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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인의 삶과 교회의 주체” / 김용준 교수(대신대, 조직신학)

by 【고동엽】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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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보편구원론’ 야기함으로써 속죄 구원론 약화시켜
하나님과 세상 구분 않고 교회를 사회적 공동체로 이해하기도

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정통교리로 인정했다. 하지만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 이후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교리를 비이성적이고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무시했다. 그러나 20세기를 선도한 신학자들, 즉 바르트, 몰트만, 융엘, 판넨베르그는 삼위일체 교리를 재생시켰다. 그렇다면 이들이 재생시킨 삼위일체 교리는 문제가 없을까. 최근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최갑종 교수, 백석대)가 개최한 ‘제62차 신학포럼’에 발제자로 나선 김용준 교수(대신대, 조직신학)가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이를 분석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 자신이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확증하고 있다는 ‘니케아 신학’ 및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4명의 신학자들을 평가한 그의 주장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니케아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 자신이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A.D 325년 니케아에서 개최된 공의회는 삼위일체 신학을 확증했다. 비록 초대교회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다뤘지만 니케아 공의회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단일성을 ‘동본질’로서 공식화했다. 초대교회에서 삼위일체 논쟁은 아들이 아버지와 ‘동본질이시다’는 구절에 초점을 맞췄다.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재확인했고, 니케아 신조에서 부록 정도로 되어 있던 성령에 대한 조항을 확대시켰다. 니케아에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알렉산더(Alexander) 주교와 함께 ‘동본질’의 옹호자였고, 후에 세 명의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은 4세기의 후반에 아버지, 아들, 성령의 본질의 단일성을 제의했다.

# 칼 바르트
20세기를 선도한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를 재생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 계시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비록 계시는 삼위일체 교리 자체는 아니지만 삼위일체 교리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된다. 바르트는 계시 개념의 분석 외에 다른 방식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접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계시는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로서 해석되어져야만 한다.

여기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신학 기초다. 특히 바르트는 아버지, 아들, 성령의 이름은 한 하나님의 삼중적 반복이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이 특별한 방식에서 각각 세 번 하나님으로서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트는 인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존재의 양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용어와 함께 절대적인 것으로서가 아니고 더 상대적이고, 더 단순하고, 그리고 더 분명한 인격에 의해 표현된 어떤 것을 표현하려는 의도다. 바르트에게서 세 위격들이라는 개념은 세 개의 개별들, 말하자면 ‘삼신론’을 의미한다.

# 위르겐 몰트만
기독교 전통 안에서 하나님의 개념은 유일신론적 이해를 따랐던 반면, 몰트만은 하나님의 유일신론적 개념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몰트만에게서 유일신론은 전통적인 신적 위격의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특히 칼 바르트에 대해 비판한다. 바르트가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존재의 양태’라는 용어에 의해 양태론에 해당된다고 그를 비판한 것이다. 유일신론에 대한 몰트만의 의문은 사회적 삼위일체 교리와 그가 사용한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내주, 상호침투, 상호보완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러나 사회적 삼위일체교리의 이해 때문에 몰트만은 삼신론을 옹호하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다.

# 에버하르트 융엘
융엘은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를 거부한다.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독교 교리는 예수 이야기의 개략이며 하나님 말씀의 개념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죽으셨던 인간 예수는 삼위일체의 흔적으로써 이해됐다. 예수의 역사와 인간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발자취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방식은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라는 구절로 이해된다.

십자가에 달리신 자와 하나님의 동일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 구분과 삼위일체의 조건을 의미한다. 융엘은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전통적인 구분은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로부터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융엘의 삼위일체 교리 이해는 ‘아래로부터’의 개념에 기초한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삶을 구성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방식에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에로 이끌려진 인간에 대한 그들의 능력 있는 전환이다.

#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
판넨베르그는 영, 또는 사랑으로서 하나님의 일반개념으로부터 삼위일체의 추론에 초점을 맞춘다. 판넨베르그는 바르트의 신학에서 한 분 하나님 안에 위격의 복수성을 위한 여지는 없으며, 단지 하나의 신적 주체의 다른 양태들을 위한 여지만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위격적 관계 안에서 상호성은 인격적 특수성과 인격들의 교제 모두를 명시한다고 주장한다. 위격적인 특수성들에게 아버지, 아들, 성령은 능동적으로 서로에게 연계한다. 이는 위격적 특수성과 상호간 위격들의 교제를 모두 구성하는 자기 구별에 의해서 명시된 행위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능력과 통치의 아들에게로의 이양은 아들에 의해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려 드리는 것으로서 둘 사이의 내적 삼위일체 관계들의 정의로서 보인다고 말한다.

# ‘삼심론’ 위험성도 내포
삼위일체 교리의 재생산은 현대신학에 깊은 영향을 줬다. 이 재생산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니케아 신학과 정통 신학적 용어들을 재발견했다. 그러나 4명의 신학자들은 삼위일체 교리의 근본적인 의미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니케아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에서 기독론은 삼위일체 교리와 연관해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지상의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죄와 범죄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삼위일체 안에서 변증적 기능과 동일성이론의 이해는 현대 삼위일체 신학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의 삼위일체에서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는 신(神) 고난설의 개념 또는 변증으로서 하나님의 죽음의 개념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과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20세기를 선도한 개신교 신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아래로부터’ 시작되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 이론은 그들을 ‘범신론’과 ‘만유재신론’, ‘유일기독론’, 그리고 ‘인간의 죄의 용서로서 속죄의 구원론적 이해의 약화’에로 인도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보편구원론을 야기함으로써 교회의 구원론적 이해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이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격에 대한 사회적 인격개념의 적용은 삼신론의 위험성을 가진다.

또한 현대신학은 교회와 세상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을 구분하지 않고, 사회적 또는 관계적 삼위일체적 위격들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서 교회를 사회적 또는 정치적 공동체로 이해하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적 의미와 연결될 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교회의 삶에도 연결된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독교인의 삶과 교회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 예배, 설교, 선교 그리고 세례의 이유라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와 연관해 삼위일체 교리는 개혁주의와 현대신학에서 모두 교회와 삶의 기초로서 이해됐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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