야 한다(3.2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정의 교리를 암초와 같이 여기지는 말아야 한다. 성경이 ‘성령의 학교’로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필요할 뿐만 아니라 유익하다’(et necessarium et utile). 주님께서는 성경 가운데서 친히 입을 여신다. 우리는 육신의 귀와 마음의 귀를 함께 열고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일을 숨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화라고 함은(잠 25:2) 오묘한 일이 그 분께 속하였다 함이요 그것이 언제든지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우리는 예정의 진리에 대해서 ‘야수적인 무지’(bruta inscitia)에 빠지지는 말아야 한다(3.21.3). 예정은 성경이 가르치는 주요한 믿음의 교리로서, 하나님께서 비밀로 감추신 영역은 그대로 두고 받되 알려주신 것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3.21.4).




2. 선택(electio)과 유기(reprobatio)


예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aeternum Dei decretum)을 칭한다. 이로써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vita aeterna)이,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damnatio aeterna)가 정하여 진다. 각 사람은 이 중에 한 길에 서므로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ad vitam), 어떤 사람은 ‘죽음으로’(ad mortem) 이르도록 ‘미리 정하여졌다’(praedestinatum). 이러한 선택은 개인적이나, 간혹 그 섭리는 ‘여호와의 분깃’으로 택하신 ‘백성’ 단위로도 선포된다(신 32:8-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그 후손을 ‘오직 거저 베푸시는 사랑으로’(tantum gratuito amore)말미암아 택하셨다(신 4:37; 7:6-8; 10:4-5; 23:5; 시 47:4). 선택은 하나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선물’(dos)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사람의 가치’(dignitas)나 행위의 공로들로부터 찾는 것은 무모하다. 이러한 은혜는 ‘그저 베푸시는 언약의 원리’(ad principium gratuiti foederis)로부터만 흘러나온다.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선택의 ‘이유’(causa)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Dei beneplacitum) 외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야곱의 후손을 자신의 기업으로 빼셨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복이 있다(시 33:2; 105:6, 42).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시 44:3).


오직 주께서 긍휼히 여기사 택한 백성이 주의 뜰에 거하게 되니(사 14:1; 시 65:4) 그 은혜의 비밀이 하나님의 뜻에만 있다(3.21.5).


역사상 나타난 하나님의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그 분의 선택은 어떤 법에도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유롭다. 선택의 은혜는 값 없이 주어지므로 동등하게 분배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한 민족을 사랑하셔서 다른 민족들보다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다. 그리고 한 때 전체로 택함 받는 민족들 가운데서도 또 어떤 사람은 ‘두시고’(retinere) 어떤 사람은 ‘버리신다’(repudiare).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다(말 1:2-3; 롬 9:13). 모두 이삭의 아들들로서 언약의 후손들이지만 ‘은혜의 놀라운 비밀에 따라서’ 야곱만이 택함을 받았다. 이러한 ‘변화’(mutatio)에는 ‘하나님의 더욱 특별한 은혜’(Dei gratia magis specialis)가 나타난다(3.21.6; 3.22.4).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롬 11:29). 이스라엘 자손을 뽑았지만 그 중에서도 ‘남은 자들’(reliquiae)에게만(롬 9:27; 11:5; 사 10:22-23) 중생의 영을 부어주신 것은 구원이 혈육에 따르지 않고 언약을 좇아 그 분의 자비에서 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증례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다 구원 받을 것이 아니라 오직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만이(갈 4:28) 하나님 나라의 기업이 된다. 이방인도 이스라엘의 수(數)에 들게 되니(신 32:9; 왕상 8:51; 시 28:9; 33:12), 이는 선택의 은혜가 지체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받을 영적인 후손들에게만 있음을 구약 시대에 미리 예표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자비’(gratuita misericordia)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계획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생으로, 어떤 사람들은 영벌로 부르신다. 이러한 ‘부르심’(vocatio)이 선택의 증거이다. 부르신 자는 의롭다 하시고, 거룩한 길에 서게 하시고, 종국적으로 영화에 이르게 하시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은 ‘구원으로 받아들이심’(assumere in salutem), ‘멸망 가운데 버려두심’(in exitio devovere) 사이에 있다(3.21.7).




3. 예지예정론 반박


하나님께서 공로를 미리 아시고 자신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예지하시는 사람들을 자녀로서 선택했다고 하는 예지예정론은 성경이 가르치는 건전한 교리를 사악하게 왜곡한다. 예정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절대적 은혜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미리 자질을 헤아리고 그 ‘예지’(praescientia)에 따라서 작정했다는 교설과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는 그저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경험’(experientia)이 밝히 증거하는 진리이다. 천사들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비록 원죄에 속한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지만 세상의 빛과 의와 구원이 되심이 영원히 정하여졌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지체들로서 선택하셨다. 이는 그들의 가치 여하를 불문하고 택하심이니, 택자들의 ‘공로’(meritum)가 아니라 오직 택하신 분의 ‘기뻐하심’(beneplacitum)에 따른 것이다. 그러므로 예정을 예지에 종속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2.21.5; 2.22.1).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이 있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무조건적 선택을 뜻한다. 사람의 ‘가치’(dignitas)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를 믿는 은혜만이 역사한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택하셨으므로 자질이 예정에 선행하지 못한다. 선택에는 이러한 목적이 있지만, ‘그 기쁘신 뜻대로’(pro voluntatis suae beneplacito), 이 말씀이 ‘더욱 우월한 원인’(causa superior)이 된다(3.22.2).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심은 오직 자신의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은혜로 말미암는다(딤후 1:9). 구원의 작정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는다(롬 9:11).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심에 따라서(엡 1:5, 9) 우리를 택하심은 우리를 자신의 은혜를 찬양하는 도구로서 삼고자 하심이었다(엡 1:6, 12, 14). 거룩함이 선택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거룩함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는냐’(롬 11:35).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양자 삼으심’(adoptio)이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ex vocatione Dei) 나온다. 하나님께서 이삭과 야곱은 부르셨으나 이스마엘과 에서는 그리하지 아니하셨다(창 21:12; 25:23). 하나님께서 므낫세가 아니라 에브라임에게 더 큰 영예를 주신 원인을 그 분의 ‘은밀한 선택’(arcana electio) 외에서 찾을 수는 없다.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로나 자질이 아니라 우리의 전적 무능과 부패를 예지하시고 선택하셨다. 공로로 말하면, 야곱과 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다르지 않다. 다만 하나님께서 한 사람에게는 긍휼을 베푸시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그리하지 아니하셨음이 다르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5-16; 출 33:19).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택하신다고 함은(롬 11:2; 행 2:33) 그 분께서 자질을 헤아리시지 아니하고 긍휼히 여기시사 미리 정하신 백성을 마음에 두셨다는 의미이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정하신 하나님께서(벧전 1:19-20) 우리를 ‘긍휼의 그릇’으로(롬 9:23) 삼으셨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라는 말씀의 뜻이 여기에 있다(2.22.4-6).


그리스도께서는 선택의 비밀을 친히 말씀하셨다. 택자들을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 ‘아버지의 것’이라고 부르셨다(요 6:37, 39; 15:19; 17:6, 9).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백성을 자신께서 택하셨다고 하심으로써(요 13:18) 함께 일하시고 경륜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셨다. 창조 전에 삼위 하나님께서 협약하셔서 아들을 보내시사 아버지께 속한 백성을 끝까지 보전하시도록 하셨다(요 17:11-12). 우리가 아들을 믿고 아들 안에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아버지의 선물’(patris donatio)이라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양자됨이 오직 아버지의 은밀하신 기뻐하심에 따른 것이다(3.22.7).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공로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공로 때문에 사람에게 영광을 예정하시지 않으셨다. 이러한 아퀴나스의 논법에 따르면 선택이 사람의 공로에 종속된다(3.22.9).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의 헤아리심과 긍휼’에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자질로 선하게 될 것을 예지하시고 선택하셨다고 한다면 결국 우리가 먼저 그 분을 선택한 것이 될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


‘하나님의 은혜는 선택을 받아야 할 자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gratiam Dei non invenire eligendos, sed facere)”(3.22.8).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야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자녀가 되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만 있다(요 1:12-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만 아버지를 본다(요 6:46). 먼저 보내심이 있고 믿음이 따른다(요 6:39-40).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만이 영생에 이르는 소망이 된다(딛 1:1-2). 믿음은 선택의 ‘보증’(pignus)이 된다. 선택이 ‘믿음의 어머니’(fidei mater)이다. 그러므로 ‘선택의 불변하는 항구성’(inflexiblis electionis constantia)에는 ‘견인’(perseverantia)의 은혜가 함께 제시된다(3.22.10).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소위(所爲)를 앞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를 주신다(3.24.3).




4. 공로 없는 은혜(gratia immerita)와 마땅한 형벌(poena debita)


예정의 경륜은 오직 하나님의 ‘뜻’(voluntas)에 달려있다. 아무도 신적 경륜을 두고 이유를 물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완전함에 대한 최고의 규준’(summa perfectionis regula)이며 ‘모든 법들 중의 법’(legum omnium lex)이다(3.23.2). 진흙이 토기장이와 쟁론하여 그릇의 어떠함을 다툴 수 없다(롬 9:21-23). 그러하듯,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마 15:13), 유기가 없다면 선택도 없게 될 것이다(3.23.1). 하나님의 은밀한 뜻은 사람의 잣대로 잴 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와 판단을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다(롬 9:19-23; 11:33). ‘성실한 무지’(fidelis ignorantia)가 ‘무모한 지식’(temeraria scientia)보다 낫다. 누가 깊음을 알되, 그 밑바닥 까지 미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예지하시되 그냥 방임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작정대로 주장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사물들의 필연성’(rerum necessitas)이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시 115:3). 사람의 넘어짐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다만 사람은 ‘자신의 죄악 때문’(suo vitio)에 넘어진다. 사람의 타락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것이로되, 그 원인은 그 분의 예정에 있지 아니하고 사람의 불순종에 있다. 그러므로 예정론이 무책임한 사람을 만든다는 비난은 합당하지 않다(3.23.2-9).


하나님의 예정은 편파적이지 않다. 구원에는 사람의 신분이나 지위나 성품에 따른 차별이 없다(갈 3:28; 약 2:5; 골 3:25; 엡 6:9). 선택과 유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역사할 뿐이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유기된 백성에게는 ‘마땅한 형벌’(debitam poenam)을 부과하신다. 그러나 선택된 백성에게는 ‘공로 없는 은혜’(immeritam gratiam)를 베푸신다. 주께서는 자비하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실 수 있으나, 심판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값 없는 은혜를 나누어 주시지는 않는다(3.23.10-11; 3.24.8-1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사람들의 의지를 사용하셔서 이루신다. 하나님의 선택을 확신하는 사람마다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힘쓸 것이다(살전 4:3; 엡 1:4; 2:10). ‘주의 마음’을(롬 11:34) 알 자 없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만인에게 복음을 전하기에 힘써야 한다(3.23.12-14).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우리를 ‘부르심’(vocatio, appelatio)과 ‘선택’(electio)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 확신하게 된다. 성령의 은밀한 역사로 말미암아 확신되는 ‘내적인 소명’(interior vocatio)이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된다(3.24.1-3, 8).
만세 전의 하나님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협약되었다.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아니라면 무조건적 선택이 무의미하다. 오직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 값 없는 은혜는 그리스도의 공로, 그리스도의 보혈의 값으로부터만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버어나드가 말했듯이, ‘하나님 자신께서 나에게 전가하시려고 작정하지 아니하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시며(요 6:35), 그 떡을 먹는 자마다 죽지 아니한다(요 6:51, 58). 오직 그 분을 믿는 자마다 그 분의 떡을 먹는다(요 3:16). 우리는 양이며 그분께서는 목자가 되셔서(요 10:3) 우리를 자신의 보호 아래 두신다(요 6:37, 39; 17:6, 12). 그리고 끝까지 지키신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다시 내어 쫓김이 없으며(요 6:37), 하나도 버림이 되지 않으며(요 6:39), 아무도 뽑히지 않는다(마 15:13).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백성만이 견인의 은혜를 누린다. 영원한 구원의 작정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담고 있으므로(3.24.4-7)!








문병호 교수의 <기독교강요> 지상강좌 (24)


'제24강좌' 최후의 부활: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음(기독교강요 3.25.1-3.25.12)


1. 부활의 소망


중세시대의 역사관은 정태적(靜態的)이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구조를 신뢰했다. 교회에 의해서 주도되는 세상 질서로 하나님의 섭리가 제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부분을 교회에 맡기고 쉬고 계신 분으로서, 성도들의 삶을 주장하시기 보다는 단지 그들의 공로를 저울에 다는 일 정도를 계속하신다고 믿었다. 종말의 소망이 가르쳐지지 않았으며, 연옥 교리를 조작하여 사후에도 공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후의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의 지금 처지가 짐승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얻을 면류관이 없다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현세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본향의 복이 없다면 이곳의 나그네 삶이 그저 고통스럽지 않은가? 지상의 삶 가운데서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금 일어나 머리를 드는 것은(눅 21:28) ‘그리스도의 학교에서’(in schola Christi) 죽는 날과 종말의 부활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처음 열매가 되셔서 천국 백성들이 받을 영광을 미리 보여 주셨다. 언약 백성의 삶은 종말을 지향한다. 종말은 단지 현재의 끝으로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현재의 삶에 이미 역사한다. 종말의 미래를 묵상하는 자는 그 열매를 이미 맛보아, 즐거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 삶을 살게 된다(3.9.1-6; 3.10.4, 6).
사랑과 믿음이 소망으로 말미암는다. 소망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에 터를 잡는다(골 1:4-5). 예수를 우리가 보지 못하였으나 믿고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함은 복음의 약속인 영혼의 구원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벧전 1:8-9). 우리의 보물이 천상에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그곳을 향한다(마 6:21). 마지막 날에 ‘우리의 크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나타나셔서 ‘복스러운 소망’을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끌어올려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날마다 소망하는 가운데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애쓴다(빌 3:14; 딛 2:12-13).
‘육신의 감옥에 갇힌’(carnis ergastulo inclusi) 우리가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에도 오히려 담대한 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부활의 권능으로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키게 되리니, 오직 우리는 잠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바라고, 믿고 지금의 몸으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쓴다(고후 4:18-5:10; 롬 8:25).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 그것은 오직 소망과 함께 역사한다(히 11:1). ‘소망의 본성’(spei natura)이 여기에 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3-4).


복음은 종말적으로 열매를 맺지만 현재적으로도 이미 역사한다. ‘의의 태양’이신(말 4:2)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조명하셨다’(vitam nobis illuminavit)(딤후 1:10). 그리하여서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이제는 외인이나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그 분 나라의 시민이 되었다(엡 2:19).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 부활의 소망은 이러한 현재적 복에 감사하는 자에게만 넘친다. ‘복된 부활을 계속적으로 묵상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만이 복음의 유익을 어김없이 받게 된다’(3.25.1).
성도가 이 지상의 나그네의 삶 가운데 누리는 ‘유일하고 완전한 복’(unica et perfecta felicitas)은 ‘하나님과의 유대’(紐帶, coniunctio cum Deo)를 이루는 것이다. 철학자들도 최고의 선으로서 신과의 합일을 말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저 헛될 뿐이었다. 그들은 그 유대를 이루는 ‘거룩한 고리’(sacrum vinculum)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서 연합되었지만 그 연합을 계속 심화시켜 가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지만 그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날마다 달려간다고 하였다(빌 3:12). 성도는 그 속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시지만 마지막에 하늘에서 그리스도를 만날 것을 기다리며 현재의 삶을 소망 가운데 산다(빌 3:20).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10:12). 그 분께서 ‘우리의 부활을 위한 모든 조목들’(omnes resurrectionis nostrae numeros)을 이미 다 완성하셨지만 ‘그것들 자체의 효과로’(ad suum effectum) ‘우리 몸의 속량’을(롬 8:23) 이루기 위해서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그러므로 오직 부활을 향하여 마음을 끌어올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미 지상의 삶에서 경험하게 된다(3.25.2).


2. 몸의 부활(carnis ressurectio)


세상을 떠나는 것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죽음이 진정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이라면, 육신의 삶이 감옥의 수형(受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육신으로 태어남이 그저 헛되지 않음은 현세의 삶이 없이는 죽음을 통한 다시 삶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남이 없다면 그 분에 관하여 전하는 것과 그 분을 믿는 것이 다 헛되다(고전 15:14). 그 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단지 이 세상의 삶에 제한된다면 우리가 더욱 불쌍한 사람이 된다(고전 15:19).
영혼 불멸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은 많으나 육신의 부활을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경은 부활을 믿는데 있어서 이성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두 가지 길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유사함’(similitudo)을 찾는 것이며, 또 하나는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omnipotentia)을 기억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취하시고 영광을 입으신 채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 그 분께서는 부활의 몸을 입으신 참 사람이시자 참 하나님으로서 그곳에서 여전히 중보하신다. 그리하여서 ‘미래의 부활의 보증’(pignus futurae resurrectionis)이 되신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imago Christi)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다시 사심으로 죽음을 이기신 것은 오직 우리를 위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caput)로서 첫 열매가 되셔서 온 몸의 지체들에게 ‘부활의 본’(exemplum)을 보이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써 ‘완전한 구원을 조성하신 분’(perfectae salutis autor)이 되셨다. 그 분의 다시 사심이 없었다면 우리의 ‘양자됨’(adoptio)이 무익하고 ‘우리 구원의 효과’(salutis nostrae effectus)가 무용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썩지 아니하는 ‘순전한 몸’(integrum corpus)으로 계시다가(엡 1:20; 시 16:10; 행 2:27)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우리의 생명이 그 분과 함께 아버지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 분께서 나타나실 때 그 생명도 또한 우리에게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골 3:1-4).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전 4:10).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미래의 삶을 공유하는 자들’(socios futurae vitae)로 삼으셨다. 그 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 그 분께서 친히 부어주신 그 분의 영을 받은 자마다 그 영의 ‘능력’(virtus)과 ‘작용’(efficacia)으로 다시 살게 되었다. 그 분께서 ‘부활이요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죽어도 사는 은혜의 길을 여셨다(요 11:25).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고전 15:23).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혼을 떠받치기 위한 확고한 실체’(ad fulciendos animos nostros firma hypostasis)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서 부활이 증언되었다. 그 분께서 다시 사셨음이 천사들에 의해서 선포되었다(마 28:6; 눅 24:6).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며 직접 그 분의 몸을 보고 만졌다(눅 24:40; 요 20:27). 부활 후 사십 일 동안 주님께서는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행 1:3).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오백여 형제들이 ‘보는데’ 승천하셨다(행 1:9; 고전 15:6). 우리가 보혜사 성령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내려 받음이(행 2:33; 요 16:7) 그 분께서 인성에 따라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오르셨음에 대한 ‘확실한 증거’(certum documentum)가 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성에 따라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우리를 위한 신인양성의 중보를 지금도 계속하신다. 오직 이러한 중보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은 사람만이 부활을 미리 맛본다(3.25.3).
몸의 부활을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 권능이 역사함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신뢰한다. 씨가 죽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연의 섭생도 부활에 대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으나(고전 15:36), 진정한 부활의 유비는 그리스도의 다시 사심 외에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부활의 섭리는 신비에 속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찬미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세계의 거민이 사망 가운데 처하여 있을지라도 주의 백성은 다시 살아나리라고 예언하였다(사 26:19). 다윗은 임박한 사망 가운데서도 생명이 되시는 여호와를 피난처로 의뢰함을 노래하였다(시 68:20). 욥은 육체의 장막을 벗고 난 후 후일에 땅 위에 서실 구속자를 자신의 눈으로 보리라고 절규하였다(욥 19:25-27). 에스겔 선지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른 뼈에 힘줄과 살과 가죽을 더하시고 생명을 주사 자신의 군대를 삼으시는 형상을 부활의 환상으로 보았다. 이로써 태초의 창조의 권능이 다시금 상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마른 뼈들을 채우시고 각 마디를 상합하게 하신 후 ‘생기’를 넣으시고 ‘너희가 살아나리라’ 라고 선포하셨다(겔 37:1-10). 이러한 말씀들은 부활이 ‘소망의 질료’(materia sperandi)이며 ‘모든 해방(解放)의 주요한 본’(praecipuum exemplar liberationum omnium)이 됨을 우리가 깨닫게 한다.
아들을 죽기 까지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의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신다(빌 3:21). 오직 하나님께서만 항상 미쁘심으로(딤후 2:13) 우리를 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지키신다(딤후 1:12). 그리하여 심판의 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으로부터 ‘의의 면류관’을 받게 하신다(딤후 4:8). 우리가 지금은 환난을 받으나 주 예수께서 마지막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안식으로’ 갚아 주신다(살후 1:6-8). 이렇듯 성도의 부활은 성부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성령의 역사로 성자께서 육신 가운데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첫 열매에 동참하는 성도의 소망이자 그 실상이다(3.25.4).


3. 부활의 영원한 복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부께서는 성자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의 죽음으로 인정하셨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고전 15:15). 몸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려 주는 영’이 되셨음이 무의미하다(고전 15:45). 몸의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들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로, 고대의 천년왕국론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 4절의 말씀을 곡해하여 그리스도의 통치를 천년 동안으로 제한하였다. 그들은 영생과 영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마 25:41, 46), 그 전제가 되는 몸의 부활도 거부하였다. 영생으로 부활하는 성도의 복이 유한하다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의 영광이 완전하지 못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왕국’(regnum Christi)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3.26.5).
둘째로, 몸의 부활과 함께 영혼의 부활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한 좌소(座所)’로서(1.5.5; 1.15.2) 그 분의 신성을 최대한 반영하며 불멸성의 표지들이 그 가운데 새겨져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그들은 영혼의 불멸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dos)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몸이 영혼보다 ‘조건’(conditio)에 있어서 더 낫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영혼은 이 세상의 삶 동안에만 몸을 살려주는 덧없는 호흡에 불과하며, 그것의 장막인 몸도 ‘성령의 전’(templum)으로 불릴 수 없다. 지상의 몸은 쇠하는 집과 같으나(벧후 1:14) 그것이 무너지면 영원한 집이 있으니(고후 5:1) 지금은 주님과 떠나 사나(고후 5:6) 몸을 떠나게 되면 그 분과 영원히 함께 살리라는(고후 5:8) 소망은 오직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만 배태될 수 있다. 영혼의 ‘본질’(essentia)이 죽음 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강도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눅 23:43),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신다는 말씀(눅 23:46), 주님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으로(벧전 2:25) 여기고 자신의 영혼을 그 분께 드리고자 하는 스데반의 기도가(행 7:59) 헛될 것이다. 사후의 ‘중간 상태에 관하여’(de intermedio statu)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후 우리의 영혼은 땅에서 들리신 주님의 영접을 받으며(요 12:32)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불린 곳에서(눅 16:22)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omnia)은 주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때 까지 ‘유예되니’(suspensa), 이는 성도를 위한 ‘영광의 면류관’이 그 때 수여되기 때문이다(3.25.6).
셋째로, 영혼의 불멸을 부인하지는 않으나 부활시 이전의 몸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은 현재 입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친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동일한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몸을 깨끗하게 하라고 하며(고후 7:1), 몸으로 행한 것으로 판단을 받으며(고후 5:10), 예수의 생명이 죽을 몸에 나타난다고(고후 4:11) 하였다. 또한 성도들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하며(고전 6:15), 몸으로 찬양하기를 원하고(딤전 2:8), 몸으로 제물을 드리고(롬 12:1), 몸으로 주님을 섬기라고 한다(고전 6:20). 주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비유하시면서 부활을 말씀하신 것은 몸의 부활을 분명하게 보여준다(요 2:19). 무덤에 있는 자들이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아온다는 말씀도 몸의 부활을 명백하게 제시한다(요 5:28-29). 죽음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적극적 작정 없이 들어온 ‘우연한’(accidentalis) 것이라면 그것으로부터의 ‘회복’(instauratio)은 그 죽음의 육체에 속한다(3.25.7).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의 ‘미래 부활의 표’(sigillum)가 된다. 우리의 몸은 의의 병기이다(롬 6:13, 19). 그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다(갈 6:17).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는 처소이다(고전 6:19-20). 이 몸은 죽을 것이로되, 그것이 다시 살리심을 받는다(롬 8:11; 고전 6:13-14).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된다(빌 3:20-21). 부활의 ‘비밀’(mysterium)이 여기에 있으니, ‘본체’(substantia)는 현재의 몸을 그대로 가지나 ‘자질’(qualitas)에 있어서는 영광스러운 변화가 있다. 즉 ‘썩음을 버린 채 썩지 않음을 입는다’(induet, deposita corruptione, incorruptionem)(고전 15:51-52). 우리는 이러한 부활의 신비를 믿어야 하며 그것에 대해서 ‘너무 자유롭고 공교한 철학적 사색을 하는 방자함’(liberius argutiusque philosophandi licentiam)을 버려야 한다(3.25.7-8).
이러한 세 가지 사설(邪說)들은 성경이 약속한 부활한 성도들의 ‘영원한 복’(aeterna felicitas)을 앗아 간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서 자신의 몸의 영광을 다양한 은사들로써 드러내시기 시작하셨고, 부활 후 높아지심으로 그 영광을 날로 더하시다가 재림의 때에 완성하신다. 그 때에 ‘심판의 부활’로 나온 자들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되고 ‘생명의 부활’로 나온 자들은 그 영광의 광채와 위엄에 휩싸이며 하나님을 ‘참모습 그대로’, ‘대하여’ 보게 된다(요일 3:2; 고전 13:12). 하나님을 마주봄은 그 분 자신의 영광과 능력과 의를 나누어 받음과 그 분 자신과 하나가 되는 은혜를 누림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 자신께서 모든 선한 것들의 부요함이 담긴 마르지 않는 샘이시다. 그러므로 ‘최고선’(summum bonum)과 ‘모든 복의 조목들’(omnes felicitatis numeros)을 그 분께 찾아야 한다. 영벌은 이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이며(살후 1:9), 영생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그 분과 ‘연합체’(societas)가 되어서 그 분의 자녀로서 완전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비의 숭고함’(sublimitas)을 ‘우리 마음의 관념으로’(mentis nostrae conceptio) 다 품을 수는 없다. 성도가 부활하여 누릴 ‘즐거움’(amoenitas)과 ‘달콤함’(suavitas)을 아무도 이성의 그릇에 다 담을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이 자리에 이르고자 하지만, 어떻게 그곳에 이를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활의 복이 귀한 만큼 지금 부활의 삶이 복된 것이다(3.25.9-12). 그러므로 부활의 미래를 묵상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삶을 살자!








하나님과 하나될 때 교회는 참되다
그리스도 말씀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그리스도 나라 돼야








'제25강좌' 참 교회: 건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기독교강요 4.1.1-4.2.12)






1.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Christus caput ecclesiae)








칼빈의 교회관의 기초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선택에 있다. 1536년 〈기독교강요〉에서 사도신경의 ‘credo sanctam ecclesiam catholicam’(나는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을 해석하면서 칼빈은 교회의 유일성, 보편성, 거룩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선택된 자들 전체의 수로 이루어진 거룩한 공교회(sanctam ecclesiam catholicam)가…한(unam) 교회이며 연합체(societas)이고 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들의 그리스도이신 우리의 주님께서는 그들의 지도자며 통치자, 이른바 몸의 머리가 되신다. 그들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 분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따라 선택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으로 모이게 되었다(엡 1:4). 그런데 교회가 둘 혹은 셋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연합체는 보편적(catholica), 즉 우주적(universalis)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들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여 일치되어서(엡 1:22-23) 한 머리에 의지함으로써 한 몸으로 자라가고 그 몸의 지체로서 서로 결합되고 함께 지어져 간다(엡 4:16). 그들은 진실로 한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서 하나가 되며 같은 하나님의 영 가운데서 영생의 유업을 위해서 부름을 받는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또한 이 연합체는 거룩하다(sancta).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선택된 사람들의 수만큼 교회의 지체들로 받아들여지며, 그들은 모두 주님에 의해서 거룩해 지기 때문이다(요 17:17-19; 엡 5:25-32)”


1559년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이러한 신경의 조목으로 성도는 ‘가시적 교회’(ecclesia visibilis)뿐만 아니라 고금(古今)과 미래의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총수(總數)로 구성된 ‘비가시적 교회’(ecclesia invisibilis)를 고백한다고 천명한다. 성령의 ‘인침’(signaculum)을 받은 성도는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분변된다(딤후 2:19; 엡 1:13). 하나님 홀로 자신의 교회에 대한 지식을 가지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밀한 선택’(arcana electio)에 기초하며, 그로 말미암아 ‘내적 소명’(interior vocatio)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러한 선택과 소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세 전에 작정되었다. 따라서 ‘교회의 머리’(caput)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지 아니하면 한 몸의 ‘지체들’(membra)이 될 수 없다(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2-23; 5:30).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그 분의 의를 전가 받는 성도만이 ‘미래의 기업’(haereditas futura)을 분깃으로 받는다. 교회가 ‘보편적’, ‘우주적’이라고 불리는 것은 한 성령을 받아서 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하나 된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함께 자라가기 때문이다(엡 4:16).


그리스도와 연합한 지체들은 ‘형제적 일치’(fraternus consensus)를 이루며 ‘형제적 사랑’(fraternus amor)을 나눈다. ‘성도의 교통’(sanctorum communicatio)은 하나님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저 주신 은혜와 은사를 서로 나누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과 교통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다음과 같은 ‘열매’(fructus)를 맺는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선택의 영원한 섭리에 의해서 존속된다.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견고한 터’(firmitudo)에 주추를 놓고 서 있으므로 그 분 자신으로부터 떨어지는 일이 없다. 셋째로, 교회의 품 안에 있는 이상 우리는 항상 진리와 함께 있다. 넷째로, 교회의 지체로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의 연합체 안에 머물게 된다.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성도는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된다(4.1.3).


비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눈에만 보이고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가시적 교회에는 비록 신앙을 고백하고 성례에 참석하며 직분을 수행하는 자라도 ‘위선자’(hypocrita)가 많이 섞여 있다. 가시적 교회의 지체로서 비가시적 교회에 속하지 않는 자가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밖에도 양이 많고 안에도 이리가 많다.’ 오직 주님만이 끝까지 구원으로 견인하실 자를 아신다(마 24:13; 딤후 2:19). ‘주님의 은밀한 판단’(arcana iudicia)은 우리의 인식력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비가시적 교회의 ‘표’(signum)는 무조건적 선택 외에는 없다(4.1.8-9).


한편 가시적 교회의 ‘표지’(nota)는 ‘말씀의 순수한 선포’(pura verbi Dei praedicatio)와 ‘성례의 합당한 거행’(legitima sacramentarum administratio)으로 제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요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 분의 충만이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게 존재한다(엡 1:23; 5:23-32).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리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딤전 3:15). 말씀의 양식이 먹여지고 성례적인 연합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있다. 오직 교회만이 ‘건전하고 온전한 교리’(salva et illibata doctrina)를 보존한다. 그러므로 비록 결점이 있더라도 이러한 공동체를 떠나는 것은 배교(背敎)에 다름없다. 다음 교리는 ‘주요하며’(praecipua) ‘절대적이다’(necessaria). 그러므로 이를 버린 교회는 죽게 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교리들(unum esse Deum; Christum deum esse, ac Dei filium; in Dei misericordia salutem nobis consistere, et similia.”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곧 그들의 교훈 위에 세워졌을진대, 그 모퉁잇돌은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 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교회는 머리이신 그 분에 부착하는 한 진리의 연합체로서 존재하게 된다(4.1.9-12; 4.2.1).




2.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교회(ecclesia mater)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놀라운 섭리의 방식으로 ‘우리의 능력에 맞추셔서’(ad captum nostram accommodnas) 교회를 주시고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우리가 날마다 진보하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복음 전파의 보물을 맡기시고 말씀에 따른 삶으로 성도들이 참 경건에 이르는 외적인 도움을 주도록 하셨다. 그들은 유아기와 아동기를 지나는 동안 교회의 도움과 섬김, 보호와 지도를 받아서 성인이 되고 궁극적으로 ‘믿음의 목표’(ad metam fidei)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막 10:9). 사도 바울이 우리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의 자녀들이라고 전한 바와 같이(갈 4:26), 교회의 성도는 율법 하에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도 ‘모성적 돌봄’(materna cura)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 자신께서 아버지가 되시는 어떤 사람에게든, 진실로 교회는 어머니가 될지니라”(quibus ipse est pater, ecclesia etiam mater)(4.1.1.)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가시적 교회는 어머니의 역할을 한다. 교회가 성도를 잉태하여 낳고 젖을 먹여 기른 후 마지막 때까지 보호하고 양육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성도는 교회라는 ‘학교’(schola)를 떠나서는 구원의 진리를 배울 수 없다(사 37:32; 욜 2:32).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교육’(educatio ecclesiae)을 통하여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있어서 장성하길 바라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자 하신다(엡 4:10-13). 교회는 ‘영혼의 영적 양식’으로서 교리를 먹인다. 그리하여서 말씀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자라며(롬 10:17), 궁극적으로 ‘신앙의 일치’에 이르도록 이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특별한 은혜는 사람의 혀와 입을 사용하셔서 그 지체들이 ‘자신의 음성’(sua vox)을 듣게 하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성전을 하나님의 얼굴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고 불렀다(출 20:24; 시 42:2).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마음속에 비춰 주시기를 간구했을 때(고후 4:6), 이는 하나님의 ‘천상의 교리’(coelestis doctrina)를 듣고자 함이었다. 진정 어머니의 품에서 생명의 도리를 배운 성도는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에 순복하게 된다(엡 4:12). 가르치는 직분이 사도와 교사에게 부여되지만 오직 성령의 감화로 듣게 하시고 듣는 자로 하여금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2:4; 3:7; 15:10; 갈 3:2). 그러므로 교회의 어머니 됨을 인정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망각하지 말 것이다(4.1.4-6).


성화의 과정에 있는 성도가 완전하지 않듯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무오(無誤)하지 않다. 고린도 교회에는 성도들 사이에 분쟁과 시기가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그 가운데 있었다. 은사가 무분별하게 남용되었으며 사랑으로 서로 교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곳을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성도들의 연합체’(ecclesia Christi sanctorumque societas)라고 불렀다(고전 1:2). 주님께서는 교회의 주름 잡힌 것을 펴시고 티를 씻어내심으로써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다(엡 5:26-27). 따라서 교회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 않다.


“교회는 날마다 나아가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거룩하다.”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개교회에서 ‘성화의 증거’(indicia sanctificationis)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존재는 인정하신다. 갈라디아 지방에는 다른 복음을 좇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온전한 순결함’(solida puritas)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곳에 여러 교회들이 존재함을 인정하였다(갈 1:2, 6). 교회는, 비록 완전하지 않더라도, 여호와의 영원한 거처요 쉴 곳이 될 것이다(시 132:13-14). 낮과 밤의 운행이 계속되는 한 하나님의 교회는 영영 쇠하지 아니 할 것이다(렘 31:35-36).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의 신앙을 살필지언정(고전 11:28), 자의로 판단하여 어머니의 품을 떠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4.1.13-15, 17). 성도들은 교회의 품 안에서 ‘서로 간에 고통을 감내하며’(sufferendo invicem)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가야 한다(엡 4:3). 교회의 됨됨이를 자의로 판단하여 그 존재를 부인하거나 다른 지체들의 연약함과 허물 때문에 걸려 넘어져서 ‘연합체의 패찰’(牌札, tessera societatis)을 떼어내 버리고 성도의 교통으로부터 이탈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4.1.16). 세례는 성도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가족’(familia Dei)이 되었다는 표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자녀들을 특별히 보호하신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중보하시는 성자의 공로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매일 사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길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무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다른 지체의 허물과 불법을 이유로 삼아서 교회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교회를 떠나는 무모함을 보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돌아오라고 부른 자를 누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완전히 나타나서 성도가 그 분과 화목하게 되었으니(딛 1:9; 3:4; 딤후 1:9; 고후 5:18), 누가 스스로 헤아려 그 사랑으로부터 혹은 자신을, 혹은 남을 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교회에는 죄행에 대한 항속적인 은혜가 깃들어 있다. 왜냐하면 교회가 설립됨에 따라서 죄사함이 더불어 덧붙여지기 때문이다”(perpetuam residere in ecclesia Christi delictorum gratiam: qoud, ecclesia velut constituta, remissio peccatorum adhuc subiungitur).


그러므로 언약의 자녀로서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품속에 즐거이 머물자(4.1.17-21, 23-29)!




3. 참 교회(ecclesia vera)


‘교회의 교제’(communio ecclesiae)는 ‘온전한 교리의 일치와 형제적 사랑’(consensio sanae doctrinae et fraterna caratias)이라는 두 고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리스도에 의해서’(in Christo vel secundum Christum) 하나로 연결될 때 온전해진다(빌 2:1, 5; 롬 15:5).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진리가 함께 역사하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한 믿음 가운데서 그 분을 한 주로 섬기고(엡 4:5) 그 분을 머리로 한 몸 된 지체들로서 서로간의 연합을 이룬다(4.2.5).


참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지배하고 그리스도의 홀이 다스리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내주가 그 나라의 통치방식이다.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듯이(요 10:14, 27), 진리에 속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소리를 듣는다(요 18:37). 참 교회의 지표는 ‘건전하고 타락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진리’(veritas Christi salva et incorrupta)에 있다. 교회의 사도성은 정치적 사도권의 계승이 아니라 사도 시대 때부터 변함없이 ‘만장일치’(unanimi consensu)로 보존되어 오던 교리의 계승으로부터 비롯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유일하게 참됨은 ‘하나님의 교리에 대한 한 진리’(una divinae doctrinae veritas)를 동일하게 믿고 고백하기 때문이다(4.1.10; 4.2.2-4).


교회의 머리가 한 분 그리스도이시므로 그 분만이 교회의 ‘유일한 감독’(unicus episcopatus)이 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임 당하신 양으로서 목자가 되셨다. 우리를 위하여 종으로 오셔서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이제 주인이 되셨다. 오직 우리에게 한 제사장이 계시니 그 분께서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께만 우리를 위한 사죄권이 있으시다(4.2.6).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열쇠의 권한’(clavium potestas)은 복음을 전도하고 그 약속으로 성도들을 권면하라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대신하라는 뜻은 아니다(4.1.22).


참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이다. 참 교회가 빛으로서 비추고, 시내로서 적시고, 가지로서 열매를 맺게 됨은 빛의 근원이시며, 생수의 샘이시며, 나무되시는 그리스도께 붙들려 있음으로 말미암는다. ‘하늘 교사의 교리’(coelestis magistri doctrina)를 미리 듣지 아니하였다면 ‘언약의 율법’(lex foederis)이 구약 백성들에게 단지 헛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아니하였다면 ‘교회의 주요한 신경이자 영혼’(principuus nervus atque anima ecclesiae)이 되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이 단지 의문을 좇는 일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4.2.6-7).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에 의해서 제정되지 않은 성례들을 거행하고 미사를 드림으로써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모든 대속 사역을 다 이루신 그 분을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마치 벧엘에 제단을 쌓는 것 같아서(왕상 12:31) 하나님께서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워하신바 된 것이다. 교회의 지체로서 성도의 교통에 참여해야 함의 당위성은 그 교통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연합인가에 달려있다. 미혹의 터에 자리 잡고 우상의 가증스러운 것을 버팀목으로 서 있는 거짓 교회의 표는 단지 멸망 밖에 없다.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속히 떠나 적그리스도를 그 중앙에 앉히고 섬기고 의지하는 사교(邪敎)에서 ‘합법적인 교회 형태’(legitima ecclesiae forma)를 찾을 수는 없다(4.2.8-12).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 아들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 것과 같이 성도들도 다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거할 때에만 교회는 진정 참되다.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그 분의 중보자 인격을 박탈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오히려 그 분을 교회의 머리로 여기고 그 분의 지체들로서 그 분과 하나가 되도록 하자. 우리는 이 연합을 가장 아름답게 보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한 분 되심이 무익하거나 무용하지 않듯이, 그 연합의 능력이 성도들의 몸 전체로 퍼져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본질을 우리에게 주입해 주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자신의 생명과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복으로 우리와 교통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요 17:21 주석).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과 조화 이루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직분따라 진리 가운데 섬기고 실천해야










'제26강좌' 교회의 직분: 머리이신 주님께로 자라감(기독교강요 4.3.1-4.7.30)






1. 사람들의 대리적 사역(ministerium vicarium hominum)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시되, 자신의 ‘가시적 현존’(praesentia visibilis)은 숨기시고 사람들을 ‘도구’(instrumentum)로 사용하신다. 다만 사람들은 ‘대리적 사역’(vicaria opera)을 감당할 뿐, 그 고유한 ‘권리’(ius)와 ‘영예’(honor)는 언제나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보이는 손으로서 사용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사신’(使臣, legatio)으로 삼으심으로써(고후 5:20) 그들에 대한 ‘자신의 배려’(dignatio sua)를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입을 사용하셔서 성소에서 친히 말씀하시듯 하신다. 그리하여서 자신의 은밀한 뜻이 사람의 말로 해석되어 전해지게 하신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전 3:16-17; 6:19; 고후 6:16).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와 같은, 심지어는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서 자신의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 ‘겸손에 이르는 훈련’(ad humilitatem exercitium)을 가장 효과적으로 받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의 보화를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에 숨기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후 4:7).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진리와 영생에 관한 가르침이 자신의 일꾼들에 의해서 선포되게 하심으로써 그 ‘고리’(vinculum)로 교회의 지체들에게 ‘상호간에 사랑’(mutua sapientia)이 자라게 하신다. 한 믿음으로 한 주를 섬기는 성도들이(엡 4:4-7) 하나가 되는 최선의 길은 목회자로 선택된 사람의 입을 통하여서 동일한 가르침을 받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직무를 부여하심으로써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신다(엡 4:12). 그리하여서 교회의 각 지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신다(엡 4:15). 이렇듯, ‘사람들의 사역’은 교회의 ‘힘줄’(nervus)과 같은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가시적 교회의 ‘직제’(職制, ordo)와 ‘정치’(regimen)에 있어서 ‘사도적이며 목회적인 직분’(apostolicum ac pastorale munus)은 필수적이다(4.3.1-2).


교회의 직분은 최고의 영예를 받을만한 가장 훌륭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자들을 세우셔서 자신의 교리를 해석하고 선포하게 하신다. ‘복음의 사역’(ministerium evangelii)은 그것이 ‘성령과 의와 영생의 경륜’(administratio spiritus et iustitiae et vitae aeternae)을 이루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고 영광스러운 일이다(고후 3:9; 4:6).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준비시키셔서 고넬료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게 하셨다(행 10:3-6). 사도 바울이 구원의 교리와 세례에 의한 성결의 도를 받게 된 것은 아나니아의 도움을 통해서였다(행 9:6). 그리고 사도 바울을 친히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셋째 하늘로 이끄셔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듣게 하셨다(고후 12:2-4). 하나님의 뜻이 이러하므로 그 분의 일꾼들의 발이 아름다우며(사 52:7), 그들의 말을 들음이 곧 그 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고(눅 10:16), 그들 자신이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마 5:13-14) 불리게 된다(4.3.3).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교회의 성도들 각자를 온전하게 하셔서 직분을 감당하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그 분의 지체된 성도는 그 분의 은사로 말미암아 그 분을 닮아감으로써 그 분의 몸을 이루는 고유한 기능을 감당한다(엡 4:10-16). 교회의 사역들이 그렇듯이 성령의 은사들(dona Spiritus)은 다양하다. 마치 다양한 성부(聲部)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한 음을 만들어 내듯이 성도들은 각자의 은사를 다른 은사들과 조화롭게 사용하여야 한다. 성령의 은사는 직분에 앞서며 성령의 은사로써 직분이 표현된다(롬 12:6-8, 주석). 성령의 은사들은 직분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직분을 예비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마다 사역과 관련된 은사들을 받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도들과 목사들을 세울 때 다만 그들에게 가면만을 씌운 것이 아니라 은사들을 공급하시기 때문이다. 이 은사들이 없으면 그들은 그들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단지 허망하고 무익한 이름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더불어서 능력을 동시에 받는다(엡 4:11-14, 주석).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들을 주심으로써 성도들이 직분을 합당하게 감당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신다. 은사들은 다양하지만 영은 하나인 것과 같이, 직분들은 다양하지만 몸은 하나이다. 모든 지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unitas Christi), 이것이 교회 사역의 신비이다(4.3.2).




2. 성경적 직분: 경건과 사랑


교회의 ‘통상직’(ordinarium munus)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된다. 이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계속되는 ‘항존직’(perpetuum)이다. 반면에 초창기 교회의 필요에 응한 ‘비상직’(extraordinarium munus)으로서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가 있다(엡 4:11). 이들은 조직된 교회가 생길 때까지 존재했기 때문에 ‘임시직’(temporarium)이라고 불린다. 먼저 임시직을 살펴본다.


사도(, apostolus)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죄 사함 받는 세례를 주고 성찬을 거행했다(막 16:15; 마 28:19; 눅 22:19). 사도라는 명칭은 주님의 일꾼으로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어의를 가지고 있다.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듣지도 못한 곳에서 교회를 최초로 설립한 사람들이었다(롬 15:19-20; 고전 3:10). 사도들의 직분은 말씀 선포와 성례 거행으로 요약되는 바, 이 직분이 목사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사도들이 전 세계를 향하여 사역을 감당했다면 목사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무리만을 담당했다. 엄격히 말해서 사도의 명칭은 열두 제자와 바울에게만 적용되나(눅 6:13; 갈 1:1) 교회의 모든 사역자들에게 광의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선지자(, propheta)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singularis revelatio)를 뛰어나게 받은 사람으로서 오늘날 사라졌거나 아니면 흔치 않게 존재한다. 이 직분은 이후 교사의 직분으로 대체되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evangelista)는 사도들을 도와서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시행하며 비록 사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주님에 의해서 세움 받은 사람을 칭한다(눅 10:1). 이러한 세 가지 직분들은 ‘정당하게 조직된 교회’(ecclesia rite constituta)에는 존재할 여지가 없다(4.3.4-5).


교회의 통상직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되는 바, 그 중에서 목사직 혹은 장로직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성경은 목사(pastor), 장로(presbyterius, senior), 감독(episcopus), 사역자(minister)라는 호칭들로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에베소서 3장 11절에서 사도 바울은 장로와 집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다스리는 은사와 구제하고 긍휼히 여기는 은사를 말함으로써 이 직분들이 초대교회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롬 12:8; 고전 12:28; 딤전 5:17).


목사(, pastor)의 직분은 ‘그리스도의 교리로 사람들을 가르쳐서 진정한 경건에 이르게 하고, 거룩한 성례들을(sacra mysteria) 거행하며, 올바른 권징을 보존하고 시행하는 것’이다. 즉, 말씀 전파와 성례 거행, 가르침, 그리고 도덕적인 지도와 권징 시행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사는 자신의 음성을 인간의 입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설교에 있다(고전 9:16-17). 목사의 설교를 통하여 성도는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게 된다. ‘선포된 설교’(externa praedicatio)는 가시적 교회가 서 있는 유일한 기초이며 성도들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고리’(vinculum)가 된다(4.1.5). 목사의 설교가 이렇게 중요하니까 제네바 규칙에서는 하나님의 소명과 더불어서 말씀에 대한 선하고 거룩한 지식과 그 말씀을 잘 전하여서 사람들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목사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불가결함을 강조하고 있다. 말씀을 통한 목사의 가르침과 충고와 권고와 비난은 공적인 담화와 개인적인 훈계를 포함한다(딛 1:9; 행 20:31). 경계를 넘어서 교회를 창설했던 사도들과는 달리 목사들에게는 각각에게 맡겨진 ‘양떼’(grex)를 목양할 소명이 고유하게 부여된다. 사도 바울이 자신들과 사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했을 때(고전 4:1), 이는 오늘날 목사직을 칭한다고 할 것이다(4.3.6-7).


교사(, didascalus)의 고유한 직분은 ‘성경 해석’(scripturae interpretatio)을 통하여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sincera sanaque doctrina)를 보존하는데 있다. 목사는 이러한 교사직을 겸한다(4.3.4).


장로(, presbyterus)는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의 ‘다스리는 것’()과 로마서 12장 8절의 ‘다스리는 자’()의 사역과 관계된 직분이다. 문자적으로 연장자(senior)를 의미하는 장로의 직분이 이러하므로 감독(, episcopus)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장로는 ‘도덕적인 견책’(censura morum)과 ‘권징’(disciplina)을 시행하는 직분을 감당한다. 장로의 다스림은 기독교인 군주가 교회를 통치하는 것과는 다르다(4.3.8).


집사(, diakonus)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역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사역으로 이루어진다. 즉 ‘구제하는 자’(,procureur)와 ‘긍휼을 베푸는 자’(, hospitallier)를 포함한다(롬 12:8).


집사 직분은 ‘공적인 교회의 사역’이며, 단지 목사를 돕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사역을 감당하는 독립된 직분이다(4.3.9).


교회 직분론은 내적으로는 예배의 경건(pietas)을 외적으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caritas)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성도의 일상의 삶과 교회의 삶은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교회의 직분은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거행에 제한되지 않고 권징과 구제에까지 미친다. 교회는 어머니요 학교로서 성도의 경건과 함께 도덕적 삶을 가르치고 훈육한다. 그러므로 성속(聖俗)의 극단적 이원론에 서서, 예배가 교회의 관할에만 속하듯이 성도의 일상적 삶은 오직 국가의 세속권세에만 속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와는 반대로 성도의 모든 삶은 오직 교회에만 속하며 국가의 통치에는 무관하다고 보는 성속에 대한 극단적 일원론도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직분에 따라서 진리 가운데 서로 섬기고 순종하는 사랑을 교회 속에서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오직 경건과 사랑 가운데 우리는 다음 말씀을 교회 통치의 제 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교회의 직분을 맡은 일꾼들은 먼저 ‘소명’(vocatio)을 받아야 하며(히 5:4), 그 소명에 확고하게 응하여야 한다(롬 1:1; 고전 1:1). 소명의 증거는 ‘우리 마음의 증언’(cordis nostri testimonium)이다. 직분 주시는 분께서 은사를 먼저 부여하시기 때문에(고전 12:7-11), 소명은 받은 바 은혜로써 확증된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역자는 ‘건전한 교리’(sana doctrina)를 믿고 ‘거룩한 삶’(sancta vita)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딤전 3:2-3, 8-13; 딛 1:7-8). 그러나 이러한 조건도 전적인 은혜로 부여된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그들에게 필요한 성령과 능력을 먼저 부여하셨다(눅 21:15; 24:49; 막 16:15-18; 행 1:8).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교회의 직분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적 은총과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 주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는다(4.3.10-14).




3. 교회의 열쇠(claves ecclesiae)


고대 교회는 성경적 직분론에 충실했다. 처음에는 장로와 집사의 직분만이 있었다. 장로들 가운데서 일부가 가르치는 목사와 치리하는 장로와 가르치는 교사로서 각각 섬겼다. 감독(episcopus)은 가르치는 장로들의 대표를 칭하는 이름이었다. 각 도시에는 목사들과 교사들로 구성된 ‘장로회’(presbyterorum collegium)가 있어서 견책과 치리의 일을 감당했다(딛 1:9). 장로회는 ‘가르치고, 권고하고, 교정하는 직무’(munus docendi, exhortandi, et corrigendi)를 감당했다. 각각의 지역을 주관한 장로회가 교회의 몸의 일부로 여겨졌으며 ‘지방감독’(chorepiscopus)이라고 불리는 대표를 두었다. 그리고 니케아 공회의 이후에는 규율을 유지하기 위하여 지방감독들 중에서 일인을 ‘대감독’(archiepiscopus)으로, 그리고 대감독보다 지위와 위엄이 더 높은 ‘총대감독’(patriarcha)을 두었다. 이러한 구조는 교회정치의 효율성을 추구한 것이지 ‘교권제도’(hierarchia)를 지향하지는 않았다(4.4.1-4).


감독은 집사들에게 재정과 구제에 관한 일을 맡기고 관리하였지만 전횡을 일삼지는 못했다. 교회의 재산은 사분(四分)해서 성직록, 빈민구호, 교회건물 수리, 이웃들을 섬기고 그들의 긴급한 일들에 대처하기 위한 비용으로 각각 사용되었다. 성찬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주의 일을 섬기는 사람이 정해진 공적인 경비 외의(고전 9:14; 갈 6:6) 교회의 비용을 사용(私用)하거나 갈취할 때에는 자신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으로 여겼다(고전 11:29). 아직 교회가 건전했을 때, 직분자들의 삶을 지배한 것은 법이 아니라 ‘양심의 순수성’(conscientiae integritas)과 ‘삶의 순결성’(vitae innocentia)이었다(4.4.5-8). 교회의 감독은 평신도들이 선거로 뽑았으며 나머지 직분자들은 대체로 감독이 임명하였다. 감독을 포함한 장로들과 집사들이 직분에 나아가는 예식은 오직 ‘안수’(manuum impositio) 밖에 없었다(4.4.10-15).


이와 같이 성경적 직분론에 충실했던 초대교회와는 달리 ‘로마 교황청’(romana sedes)의 정치제도는 기본적으로 세속적, 권위적이었으며 교황을 최상위로 한 계급구조를 근간으로 전제적(專制的)이었다. 교회 지체들의 고유한 권한이었던 선거권은 전권이 ‘참사회원들’(canonici)에게 넘어갔다. 직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직분이 무분별하게 주어졌다. 사제는 말씀과 성례의 직임을 감당하였던 장로가 아니라 ‘제사장’(sacerdos)으로 여겨졌다(4.5.1-4). 로마 교황이 ‘수위권’(primatus)을 주장하여 그리스도 대신에 교회의 머리임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목 잘린 지체가 된다고 호도(糊塗)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으로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지금은 하늘 성소에서 중보하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부인하고, 로마 교황은 베드로에게 부여된 열쇠의 권한에 따라서 자신에게 사죄권과 중보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히 7:12), 십자가에서 구약의 제사법이 성취되었지만 교황은 여전히 그 이전에 머물며 은혜의 성도들을 예속시키고 있다(4.6.1-2).


주님께서 베드로를 ‘반석’(Petrus)이라고 부르시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은(마 16:18) 그에게 양을 먹이라는 이후의 명령과 다르지 않다(요 21:15; 벧전 5:2).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고전 3:11).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 분께서 제정하신 ‘질서’(ordo)와 ‘정치 형태’(politiae forma)에 따라서 우리 지체들은 함께 한 몸이 된다(엡 4:4-5, 16; 골 2:19). 주님께서 ‘보배로운 산 돌’로서 ‘모퉁이 돌’이 되시고 우리가 그 위에서 하나로 지어져간다(엡 2:20-21; 벧전 2:5-6). 하나님께서 사도들에게 부여하신 ‘매고 푸는 권세’(potestas ligandi et solvendi)는 그들이 전한 복음의 역사가 어떠함을 제시하는 것이지 그들에게 사죄권을 부여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마 16:19; 18:18; 요 20:23). 이는 사도들이 화목하게 하거나 벌을 주는 직분을 가졌다고 말할 때에 갖는 의미와 같다(고후 5:18; 10:6). 로마 가톨릭은 은밀하게 뽑은 자신들의 대표에게 온갖 영예를 부여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앉히고(살후 2:4)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단 7:25; 계 3:10; 13:5). 이미 불법의 은밀한 활동은 시작되었다(살후 2:7). 결국 교황청의 ‘은밀한 신학’(arcana theologia)은 제1조가 하나님을 부인함이요, 제2조가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말씀과 가르침을 허위라고 조장함이요, 제3조는 미래의 삶과 최후의 부활을 한낱 우화로 여김이다. 교황주의자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특별한 기도로 인하여 이 지상에서 이미 천상에서와 같이 과오를 범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4.6.3-10; 4.7.25-27).


보편적 교회는 있으나 ‘보편적 감독’(episcopus universalis)은 있을 수 없다. 특정한 사람을 교회의 머리라고 부른다면, 그 사람이 넘어지면 전체 교회가 넘어지게 될 것이다(4.7.4, 21-2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공히 주신 것이다(4.6.3). 지상의 성도가 그러하듯이 지상의 교회는 완전하지 않다.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 위에 특별히 높이지 않으셨다. 사도들은 교회가 조직적으로 형성되기 전에 선도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하였으며 교회를 세계적으로 창설하였다. 그들의 직분에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자신에게 교회의 머리가 되는 권능이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지상의 성도가 그러하듯이 지상의 교회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여전히 거룩해져야 한다. 즉,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져 가고 있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교회 권세는 주님 말씀에 종속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을 종들은 가르쳐서는 안돼




'제27강좌' 교회의 권세: 교리권, 입법권, 사법권(권징)(기독교강요 4.8.1-4.13.21)






1. 교리권






교회에 부여된 ‘고유한 권세’(propria potestas)는 ‘영적인’(spiritualis)것으로서 ‘교리에’(in doctrina), ‘사법에’(in iurisdictione), 그리고 ‘입법에’(in legibus ferendis) 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권세를 주신 것은 무너뜨리려 하신 것이 아니라 세우려 하심이었다(고후 10:8; 13:10). 이 권세를 대리하여 행하는 사역자들은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들의 종이라고 여긴다(고전 4:1).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사람들의 유일하신 교사이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 17:5).


교리권은 ‘교리들을 전하는 권한과 그것들에 대한 설명’(autoritas dogmatum tradendorum et eorum explicatio)으로 이루어진다(4.8.1).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 그리고 사도들이나 그 후예들이 권위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그들 자신들로 말미암지 않고 그들의 ‘직분’(ministerum) 곧 그들이 위탁받은 ‘말씀’(verbum)으로 말미암는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받은 것 외에는 말하지 못하도록 하셨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것을 선포하였다(출 3:14). 그러므로 백성들이 그를 여호와의 종으로서 믿었다(출 14:31).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입으로 전해진 진리의 법대로 전하였다. 먼저 그들은 듣는 편에 속하였다(신 17:9-13; 말 2:4-7). 선지자들 역시 여호와의 말을 들은 후 성실하게 전하였다(겔 3:17; 렘 23:28).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알곡’이었으며 그 외에는 모두 ‘겨’와 같았다(렘 23:28).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연약함과 허물을 인정하고(렘 1:6; 사 6:5) 오직 여호와께서 그들의 입에 두신 말씀만 대언하였다(렘 1:9). 사도들은 보내심을 받은 소명이 자신들을 보내신 분의 것을 천하 만민에게 전하는데 있음을 깨달았다(요 7:16; 마 28:19-20). 제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칭해진 것은 세상이 그들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마 5:13-14; 눅 10:16). 그들이 가진 풀고 매는 권세는 그들이 맡은 말씀에 있었다(마 16:19; 18:18; 요 20:23).


“교회의 권세는 무한하지 않으며 주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 안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가지는 교리권에 대한 다음 제 일 원칙은 언제나 불변하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 분 자신으로부터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ne quid doceant servi Dei quod non ab ipso didicerint).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는 그 분의 영원하신 지혜이신 아들께 먼저 배워야 한다. 믿음의 일꾼들은 언제나 ‘주의 영’으로 하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알았다(고후 3:18). 구약 시대 족장들에게 작용한 ‘은밀한 계시’(arcana revelatio)도 아들로 말미암았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마 11:27) 아무도 ‘하나님의 비밀’(mysteria Dei)을 영혼에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4.8.2-5).


구약시대의 참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그들이 받은 율법을 가감 없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지키라는 명령을 수행하였다(신 4:2; 5:32; 13: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에 자신의 말씀을 두심으로써 그들이 율법의 표준을 벗어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선포하게 하셨다(말 2:7; 4:4). 드디어 하나님의 지혜가 육신으로 나타나심으로써 의의 태양이 정오의 밝은 빛과 같이 빛나서 완전한 진리가 우리의 심령 가운데 조명되었다(히 1:1-2). 주님의 오심을 말세 혹은 마지막 때라고 부른 것은(행 2:17; 딤후 3:1; 벧전 1:20; 벧후 3:3; 요일 2:18) ‘그리스도의 교리의 완전성’(doctrinae Christi perfectio)을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 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골 2:3). 그 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요 4:25). 그러므로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다.


오직 유일하신 선생은 그리스도시니(마 23:8, 10),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선행(先行)하셔서’(praeeunte Christi spiritu) 명령하신 것만 전하였다(마 28:19-20). 사도들은 ‘확실하고 진정한 성령의 필사자들’(certi et authentici spiritus sancti amanuenses)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은 대로(롬 10:17) 기록하였을 뿐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참되시다(롬 3:4). 그러므로 기록하는 자와 전하는 자가 여일(如一)하니,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해야 한다(벧전 4:11). 오직 성도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고후 10:4-5)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에 서야 한다(4.8.6-9).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은 함께 역사한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교회는 말씀에 부속되어 있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치시는 곳을 그 한계로 여기고 머물러야 한다. 성령께서 교회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에 교회가 제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음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궤변은 진리로부터 전혀 동떨어져 있다. 주님께서는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신다(요 16:7, 13, 26). 성령께서 내주하심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완성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의로 말씀하시지 아니하셨고 아버지께서 그 분 안에 계셔서 주시는 것을 말씀하셨다(요 12:49-50; 14:10). 그러므로 성령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은(신 4:2; 계 22:18-19) 금하여야 한다(4.8.13).


교회는 무오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겸손을 버리고 교만해질 만큼 베푸시지는 않는다. 교회가 정결하고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으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불림은(엡 5:26-27; 딤전 3:15),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을 그치시고 교회에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성결하게 하셨으나, ‘성화의 시초’(initium sanctificationis)가 보일 뿐 그 ‘끝’(finis)은 그 분께서 오셔서 교회를 지성소적인 임재로 충만하게 하실 때 이루어진다(히 9-10). 교회는 ‘거룩하고 정결하다’(sancta et immaculata). 그러나 지상의 성도와 같이 교회도 아직 완전하지 아니하다. 교회가 이러할진대, 교회의 ‘공회의’(universale concilium)가 ‘오류를 범할 수 없다’(errare non posse)고 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새로운 교리를 창출해 낼 수 없다. 교리로 완전하게 할 만큼 말씀은 불완전하지 아니하며, 교리로 채워야 할 만큼 말씀은 부족하지 않다. 교리는 말씀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고백하게 하는 가르침일 뿐이다.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요 16:12) ‘관습들로써’(moribus) 교회에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것은 오직 보혜사 성령의 역사로만 말미암는다(요 16:13).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 외의 어떤 것을 매개로도 계시되지 않는다(4.8.10-12, 14-16).


성경은 교회의 인정에 따라서 비로소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성경은 교회의 해석에 따라서 비로소 계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승인하는 권세’(potestas approbandae scripturae)나 ‘성경을 해석하는 권세’(potestas interpretandi scripturam)가 교회나 공회의에 있지 아니하다. 성경의 진리가 사람의 모임이나 의사결정에 따라서 결정되거나 해석되지 아니한다. 오히려 모든 ‘판단’(iudicium)이 성경으로부터 나온다(4.9.1-2, 8, 13-14).




2. 입법권


하나님께서 교회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을 만드신 ‘유일한 입법자’(unicus legislator)이시다. 교회는 법을 만들어서 성도들의 양심을 억압할 권한이 없다. 우리가 가진 영적 자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이 자유를 ‘인간의 전통’(traditio humana)으로 맬 수 없다. 참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그 분의 말씀을 듣는데 있지, 교회가 제정한 법을 지키는데 있지 아니하다. 양심은 ‘유일한 자유의 법’(una libertatis lex)인 복음의 말씀에 다스림을 받아야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사람이 만든 법이 사람을 구원하는데 유익할 수 없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많은 법으로 남을 억압하듯이, 전통은 말씀의 은혜를 단지 해칠 뿐이다(4.10.1).


로마 가톨릭은 교회법을 ‘자유의 법, 달콤한 멍에, 가벼운 짐’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으로써 오히려 성도의 양심을 구속(拘束)하고 있다. 오직 그리스도의 멍에만이 쉽고 그 짐만이 가볍다(마 11:30). 양심은 ‘일천 명의 증인들’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그 속에 ‘양심의 법정’(conscientiae forum)이 있기 때문에 올바른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율법을 마음에 새긴다(롬 2:15-16). 진정한 분별력과 사랑은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전 10:28-29; 딤전 1:5; 행 24:16).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추구하는데 있다. 양심은 사람들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만 상관되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다. 그러므로 양심에 사람의 짐을 지우는 것은 옳지 않다(4.10.2-5).


교회의 법을 제정하시는 고유한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 교회의 주교들은 영적 입법자가 아니며 교회 통치의 전권을 위임받은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재판장이시자 입법자시니, 능히 살릴 자를 구하시고 멸할 자를 벌하신다(약 4:11-12; 사 33:22). 그러므로 주의 사역자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양들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벧전 5:2-3). ‘모든 의와 거룩함의 완전한 규범’(perfecta omnis iustitiae et sanctitatis regula)이 하나님의 ‘뜻’(voluntas)에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예배는 그 분의 뜻을 순종하고 섬기는데 있다. 따라서 그 분의 뜻을 거스른 경건과 예배의 규범은 모두 거짓되다.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완전하게 세우려 하심에 있다(골 1:28).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심에 있다(골 2:3, 8).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는 자마다 여전히 ‘그림자’에 속하고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매여 있으니(골 2:8, 17, 19), 말씀을 떠난 교회의 법은 죽을 것으로만 역사한다(4.10.6-8).


로마 가톨릭의 ‘교회법’(constitutio ecclesiastica)은 의식과 예배에 관한 규정과 권징에 관한 규정을 포함는데, 이는 유대 형식주의와 외식주의를 계승한 ‘유전’(遺傳, traditio)과 다를 바 없다(마 15:3).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보다는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고(갈 4:9) 그리스도의 교훈을 무시하고 세속적 금욕주의를 주창할 뿐이다(골 2:23).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실체며 완성이시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숨기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분을 드러내어야 한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골 2:20).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의를 다 이루셨으므로 성도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3). 구원의 전체 과정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다. 로마 가톨릭은 미사라는 의식을 교회법으로 조작하여 주님께서 단번에 영원히 드리신 십자가의 제사를 무시하고 여전히 짐승을 잡아 드리듯 하고 있다. 그들의 법은 미사를 성도의 공로라고 규정한다. 성도의 행위는 그 자체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평가하시기 때문에 공로가 있는 것이다. 입법자이신 하나님께서 받을 만한 것으로 여기시는 자비가 공로의 기원이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에 의해서 의롭게 여겨질 뿐, 그 자체를 본다면 불완전하고 미약하다. 의식이나 도덕적 행위가 의롭다고 여겨짐은 단지 형식이나 외식이 아니라 언약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는다. 법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법을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신 12:32; 렘 7:22-23). 인위적 의식이 아니라 심중에 드리는 순종의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으신다(삼상 15:22-23; 렘 11:7). 법을 만들어서 새로운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평화의 법을 순종하며 서로 사랑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신다(행 15:19-29).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로 사신 자유를 자의로 사용함으로써 연약한 자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전 7:23; 8:1-13). 사제 독신제와 수도원 맹세의 예들에서 보듯이(4.12.23-28; 4.13.8-21), 교회법이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섞인 누룩과 같이 사람의 교훈을 강요할 때(마 16:12), 그것은 적그리스도의 도구가 될 뿐이다(4.10.9-26).


교회법의 목적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고전 14:40) 영원하신 말씀에 따라서 교회가 사랑과 진리의 연합체를 이루는데 있다. 교회법이 없다면 교회는 마치 ‘근육’(nervus)이 없는 몸과 같이 될 것이다. 교회의 모든 규율은 의식에 관한 것이든, 도덕적 행위에 관한 것이든 자유로운 양심을 억압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덕을 세우는데 있다. 즉 ‘교회의 건덕’(ecclesiae aedificatio)이 교회법의 제일 가치이다. 교회법은 지체들을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자라게 할 때에만 올바르다(4.10.27-32).




3. 사법권(권징)


교회의 재판권은 세속적 사법이 아니라 ‘영적인 제도’(spiritualis politia)로서 ‘도덕적 권징’(morum disciplina)을 그 요체로 한다. 교회의 권징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열쇠의 권한’(potestas clavium)에 부합한다. 복음의 교리는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제자들이 부여 받은 권한은 ‘교리의 저자’(doctrinae autor)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구원을 선포하는데 있다(마 16:19; 요 20:23). 이러한 열쇠의 권한은 선포된 말씀을 어기는 자들에 대한 권징을 포함한다(마 18:15-18). 로마 교황청은 이러한 열쇠를 스스로 제조(製造)한다(4.11.1-2).


교회의 사법권은 세상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검을 사용하여(고후 10:4-6) 성도를 돌이키는데 있다. 그것은 합당한 절차에 따르되 그리스도의 제정에 따라서 성령의 능력으로 시행되어야 한다(고전 5:4-5). 초대 교회에서는 성경 말씀에 충실하여 ‘장로들의 회’(senatus presbyterorum)가 이 일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은 사제들이 교회의 재판권을 독점하고 ‘칼의 권세’(ius gladii)를 휘둘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방인의 습속으로 성도들을 판단하는 것을 금하셨다(마 20:25-26; 막 10:42-44; 눅 22:25-26). 우리의 싸움의 병기는 육체에 있지 아니하다(고후 10:4). 교회가 가할 수 있는 마지막 벌은 ‘출교’(excommunicatio) 밖에 없다(4.11.3-10).


교회의 권징(disciplina ecclesiae)은 ‘견책’(censura)과 ‘출교’(excommunicatio)로 주로 시행된다. 권징은 교회가 가진 영적인 재판권으로서 열쇠의 권한에 의존하여 논의된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교회의 생명이라면 권징은 교회를 지탱하고 움직이는 ‘힘줄’(nervus)이라고 할 것이다.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반대하며 날뛰는 사람들을 억제하는 ‘굴레’(fraenum), 게으른 사람에게 약동시키는 ‘박차’(stimulus), 타락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의 온유함으로 징계하는 ‘아버지의 매’(paterna ferula)와 같다(4.12.1).


권징은 ‘사적인 충고’(privata monitio)로부터 시작된다. 성도들은 한 몸의 지체들로서 가족과 같이 서로 충고할 수 있다. 특히 말씀을 선포하고 성도들의 신앙과 경건을 보살펴야 할 직분을 맡은 목사와 장로들이 이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처음 단계의 경계(警戒)를 받고도 계속 죄와 악행을 범하는 사람에게는 재차 충고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면 장로회에서 공적 권위로 치리하여야 한다(마 18:15-17). 은밀한 사적인 죄는 이와 같은 절차를 지킬 것이나, 공공연히 드러난 공적인 죄는 즉시 그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엄숙히 꾸짖어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게 해야 한다(딤전 5:20). 그리하여서 적은 누룩이 온 회중에 퍼지지 않게 해야 한다(고전 5:1-7). 교회의 권징은 개인 구원과 더불어서 교회의 연합을 고려하여 시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4.12.2-4, 6).


권징을 시행하는 목적은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로, 더럽고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금함으로써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치욕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건강을 위하여 종기가 제거되어야 하듯이, 거룩함을 위하여 부패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골 1:24; 엡 5:25-26). 둘째로, 선한 사람들이 악한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함으로써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게 되므로, 성경은 행악하는 자들과 사귀는 것과 함께 먹는 것을 금하였다(고전 5:6, 9). 셋째로, 행악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갖도록 징계를 가함으로써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이다(살후 3:14).


권징의 방식으로 시행되는 ‘교정’(correctio)과 ‘출교’(excommunicatio)는 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우고자 함이다. 그러므로 엄격히 판단하되, 온유한 심령으로 행함으로써 권징을 받는 사람이 형제적 사랑을 느끼며 너무 많은 근심에 빠져 절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갈 6:1; 고후 2:7-8; 살후 3:15). 교정은 고치어 제자리에 세우는 것이며, 출교는 연합체로부터 떠나게 하되 다시 돌아올 길을 여는 것이다. 이렇듯 권징이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적극적인 의의가 있지만 그것은 항상 교회의 전체 지체들의 유익을 고려하여 시행되어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가라지를 뽑으려다 곡식을 다치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마 13:29). 키프리아누스의 다음 말은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깊이 새길 귀한 교훈이 된다.


“가능하거든, 긍휼히 여기며 한 사람을 교정하라. 그러나 불가능하거든, 끝까지 참고 사랑으로 슬퍼하며 신음하라”(4.12.5, 8-13).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볼 수 있게 하는 징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 강화시키고자 성례 제정하셔




'제28강좌' 성례: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표, 세례: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기독교강요 4.14.1-26; 4.15.1-4.16.32)






1. 성례의 비밀








성례는 복음 선포와 함께 우리의 믿음을 돕는 은혜의 방편이 된다. 어거스틴이 정의한 바와 같이 성례는 ‘거룩한 것에 대한 보이는 표’(rei sacrae visibile signum) 혹은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형상’(invisibilis gratiae visibilis forma)으로서 다음과 같은 이중적 의의가 있다. 첫째로, 성례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신 자신의 인자하심에 대한 약속을 가시적으로 인치신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을 지켜주신다. 둘째로, 성례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 자신의 경건을 확증한다. 곧 성례는 ‘외형적인 표상으로써’(externo symbolo)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뜻과 그것을 의지하는 우리의 믿음을 제시하는 ‘증언’(testimonium)과 ‘증거’(testificatio)가 된다(4.14.1).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키고자 성례를 제정하셨다. 성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사실 자체를 드러내기보다 성도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온전히 수납하도록 돕는데 있다. 성도는 비록 거듭났지만 ‘무지’, ‘어리석음’,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adiumentum)이 여전히 필요하다. 성례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낮추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맞추어주신다. 그리하여서 우리의 믿음이 ‘괴어지고 받쳐지게’(fulciatur ac sustentetur) 하신다. 성례의 ‘표징’(signum)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선물의 ‘의미’(significatio)를 우리의 심령에 ‘확증하고 인치고자’(confirm‎!et ac obsignet) 하신다. 그러므로 성례는 ‘선행하는 약속’(praeeuns promissio)에 따르는 ‘부록’(appendix)과 같다. 신학자들은 ‘비밀’(musthrion)이라는 성경 말씀을(엡 1:9; 3:2-3; 골 1:26-27; 딤전 3:16) 번역함에 있어서 그 신비를 표현하기 위하여 ‘sacramentum’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성례를 이 단어로 표현함은 그 비밀이 그리스도의 제정으로 말미암아 표징과 함께 주어진 약속의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4.14.1-3).


성례는 ‘외형적인 표징’(externum signum)과 ‘말씀’(verbum)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말씀은 주문과는 달리 단지 소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은 사제가 ‘축성경’(祝聖經, consecrationis formula)을 읽기만 하면 그것이 회중에 이해되지 않더라도 유효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한 바, 성례에 있어서 ‘말씀의 능력’(virtus verbi)이 작용하는 것은, ‘그것이 말씀되기 때문이 아니라 믿어지기 때문이다’(non quia dicitur, sed quia creditur). 표징에 대한 성례 제정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만이 그것이 의미하는 바대로의 은혜를 받는다. ‘말씀의 가르침’(doctrina)이 없는 표징은 단지 공허할 뿐이다. 양자는 끊을 수 없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성례가 ‘보이는 말씀’(visibile verbum)이라고 불리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성례는 ‘믿음의 말씀’으로(롬 10:8) 거듭난 성도가 그 가운데 약속된 언약의 복을 누리는 한 방편이다. 성례로 말미암아 믿음이 처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성례가 ‘믿음의 기둥’(fidei columna)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것이 이미 역사하는 믿음을 아래로부터 괴서 받치기 때문이다. 성례는 이미 받은 ‘영적인 선물들을 비추는 거울’(speculum)과 같은 것이지, 그것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언약의 백성의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할례를 ‘인’(印, sfragida, sigilla)이라고 불렀듯이(롬 4:11), 세례와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 분께서 삶과 죽음을 통하여서 다 이루신 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는 성도의 은혜를, 그 ‘고상한 신비’(sublima mysteria)를 가시적 표상으로 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의 표징은 단지 외계적인 상징물에 불과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신비로운 물체도 아니다. 오직 말씀을 믿는 믿음에 따른 ‘경건한 마음 씀으로’(pia consideratione) 성례의 신비를 경험할 일이다(4.14.3-6).


성례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보증’(pignus)으로서, 성도의 믿음을 ‘지탱시키고, 양육시키고, 확증시키고, 증진시킨다’(sustinent, alunt, confirm‎!ant, adaugent). 성례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적시한다.


첫째,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교훈하신다. 둘째, 성례로써 그 말씀을 확정하신다. 셋째, 자신의 영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추시고 우리 가슴의 문을 말씀과 성례에 열도록 하신다(4.14.7-8).
성례가 그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내적 교사’(interior magister)인 성령의 은밀한 역사가 있어야 한다. 성례로써 믿음이 더해지고 강화되는 것은 그 자체에 ‘은밀한 힘’(arcana vis)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성령의 능력’(virtus)이 없다면 가시적 표징은 그저 한 물체에 불과할 뿐 아무 성례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믿음을 낳고, 지탱시키고, 자라게 하고, 견고하게 하는’(ad fidem et concipiendam, et sustinendam, et fovendam, et stabiliendam) 작용을 하게 되면 성례는 제정된 바대로 고유한 기능을 다하게 될 것이다. ‘성령의 작용’(spiritus actio)이 없다면 성례은 ‘힘’(vis)도, ‘효력’(energia)도 없게 될 것이다.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외적인 말씀과 성례가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으로 옮겨진다. 성령은 ‘마치 매개하는 빛과 같이’(quasi intermedio fulgore) 역사한다. 이 빛으로써 심겨진 말씀의 씨가 자라게 된다(마 13:3-23; 눅 8:5-15; 고전 3:7). 오직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례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성례에 옮겨서는 안 된다. 성례는 성령의 감화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받지 아니하면 아무 유익이 없다. 성례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와 그 분의 대리적 공로를 믿는 사람에게만 하늘 보화가 부어진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주시는 ‘내적인 은혜’(interior gratia)와 성례의 ‘외적인 거행’(externum ministerium)은 구별되어야 한다(4.14.9-12, 17).


성례를 표현하는 ‘sacramentum’은 어원상 군인의 충성 맹세를 뜻한다.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의 ‘신비’(mysterium)를(고후 6:16; 겔 37:27) 함의하면서 두 가지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첫째, 성례는 언약 백성의 믿음을 돕는다. 그것은 성도가 은혜의 비밀을 고백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나타낼 뿐 아니라 또한 그로 말미암은 영광을 하나님께 올리는 예식이어야 한다. 성례 가운데 성도는 감사와 찬미로써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다. 둘째, 성례로써 성도는 다른 지체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한다. 교리의 순수성과 성도간의 사랑이라는 교회의 두 요소가 성례 가운데 확증된다. 성례는 ‘의의 원인’(causa iustitiae)이 될 수 없다. 성례로써 구원의 믿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성례로부터 ‘구원의 확신’(salutis fiducia)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보이는 표징이 없이 보이지 않는 성화가 있을 수 있다. 역으로, 참 성화가 없는 보이는 표징이 있을 수 있다”(4.14.13-14).


성례의 ‘표징’(signum)은 ‘형상’(figura)과 ‘진리’(veritas)를 포함하고 있다. ‘형상’은 표징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물질적 속성이며 ‘진리’는 그 형상이 뜻하는 의미이다. ‘형상’이 아니라 ‘진리’가 성례의 ‘본체’(res)이다. 무엇이 표징이 제시하는 성례의 진리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살아나는 것과 그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진리의 표가 성례일진대, 세례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시작의 표라면 성찬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계속의 표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질료’(materia)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성례의 ‘실체’(substantia)가 되신다. 표징 자체가 아니라, 표징을 통하여서 그리스도와 그 분의 대리적 속죄 사역을 믿는 믿음을 확증시키고, 강화시키는 성령의 감화가 곧 성례의 유익함이다. 이렇듯 성례의 의의는 표징 자체의 ‘은밀한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표징을 통한 믿음의 역사에 있다. 따라서 받는 사람의 믿음이 중요하다(4.14.15-16). 구약 시대에 계시된 많은 은혜의 표들도 그 실체에 있어서는 신약의 성례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의 믿음을 강화하시기 위해서 말씀과 함께 보이는 보증을 더하셨다(창 2:9; 3:22; 9:13-16; 15:17; 삿 6:37-40; 왕하 20:9-11; 사 38:8). 이러한 구약의 표징들도 언약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기초하여 제정되었다. 다만 그들은 그 분께서 그들 가운데 지금 계시지만 앞으로 오셔서 구원을 다 이루실 것을 바라며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점에서 그 분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주셔서 자신의 다 이루신 의를 전가해 주신 신약 성도들과는 구별되었다(4.14.18-20).




2. 세례: 옛사람의 죽음과 새사람의 삶의 표


‘세례’(baptismus)는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몸 된 교회의 ‘연합체’(societas)에 ‘입교하는 표징’(signum initiationis)이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고, 사람들 가운데서 그것을 고백하는데 도움이 된다. 세례를 통하여서 성도는 다른 지체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그들과 한 종교를 믿는 가운데 한 예배를 드림을 입증하고, 자신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확증한다(4.15.1, 13).


세례의 유익은 다음 세 가지로 제시된다. 첫째로, 세례는 우리가 정결함을 받았다는 ‘표상’(symbolum)과 ‘증거’(documentum)가 된다. 세례는 사람들 가운데서 성도임을 드러내는 ‘표’(tessera)나 ‘표지’(nota)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약속과 함께 자신의 뜻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명령이다(마 28:19; 행 2:38; 막 16:16).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깨끗하게 씻음을 받은(엡 5:26; 딛 3:5) 성도를 ‘구원하는 표’가 세례이다(벧전 3:21). 우리의 죄를 씻는 물두멍이 그리스도의 피이므로, 세례는 그 실체로서 그리스도를 인친다. 칭의의 법정적 선포가 항상 유효하듯이 세례의 효력은 이후의 죄로 말미암아 무효가 되지 않는다. 전체 구원의 은혜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로 말미암듯이,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오직 그 분 안에서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열쇠의 권한을 왜곡하여 세례 이후의 사죄권은 사제에게 있다고 가르치는 로마 가톨릭의 교리는 허망될 뿐이다(4.15.1-4).


둘째로,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죽음’(mortificatio)과 ‘삶’(vivificatio)을 제시한다. 세례로써 성도는 단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교훈을 얻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죽음에 연합하며(롬 6:5) 살리는 영이신 그 분의 부활에 동참하는(롬 6:8) 은혜를 확증한다. 세례의 표는 단지 다시 살아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포함한다. 즉 죄를 버리고 의로써 거듭난 중생의 삶을 사는 표가 세례이다(롬 6:11; 골 2:11-12; 딛 3:5).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이 새 삶 가운데 작용함을 인치는 거룩한 예식이다(4.15.5).


셋째로,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과 ‘하나가 되어서’(unitos) 그 분께서 선물로 주신 ‘모든 선한 것들에 동참하는 자들’(omnium bonorum participes)이 되는 은혜를 인친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언약적 전가를 받으심과 함께 우리를 자신의 자리에 함께 세우기 위함이셨다(마 3:13). 우리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은 그 분을 옷 입음이며 그 분 안에서 그 분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됨을 보증하는 것이다(갈 3:26-27). 구원받은 성도로서 이제는 육체가 아니라 ‘새로운 영적 본성으로’(nova spirituali natura) 사는 자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좇는 삶을 살게 된다. 회개의 세례는(마 3:6, 11; 막 1:4; 눅 3:16; 요 3:23; 4:1; 행 2:38, 41) 거듭난 중생의 삶 전체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한 번 받은 세례는 이후의 죄로 인하여 변개되지 아니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세례 가운데 함께 역사하신다. 세례의 ‘원인’(cuasa)은 성부께 있다. 세례의 ‘질료’(materia)는 성자시다. 세례의 ‘효력’(effectus)은 성령의 역사이다(4.15.6).


세례의 이러한 유익은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공로를 전가해 주시는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는다. 세례 요한이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는 반면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신다고 한 것은(마 3:11; 눅 3:16) 성령을 주시는 분 곧 ‘내면적인 은혜를 조성하시는 분’(interioris gratiae autor)이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하기 위함이었다. 세례가 확증하는 의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는다. 거듭난 성도는 ‘죄책과 저주로부터는’(reatu et damnatione) 해방되었으나(롬 8:1) 여전한 곤고함이 남아 있다(롬 7:18-24). 세례의 표징은 새 사람으로서 다시 산 사람이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은혜의 삶을 사는데 까지 미친다(4.15.7-12). 세례의 효력은 물이라는 표징 자체로부터 말미암지 않는다. 세례의 ‘본체’(res)와 ‘진리’(veritas)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있다.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로 우리가 한 몸이 되었듯이, 세례로 우리는 그 분과의 연합의 시작을 제시한다. 세례의 효력이 표징 자체에 있지 않듯이, 그것을 거행하는 목사의 능력과 가치에 따라서 좌우되는 것도 아니다(4.15.14-16; 4.16.25).




3. 유아세례: 하나님의 언약의 시간표


구약 시대 할례는 인류의 부패한 본성을 잘라 버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표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가 됨을 인치는 예식이었다. 할례의 ‘인’(sigillum)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피를 그 ‘실체’(substantia)로서 믿는 자신들의 믿음을 확증하였다(갈 3:16; 롬 4:11; 요일 1:7; 계 1:5). 구약 시대 백성들은 할례를 통하여서 세례의 영적 약속을 미리 누렸다. 세례가 그러하듯이, 할례도 그리스도를 중보자로서 믿는 언약 백성들이 누리는 보이지 않는 은혜에 대한 보이는 표였다. 할례와 세례는 무조건적 은혜와 영생의 ‘약속’(promissio)을 공유한다. 성례가 작용하는 ‘내적 신비’(interior mysterium), 즉 대제사장으로서 제물이 되셔서 단번에, 영원히 자신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히 4:14; 5:5; 9:11) 표피를 베고 물로 씻는 표상에 의해서 ‘의미되는 본체’(res signata)가 된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비록 표징의 양식과 구속사적 경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으나, 할례와 세례는 그 ‘실체’(substantia)나, ‘진리’(veritas)에 있어서 동일하다. 할례의 예표가 세례로 성취되었다. 할례는 이후 오셔서 다 이루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세례는 이미 오셔서 다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 거행되었다(4.14.22, 23-24; 4.16.1-4).


할례와 세례가 동일한 언약의 약속을 확증하기 때문에, 유아들에게 ‘언약의 약속을 인치기 위해서’(ad obsignandam foederis promissionem) 할례를 행했듯이(창 17:9-14), 이제는 믿음의 자녀가 세례를 받음이 합당하다. 유대인의 자손이 그러하였듯이(스 9:2; 사 6:13), 성도의 자녀들은 ‘언약의 상속자들’(foederis haeredes)로서 거룩하게 구별된다(고전 7:14). 할례와 세례 모두 언약의 자녀가 ‘하나님의 가족’(familia Dei)이 되는 표이지만, 그 경륜에 있어서 세례가 더욱 귀하다. 그림자가 몸으로서 성취되었으므로, 세례가 할례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더욱 분명하게 확증하기 때문이다. 유아 세례를 통해서 세대를 이어서 복을 주시겠다는 은혜의 언약을(출 20:6)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셔서 그 의를 전가해 주신다는 ‘놀라운 위로’(eximia consolatio)가 넘친다. 유아세례는 사도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세례를 제정하신 목적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백성이 또한 그 분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인치는데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유아세례를 거행하여 교회는 연합체로서 사랑을 더하고, 부모는 자녀를 언약의 백성으로 양육하며, 유아 본인은 더욱 믿음의 확신 가운데 자라게 되는 유익을 얻음이 마땅하다. 주님께서는 천국이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시며 어린 아이들을 맞으시고 안수해 주셨다(마 19:13-15). 이로써 어린 영아와 유아를 천국의 백성으로서 인침이 합당함을 계시하셨다(4.16.5-9).


할례가 인친 구약 언약의 약속도 영적이었으며 영생에 관한 것이었다. 표상은 육체를 베는 것이었지만 그 의미는 언약의 백성으로 거듭남이었다. 이렇듯 할례의 실체가 세례와 다르지 않으므로, 사도 바울은 세례를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불렀다(골 2:11). 그리고 그 의미로서 그 분의 죽음과 부활에의 연합을 제시했다(골 2:12).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녀가 ‘언약의 자손’으로서(행 3:25)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의 복을 누리게 된다(창 12:2; 17:7; 갈 4:28; 롬 4:12). 그리스도께서 할례의 수종자가 되신 것은 옛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들을 견고하게 하려 하심이었다(롬 15:8). 구약시대 유아들에게 거행된 할례는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과는 구별된다는 표였다. 당시 그 분께서는 아직 ‘그림자’로 현존하셨다. 이제 세례는 ‘몸’으로 오신 그 분 ‘안에’ 있는 언약의 백성을 인치는 표가 되었다(엡 2:11-13; 골 2:17). 이렇듯 세례가 할례의 완성이니, 어찌 유아세례를 금하여 언약의 복을 감할 수 있겠는가(4.16.10-16)?


인류는 모태에서부터 죄 중에 잉태되어(시 51:5)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사망에 속하여 태어난다(엡 2:3; 고전 15:22). 하나님께서는 선악의 분별력이 없는 유아라도 자신의 뜻에 따라서 거룩하게 하실 수 있다. 할례가 그렇듯이(렘 4:4; 9:25; 신 10:16; 30:6) 세례는 회개의 표이다. 회개의 마음은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써 생긴다. 유아들에게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장래의 회개와 믿음을 위한 ‘씨’(semen)가 그들 안에 숨어 있다. 유아세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을 확증하는 현재적 효과가 있다. 그 나머지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중생 시간표’(suos regenerandi gradus)에 따라서 자라감에 따라서 때에 맞추어 부여하신다. 세례의 능력이 수세자의 공로로 말미암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게 될 것이다. 세례는 공로에 대한 대가가 아니며, 그 자체로 구원에 이르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례는 하나님의 무조건적 선택의 은혜를 그 분 자신의 섭리에 따라서 인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의 은총을 베푸셔서 유아들을 ‘가족’(familiares)과 ‘권속’(domesticos)으로서 자신의 집에 들이신다. 곧 자신의 집인 교회의 ‘지체’(membra)로서 가입시키신다. 이를 인침이 세례니, 유아의 세례가 복되지 아니한가(4.16.17-21, 26, 31-32)!










생명의 양식 나누는 ‘영적 잔치’
그리스도의 몸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 얻는 약속을 확증하다




'제29강좌' 성찬: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로서 살아감의 표, 미사와 가톨릭 거짓 성례들:새로운 유대주의(기독교강요 4.17.1-50; 4.18.1-4.19.37)






1.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의 영적 잔치






세례의 표징인 물에는 ‘씻음’(ablutio)이, 성찬의 표징인 떡과 잔에는 그리스도의 ‘무름’(satisfactio)이 표상된다. 이러한 표상의 실체가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물과 피였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오셨다고 한 말씀에는(요일 5:6) 성례의 ‘숭고한 신비’(sublime mysterium)가 이미 제시되어 있다(4.14.22).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단지 외면적, 형상적이지 않으며 내면적, 영적이다. 그것은 성례적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바깥에 계시지 않고 우리 안에 사신다. 그 분께서는 각인에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인격적인 교제를 하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놀라운 교통을 하신다. 그리하여서 그 분께서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시기 까지 우리 속으로 들어오셔서 한 몸이 되사 날마다 자라 가신다(3.2.24).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의 은혜로써 성도 안에 사시고, 성도가 그 분 안에 산다.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을 통한 성도의 ‘교제’(communio)와 ‘교통’(communicatio), 성찬은 이 ‘신비한 복’(mystica benedictio)을 마치 인(印)과 같이 확증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부어주신 영으로써(행 2:33; 롬 8:9), 우리 안에 사신다(갈 2:20). 그 분께서 ‘우리 밖에’(extra nos) 계시나, ‘우리 안에’(intra nobis) 사신다. 그리스도의 영이 ‘고리’(vinculum)가 되어서 우리를 그 분과 연합시키고, ‘수로’(canalis)가 되어서 ‘그 분 자신과 그 분께 속한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기 때문이다. 성찬의 ‘물질적인 표징들로써’(corporeis signis) 제시되는 ‘영적인 진리’(spiritualis veritas)는 중보자 그리스도의 초월하시면서 내재하시는 임재의 비밀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세 가지 익숙한 말로 설명하기를 원한다:의미(significatio), 그 의미를 낳는 질료(materia), 이 두 가지로 말미암는 능력(virtus) 또는 효과(effectus). 의미는 표징이 지시하는 약속들에 담겨있다. 나는 그리스도를, 그 분의 죽음과 부활과 함께, 질료 혹은 실체(substantia)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속, 의, 거룩함, 영생, 그리고 다른 모든 은총들을 효과라고 이해한다(4.17.11-12).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아버지’(optimus pater)로서 자신의 자녀들을 일생 동안 쉼 없이 ‘기르신다’(alere).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한 능력에 맞추어서’(ad modulum) 성찬을 제정하셨다. 그리하여서 자신의 호의에 대한 ‘보증’(pignus)을 삼으셨다. 성찬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과 음료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분께서 영생을 주시는 분이심을 확증하는 ‘영적 잔치’(spirituale opulum)이다. 성찬의 ‘떡’(panis)과 ‘포도즙’(vinum)은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얻게 되는 ‘보이지 않는 자양분’(invisibile alimentum)을 표상한다. 우리를 위하여 살을 찢기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께서 ‘우리 영혼의 유일한 양식’(unicus animae nostrae cibus)이 되신다. 그 양식을 먹는 자마다 ‘생명을 살리는 죽음의 능력’(vivificae mortis virtus)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게 된다. 이러한 ‘은밀한 연합’(arcana unio)이 떡과 잔의 표상으로써 기념되었다(4.17.1).


성찬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때까지 자라가며 그 분께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의 것으로 삼게 되는 은혜에 대한 증거를 얻게 된다. 떡과 잔이라는 성찬의 표징들을 통해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로써,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제시되신다’(exhiberi).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대한 ‘큰 확신과 달콤함’(magnum fiduciae et suavitatis)을 얻게 된다. 주님께서 인자가 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내려오심으로 우리가 하늘에 오를 길을 여셨다. 친히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 무력해지심으로 우리가 강해지고, 빈곤에 처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 죄의 짐을 지심으로 우리가 의를 덧입게 하셨다. 살과 피를 취하시고 내어주심으로써 우리가 부활의 육체 가운데 영생을 누리게 하셨다(4.17.2, 11).


성찬의 주된 기능은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양식’, ‘참된 음료’로서 그 분의 몸을(요 6:55)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는(요 6:54) ‘약속을 인치고 확증하는데’(promissionem obsignare et confirm‎!are) 있다. 십자가에서 이 약속이 수행되었으며 다 이루어졌다. 주님께서 죽음을 삼키는 죽음을 당하셨다(벧전 3:22; 고전 15:54). 그리하여 그 분의 살과 피를 영생의 양식으로 제공하셨다(요 6:48, 50). 그 양식으로써 마지막 부활의 때에 우리의 육체는 ‘썩지 아니함’과 ‘죽지 아니함’을 입게 된다(고전 15:53-54).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양식이다. 그러므로 성찬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낸다.’ 그리하여서 ‘그 분의 실체에 참여하는 자들’(participes substantiae eius)이 되게 한다.


“받으라, 먹으라,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나의 몸이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나의 피니라”(accipite, edite, bibite; hoc est corpus meum, quod pro vobis traditur; hic est sanguis, qui in remissionem peccatorum effunditur)”(마 26:26-28; 고전 11:24; 막 14:22-24; 눅 22:19-20).


이러한 제정의 말씀을 통하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이 ‘우리의 것’(nostrum)이며 ‘우리를 위한’(pro nobis) 것임을 선포하셨다(14.17.3-4, 11).




2. 영적 그러나 실재적인 현존(praesentia spiritualis sed realis)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주셨다는 믿음이 없이는 성찬의 복을 누릴 수 없다. 성찬은 대리적 속죄의 의가 성도의 구원에 역사함을 확증하되, 오직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그러하다. 믿음 가운데 성찬에 참여함에 있어서, 표징 자체를 업신여겨서도 과도하게 찬양해서도 안 된다. 주님께서는 표징의 의미를 단지 관념상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참여하라고 하셨다. 성찬에 있어서, ‘먹음’(manducatio)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 분을 마음에 모신 성도가(엡 3:17) 그 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 ‘양분’(alimentum)으로 ‘능력’(virtus)과 ‘생기’(vigor)를 얻는다. 그러므로 성찬의 신비를 단지 성령의 내적 감화를 받는 정도로 여겨서도 안 된다(4.17.5, 7).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말씀’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셨다(요 1:1, 4; 요일 1:1-2).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원천이며 기원’(vitae fons et origo)이셨다. 그 분의 살은 생명의 떡이요 그 분의 피는 생명의 음료였다(요 6:48, 51, 56).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육체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부활의 삶을 소망하는 성도에게 ‘놀라운 위로’(eximia consolatio)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생명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 그 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다. 우리는 그 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들이다(엡 1:23; 고전 6:15). 우리는 그 몸의 뼈와 살을 이룬다(엡 5:30; 창 2:23). 이러한 한 몸 됨의 비밀이 크다(엡 5:32). ‘이 비밀을 설명하는 것보다 오히려 찬미하는 것이 낫다’(eam admirari quam explicare malit)(4.17.7-9).


성육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인성의 따라서는 특정한 곳에 계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살과 뼈를 가지셨다(눅 24:39; 요 20:27). 그 ‘유한한 몸’(corpus finitum)으로 마지막 날 까지 하늘에 머물러 계신다(행 3:21).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내려주심은 이제 그 분께서 육신으로는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이 땅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하여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신다(마 26:11; 요 12:8; 막 16:19).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엄위와 섭리와 형언할 수 없는 은혜’(maiestas, providentia, ineffabili gratia)에 있어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마 28:20). 주님께서는 몸으로 하늘에 ‘올려져’ 가셨다’(행 1:9; 막 16:19; 눅 24:51). 그리고 ‘거기로부터’(빌 3:20) ‘본 그대로’ 오실 것이다(행 1:11). 그리스도의 ‘거주지’(domicilium)는 하늘이다(4.17.12, 26-27).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신성과 인성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중보하신다. 신성에 따라서는 그 분은 ‘어디에나’(ubique) 계신다. 그러나 인성에 따라서는 하늘에 계신다. 부활로써 육체에 불멸성이 부여되었으나, 그것의 고유한 속성이 제거된 것은 아니다. ‘육체의 현존’(praesentia carnis)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승천 후에도 인성에 따라서는 ‘지역적으로’(localiter) 현존하신다. 성도가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받게 됨은 ‘성령의 은밀한 능력’(arcana virtus)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은 성례의 약속을 효과적으로 실현한다. 성령께서는 표상에 의해서 ‘의미되는 본체’(res signata)를 ‘드러내시고 제시하신다’(praestat et exhibet).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심령에 ‘증거하시고 인치신다’(testatur et obsignat). 성령의 ‘작용’(efficacia)은 객관적인 성례의 거행과 주관적인 성도의 감화에 동시에 미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승천으로 인성에 따라서 육체가 지상을 떠나셨다. 이는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그 육체의 ‘영적인 현존’을 이루기 위해서였다(4.17.10, 28).


성찬에는 ‘말씀의 선포’(praedicatio verbi)가 필수적이다. 제정의 말씀에 따른 약속은 표징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을 향하여 주어진다. 성찬에 참여하는 자는 그 약속을 ‘믿음의 분수대로’(analogia fidei)(롬 12:6) 받아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만이 성령의 ‘은밀한 힘’(vis arcana)으로 그 분과 하나 된 가운데 ‘영적인 먹음’(spiritualis manducatio)을 통하여서 그 분의 살과 피에 참여한다. 이 먹음은 영적이나 ‘참되고 실재적이다’(vera et realis). 이러한 성찬의 신비는 이해되기보다 경험된다. 그 역사는 오직 성령의 ‘불가해한 능력’(incomprehensibilis virtus)으로 말미암는다(4.17.32-34, 39-40).


성찬은 물질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대로 ‘마음을 들어 올려’(sursum corda) 하나님의 영원한 영적 양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4.17.31, 35-36).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하는 동시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화목과 평강을 고백하는 예식이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의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성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함께 자라가는 거룩한 잔치이다(4.17.38, 42).




3. 로마 가톨릭 화체설 비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사제의 ‘축성’(祝聖, consecratio)으로 떡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화체설’(化體說, transsubstantiatio)을 주장한다. 그들은 떡의 육체로의 ‘변화’(conversio)를 다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떡의 실체’(substantia panis)가 없어진다. 떡은 자체의 고유한 속성을 잃는다. 둘째, 떡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새롭게 존재하며, 지역적, 육체적으로 현존한다. 셋째, 그리스도의 몸은 ‘떡의 형상’(forma panis)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도 그리스도의 몸은 편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분께서는 승천하신 그대로 하늘에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지역적 현존’(praesentia localis)을 ‘육체적 현존’(praesentia carnalis)으로 이해한다. 그들의 궤변에 따르면 한 분 그리스도께서 다수의 몸을 갖게 된다. 이러한 난점을 무마하기 위해서 그들은 떡의 실체와 형상을 이원론적으로 파악하여, 성찬에 있어서 떡의 실체는 없어지고 떡의 형상은 변화되어서 그리스도의 몸을 새로운 실체로 받는다고 한다. 그들은 하늘에 현존하는 몸이 떡에 현존하는 몸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리하여서 그리스도의 육체는 인성의 제한을 받으나 무제한하다는 자가당착에 빠진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은 성찬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을 육체적, 물질적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성찬의 표징으로부터 그것에 의하여 의미되는 본체인 그리스도의 몸을 분리시킨다. 그리하여서 보이지 않는 은혜를 보이는 표로써 드러내심으로써 성도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자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이렇듯 표징과 그 의미와의 관련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들은 ‘병재’(竝在)에 의해서(per concomitantiam) 살과 피가 동시에 한 표상으로 제시된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적 진리에 따른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이 아니라, 사제의 기적적 능력을 가정한 ‘은밀한 현존’(praesentia arcana)을 주장한다. 그들에게는 ‘떡의 외형 아래에’(sub specie panis)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육체적으로 현존한다는 전혀 비성경적인 ‘은밀한’ 궤변이 있을 뿐이다(4.17.13-15, 18).




4. 루터란 공재설 비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는 달리, 루터란들은 떡의 실체가 변하지 않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들도 떡과 그리스도의 몸과의 ‘실체적 관련성’(habitudo substantialis)은 부인한다. 그들은 성례에 있어서 떡이 그리스도를 ‘제시함’(exhibitio)을 떡이 그리스도의 몸을 표상한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 떡과 함께 현존한다는 사실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떡이 몸이다’(panem esse corpus) 라는 말과 ‘몸이 떡과 함께 있다’(corpus esse cum pane) 라는 말은 천양지차이다.


로마 교회는 화체설을 주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떡에 ‘내포시키려고’(includat) 하는 반면에 루터란들은 그것을 떡에 ‘부착시키려고’(affigat)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썩을 요소들에 가두거나 고착시키는 것은 그 분의 영광에 합당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인성에 합당하지 않은 속성을 그 분의 몸에 돌려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대속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지금도 양성 가운데서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고 계시기 때문이다(4.17.16-17, 19-20).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은밀한 현존’이라는 모호한 말로써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몸이 떡 가운데도 육체적으로 현존한다는 주장을 한 반면에, 루터란들은 승귀한 그리스도의 몸이 모든 곳에 현존한다는 ‘편재성’(ubiquitas)에 기초해서 자신들의 공재설(共在說, consubstantio)을 전개하였다.


루터란들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영광의 몸’을(빌 3:21) 인성의 제한을 받지 않는 ‘보이지 않고 무한한 몸’(invisibile ac immensum corpus)이라고 곡해한다. 그들에 의하면, 그 몸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으나 어떤 공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multis in locis simul esse, nulloque spatio contineri). 이러한 궤변은 ‘속성 교통’(communicatio idiomatum)에 대한 그들의 오해로부터 기인한다. 성육신 이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말씀은 모두 위격적 연합 가운데 읽어야 한다. 어느 특정한 성에 속하는 사실은 전체 위격에 돌려진다. 양성은 위격 안에만 있으며, 위격을 통하여서만 교통한다. 위격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전체로 계신다. 그러나 위격에 속한 양성에 관한 한 각각의 성이 항상 전체로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께서는 한 분 이시다. 그러나 전체로서 그러하신 것은 아니다’(totus, sed non totum ). 승천 후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에 따라서는(ad humanitatem) 하늘에 계시고 신성에 따라서는(ad divinitatem) 어디에나 계신다. 신성에 따라서는 장소에 제한되지 아니하고 인성에 따라서는 동시에 여러 곳에 계실 수 없다. 한 성에 따른 것은 다른 성에 따를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성에 따르던 그 주체는 양성의 위격이다. 즉 인성에 따라 특정한 곳에 계신 분도, 신성에 따라 어디에나 계신 분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 전체시다. 루터란들은 이러한 양성의 위격적 교통을 곡해하여 양성이 위격을 통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교통하여 서로 혼합되거나 변화된다고 보았다. 그들은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에 혼합되어서 육체인 채로 어디에든지 현존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과 마찬가지로 루터란의 공재설도 성찬을 받는 성도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4.17.29-31).




5. 로마 가톨릭 미사와 거짓 성례들 비판


로마 가톨릭은 미사를 죄를 보속하기 위한 공로를 쌓는 희생 제사로 여긴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대제세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5:6, 10; 7:17, 21; 9:11, 26; 10:10, 14, 21; 시 110:4; 창 14:18). 그리스도께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요 19:30; 히 10:18, 26), 죽을 인간이 제사장이 될 필요도 없다(히 7:17-19). 미사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의 의의를 곡해하므로 그것을 기념하는 성찬를 제거하고 폐지한다. 그러므로 전적 은혜를 감사하는 성찬과 자신의 공로를 헤아리는 미사는 양립할 수 없다(4.18. 1-3, 7).


로마 가톨릭은 세례와 성찬 외에 비성경적인 다섯 가지 성례를 거행한다. 견진례(confirm‎!atio)는 세례 받은 성도들이 거룩한 영적 싸움을 싸울 능력을 주는 성례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는 이미 세례에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롬 6:4)이기 때문이다(4.19.5, 8). 고해(poenitentia)에는 가시적인 표징이 없다. 내면적인 통회가 회개의 표징이자 본체이기 때문이다. 고해 역시 견진례와 마찬가지로 그 의미가 세례에 포함되어 있다(4.19.15, 17). 종부성사(ultima unctio)는 임종을 맞이한 성도에게 기름을 부음으로써 병 낫기와 영혼 구원을 구하는 예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례를 제정한 말씀이 어디에도 없다(4.19.18-20). 신품성사(ordes ecclesiastices)는 일곱 가지 직분에 나아가는 서품의 예식이다. 그러나 이는 직분의 임명과 다르지 않은 의식으로서 성례의 표나 말씀이 없다(4.19.22). 혼인성사(matrimonium)는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이 되는 연합의 신비를 기념하는 예식으로 여겨진다(엡 5:28-32). 그러나 진정한 성례적 연합은 세례와 성찬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교통으로 족하다(4.19.34-36).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거짓 성례들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무화(無化)시키고 단지 인간의 공로만을 부각시킬 뿐이다. 성례는 보이지 않는 은혜의 보이는 표이므로, 은혜의 약속이 말씀으로 제정되지 않는 어떤 예식도 단지 헛되고 참람할 뿐이다.










하나님 주권적 섭리가 통치 질서
국가통치는 살아있는 예배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










'제30강좌' 국가: 하나님의 일반 은총적 다스림(기독교강요 4.20.1-32)






1. 국가통치의 목적








사람은 ‘이중적 통치’(duplex regimen)를 받는다: ‘영적 통치’(regimen spiritualis)와 ‘국가적 통치’(regimen politicum). 영혼의 구원 즉 영생에 관한 통치는 교회의 교리권, 입법권, 사법권으로 논의된다. 중생의 은혜는 국가와 신분과 인종을 넘어서 역사하는 바,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로 말미암는다(갈 3:28; 골 3:11).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로 맺혀진 ‘영적인 열매’이다. 그러므로 그 관할이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spirituale Christi regnum)에 있다. 영적인 통치는 성도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한다. 성도는 그 다스림 아래에서 죄의 종의 멍에는 벗어버리고(갈 5:1) 주님의 멍에를 메고 의의 종으로서 살게 된다(마 11:28-30; 롬 6:15-20). 주님과 함께 새사람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갈 2:20) 이제는 ‘세상의 초등학문’을 버리고(골 2:20)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이 세상의 초보에 속한 것들’(elementa huius mundi)을 버리고 영원한 것들을 추구한다.


한편, 국가적 통치는 세속 정부의 다스림을 통하여서 ‘시민질서’(civilis ordinatio)를 수립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성도들의 경건한 삶에도 무관하지 않다.


‘국가통치’(politica administratio), 그것은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예배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지위를 수호하며, 우리의 삶을 사회의 연합체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도덕을 시민 정의에 부합하도록 형성시키며, 우리가 서로 간에 화해하게 하며, 공공의 평화와 안온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정부’(politia)의 역할은 단지 의식주를 채우고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삶을 고양시키는데 국한되지 않는다. 정부는 우상 숭배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행위를 금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훼방하는 일이 없도록 방지하고 공개적인 예배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돕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정부는 ‘통치자, 법, 국민’(magistratus, lex, populus)의 세 요소로 이루어진다(3.19.15; 4.20.1-3).


사람은 ‘사회적 본성’(natura socialis)을 공유한다.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성실’(honestas)과 ‘공평’(honestas)에 대한 관념이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법과 사회 질서의 ‘씨앗’(semina)이 심겨져 있다(2.2.13). 사람들이 함께 국가를 이루고 시민법을 통하여서 통치자와 피치자의 질서를 세워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은총에 속한다(2.2.17).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창조와 구속 경륜에 역사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사회적 삶에도 미친다. 하나님께서 ‘최선의 방식으로’(optima ratione) 다스리지 않으시는 것은 하나도 없다(1.5.8).




2. 통치자


하나님께서는 통치자의 역할을 인정하실 뿐 아니라 최고의 찬사로 그 가치를 칭송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다른 사람을 적합하게 판단하는 사람은 ‘신’이라고 불렸다(출 22:8; 시 82:1, 6; 요 10:35).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권세’(potestas)로써 그 분 ‘대신에’(vices) 다스리는 자들로서 세워졌다(롬 13:1-4). 오직 하나님께서 권능을 부여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방백들과 재상들과 재판관들이 그들에게 속한 백성을 다스린다(잠 8:15-16). 교회에 부여된 다스리는 은사도(롬 12:8; 고전 12:28) 이러한 국가 통치의 원리를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자들을 자신의 ‘대리자들로’(vicarios) 삼으셔서 국가와 교회를 ‘세우심’(aedificatio)은 인류의 패괴함 때문이 아니라 ‘신적인 섭리와 거룩한 질서로’(providentia divina et sancta ordinatione) 말미암는다.


‘시민국가의 권세’(civilis potestas)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유한한 인생의 삶 전체에 있어서 가장 거룩하고 나아가 모든 것 중에 더욱 더 영예롭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국가의 위정자들을 ‘경건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위한 보호자들로’(patronos piis Dei cultoribus) 삼았다. 왕들은 백성의 ‘양부’가 되고 왕비들은 ‘유모’가 된다(사 49:23). 그러므로 모든 통치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아들에게 입 맞출 것이요(시 2:12), 성도들은 자신들의 경건한 생활과 평안을 위하여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한다(딤전 2:2). 성도들이 군왕과 재판관을 위하여 기도해야 함은 그들의 통치권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고 하나님께 돌아가야 함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왕은 여호와의 힘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그 분의 인자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아니한다(시 21:1, 7). 나라가 그 분의 것이며 그 분은 모든 나라의 주재가 되신다(시 22:28). 하나님께서는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왕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신다(시 45:7). 왕의 선정(善政)이 ‘주의 판단력’과 ‘주의 공의’로, ‘주의 기이한 일’과 ‘주의 성실’로, ‘주의 권능의 규’로 말미암는다(시 72:1; 89:5; 110:2). ‘오직 주께서 왕위를 견고케 하사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시 132:18).


통치자는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일꾼’(minister), ‘하나님의 진리를 입으로 선포하는 도구’(organum), ‘하나님의 행적을 기록하는 손’(manus)이며, 그가 앉은 재판석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그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하심, 보호하심, 선하심, 인자하심,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형상이 되어야 한다. 통치자는 ‘하나님의 종’(servus Dei)이며 ‘하나님의 대사직(大使職, legatio)을 수행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할 것이며(렘 48:10), 삼갈 것이며(대하 19:6-7),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돌려야 할 것이다(시 82:1).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왕이 치리하는 것이 그 분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잠 8:15). 하나님께서는 국가를 세우시되, 더불어 그 통치자들을 정하여 세우신다(4.20.4-7).


통치자의 ‘직분’(officium)은 율법의 두 돌판에 모두 미친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이 정부의 제 일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 순수한 교리가 보전되고 예배가 보호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예배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법이 시민법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둘째 돌판과 관련하여서 통치자는 공평과 정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학대하지 말고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렘 22:3). 오히려 낮고 천하고 굶주리고 버림 받은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을 압제하는 악인들로부터 건져내야 한다(시 82:3-4). 공정한 재판을 실시하여 하나님의 의가 외형이 아니라 진실에 있음을 나타내야 한다(신 1:16-17; 16:19; 17:16-20). 참으로 통치자는 ‘정의’(正義)를 행하여야 한다.


“참으로 의(義, iustitia)는 무죄한 사람들을 성실하게 지키고, 감싸고, 보호하고, 변호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정(正, iudicium)은 불경한 자들의 무모함을 막고, 그들의 힘을 제어하고, 그들의 비행을 벌하는 것이다”(4.20.9).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심판을 대행하신다(롬 13:4). 악인을 의롭다고 여기는 자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잠 17:15; 잠 24:24). 통치자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지하여 공적인 보복을 가하는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에서는 원수도 사랑해야 할 이웃이지만, 세상의 왕국에서는 적으로부터 자국민을 방어하기 위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통치자가 검을 들 때에는 선악시비에 대한 ‘공평한 판단’(aequum iudicium)과 더불어 ‘관용’(clementia)이 필요하다. 관용은 국왕을 자문하는 ‘최고 고문관’(optima consiliaria)이라고 할 것이니, 그것으로 말미암아 왕위가 견고해진다(잠 20:28). 관용은 국왕이 국민에게 베풀 ‘제일의 선물’(prima dos)이다. 국왕은 인간의 본성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국민에게 맞추어 위정해야 한다. 무엇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으로’(pura Coram Deo conscientia) 국정을 수행해야 한다(4.20.10-13).




3. 법


시민국가에 있어서, 위정자 곁에는 ‘법’(lex)이 있다. 법은 공화국의 ‘가장 견고한 힘줄’(validissimus nervus)이며 ‘영혼’(anima)이라고 불린다. 법이 없다면 위정자가 존재할 수 없으며, 위정자가 없다면 법은 활력을 잃어버린다. ‘법은 무언의 통치자’(mutus magistratus)요, ‘통치자는 살아 있는 법’(lex viva)이다.


법을 논의함에 있어서, 일반 시민국가의 정치와 기독교 국가의 정치를 구별하여 다룰 필요가 있다. ‘기독교 국가’(politia christiana)는 하나님의 법 즉 율법으로 다스려진다. 율법은 ‘도덕’(mores)에 관한 법, ‘의식’(caeremoniae)에 관한 법, ‘재판’(iudicia)에 관한 법으로 구성된다.


‘도덕법’(lex moralis)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규범으로 구성된다. 전자는 ‘순수한 믿음과 경건으로’(pura fide et pietate)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명령이며, 후자는 ‘성심을 다한 사랑으로’(sincera dilectione)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도덕법은 모든 나라와 민족을 향하여 부여된 ‘의의 규준’(regula iustitiae)으로서 그곳에는 ‘영원하고 불변한 하나님의 뜻’(aeterna et immutabilis voluntas Dei)이 드러나 있다.


‘의식법’(lex caeremonialis)은 마치 유년기의 자녀들을 위한 ‘몽학선생’(paedagogia)과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지혜가 아들에 의해서 실체적으로 드러날 때까지 유년기의 유대인들을 여러 의식들로써 훈련시키고자 하셨다(갈 4:3-4; 3:23-24). 의식법에 규정된 각각의 규례는 그 실체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경건에 이르는 훈련’(exercitatio ad pietas)은 되지만 ‘경건 자체’(pietas ipsa)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재판법’(lex iudicialis)은 유대 민족의 국정(國政)을 위하여 주신 것으로서 그 가운데 ‘공평과 정의의 공식들이’(aequitatis et iustitiae formulae) 제시되어 있었다. 재판법은, 일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하나님의 영원하고 최상의 뜻인 사랑을 세상 가운데 구현하는 기능은 있지만 ‘사랑의 규범 자체’(praeceptum dilectionis ipsum)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때가 되어 재판에 관한 율법이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영원한 직분들과 규범들’(perpetua officia et praecepta caritatis)은 남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심으로써 의식법과 재판법 자체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의 의미는 오히려 완성되었다(4.20.14-15).


그렇다면 각국의 시민법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인 ‘사랑의 규준’(regula caritatis)에 부합해야 하는가? 시민국가의 근간은 ‘자연법’(lex naturalis)과 ‘헌법’(constitutio)에 기초하고 있다. 자연법은 언제, 어디에서든지 동일하며 ‘공평’(aequitas)이라는 덕목에 그 최고의 가치가 구현되어 있다. 헌법은, 비록 각국에 다양하지만, 그 공통된 목적이 공평을 추구하는데 있어야 한다. 공평은 자연법으로서 시민법적 기초 원리가 되는 바, 그 실체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법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도덕법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법은 자연법의 증언과,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의 영혼에 새겨진 그것에 대한 양심의 증언과 다르지 않다. 이 도덕법 전체에,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는 공평의 논리가 그 자체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직 공평만이 모든 법의 목표(scopus)와 규준(regula)과 한계(terminus)가 되어야 한다.”


각국의 시민법이 이러한 기준에 따라서 수립되고 시행된다면 비록 구체적 규정이나 절차에 있어서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권장할만한 것이다. 왜냐하면 실정법은 시대와 환경과 여건을 무시하고 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맞추셔서 법을 주셨으나 그 본질은 불변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4.20.16).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관원들에게 법적인 판단을 맡길 수 있는가? 성경은 소송 자체를 금하지는 않는다. 사도 바울은 세상의 법정에서 로마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특권을 항변했다(행 16:37; 22:1, 25). 그는 불의한 재판장을 기피하고 가이사의 법정에 고소했다(행 25:10-11).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고 했으니(딛 1:15) 소송도 그러하다. ‘사랑과 인애로’(dilectione benevolentiaque) 상대방에 대한 악의에 지배되기 보다는 진실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재판관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여기며 세상에 법정에 서는 것은 부당하지 않다. 자신의 복수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적인 제재를 가하고자 궁리하는 것보다 기소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을 통하여서 판단을 받음으로써 유익을 얻는 것이 더욱 현명하다(롬 13:4). 하나님께서는 친히 복수하시되(롬 12:19), 많은 경우 사람의 손을 이용하신다. 그러므로 세상의 관원을 하나님의 사자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소송이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광적으로 소송을 즐기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신다(고전 6:5-8). 자신을 해하거나 저주하는 자에게도 선을 행하고 축복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눅 6:28; 마 5:44), 선으로 악을 이기고자 하는 사람(롬 12:21), 그리고 판결로 말미암아 교만하거나 분을 품지 아니하고 ‘인내로’(patientia) 그것을 수용하고자 하는 ‘순수한 소송인’(probus litigator)만이, ‘최고의 계획’(optimum consilium)이 ‘사랑’(caritas)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소송의 자격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이다(4.20.17-21).




4. 국민


국민에게는 ‘공적인 직분’(officium publicum) 혹은 ‘직무’(munus)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위정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집권자는 하나님의 ‘일꾼’(inister)이자 ‘사자’(legatus)이다. 그들은 단지 ‘필요악’(mala necessaria)에 불과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섭리의 도구로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부여된 ‘지위 자체’(ordo ipsus)가 영예와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신민(臣民)은 국가의 공직자들을 공경해야 한다(벧전 2:17; 잠 24:21; 롬 13:5).


그리스도의 영적인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위정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이 시행하는 국정에 대해 참여하고 협조할 의무가 있다. 사인(私人)의 정치적 편견이 여과 없이 표출되고 시민의 저항이 제한 없이 난무하는 사회에는 세움이 아니라 파멸만 있을 것이다. 위정자들에 대한 ‘복종’(observatio)은 권위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으로부터 비롯된다(롬 13:1-2; 딛 3:1; 벧전 2:13-14). 하나님께서는 악한 통치자들이라도 ‘자신의 의와 심판을 위한 일꾼들’로서 세우신다. 그들의 악정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노를 내리신다(욥 34:30; 호 13:11; 사 3:4; 10:5; 신 28:29). 하나님께서는 악한 왕이라도 세우셔서 자신의 섭리를 이루신다(삼상 8:11-17; 단 2:37-38; 4:17; 5:18-19). 패역한 사울이라도 기름부음을 받게 하셔서 이스라엘 국가의 토대를 놓게 하셨다(삼상 24:6, 10; 26:9-11). 바벨론을 강하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며 살게 하셨다(렘 27:5-8, 17). 그러므로 선군이든 폭군이든 하나님의 섭리의 손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4.20.22-28).


위정자의 권위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소명에 있으므로, 그 분의 뜻을 거슬러 악정을 일삼는 경우 그 판단을 그 분 자신께 맡겨야 한다. 각자는 타인의 의무를 판단하기보다 자신의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왕의 마음을 봇물을 조절하시듯 하시고(잠 21:1), 그들의 패역을 친히 징계하신다(시 2:10-12; 82:1; 사 10:1-2).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택한 사자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압제하는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게도 하신다(출 3:7-10; 삿 3:9). 교만한 왕들의 홀을 꺾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위정자에 대한 사사로운 저항은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위정자의 전횡을 막기 위하여 임명된 관리들의 공적인 저항은 허용된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일꾼들로서 그렇게 하여 자신들의 의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4.20.29-31).


국가 위정자는 무엇보다 국민의 ‘자유’(libertas)를 수호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가 무지한 다수의 방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바람직한 ‘정부 형태’(gubernationis genus)는 자유와 함께 ‘절제’(moderatio)를 추구하는 정치 제도를 수립해야 한다. ‘왕국이 전제 정치로 타락하는 것은 쉽다.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소수의 당파로 타락하는 것은 더욱 쉽다. 민중의 지배가 소요(騷擾)에 빠지는 것은 가장 쉽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백성들의 정체(政體)로서 ‘민주정치에 가까운 귀족정치’를 명령하셨다.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통치는 하나님의 뜻에서만 구할 수 있다. 시민의 저항권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수행하는 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그 분의 뜻에 불순종할 때 정당화 된다(단 6:22-23).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정자는 이미 자신의 고유한 직분을 포기한 것에 다름없다. 그러한 위정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일이다(호 5:13).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2-23).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


국가의 신민은 오직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한다. 경건으로부터 멀어지느니 차라리 고통을 받는 편이 낫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값으로 사셨으니,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직 그 분께만 순종해야 한다. 아멘(4.20.8, 32).


하나님께 찬송을(Laus Deo)!
영원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Soli Deo Gloria in Aetern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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