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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by 【고동엽】 2021.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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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
천국 도서관장 2010.01.12 12:44 http://blog.daum.net/godlysalvation/164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아우구스티스의 삼위일체론의 관게성에 많이 빚진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소박하지만 간결한 삼위일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 일체론'


박찬희


1. 머리말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개념은 신앙이 철학적 사유에서 확인될 수 있고 철학과 신앙이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신앙을 이성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하나의 단계로 시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A.D. 400년 어간부터 삼위일체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여 A.D. 428년 이전에 그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정립한 책 'De Trinitate contra Arianos libli quindecim'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술 등 중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심오한 사상을 발전시켜 정립한 신학적 대작이다. 본고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책을 중심으로 그의 삼위일체론을 기술해 나아갈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언어는 아주 불완전하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논하는 것은 매우 힘드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삼위일체를 논하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통일성(혹은 단일성)을 전제로 하여 그 관계성을 설명하였다. 즉 아우구스티누스는의 삼위일체론은 관계적 삼위일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내재적, 심리적 관점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흔적을 그 형상을 가진 인간, 특히 그 마음에서 찾고 있다. 그의 유비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완전히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아는 것은 곧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가져올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마음이 하나님의 형상인 것은 "마음이 자체를 이해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은 또한 창조주를 기억하며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 자체가 지혜롭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비록 자체를 기억하며 이해하며 사랑할지라도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자체를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이해하며 사랑해야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마음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창조주를 받아들이고 그 본성에 참여하는 것에서 찾는다.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 하나님은 창조되신 분이 아니며 마음을 창조해 주셨기 때문에, 마음은 그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분께 참여할 수 있다.


또한, 삼위일체론의 전개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 개개인의 내적인 정신세계에서 그 흔적을 찾고자 했던 것은 그 자신이 인간 정신의 내적인 활동이 하나님에 관하여, 구원의 경륜만큼이나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 삼위의 구별성과 통일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하면서 구별성을 설명하면서도 그 통일성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는 "세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시며, 성부가 성자를 낳으셨으므로 성부는 성자가 아니시며, 성자는 성부에게서 났으므로 성자는 성부가 아니시며, 성령은 성부나 성자가 아니라 성부와 성자의 영에 불과"하다고 하여 삼위일체의 구별을 뚜렷이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며 삼위일체의 통일성에 속한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신다"고 하여 그 구별성을 극복하고 통일성을 확고히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개념이 삼신론으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삼위일체이시므로 삼중(三重)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이유로서 성부만으로, 또는 성자만으로, 또는 성령만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합친 것과 동등하게 위대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 자신의 경우에 동등하신 성자나, 성부 성자와 동등하신 성령이 동등하신 성부와 합할 때에, 이 분들을 각각 따로 생각한 때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게 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이 더 완전하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부나 성자나 성령이나 모두 완전하시며,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완전하시다"라고 하여 하나님의 완전성에 근거한 통일성을 주장하였다.


3. 삼위의 관계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관계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세 가지의 존재 양식이 있으며, 그 중 하나도 다른 하나가 없이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세 위격 사이에는 상호 의존의 관계가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은 모두가 나누이지 않는 완전한 단일성임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단일체는 낳는 자, 출생된 자, 나온 자라는 세 가지의 상이한 관점에서 볼 때에는 각각 위격을 가진다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위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하나님의 독특한 본질에는 영원성과 진리와 의지의 면에서 변함이 없다. 거기서는 진리가 영원하며,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이며, 사랑이 참되며 영원성이 참되기 때문이며, 또 영원성이 사랑을 받으며 진리가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성자는 성부와 동등하지 않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지혜로서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영광의 순수한 빛"이시다. 성자는 성부와 동일한 존재시며, 따라서 그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진정한 하나님이시며,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일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 진정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는 확실히 성부 및 성자와 동등하며, 삼위일체의 통일 안에서 그들과 동등한 본질이며 동등하게 영원하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과 신성이 하나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는 하나가 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특별히 성령에 대하여 주목하는데 그에 의해 촉발된 필리오케 논쟁의 발화점이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성령이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자에게서 나옴을 설명하였다. 그의 설명은 성서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즉 성자가 제자들에게 행한 것은 성자 자신이 성부와 동일한 본질이라는 확신에 근거한 것이었다.


주께서 제자들의 얼굴에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이 어떤 다른 뜻이었는지를 나는 알 수 없다. 몸으로 숨을 내쉬는 것, 숨이 몸에 닿은 감각-이런 것은 성령의 본질이 아니고, 성령이 성부에게서 뿐 아니라 성자에게서도 나오신 다는 것을 알리는 적합한 상징이었다.…하나님의 영은 곧 성부와 성자의 영이며,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성령이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의 본질의 동일성을 주장하면서 삼위일체가 어떻게 역사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본질이 동일하시므로, 창조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삼위일체 신으로서 분리할 수 없이 일체로서 역사하신다…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 존재의 본질에서 세 분이 하나같은 하나이시다. 거기에는 시간적 운동이나 시간, 공간의 간격 없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 세 분은 함께 영원으로 영원까지 하나이시며, 이를테면 영원 자체이시며, 그 영원에는 진리와 사랑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말할 때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되며, 동시에 말할 수 없다. 한 분 한 분이 눈으로 보이지 않는 글자로 공간을 차지하신다. 마치 내가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를 말할 때에, 이 이름들은 서로 다른 특수한 것을 의미하지만 그 어느 이름을 말할 때에도 나의 기억과 지성과 의지가 즉 영혼 전체가 협력하지 않으면 그 이름을 말할 수 없으므로, 셋이 모두 합해서 한 이름을 말하는 것이다.


그와같이 성부의 음성과 성자의 육신과 성령의 비둘기를 각기 한 위격에 돌리지만, 사실은 삼위일체 전체가 함께 지으시는 것이다. 이렇게 비교해 보면, 우리는 삼위일체 신은 분리됨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보이는 피조물의 형태를 통해서 분리되어 계시될 수 있다는 것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기 특유하게 계시한다고 하는 이 모든 일도 그 하나하나에서 삼위일체 신이 분리됨 없이 함께 역사하신다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성 아래서 정의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명확하다. 그는 본질 즉 에센티아(essentia)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우시아(ousia)라고 하며 라틴어로 숩스탄티아(substantia)라고 하는 것인데(180 5.8.9) 삼위일체는 "세 페르소나와 한 에센티아"라고 정의한다.


4.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해석의 특징 - 관계적 해석
아우구스티누스는 "같은 삼위일체 안에서 어느 한 분에 대해서 하는 말은 그 분 자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과의 상호 관련 하에서, 또는 피조물에 관련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말은 실체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 하나님은 '본질적 존재에 따라 그가 계신 그대로"임을 확신한다. 이것은 "관계적으로 말하는 본질적 존재는 그 관계가 제거된 때에도 모두 어떤 존재"라는 명확한 진술로 나아간다.


그러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관계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앞서 본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언급한 내용을 설명하였다. 이제 이 부분에서는 삼위가 각각 어떻게 서로에게 관계하는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명을 살펴보려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는 낳으신 자 성자는 능력과 지혜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없었다고 말하는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반박하며 성부와 성자의 동일성에 대하여 '지혜'로 설명한다. 그의 다음과 같은 반문은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임을 확실히 하는 말이다. 그는 "성부 하나님이 지혜 자체가 아니고 지혜를 낳으신 분일 뿐이라면, 성자를 지혜에서 온 지혜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한다. 또한 그는 성령을 '나오신 자'라고 하였는데 "성령이 나오신 것은 났기 때문이 아니라 주어졌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 성령은 "영원히 선물이시지만 시간 안에서 주어지셨다"고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와 성자는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결합되며, 그로 말미암아 낳은 이가 난 이를 사랑하고 난 이가 낳은 이를 사랑하며 그로 말미암되 그것은 그에 참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본질로 인함이라고 하여 성령도 동일한 하나의 본질과 동일한 동등성으로 존재하신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를 결합하는 완전한 사랑"이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서 사랑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이 사랑의 관계가 삼위의 통일성을 보여준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사랑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이 사랑의 관계 즉, 삼위일체의 발현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종속론을 극복하는 중요한 언급이다. 본질 자체가 동일한 분으로서의 삼위일체는 시간적으로 먼저 나고 나중 났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5. 삼위일체적 흔적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는 피조물들에 그 모양이 알맞게 나타나 있는 삼위일체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말은 인간과 세계가 삼위일체적으로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다. 단지 그것들에서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부분적 요소가 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를 논증하기 위하여 인간 내면적인 요소들과 외면적인 요소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1) 내면적 인간 속의 삼위일체


(1) 사랑(amor)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에는 마치 삼위일체와 같은 세 가지 면이 있다고 하였다. 즉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받는 다는 것과 사랑"이 그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과 관계되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관련된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품고 사랑하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품은 사랑이다.


(2) 마음(mens)-지식(notitia)-사랑(amor)
인간에게는 마음과 그 마음자체를 아는 지식 그리고 그 마음 자체를 사랑하며 또 그 자체의 지식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이며 동등하다. 이 셋은 혼합되지 않고 서로의 안에 본질적 존재로 있다. 즉 "마음 자체가 본질적 존재로서 있는 것과 같이, 사랑과 지식도 본질적 존재로서 있다"는 것이다.


(3) 기억(memaria)-이해력(혹은 지성intelligentia)-의지(voluntas)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셋은 "세 생명이 아니라 한 생명이며 세 마음이 아니라 한 마음"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것들은 "세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은 이 셋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명과 마음과 실체라고 부르는 기억은 그 자체에 관해서 그렇게 부르며 기억이라는 이름은 어떤 것과의 관계로 부르는 것이다. 이해력과 의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 어떤 것과의 관계로 이해력이라고 하며 의지라고 하지만, 그 자체에 관해서는 둘이 다 생명이며 마음이며 본질적 존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세 가지 요소가 어떻게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지각하는 사람의 지각을 형성한 대상을 기억 속에 넣는다. 다음에, 그것의 인상으로 된 형상을 넣는다. 끝으로 이 둘을 사랑 또는 의지가 결합한다. 다음에, 마음이 생각으로 자체를 볼 때에 마음은 자체를 이해하고 인식한다. 즉 자체에 대한 이 이해와 인식을 낳는다. 비물체적인 것이 보일 때에는 이해되며 이해 될 때에는 인식되기 때문이다.


다만 마음이 자체를 생각해서 보며 이해할 때에는 이전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현재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일들을 알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일을 생각하고 글자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우리는 그가 글자를 안다고 한다. 그리고 낳은 자와 난 자라는 이 둘을 사람이 연결하는데, 이 사랑은 제삼 요소이며, 곧 무엇을 차지하며 즐기려는 의지이다.
2) 인간 외면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


(1) 물체-시상(視像)-주의력
아우구스티누스는 외부로 지각되는 것 즉 보이는 물체와 보는 사람의 시각에 새겨지는 형상과 이 둘을 결합하는 의지의 목적 즉 주의력이라는 인간의 외면적 시각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의 형상을 들어 삼위일체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상은 사람이 보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시상은 눈앞에 있는 대상을 지각하기 전에는 없던 것이며, 이에 연관되어, 대상이 보이는 동안 눈 안에 있는 시상을 대상에 고정시키는 힘, 즉 마음의 주의력이 있다"고 하면서 이러한 감각들의 긴밀한 연관성에 주목한다. 즉 "보이는 물체의 형태가 있고 그 형태가 감각 기관에 인상을 주어 시상이 되고, 영혼의 의지가 감각 기관을 대상으로 향하게 하여 거기에 고정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6. 맺는 말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 대한 입장은 전체적으로 니케아 신조와 일치한다. 그러나 삼위일체 내의 위격들의 본질이 하나라는 것을 더 역설하며,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것을 명확히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를 성자의 처음이라고 부르며, 성부와 성자를 성령의 처음이라고 부른다. 즉 "삼위일체 내부의 상호관계에서 낳는 이를 처음이라고 한다면, 성부는 성자에 대해서 처음이시다. 성부가 성자를 낳으시기 때문이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시므로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처음이시오, 두 처음들이신 것은 아니다"라고 하여 종속론적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발현이 "시간적인 간격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종속론에서 벗어났다. 쉐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이 결코 아리우스적 종속론이 아님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이라는 말을 위격에 관해서만 쓰고, 본질에 관해서는 쓰지 않는다. 본질 자체를 말할 때에는 "처음"이나 근원이 없다. 따라서 낳으심(발생, generation)과 불러내심(파송,spiration)으로써 "처음"이 되셨다고 하는데 함축된 "종속"도 아리우스적인, 즉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위격과 관계에 관한 것, 즉 삼위일체적인 종속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의 흔적을 인간의 마음에서 찾는다. 그가 유비를 통하여 설명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비록 완전한 것을 드러내지는 못한다고 하여도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좋은 길을 제시하여 주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비에 의해서 하나님이 삼위일체임을 논증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신앙이 먼저 있고, 그 신앙이 기초가 되어 하나님의 삼위일체와의 유추(analogy)에 의해서 인간 정신의 삼위일체적 구조를 탐구해 간 것이다.


그는 이 삼위일체를 관계적 측면에서 접근하였다. 그런데 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세 위격을 연결하는 동시에 세 위격의 본질적 성품이다. 사랑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고리인 것이다. 삼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 사랑의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통일성을 이룬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관계 안에서 보는 특징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 하나님이 구별성을 가지면서도 통일성(단일성)을 가진다고 보았으며, 성령(사랑)을 그 통일성을 이루는 결합적 기능으로 이해하였고, 성령의 이중출원 즉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아들로부터' 나심을 강조하였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정신 세계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추출하여 내었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방대한 그의 저작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였지만 그것을 완전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여전히 신비(mystery)인 것이다. 삼위일체는 역사의 종국에서 밝히 드러날 하나님의 영역이다. 인간이 그것을 해명하려 하여도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저술 말미에 다음과 같이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확고한 기대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약속을 받은 대로 얼굴과 얼굴을 대해서 보는 때가 오면, 우리는 이 삼위일체를, 곧 비물질적일 뿐 아니라 완전히 불가분적이며 참으로 변함없는 이 삼위일체를 볼 것이다. 그 형상인 우리 자신을 지금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훨씬 더 확실하게 볼 것이다.
거기서는 우리가 진리를 보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고 완전하게 진리를 즐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은 중세이후의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삼위일체에 관한 논문」(Treatise on the Trinity)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수정하거나 보완한 것이라기보다는 보다 우아하게 재진술한 것이었으며,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 접근법을 직접적으로 반복하는 방법으로 성서해석을 해나가고 있으며(심리학적 유추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서방 전통 속에서 이루어진 삼위일체에 관한 가장 중요한 재진술이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의 칼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은 삼위일체 문제를 책의 가장 처음에 위치시킴으로서 삼위일체를 교의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았던 것이다.


참고문헌

1) 이 부분은 Karl Jaspers가 Die Grossen Philosophen을 쓰다가 1957년에 타계하였는데 그 Ⅰ부를 김쾌상이 번역하여「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으로 발간하였다. : Karl Jaspers,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 김쾌상 역(서울:전망사, 1981), 55.
2) A.W Haddan, "Translator's Preface", E.D by Philip Schaff,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vol. 3(Michigan:WM. B. Eerdmans Publicing Company, 1980), 13.
3) A select library of the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vol. 3의 17-228쪽에 편집되어 있는 이 책은 김종흡에 의해 우리말로 번역되었다(Augustinus, 「성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김종흡 역, 서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7.). 본 소고에서는 이 번역본을 사용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논술하려 한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인용할 때에는 이 책을 생략하고 "De Trinitate, 1.1.1(권,장,절)"의 형식으로 주를 달 것이다.
4) De Trinitate, 5.9.10
5) De Trinitate, 14.12.15.
6) Ibid.
7) Alister E. McGrath, 「역사속의 신학-그리스도교신학개론」, 김홍기/이형기/임승안/이양호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98), 400.
8) De Trinitate, 1.4.7.
9) Ibid.
10) De Trinitate, 6.7.9.
11) De Trinitate, 6.8.9.
12) De Trinitate, 5.5.6 : 7.3.6.
13) De Trinitate, 15.14.23.
14) De Trinitate, 4.서론.1.
15) De Trinitate, 4.20.27.
16) De Trinitate, 1.6.9.
17) De Trinitate, 1.6.11.
18) De Trinitate, 1.6.13.
19) De Trinitate, 1.9.19.
20) 필리오케 논쟁에 대하여는 야마다 아끼라, 「아우구스티누스」, 윤원호 역(서울:대한기독교서회, 1989), 98-109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21) De Trinitate, 4.20.29.
22) De Trinitate, 4.30.21.
23) De Trinitate, 7.4.7.
24) De Trinitate, 5.11.12.
25) Ibid.
26) De Trinitate, 6.2.3.
27) De Trinitate, 7.1.2.
28) De Trinitate, 6.1.1.
29) Ibid.
30) De Trinitate, 5.13.14.
31) De Trinitate, 5.16.17.
32) De Trinitate, 6.5.7.
33) De Trinitate, 7.3.5.
34) De Trinitate, 15.26.45.
35) De Trinitate, 6.10.12.
36) De Trinitate, 8.10.14.
37) De Trinitate, 9.2.2.
38) De Trinitate, 9.4.7.
39) De Trinitate, 9.5.8.
40) De Trinitate, 9.4.5.
41) De Trinitate, 10.11.18.
42) De Trinitate, 14.6.8.
43) De Trinitate, 11.2.2.
44) De Trinitate, 11.2.5.
45) 윌리엄 G. T.쉐드, "해설" 「성 아우구스티누스 삼위일체론」, 김종흡 역(서울:크리스삻 다이제스트,1997), 15.
46) De Trinitate, 4.20.29.
47) De Trinitate, 5.14.15.
48) De Trinitate, 15.26.45.
49) Ibid.
50) 야마다 아끼라, 110.
51) De Trinitate, 15.23.44.
52) De Trinitate, 15.25.45.
53) Alister E. McGrath, 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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