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대의 신학노선
김중은 교수(장신대 18대 총장)
2001년 창학 100주년을 맞이한 오늘의 장로회신학대학교(이하 장신대)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이하 평장신)에서 시작되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노선을 잘 이해하고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는가? 또는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장신대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전통과 평장신의 신학노선과는 단절된 채 나름대로의 새로운 신앙과 신학노선을 추구하고 있는가? 또는 오늘 장신대의 신앙과 신학노선에서 평장신과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무었인가? 오늘 장신대가 추구하는 신앙과 가르치는 신학의 본질과 그 특징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장신대의 이러한 신앙과 신학의 부단한 정체성 확인은 교회의 신앙이 혼잡해지고 신학의 사명이 불확실하게 보이는 21세기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성서학과 성경관의 관점에서 장신대 100년 역사의 흐름을 되짚어 보면서 이 글을 전개해 나가고자 한다.
주지하는 대로 한국 장로교회는 1945년 감격의 해방을 맞이한 후, 1950-1960년까지 10년 동안 신학적인 갈등과 신앙적인 입장의 차이 때문에 교회가 분열하고, 신학교가 분립하는 불행을 겪었다. 춘계는 전통적인 평장신의 신앙과 신학의 특징을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 내지 그 신학의 갈등에 연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한 적이 있다: “1901-1945년 신학교육의 특징은 한마디로 도입기의 신학으로,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일방적, 무비판적 전달-흡수의 시기였고, 전도열이 왕성했던, 신학적이기보다는 신앙적인 시기였다. 이 시대의 일방적인 신학교육 결과로 한국 장로교회 신학은 편파적이고 편협하고 포용성이나 융통성이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소위 선교사 신학교육시대로 정리되는 평장신시대 신학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견해는 한국 장로교내에서 소위 진보주의나 신정통주의 그룹(주로 일제시대 일본이나 미국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그룹)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어쨌든 김명룡은 “한국의 장로교회를 분열시킨 신학적 오해는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에 그 뿌리가 있다”고 진단하였으며, “소위 자유주의 신학으로 알려진 신신학에 대한 논쟁이 1953년의 기장측의 분열과 1959년의 통합측과 합동측의 분열에 깊이 개입되어 있었다”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1938년 평장신이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폐문한 이후, 1945년 해방이 되면서 1950년대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혼란이 야기되는 상황을 잠깐 짚어볼 필요가 있다.한국 장로교회는 193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 27차 총회에서 일제의 물리적 강압아래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평장신은 그러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학교 문을 닫았다. 평장신의 교육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도, 한국교회의 목회자 양성을 포기할 수 없고 계속해야 한다는 명분은 설득력이 있었고, 평소 평장신의 선교사 신학교육에 불만을 품어오던 김재준은 1940년 서울에 조선 신학원을 세우고 신학교육을 시작했다(김재준은 일본의 자유주의신학 중심지 청산학원 신학부에서 신학을 했고,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서 1931년 신학사, 1932년 동교에서 “오경비판과 주전 8세기 예언운동”이란 논문으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편 평양에서도 1940년 4월, 평장신 11회(1918년) 졸업생인 채필근이 닫혔던 평장신의 문을 열고, 교장이 되어 신학교육을 재개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에 끝까지 저항했던 소위 “출옥성도들”은 그 동안 조선신학교와 후기 평장신을 친일파에 의해 주도된 신학교로 규정하고, 목회자 양성 신학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들은 1946년 9월 부산에 고려신학교를 세우고, 신사참배에 불복종했던 과거 평장신의 칼빈주의 정통신학을 계승한다고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장로교 총회는 고려신학교 설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1952년 37회 총회는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하등 관계가 없다”고 최종 선언했다. 이 때부터 한국 장로교회 분열의 비극은 김인수의 지적대로 항상 신학교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해방 후 서울의 조선신학교는 1946년부터 총회의 공식인준을 받았으나, 소위 신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친다는 물의가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평장신의 보수주의 신학을 계승하는 신학교를 재건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며, 1948년 6월 서울에는 평장신의 보수신학 노선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박형룡을 임시교장으로 하는 장로회신학교가 세워졌다. 1949년 35회 총회에서는 서울의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정했다. 1950년 36회 총회는 이미 인준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를 통합하여 “하나의 총회신학교”로서 운영하기를 결의하고, 1951년 9월 감부열 선교사를 교장으로 선임하여 대구에서 개교하였으나, 조선신학교측이 이를 거부하여 통합에 실패했다.
해방직후 평양에서는 김인준(평장신 19회 졸업생, 목사) 교장의 지도로 평장신이 명맥은 유지하였으나 38선에서 남북이 분단되고 공산정권하에서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순교하였으며, 1947년부터 평장신은 이성휘 교장이 맡아서 공산정권 아래서 어려움을 겪다가,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이성휘는 순교하고 평장신도 사라졌다. 하나의 총회신학교 통합노력이 실패한 뒤, 1952년 4월 제37회 총회에서는 성경 유오설을 주장, 옹호, 선전한다는 이유로 김재준 목사 면직과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서고도의 본국 송환을 결정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써 한국 장로교회와 신학은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신학 교육의 방법론 차이 내지는 성경관 논쟁 때문에 다시금 1953년에 기장과 예장이 분열하는 상처를 입게 된다. 조선신학교는 한국 신학대학이 되었고, 총회 신학교는 1952년 10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신학교”라는 교명으로 정부의 설립인가를 받아, 1953년 10월 서울 남산교사에서 박형룡을 교장으로 평장신의 신학을 계승하는 신학교육을 재개했다.
1953년 장로교 총회가 기장측과 구별되는 평장신 전통의 보수주의 신학 노선에 대한 설명을 요청 받았을 때, 총회는 “성경 무오설”과 “축자영감설”을 한국 장로교회 보수주의 신학사상의 2대 핵심내용들로서 규정했다고 박용규는 서술하고 있다. 사실 고신파가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한 것이나, 기장과 예장이 신학교육 때문에 분열한 것이나, 또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이 WCC 가입 찬반 문제로 분열한 것도, 그 신학적 명분의 공통된 뿌리는 성경관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경관을 명분으로 내세운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논쟁과 교회의 분열은 불행하게도 진리를 위한 선한 싸움이 아니었고, 대부분 자파(自派)의 자기의(自己義)를 관철하기 위한 주도권 다툼이었다는 데 그 비극이 있었다. 그 동안 한국장로교회 역사에 관한 성찰들을 종합해보면, 100년 전 평장신에서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신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노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경관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여겨진다. “한국의 장로교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신학적 이유의 중심에는 성경관의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 구체적으로는, “이 성경관의 차이의 중심에는 성경에 대한 역사 비판학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고, 아울러 성경무오설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김명용이 지적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된다.
그렇다면 오늘 장로회 신학대학의 신앙과 그 신학 노선도 이러한 관점에서 무관하거나 예외가 될 수는 결코 없다. 따라서, 장신대 100년 전통의 신앙과 신학노선도 무엇보다 성경관의 관점에서 정리해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되돌아 보건데, 장신대의 소위 광나루시대가 시작된 1960년대 당시 계일승 학장은, “에큐메니칼(세계교회와 연대하는) 정신에 입각한 보수신학을 견지하는 것”이 장신대의 신학적 입장이며, "근본주의나 진보주의라고 일컫는 자유주의나 급진적 신학에는 비판과 신중을 기하면서, 한국교회의 건전한 발전과 선교의 전진을 염두에 두는 것"이 장신대의 학풍이요 강조점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개교 7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에서, 장신대는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해 이렇게 고민하고 있었다 : “그러면 장로회신학대학은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보수신학은 합동측이 가져가고 진보주의는 기독교장로회가 가져갔다고 한다.
우리는 극단의 보수도 원치 않고, 진보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장신대 신학노선은 좌도 우도 아닌 중도 보수로 알려졌고, 무특징이 특징인 신학, 때로는 색깔이 분명치 않은 신학, 부정적인 시각에서는 “회색”신학교라는 평을 들어온 것이 사실이다. 장신대 신학은 보수신학의 입장에서 한 편으로는 근본주의와 차별화하고, 나아가 다른 한 편으로는 자유주의와 차별화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장신대 신학은 “정통-근본주의”와 “자유-급진주의” 양쪽을 다 지양하고 나온 신정통주의 신학노선인가? 예장총회는 1979년 이점에 대해 이종성 학장에게 다음과 같이 해명을 요구한 적이 있다: “…귀하가 신정통주의를 장로회신학대학의 신학노선으로 삼겠다는 뜻입니까?” 여기에 대한 이 학장의 대답은 이랬다: “아닙니다…본 대학의 신학노선과 방향은 본 교단의 노선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노선과 에큐메니칼 운동노선에 근거하여 성서적 복음주의 신학을 영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춘계는 이후 장신대 신학은 물론이고, 한국교회는 교파를 초월하는 “복음적이고 성서적 신학”을 영위해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성서적, 복음적” 신학노선이라고 했을 때, 성서적이라든지 복음적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불투명했기 때문에(사실 이러한 용어는 서구의 신정통주의자들이 선호하는 표현이다), 김이태는 장신대의 신학노선과 그 정체성을 “중심에 선 신학”으로 표현했다. 김이태는 그 누구보다, 장신대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과 그 신학노선에 대해 중요한 개념적 정리를 한 사람이다. 개교 80주년을 맞이하여 김이태는, 장신대 신학의 특성이 결코 진보나 보수의 중간에 끼어 어정쩡하고 무특성이 특성인 그런 중도신학이나 중간의 신학이 아니고, 진보와 보수를 다 부둥켜안고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복음 전통의 중심에 선 신학”이라고 정리했다: 중심의 신학에서 “중심은 산술적인 중간치가 아니다. 그것은 동양사상의 '중용(中庸)'(이를테면 원의 중심)이며, 기독교가 2천년 동안 가르쳐 온 진리의 대도(大道)이다. 장신대가 지향해야 할 신학의 길은 그러므로 길의 좌우나 앞뒤, 변두리에서는 신학이 아니라 바로 기독교회 전통의 한 복판에 서는 신학이다. 거기에는 항상 긴장이 있고, 불투명한 요소가 가시지 않고, 별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고, 좌우, 전후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면키 어렵다"고 보았다.
김이태가 말하는 중심에 서는 장신대 신학의 세가지 특징은 ①포괄적이며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②긴장 속에 서 있으며, ③선풍적이 아니라 점진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다. 성경은 인간의 책인 동시에 하나님의 책이다. 그래서 장신대의 신학은 초월과 내재의 긴장에 그 중심을 둔다고 했다. 김이태는 지금까지 장신대 신학의 약점도 지적했는데, 참으로 성경에 기초하여 복음의 중심에 선 신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수구주의”가 되어서는 안되고, 항상 새로워지는 “개혁신학”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김이태는 두 가지 보강책을 제시했다: 첫째는, “새롭게 대두되는 사회문제에 민첩하게 대처하는 신학”이어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새로운 사상과 학설에 과감하게 자신을 노출시키는 신학”을 말했다. 그러면서, 어떤 것에 “노출된다”는 것과 그것을 “통채로 삼킨다”는 것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키고, “새로운 사조에 헤엄쳐 들어가되 전통의 밧줄에 단단히 몸을 묶고 헤엄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갈라디아서 1장 9-10절을 인용하면서, 김이태는 장신대 신학의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인간의 지적 호기심에 만족을 줄 수 있을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고 그에게 영광이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데 있다”고 결론지었다. 여기서 우리는 100주년을 맞이하는 장신대의 신앙과 신학노선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그 교육의 정체성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려는 개혁교회 전통을 따라, 복음주의의 중심에선 신학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II
그렇다면 개혁교회 전통을 따르는 복음주의 중심에 선 성경관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장신대 신학노선의 성경관은 역사-비평적 방법을 받아들이고, 성경의 유오를 주장하는가? 이와 연관하여 평장신 전통의 보수신학의 성경관은 무엇이며, 그것은 오늘의 장신대 신학의 성경관과 단절되어 있는가, 연속성을 가지는가? 이러한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때, 100주년을 맞는 장신대는 한국 장로교회 현실에서 자기 신앙의 정체성 이해와 신학노선이 좀 더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한다. 현대 성서학에서 보수주의란 성경본문의 통일성과 거기에 기록된 사건의 역사성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입장인데 반해, 자유주의는 성경본문 상호간의 충돌(또는 모순점들)을 지적하고 그 기록된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과 정확성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박봉랑은 자유주의 신학이란, “종교개혁시대를 뒤따르는 신교 정통주의에 대한 반립(反立)으로, 슐라이에르마허를 조상으로, 릿츨, 트렐취, 하르낙의 신학전통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신학적 자유주의란, “기독교의 계시와 은총의 절대성을 부정 또는 상대화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요컨데 개혁주의 전통의 보수주의는 성경무오설을 말하고, 자유주의는 성서유오설을 주장한다.16세기 종교개혁자들에 있어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성령)으로 계시된 말씀으로서, 성경본문의 문자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는 분리되지 않고 한가지로 해석되었다. 성경의 본문이 특별히 지시하지 않는 한, 본문의 의미는 그 기록자가 사용한 언어의 문법과 그 역사적 상황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문법-역사적 방법”(the grammatical-historical method)이 보수주의 개혁신학 전통의 성서해석 방법이다.그러나 18세기의 서구 계몽주의가 세계사상계의 주류를 이루면서, 신학적 자유주의의 성서해석학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생겼다. 칸트(I.Kant, 1724-1804)는 계몽주의(die Aufklaerung; the Enlightenment)를, “인류가 그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했던 후견으로부터의 탈출”(the exodus of humanity from its self-imposed tutelage)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신앙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신적인 권위로부터 인권의 해방과 인간의 자율과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아래, 독일 신학자 제믈러(J.S.Semler, 1725-1791)는 “기록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지 않다”는 혁명적인 해석학적 명제를 발표했고, 구라파의 성서학자들은 성경의 내용을 사실여부에 비추어 비평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비평학자들은 16-17세기 깔뱅주의적 정통주의가 주장하는 보수적인 성경에 관한 “언어영감설”(Verbal inspiration)을 배격하였으며, “성령의 내적 조명”으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성의 합리적인 판단에 의해 역사내재적인 인과율에서 성경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성경도 인간이 기록한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의 종교문서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고대 종교문서들과 똑같은 해석학적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평적 성서연구 방법을 “역사-비평적 방법”(the historical-critical method)이라고 부른다. 역사 비평적 방법은 그 시행에 있어서 세 가지 조건을 전제한다: 첫째, 성경은 영감된 계시가 아니고,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초자연적이며 초월적인 성서해석학의 특권은 더 이상 인정할 수 없다. 둘째,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성격에 관해서는 우리 자신들의 현재 경험에서 얻은 유비에 의해 규명될 수 있고, 규명해야한다. 셋째는,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자연법칙의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기적들이나 하나님의 초월적 행동들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전제 위에 세워진 비평적 성서해석과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의 복음적 신앙과 신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처음부터 명약관화한 것이다. 현대 영국의 성서신학자 하워드 마샬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제들 위에서 수행된 성서연구는 하나님의 행동들에 관한 책인 성경을 진실하지 못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서 간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첫 출발부터 역사-비평적 방법은 성경 그 자체가 설명하는 것과는 다른 기독교에 관해 설명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단순히 성경의 부분들이 잘못될 수 있다는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잘못되어 있다는 전제가 그 방법론 속에 구조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비평적 방법을 수행하는 성서비평학은 “고등비평”(Higher criticism)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러한 성서비평학이 19세기에 구라파 대륙과 영국과 미국으로 번져나가면서,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 및 신학과 충돌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신정통주의가 신신학 또는 자유주의 신학으로 오해받는 이유도 신정통주의 성서해석이 역사비평적 방법 즉 고등비평을 성서해석에 예비지식으로 전제하는데서 기인한다. 어쨌든, 근본주의란 1900-1930년에 미국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저러한 고등비평을 전제로하는 자유주의(현대주의) 또는 신정통주의 사상의 침투에 대항하고 싸우기 위해 일어났던 신학적 운동이었다. 특히 그것은 성경의 계시와 언어영감을 부인하며, 성경의 오류를 선전하는 성서비평학, 즉 고등비평의 도전에 대한 응답이었다. 시간과 장소와 강도를 달리하면서, 이러한 충돌은 20세기 전반에 세계의 개혁교회와 장로교회 곳곳에서 신앙적 갈등과 신학적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때로는 교회가 분열하고, 신학교가 갈라서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었고, 비단 한국 장로교회와 장로회신학교에만 국한 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미국 장로교회와 프린스턴 신학교가 바로 이 문제 때문에 1929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측과 분열했는데, 이때 평장신에서도 이러한 세계적인 신학적 갈등과 성서비평학의 문제를 예의 주시하고, 자신의 신학과 신학노선을 분명히 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김재준이 평장신의 신학을 비난하면서 조선신학교 신학교육을 통해 신정통주의를 표방하고 성서유오설을 주장하며 가르쳤을 때, 당시 장로교 총회가 그의 입장을 왜 신신학이나 자유주의로 규정했는지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신정통주의가 한국 장로교에서 신신학 또는 자유주의로 오해받은 이유는 한마디로 역사비평적 방법을 성서해석에 예비지식으로 받아들이고 성경의 유오설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김재준은 자신이 속한 신학입장을 “자유 보수주의자들”(Liberal conservatives)이라고 부르고, 자신들의 신학노선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한국신학은 장로교파에 속한 개혁자적 신학을 기반으로하고, 온갖 형태의 현대신학을 소개하며 성서비판학, 특히 그 역사적 비판학을 강의하였고 세계교회, 즉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조하면서 한국교회의 정신적 자립 자주를 강화하는 방향을 당초부터 취해왔다”. 그는 평장신의 신학을 “극단적인 정통주의 또는 근본주의였다”고 매도하고, “…이 신학 양식을 표현하면 교회에 와서, 예수믿고, 천당가시오라는 세 마디로 요약된다”고 비판했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과 교단 분열에 관해서 장공은, 평장신 선교사들의 사상적 쇄국주의와 교권의 엄중한 감시아래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던 소수 학도들이 자유로 세계신학에 접촉하였는데(일본, 미국 등지에서 신학 수업), 해방이 되자 자유 분위기가 대세를 지배하게 되어, 자연히 신학적 논쟁이 격렬하게 폭발되었다고 설명했다. 이 신학적 논쟁의 성격과 그 추이에 대해 장공이 다음과 같이 정리한 것은 장신대의 신학노선을 가늠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 때의 한국교회의 신학논쟁은 정통주의 대 자유주의가 아니라 정통주의 대 신정통주의의 양태로 전개되었다. 세계교회는 이미 두 극단에서 새로운 종합에로 상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는 여전히 지양된 한 극단인 정통주의 신학 일색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세계신학의 현 단계의 주류인 신정통신학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대결하는 상대방이 그 전에 있던 자유주의 신학인줄로 오인하고 돈키호테식의 용기를 부렸던 것이다. 사실 그 상대가 자유주의 신학(소위 신신학)이었다면 멋진 승산도 가히 기약할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상대자가 이미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함께 이기고 올라선 신정통신학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학적 패배는 단시일내에 결정되고 만 것이었다. 역사적 상황안에서 신학은 보수와 자유를 함께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공은 신정통주의 성경관에 입각하여, 성경이 구원을 얻는 도리에서는 신앙과 행위에 불오함(Infallibility)을 믿으나, 과학적 역사적 문서로서는 무오(Inerrancy)하지 않고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김재준의 성서 유오설에 맞서서, 한국 장로교의 메이첸으로 알려진 박형룡은 평장신의 신학적 전통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성경무오설을 주장했다. 이렇게 한국 장로교회는 1930년대에 성경의 유오와 무오를 주장하는 성경관의 차이 때문에 신학노선에 균열이 생겼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찍이 1920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 교수회가 작성하여 발표한 7개 조항의 평양 “장로회신학교 신앙고백서(信經)”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었다. 앞서 지적한 대로 평장신의 교수진 역시 닥아오는 신학적 갈등과 신학의 정체성위기를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다.
평장신이 자신의 신학노선을 선언한 신경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1. 신구성경(新舊聖經)은 초자연적으로 하나님의 계시하신 바로 믿으며 이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대하여 유일무이한 확실한 준칙(準則)으로 받음.
2.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로 영원히 존재하시고 살아계신 진신(眞神) 하나님 한분을 믿음.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과 참 인성을 믿으며 또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고 완전히 무죄하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인속죄(代人贖罪)하심과 육체로 부활하사 승천하심과 우리를 위하사 대제사장이 되심과 크신 권능과 영광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친히 재림하실 것과 만국을 의로 심판하실 것과 그의 모든 원수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실 것과 마침내 그의 나라를 성부께 바칠 것을 믿음.
4. 성신의 절대적 신성과 인성과 또 창조와 섭리와 구원, 특히 신자의 중생과 성결과 영광 주장하심을 믿음.
5. 하나님 앞에서는 천하만민이 다 죄인인 것을 믿으며 끝까지 회개치 않는 경우에 이 죄의 대가로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 사망할 것을 믿음.
6.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은 자들은 성신의 능력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을 믿으며 또 이외에는 구원 얻을 길이 없는 줄로 믿음.
7. 의인과 불의한 자의 몸이 반드시 부활할 것을 믿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영생 얻을 것을 믿음.
평장신의 신앙고백서에는 개혁교회 전통의 “튤립”으로 대변되는 칼빈주의 교리와 정통-보수주의 신앙고백의 기본적 교리내용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당시 자유주의-진보주의(신정통주의) 신학 사조에 대응하려는 신학적 노선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무엇보다 성경관의 중요성에 유념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계시”라는 입장을 제일 먼저 강조하였고,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대속,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과 승천, 재림과 심판, 구원은 믿는자의 영생 얻음이라는 점들이 명시되었다. 이러한 평장신의 신학적 노선은 내용적으로는 근본주의의 5대 교리와 공유하는 바가 많으나, 근본주의의 특징 중의 특징인 소위 문자적인 “축자영감설”은 결코 주장하고 있지 않으며, 다른 신학입장에 대해서 적대적, 배타적,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근본주의 입장과는 차별화 하고 개혁교회전통에 선 복음주의 신학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평장신의 신앙과 그 신학의 성격은 또한 무엇보다 1918년 3월20일 창간되어 1940년 10월 25일 최종호(22권 5호)까지 약 22년간 계속되었던 교지(계간, 때로는 격월간 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을 통해 확인될 수 있다. 신학지남 창간호에서, 편집인 왕길지는 이렇게 신학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신학(神學)의 참 지남(指南)은 성경이어늘 어찌하여 이 기보(期報)의 명칭을신학지남이라 하느냐. 이 잡지는 성경과 같으냐. 결단코 아니라. 이 기보는성경(聖經)으로 진남(眞南)을 삼아 의지하여 매기에 특별히 우리 장로교회의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신학(神學)의 넓은 바다(廣海)에 향방을 지남(指南)하려는목적(目的)에 있나니라.”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평장신의 신앙과 신학노선이 어디까지나 “솔라 스크립투라”(오직 성경)에 정초하며, 그 신학은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아야한다는 복음주의의 확고한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 것은 100주년을 맞이하는 장신대 신학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평장신의 신학전통과 연대하는 매우 중요한 점이다. 장신대 100년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신학의 특징들은 그럼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학의 바른 길잡이는 다른 무엇이 아니고 성경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모든 신학적 지식은 성경에 기초하며 성경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성경의 권위, 즉 성경의 계시와 영감을 일차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신학은 바른 신학이 아니다.
둘째로, 신학은 “넓은 바다”와 같다는 인식이다. 일찍부터 평장신의 신학이나 그 전통을 이어오는 장신대 신학이 편협한 근본주의라는 비난이 있는데, 그러한 잘못된 시각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셋째는 넓은 바다와 같은 신학세계에서 목회자나 신학생들이 목적지 없이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식이 되어서는 결코 안되며, 성경에 의지하여 장로회 신학은 항해로를 바로 잡아주는 책임과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광활하고 명쾌한 개혁교회전통의 복음주의적 신학노선인가! 한철하는 신학지남에 나타나는 신학의 성격과 한국 장로교회 신앙의 특질을, “①신본주의적이요, ②복음주의적이요, ③지정의(知情意)의 균헝이 잡혀있고, 극히 실용적인 입장을 잃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지적 추상성에 빠져있지 않다.”고 평가했다. 정성구도, 신학지남에는 신학적 입장을 천명한 선언문은 없으나, 모든 논문들은 보수적이고, 정통주의적이며, 개혁주의적인 신앙노선을 표방했고, 한마디로 복음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보았다. 춘계는 그러나 “신학세계”에 나타나는 감리교 신학과 “신학지남”에 나타난 장로교 신학의 차이를 네 가지로 비교하면서, 그 중에 감리교 신학은 “자유적이고 새로운 신학이해를 시도하고 있으나, 신학지남은 과거의 신학사상과 성경의 교리를 풀이하는 데 치중”하고, 선교사들의 글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며, 변증적인 입장에서 서구신학의 소개에 그치는 정도라고 부정적인 평가했다.
또, 한국 장로교 신학의 흐름은 1912년 장로회 총회가 조직되면서부터,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채택, 사용하여 칼빈주의적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고 보면서, 신학지남 시대 장로회신학은 “피어보지 못한 신학의 꽃 망우리”라고 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비판도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장신대 100년의 신앙과 신학전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견해가 아닐까 생각된다. 춘계의 비판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가 지적하고 있는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장단점을 밝히면서 어떤 점에서 그것이 한국장로교 신앙과 신학에 누와 해를 끼쳤는지, 또는 칼빈주의적 특징이 우리에게 좋은 점 보다는 왜 나쁜 점이 많은지를 설명하고, 당시에 어떤 대안이 역사적으로 가능했는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본 필자의 견해로는 한국에서 감리교 신학의 역사적 발전과 견주어 볼 때, 장로교의 복음주의 신학은 단점보다 장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며, 당시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신학적 안목에서 볼 때, 신학지남의 성격은 고답적인 상아탑의 이론적 신학전문 학술잡지는 아니었다. 그것은 실용정신에 입각하여,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깊고 넓은 신학 정보와 함께 목회에 도움을 주는 설교의 실제(강대도형 등)와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성경공부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1934년 전까지 신학지남에는 개혁주의나 칼빈주의라는 용어조차 사용되지 않았다고 정성구는 지적했다. 한편, 홍치모는 초기 한국 장로교회 선교사들, 특히 평장신에서 교수로 활약한 마(포)삼열, 곽안련, 이눌서 등의 신앙과 신학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초기 선교사들의 신앙은 청교도적인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신학사상은 칼빈주의 근본주의 사상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신학사상이 저변에 깔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에 나타난 사상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막연한 복음주의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칼빈주의 신학사상이 한국교회 안에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930년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홍치모는 여기서 “막연한 복음주의”라고 했으나, 평장신의 신학노선은 위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결코 막연하지 않았고 개혁교회 전통의 분명한 복음주의였다.
김명혁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란 종교개혁의 복음운동이 합리주의와 사변주의, 국가교회의 구조들에 의해 그 생동력을 잃었을 때, 17세기 말 독일의 슈페너를 중심으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과 18세기 중엽 영국의 웨슬레를 중심한, “복음주의 각성운동”, 그리고 청교도 신앙 전통을 계승한 미국 장로교의 18세기 죠나단 에드워즈를 선두로한 제 1차 대각성운동, 그 뒤를 이어 19세기에 찰스 휘니의 제2차 대 각성운동 등이 합류하여 형성된 신앙부흥운동을 일컫는 용어이다. 19세기 중엽 미국 장로교회와 신학교들에서는 저러한 대각성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성경중심의 신앙을 사모하는 사경회의 강조와 함께 세계선교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여기서 소명을 받은 장로교 선교사들이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과 평장신의 신학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17세기 말부터 복음적인 생활을 강조하는 성경적인 신앙 각성운동들에 의해 형성되어 나온 기독교의 신앙과 신학의 한 형태로서, “십자가의 복음, 중생의 체험, 성경의 권위, 성경적 성결, 전도와 봉사 등을 강조하는 것”이 특성이다.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가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거듭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의 권위”이다.
오늘날 현대 성서학에서 복음주의란,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명제아래, “(성경)본문에 근거한 신앙”(a text-oriented faith)에 입각하여 성경의 권위(계시와 영감)를 주장하는 신학적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장로교 초기 선교사들을 신학적으로 폄하하여, 무자격, 편협, 극단의 보수, 근본주의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포삼열이 한국 선교 희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자신을 포함한 대다수의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을 천명하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 그들의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신학노선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선교에서 복음적 메시지를 전하는 데 어떤 불확실성은 전혀 없었다.대다수의 한국 선교회원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틀림없는 말씀이고 성령의 검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으며, 그는 죄 용서를 위해 그의 피를 쏟아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죽은 자들가운데서 살아나셨으며, 승천하셨고 다시 오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진사람들이었다 … 이러한 신앙에서 성경은 우리의 사역에서 가장 우선적인위치에 놓여졌다.
하나님의 틀림없는 말씀으로서 성경의 가르침들에 대해유일하고 가장 뛰어난 자리를 매김한 것은 한국을 복음화 하는 데 이 50년세월을 통해 두드러진 요소였다”. 한편 평장신 당시 일본의 신학교들은 1910년대에 이미 성경에 대한 고등비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감리교 신학자인 양주삼이 1916-7년에 감신대 교지 “신학세계”에 기고 연재한 “구신약전서총론”에서, 처음으로 “제약없이 고등비평을 소개할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평장신의 신학은 성서비평학을 배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양주삼은 그의 글에서 고등비평이란 단어조차 사용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고등비평에 대한 소개는 평장신의 성서주해 교수 어도만이 1921년 신학지남(제3권 4호)에 번역하여 소개한 “고등비평”이란 글이 최초의 것이다. 놀라운 것은 어도만이 소개한 이 글에서, 고등비평은 “원리적으로 적합한 것”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고등비평의 성격과 전제에 관해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서 어도만이 “원리적으로 적합하다”고 소개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아마도 하등비평 즉 본문비평과 구분하여, 고등비평은 성경본문에 내재하는 증거들을 찾아내어 성경문서의 형성사와 그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려는 관심과 목적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신학은 처음부터 막무가내로 이러한 성경문서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그 역사적 자료에 대한 가치평가에 관한 학문적인 생각에 대해 원리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변조은(John P. Brown)은 신학지남에 나타나는 초기 선교사들의 성서해석 입장이 맹목적으로 근본주의적 축자영감설을 추종하고 무조건으로 비평학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고 분석했다. 1930년대 이후 박형룡의 축자영감설과는 차별화하여, 평장신 초기 선교사들의 성서해석은 “순 복음주의적인 해석방법”이었고, 그들의 주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속주로 선포하는 데 있었으며, 그들에게 “성경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만민의 구주로 증명하는 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도만의 입장도 “성서비평을 하되 주의있게 하라는 것”으로 보았다.
III
우리는 여기서 한국 장로교 성서해석의 역사를 길게 논할 수 없다. 다만 장신대 100년의 신앙과 신학노선을 이해하기 위해서, 1930년대 이후 본격화된 한국 장로교내에서 성서유오설과 성경무오설의 대립과 갈등을 복음주의 성경관의 관점에서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점이 여기서 취급해야할 논점이다. 이 문제를 정리하는 데는 먼저 성경의 무오, 유오에 관해 정확한 개념 정리와 용어사용이 필요하다. 성경무오설 주장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신정통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유일무이한 법칙(준칙, 규범)이며 이 점에서 성경은 불오(Infallibility)하나, 역사 내재적인 지식에 관해서는 오류(Errancy)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와는 다르게, 정통주의(근본주의)나 복음주의는 구원에 관해서는 물론이고, 과학적, 지리적 역사적인 지식에 있어서도 성경은 무오(Inerrancy)하다고 주장한다. 한편 자유주의나 급진주의는 성경의 권위, 즉 영감과 계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불오 무오를 원리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한국 장로교 신학에서 기장의 초기 민중신학이나 종교다원주의 또는 감리교 신학의 급진적인 토착화 신학의 일부 성경관을 제외하고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적 자유주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신정통주의의 성경관이다. 신정통주의는 성경의 “불오(Infallibility)”는 믿는데, 성경의 “무오(Inerrancy)”는 인정하지 않는다. 신정통주의는 고등비평의 역사-비평적 방법을 성서해석의 예비지식으로 전제하되, 성경본문의 최종적 해석은 신학적인 것(“예수그리스도의 마음”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말하자면 영감은 말하지만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반대하고, 기록된 성경은 계시가 아니라 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경험한 인간들(성서 기자들)의 증언일 뿐이라는 것이다. 성육신을 주장하지만 동정녀 탄생은 부정하고, 하나님의 창조는 말하지만 창세기 1-11장의 기록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이 아닌 상징적(또는 설화적)인 이야기로 해석하며, 출애굽의 구속사는 주장하지만 홍해(갈대바다)의 기적은 부인하고, 여리고성의 함락도 실제사건이 아니고 믿음의 승리라고 설명하며, 요나서, 룻기, 에스더 이야기도 일종의 종교소설이며, 부활은 주장하나 육체적 부활은 부인하고, 그리스도가 위대한 일을 했다고 주장하나 초자연적 기적을 행했다는 것은 부정하기 때문에 신정통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고 가르치는 신정통주의가 한국 장로교회에서 자유주의 아류(신신학)로 인식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경의 무오, 유오설이 끝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성경의 권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는 두 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지는데, 곧 계시와 영감이다. 계시는 인간의 종교적 체험이나 인간의 사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셨고,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성령)이라는 뜻이다. 영감은 인간 기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할 때 잘못이나 오해가 없도록, 기록자의 사상과 말과 글을 성경의 참 저자이신 성령이 친히 간섭하시고 돌보셨다는 뜻이다(딤후 3:16; 벧후 1:21; 삼하 23:2 등). 이러한 관점에서, 성경은 백 퍼센트 하나님의 책인 동시에 백 퍼센트 인간의 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성경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책이기 때문이다.
김명룡은 한국 장로교가 그동안 “신정통주의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것으로 가르쳐 온 것은 신학적 무지 내지는 근본주의적인 극단적 보수신학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학적 왜곡”이라고 했는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나 성경관 문제에 있어서는 역시 어폐가있는 말이다. 또 김명룡이, “성경내의 모순, 착오, 불일치, 오류들이 밝혀지면서 17C의 옛 정통주의 신학의 지주였던 성경의 축자영감설은 붕괴되었고,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이(미국에서는 고등비평학이라고 많이 언급됨) 성경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도구로 신학계에서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 것도 일방적인 주장이며 지나친 과장이다. 20세기에 세계 개혁교회와 장로교의 신학교에서 주도적인 성서해석 방법론이 된 고등비평은 전통적인 교회의 신앙을 파괴하는 성격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 한국의 상황에서 이점은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총회에 제출한 “51명의 진정서”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그 당시 신학생들은 “우리가 유시로부터 믿어오던 신앙과 성경관이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하면서, “저들(조선신학교에서 성서비평학을 강의하는 교수들)은 성경의 고등비평이나 자유주의신학은 결코 신앙을 파괴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나 사실에 있어 파괴당하고 있는데야 어찌합니까?"라고 호소했다.
최근 미국 장로교의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구약교수 쿠트는 미국 장로교회 목사 오어드(D.R.Ord)와의 공저 "성경은 사실인가?"를 통해 고등비평의 신앙파괴 문제를 “산타클로스 이야기”에 비유했다: 유아기에는 산타 할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넣어 준다고 해도 믿었지만, 초등학교에만 들어가도 선물을 주는 것은 부모나 친척들이라는 것을 자연히 이해하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이제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지 말고 성서 비평학이 가르쳐 준 대로 솔직하게 교인들이나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초자연 적인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출애굽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고 팔레스틴에서 다윗왕의 종주권을 강화하고 팔레스틴 민족들에게 공동의 적인 애굽의 압제를 함께 벗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주기 위해 다윗왕궁의 서기관들이 만든 일종의 서사시적 건국설화라는 것이다. 복음서들은 역사적 예수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진술이 아니라고 이 책에서는 주장한다.
성경의 영감은 무오성(Inerrancy)과는 결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성경은 “경건한 허구”(Pious fiction)일까? 세계 성서학계는 아직도 역사-비평적 방법이 참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도구”인가에 관해 계속 고민하고 있으며, 새로운 대안들을 모색하고 있다. 최근 자서전을 출판한 빌리 그래함도 성서비평학의 문제로 심각히 고민하였으며, 결국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믿음의 결단으로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렸다고 고백하였다. 예수는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기독론의 명제에서, 우리는 예수가 백퍼센트 참사람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고, 죄가 있다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이고, 성경은 그의 계시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또한 백퍼센트 인간의 책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고 선험적으로 규정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은 어폐가 있다(마 22:29; 막 12:27; 벧후 1:16 등 참조).
성경 문자의 우상화를 방지하고, 가현설적인 성경이해를 경계하기 위해서 성경의 역사적 성격과 그 형성사를 이해하는 것은 당연하나, 성경의 저자가 인간이기 때문에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성경의 저자는 인간이 될 수 없고, 하나님(성령)이라고 하는 것이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입장이다. 박형룡이 바르게 말한 대로,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소위 성경의 오류들은 난관들이요 증명된 오류들이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노선의 성경관에서는 성경에 “모순”(contradiction)이나 “오류”(error)가 있다고 말하지 않고, 성경에 “난제”(Bible difficulties; Hard sayings)가 있다고 말한다. 어떠한 첨단 과학이나 학문 세계에도 여전히 난제는 산적해 있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과학적, 지리적, 연대기적인 “오류”도 오류라고 규정하지 않고,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 문화적인 시공의 간격에서 당연히 기대되는 지식정도나 관점의 “차이”(differences)로 인식한다. 그것은 오늘 21세기 우리의 이성적 판단과 과학적, 역사적 지식도 절대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며, 성경의 오류를 최종적으로 판정할 만큼 만고불변의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결코 그 장점들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한 아류로서 고등비평의 상대적인 지식을 성경본문의 명백한 진술보다 앞세우며 성경의 오류를 주장하기 때문이고, 그것도 기록자의 실수나 본문 전승상의 있을수 있는 착오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사실 역사성(historicity) 자체를 축소(reductionism)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IV
신정통주의를 대표하는 바르트의 성경관에서 결국 성경은 계시와 구별되며, 성경은 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증언”이고, “성경은 단지 계시에 대한 인간적인 말일 뿐이다”. 이 성경의 인간적인 말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 말씀을 통해 인간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성경은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영감은 “계시의 행위”지만, 그것은 성서의 인간적 증인들과 그 증언을 듣는 현재 우리 자신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의 전체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 때에도 “성서적 증인들의 인간적인 불완전성을 인정해야한다”고 바르트는 주장했다. 이것은 바르트가 종교개혁자들의 성경관을 20세기에 부활시킨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자들과 종교개혁 전통의 성경관을 수정한 것이며,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언사(어)영감설(Wortinspiration)”에서 소위“사건(또는, 실제)영감설(Realinspiration)”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박봉랑도 이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고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말씀의 형식과 계시 자체 사이에 문자적인 동일이 있을 수가 없다. 성서와 설교 그 자체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 즉 계시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이러한 신정통주의 신학의 성경관은 성경 권위의 약화를 초래했고, 성경의 역사적, 과학적, 문학적 오류(Errancy)를 주장하게 했다. 결국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이 아니라 폭죽임이 드러났다. 박형룡도 신정통주의의 장점들과 자유주의와 구분되는 그 성격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계시와 영감을 수정하고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하는 신정통주의의 성경관을 “괴상한 성경관”이라고 했다.어쨌든 성경의 친필원본(Autograph)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현실에서, 오늘날 사본상의 증거만 가지고 본문의 의미파악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단어의 일점 일획, 토씨까지 영감되었다고 주장하는 소위 문자적-기계적 “축자영감설”은 성경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성립될 수 없을 뿐아니라, 복음주의가 말하는 성경관이 아니다.
개혁자 쟝 깔뱅도 기계적이나 축자적 영감설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사본이나 본문 전승과정에서의 필사오류는 제한된 범위에서 지적하였으나, 오늘날 자유주의나 신정통주의가 전제하는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성경의 오류를 말한 적이 없다. 깔뱅은 그가 가지고 있는 성경본문이 본래 계시된 정확한 내용을 보여준다고 믿었고, 성경의 계시내용에 “진정한 오류”를 인정하지 않았다. “성경은 거짓말하실 수 없는 그 분이 말씀하셨음으로(딛 1:2), 우리는 그 말씀의 결국이 확실한 것으로 알고 그 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입맞추어야 한다.”고 깔뱅은 말했다. 성서해석사에서 깔뱅은 역사-비평적 주석의 원조(元祖)가 아니라, “현대 역사-문법적 주석의 창시자”(founder of modern historical-grammatical exegesis)로 평가받고 있다. 춘계도 “…칼빈은 틀림없이 성서기록의 영감설과 성서의 무오성을 강조한 것 같다”.고 했다.
마삼락은 일찌기 1966년 51명의 세계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참석한 “성서권위에 대한 보스톤 회의”에 다녀와서 성경무오성과 축자영감설에 관해 중요한 보고를 했다: 이 회의에서 성경의 “무제한적인 무오설교리”에 대해서는 일치를 보지 못했고, “성경은 성령에 의해서 받은 거룩한 책이며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다”라는 성명서를 채택했으나, 여기서 “축자적으로 영감을 받았다”는 말은 “받아쓰기”를 의미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고리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성경의 역사, 연대기, 문자적 해석의 어려움과 관련된 무오성(Inerrancy)의 개념과 난해구절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으며, 성경무오성이 곧 성경적 교리라는 데에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고 전했다.축자영감(Verbal Inspiration)의 “축자”(逐字)는 한국어 번역의 오류이며(문자적-기계적 의미에서 축자영감이라고 말하려면, “verbatim inspiration"이라고 해야 한다), “verbal”은 언사적(言辭的), 또는 언어적(言語的)이라고 고쳐 번역해야 한다. 이 때 언사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하실 때 인간 기록자가 실수하지 않도록 그의 생각과 함께 그가 사용하는 언어도 돌보셨다는 뜻이다.
또, 인간 기자를 기계적인 도구로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인격과 능력을 사용하셨다는 점에서 유기적이며, 부분적이거나 부족하게 영감하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충족하게 하셨다는 것이 개혁교회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이다; 그것은 언사적-유기적-완전 영감설(Verbal-Organic-Plenary inspiration)이라고 정리해 볼 수 있다. 박형룡은 일찌기 정통주의는 복음주의와 같은 의미로 바꾸어 쓸 수 있다고 하면서, 정통주의는 “신구약 성경을 천계(天啓)와 영감(靈感)으로 말미암아 온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고등한 초자연적(超自然的) 성경관으로 출발한다”고 그의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의 유오를 주장하고 신학사상의 자유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1920년대에 이미 카나다 장로교 선교사 서고도의 영향을 받아 조희엽 목사는,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큰 잘못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문학적 오류는 물론, 다수의 역사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고 발언하여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1934년 제23회 총회에서 모세오경 저작문제와 바울서신 해석 문제가 비화되었고, 고등비평의 영향아래 쓰여진 아빙돈 단권 주석이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 보수적인 장로교 총회와 신학에 태도의 변화가 생겨났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근본주의 입장의 등장”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한철하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보수신앙 전통이 1930년대에 와서는 그 성격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보수주의가 내용적 신앙적 보수주의에서 태도상의 보수주의로 변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에 미국에서 벌어졌던 보수신학과 자유신학의 싸움의 여파가 한국까지 파급되어 온 데 기인한다”.같은 개혁교회 전통의 정통주의 보수신학을 계승 발전시키면서도, 한국 장로교회의 복음주의는 성서 비평학을 소개하고 성서의 오류를 주장하는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에 대해 염려하면서도 인내와 관용과 대화의 자세로 대안을 제시하는 입장을 취한데 반해, 근본주의는 그 상대를 적대시하고, 백안시하며, 전투적이며 배타적이고 분리적으로 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예컨대, 1930년대 이후 박형룡의 태도에 비하면, 남궁혁의 입장은 복음주의 노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서 유오설을 끝까지 주장하여 자유주의 신신학의 대변자로 알려진 김재준이나, 성경무오설로 끝까지 전투적으로 맞서서 한국의 메이첸이란 이름을 얻은 박형룡이나, 명분은 성경관을 내세운 진리싸움이었으나, 사실은 자기의(自己義)를 위한 다툼이었다. 그래서 김양선은, “만일 김재준교수가 계속적으로 보수주의 신학을 강렬히 비판하지 않았다면 금일과 같은 장로교회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비평학자 자신들도 이 당시 상황에 대해, “영감설과 무오설에 저항하고 충돌과 분열을 야기시켰으나 그 귀중한 댓가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학문적 연구의 개척을 위한 거점도 확고히 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평장신의 신학노선과 그 성경관은 성경무오설을 분명히 하는 입장이었고, 성경유오설을 경계하고 고등비평의 방법론을 섣불리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결코 비평학을 백안시하거나 분리주의적인 전투를 하는 근본주의 와는 구별되는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입장을 지켜나갔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평장신의 2대 교장이었던 라부열이다. 라부열은 이렇게 말한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이 불착무오(不錯無誤)하거니와, 그 범위가 우주와 같이 광막하야 그 불착무오한 여부를 오인(우리)의 천근(淺近)한 식견으로는 요해(了解)키 어려울지니 망원경을 발명하기 전에 먼 하늘에 있는 성구(星球)를 발견치 못하였나니, 이는 성구가 없었던 것이 아니오 천문학자의 육안력이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로다. 그런 고로, 과학을 선히 연구하는 자는 물리가 오묘함으로 그 연구함을 쉬지 아니하나니, 성경을 연구하는 오인도 오묘한 난제를 당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인정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나의 연구력이 박약함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니라”.
여기서 라부열은 복음주의의 성서 해석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서, 그의 성경관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성경이 불착무오(不錯無誤)하다 함은 금일의 성경을 지칭함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와 사도가 신의 지도를 받아 첫 번 저술한 원본을 가르킴이라. 옛적에 인쇄법이 발명되지 못하여 다만 각 사람의 수필(手筆)로 등사하야 수 천년 동안 유전(流傳)하였으니, 등사자가 아무리 조심하였다 할지라도, 다소간 오서(誤書) 또는 낙자(落字)가 없지 못할지라. 열왕기와 역대기를 참고하면, 어떤 군왕의 연대가 피차 부동(不同)하니 이는 히브리 숫자가 자형(字形)은 비슷하나 지수(指數)는 크게 다른 고로 등사인이 오서하기 용이하였음이라. 이로 볼지라도 금일의 성경이 오서가 없다고 못할지니, 그 해석이 어찌 용이하리오. 그러나 금일의 성경이 착오처(錯誤處)가 다대(多大)한 것은 아니니, 그 보존된 각 사람의 사본을 참조함으로 원본 성경이 어떠함을 넉넉히 참작할지니 금일 성경이 원본과 크게 다르다고 함은 아니로다”. 나부열 역시, 무제한의 “축자영감설”을 고집하지 않으면서, 성경의 원본에 근거한 무오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개혁신학 전통의 성경관과 동질성을 나타내는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이다. 평장신의 복음주의 성경관이 오늘의 장신대 성경관으로 연결되는 증거를 장신대 교수였던 김규당의 성경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평장신 33회(1938년) 졸업생인 김규당은 그의 성경관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성서는 영감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과, 정확한 사상전달은 정확한 문자로써야 달성된다는 사실과 성서의 내용이 매우 중요함에 비추어 성서에 잘못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V
장신대는 그러나 1964년부터 호주 장로교 선교사 변조은(John P. Brown)이 성서비평학을 조심스럽게 소개했으며, 1966년 미 남장로교 선교사 김기수(Keith R. Crim)가 요나서를 상징으로 해석해야한다고 가르치면서 총회에까지 물의를 일으켰다. 1972년부터 장신대 강단에 선 한국계 미국인 남장로교 선교사인 문희석(Cyrus H.S. Moon)은 성서 비평학적인 입장에서 소위 “성서학적인 성서관”을 확립하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강의와 저술 및 출판작업을 진행했다. 여기에 대해 김정준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 1935년부터 우리 한국장로교 안에 있던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과 기계적 축자영감설… 미국 메첸, 워필드, 하지 계통의 보수주의 신학만이 성서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성서주의가 장로교회 신학교수에 의하여 무너지고 만 것이다.…문희석 박사는 예장 통합측 신학교수로서 세 번째 이러한 성서 비평학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이미 김기수란 이름을 가진 K. R. Crim 박사와, 같은 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친 변조은이란 이름을 가진 J. P. Brown 목사, 두 선교사가 있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만수의 성급한 판단과는 다르게, 총회(예장 통합)는 1979년 “신학대학 교수 강의 및 저서내용 사건”을 문제 삼았고, 그 해명을 받았다. 이것은 장로회 통합교단과 장신대가 성서비평학과 성서유오설을 주장하는 신정통주의 신학을 신학노선으로 공식화하거나 무제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지를 거듭 천명한 것이다. 이미 1973년 신학춘추 “사설”에서는 “장로회 신학대학의 신학노선”을 비교적 자세히 밝혀둔 바 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역사적으로 장신대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가장 중요시하면서 미국장로교회의 신학노선을 따르려고 애써 왔다는 것과, 총회가 1922년에 채택한 12신조와 1968년에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주축이 되어, 장신대의 신학적 입장은 “보수주의 정통주의”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때로는 교수들 가운데 이러한 입장에 부합되지 않는 말을 하는 이가 있기도 하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본 대학의 신학노선은 성서에 기초를 두고 칼빈의 신학사상을 길잡이로한 복음적 신학의 노선을 걷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한편, 장신대 교수회에서도 1980년대에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신학의 노선을 분명히 할 필요를 느끼고 “장로회신학대학 신학 성명”을 발표했는데 그 서문에서는, “우리는 여기에서 신학의 전제, 개혁주의 신학 전통과 에큐메니칼 신학, 신학과 교회, 신학의 선교적 기능과 사회적 기능, 신학의 자리의 방향, 신학의 한계와 신학의 대화적 측면에 대하여 7가지 명제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는 장신대의 신학 교육을 가늠하며, 교회와 사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결정한다”라고 밝혔다. 그 7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우리의 신학은 복음적이며 성경적이다.
2. 우리의 신학은 개혁주의적이며 에큐메니칼하다.
3. 우리의 신학은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에 봉사한다.
4. 우리의 신학은 선교적인 기능과 역사적, 사회적 참여의 기능을 수행한다.
5. 우리의 신학의 장은 한국이요, 아세아요, 세계이다.
6. 우리의 신학은 기술사회의 문제들(현대 과학주의와 현대 문명의 문제들)에 응답해야 한다.
7. 우리의 신학은 대화적이다.
각 명제에 따라나오는 해설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는 없고, 제1 명제의 해설에서 오늘의 장신대의 성경관과 그 신학노선을 읽을 수 있다:
“성경안에는 중심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복음이다. 부활의 빛과 성령강림의 빛에서 본 예수님의 말씀들과 행동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및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한 사도적 선포가 복음의 진수이다. 성령에 의하여 영감된 성경의 진리들은 이 복음에 입각해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경우에 따라서 성경비평학에서 얻은 통찰로써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지닌 신학적 맥락들을 존중하면서 성경내에 계시된 진리들을 신학의 규범으로 삼이야 한다. 이 계시된 진리들은 하나의 인격적 진리요 말씀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의미가 완전해 진다.”
이러한 장신대의 신학노선은 일견 신정통주의 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근간은 평장신의 신앙고백 전통과 기독교 역사의 모든 정당한 신조(신앙고백)들과 연대하는 것이며, 특히 그 복음에 대한 이해나 성경관과 그 해석방법론에서 깔뱅이 이룩한 개혁교회 신앙과 신학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는 복음주의 신학입장임이 틀림없다. 장신대 신학은 성경의 유오를 주장하지 않는다. 장신대 신학은 성서비평학을 “결정적인 도구”로 환영하여 받아들이지 않지만, 결코 백안시하거나 적대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 각자의 신앙양심(또는 믿음의 분량)과 신학적 책임아래 그 비평학에서 얻은 통찰을 유익하게 사용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바울 사도가 기록한 대로,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고전 6:12)는 말씀과 상통하는 복음안에서 자유하는 입장이다(요 8:31-32).
평장신의 조직신학교수 이눌서의 후계자였던 구례인은 동양성현의 지혜를 인용하는 자리에서, 생명력 있는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을 이렇게 밝혔다: “人皆好之必察焉 人皆惡之 必察焉 擇其善而居”(사람들이 다 좋다고 해도 반드시 살펴보고 사람들이 다 나쁘다 해도 반드시 살펴보아 그 좋은 것을 택하여 거할지니라).이러한 맥락에서 박수암은 성서 비평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밝혔다: “역사비평적 해석은 그것이 성경의 영감성과 하나님의 객관적인 행위를 부인하고 성경도 다른 모든 문서와 마찬가지로 인간 이성의 보편적인 법칙으로만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는 점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성경 본문에 대한 세심한 연구는 “성경의 다양성을 파악하게 하여 더 넓은 성경의 통일성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장점이 있는데, 신중히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21세기를 향한 한국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노선을 위해 박수암은 결론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부각시켰다. 하나는 역사적 개신교는 성경비평에 관여하되 저자의 의미와 의도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 하며, 그렇게 반(反)비평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개신교는 성경본문과 역사와 문헌들을 마구잡이로 재구성하는 자유주의적 비평주의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지철도 성서해석에 있어서 역사비평적인 접근을 결코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물음이 없는 본문 해석은 “가현설”의 위험성에 빠지게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지철은 “성경 본문의 역사적 자리를 찾아나가는 방법론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문이 전달해 주려는 신앙의 확실성을 확보해 나가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 있어서 성종현도 같은 입장을 취한다. 역사적이고 비판적인 성서해석 방법 사용은 “필연적”이지만, “역사적-비판적 방법은 최종적 단계에서 반드시 성서신학적인 해석으로 끝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종현의 입장에서는 본문의 “역사적 사실 규명 여부”와 “신앙의 확실성 확보” 또는 “성서신학적인 해석” 사이의 괴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실 개혁교회전통의 복음주의 신학에서 성경본문의 역사적 성격규명은 “역사-비평적 방법”이 아니라 “문법-역사적 방법”으로 수행되는 것이다.
VI
일찍이 평장신이 고등비평을 “원리적으로 적합한 것”이라고 소개한 바는 있으나,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하는 곳마다 고등비평을 앞세워 교회의 성경적-복음적 신앙이 파괴되는 상황을 보고, 이눌서는 고등비평을 사용하는 근대주의(자유주의)는 배도(背道)하는 것이라고 따끔한 일침을 가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오늘 장신대 신학과 신학노선이 고등비평을 제한 없이 사용하는 자유주의나 그 아류로서 성서비평을 전제하는 신정통주의의 성경오류 주장을 경계하면서, 성경의 불오성(Infallibility)과 무오성(Inerrancy)을 어디까지 견지하고 있는가가 관심의 초점이다. 오늘 장신대 성서학의 입장은 신중히 성서비평학(고등비평)을 비평하면서도, “경우에 따라” 비평학적인 통찰을 적절히 사용하고자 하는 것은 개혁교회 전통의 살아있는 복음주의 신학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총신대는 개혁교회 정통신학의 “보수적 태도”를 가져갔고, 장신대는 그 “보수적 내용”을 중요시하며 지금까지 그 신학노선을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한숭홍 역시 현 시점에서 장신대 신학노선은 “개혁 전통에 선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정리하면서, 총신대의 “칼빈주의에 역점을 둔 근본주의 신학”, 또는 고신의 “근대 화란 개혁주의에 기초한 근본주의 신학”, 기장의 “자유주의적 신정통주의 신학-진보주의 신학-신정통주의적 문화신학-민중신학”의 입장들과 구별한 것은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장신대를 창학한 마(포)삼열의 아들이며 본교 교수와 협동학장이었던 마삼락이 본 교단과 본교의 신앙과 신학노선을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로 정리한 강연 내용을 인용하면서, 이 장을 마감하려고 한다. 마삼락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이 일단락된 직후인 1960년 본 교단(예장 통합) 전국 교역자 여름 수양회에서 “복음주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 역사적 면에서 고찰함”이란 매우 중요한 강연을 했는데, 여기서 마삼락은 복음주의를 규정하는 데는 역사적 전통이나 신조(신앙고백)만으로는 부족하고, “성경을 그대로 믿고 생활하는 것”이 그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즉, “복음주의는 신조대로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라는 명쾌한 설명이다. 마삼락의 결론을 들어보자: “전국에 계시는 교역자 여러분, 1920년에 제정한 평양신학교의 신앙고백서를 시인하고 믿습니까? 저는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믿는 것만으로는 나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음주의자가 되도록 만들어지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1846년에 복음주의 동맹의 고백을 믿습니까? … 1648년에 제정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믿습니까? 여러분도 장로교인이고 저도 장로교인이므로 이 신조를 믿습니다. 그러나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복음주의 신앙을 소유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복음주의적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권위가 좋은 신조에 있는 것이 아니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있는 것입니다.”마삼락은 마틴 루터의 고백과 같이 “내가 여기 서 있어서 다른 도리가 없사오니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설 때”에만 온전한 복음주의 신앙과 신학이 가능함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시편 19편9-10절을 인용하면서 그의 강연을 마쳤는데, 즉 “정금보다 꿀보다 꿀송이 보다 전통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복음주의 신앙을 소유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복음주의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는 오늘 장신대 복음주의 신앙의 본질과 신학노선에 그대로 직결되는 것이다(벧전 3:15 참조). 깔뱅의 제네바 아카데미의 신앙과 신학전통을 이어가는 “경건과 학문”이라는 학훈은 그럼으로 장신대의 신앙과 신학노선이 오직 성경에 기초하여 우리의 신앙과 학문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일체양면이라는 복음주의 신앙과 신학의 특징을 표명한 것이다.
VII
장신대 교수회는 건학 2세기를 맞이하여 1920년 평양 본교 교수회가 발표한 “본교의 목적 과 신경”, 1985년 본교 교수회가 채택한 “장로회신학대학 신학성명”과 연대하면서 백년 역사상 세 번째로 금년(2002년)에 본교의 신앙과 신학 교육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기본문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이 문서의 내용을 분석하고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 본질적인 특징을 말하자면, 이번 문건의 의의는 장신대가 100년 역사를 이어 온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 신앙과 신학노선의 교육의지를 21세기를 내어다 보면서 다시 한 번 새롭게 다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 신학교육성명을 위한 기초문서에서 첫 문장이 “성경에 근거한 신학교육을 위하여”로 시작하여 본교의 교육이념과 교육목표와 교육목표를 “성경 중심 사상”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개혁교회 신앙과 복음주의 신학의 뿌리와 정체성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장신대는 그럼으로 그 역사를 통해서 지금까지 한번도 “신정통주의”를 그 신앙의 중심이나 신학노선으로 발표하거나 내세운 적이 없다. 교수 개인에 따라, 신정통주의나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 점이 있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본교단 총회의 직영신학교로서, 장신대의 신앙과 신학노선은 개혁교회 전통의 복음주의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은 “오직 성경”이 그 기초가 되어 “성경은 영감되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성경관을 가지고, 성경중심의 설교, 성경중심의 목회, 성경중심의 신학교육을 하는 것이 그 장점이며 특징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점은 본 교단 총회헌법개정위원회가 지난 1999년에 “21세기 한국장로교의 신앙과 신학의 방향”을 출판하고, 이 문건에 근거하여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제1편 교리, 제6부에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앙고백서”가 신설된 것이다(이것은 마치 “양두구육”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기존의 복음주의 신앙이나 신학노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이 문서를 기초한 위원장 이형기는 최근 본 필자에게 직접 자신의 성경관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성경이 오늘날 몇 퍼센트나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성서신학하는 사람은 다 아는 대로 신정통주의를 넘어서는 자유주의 신학의 입장이다. 그래서 본 필자는 이전에 이형기 박사의 신학적 입장은 그렇지 않았는데(이형기는 한국복음주의 신학회 회원이며, 김명혁, 손봉호, 이종윤 등과 함께 그 기관지 “성경과 신학”의 편집위원이었다)라고 물었고, 그 대답은 “나는 변했다”는 것이었다..이형기의 신학적 변신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가 앞에서 언급한 총회 문건에 실린 “복음과 성경”이란 글이다. 이글의 주장과 내용이 장신대 신학교육성명을 위한 기초문서에도 들어와서 갈등과 긴장을 조성했으며, 결과적으로는 그 자유주의 성향이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어느 정도 조율되었다.
이형기의 자유주의 성향의 성경관은 소위 “에큐메니칼 성경관”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 같다. 사실 에큐메니칼 성경관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나, 그 근거는 WCC가 1980년 "신앙과 직제" 문건 제 99번으로 표시된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성경의 권위와 해석”이라는 소책자(영문)를 출판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자의 머리말에서 루카스 휘셔는 “분명히 이 보고서들 속에서 인식할 수 있는 의견수렴들은 아직도 하나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그 실험적 성격과 한계를 밝히고 있다. 이 소책자는 1996년 한국장로교출판사에서 이형기역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서 이 에큐메니칼 문건을 다룰 수는 없겠으나, 그 내용의 심각한 문제점은,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놀랍게도 로마 천주교 신학자들이 이 문건의 작성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문건에서 성경관의 문제는 복음전승(소위 대문자 Tradition)에 역사적으로 우선권과 권위를 주고 저러한 역사적인 복음전승(즉 사도적 복음과 신앙)과 기록된 성경(소문자 traditions)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여, 그 어느 하나도 독자적인 권위를 주장할 수 없다고 해석하는 데 있다.
이것은 “오직 성경”이라는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학의 기초를 다시 흔드는 것이고, 로마천주교의 “사도적 전승”(성전)에 입각한 교도권과의 일종의 타협에 불과한 것이다. 이형기는 복음과 성경 이해에서 이러한 이분법적인 복음전승의 역사적 우선권 주장과 자유주의 성서비평학의 전제들과 방법을 수용함으로써 개혁교회전통의 복음주의 성경관에서 매우 멀리 이탈된 현상을 보여준다. WCC를 중심하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자유주의 성향(그리고 현재 더욱 심화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성향)과 복음주의 교단들과 유리된 비에큐메니칼 성향은 어제 오늘 지적된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근래에는 WCC 정회원 교단이 아닌 로마 천주교가 신앙과 직제위원회에 다수의 위원들을 보내어 공식적으로 신앙과 직제에 관한 문서작성에 깊이 개입하고 있는 현실은 매우 우려해야할 상황이며 시정되어야할 사안이다(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상호주의 원칙에서 WCC 회원교단 대표들이 공식적으로 로마 교황청의 신앙과 직제에 관한 문서작성에 위원 자격으로 함께 참여해야 하는데, 본 필자가 알기로는 그렇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은 불가능한 현실이다).
현재 WCC 에큐메니칼 운동이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개혁교회 전통의 소위 보수주의 교단들을 활발히 참여하게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 한, WCC 에큐메니칼 운동은 반쪽 에큐메니칼이며, WCC가 나누어 주는 문건들을 수령하여 그것을 앵무새처럼 노래하면서, 그것을 반대하거나 문제점을 지적하면 성서문자주의자나 수구적인 무지몽매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적대시하는 것은 또 하나의 부끄럽고 불행한 “에큐메니칼 근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 편, 김명용은 금년 제 1회 춘계 학술강좌를 통해 장신대 신학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다소 색다른 견해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이종성에 의해 장신대 신학 속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통전적 신학은 21c를 맞이하면서 장신대 신학의 거대한 줄기로 자라고 있다. 장신대 신학은 오순절 성령운동의 신학도, 복음주의 신학도,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학도 그 어떤 신학도 배척하지 않는 신학이다. 장신대의 신학은 폭넓게 전 세계의 신학을 연구하면서 예수그리스도와 성서의 빛에 따라 온전한 신학을 형성하고자 하는 통전적 신학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 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김명용이 개인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장신대 신학의 "거대한 줄기"로서 “통전적 신학”이 무엇인가? 에 관해서는 앞으로 본 교단총회의 동의와 장신대 교수들의 신학적 공감대가 뒷받침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강연 요점이 과장되어 있으며 또한 불충분한 설명 때문에, 심도 있는 논의가 계속되어야 할 문제이다. 다만 이 시점에서 김명용이 말하는 장신대의 통전적 신학이 춘계에 의해서 역사적으로 뿌리 내린 것이라면, 춘계 이전의 장신대의 신학적 전통은 잘못 내려진 뿌리이거나 뿌리가 없는 신학이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동안 춘계는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애매모호하게, “열린 보수”니 ”성서적, 복음적 신학“으로 말해 왔으며, 장신대 신학노선은 결코 ”신정통주의“가 아니라고 본 교단 총회 석상에서 공언하였는데, 김명용이 이 점에서 춘계의 신학과 신정통주의 입장에 관련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춘계의 신학은 ”통전적 신학“이나 어떤 다른 신학이기 보다는 신정통주의라는 것이 한국장로교회 신학계에서 일찍부터 거론되고 있었으며, 작금에 춘계는 성경관에 관한 자신의 글에서, 바르트 중심의 신정통주의 성경관이 한국교회 현실에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옹호함으로써 춘계의 신학적 입장은 사실상 본인에 의해 확인 된 셈이다.
고신대 교수 최덕성에 의하면, 김명용은 이미 장신대의 신학적 위치를 ”진보적 정통주의 신학“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여기서 진보적 정통주의란 신정통주의를 우회적으로 표한한 것이 아닌가? 최덕성은 그래서 현 장신대의 신학에 관해, ”...장신대학은 자유주의와 바르트주의, 곧 진보적 정통주의만을 강조하지 한국 장로교회가 오래 전부터 수용해온 역사적 개혁주의 신학, 곧 칼빈주의는 강조하지 않는다고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최덕성은 ”장신대학 신학의 근간을 이루는 바르트주의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을 허용하지 않는 배타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배타주의적 바르트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는 장신대 신학이 어떻게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으로 치닫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수용하고 그것에 주동적으로 참여하는 교단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라고 했다. 최덕성의 장신대 신학 평가는 일리는 있으나 대체로 ”들은 소문으로 그렇다고 한다“는 식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신뢰도가 떨어진다. 어쨌든, 위에서 검토한 최근 일련의 장신대 신학적 정체성(신앙과 신학노선)에 관한 새로운 논의들은 계속 우리의 신학적 관심과 토론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결코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연결되어서는 안되고), 장신대의 100년 전통의 정체성으로 파악되는 개혁교회전통의 신앙과 복음주의 신학의 입장에서 조율되어야하고 조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출처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글쓴이 : 하늘형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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