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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신앙론/박해경 교수(ACTS, 조직신학)

by 【고동엽】 2021. 11. 2.

-목차-
1. 서론
2. 칼빈의 기독교의 본질 이해
3. 신앙의 정의
4. 신앙의 본질적 특성과 목표
5. 신앙의 지식과 확신
6. 신앙과 경건
7. 결론

1. 서론

워필드(B. B. Warfield)는 칼빈을 가리켜 "성령의 신학자"(the theologian of the Holy Spirit)라고 하였다. 기독교교리사에 있어서 교회가 죄와 은총론은 어거스틴(Augustine)에게, 속죄론은 안셀름(Anselm)에게, 이신칭의론은 루터(Luther)에게 은혜를 받고 있으나 성령의 역사(役事)에 관한 교리는 특히 칼빈에게 빚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을 자세히 검토한다면 워필드의 이 말은 극히 타당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은 강요 3권에서 실상 구원론을 논하고 있는데, 성령의 사역을 그 내용으로 하니까 별도의 성령론없이 구원론속에서 성령론을 다룬 것이다. 이 전통은 개혁주의 신학에 이어져서 조직신학의 틀을 구성할 때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다루되 별도의 성령론을 논하지 않거나 기독론 혹은 구원론과 묶어서 취급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성령론이 곧 구원론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칼빈은 성령의 으뜸가는 사역은 "믿음"이라고 하였고, 성령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은 주로 믿음과 관련된다고 하면서 믿음에 의해서만 성령은 우리를 복음의 빛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다고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강요 4권의 첫 부분에서 3권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는데, 3권의 전 내용을 믿음의 교리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권(3권)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시고, 우리는 그가 가져 오신 구원과 영원한 복락에 참여자가 되는 것은 복음신앙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 음을 낳게 해주고, 증진시키며, 그 목표에 이르게 하려면 무지하고 게으른 우리에게는(여기 에 변덕스러움이 추가된다) 외적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이 같은 약점을 대비하여 보조장치를 첨가하셨다.

여기서 칼빈은 강요 3권이 구원론임을 분명히 말하면서 구원받는 일은 "복음신앙" 즉 복음을 믿음으로써 되는 것이라고 한다. 복음신앙(Faith in the Gospel, fide evangelii)은 개혁파 신학자들이 말하는 구원의 신앙(Saving faith), 혹은 칭의의 신앙(Justifying faith)을 뜻하지만 거기에는 좀더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칼빈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이라는 차원에서만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경외심과 경건을 가지는 산 신앙(living faith)을 의미하고자 했고, 여러 신앙 조항들이 기초를 이루어서 각 조항들의 실재성을 토대로 하여 결국 하나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올라가도록 하는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강요 1권에서 창조자 하나님을 논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경건이 필수적이라고 하였고, 2권에서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설명할 때에도 창조자에 대한 지식이 "믿음"이 수반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하나님을 제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면서 신앙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3권은 이미 말한 대로 성령의 사역론으로서의 구원론인데, 이 구원은 "복음신앙"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였으며, 4권에서는 교회론을 다루는데, 교회의 목회 사역은 한 마디로 "믿음"을 생기게 하고(낳게), 증가시키며(강화), 그 목표(구원과 영원한 복락)에 이르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하였다.
생명의 말씀사에서 출간한 기독교강요 한국어 판의 "역자 서문"에 보면 공동번역자 일동 명의로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쓴 목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사실은 한철하 박사의 글이다. 이 서문에서 한 박사는 성경의 목적과 강요의 목적이 같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경은 무엇 때문에 기록되었는가? 요한복음 20:31에 의하면 우리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 게 하기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성경이 죄에 빠진 인생을 구원하려는 것을 목적 한 것과 같이 칼빈의 기독교강요도 그 전체가 구원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도 사도 바 울과 루터의 핵심 교리인 이신득의의 근본 교리에 따라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칼빈의 기독교강요 전체의 중심에는 "믿음"이라는 한 단어가 마치 반지에 다이아몬드처럼 박혀 있다. ...칼빈의 글은 기독교강요 뿐만 아니라 어느 글에서든지 이와 같이 "신앙"에 관 심의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믿고 구원 얻게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이 글에서 한 박사는 칼빈을 신앙의 신학자로 보고 있다. 워필드는 성령의 신학자라고 하였으나 그는 믿음의 신학자로 평한 것이다. 칼빈의 전 저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경외심을 볼 때 어느 페이지에서든지 신앙으로 쓰고 있었음이 드러나며, 신학의 목적 자체도 목회와 선교와 마찬가지로 "믿음"을 생기게 하고, 강화시켜 주는 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경외하게 되듯이 칼빈의 저술 자체가 같은 목적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이 화석화된(petrified) 교리조항만을 나열하는 식으로 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나아가는 살아있는 신앙의 학문이 되어야 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나타나는 "믿음"을 세워주고 강화(증진)시켜주는 신학이 현대 신학계에 필수적으로 요청된다고 본다. 현대신학계는 일면으로 자유주의가 범람하여 인간의 이성을 토대로 하여 어느 한 가지 진리 개념을 가지고 전 기독교를 해석하려는 각양 인본주의 신학을 내어놓고 있으며, 다른 한 면으로는 보수주의에서 여러 교리 항목들을 철저하게 수호하여 자신들의 교단 신학에 동조하지 않으면 적대적인 자세로서 정통 교리를 방어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이 두 가지 경향을 바로잡는 일은 기독교가 무엇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는 과제를 주고 있다.
구스타프 아울렌(G. Aulen)과 헨드리쿠스 벌코프(H. Berkhof)는 그들의 책에서 신앙론으로서의 조직신학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바르트(K. Barth)가 "교회교의학"(Church Dogmatics)이라고 조직신학 책명을 붙여놓고 교회에 신앙적 유익을 주지 못한 것처럼 이들도 역시 이름은 신앙론인데, 신앙의 목표를 분명히 해 주지 못하고 있다. 참신한 것이 있다면 신학서론(Prolegomena)에 있어서 전통적 방법을 탈피하여 믿음의 의의와 중요성을 취급하였다는 것뿐이다. 반면 루이 벌코프(Louis Berkhof)는 구원론 속에서 신앙론을 논하기는 하나 철저하게 구원의 신앙만을 옹호하고 있다. 물론 그도 신앙론이라는 교리 조항을 수호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모든 교리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도달하게 되는 산 신앙과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칼빈처럼 명백하게 개진하지는 못함으로써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흔히 보여주는 신학 노선의 고수라는 신념외에는 신학도들에게 복음신앙을 세워주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쏟지 못한 것을 본다.
이 글이 목적하는 바는 칼빈의 신앙론 연구를 통하여 그의 신앙개념을 파악하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참 신앙을 가져 신학의 목적이 성경의 목적과 같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칼빈의 신학을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세워지고, 더 강화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더 진력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도록 하는 데에 있다.

2. 칼빈의 기독교의 본질 이해

칼빈에 의하면 기독교는 구속의 종교이다. 그는 성경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아야 하며, 그 내용을 어떤 "목적"에 관련시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말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구속의 "복음"이다. 다시 말해서 칼빈의 주 관심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적용하여 "믿고" 구원 얻게 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강요 2권에서 성경의 성격을 논의하면서 "복음"을 설명할 때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비밀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라고 한다. "복음"이란 넓은 의미에서 구약에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신 약속들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더 높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은혜의 선포이다. 즉 칼빈은 성경이 한 마디로 복음을 말하고 있다고 보며, 그는 이 복음을 "신앙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sola fide)은 칼빈이 이해한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성경의 종교이며, 성경은 복음인데, 복음은 "신앙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만 우리는 의롭게 되고(롬 3:28), 또 믿음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히 11:6)을 칼빈은 그의 신학에 적용시켰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기독교가 그 위에서 돌아가는 돌쩌귀(hinge)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이래로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신학 전통에 의하면 기독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신칭의의 종교이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분석하여보면 1권에서 창조자 하나님이 사람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나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2권에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어 복음을 준비하셨는데, 3권에서 이 복음을 믿으므로 하늘의 복락과 영원한 구원을 얻는 문제를 다루었고, 4권에서는 구원을 얻게 하는 유일한 수단인 "믿음"을 생기게 하고, 강화하여 그 목표에 이르도록 하는 목회 사역론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칼빈은 한 마디로 "신앙"의 신학자로서 신학의 목적을 "믿음을 세움"에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칼빈은 신앙론을 바로 정립할 필요성에 대하여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천국에 들어가게 하여 주는 구원의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서 위험하게 기만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단순한 견해나 평범한 설득을 가지고는 구원이라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과, 성경 이야기를 단순히 동의하는 수준을 가지고는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큰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검토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믿음도 여러 가지이며 잘못된 신앙도 많으므로 무엇이 복음신앙인가 하는 문제를 명백히 제시하는 것이 칼빈의 신학적 과제였다. 로마교회의 2분법적 신앙관, 즉 희미한 신앙(맹신, fides implicita)과 명백한 신앙(fides explicita), 또는 미형성된 신앙(fides informis)과 사랑으로 형성된 신앙(fides formata caritate), 그리고 신앙의 대상을 믿는 객관적 신앙(fides quae creditur)과 믿음의 행위로서의 주관적 신앙(fides qua creditur)의 문제, 내밀적 신앙(內密的 信仰)과 초보적 신앙, 흔들리는 신앙과 확실성의 문제, 신앙과 소망, 신앙과 칭의, 신앙과 성화 등을 다루어야만 하였다. 또 신앙의 지식(notitia fidei)이라든가 신앙과 말씀 혹은 이적의 관계, 신앙과 기도, 신앙과 예정, 산 신앙으로서의 하나의 신앙과 여러 신앙 조항들의 관계 등이 중요한 잇슈가 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모든 신앙 조항들을 논함에 있어서 실제로 하나님의 실재하심과 그의 권능과 우리를 향하신 자비의 은혜를 믿었으며 독자들에게도 복음신앙으로서의 산 신앙을 세워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복음신앙의 정의에 이어 신앙의 목표, 신앙의 지식, 확실성, 신앙과 경건 등의 문제에 국한하여 다루고자 한다.


3. 신앙의 정의

칼빈에게 있어서 가장 유명한 신앙의 정의는 강요 3권 2장에 나온다. 이 정의를 확대하여 해설하는 것이 그의 신앙론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정의가 칼빈의 신앙론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며 확실하게 아는 것(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에 근거하는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 에 계시되며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 된 것이다.

여기서 칼빈은 신앙을 확실한 지식으로 정의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풀어주시는 선하신(자비의) 은혜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선하신 의지로서 은혜주시는 것)에 대한 지식"(cognitio divinae benevolentiae ega nos)이라고 함으로써 칼빈은 직접적인 "신 지식"(神 知識, cognitio Dei)이라 않고, 하나님의 자유로이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약속의 진실성에 근거한(gratuitae in Christo promissionis veritate fundata) 지식이라고 말한다.
이 정의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하나는 칼빈이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이시나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역사적 신앙(fides historica)의 성격을 무시하지 않고 한 분 하나님을 믿게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칼빈이 의도하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선하신 뜻(선의)으로서의 자비"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칼빈은 믿음의 기능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무엇이든지 동의하며(subscribere), 하나님의 진실성을 신뢰하는 것이며, 하나님만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misericordia)과 그의 선의(benevolentia)를 통하여 하나님께 이끌리는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는 일에 이끌리는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칼빈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우리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정의에 있어서 칼빈은 성경적 신앙은 구원의 신앙임을 단정짓고 있다.
이것은 다음의 정의에서 더 분명하여진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별시켜주는 그런 믿음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냐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고, 우리를 사 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며, 영원한 구원이며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내주 (indwelling)하시게 한다. 이로써 나는 믿음의 진의(force)와 본질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강요 3권 2:7의 정의보다 2:13의 정의가 "구원의 신앙"으로서의 내용을 더 명확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칼빈도 믿음에는 다양한 형태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믿음이라는 단어가 모호한 의미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시인한다. 예를 들면, 어떤 때는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리(Sana pietatis doctrina), 혹은 하늘에 속한 교리 전체(totam caelestis doctrinae summam)로 확대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또 믿음은 우리를 신앙에로 세워주는 가르침과 도 동일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관심 하는 신앙은 복음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주며, 영생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게 하는 믿음을 말한다. 이 믿음은 기독교강요 3권에서 이미 첫 부분에 강조한 바 있다. 성부께서 그리스도 자신의 개인적인 용도가 아닌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에게 주신 유익들(benefits)을 얻으려면 먼저 그리스도와 연합(union with Christ)하고 그와 함께 자라나야(growing together) 하는데, 그 일은 "믿음으로" 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을 세우는 일이 바로 성령의 으뜸가는 역사이며, 이 믿음에 의해서만 성령은 우리를 복음의 빛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며, 성령은 신자들에게 이 믿음을 공급하셔서 자기에게로 이끄신다고 한다.
따라서 칼빈이 말하는 신앙이란 복음신앙으로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가는 믿음이며(벧전 1:21, 요 14:6, 17:1-3), 천국 백성이 되는 신앙인데, 물론 여기에는 성화의 삶이 포함된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선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약속의 말씀으로 영원한 구원의 소망에 대한 확신을 주며(구원의 확신), 성령의 내주하심과 인치심으로 우리의 삶에 경건과 선행이 나타나게 하셔서 온전한 사랑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다.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뗄 수 없는 관계로 묶인 것을 칼빈은 말하고 있다.


4. 신앙의 본질적 특성과 목표

칼빈에 의해서 정의된 신앙은 한 마디로 구원의 신앙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신앙의 목표(scopos fidei)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신앙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것이며,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일이다. 기독교강요 초판에서도 칼빈은 신앙의 본질적 특성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의를 확신하는 것이며, 그 목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죄 사함과 성화를 얻는 일이며, 마지막 날에 하나님 나라(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다른 하나의 유형은(참된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계신 것을 믿을 뿐만 아니 라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속자로 참되게 인정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의(de bona Dei erga nos voluntate)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신앙이다. ...또한 우리가 그를(그리스도) 통해 죄 사함과 성화를 얻게 되는 것처럼 마지 막 날에 나타날 하나님 나라에 마침내 우리가 들어가기 위해 구원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주께서 그의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제공하시며 약속하시는 모든 일들의 핵심 주제(head)이며, 총화(sum)이다. 이것이 그의 성경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목표(goal, meta)이며, 과녁(target or mark, scopos)이다.
앞에서 언급된 칼빈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 나타난 신앙의 정의에서 신앙의 목표(과녁)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이 내용이 초판에서도 잘 지적되어 있음을 본다. 칼빈은 초판에서 이미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냐"(what the nature of this faith ought to be, qualis esse haec fides debeat)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신앙을 두 가지 형태로 구별하면서 신학자들이 흔히 부르는 "역사적 신앙"(fides historica) 혹은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신앙내용들을 믿는 인지적 신앙" (fides quae creditur)은 실상 참된 믿음이라고 볼 수 없다고 한다. 그런 믿음은 마귀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약 2:19).
실제로 칼빈의 관심은 fides quae 라든지 fides qua의 구별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진정한 관심은 무엇이 참된 신앙의 본질이냐 하는 문제이다. 그는 성령의 으뜸가는 사역으로서의 신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천국을 소유하게 되도록 하며, 한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이 될 때 참 신앙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앙이 한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거기에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첨가되어야 한다고 했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한다고도 하였다.
칼빈은 그의 신앙의 정의에서도 삼위일체론적 정의를 하고 있음을 앞에서 보았다(III. 2. 7). 즉 1) 신앙은 우리에게 선의를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성부께서는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죄 사함과 성화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선의(benevolentia)를 가지신 것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2) 또한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자비의 약속과 진실성에 기초한 하나님의 선의를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사랑하여 주시는 자비의 약속을 확증하시지 않는다면 신앙의 확실성은 세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3) 이 신앙은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영혼은 참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의를 의지하게 되고, 우리의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떠나 방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정의에서 칼빈은 정의된 각 부분들이 모두 신앙의 목표임을 말한다. 하나님의 선의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의 약속과 성령의 인치심이 모두 그러하다. 하지만 이 모든 내용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과녁, 곧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선의(the divine benevolence toward us)의 내용은 "구원"과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신앙의 본질적 특성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불신자들이 그것으로 인하여 명확하게 구별되는 근본적인 내용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 구원의 신앙을 정의할 때에는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여 주는 특별한 표식(the special mark)을 언급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신자와 불신자가 구별되는 특별한 표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약속을 붙드는 확고한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신앙이다. 우리가 신앙을 논하는 목적은 "구원의 길을 파악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지는 믿음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원의 신앙"(saving faith)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선의를 바라보는 것"이라 할 때 그 내용은 구원과 영생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신앙의 본질상 참된 구원의 신앙이 가지는 특성은 이 세상에서의 부귀나 장수보다는 "내세"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세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단정한다. 물론 칼빈은 강요 II권에서 일반은총으로서의 현세의 여러 가지 학문과 예술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III권에서도 현세 생활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현세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고 한다. 더구나 III권 10장에서는 현세 생활을 기독교인이 올바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논하기까지 한다. 강요 IV권에서도 20장에서 세속정부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영지주의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현세 생활은 신자들의 "구원"을 촉진(promote)시키도록 예정된 것이며, 현세 생활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의"(divine benevolence)를 증거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의 목표는 하나의 과녁을 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라는 것이다. 이 과녁을 통해서 신앙의 본질적 특성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 수 있게 된다. 칼빈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는 하나의 중심점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선의"라는 것이며, 이 신앙의 본질적 특성은 우리를 참 신자가 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구원과 영생 복락에 참여자가 되게 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게 하며, 거듭나서 하나님의 양자로 되게 하고, 천국을 소유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5. 신앙의 지식과 확신

칼빈이 신앙을 정의할 때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 지식은 어떠한 지식인가 하는 것이 논의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강요의 영문 번역자인 배틀즈(Ford Lewis Battles)는 칼빈이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지식은 현대적 용어로 말하자면 "실존적 이해"(existential apprehension)에 가장 가까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존적 이해라는 말은 칼빈의 의도를 올바로 파악하기에 충분치 못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실존적이라고 말하는 뜻은 신앙의 지식이 단지 두뇌로만 아는 지식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것 같은데, 오늘 날 실존주의 철학이나 신학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비추어 본다면 이것은 권장할 만한 용어가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칼빈이 말하는 신앙의 지식(notitia fidei)은 확실성(assurance)으로 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확실한 지식"(assured knowledge)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경건한 지식"(pious knowledge)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칼빈은 신앙의 지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믿음을 지식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되는 것들과 통상 적으로 관련된 그런 종류의 이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감각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은 믿음에 도달하려면 지성 그 자체를 초월해야만 한다. 지성은 믿음에 도달하고도 자기가 느끼고 있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 지성은 자기가 파악하지 못한 것을 확신하고 있을 때는 그 설득되어짐이 확실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것을 그 자 체의 능력으로 지각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결론짓기 를 신앙의 지식은 이해가 아니라 확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경건한 무지"(pious ignorance)가 아니라 지식에 근거하는데, 이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cognitio Dei)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cognitio divinae voluntatis)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순종적으로 교회에 복종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맹신"(fides implicita)에 불과한 것이다. 칼빈은 바울도 우리의 의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명백하게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고 해석하였다.
물론 칼빈은 로마교회의 희미한 신앙인 맹신(implicit faith)과 확실한 신앙(explicit faith)의 구별을 비난하고 있으나 신앙의 준비단계로서의 희미한 신앙(implicit faith)이 많은 성도들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비록 믿음의 시작에 불과한 초보적 신앙상태나, 혹은 말씀을 들으려는 경건한 마음의 경향만 있어도 그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말하는 진정한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선의"를 확실히 아는 지식이며, 그 지식은 경건한 지식이다. 이것을 "복음신앙"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가는 믿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제시하는 그대로의 그리스도, 다시 말해서 신앙의 목표이신 그리스도를 "복음"이 우리를 인도하는 대로 잘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이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 이르는 올바른 길을 갈 수 없는 까닭이다. 즉 "복음의 옷을 입으신"(clothed with his gospel) 예수를 "알아야"(지식) 참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식"이라는 용어 사용에 관하여 칼빈은 여러 가지 단어를 상호 교환적으로 쓰기 때문에 단어의 용례를 가지고 칼빈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예를 들면 게리쉬(B. A. Gerrish)가 칼빈이 아퀴나스(T. Aquinas)와는 대조적으로 신앙에 대해서는 scientia라는 말을 쓰지 않고, notitia를 사용한다고 주장하나, 위의 각주에서 본대로 파커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칼빈은 고전 2:12이나 에베소서 3:19의 주석에서 이런 용어들을 교환적으로 구별 없이 쓰고 있다. 보스(A. Vos)는 아퀴나스와 칼빈을 연구하면서 칼빈에게 신앙은 확실한 지식이고, 아퀴나스에게는 확실한 신뢰인데, 용어상으로는 다르지만 내용상으로는 같다고 보았다. 그 이유는 칼빈에게 지성(mind)이라는 말은 이해(understanding)와 동의어로 쓰였고, 마음(heart)은 의지(will)와 동의어로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성뿐 아니라 의지의 역할을 강조하는 아퀴나스의 신앙관과 비교할 때 칼빈이 신앙의 지식에 의지적 요소인 확신을 말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하였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켄달(R. T. Kendall)은 칼빈은 주지주의적이었으나 칼빈주의자들은 주의주의적이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신앙의 지성적인 면을 강조했으나 후기 칼빈주의자들은 주의주의적 경향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멀러(R. Muller)는 칼빈이 말하는 신앙의 지식은 확신을 포함하며, 지성과 의지의 균형을 가지고 있고, 그의 구원론적 관심은 신앙론에서 인식행위의 "의지의 우위성"(the primacy of the will)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우리는 칼빈이 신앙의 지식을 단순히 지성적으로만 말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고, 또한 의지를 포함하면서도 성령의 설득에 의한 마음의 확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선의, 즉 구원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며, 또한 경건한 지식이고, 단지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서 이루어지며, 참된 실천과 삶으로 직결되므로 "실천적 지식"(notitia practica)이기도 하다.
신앙의 지식은 실천적 지식이므로 칼빈은 신앙의 경험적 요소 중에 의심하여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가 있고, 우리가 본래 가지고 있는 불신앙과 부단히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 안에서는 육신의 잔재 속에 잠자고 있는 불신앙이 일어나서 마음 속에 잉태된 신앙을 공격하므로 신자가 육과 영의 갈등을 완전히 극복하고 불신앙이라는 질병을 완전히 치유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믿음은 의심과 확신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불신앙은 양심을 무기로 삼아 믿음을 무너뜨리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배워야 하며, 부단히 말씀을 공급받고, 믿음을 강화시키는 은혜의 수단인 성례와 믿음의 주요 단련인 기도와 우리 신앙의 확신을 주는 근원으로서의 선택, 양심의 평화, 및 성령의 역사에 의한 말씀과 성례가 신앙을 강화시켜 준다는 사실들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나 선행을 통한 신앙의 확신을 체험하여야 한다. 칼빈은 성령이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며 근원이시라고 하였고,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결과라고도 하였다. 즉 마음에 신앙의 확신을 가져다 주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의한다는 것이다.
특히 칼빈은 말씀 외에도 하나님의 권능이 제 2의 지주(secunda fultura)로서 신앙을 강화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능력에 병행해서 나타남으로 우리의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합당하게 공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깊이 심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무한하신 권능을 대대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을 본다. 신앙이 굳세게 되고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능력을 의존하고 또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과 신앙의 확실성을 가지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내세에 대한 확신"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의"를 바라보는 것이라면 우리는 구원과 영생을 소유한 것을 아는 것이다. 믿음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확신은 내세를 기대하는 데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내세를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칼빈은 우리의 믿음의 진정한 목표(the proper goal of faith)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약속(the promise of mercy)인 구원이므로 우리의 믿음이 떨며,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구원의 약속(the promise of salvation)으로 강화해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이 말하는 신앙의 지식이란 확신인데, 이 확신은 다름 아닌 "구원의 확신"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믿음의 확신은 어느 한 시점에 국한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이유는 믿음은 본질상 현세 생활이 지나간 후에 있을 내세의 영생불멸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 믿음을 통하여 하늘의 삶(heavenly life)을 바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며, 하늘에 약속된 내세의 영생복락을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없으므로 우리 자신을 초월하고, 우리의 지각능력을 이 세상 사물의 저편에로 향하게 하며, 보이지 않는 소망을 소유하는 것이 신앙의 확신이라는 것이다. 믿음과 소망을 연결하면서 칼빈은 믿음이 살아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의 소망(the hope of eternal salvation)이 불가분리적인 동반자로 함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칼빈에 있어서 믿음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선의와 자비"이며, 그 내용은 하늘에서의 영원한 구원의 소망과 언제나 연결된다. 따라서 신앙의 지식은 확신이며, 이 확신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의를 굳고 확실하게 아는 지식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성에 알려졌으며 우리의 마음에 인쳐진 것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내주케 하는 믿음이며, 죽음에서 영생으로 옮겨가는 영원한 구원인 내세의 영생을 소유한다는 구원의 확신에 대한 신앙이다.


6. 신앙과 경건

칼빈은 기독교강요 최종판(1559)에 나타난 "독자에게 드리는 글"에서 저술의 의도를 말하는 가운데 "순수한 경건"의 교리를 보존하여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 외에 어떤 다른 의도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1536년 초판 발행시의 라틴어 제목은 역시 경건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강요. 구원론에서 알 필요가 있는 제반 사항과 "경건"의 대요를 포함하고 있으며, 경 건에 열심히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읽을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고, 최신판이다. ...

기독교강요를 경건대전(summa pietatis)이라고 하고, 칼빈이 말하는 신앙의 지식을 경건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저술활동 뿐 아니라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난 경건과 경외 때문이다. 실제로 칼빈의 저작속에 "경건"이라는 말은 빈번하게 나오며, 경건은 교리와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기 위한 선결조건이므로, 기독교강요에서는 세속적인 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워주는 경종처럼 계속 울리고 있다. 두메르그(E. Doumegue)는 칼빈에게 있어서 종교와 경건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라고 하였고, 헌터(M. Hunter)는 칼빈의 인격의 핵심이며(Keynote) 그는 하나님께 사로잡힌 영혼의 소유자였고, 학문 자체로서의 신학이란 그에게 전혀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한다.
칼 바르트가 예정이라는 개념이 그 자체 때문이 아니고 (기독교의) 설명을 위하여, 또 음식으로서가 아니고 음식의 "소금"으로서 나타나고 그래서 중요하다는 말을 하였는데, 이런 말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칼빈에 있어서의 "신앙의 지식"은 "경건"이라는 소금으로서 모든 교리 연구와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근본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치 성경의 모든 구절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성령의 감동을 받듯이, 또 성경의 매 구절 속에서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듯이 칼빈의 삶과 신학 속에서 경건이라는 믿음은 언제 어디서나 우러나오는 향기와 같다고 하겠다.
실제로 칼빈은 강요 III. 2. 7에서 신앙의 정의를 내린 직후, III. 2. 8에서 바로 말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나 경건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도 구원에 대한 믿음이나 지식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을 논박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이 제시하는 것에 동의만 하면 믿음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거룩케하심(성화)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지 못하며, 믿음이란 경건한 성향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까닭이다.
칼빈은 믿음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로 사용되지만 성경에서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리"(sound doctrine of godliness, Sana pietatis doctrina)를 의미하는 때가 많다고도 하였다. 믿음은 "하늘에 속한 교리 전체"(totam caelestis doctrinae summam)로 볼 수 있고, 믿음은 이러한 하늘의 교리에서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경건한 자의 마음은 번뇌와 고통으로 시달릴 때에도 결국은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신이 상실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믿음의 확신을 가져다 준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확신을 감소시키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주의 권능을 높이며, 자신을 낮추는 일이 습관화 되도록 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느껴야 하는 "경건한 두려움"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낳을 뿐 아니라 낙심한 사람에게도 은혜가 임하면 그에게 경외심과 찬양으로 가득 채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권능에 순복하게 한다.
칼빈은 경건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의식(sense of the power of God)이 우리에게 적절한 경건의 교사가 되며, 거기서 종교가 나오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유익을 앎으로써 생기는 하나님 에 대한 사랑에 존경이 결합된 것을 경건이라고 부른다.

경건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grace)와 그 유익(benefits)을 아는 지식(신앙의 지식)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결합된 것이라고 한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신앙의 지식)은 우리에게 경외를 가르쳐 준다고 하였다. 경건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즉 신앙의 지식도) 없다는 것이다. 강요 I권에서 경건한 사람의 특징을 논하는 가운데, 칼빈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에게 집중하는 신앙을 논하고 있으며, 모든 일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는 신본주의 신앙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III권 2장에서 신앙론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임과 아울러 나머지 강요의 모든 교리 서술의 내용도 같은 방식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 위해서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하늘의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일종의 승천의 신앙이 요구되고 있다.
디도서 1:1의 주석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지성에서 나온 헛된 것과는 대 조되는 하늘에서 온 진리다. 바로 이 진리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것만이 명실 상부한 진리라고 부를 가치가 있다. ... 교리에 대해 오직 한 가지 추천할 만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에서 가장 크 게 진전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가장 훌륭한 제자요 그 사람만 인간의 양심을 자극하여 하나 님을 경외하도록 하는 참된 신학자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히브리서 6:19의 주석에서는 "신앙이 하나님께 미치지(도달) 않으면, 신앙은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멀리 하늘까지 솟아오를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칼빈에게 믿음은 경건이고, 경건은 지상의 것들을 넘어서서 각종 난관을 극복하고 하늘의 하나님께로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여 그 분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본질상 한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이다. 믿음이란 여기저기를 주목하거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에게 연합하고, 그에게만 집착하는 것이다.
칼빈은 성화를 계속적인 회개의 실천으로 보는데, 여기서 회개란 우리의 삶을 참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전향)이며(true turning of our life to God), "하나님"을 참으로 신실하게 두려워하므로 전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는 옛 사람과 육을 죽이고, 성령의 살리심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회개는 믿음과 떨어져서는 성립할 수 없고, 언제나 회개와 믿음은 항구적으로 묶여있어 함께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명한 결론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믿음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처럼, 회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점이다. 칼빈이 말하는 기독교는 "하나님" 중심의(신본주의) 종교이다. 모든 교리가 "하나님"의 진리이다. 구원도 하나님의 구원이고,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이고, 칭의는 하나님이 의롭다하여 주시는 은혜이고, 성화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되어져 가는 은혜이며, 믿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면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고, 회개도 하나님께로 계속해서 일생동안 돌아가는 것이다. 물론 일생에 한번만 하는 회개로서의 회심도 있으나 구원받은 자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들어 올려 하나님께로 향하는 일은 성찬에서뿐만 아니라 삶 전체에서도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어야 하고, 경건의 실천으로서의 삶이어야 한다 이 경건의 실천은 필연적으로 선행과 연결되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을 완전하게 받아주신다는 확신도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식이란 두 가지 확신이다. 우리의 믿음과 선행을 하나님이 받아주신다고 하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경건한 삶을 위한 든든한 기초이다. 그리고 이 확신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선의를 가지셨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나의 선행과 봉사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약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7. 결론

칼빈이 말하는 믿음의 지식이란 주지주의적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선의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다. 이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약속하신 말씀에 뿌리를 둔 것이며, 성령의 인치심으로 우리 지성과 마음에 주어진 것이다. 이 신앙은 구원의 확신뿐 아니라 선행에 대한 확신도 포함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본질을 아는 지식이라기 보다는 보다는 그 분이 우리를 향하여 원하시는 바 구원의 호의를 깨닫고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그래서 이것은 구원의 신앙이며, 복음신앙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승천의 신앙으로 또 산 신앙으로 되어져야 하므로 이 복음신앙은 칭의와 성화라는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신본주의 믿음이며, 하나님의 구원과 섭리에 항상 감사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언제나 의식하며 선행을 힘쓰며, 죄짓지 않으려고 언제든지 우리의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회개를 실천하는 성화의 신앙이며 경건을 실천하는 신앙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학과 목회 사역 및 우리의 모든 삶은 이러한 구원의 확신과 경건에 바탕을 둔 복음 신앙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출처 : 행복충전소♥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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