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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론과 삼위일체

by 【고동엽】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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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론과 삼위일체

혹간 사람들은 삼위일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논리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삼위일체란 성경을 정리하고 체계화시킨 것이며,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이해가 다소 어렵더라도 불구하고 성경을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삼위일체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논리가 아니라, 당시 초대교회시절에 성행하던 이단들에 대항하여 그들에 맞서 만들어진 논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AD318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가 "비존재로부터 피조되었으며,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고 주장함으로서 알렉산더 감독과 대립하여 초대교회를 분열시켰다.
아리우스 장로는, 성자는 어느 순간에 성부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성자는 성부와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하지 않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아리우스는 단일신론자, 즉 여호와의 증인의 조상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즉 예수가 하나님과 유사본질인가 동일본질인가 라는 문제가 대립되어진 것이다.

장로 아리우스와 감독 알렉산더의 두 사이에서 시작된 날카로운 신학적 대립으로 교회 분열의 문제가 대두되자, AD 325년, 318명의 감독들이 모이게 된 니케야회의가 황제에 의하여 소집되었고, 회의 회의 도중에 갑작스러운 알렉산더 감독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당시 서기이며 집사였던 청년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로 이 토론이 계속되었으며, 황제의 비호와 많은 감독들의 정치적인 동조가 있었던 아리우스에 비하여 청년집사 아타나시우스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토론이 계속되어진다.
결국 니케야회의는 동조세력이 없었던 아타나시우스 집사가 오히려 아리우스 장로와의 토론을 승리하게 됨으로서 "성자는 피조된 것이 아니며 성부와 동질이다"라는 삼위일체의 초석이 되는 니케야 신조가 계승되어지게 된다.

청년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장로와 논쟁 끝에 무려 다섯 번을 유배당하였다가 다시 돌아왔으며, 돌아올 때마다 지지자들에게 열렬히 환영을 받는 상황이 연출되었으며, 결국 아리우스장로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아타나시우스는 말년에 자신의 알렉산드리아 교구에서 존경을 받으며 평안한 시간을 갖게 된다.
당시의 유명한 유행어는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을 반대하고, 세상은 아타나시우스를 반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타나시우스의 어려운 토론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항상 성경이 최종권위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가 승리한 것은 그의 주장이 성경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우스는 자신의 주장을 명백히 논리적, 성경적으로 주장하지 못하였고, 여러번 자기 주장을 번복하기도 하고 말을 바꾸면서, 오직 외부적인 정치적 공세로 아타나시우스를 압박해 나갔던 것이다.

니케야회의에서는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와 대결함으로서 삼위일체의 초석을 확립하였고, 콘스탄틴노플회의에서는 양태론자 사벨리우스의 견해를 반대함으로서 양태론을 비성경적인 논리로 확정짓게 되고, 에베소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양성론자)와 단성론자가 대결하게 되었는데, 네스토리우스가 추방을 당하게 되며, 유티케스(단성론자)가 예수는 신성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함으로 회의가 난장판이 되어 버렸으나, 500여명의 각 지역의 교회 감독들이 참여한 칼케톤회의에서는 그리스도는 변화와 혼합이 없이 두 (인성과 신성의) 본성을 한 위격안에 연합하여 갖고 있다고 확인하게 되므로써,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기독론)에 대한 논리가 매듭되어진다.
즉 325년 니케야 회의,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 에베소 회의, 451년 칼케톤 회의에서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기독론)에 대한 결론이 150년이란 시간을 통해 일단락되어진 것이다.
즉 그 삼위일체와 기독론의 성립시초는 이단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므로, 그 유래는 이단들이 제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2000년 동안 이 논리들은 숱한 이단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아왔으나, 단 한번도 성경적인 논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삼위일체와 기독론은 이단판정의 시금석이 되어왔다.

▶ 양태론이 무엇인가?

삼위일체에서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이 <양태론>이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던 성도들 가운데에서도 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목회자들도 이러한 양태론적인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양태론이 무엇인지, 그 정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만 한다.

양태론은 물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기본적인 양태론을 쉽게 설명하자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한 한 인격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필자는 회사에서 사장이고, 교회에서는 권사이며, 집에서는 가장이 되어진다든지, 동질의 물이 얼음과 수증기의 형태를 가진다는 예를 말한다. 또 수박과 수박즙과 수박조각으로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비유는 한 실존적인 인격의 세가지 양태(Mode)를 보여주며, 이러한 것을 단일신론적 양태론이라고 하는데, 일반 성도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된 이단적인 주장이기도 하다.
본인의 세 양태, 사장과 권사와 가장이라는 사역적인 직분은 상호간에 인격적 교류나 관계를 갖지 못하는데, 세 양태가 동일인격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역적인 분류를 곧 경륜적삼위일체(사역적삼위일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주장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어가는 4세기 무렵에 잠시 있던 견해로서, 물론 현재 우리가 인정하는 정통삼위일체가 아니다.

즉 한 인격의 하나님이 구약에서는 성부로, 신약에서는 성자로, 십자가 이후로는 성령의 세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곧 양태론인데,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서 언급되는 삼위간의 인격적인 교통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비성경적이다.
또 십자가에서 죽은 분이 성부하나님 자신이 되어지므로 성부수난설이라고 불렸으며, 교회사에서 대표적인 인물로는 사벨리우스, 노예투스, 파락세아스등이 있었는데, 양태론도 변형되어 몇가지 유형을 갖고 있다.

또 삼신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하는 본질과 인격이 다른 세분의 신(하나님)이 각각 분리되어 계시다는 주장인데, 다시 말하자면 세분의 신을 믿는 이러한 주장은 삼신론이 되고 만다.
이러한 삼신론은 인격뿐 아니라 본질도 셋으로 분리시키는 주장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세분의 분리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주장하므로서, 최근에는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인격만을 너무 강조하다보면, 하나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에 유의하여야 한다.

또한 단일신론은 오직 성부하나님만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으로, 대표적인 곳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교리가 이에 속하며, 구약성경만을 인정하는 유대인들의 주장이 되고만다.
양태론도 결국은 단일신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삼위를 모두 한 인격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태론은 지방교회(워치만 니, 위트니스 리), 성락교회(베뢰아), 뉴예루살렘교회(스웨덴 보그)등이 주장하고 있으며, 몇몇 자유주의 신학자들에서도 보여진다.

또한 몰몬교와 같이 다신론을 주장하는 이단들도 있으며, 더욱이 누구나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몰몬교의 삼위일체는 성부는 엘로힘, 그리고 성자는 구약에서는 여호와이며 신약에서는 예수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고 있다.
또 통일교와 같이, 사람은 성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지방교회, 몰몬교 역시 사람이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신인합일) 곳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또 그밖의 몇몇 사이비집단들이 주장하는 이러한 삼위일체는 자신들의 교주나 지도자를 삼위일체 중에 한 형태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토론할 가치조차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설명을 생략한다.

그동안 삼위일체론이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어렵기 때문에, 오랫동안 삼위일체에 대해서 좀 쉽게 설명하고 이해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때로는 한 물방울이 셋으로 갈라지거나 다시 하나로 합하여지는 것을 삼위일체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삼위적인 양식을 물과 수증기와 얼음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더욱 혼란만 가증시킬 뿐이며, 양태론적인 자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물에 대한 비유 외에도,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비유하여 삼위일체를 동일한 수박의 다른 형태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혹간은 삼각형의 세 내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세상의 어떤 물질에 대한 유비와 비교할 수가 없다고 보아야 한다.
삼위일체를 아주 쉽게 이해하기 위한 위의 여러가지 유비는,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에 약간의 도움은 줄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바람직한 설명은 결코 되지 못한다.

특히 지방교회는 물과 수증기, 얼음의 비유를 하고 있으며 그리고 수박과 수박조각과 수박즙으로 삼위일체를 비유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양태론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동등함과 질서적 종속이라는 말로 요약되어지며, three substanses one essence 혹은 three individual existances sharing one essence으로 설명된다.
바로 삼위일체의 "일체"라는 말이 히브리서의 "본체"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위일체란 성경적인 근거를 통하여 아래의 세가지 조건을 만족하며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만든 논리가 아니며, 성경적인 정리를 체계화 시킨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즉 삼위의 인격은 각각 다르지만, 그 삼위의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상호관계가 가능한 독립적인 인격체이지만, 그 삼위는 같은 신적본질을 공유하는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 정통신학이 말하는 양태론

그렇다면 양태론에 대해서는 정통신학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러나 본인이 양태론에 대해서 정통신학서적을 참고하려는 이유는, 양태론을 주장하는 많은 단체들이 언제나 자신들은 양태론이 아니라고 변명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의 양태론이 정통신학인 것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물론 뒤에서 성경적인 설명도 충분히 할 것이다)
양태론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삼위가 각각 인격적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어떠한 형태로든지 하나님 자신이 성자 예수로 오셨고, 성자 예수가 십자가 이후 성령으로 오셨다는 주장은 분명한 양태론이다. 실제적으로 양태론은 동일인격의 세 과정이기 때문에, 그 세 양태는 서로 인격적인 구별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 위가 아니라 다만 다른 때에 다른 형태로 나타나시는 한 위라고 가르쳐왔다. 예를 들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아버지로 나타나시고, 복음서를 통해서는 같은 분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보는대로 아들로 나타나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같은 분이 교회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상권 347쪽)

"양태론은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강조하려는 열정 때문에 매력적이다. 이 입장은 한분뿐이신 하나님에 관한 구절뿐만 아니라 요한복음10:30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는 구절이나 요한복음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는 구절들을 통해 지지를 얻는다" (같은 책, 347쪽)

"싸벨리우스파는 삼위를 단순히 신적행위, 혹은 신적 현현의 많은 형태로 보고 하나님은 창조와 율법의 수여자로, 성육신에서는 성자로, 중생과 성화에서는 성령으로 각각 자신을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삼위는 한위로 축소되어 버렸다"(루이스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87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정한 둘째 이단은 제4세기에 나타난 사벨리우스파 혹은 양식적 단일신론 이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한 형태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는데 관심이 있었으나, 그 기본적인 관심은 기독론, 즉 그리스도의 충분한 신성을 주장하는데 있었다. 이 견해는 양식적 단일신론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3위를 하나님 현현의 세 양식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란 명칭은 단순히 신적본체가 자신을 나타날 때의 세형상을 가르키는 것이라 하였다. (기독론에 나타난 이단사상. 신복윤교수)

"프락세아스(Praxeas)는 알려지지 않은 이단으로서 어떤 학자들은 그를 사벨리우스(Sabellius)라고 보기도 하지만, 프락세아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서머나의 노예투스(Noetus of Smyma. 150년경에 활동)의 가르침에 훨씬 가깝다. 프락세아스는 삼위일체의 위격사이의 구별은 진짜 구별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세 이름은 구속의 형태를 설명하는데는 약간의 가치가 있지만,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구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부라는 이름은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하며, 성자라는 이름은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활을, 그리고 성령이라는 이름은 성화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이 모든 작용의 역사자는 유대인의 성경에 나오는 그 한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성육했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이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53-154쪽)

# 초기 기독교에서는 신관 중 삼위일체의 문제, 특히 성부와 성자의 내적관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둘째 이단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성부로, 한번은 성자로, 한번은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활동했다고 보고, 십자가에 못박힌 분이 바로 성부 자신이었기에 성부수난설이라고 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의 단일성과 조화시키고자한 단일신론자들이었다.(교육목회협의회, TBC 성서연구. 546 쪽)

이제 유명한 신학자들의 교과서적인 신학서적의 내용을 살펴 보았다.
무엇이 양태론인지 충분히 분간할 수가 있을 것이다.
양태론이란 하나의 인격을 가진 하나님이 세가지 양태, 즉 구약에서는 성부하나님으로, 신약에서는 그 하나님이 직접 예수로 오시고, 오순절이후에는 그 예수가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말한다.
정통삼위일체는 인격에서는 상호교류가 가능하도록 구별되지만, 신적본질은 하나라는 것이다.

▶ 양태론자의 실제 주장

그렇다면 명실상부한 양태론자이며, 지방교회의 지도자인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인용하여보자.

# 아버지는 온전한 수박으로 설명된다. 아들은 조각난 수박으로, 성령은 수박의 즙으로 설명되어진다. 이제 여러분은 요점을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아니라 아들도 된다. 그리고 아들은 아들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되기도 한다. 바꿔 말하면 이 수박은 먹기 위한 조각도 되며, 우리 안에 있는 즙도 된다. 그 수박은 먹혀진 후 없어진다. 본래 그 수박은 식탁 위에 있었지만, 그것을 먹은 후에 그 수박은 온 가족 속에 있는 것이다”(하나님의 경륜, 55-56쪽).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분리된 세 인격이나 세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은 한 하나님, 한 실제,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이름으로 지칭된다. 이름은 그 인격을 지칭하며, 그 인격은 그 이름의 실제이다. 신성한 삼일성의 이름은 그 분의 인격과 동등한 신성한 존재의 총체이다. 하나님은 삼일, 즉 셋-하나이시다.(세부분의 사람의 생명되시는 삼일 하나님. 52쪽)

# 우리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왜, 어떻게 이 한 하나님이 세 위격을 가지셨으며 가지실 수 있는가? 위격(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것은 사람의 해석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 290쪽)

위의 글을 읽어보면 위트니스 리가 양태론이라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의 실제적인 지도자이다, 워치만 니와 함께 위트니스 리를 지방교회는 사도라고 부른다. 지방교회의 교리는 위트니스 리와 100% 동일하다.
더욱더 위트니스 리의 견해를 살펴보자.

#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것은 분명하고도 명확한 성경의 계시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언급된 명확한 계시에 근거한 정통적인 가르침이나 해석에서 벗어나 그중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도 한 하나님이요, 아들도 한 하나님이요, 성령도 한 하나님으로서 세 하나님이 단체적인 한 하나님이 된다고 말한다(하나님 282쪽)

# 어떤 그리스도인 교사들은 삼일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를 아들과 분리시킨다.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 영을 모두 분리시킨다. 그들의 가르침에서 그들은 아버지, 아들, 영이 구별될 뿐 아니라 분리될 수 있는 위격들이라고 말한다.(하나님 287쪽)

# 삼일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전체적으로 충분치 않으며 "삼신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할 때, 하나님은 뒤에 남아 계시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보좌에 남아계시지도 않는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한 인격으로 생각하여 또 다른 인격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게 하시고 그후 아들은 또 다른 인격이신 그 영을 보낸 것으로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으로는 그 영이 믿는 이들 안으로 오실 때,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신다. 믿는 이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버지 앞에 엎드려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가르침을 받는다. 신격을 세 분리된 인격들로 나누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라, 니케야 신조의 교리이다.(439쪽)

▶ 우리는 왜 양태론을 조심하고 유의하여야 하는가?

1) 성부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성자하나님으로 오셨다고 주장하면, 성부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되고만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왜냐하면 정지전능하시고 영원불사이신 하나님이 돌아가신 시간이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성자예수님이 성령이 되셨다고 한다면, 부활의 신체를 가지신 예수님의 인격적인 재림을 부정하여야만 하고, 예수님의 영적재림을 주장하여야만 하는데, 이것 역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3) 성경에 기록된 삼위의 인격적 교류와 상호작용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어진다. 예를 들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송하신 것과 성자가 성령을 파송한 것, 성자예수가 성부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성경적 기록, 성자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고 하늘에서 성부하나님의 소리가 들린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가 없어지므로 비성경적인 모순이 되고만다.

4) 성부하나님이 성자예수로 되었다가 성령이 되었다고 하면, 인격적인 성부하나님과 예수님은 현재 어느 곳에서도 계시지 않고 성령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되고만다.

5)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 바쳐진 성자예수와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므로 구속의 성취를 이루신 성부하나님의 인격이 구별되지 않고 동일시 되어진다. 즉 양태론은 십자가의 대속적인 개념이 달라지게 된다. 실제로 양태론을 주장하는 교회의 구원론은 일반 기독교와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서 말하였듯이 예수의 인격적 재림을 부정하므로 종말론에서도 달라진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버뱅크라는 학자가 말하였듯이, 첫단추를 잘못 꿰메면, 마지막 단추는 채울 수가 없어지게 된다.

▶ 양태론의 성경적인 모순:

다음은 양태론이 모순이라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1)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아버지에게 기도한 것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에게 기도한 것인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 것인가?

2) 예수님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일하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에게 바쳐진 제사였는가? 아니면 인격적으로 구별되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바쳐진 제사였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상호존재과 동시존재를 주장하게 되면, 자신이 자신 안에 계신 아버지께 제사로 바쳐지기 위해 예수님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는 것이 되어진다. 제물로 바쳐지는 분과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인격적으로 구분되어야만 한다.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 십자가의 대속이다......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바쳤으며 누가 그 희생제물을 기쁘게 받았는가?

3)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나이다"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전에 하신 이 말씀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기 영혼을 부탁한다는 것인가?

4) 다윗이 기록한 시편110:1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되...."라는 구절은 신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구별하는 의미로 재조명 되어진다(마22:43). 다윗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예수를 본 것인가? 하나님과 구별된 인격으로서의 예수를 본 것인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

이 시편의 기록은 신약의 여러 곳에서 예수님이 직접 인용하셨으며, 다윗이 하나님과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별되었다(동시대에 공존하셨다)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직접 말씀하신 구절이다. 신약에서 마22:43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말한 "내 주"는 곧 예수이시다..... 다윗은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를 구별하였으며 예수님이 직접 구약의 이 말씀을 인용하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삼신론자인가?
만일 인격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다윗은 세 인격을 어떻게 구별하였을까? 다윗은 어떻게 하나님이 장차 거쳐야 할 두 번째 단계를 구별하여 보았는가? 신약에서 예수님은 그 문장을 유대인들에게 친히 직접 말씀하셨다.

5) 보혜사이신 예수께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준다는 성경말씀은, 다른 보혜사가 곧 동일한 보혜사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문자 그대로 구별된 인격으로 다른 보혜사를 말하는가?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면서 왜 "다른 보혜사"라고 말하셨으며, 3인칭대명사 "그"라고 하셨는가?

6) 사람과 한 분 하나님 사이의 또 다른 한분이신 중보자 예수가 있다는 성경말씀(딤전2:5)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동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와 구별되는 인격으로서의 예수님이 중보자로서 한 분이라는 것을 가르키는가?

7)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였으며, 성부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 인격이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인격인가?
요한12:28의 예수님의 지상간구와 하나님의 하늘로부터의 소리는 무엇인가? 또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오던 하나님의 소리는 예수님 안에서 들려오던 예수님 자신의 소리인가?

8)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을 보았다. 이 삼위는 모두 구별되지 않는 동일한 하나의 인격인가?

9) 예수님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면, 주기도문에서 왜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으며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셨는가?

10) 사도행전 10:37-38 성경본문...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며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행10:37-38)

"하나님"이 "예수"에게 "성령"을 부어주셨다.....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이 동일한 한 실체라면 성경본문은 무엇인가?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안에 있는 예수에게, 자신의 안에 있는 성령을 부어주셨는가? 아니면, 혹은 자신이 자기에게 자신을 부어주셨는가?

다시 말하면, 양태론은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이 곧 드러나게 된다.

▶ 고전적 삼위일체: 초대교회 교부들이 주장하였으므로 정통삼위일체인가?

양태론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양태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수법이 초대교회 교부들도 자신들과 같은 하였으므로, 자신들은 정통삼위일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발전해갔던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삼위일체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양태론이란 논리는 항상 등장했으며, 그 양태론은 2000년 교회사동안 언제나 위험하고 이단적인 주장이었으며, 양태론이 정통삼위일체가 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단지 그 고전적 삼위일체가 전개, 발전되어지는 과정에서 정통삼위일체는 양태론과 언제나 투쟁하게 되면서 발전되어진다. 물론 그 당시의 초대교회 교부들의 견해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정통교회사를 살펴 보자.

# 개념적인 면에서 그들은(갑바도기아 교부들) 휘포스타시스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바르게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들의 사고에서 그 용어는 우리가 '위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에 연상하는 충만한 의미상의 발전에 완전히 도달하지 못했다.(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2쪽)

# 동방교회의 신학자들은 서방교회가 즐겨 사용한 '페르소나'를 피하고 그 대신 '휘포스타시스'라는 말을 사용했다. '페르소나'의 본래의 뜻이 가면(mask)이므로 그 말을 삼위에 적용시킬 때, 사벨리우스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체를 의미하는 말로서 '우시아'를 사용했다. 한 '우시아'에 세 '휘포스타시스'가 있다고 했다. (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9쪽)

# 3세기 초에 터툴리안은 인격들(persons), 얼굴들(faces), 가면들(masks)과 같은 단어의 의미를 빌어서 세 위격, 한 본질(Three persons, one essence)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후 같은 세기의 사벨리우스는 터툴리언의 개념으로부터 약간 애매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양태론(이는 문자적으로 아버지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성부고난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신고난설, 즉 하나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뜻)과 같은 개념으로 삼위일체론을 변형시켰다. 그는 세 개의 구별된 실체들이 한 신성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에 따라서 성부의 형태, 성자의 형태, 성령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참조: 물, 얼음, 수증기와 같이 유사성을 갖는 세 인격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아가폐 성경사전 779쪽)

# 이 말은(프로소폰: 라틴어 페르소나의 헬라어) 불행하게도 사벨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여 오용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형식적으로만 믿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란 자체 안에 있는 관계명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외부세계와 가질 때 가지는 명칭뿐이라고 했다. 이름은 셋이나 실제는 한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는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페르소나' 대신에 '프로소폰'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을 쓰면서 그는 삼위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실체를 가진분이 아니라,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아들로, 때로는 성령으로 나타나서 특유의 기능을 발휘하나, 하나님과 별개의 휘포타시스를 가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님은 한때는 창조자로, 한때는 구속자로, 한때는 생명의 부여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98페이지)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로마는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헬라어 "프로소폰"이 라틴어의 "페르소나"라는 단어로 번역되어져 가는 과정에서, "페르소나"라는 단어의 어원이 얼굴, 모양, 또는 배우가 쓰는 가면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어원적으로 한 배우가 세가지의 가면(세가지의 배역)쓸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대에서 한명의 배우가 서로 다른 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다른 역을 맡을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인격의 하나님이 세 역할, 즉 창조자로서, 구속자로서, 성화자로서의 삼중적 역할을 맡을 수 있다"고 가르칠 위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즉 용어적으로 볼 때에 한 인격적 존재가 경륜적(사역적)으로 세 역할을 하였다고 오해될 수 있었으므로, 실제로 그러한 견해가 곧 양태론으로 발전하는 위험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 수세기에 걸쳐 많은 훌륭한 교사들이 삼일하나님의 두 면을 일치시켜 보려했다. 그렇게 하는데서 그들은 어떤 용어를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인격'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한 하나님의 세 인격이라 말했다.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삼일성을 설명하기 편리하므로 우리도 이 용어를 임시로 빌어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한 하나님의 세 인격이라고 말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어거스틴이 이 문제에 대하여 말한 것을 보자. 어거스틴은 삼일하나님의 비밀을 적절하게 표현할 인간의 언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삼위양식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위트니스 리의 신약의 결론. 성령51쪽)

위트니스 리는 어거스틴이 양태론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어거스틴과 초대교회 교부들이 상호내재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지방교회는 정통삼위일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의 모순인가를 알 수 있다.
정통신학 역시 어거스틴의 이러한 오해적인 비난에 대해서 이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그 당시는 삼위일체가 발전, 전개되어져 가는 과정에 있었으므로, 초대교회 교부들의 주장이 좀 달라도 이단이라고 할 수는 없다.

# 교회가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는 동의어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은, 어거스틴이 죽은지 반 세대가 지난 451년의 칼케톤 공의회에서였다. 이리하여 페르소나에 대한 정의에 휘포스타시스의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성격을 포함시키는 길을 열게 되었다. 어거스틴이 이 위격들을 "존재양식"이라고 말하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정확히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영구성이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휘선택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가 선택한 어휘는 그를 사벨리우스주의로 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이것은 페르소나라는 단어가 얼굴이나 가면을 뜻하기 때문에 삼위가 한분 하나 님의 세 얼굴로 이해되어 결국 양태론적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다-역주) (제럴드 브레이의 신론. 198쪽)

정통삼위일체는 곧 어거스틴의 주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휘포스타시스와 페르소나의 용어적인 개념은 어거스틴이 죽은 후 500년 후에 공식적으로 동의어라고 선언되었던 것이다.
즉 초대교회 교부들의 삼위일체와 유사점이 있으므로, 자신들도 정통삼위일체라는 양태론자들의 주장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주장이다.
그들은 분명히 양태론을 주장하면서도, 외부적으로는 양태론이 아니라고 숨기며 위장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 자신이 스스로 양태론이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함이며, 둘째, 초신자가 자신들의 교회에 입교할 때에 자신들의 교리와 사상을 숨기고 위장하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경륜주의는 양태론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륜주의는 4세기 이후로는 단 한번도 정통신학이었던 적이 없었다.

# 그러나 이 견해는(필자주: 경륜적삼위일체는) 전체 교회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신학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동방의 3대 신학자와 아우구스티누스 후부터 경세론적 삼위일체론을 공적으로 지지하는 신학자는 없었다......이러한 이유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제4세기 이후부터는 신학영위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말았다.(이종성의 삼위일체론, 257쪽)

삼위가 인격적으로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그것은 성경적인 기록자체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분명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상호 인격적인 교류를 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성자예수가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은 비둘기처럼 머리 위로 임하셨으며, 하늘로서는 성부의 소리가 들려왔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어느 때라도 기독교의 성부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성부하나님이 돌아가신 적이 있거나, 돌아가실 가능성이 있다면, 하나님은 생명의 근본이시며 전능하신 불사의 하나님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즉 성부하나님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이 돌아가셨다는 것에 우리는 동의하여야만 한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분과 그 제물을 온전히 받으시는 분의 인격이 구별되어지지 않는 주장은 양태론이며 서 성부고난설이며, 결코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이 아니며 기독교의 것이 아니다.
성령은 성경에서 "예수의 영" 혹은 "하나님이 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다?

특히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의 책을 읽어보면 명백한 양태론을 말하고 있으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삼위가 한 위 안에 내재되어있다는 이상한 변명을 한다.
즉 자신들은 상호내재를 주장하므로 양태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방교회의 주장대로 보자면,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예수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 주장을 한다.....(앞에 올린 위트니스 리의 글을 참조하시요)

그렇다면 예수와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 거치는 단계와 과정이 되어지므로 명백한 양태론이다.
즉 성부의 시대에 예수라는 신약시대의 과정은 아직 거치지 않은 장래의 과정이 되어지며, 성령이라는 과정은 오순절 이후에 하나님 자신이 거쳐야 할 미래적인 과정이 되어진다.
즉 세 양태는 시간적인 차이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시간적인 차이를 두는 세 양태가 내재적으로 볼 때에, 동시존재할 수 있다고 하는지 궤변과 모순이 될 뿐이다. 양태론이라고 하는 비난을 대외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 황당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즉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은 동시존재하는 요소일 수도 있으며, 혹은 서로 시간적 차이를 갖는 과정과 단계가 된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본인의 사역적 직분의 구별, 즉 교회의 권사와 회사의 사장과 집안의 가장이 내 안에서 서로 상호교류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호내재 혹은 동시존재할 수 있는가?

본인이 전에 어느 회사에 과장이었고 그 후에 부장이 되었다고 하자.
그리고 지금 사장이 되었는데, 본인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시간적인 차이를 갖는 세 단계와 과정이 한 인격에 상호내재, 동시존재될 수 있으며, 본인이라는 동일인격의 과장과 부장과 사장이라는 과정과 단계가 서로 인격적인 상호교류를 할 수 있다는 해괴망칙한 주장이 바로 지방교회의 주장인 것이다.

출처: 이인규 저

- 본문에서 언급되는 특정 교파에 관한 평가는 옮긴이의 견해와 다를 수도 있습니다. -


양태론과 양자론 (집필자 : boolingoo)

1. 양자론과 양태론은 기독론(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쟁 과정에서 나온 견해입니다. 이 두 견해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에서 "일체", 즉 하나님의 "하나되심"(oneness)을 강조하고 있는 점입니다.

2. 양자론(역동적 단일신론; dynamistischer Monarchianismus)
양자론, 또는 역동적 단일신론은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을 부어서 아들을 삼았다는 견해입니다. 양자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비록 동정녀에게서 태어났지만, 처음에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비로소 성령을 통해서 신적 요소가 부여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여러 가지 신적인 능력을 갖게 된 것은 이때에 성령을 통해서 부여된 권능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예수님은 성령의 통해 하나님과 역동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양자론은 역동적 단일신론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양자론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성부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후에 이 사상은 예수님의 신성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요약> 양자론
예수은 원래 보통 사람이었다-그런데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양자)이 되었다. 예수님이 가진 신적인 능력은 이때에 임한 비둘기 같은 성령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성부만이 하나님이며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예수님의 신성 부인-이단으로 정죄됨).

3. 양태론(양태론적 단일신론: modalistischer Monarchianismus).
양태론은 성부와 성자를 한 하나님의 다른 양태(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입니다. 양태론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오직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서 한 집 안의 가장이 자녀들 앞에서는 아버지가 되고, 할머니 앞에서는 아들이 되며, 회사에 가면 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한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양태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성부로도 나타나시고, 아들로도 나타나시며, 성령으로도 나타나셨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양태론자들은 "삼위(位)"를 구분하는 것을 반대합니다. 그들은 성자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부로 봅니다.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에 달려 고통 받으신 분이 성부라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터툴리안은 이것을 '성부수난설'(Patripassianismus)이라고 불렀습니다.

양태론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은 서방의 사벨리우스(Sabellius)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속사의 과정에서 세 얼굴(또는 세 역할)로 나타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육과 혼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신의 본질이 가지는 세 가지 면도 이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태양과 열과 광선을 가지고 이러한 신의 본질을 설명했습니다. 태양은 하나이지만, 그 안에서 열과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성부는 태양이라면, 성자는 비취는 광선이고, 성령은 태양에서 나오는 열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견해도 후에 "삼위"의 구분을 거부한 이유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사벨리우스는 세 위간의 구분을 무시했습니다. 그는 성부와 성자가 본질 상 하나라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예수님의 인성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261년에 교회 회의를 통해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요약> 양태론
세상에는 한 하나님만이 계시며 서로 다른 3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성부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 성자이며, 영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성령이다. 즉 성자와 성령은 성부께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신 것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인간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이시다(예수님의 인성 부인-이단으로 정죄됨)

내용출처 : [기타] http://biblenara.org/q&a/Q537.htm



세계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 한 하나님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어서 제각기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말하고 있으나, 창조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유일하게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즉 스스로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들이 상상하거나 만들어낸 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뜻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신(唯一神)이시나 단일신(單一神)은 아니시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유일신’이란 뜻을 ‘단일신’으로 이해하여 홀로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성부), 아들 하나님(성자), 성령 하나님(성령) 세 분이시나 한 하나님이시며, 한 하나님이시나 세 분으로 계시며 일하십니다. ‘삼위일체’란 단어는 성경에는 없으나, 교회는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위(persons)가 한 하나님이신 진리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제일 처음 삼위일체라는 말을 한 이는 터툴리안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지를 물으면서, 아들이시면 아버지와 같이 동등하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신지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데서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하게 된 교리입니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의 시대로부터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삼위일체 정통교리를 확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재확인하기까지 교부들이 많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변증하고 논의를 거듭한 끝에 교회가 교의로 받아들이게 된 교리입니다.

양자설과 가현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잘못 가르친 초기의 이단은 영지주의와 에비온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헬라의 철학과 동방의 여러 종교의 혼합 사상이며, 에비온주의는 유대교적 배경에서 나온 사상이었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났다는 뜻에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고 역사적인 인물로 사신 것을 부인하거나 그런 역사성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에 에비온주의는 예수는 단지 인간일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양자(養子)로 삼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가현설과 양자설, 이 두 사상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단설을 대변하는, 따라서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전형적인 이단설입니다.

사도들을 계승한 속사도 교부들이나 그 다음 세대의 변증가들은 나사렛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에게 나신 분으로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도들의 고백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진리를 설명함에 있어서 다소 표현상 미흡한 점은 있었으나 그 진리를 부인하거나 왜곡하는 이단적인 가르침에 대항하여 정통적인 신앙을 변증하며 전수하였습니다. 미흡한 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아들 하나님을 헬레니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 사상으로 설명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로고스’는 순수한 신과 물질 세계를 중계하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아들을 ‘로고스’로 설명하자니까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시며 한가지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심을 충분히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양태론의 생성과 파급

3세기에 이르러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삼위일체를 결과적으로 부인하는 단일신론(單一神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양자로 이해하는 소위 동적(動的) 단일신론과 하나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는 양태론적 단일신론이었습니다. 동적 단일신론은 에비온적 양자론에 가깝고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영지주의적 가현설에 유사한 것입니다.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그냥 양태론(樣態論, Modalism)이라고도 하고, 그것을 사벨리우스가 처음 말했다고 해서 사벨리우스주의(Sabellianism)라고도 합니다.

3세기 중반에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 구약과 신약과 교회 시대의 세 시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자(單子, monad)로서 하나님의 존재 내에서 구별이 없으며, 세계와의 관계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별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 가지 이름과 양식으로 구별될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태양과 빛과 열을 비유로 사용하여 로고스를 통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면 장차는 로고스가 다시금 흡수되고 하나님은 하나일 뿐이라고 합니다. 사벨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완전히 무시하였으므로 그에게서 성육(成肉)의 개념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벨리우스의 양태론은 물론 이단설로 정죄를 받았으나, 교회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합리주의적 사고를 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신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본래 삼위일체 교리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들이 그 교리를 논할 경우에는 양태론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하는 신학자들은 역사적인 예수를 찾느라 예수전 연구에 헛되게 열을 올렸습니다. 유니테리안은 양태론적 단일신론을 따르는 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표방하는 합리주의적인 신자들의 그룹입니다.

한국 기독교장로교회가 1972년에 내 놓은 신앙선언서 제 1장 1절에 보면 양태론적인 삼위일체 이해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것을 작성한 신학자들이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로 나타나셨고 계시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아들로 나타나셨고, 또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에서 성령으로 나타나셨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세 품격에서 만나며 그 하나의 품격에서 다른 두 품격과 만난다.”

자유주의적인 신학자들이 양태론을 말하는 것은 알 만한 일로 여기지만,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자에게서도 양태론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어서 자못 긴장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느 보수적인 신학자의 글에서도 “이 세 위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격들처럼 전적으로 분리된 세 인격이 아니다. 오히려 이 세 위는 하나님의 본체(本體)가 존재하고 있는 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라는 표현을 봅니다.

이러한 양태론적 이해는 부흥사들이나 일반 목회자의 설교에서도 흔히 듣는 것입니다. 일반 목사들의 경우는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해, 햇빛, 열, 혹은 물, 얼음, 수증기 등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로 설명합니다. 그러다 보면 불가피하게 양태론에 빠지게 됩니다. 신학자들의 경우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유신론적으로 논증을 하다가 그러한 논증의 잣대를 삼위일체론에까지 적용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양태론적 이해가 만연되고 있는데다가 그냥 주관적인 성경공부에만 열을 올리고 교리 교육에는 대체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국 교회이다 보니 신자들은 이단들의 가르침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양태론을 가르치는 윗트니스 리도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는가 봅니다.

1996년부터 98년의 기간에 월간지 <교회와신앙>의 발행인 최삼경 목사는 윗트니스 리측과 벌인 논쟁에서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변형된 양태론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최삼경 목사의 말에 동감합니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을 “양태론”이라고 말할 가치조차도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양태론은 합리주의적 이해에서 출발하는 삼위일체 이해로 나름대로의 전제와 논리성을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윗트니스 리의 경우는 논리성을 결여한 채로 겁없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전혀 부적합하고 불경스런 비유를 들면서 조잡한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신학적으로 논쟁할 가치조차 없음을 발견합니다. 윗트니스 리는 너무 많은 비유와 설명으로 일관하고 있어서 일일이 들어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대꾸하고 논쟁을 한 최삼경 목사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삼위일체는 경외심을 가지고 신중히 논해야 합니다

교리사를 보면 교부들이나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거나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할 때 어휘 선택을 하는 데도 얼마나 신중을 기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음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면, 니케아 공의회의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 본질(homoousios)이신 한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동 본질이란 말이 사벨리우스가 쓴 말이므로 사용하기를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삼위가 한 하나님이심을 그런 대로 가장 적절하게 이해하게 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사용하였습니다.

목회자가 성경에 충실하다가도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성경과 교리사적(敎理史的)인 지식을 동원하기보다는 자연의 비유로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어거스틴을 포함한 많은 교부들도 그랬으나 그러나 그것은 양태론에 문을 여는 것이므로 바람직한 시도가 못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면서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실체를 비유로 설명하는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말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답하시는 말씀,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ehyeh asher ehyeh, 출 3:14)하는 말씀을 발견할 뿐이다. 그밖에, 예컨대, 이사야 9장 6절에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는 이름이나 유추들은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거나,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물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역할과 능력을 묘사하는 말일 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계시해 주시지 않으시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다는 것은 신학의 기본적인 전제입니다. 철학적인 막연한 신관이나 다신론적인 혹은 범신론적인 신관이나 다른 종교적인 신관으로 성경에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려고 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물질 세계를 초월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당신이 지으신 자연계의 유추를 통한 설명으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설명은 약간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 같으나,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금 의문을 일으키게 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만들 뿐이다. 즉,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이해로 오도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삼각형을 그려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안 될 말입니다. 그런 설명은 불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의 오묘한 것을 도식화함으로써 쉽게 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비신학적인 발상입니다. 셋이 어떻게 하나가 되느냐 하는 의문을 그대로 받아, 그 원리를 수적으로 혹은 기하학적으로 설명하려면 설명이 옳게 되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예정론을 이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대치시키면서 해결하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모든 것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예정을 바로 이해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속사도 시대 이후 로고스를 우주구조론(cosmogony)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오던 것을 이레니우스(∼202년)가 구속론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의 확립에 전기(轉機)를 마련한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레니우스는 당시까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로고스로써 설명하려는 것을 지양하여 그리스도로써 로고스를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로고스, 즉 그리스도의 이해가 철학이 말하는 로고스 개념보다 선행하며 더 명확함을 인식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고백하며 예배하는 교리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에 관한 지식은 무슨 사색으로나 비유를 사용하는 설명을 통하여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말씀을 따라 논구하고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자들만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이해하기를 시도해야 하는 현학적인 논리의 희롱이 아닙니다. 목회 현장에서 평신도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면서 난해한 교리라든지 신비 중의 신비라고 말함으로써 미리 겁을 주는 것은 그들이 교리를 배우는 일에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는 초절적(超絶的)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지식이지만,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되었으므로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자이면 누구나 다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믿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교리일 뿐 아니라, 또한 실제로 믿고 있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니케아 신조가 작성되면서부터 있게 된 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자들이 교리 작성을 위하여 연구하고 논의하기 이전에 이미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이고, 교회가 세례식을 행할 때 예수의 명령을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에 연합하는 세례를 베풀었으며, 수세자로 하여금 사도신경을 따라 삼위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배에서 기도와 찬송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세로 고백해야 하는 교리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삼위일체 교리를 두고 논의할 때, 논의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아버지와 같이 참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을 비록 만족할 만하게 설명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구든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 16:16)”고 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따라, 혹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하는 도마의 고백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시인하고 고백하면, 그는 실제로 삼위일체 교리를 믿고 있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를 먼저 이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를 시인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모든 이단은 단일신론적 신학을 지지합니다.

초대 교회의 유대교적 에비온주의적 양자론(養子論)과 영지주의적 가현설(假現說)은 반 기독교적인 이단의 전형(典型)입니다. 영지주의는 희랍적 철학 사상과 동방의 신비주의적 종교 사상이 혼합된 사상이었습니다. 양태론은 인간의 육체를 옷 입듯 입으셔서 사람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말하는 가현설과 통합니다. 합리주의적인 그리스도 이해나 신비주의적 그리스도 이해가 서로 통합니다. 많은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 안에 사람으로 나셨음을 믿지 않으며, 그럼으로써 사람으로 나신 예수께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부인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종교적인 체험을 위하여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이로 생각할 뿐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은 금식과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하나님과 접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각자가 그리스도와 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에 양태론적 삼위일체 이해가 보수적인 교회에까지 일반화되어 있는 것은 시정되어야 합니다. 양태론적 이해는 신비주의 운동이 준동할 수 있는 소지를 마련합니다.

“그리스도 중심 신학”을 떠나서 “신 중심 신학”을 거점으로 한다는 종교다원주의자에게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완전히 폐기될 수밖에 없는 교리입니다. 기독교적 신앙과 신학의 핵심을 떠나 단일신론적인 신관을 견지하는 자유주의 신학은 이제 기독교적 신학 세계를 벗어나 “우주론적 기독론”이란 말에 걸맞게 종교다원주의의 무중력 세계로 접어들어 표류합니다. “우주론적 기독론”은 종교다원주의자들이 그들의 사상적 근거를 두려는 비역사적인 기독론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능력임은 일찍부터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인격이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고백을 확정하고 난 이후에, 즉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인격이시라는 교리만 해도 성경에는 분명히 기록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보면, 그것이 진리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성령을 가리켜 보혜사(parakletos, 위로자)라고 하심으로써 성령께서 인격이심을 말씀하십니다(요 14:26, 15:27, 16:7, 17:13~14, 참조: 롬 8:26~27).

기독교의 삼위일체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즉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에서 출발합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마 11:17). 즉,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요 14:6).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롬 8:9, 요 3:5).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 전에 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이 기독교 서방 교회의 전통적인 고백입니다. 동방 교회는 성령은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나오신다고 고백하는 점에서 다소 다릅니다. 그러나 삼위 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말씀합니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사랑하기 시작하셔서 비로소 사랑의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영원 전부터 아들을 사랑하시며,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과 더불어 사랑으로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말씀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합니다(요 15:9, 17:24).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섭리하십니다. 사람을 지으시되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며 서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심으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당신을 희생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났음을 믿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삶을 살아 구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맺는 말

유신론적(有神論的) 논증은 철학과 종교에서 성경의 계시의 말씀을 접어 둔 채 신의 존재를 논의하는 논증입니다. 즉, 자연 만물을 보아서 신(神)이 존재함이 틀림없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논증이다. 유신론적 논증을 통하여서는 신의 존재를 막연히 추측할 수 있게 해 줄 뿐입니다. 이러한 지극히 제한된 일반적인 유신론적 논증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는 일에 더 연장하여 적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아주 불합리한 논리의 비약을 감행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 안에서,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관한 부수적(附隨的)인 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논의할 경우와 같이 술어(述語)나 보어(補語)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변함이 없는 주어(主語)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즉, 우리의 신앙고백과 예배를 받으시는 주격이신 하나님 자신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논증할 수 있거나 논증을 감행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며, 필요 없이 많은 말로 설명해야 하는 교리가 아니고 신앙고백과 예배로 응답해야 하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거나 설명함에 있어서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나 우리의 언어의 취약성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면 쉽게 양태론이나 잘못된 삼위일체론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한국 교회는 양태론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유신론적 논증의 한계점을 충분히 인식하는 가운데 당치않은 논리의 비약을 피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면서 성경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아니 모든 교리는 온전히 그리고 철저히 삼위일체 교리에 근거하고 있음을 재삼 인식하게 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만물과 사람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사람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에 관한 교리이기 때문이다(졸고: “한국교회의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과 성령론> 차영배외, 태백사, 1999. 235~253 참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며, 우주와 만물을 운행하시고, 당신이 지으신 땅 위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대로”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땅 위의 모든 것을 돌보도록 하는 직임을 맡기시고 권위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죄를 범하여 타락하였습니다. 타락하여 죄와 죽음에 처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셔서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셔서 우리는 그 진리를 알게됩니다.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를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해 주십니다.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1:17).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요 14:6).

그래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재확인한 신조는 이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시며 천지와 가시적이며 불가시적인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우리가 믿사오며, 만세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빛에서 나오신 빛이시요, 참 하나님에게서 나오신 참 하나님이시요, 나셨으며 창조되지 않으셨고 아버지와 동질이시며, 그를 통하여 만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육신이 되시고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 아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영광 중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을 믿습니다.

주님이시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사오니 성령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셨으니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예배와 찬송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위한 세례를 고백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생명을 믿습니다.”

요한 1서에 보면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라고 한 마디로 말씀합니다(요일 4:9, 16). 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만물을 당신의 작품으로서 좋게 여기시면서 비로소 사랑하기 시작하신 것은 아님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님과 더불어 사랑 안에 계심을, 교제(communion)하고 계심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영원전부터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심을 함축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므로 영원전부터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또한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여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아버지께서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시고, 아들은 자신을 희생으로 내어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오래 참으시는 가운데서 우리 죄인을 회개케 하시며, 정하게 하시고 의롭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독생자가 누리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심으로 기도하시고 성화시키시며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성삼위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와 찬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내용출처 : [기타] 김영재교수 합동신학대학원(역사신학)





Sabellianism /사벨리우스주의

Sabellianism, Christian heresy that was a more developed and less naive form of Modalistic Monarchianism (see Monarchianism ); it was propounded by Sabellius (fl. c. 217-c. 220), who was possibly a presbyter in Rome. Little is actually known of his life because the most detailed information about him was contained in the prejudiced reports of his contemporary, Hippolytus, an anti-Monarchian Roman theologian. In Rome there was an active struggle between the Monarchians, or Modalists, and those who affirmed permanent distinctions ("Persons") within the Godhead. The Monarchians, in their concern for the divine monarchy (the absolute unity and indivisibility of God), denied that such distinctions were ultimate or permanent. Sabellius evidently taught that the Godhead is a monad, expressing itself in three operations: as Father, in creation; as Son, in redemption; and as Holy Spirit, in sanctification. Pope Calixtus was at first inclined to be sympathetic to Sabellius' teaching but later condemned it and excommunicated Sabellius.
발전된 형태의 양태론적 단일신론(Modalistic Monarchianism)을 표방한 그리스도교 이단(→ 단일신론).로마의 장로로 추측되는 사벨리우스(217경~220경 활동)가 제창했다. 사실상 사벨리우스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그에 관한 가장 상세한 정보는 단일신론을 반대하는 동시대의 로마 신학자 히폴리투스의 편견에 찬 글에 담겨져 있다. 로마에서는 단일신론자(양태론자)들과 신격 안에 항구적인 구별(위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활기찬 논쟁이 있었다. 하느님의 단일신격(하느님의 절대 단일성과 불가분리성)에 관심을 가졌던 단일신론자들은 그런 구별이 궁극적이며 항구적이라는 견해에 반대했다. 사벨리우스는 신격은 단일체(monad)이며 3가지 작용으로 자신을 표현한다고 명시적으로 가르쳤다. 즉 창조에서는 성부로, 구속에서는 성자로, 성화(聖化)에서는 성령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교황 칼릭스투스는 처음에는 사벨리우스의 가르침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후에는 사벨리우스를 정죄하고 파문했다.

The heresy broke out again 30 years later in Libya and was opposed by Dionysius of Alexandria. In the 4th century, Arius accused his bishop of Sabellianism, and throughout the Arian controversy this charge was levelled at the supporters of Nicene orthodoxy (those who accepted the doctrine of the Trinity set forth in the Nicene Creed), whose emphasis on the unity of substance of Father and Son was interpreted by Arians to mean that the orthodox denied any personal distinctions within the Godhead. About 375 the heresy was renewed at Neocaesarea and was attacked by Basil the Great. In Spain Priscillian seems to have enunciated a doctrine of the divine unity in Sabellian terms. (see also Index: Arianism)
사벨리우스주의는 30년 후에 다시 리비아에 나타나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의 반대를 받았다. 4세기에 아리우스는 사벨리우스주의를 지지한 자신의 주교를 공박했고, 아리우스주의 논쟁 때 니케아 정통교리의 지지자들(니케아 신조에서 주창된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비난을 가했다. 정통파들이 성부와 성자 실체의 단일성을 역설하자 아리우스파는 정통파가 신격 내의 위격의 구별을 부정한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375년경 사벨리우스주의는 네오카이사리아에 다시 나타났고 바실리우스의 공격을 받았다. 스페인에서는 프리스킬리아누스가 사벨리우스의 입장에서 하느님의 단일체 교리를 주장했던 것 같다.

At the time of the Reformation, Sabellianism was reformulated by Michael Servetus, a Spanish theologian and physician, to the effect that Christ and the Holy Spirit are merely representative forms of the one Godhead, the Father. In the 18th century, Emanuel Swedenborg, a Swedish mystical philosopher and scientist, also taught this doctrine, as did his disciples, who founded the New Church.
종교개혁 때는 사벨리우스주의가 스페인의 신학자이며 의사인 미겔 세르베투스에 의해 재정립되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의 신격, 즉 성부의 대행적 형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18세기에는 스웨덴의 신비주의 철학자이며 과학자인 에마누엘 스베덴보리가 역시 이 교리를 가르쳤고, 새 교회(New Church)를 설립한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Monarchianism/단일신론 (單一神論)

Monarchianism, a Christian heresy that developed during the 2nd and 3rd centuries. It opposed the doctrine of an independent, personal subsistence of the Logos, affirmed the sole deity of God the Father, and thus represented the extreme monotheistic view. Though it regarded Christ as Redeemer, it clung to the numerical unity of the Deity. Two types of Monarchianism developed: the Dynamic (or Adoptionist) and the Modalistic (or Sabellian).
2~3세기 사이에 발전한 그리스도교의 한 이단으로, 이것은 로고스(말씀 또는 그리스도)가 독립적인 한 인격적 실체라는 교리를 부인하고 오직 성부 하느님만이 유일한 신임을 주장함으로써 극단적인 유일신 사상을 대변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간주하지만, 신은 숫자적으로 하나뿐이어야 한다는 데 집착했다. 이 단일신론은 2가지 형태로 발전했는데, 하나는 역동적 단일신론(또는 양자론)이고 다른 하나는 양태적 단일신론(또는 사벨리우스주의)이다.

Dynamic Monarchianism held that Christ was a mere man, miraculously conceived, but constituted the Son of God simply by the infinitely high degree in which he had been filled with divine wisdom and power. This view was taught at Rome about the end of the 2nd century by Theodotus, who was excommunicated by Pope Victor, and taught somewhat later by Artemon, who was excommunicated by Pope Zephyrinus. About 260 it was again taught by Paul of Samosata. It is the belief of many modern Unitarians.
역동적 단일신론은 그리스도가 기적적으로 잉태된 단순한 인간이었는데, 다만 그가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을 무한히 받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했다. 2세기말경 테오도투스가 이 사상을 로마에서 가르치다가 교황 빅토리우스에게 파문당했고, 그후에 아르테몬이라는 사람이 가르치다가 교황 제피리누스에게 파문당했다. 260년경에 또다시 사모사타의 파울루스가 이 사상을 가르쳤다. 오늘날 이 사상은 유니테리언파의 신념이다.

Modalistic Monarchianism took exception to the "subordinationism" of some of the Church Fathers and maintained that the names Father and Son were only different designations of the same subject, the one God, who "with reference to the relations in which He had previously stood to the world is called the Father, but in reference to His appearance in humanity is called the Son." It was taught by Praxeas, a priest from Asia Minor, in Rome c. 206 and was opposed by Tertullian in the tract Adversus Praxean (c. 213), an important contribution to the doctrine of the Trinity. See also Sabellianism ; Adoptionism .
양태론적 단일신론은 몇몇 교부들이 주장하는 '성자 종속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분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한 하느님으로서 "그가 세상보다 먼저 서 계신다는 점에서 성부요,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성자로 부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소아시아 출신의 성직자 프락세아스가 206년경 로마에서 가르쳤고, 테르툴리아누스가 자신의 소논문 〈프락세아스 반박 Adversus Praxean〉(213경)에서 반박했다. 이 논문은 삼위일체 교리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 사벨리우스주의, 양자론
 
내용출처 : [기타] http://www.cyberspacei.com/jesusi/inlight/religion/heresy/sabellianism.htm

출처 : 智本知神
글쓴이 : Heale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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