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 · 65
1. 두 종류의 지식: 하나님과 인간 · 67
2. 하나님의 지식을 배우는 목적 · 71
3. 생래적 지식 · 79
4. 계시 · 84
1) 자연계시 · 84
2) 성경 계시 · 87
3) 자연계시와 성경계시의 관계 · 96
5. 삼위일체 하나님 · 97
6. 인간의 창조: 하나님의 형상 · 104
7. 섭리 ·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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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종류의 지식: 하나님과 인간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지식이 있는가? 과학적인 지식, 생물학적인 지식, 사회학적인 지식, 물리학적인 지식 등등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어쩌면 인간은 지식이라는 바다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칼빈은 그의 위대한 저서 <기독교 강요>에서 인간의 모든 지식을 단 두 가지로 요약했다.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한 지식이다. 참으로 놀라운 통찰력이다. 아무리 바다의 모래알같이 많은 지식이 있다고 하지만 정리하면 결국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으로 요약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사변적이거나 철학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깨닫는 지식을 말한다. 칼빈에 의하면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과 인간을 아는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을 알 때 인간은 참되고 건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종류의 지식은 어떤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인간은 질서정연한 자연의 움직임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볼 때, 또 삽시간에 불바다를 만드는 화산 폭발이나 성난 파도가 배를 삼키는 위력을 볼 때 놀라움과 경탄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솜씨를 말하기도 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허무, 불안, 절망, 죽음 등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거나 경험할 때면 우리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가를 깨달을 뿐만 아니라 인간처럼 연약한 존재가 아닌 전능자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자연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실존적인 경험에서 발견한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지식도 있다. 또 이런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기독교 사상의 기초를 놓은 성 어거스틴도 이러한 사실을 그의 유명한 <독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하나님과 영혼을 알고 싶다. 그것뿐인가? 그 외에는 없다.” 그리고 그는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알게 하시며 또한 당신도 알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 St, Augustine, Soliloqia, I.2.7. II.1.1(“I desire to know God and soul. Nothing more? Nothing whatever. And he prays: Oh god whom are ever the same. Let me know my self and thee.”). 왜 어거스틴이 자신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지식이라고 했을까? 이는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이 단 두 가지 지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어거스틴은 이 지식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추구했다. 이는 이 세상 철인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기도 속에는 하나님과 자신을 알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지극한 겸손과 경외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웨스트민스터 대 요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과 대답을 살펴보고자 한다.
문1.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인가?
답. 사람의 첫째 되고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함이다.
요리문답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방황하게 되고, 불행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라는 언어를 빼고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무지 이야기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인간은 인간이 최고요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지식은 인간을 아는 지식에서 시작한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싹트게 했다. 글자 그대로만 본다면 참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빼놓고는 하나님도 말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요 하나님과 대등하게 되고자 하는 교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지식은 동시적인가? 아니면 어떤 순서를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심각한 딜레마로 인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 관한 지식을 세 번씩이나 수정하였고, 이 문제를 <기독교 강요>에서 가장 먼저 다루었다. 1560년 불어판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지식의 관계성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또한 자기 자신을 안다.”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지식과 인간의 지식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관계가 동시적인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인간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비로소 우리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온갖 주제들을 열심히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부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간의 주된 목적이며 인간의 존재를 정당화시켜 준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모두에게 이 한 가지 목적이면 충분할 것이다”라고 칼빈은 말했다. 예레미야 9:24 주석을 참조(LCC번역 XXIV, 125) <기독교 강요> 1권 32에서 재인용. 그렇다. “나는 누구인가?”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발견된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삶으로써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확립해 갈 수 있다. 이 순서가 성경에서 가르쳐 준 올바른 순서이다.
하나님을 앎으로써 우리를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지식은 과학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깨달아지는 지식이다. 요엘 3:17 주석에서 칼빈은 믿음의 지식(scientia fidei)과 과학적인 지식(scientia experimentalis)을 구분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지식은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온다. 이것은 <기독교 강요>2권에서 말한다. 믿음의 지식이란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의로우시고 사랑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아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에 기인한다. <기독교 강요>, 1.6.2. 여기서 ‘순종에 의해서’라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탐구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 오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얻어지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인간을 살게 한다. 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성경 지식 탐구를 조명해 보는 좋은 거울이 되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식을 갖고자 하는가를 점검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들여다보고 회개하도록 도와준다.
요약하면, 모든 지식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인간에 관한 지식이다. 인간은 자신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앎으로써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이는 탐구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얻어지는 지식이다. 이 순서는 성경이 가르쳐 준 것이며, 인간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지식에 대한 대강령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인가?
2. 하나님의 지식을 배우는 목적
인간은 무엇을 알고자 하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자 하며 상대방을 알고 사귀고자 한다. 사귀다 보면 서로를 알게 되고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서로 알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앎이 서로를 올바르게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칼빈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알고자 하는 목적에 대해서 말한다. 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고자 하는가? 하나님을 알면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기 때문인가? 하나님을 알면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면 우주의 근원을 알 수 있기 때문인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건하게 살기 위해서이다. 구약에서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신 5:6).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다한다’는 말이다. 예배는 적당하게 하는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다 바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우리를 산 제사로 드리는 생활이라고 했다(롬 12:1). 여기서 중요한 말은 산 제사에서 ‘산’이라는 형용사에 있다. 죽은 제사가 아니라 산 체로 우리 몸을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목적이다. 언젠가 미술가 강우방은 경주 석굴암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그의 전 생애가 석굴암을 예배하는 경지에 들어간 것을 고백한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다. 밥을 먹건 무엇을 하건 그의 마음 속에는 석굴암에 대한 것이 사로잡고 있었다. 여기서 예배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스콜라 철학자처럼 “하나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한다. 언뜻 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전자가 사변적인 질문이라면 후자는 성경적인 질문이다. 전자는 철학적인 논리나 체계를 토대로 한다면 후자는 성경 계시를 토대로 한다. 전자의 지식은 철학자의 지식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믿는 자의 지식이다. 즉 전자는 철학적인 이론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경건한 삶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 곧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아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깊은 존경심에 기인한 지식이다. 그렇다면 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이라는 말은 칼빈의 생애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에서도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즉 경건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칼빈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개념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칼빈 신학을 경건 신학이라고 한다.
희랍 사람들은 신을 예배하는 것을 경건(ευσεβεια)이라고 정의했다. 라틴 고전에서는 경건(pietas, pius)이란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지칭하는 언어였는데 로마 가문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것을 경건이라고 봤다. 그래서 로마에서 가장 큰 죄는 부모를 살인하는 죄였다. 존 칼빈, <칼빈의 경건>, 이형기 옮김(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9).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경건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들을 알 때 나타나는 경외감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된 것”이라고 했다. 또 시편 119:79 주석에서는 경건의 참된 본질은 첫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the fear, or the reverence of God)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the knowledge of Divine truth)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첫째와 둘째는 서로 분리할 수 없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건한 자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그 말씀을 두려움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이다. CC, vol. 6, 459. 예레미야 10:25 주석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cognitio dei/the knowledge of God)이 경건의 시작(the beginning of religion)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경건의 열매(the fruit or the effect of piety)라고 했다. CC, Vol. 9, 67. 칼빈의 경건의 의미를 성경에서도 잘 말해주고 있다. 성경에서는 경건이라는 말은 ευσεβεια 로서 목회서신과 공동서신에서 독점적으로 나타나며 그밖에는 행 3:12에서 단 한번만 사용된다고 한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경건이라는 말이 없고 서신에만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것은 경건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구원받은 인간이 그 은혜를 우리의 삶 속에서 표현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70인역에는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지고 있는 의무 곧 경건, 거룩함, 종교”를 가리킨다고 한다(Walter Bauer, A Greek-Englsih Lexican of the New Testament, ed. and trans. William F. Arnendt and F. Wilbur Gingrich, 4th ed(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52), 326.) 여기서도 전자와 후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스겔 18:5-9 주석에서 경건은 “사랑의 뿌리”(piety is the root of charity)라고 했으며 경건 없이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CC, XII, 221.(“We fear God when we live justly with our brethren, for piety is the root of charity. No one never loves his neighbour from his heart unless he fears and reverences God.”) 이런 점에서 보면 경건이란 하나님과 신자간의 관계 속에서 성립되는 언어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신자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경건한 삶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상태(reverence joined with the love of God which the knowledge of his benefits induces)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온다. <기독교 강요>, 1.2.1.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지극히 자발적인 것으로서 뜨거운 열정이 포함되어 있다. <기독교 강요>, 1.4.4. 칼빈은 경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고 싶은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음으로 이 심판 앞에서 두렵고 떠는 마음과 태도에 있다. 오히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그의 의(義)를 수용하고 죽을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르지 않은,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 이러한 열심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몰염치가 원하는 데로 하나님을 날조하려는 시도는 그만 두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되 하나님이 자기를 저들에게 계시하시고 선포하신 대로만 이해한다. <기독교 강요 요약>, 존 칼빈 지음, 이형기 박사 옮김 요약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6), 29(1537년 판 <기독교 강요>), 2절. "True piety does not consists in a fear which willingly indeed flees God's judgment, but since it cannot escape is terrified. True piety consists rather in a sincere feeling which loves God as Father as much as it fears and reverences Him as Lord, embraces His righteousness, and dreads offending Him worse than death. And whoever have been endowed with this piety dare not fashion out of their own rashness any God for themselves. Rather, they seek from Him the knowledge of the true God, and conceive Him just as He shows and declares Himself to be."(The Piety of John Calvin, trans and ed. (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Company, 1978), 각주 1에서 재인용).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깨달음으로써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결합된 것”이다. <기독교 강요>, 1.2.1.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열정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언어는 ‘열정’이라는 말에 있다. 이 열정은 광신적인 열정이 아니라 중생을 통해서 나온 순수한 열정을 의미한다. 경건한 사람은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경건한 자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자이며 하나님을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 알고자 하는 자이다. <기독교 강요>, 1.2.2.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에게는 경건한 생활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경건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결코 가질 수 없다.
이를 요약하면 첫째, 경건한 자는 자기의 사상이나 의지대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된 대로 이해한다. 둘째, 경건한 자는 모든 선의 근원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그렇게 사는 자이다. 셋째, 경건한 자는 하나님이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임을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구해 주실 것을 믿는 자이다. 넷째,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주요 아버지로 믿고 매사에 그의 권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이다. <기독교 강요>, 1.2.2. 다섯째, 참된 신앙(종교)은 하나님에 대한 자발적인 경외심과 존경심이 결합되어야 한다. 여섯째,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존경하고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 일곱째, 경건한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생활인 동시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삶이다. 여덟째, 경건한 생활이란 세상을 떠난 내면화에 중점을 두는 지식이 아니라 경건한 삶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더 깊이 연합하고 사귐을 가짐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이런 점에서 경건한 삶이란 그리스도인의 총체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지는 지식은 인생의 허무와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살게 한다(전 12:6).
희랍 철인들이 신을 알고자 한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원형인 이데아를 이해하는 데 있었다. 그들은 이데아에 도달할 때 진정한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철학이란 이러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삶의 한 방편이었으며, 철학자란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사랑하는 자이다. 결과적으로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철학자가 되어야 하며 이상적인 국가의 통치자도 철인이 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칼빈에게 있어서 창조주 하나님은 플라톤이 말하는 비인격적인 이데아가 아니라 모든 선의 근원이시고, 창조물을 그의 권능으로 보호하시며, 지혜로 다스리시고, 선한 방법으로 보존하시며, 인간을 의와 심판으로 다스리시고, 자비로 참으시고 보호하시며 지켜주시는 인격적인 분으로 믿었다. <기독교 강요>, 1.2.2. 진정한 신자는 이와 같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구할 수 있으며, 또한 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을 배워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지식의 목적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데 있으며, 둘째로 우리의 “교사요 안내자로서” 이런 지식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만 이런 지식을 찾아야 되는 것을 배우도록 하는 데 있다. <기독교 강요>, 1.2.2. 하나님의 지식을 교회를 섬기는 데 사용하지 못할 때 오히려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분열시키게 된다. 이런 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자는 이 사실을 마음 속에 깊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배하는 지식을 얻기 원하는가? 그렇다면 경건한 생활을 해야만 한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배울 수 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철학적 체계에 기초한 지식이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지식을 사변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방법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돕는 동시에 계시한 데로 하나님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주요 아버지로 이해하며,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그분으로부터 세상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얻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도록 돕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경건한 사람은 죄를 짖지 않고 살려고 한다. 왜 그런가? 이는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경외하는 주님으로 예배하며 찬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이에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기를 원하는 지극한 사랑과 같은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이 미워하는 것을 할 수 있는가? 결코 할 수 없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고자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식을 얻고자 하는 목적이며 동시에 하나님 지식에 대한 논리이다.
3. 생래적(生來的) 지식
인간은 생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awareness)을 갖고 태어났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알게 되어 있다”고 칼빈은 분명하게 말했다. “All men have been born for religion”.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I. John Hesselink, 7; Calvin's Catechism of 1538. 존 칼빈, <신앙입문>, 최병도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94), 22. 존 칼빈, <깔뱅의 요리문답> (도서출판 경건, 1995), 25. 그렇다면 그 지식(divinitatis sensum)은 무엇인가?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것이다. 가령 인간은 어떤 경이로운 사건을 접할 때나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 “아하”, “아이고 맙소사”, “아이고 어머니”, “엄마야” 등등의 말을 무심코 내뱉는다. 이 언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온다. 다시 말하면 이 언어들은 의식적으로 나오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사변적 것이 아니라 직접적이다. Sensum Divinitatis, direct revelation of God to the soul of men as a creature, is an intensely numinous awareness. 이와 같은 언어는 우리 인간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할 수 없으며, 또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한 대로 고의적인 것이다(롬 1:20). 이와 같이 인간은 생래적(生來的) 지식을 가지고 있다. 신에 대한 생래적 지식은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Edward W. Dowey, 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51.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자는 급박한 상황이나 경이적인 체험을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무의식적으로 튀어 나와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아직 그 사람에게 온전한 신앙이 뿌리내리고 있지 않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신(神)에 대한 지각은 두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종교의 “씨앗”이요, 둘째는 “양심”이다. 아담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각은 그대로 있는가? 아니면 없어져 버렸는가? 간단하게 말하면 부패된 인간 속에도 이 지각은 아직 남아 있다. 그 각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종교의 씨앗(religionis semen). 주지하다시피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역사가들이 말하는 고등종교인 불교, 유교, 도교, 회교, 힌두교 외에도 미신적인 종교의 대상인 “부적”, “당산나무”, “바위”와 유사종교성을 가진 막시즘, 공산주의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비록 왜곡된 종교성이지만 모든 인간은 종족을 초월해서 종교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은 하다 못해 “부적”이라도 믿어야 사는 종교성을 가진 존재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부적을 믿는 자에게는 부적이 신(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 하나님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문제이지 엄격한 의미에서 인간에게 불신앙은 없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미 “불신앙”이라는 말 속에 신(神)이라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신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무신론이라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고의적인 행위이다.
둘째, 양심. “양심”이라는 말은 윤리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양심은 인간의 도덕성을 말하며 이 도덕성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것으로 범세계적이다. 하지만 윤리라는 개념은 민족과 종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양심은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인간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이란 제한적인 의미에서의 선과 악이다. 가령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을 때,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양심의 가책에는 잘못에 대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포함된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는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 중의 하나이다. 양심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동물들은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그들의 생리적인 현상을 표출하지만 우리 인간은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덕성이 부패된 사람을 말하여 동물(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동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동물처럼 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주셔서 죄를 알게 하고 이방인에게는 양심을 주셨다고 했다(롬 2:15). 양심의 역할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고발하는 것(self-accusation)이다. conscience(롬 2:15/συνειδησις) Conscientia is a knowing with, or joint knowing. It cannot be remain private.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케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하며 그렇게 못할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The Knowledge of God in Calvin's Theology, 59).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배려이다. 누가 자기를 고발하기를 좋아하겠는가? 다른 사람이 우리를 고발하면 원수가 되지만 자기가 자기를 고발하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케 된다. 그래서 양심을 말하여 신의 은밀한 음성이라고도 한다.
종교의 씨앗과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주신 지각이다. 전자는 종교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고 후자는 도덕성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두 가지 지각만으로는 성경에 계시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래적인 종교성과 양심은 부패한 인간에게 아직도 남아 있다. 하나님의 은혜(일반 은총)로 주신 두 가지 신(神) 지식 때문에 비록 인간은 왜곡된 종교성을 갖고 있지만 여러 가지 종교성과 미신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으며, 완전한 도덕성을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사회 정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며, 양심대로 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예술성이나 과학의 발전과 발견도 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에 기초한 것이다. 일반 은총이란 화란의 위대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가 한 말로서 “하나님의 일반은총은 그의 구원하시는 은총과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는데 이는 본질상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모든 개인, 전체로서 인류, 그리고 우주에 일반은총을 베풀어주신다. 심지어 악인과 타락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 포함시킨다. 일반은총으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죄악을 억제하시고, 죄가 잉태하여 확산시키는 폐해가 더 퍼지지 않게 하시고, 거듭나지 못한 자라도 넓은 의미에서 비구속적 의미의 선행을 할 수 있게 하신다. 이는 죄인일지라도 인간에게, 심지어 거듭나지 못한 인간에게 남아 있는 진, 선, 미의 원천이다. 이는 가정과 국가 속에, 과학과 예술 속에, 교육과 넓은 의미의 사회 속에서, 심지어는 인간 본성이 죄로 타락하고, 저주 하에 놓여있는 거듭나지 못한 인간의 삶과 인간성 속에서 시간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할 것이다”(Frank Vanden Berg, <수상이 된 목사 아브라함 카이퍼>, 김기찬 역(나비, 1991), 252). 따라서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고의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생래적인 지식 때문에 인간은 아무리 타락했을지라도 동물과 다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허무하고 부질없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생래적인 지식을 주신 목적이며 올바른 종교의 논리이다. <깔뱅의 요리문답>, 25-26.
4. 계시
1) 자연계시
가장 복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인생의 최고의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태어날 때부터 종교의 씨앗과 양심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주의 전 창조를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창조의 사역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계시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아름답고 신비스럽다.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보이지 않은 신성과 그 누구도 비할 데 없는 능력을 보여 주셨다. 숲 속의 오솔길을 걸어보면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를 볼 수 있다. 아카시아 꽃의 향기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짖게 하고, 이름 모를 여러 꽃의 아름다움과 신비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능력의 신비를 느끼게 하며, 살며시 지나가는 뱀을 보면 소름 끼치는 감정 속에서 인간의 유한함을 느끼기도 한다. 길섶에 피어있는 진달래와 개나리는 우리에게 봄소식을 알려주고, 울창하게 녹색으로 뒤덮여 있는 나무숲을 보면 여름이 다가옴을 깨달으며, 노랗게 물든 단풍을 보면 가을이 깊어져 가는 정취를 맛보기도 하며, 겨울을 알리는 하얀 눈 덮인 산을 바라보노라면 눈처럼 순수하게 살고픈 심정도 갖게 된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면서 양심의 소리를 들어보려는 노력도 해본다. 정말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으며, 이 자연을 통해서 그를 알게 하셨다(전 3:11). 참으로 우리의 존경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위대하고 능력이 많은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고의적인 죄가 된다. 누가 이 자연의 신비와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단순히 비인격적인 자연의 질서라는 이론으로 돌릴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은 정말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칼빈의 고백처럼 전 우주 창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을 볼 수 있는 “거울”임에 틀림없다. <기독교 강요>, 1.5.1.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과학자들은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자들은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에너지의 폭발로 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을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인간은 하등 동물인 아메바에서 고등동물로 진화된 것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인간은 단백질 DNA와 RNA의 합성체라고 한다. 이 논리들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설명하고자 한 시도이며, 이러한 이론의 확실성은 겨우 개연성 이상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과학이 가설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찌 비인격적인 물질에서 인격적인 것이 나온다고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창 1:27, 창 2:7). 인격과 물질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격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획일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잘못이다. 과학과 신앙은 두 개의 다른 논리(문법)에 의하여 지배된다. 문법이라는 개념은 Ludwig Wittgenstein의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개념으로서 간단하게 말하면 언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룰이라고 한다. 언어의 의미는 언어의 사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전자는 가설(hypothesis)에서 시작하여 실험으로 증명하며 후자는 계시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확신한다(히 11:3).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를 이렇게 찬양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 방에서 나오는 신랑 같고 그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 온기에서 피하여 숨은 자 없도다(시 19:1-6).
그렇다.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그의 신성과 능력, 지혜, 섭리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극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섭리를 보며 그에게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창조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연계시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과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우리는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연계시를 통해서는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를 통해서 당신의 영원한 신성과 능력을 분명히 알게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의 이성과 마음이 어두워져서 피조물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창조된 피조물이 창조주를 모른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책임이다. 타락한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을 통하여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 수 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 따라서 성경계시가 필요하다.
2) 성경계시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지워지고 부패해져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왜곡되게 이해하고, 자연계시(하나님의 창조)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성경이 쓰여지게 하셨다. 이에 대해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안내자요 교사이다”라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1.6.1. 또 실제적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칼빈은 힘주어 말한다. <기독교 강요> 1권 7장에서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은 성경에서만 발견할 수 있으며 1권 8장에서는 성경의 권위와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만 참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 말은 매우 중요하다. 어디에서 참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만이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이 두 가지 지식을 깊이 알아야 한다. 결국 신자는 구속주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통치자로 뿐만 아니라 중보자요 구속주로 알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논리적 순서상 창조주 하나님을 먼저 다루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종교의 씨앗과 양심을 주셔서 그의 피조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실존을 알 수 있게 하셨지만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부패하고 심히 왜곡되어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우리를 정확하게 창조주 하나님께 인도할 조력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약의 족장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통하여 자신을 성경에 계시하셨으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계속해서 세상에 남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의 섭리 가운데 성경이 쓰여지게 하셨다. 성경은 우리가 참으로 경배하고 신뢰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게 해준다.
칼빈은 성경을 “안경”에다 비유한다. 안경의 목적은 눈이 나빠서 잘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잘 보이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아주고,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을 쫓아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준다.
인간의 마음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이나 변할 만큼 변화무쌍하다. 또한 우리 인간의 지식은 개연성을 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존재가 우리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와 사도들을 통해 쓰신 성경을 통해서만 창조주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말했다(창 1:1).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암호 같은 지식을 인식할 수 있는 소수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요, 신과 자연은 동일하다는 범신론적인 하나님도 아니며,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 자를 의지해야 한다는 철학자의 하나님도 아니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즉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성취시키시고 약속한 대로 인도하시는 사랑과 권능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성경은 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또한 성경은 창조의 사역에서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해 준다. 이 하나님이 바로 구속주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우리가 어디에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가를 도와주는 교사요 안내자이다. 이 안내자 없이는 우리는 미신을 믿게 되고 오류에 빠지게 되며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참 하나님은 오로지 성경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성경의 저자, 핵심, 메시지, 자증성(自證性), 내적 증거, 권위, 올바른 사용은 무엇인가?
① 성경의 저자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 책인가? 성경은 소설, 윤리, 철학 책인가? 성경은 왜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 세상 어떤 책보다 많이 읽혀지고 있기 때문인가? 고전적인 책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순히 교회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인가? 어떻게 성경을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절대 무오성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가?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고 또 그 저자가 있다. 그 책에는 저자의 사상과 감정이 담겨져 있다. 즉 책이란 인간의 언어로 쓰여져 있지만 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저자의 사상과 감정까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언어는 저자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경도 저자가 있고 인간의 언어로 쓰여져 있다. 하지만 성경은 비록 인간의 언어로 쓰여져 있지만 인간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로 쓰신 것이다. 왜 인간의 언어로 쓰셨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을 무시하시고 인간의 언어로 성경을 쓰지 아니하셨다면 우리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능력을 배려하셔서 성경 저자들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쓰게 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중저자(dual authorship)가 있다.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원저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바로 이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인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에서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은 희랍어 원문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숨결’(θεοπνευστος)로 번역할 수 있다. ‘숨결’이란 살아서 움직이며 역사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성경의 말씀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살아서 움직이며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하여 성경 안에서 인격적으로 말씀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음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 해석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을 통해서 듣고 또 가르침을 받은 대로 선포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이다. 이 사실을 믿는 자 안에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그러나 성경을 사람의 말로 듣고 믿는 자는 인간에 대한 여러 가지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지식은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변하여 새 사람 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능력은 체험할 수 없다(살전 2:13).
② 성경의 핵심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딤후 3:15)라고 말한다. 성경에는 역사, 시, 이야기, 편지 등등 여러 문학의 장르가 있지만 문학이나 철학, 윤리, 시를 가르치는 책은 아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지혜를 가르치는 책인 동시에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생활인가를 가르쳐 주는 책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은 그리스도만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우리를 그에게로 보내고, 그 안에서 우리를 세워간다. 암브로시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우리의 입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께 말한다. 또 그는 우리의 눈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아버지를 본다. 그는 우리의 오른 손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자신들을 아버지께 드린다. 그가 개입하지 않고서는 우리나 다른 모든 성인들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을 수 없다.” <기독교 강요>(1536/초판>, III, 6.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구약을 하나로 묵는 끈이요, 신구약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설계도이다.
성경 연구의 최종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요한복음 5:39 주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참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는 유일한 중보자시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구원하시고 제 2 위격으로 자신을 알리시는 구속주 하나님이시다.
③ 성경의 메시지
성경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딤후 3:15). 즉 구원의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 버린 메시지나 모임, 관계성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은 또한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참된 경건의 삶을 제시한다.
④ 성경의 자증성(自證性)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자이시기 때문에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이를 증거하셔야 한다. 이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경의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그 속에서 말씀하신다(the highest proof of Scripture derives in general from the fact that God in person speaks in it).” <기독교 강요>, 1.7.4. “성경은 스스로에 의해 보증받고 있다(Scripture indeed is self-authenticated).” <기독교 강요>, 1.7.5. αυτοπιστον. 홀트롭은 성경의 자증성을 성경을 증명이나 증거에 종속시키는 것을 개혁주의 견해로 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자증의 성격은 믿음의 필요성, 성경을 능력으로 보는 혹은 신자의 체험으로 보는 것에 있다고 강조했다(필립 홀트롭, <기독교 강요 핸드북>, 47).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인간의 탐구나 논리에 의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스스로가 성경 안에서 인격적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임을 스스로 증명한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혹은 우리에게 믿음을 일으킴으로써 말한다. 칼빈은 이것을 성경의 자증성(αυτοπιστον)이라고 했다. 만약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간의 탐구나 논리로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말할 수 없다. 이는 인간이 무오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어떻게 스스로 증명하시는가?
⑤ 성령의 내적 증거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본성이 부패하고 일그러져서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도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 주셨고, 성령님께서 믿는 자 안에 내주(內住)하셔서 우리의 지성을 중생케 하시고 마음을 새롭게 조명하심으로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마치 공증이라도 하듯이 마음에 인을 쳐 확신케 하신다. 또한 성령님은 우리의 “내적인 선생님”으로서 하나님께서 저자이심을 가르쳐 주신다. 성경의 올바른 의미를 가르쳐 주신다.
인간의 탐구나 논리에 의해서 성경의 저자를 알 수 없다는 말은 학문적인 방법으로는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증명할 수는 있지만 이것의 확실성은 개연성(probability) 이상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개연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직 성령님만이 우리 마음에 성경의 절대 무오성과 절대 권위에 대해 확신을 주심으로 이를 증명할 수 있다. 이는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벧후 1:21).
⑥ 성경의 권위
성경은 스스로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다. 이 권위는 하나님께서 증거하신다. Hilary of Poitiers는 그의 저서 <삼위일체에 대해서>(On the Trinity)에서 성경 자체의 권위를 이렇게 말했다. “친히 하신 말씀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하나님 자신이 바로 자신에 관한 가장 적합한 증인이다(For He whom we can know only through his own utterances is a fitting witness concerning himself)”라고 했다. A select Library of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of the Christian Church, second serices, Vol. IX. "On the Trinity": Book 1.18, 45. 1. xviii.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의 책이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며, 성경의 절대 무오성과 권위는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키신다. 교회는 이 성경에 기초하며, 이 진리를 수호하고 선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다.
⑦ 올바른 성경 사용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17). 여기서 교훈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메시지를 말한다. 책망과 바르게 함이란 성경을 배우는 가운데 자신의 잘못된 점을 회개하고 고치는 것이다. 의로운 행동을 하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킴으로써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한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정체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성경이 스스로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도록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가르치고 설교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문학책으로, 철학책으로, 이야기책으로, 4대 성인의 한 사람의 책으로 읽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읽고 순종해야 한다. 또한 성경을 대할 때 경외심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창조주요 구속주로 계시하신다.
3) 자연계시와 성경계시의 관계
하나님은 자연의 거울(자연계시)과 성경의 거울(성경계시, 특별계시)을 통해서 자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알리셨다. 신학적으로는 전자를 자연계시, 후자를 특별계시라고 한다. 그렇다면 두 계시는 어떤 관계인가? 객관적인 면에서 보면 자연계시나 특별계시는 차이가 없다. 다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자연계시도 창조주 하나님을 말하고 특별계시도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관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의 타락에 의해서 이제는 자연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 수 없다. 그래서 특별계시인 성경이 인간에게 필수 불가결한 안경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 안경을 쓰지 않고 자연계시를 보면 천지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특별계시는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해 주는 데 비해 자연계시는 구속주 하나님을 계시하시지 않는다. 이것이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다른 점이다.
성경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제시한다. 여기서 새롭다는 것은 내용을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고도 깊게 계시한다는 말이다.
5.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은 설명하기 지극히 어렵고 이해하기 심히 어려운 교리임을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께서 세 분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한 분으로서 삼위가 일체가 되시는가? 이 난해한 질문은 초대교회사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철학과 사변적인 논리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했던 수많은 잘못을 교리사(敎理史)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에서 가르쳐 준 대로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려고 했다. 이것이 칼빈의 위대한 점이다.
초대 교부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통해서 삼위의 일체성을 설명해 보고자 시도했다. 가령 개울, 강, 바다에서 하나의 공통점은 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울, 강, 바다는 세 개의 다른 물이다. 이와 같이 하나이면서도 세 개의 다른 물로 구별되는 것을 하나님의 창조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흔적이라고 했다.
갑바도시안 교부들은 “한 분 하나님은 세 가지 다른 ‘존재 양식’들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Alister E. Mcgrath, <역사 속의 신학>, 김홍기·이형기·임승안·이양호 옮김(대한기독교서회, 1998), 396.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각은 “세 인격 속의 한 신성” 이라는 말로 특징을 지워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한 신성이 세 인격 속에 공존할 수 있는가? 그들은 인간의 개체성과 그 공통성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고자 했다. 예를 들면 사람의 각 개인의 이름을 이씨, 김씨, 박씨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세 사람으로 구별되어진다. 그러나 이씨, 김씨, 박씨는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한 인간을 대표하는 인류가 된다. 이와 같이 갑바도시안 교부들은 인격의 다양성(from the diversity of the person or hypothasis to the unity of essence or ουσια)에서 본질의 통일성으로 추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세 인격은 각각 독특한 성격을 갖는다. 성부는 아버지 됨으로 구별되며, 성자는 아들 됨으로, 성령은 정결케 하는 능력으로 구별된다. <역사 속의 신학>, 396. 신성은 인격들 안에 분할되지 않은 체로 존재한다, 이것을 말하여 ‘페리코레시스’(삼위의 공동본유성(共同本有性)/περιχωρησις/co-inherence)라고 부른다. <역사 속의 신학>, 397. 그리하여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삼위로 존재하신다.
초대 교부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사람이 바로 성 어거스틴이다. 어거스틴 이전의 교부들은 삼위일체의 흔적을 인간 외적인 것 즉 자연에서 발견하려고 했거나, 인간의 공동본유성으로부터 삼위의 일체성을 증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한 본질인 정신현상 안에서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설명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시도였다. 즉 그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통일성에서 출발하여 인격의 차별성(from the essential unity of God to the distinction of persons)을 설명하고자 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정신현상(mind's search for selfknowled -ge)에서 자기 자신을 기억하는 방법(returning into himself)에 의해서 삼위일체성을 발견(looking for God within)하고자 했던 것이다. 갑바도시안 교부들의 삼위일체 교리가 외적인 삼위일체라고 한다면 어거스틴의 것은 내적인 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도를 ‘심리적인 비유 방법’이라고 부른다. Justo L. Gonzalez, A History of Christian Thought, Vol. 1(Nashville: Abingdon Press, 1970), 330.
어거스틴에 의하면 정신(mens/mind/soul)은 인식의 좌소(the seat of awareness)로서 세 가지 다른 기능을 갖고 있다. 기억(memory), 이해(understanding), 의지(will) 혹은 사랑이 그 세 가지 기능이다. 즉 인간은 하나의 정신 속에 기억, 이해, 의지(사랑)라는 서로 다른 세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과거의 경험은 기억 속에 저장되고, 저장된 과거의 경험을 이해하며, 이해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의지(사랑)가 있다. 인간은 정신 속에 있는 세 가지 기능을 통하여 자기의식 즉 자기에 대한 지식을 갖는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인간 정신 속에 있는 삼위일체이다.
정신은 두 객체를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다. 인간이 정신 속에 있는 세 가지 기능을 통하여 자기를 인식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은 그 자체를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한다. 정신 속에 있는 삼위일체는 정신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다. 어거스틴, <삼위일체론>, 14.12.15. 이 정신의 삼위일체는 정신이 정신 자체를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라기보다는 정신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정신이 자기 자신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정신의 자기 이해는 동시에 정신의 하나님의 이해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정신의 심리적인 현상 속에서 삼위일체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정신 속에 있는 세 가지 심리적 기능은 인간의 삼위일체 인식에 대한 비유이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어거스틴은 겸손하게 말했다.창조주 하나님의 지식 ? ? <기독교 강요> 산책
어거스틴은 성령을 사랑이라고 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성령을 사랑이라고 한 것은 삼위일체의 어느 하나를 지칭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라 삼위일체의 관계성 속에서 성자를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랑은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를 결합시키는 띠(bond/ vinculum trinitatis)와 같다. 성부와 성자의 교통·교제·함께 함(communion)·하나님 자신을 주심(self-giving)·선물이다. 성령이 신자에게 주어질 때 신자는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게 된다. <삼위일체론>, 15.32.18. 그래서 성령(사랑)은 사랑하시는 성부와 사랑을 받으시는 성자를 연결하는 띠이다.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중생한 우리 안에 부어질 때 그 사랑으로 인하여 신자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성해 나갈 수 있다.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어거스틴의 삼위일체 인식에 대한 심리적인 모델은 하나의 좋은 시도였지만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는 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었다. 이는 인간 정신의 인식 과정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성을 인간의 자기 인식 능력인 정신의 기능(기억, 이해, 사랑)에서만 찾는다면 문제가 있다. 우리가 기르는 개도 주인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한다. 그렇다면 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바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칼빈은 인간의 인식과정을 통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설명하기보다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한 본질(one essence)과 삼 위격(three hypostases)을 가르쳐준다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성경적인 시도였다. 교부들과 비교할 때 칼빈은 삼위일체의 본질의 통일성(unity)이 아니라 개별성을 지닌 삼위성에 중점을 둔다. 그는 위격(서열)과 본질(비서열)을 명확히 구분한다. 여기서 서열이란 관계성에서 본 서열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버지는 아들보다 서열이 높다. 그러나 본질 면에서 볼 때 삼위는 한 분으로서 구별이 없지만, 위격 면에서 보면 삼위는 셋으로서 각 위의 구별이 있다. 홀트롭, <기독교 강요핸드북>, 70. 칼빈은 “삼위일체에 있어서 삼위는 세 분을 말하나 각각은 전적으로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다(신 6:4). 비록 성경이 삼위일체라든가 위 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으나 삼위일체를 성경이 증거하며 가르친다”고 말했다.
족장들과 사도들의 말씀의 원천은 영원한 지혜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지혜 곧 성자 하나님을 의미한다. 세계는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성자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성자의 신성을 말해 준다. <기독교 강요>, I.13.7. 성자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심은 구약(렘 23:5-6, 사 9:6)과 신약에서 여러 가지로 증거하고 있다(빌 2:6-7). 또한 이적을 통해서도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되심을 증거한다.
성령님도 하나님이시다. 즉 성령 하나님도 인격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성령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령님을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체로 보지 않기 쉽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했다(고전 3:16-17, 6:19; 고후 6:16). 즉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성령님이 인격체로서 하나님이 되심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령님을 통한 사귐 안에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적용하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계신다. 여기서 강조할 점은 “우리를 위해서”라는 말이다. 참으로 놀라운 성경적인 통찰력이다. 여기에 축도의 의미가 있다.
삼위일체에 있어서 삼위는 구별된 속성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9)에서 삼위의 구별을 말해 준다. 삼위의 차이점은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본질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삼위가 일하시는 역사에서의 차이이다. 즉 삼위의 차이점은 “활동의 시초 및 만물의 원천과 기원은 성부에게 돌려지고, 지혜와 모략 및 만사의 지배권은 성자에게 귀착되고, 그러한 활동의 힘과 효능은 성령에 기인한다는 것이다(To the Father is attributed the beginning of activity, and the fountain and wellspring of all things; to the Son, wisdom, counsel, and the ordered disposition of all things; but to the Spirit is assigned the power and efficacy of that activity).” <기독교 강요>, I.13.18. 성부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요 원천이며,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를 구체화시키시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통해서 오신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역사를 움직이게 하시고 활동하게 하신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그것의 활동은 삼위 하나님의 역사이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은 함께 일하신다.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성을 성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 불리고, 성부와의 관계성에서 생각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기독교 강요>, I.13.19.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교리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으로 일하고 계신다. 성부는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고, 성자는 성부의 계획을 실현시키시는 지혜이시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역사와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사역은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의 사역에, 예수님은 구속의 사역에, 성령은 성화의 사역에 돌려진다. 로레인 뵈트너, <개혁주의 신학 연구>, 김광열 역(기독교문서선교회, 1994), 119. 바빙크는 성부는 구원의 근원이시요 성자는 구원의 성취 자시요 성령은 구원을 작용하시는 분이시다(<하나님의 큰 일>, 284).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하나님은 유일하시고 단일한 본질로서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칼빈의 위대한 점은 삼위일체 교리를 철학의 지식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하지 않고 성경이 가르친 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 말은 칼빈이 철학적인 지식이 부족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겸손하게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는 되지 않는다. 또 창조주 하나님의 지식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다.
6. 인간 창조: 하나님의 형상
칼빈은 실제적으로는 인간론을 <기독교 강요> 제 2권(타락 후의 인간 상태)에서 다룬다. 이에 앞서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는 창조 당시 즉 타락 전의 인간 상태를 다룬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를 통해서 그의 신성과 능력을 분명히 보여 알게 하셨음으로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는 극장과도 같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the image of God)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을 통하여 인간의 본성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수 있는 접촉점을 갖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수많은 논란이 있었음을 교리사를 통해서 읽을 수 있다. 교부 중의 한 사람인 이레니우스는 창세기 1장 26절을 주석하면서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과 모습(the likeness of God)을 구별했다. 그에 의하면 타락 시에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은 잃은 반면 하나님의 형상은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구속 과정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모습을 도덕적인 삶을 통해서 회복해 간다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타락 시에도 없어지지 않은 인간의 합리성과 자율성을 의미한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대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을 세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 단계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려는 인간의 본능적 성향이다. 이 성향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둘째 단계는 인간이 하나님을 습성적으로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고 사랑하는 단계이다. 첫 단계는 모든 사람에게, 둘째 단계는 의로운 자에게, 세 번째 단계는 오직 축복 받은 자에게서 발견된다. summa theologia, I.93.4. 이와 같은 견해는 인간의 타락 후에도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특별은총(하나님의 구속적인 은혜)이 없어도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성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비성경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 형상의 좌소(坐所)는 일차적으로 영혼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영혼 밖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신적 형상의 일차적 좌소가 정신과 마음 혹은 영과 그것의 능력들 속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빛나지 않은 곳은, 심지어 육체를 포함하여, 인간 속의 어느 곳에도 없다”고 칼빈은 말했다. <기독교 강요>, 1.15.3.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양심도 하나님 형상의 한 요소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정신의 빛 아래서, 순수한 마음 안에서, 모든 건강한 각 기관들 안에서” 보여진다. <기독교 강요>, 1.15.4. 칼빈은 계속해서 “즉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본성을 모든 종류의 생물들보다 뛰어나게 만드는 모든 탁월성까지 적용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 하더라도 그러하다. 따라서 아담이 올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 감정을 이성에게 예속시키고 일체 감각을 올바로 통제하고 또 진실로 그의 탁월성이 조물주께서 그에게 주신 특별한 재능들에게 기인한 것이라고 인정할 때, 아담에게 부여된 완전성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로서 표현된다”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1.15.3. 이 때의 인간은 모든 선함에 있어서 탁월한 존재였다고 칼빈은 말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을 다른 짐승과 구별되게 한다. 둘째, 인간의 감정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이성을 가졌다. 셋째,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넷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을 닮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무엇을 닮았는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다. 이런 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기독교 강요>, 1.15.3. 다섯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 감성, 오성의 능력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보여진다. 칼빈에 있어서 이성, 감성, 오성, 의지는 영혼의 주요 기능에 속한다. 마음의 건강과 올바름을 가질 때 영혼의 기능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이런 것들이 부패하였다(Luke Anderson, "imago dei in Calvin and Bernard",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ed. Wilhelm H. Neuser(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4), 186).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비추는 거울(reflection/speculum)로서 형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거울”이라는 말은 은유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어떻게 거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가를 말해 준다.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히 풍성하신 지혜와 의와 인자와 능력을 반영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의와 인자를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 <기독교 강요>, 1.14.21. 이런 점에서 브라이언 게리쉬(Brian A. Gerrish)는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했다. 도날드 맥킴 편저, <칼빈신학의 이해> (생명의말씀사, 1991), 137-158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 철학자들의 이론으로 설명하지 않고 성경에서 특히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된 것 안에서 찾으려고 했다. 이는 다른 신학자와 전혀 다른 그의 위대한 점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에는 초자연적인 은사와 자연적인 은사가 있다. 전자는 믿음, 하나님의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성결과 의로움을 향한 열정 등이다. <기독교 강요> 2.2.12; 골 3:10, 엡 4:24 주석. 후자는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이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은 인간이 선과 악을 분간하고 이해하며 판단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또한 예술을 창조하고 과학에서 원리를 추론하는 의지와 오성과 판단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기독교 강요>, 2.2.12. 비록 초자연적인 은사는 소멸되었지만 자연적인 은사는 인간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에게 남아 있다. <기독교 강요>, 2.2.12. 이 때문에 인간과 동물이 구별되는 것이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지만 사회생활에서 최소한의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은 파괴되었다. 파괴된 하나님 형상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를 믿어 중생한 신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시작하며, 매일매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간다. 존 칼빈 <칼빈성경주석>, Vol. 19, 고전 15:39 주석, 462. 칼빈은 회복된 하나님 형상의 핵심을 에베소서 4:24에서 찾는다. 그것은 참된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전자는 인간과의 관계성을 말하며 후자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진실된 의로움은 십계명의 이웃과의 관계성을 의미하며, 진실된 거룩함은 십계명의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뜻한다고 칼빈은 말했다. 엡 4:24 주석. 이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조금씩 점진적으로 회복한다. 이제까지 세상을 좇아서 살던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은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성화 과정을 통해서 죄악된 옛 사람을 훌훌 벗어버리고 참된 경건과 의와 순결과 중생한 이성을 소유한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1.5.4. 예수 그리스도를 닮음으로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을 가진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1.15.4.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거울처럼 이 세상에 비추게 된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이 얼마나 거룩하고 탁월한 존재인가를 알게 되는 동시에, 타락으로 말미암아 얼마나 죄악된 존재였는가도 알게 된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도 깨닫게 된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초자연적인 은사는 완전히 소멸되었으나 자연적인 은사(예술적 창조성, 양심, 과학적 창조성)는 비록 부패되고 왜곡된 형태이지만 아직 인간에게 남아 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동물처럼 저급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도 갖고 있지만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 본래의 본질과 가치를 말해 준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본래 탁월한 존재였다. 지극히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과도 교제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자연적인 은사는 부패하고 왜곡된 상태로 인간에게 남아 있지만,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초자연적인 은사는 아예 소멸되었다.
인간성의 회복은 하나님 형상의 회복에 달려 있다. 즉 하나님과 관계에 있어서의 거룩함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회복을 위해서는 신자는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어떻게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엡 4:22-23). 여기서 옷 입음이라는 은유를 잘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 옷을 갈아입으려면 헌 옷을 벗어야 가능하다. 옷을 벗지 않고 새 옷을 갈아입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설령 헌옷에다 새 옷을 갈아입는다고 해도 옷맵시가 나지 않는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듯이 신자도 무슨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그 신자의 인격과 품위가 결정된다. 신자는 세상의 비싼 옷을 사서 입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한다. 이와 같이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서 신자는 부단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는 자기부인이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이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부인이란 하나님과 관계에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되며 이웃관계에선 이웃 사랑으로 표현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의 거룩함과 도덕성의 회복이란 고전을 읽어서 되는 것도 아니요 세상 학문을 통한 인성 교육을 통해서도 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의 입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
목회상담학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자신을 보는 안경인 동시에 다른 사람을 보는 안경이 된다. 이 안경으로 보면 어떤 사람도 구제불능인 사람은 없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되어져야 할 사람들인 것이다.
추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것이 인간이지만, 중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성화를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7. 섭리
<기독교 강요> 1539-1554년판에서는 칼빈은 섭리와 예정 문제를 같은 곳에서 함께 다루었다. 그러나 최종판(1559)에서는 둘을 완전히 분리시켜 섭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제 1권)에서 다루고, 예정은 제 3권 구원론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성령의 내적인 역사를 통한 구속역사를 다룰 때 하나님의 예정을 논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유지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고 한다. <기독교 강요>, I.16.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우주만물과 인간을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보호하실 뿐만 아니라 공중을 나는 참새 한 마리까지도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는 통치자시요, 보호자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섭리로써 이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마스터키(master key)를 가진 자처럼 당신이 창조하신 우주만물을 섬세하게 양육하시며 보호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숨겨져 있어서 제한된 정신을 가진 인간이 그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인간이 잘못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면 섭리로 다스린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섭리는 흔히 말하는 숙명(fate)이나 우연(chance)과는 전혀 다르다. 숙명이란 개인의 자유와 관계없이 비인격적인 무엇에 의해서 개인의 현재와 장래의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버렸다는 뜻이며, 우연이란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어떤 일이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일어나 버리는 경우를 말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 자동차 사고가 나서 죽었다고 했을 때 이것을 가리켜 그의 숙명이라고 말하며, 길을 가다가 갑자기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했을 때 그 만남을 우연의 일치라고 한다. 그러나 섭리는 숙명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의해서 일어난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인간에게 일어나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도 포함된다.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만사의 제 1 원인이다. <기독교 강요>, 1.17.6.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2 원인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이 잘못해서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선하신 섭리 가운데 일어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다 잘못된 것은 인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섭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기초해 있다. 하나님의 깊으신 계획과 뜻은 숨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깊이 이해할 수 없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는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과 거룩하시고 선하신 뜻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을 생각해 보자. 자기를 죽이려고 그를 깊은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끝내는 애굽에 노예로 팔아버렸던 그의 형들에게 털어놓은 요셉의 눈물겨운 고백은 하나님의 섭리의 본질과 섭리를 믿는 신앙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 이 얼마나 놀랍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인가! 요셉의 형들은 그를 죽이려고 했던 그 사건 가운데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흐르고 있었다. 비록 우리가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섭리를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건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대부분 우리의 문제는 “왜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일어났느냐?”는 데 있다. 이러한 일 때문에 인간은 절망하고 좌절한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분노하고 절망에 빠진다. 몇 년 전 필자가 아는 신학연구과 학생 중에서 불치병으로 생애의 마지막을 고통과 분노 속에 보내고 있었던 한 자매님을 기억한다. 담임 목사와 심방 가서 이야기하는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이냐 질문했을 때 그녀는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할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고백했다. 장래가 촉망되는 자매였다. 꿈도 많았다. 꽃망울을 머금은 채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져 가는 그녀를 바라볼 때 할말을 잃어버렸다.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었다.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말문이 막혔다. 이야기를 듣고 기도만 하고 돌아왔다. 얼마 되지 않아 소천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것이 몹시 마음 아팠다. 사죄를 빈다. 이와 같이 대부분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왜 하필이면”이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 면에서 볼 때 이 질문보다는 이 사건 가운데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는 믿음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이다. 섭리를 믿는 자에겐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롬 8:28).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자에겐 숙명도 운명도 우연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필자가 미국에 있을 때 ABC 방송국의 20/20이라는(1987. 12. 18. 금요일 10시) 프로그램에서 여자 앵커 월터 바브라가 스티브 맥도널드라는 전신이 마비된 전직 경찰관과 인터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스티브는 뉴욕시 경찰관으로서 어느 날 뉴욕시에 있는 유명한 공원 Central Park을 순찰하고 있었는데 젊은 흑인 3명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경찰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아무런 경계 없이 그들에게 물어봤는데 갑자기 한 청년이 총 3발을 쐈다. 총알은 스티브의 목을 관통했고, 비록 생명은 건졌지만 이 사건으로 스티브는 목 밑으로 전신이 마비되어 버렸다. 스티브의 집안은 삼대 째 경찰 집안으로서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결혼한 지 1년 8개월 밖에 안된 상태로서 그 무렵 아내는 아들을 분만했다. 이 인터뷰는 사고가 난 지 3년 후에 가진 것으로 ABC 방송국의 앵커 바브라의 스티브와의 인터뷰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스티브, 당신은 흑인에 대한 복수심이 있습니까?” “아무런 복수심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필자가 여기서 소개하려고 하는 중심 메시지는 다음 질문에
출처 : 개혁 신학 연구소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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