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와 한국교회
이광호 목사
1. 서론
동일한 하나님을 믿으며 동일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하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제각각이다. 문제는 제각기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자기의 신앙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믿음은 과연 상대적인가? 우리는 현대 기독교의 다양한 신앙의 형태들을 포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신앙이었다. 그들은 수 천년의 역사와 다양한 문화적 배경 가운데 살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서로 상이 하지 않았다.1) 그러므로 원리적으로 보아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면 보편교회 가운데서 동질의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의 신앙은 신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선배들의 신앙과 다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끄트머리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동일한 신앙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성령의 간섭을 받아야 하며 성경에 대한 동일한 고백이 있어야만 한다. 즉 그것은 인간들의 신앙적 합의에 따른 결과 때문이 아니라 한 성령, 한 세례, 한 그리스도, 한 성경에 의한 신앙이 확립될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지상의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우리 가운데 칼빈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16세기 종교개혁 현장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다. 당시 로마교회의 비신앙적인 행태와 다양한 이단 사상들에 대해 칼빈은 성경을 기초로 하여 맹렬한 신학적 비판을 가했다. 성경을 벗어난 주장을 하며 비성경적인 신앙활동을 하는 자들을 엄하게 책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 칼빈에 대한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로마가톨릭교와 개신교의 입장은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 철저히 상반되었으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그 시각차는 여전히 크다.2) 어떤 사람들은 칼빈을 매우 훌륭한 교사로 인정하는가 하면 그를 편협한 신학자로 보는 자들도 많이 있다. 물론 칼빈 역시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었으므로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이란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인 신학사상을 완벽한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칼빈주의 신학을 확립하고 있지만 이 역시 개념상 통일성 있는 사상을 구축하고 있지는 못한 상태에다. 우리는 칼빈주의에 대한 본질적 의미와 더불어 포괄적 이해를 함으로써 교회의 뼈대가 되는 참된 신학을 구축해가기를 바란다.
2. 칼빈주의란 무엇인가?
칼빈주의란 무엇인가? 칼빈주의 신학은 칼빈의 개인적인 모든 사상을 추종하는 신학을 말하지 않는다. 칼빈의 신학사상과 칼빈주의의 신학사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오해하는 자들은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이 곧 칼빈주의라 생각한다.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그의 신학에 대해 말씀을 통한 건전한 비평(criticism)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더욱 가까이 알아가고자 애쓴다. 오늘날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 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을 ‘칼빈주의자’로 일컫는다.3)
칼빈은 성경의 원리를 체계화했지만 그가 칼빈주의 신학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직접 정리한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역사적 개혁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부터 있어왔다. 그러므로 칼빈 이전에도 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 등에 의해 성경에 의한 정통 신학이 제시되었으며 칼빈이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칼빈주의란 칼빈이 세운 신학체계로 인해 후대의 성도들이 붙인 이름이며 칼빈이 창안한 신학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신학사상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 교회 가운데 침범하는 세속적인 사상에 대한 변증과 방어체계로서 많은 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였다. 칼빈주의 신학사상을 지향하는 교회들은 많이 있어왔으며 지금도 세계 도처에 흩어져 보편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칼빈의 사상에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없이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인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말씀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며 더욱 진리에 접근해가고자 하기 때문에 칼빈의 개인적인 사상과 상충될 때가 많이 있다. 예를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시기의 성도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지만, 칼빈의 사상에 반하는 성경적 원리를 확인하고 체계화했다. 그러므로 장로교에서 신앙고백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칼빈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성수문제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에 연관성이 있느냐 하는 점과 관련된다. 칼빈은 일요일을 굳이 주일로 지킬 필요는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청교도들은 주일을 매우 중시했다.4) 그러한 신학적 해석은 칼빈의 사상과 많은 차이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3.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서 칼빈주의 신학이 지향하는 사상은 무엇인가?
칼빈주의는 단순한 이론적 체계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신학적 배경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실제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그것 자체로서 부여할 의미는 없는 것이다. 이제 칼빈주의 신학이 교회를 위해 지향하고 있는 몇 가지 함축된 내용들을 살펴보자. 이 의미들은 칼빈주의 교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열매들이다.
(1) 칼빈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중심 주제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 등을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오늘날 개신교회의 뿌리는 사실상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성경을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대의 눈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는데 익숙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세상에 대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을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 성경을 보게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의 절대성을 신앙하는 성숙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개념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무능함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에 달려 있다. 즉 인간 자신의 멋있는 삶이나 의미있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인간의 의미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2) 칼빈주의 신학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기본 생활원리는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성경중심(Scripture-centered), 교회중심(Church-centered)으로 집약될 수 있다.5) 이는 곧 인간의 삶은 인간 자기 중심이 아니며,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국가나 사회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성도의 삶의 의미가 명확하게 정립되고 있다. 나중 신 칼빈주의자들이 그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써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적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고 성경중심에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중심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으며 교회중심에서 국가와 사회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방향을 이미 세상 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뛰어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 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3) 우리가 흔히 TULIP이라는 말로 일컫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교리6)는, 인간의 전적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말한다. 이는 구원론과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주의 5대교리가 일컬어지는 교리는 칼빈이 직접 제시하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반 세기 가량 지난 후 화란에서 작성된 ‘도르트 신경’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7)
이는 하나님께서 완전하심과 그의 능력이 완벽한데 반해 범죄한 인간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그 능력은 전적으로 무능함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과 관계되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처참한 형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에게만 은혜를 베푸시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한 분으로써 인간과 아무런 상의 없이 절대적인 은혜를 베푸시며, 선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에 이르기까지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지킴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에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받은 자의 수를 늘이려 하고,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자들과는 전혀 다른 교리이다.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의지로 믿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하게 하거나 덜하게 할 수 없다.8) 그것은 전적으로 창세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뜻에 기인한 것이다.
(4) 칼빈주의 교회에서는 올바른 말씀선포, 참된 성례의 시행, 온당한 권징의 이행을 교회의 중요한 표지로 이해하고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이 세 가지 표지가 없으면 참된 교회가 아니라 거짓교회라 단정 짓고 있다.9)
우리는 무엇을 교회라 하는가? 십자가가 세워진 건물이 곧 교회인 것은 아니다. 나아가 목사, 장로, 집사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다. 또한 매주일 사람들이 모여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부르며 연보를 하면 그것 자체로서 교회인 것은 아니다.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고 열심히 전도하면 그것으로서 교회인 것도 아니다. 그러한 종교적 행위들은 거짓교회에 속한 불신자들도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참된 교회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올바른 성례가 시행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정당한 권징사역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이런 내용들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거짓교회일 따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교회는 거의 거짓 교회화 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4. 하이퍼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
(1)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
하이퍼 칼빈주의10)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극단적인 신학적 사고를 하고 있다. 그 중 예정론은 절대적이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예정론을 따르면서 '타락전 선택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칼빈은 예정론에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베자(Theodore Beza)가 선택과 유기에 대한 예정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과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서 창조된 사람이 있음을 강조한 것과 비교된다. 물론 타락전 선택설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이퍼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역시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기백성을 예정하고 계심을 언급하고 있다.11)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 곧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확증하셨는데 이는 타락전 선택과 동일한 의미이다.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 중 하나는 하이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와 달리 반 율법주의적 경향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형성된 칼빈주의 신학은 변천해 가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16세기에 기초가 놓여진 칼빈주의 신학은, 17세기의 새로운 환경 가운데서 반 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의 대립되는 신학사상이 등장하게 된다. 반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으며 ‘타락전 선택설’을 따랐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들을 선택하셨으면 그 이후의 율법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무의미화 하였다.
그들의 핵심 신학사상은 창세전 영원한 작정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 예정론을 다룬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반적인 구원의 확신에 관련된 교리를 부정한다. 즉 구원에 대한 성령의 내적인 증거와 성화의 외적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지 사람에게 죄를 알도록 할 따름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므로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한다. 즉 창세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구원이외에 달리 구원받은 인간에게 있는 성령의 내적증거와 성화를 통한 외적 증거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한편, 17세기 후반에는 신율법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반 율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신학사상이다. 신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요구와 연관된 구원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 사람 아담에게 행위언약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어긴 결과 모든 인간이 멸망에 빠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뿐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언약적 요구를 정하셨는데 그것이 곧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써 보여주신 모범을 따른 순종을 요구하시며 이를 믿음으로 용납하신다고 한다. 이 믿음은 회개와 선행을 반드시 동반해야 하며 이로써 칭의에 이른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칼빈주의자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그 신학사상은 정통 칼빈주의 신학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 결국 이 두 사상은 서로 대립하여 반 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율법의 불필요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 자들이 우리가 말하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Hyper-Calvinists)이다.
이 하이퍼 칼빈주의 신학사상은 처음 영국에서 등장하여 점차 미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구원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심하게는 복음 전파 없이도 하나님께서 직접 회개와 중생 사역을 통해서 선택한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나아가 선택된 자들에게는 복음 전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구원이 예정된 자들은 선택의 씨앗을 갖고 태어나므로 결국 구원의 열매에 이르게 되며, 유기된 자들은 저주의 씨앗을 갖고 태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멸망의 열매에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복음을 제시하고 그들을 초청하는 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기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며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며 초청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일반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하여 구원에 참여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에 위배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칼빈주의 교리에서 말하는 제한적 속죄와 배치된 보편적 속죄와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2) 신 칼빈주의(Neo-Calvinism)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의 신학체계에 의한 칼빈주의를 일반적으로 ‘신 칼빈주의’로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경향성은 어떤 형태로든 그 전부터 있어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신 칼빈주의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카이퍼의 신학사상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기독교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카이퍼의 일반은총론, 하나님의 영역주권,12)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등이 신 칼빈주의의 일반적인 특성이라 볼 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이전의 전통적 칼빈주의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폭넓은 신학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전통적 칼빈주의는 교회 중심적 신학을 전개하는 특색을 띠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역시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구원론과 관련지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 영역을 우주적 보편교회와 시대적 지역교회로 부터 국가를 비롯한 세속적 일반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교회뿐 아니라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시키는 세계관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는 칼빈주의의 중심사상에는 모든 피조세계의 각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교회론적 사고의 틀을 넘어 세상과 세속 국가의 모든 영역에 확장시킨 새로운 신학적 틀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전인격적 신앙인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학적 사고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세상에 대한 공격적인 참여적 사고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여기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아브라함 카이퍼 당시 네덜란드의 전반적인 사회 배경이다. 그 때의 네덜란드는 기독교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국가였다. 따라서 당시 모든 국민들은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런 국가 사회의 분위기 가운데서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 문제에 관한 논의를 했던 것이다. 그런 특수한 시대와 지역적 배경 가운데서 형성된 신 칼빈주의 사상임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처럼 전형적인 세속국가에서 그 사상을 그대로 유입하여 적용하려는 것은 억지논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즉 카이퍼가 당시 네덜란드의 정치와 사회 등 각 분야에 관여하고자 했던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 기독교와 무관한 이교적 한국 정치와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면서도 그가 살던 시대와 교회적 배경을 살피지 않아 그의 진정한 신학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사회에 어설프게 적용하려고 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국가와 사회를 향한 신 칼빈주의적 신학사상이 20세기에는 미국의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헤롤드 오켕카, 칼 헨리 등의 ‘신복음주의 운동’과 영국의 존 스타트를 중심으로 하는 로잔언약 운동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경우 스스로 보수주의라 일컫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그 영향 아래 놓여 있다.13) 즉 한국교회에는 이미 전통적인 칼빈주의는 거의 사라지고 없으며, 칼빈주의라 주장하는 자들은 대개 신 칼빈주의자들이다.14)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 자체는 카이퍼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그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카이퍼 이전의 일반은총 개념은 세상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아니라 도리어 소극적 참여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회를 위한 사회참여였을 뿐 세상에 대한 참여자체에 대한 값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사회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삶의 원리에 대한 성도의 일반적인 적용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카이퍼는 일반은총의 개념을 세상을 향한 적극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일반은총 개념이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에게 구분없이 허락하시는 은총 개념인데 반해, 카이퍼의 일반은총은 그 개념을 넘어선 것이다.
그는 교회의 구속적 의미를 넘어서 모든 영역에서 요구되는 일반은총의 개념을 주장했다. 다시 말하자면 신칼빈주의 사상에서는 교회가 불신자와 함께 사회정의를 위해 활동할 수 있으며 인간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은총론에서는, 인간은 신앙과 무관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진선미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나름대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가 세상을 변혁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신 칼빈주의자들은 전통적 칼빈주의를 이원론적이라 보며, 성속의 구별이나 영육의 차이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가 윤리적 선도를 위한 사회적 책임과 정치 경제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하며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존 스타트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칼빈주의를 자처하는 한국의 다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와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신 칼빈주의 사상은 결국 교회를 세속화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변혁을 이야기하면서 도리어 세속에 동화되어 버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브라함 카이퍼를 중심으로 한 신학 사상에 대항하여 소위 ‘31조파’가 태동이 되고 이 교회는 나중 한국의 고신교단과 자매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에 앞장섰던 신학자는 스킬더(K.Schilder)이다. 카이퍼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한 모든 세상의 선함을 강조하여 일반 사회와 문화 속에 남아있는 일반은총을 통한 기독교 문화회복을 주장한 반면,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일반은총이 가능하며 문화도 새롭게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 결과 카이퍼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일반 학문의 영역 등 각 분야에서 창조의 선함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스킬더는 카이퍼로부터 분리하여 깜펀 신학교를 설립하여 교회와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앙운동을 강조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한국의 고신교단은 스킬더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교단과 자매관계에 있으면서 스킬더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고 스킬더가 대항했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에 대한 아무런 비판적 이해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5. 한국교회와 칼빈주의
(1) 신 칼빈주의의 영향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가담하려고 한다. 나아가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서도 신 칼빈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 자체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특색을 띠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사회 변혁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칼빈주의 사상은 외견상 활발해 보이고 세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회 참여적 활동은 성경이 교회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가 아니다.15) 한국의 신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교인들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명선거 운동을 한다든지 일반대학에서 일부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컨닝추방운동’ 등을 전개함으로써 사회개혁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내의 만연한 부정 선거나 신학교에서 있는 ‘컨닝’, 그리고 성도라 하면서 부정행위를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대개 침묵하고 있다. 설령 간간히 음성을 낸다 할지라도 세상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 볼 때 지극히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천국 메시지를 증거했는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형식적 칼빈주의
한국교회는 칼빈주의란 이름만 받아들였을 뿐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 의미에서 의 참된 칼빈주의와 거리가 멀다. 즉 칼빈주의라는 형식만 가지기 원했을 따름이며 진정한 칼빈주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대다수 한국교회는 칼빈을 거의 모르고 있으며 칼빈주의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칼빈의 이름에 익숙하여 그의 신학사상에 대한 막연한 맹신만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칼빈과 칼빈주의를 항상 앞세우고 있지만 칼빈의 사상과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지식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칼빈주의에서 이단시하는 알미니안주의를 말로 이단시하면서, 실제로는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훨씬 지나쳐 있는 이상한 모순에 빠져 있다. 특히 전도와 선교의 문제에 있어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 보다도 더욱 심각한 인본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다수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 칼빈주의자라고 하는 자기 인식과 특이한 종교현상에 빠져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장로교에서 주장하는 한국식 칼빈주의는 전통적 칼빈주의의 신앙고백이나 신앙적 삶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6. 필자와 칼빈, 그리고 칼빈주의
필자는 칼빈과 신학적 입장을 달리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전히 자신을 칼빈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가 자신을 칼빈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칼빈주의의 건전한 신학 정신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며,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을 말씀을 근거로 하여 비판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학자로서 마땅히 시도해야 할 정당한 학문 활동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몇 가지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주일문제16)
종교개혁 당시 로마가톨릭 교회의 주일성수 개념은 가히 우상숭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런 잘못된 신앙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한 날을 절대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인식했으나 주일을 올바르게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 또한 주일을 거의 우상시하고 있다. 우상화된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주일의 참된 의미를 모르면서 율법적 이해를 하며 주일을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주일날 정장 차림을 하고 교회에 츨석하여 종교적 열심과 더불어 많은 봉사를 하면 그것을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일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느냐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며 얼마나 적극적인 봉사를 했느냐 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과 직접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그러한 행위 자체로서 올바르게 주일을 지킨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주일을 잘 지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율법적이며 곧 우상 숭배적 주일성수가 된다.
주일성수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조건은 온전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올바른 예배에 참여함에 달여 있다. 비록 정장차림을 하지 않고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올바른 성찬이 시행되며 귄징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교회에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런 본질적인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주일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를 하고 일요일 종일토록 교회에서 시간을 보낸다 할지라도 올바른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는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많은 목사, 장로들은 주일성수를 강조하면서 정녕 자신들은 주일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칼빈이 왜 주일을 우상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막연히 주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서 스스로 주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한 날을 우상화하는 잘못된 사람들을 말씀을 통해 비판하며 경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주일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당시의 어리거나 잘못된 교인들이 주일을 우상화하고 있었을지라도 공예배 모임을 가지는 주일 자체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안식 후 첫날이 아니라 다른 날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도리어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함으로써 성도들을 일깨우는 것이 더욱 중요했던 사실을 그는 간과했던 것 같다.
(2) 만인제사장 이론 문제17)
종교개혁 당시 로마교회에서는 사제 제사장설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523년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점을 주장했던 것이다. 루터 이후 대다수 개혁주의자들은 그 이론을 비판없이 수용했으며 칼빈 역시 루터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 이론은 시대적 반동에 따른 것으로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된다. 중세 종교개혁 시대 이전에는 모든 성도들 각 개인이 제사장이라는 보편적 이론이 교회 가운데 퍼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중세 로마교회의 주장과 시대적 정황에 따른 이론일 수 있으며 당시 잘못된 신학에 대한 반동적 이론이었던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시대와 환경을 초월한 성경 자체의 교훈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신학적 해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만인제사장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제나 목사가 신약시대에 있어서 특별한 제사장이라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신약시대의 제사장은 지 교회(local-branch)이다. 즉 지 교회 단위에서 제사장의 직무와 기능이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신약시대의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곧 제사장 기능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세례와 성찬이 베풀어지며 권징사역이 이루어지는 지 교회가 곧 제사장인 점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3) 전쟁18)과 사형19), 그리고 인위적 생명박탈20)의 문제
종교개혁 당시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다. 진리를 위해 싸운다는 명분으로 종교전쟁을 통해 사람을 죽이거나 진리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생명을 박탈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더구나 당시 마녀사냥으로 인해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생명을 잃었다. 그러한 중세의 사회적 분위기가 생명에 대한 인위적 결정을 자연스럽게 했으며 인명경시 풍조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칼빈은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입장을 가졌고 사형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즉 인간의 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역시 올바른 성경 해석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 당시의 특별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종교 지배층에서 조직적인 측면에서 반 교회적이라 판단되는 특정인을 사탄의 앞잡이로 간주하여 심하게 탄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그런 현상이 전체적으로 빈번히 일어났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은 14,15세기에 시작되어 16,17세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당시의 유럽은 마녀사냥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기독교 내부의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종교 지도계층은 그것을 무마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 조직의 부패한 활동을 문제 삼으려 하던 세력에게 공포감을 줌으로써 지배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보편화되어 가는 동안 일반 시민들은 사탄으로 인한 마법과 그것을 주도하는 마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당시 교회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은 조직에 불리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여겨지는 반대자들을 사탄을 핑계대어 처단함으로써 종교적 정당성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이 그런 분위기에 동조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의 그런 사회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21)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로서 경계해야 할 인물로 생각했다. 세르베투스는 이단혐의로 인해, 1553년 후반기 제네바에서 두 달 이상의 조사와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화형을 당했다. 칼빈은 베자와 함께 그 재판을 주도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화형에 처함으로써 상당한 신학적 논쟁을 야기했으며 당시 신교도들 사이에는 칼빈을 비판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중세 유럽사회는 개인의 인권보다 전체 사회를 더욱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한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중세에 진리를 위한 투쟁이 교회를 해롭게 한 이단으로 판단되어 사형에 처해진 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위클리프(John Wycliff), 후스(Jan Huss)와 같은 이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투쟁했지만 당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칼빈의 자세가 옳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 한다. 물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 칼빈은 구약성경의 사형에 관한 예들과 신약성경의 예, 특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같은 말씀들을 배경으로 하여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시대적 환경에 예속된 그가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발생한 문제라 볼 수 밖에 없다.
(4) 칼빈의 예정론
칼빈주의의 핵심은 예정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칼빈주의자란 예정론에 대한 신봉자를 말한다.22)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칼빈의 독자적인 신학사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발견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거스틴이 이미 오래전에 동일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칼빈은 타락전 선택과 타락후 선택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전반적으로 미흡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예정론 자체에 있어서라면 필자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견해가 정통 칼빈주의자들 보다 오히려 더 건전한 견해로 이해한다. 물론 하이퍼 칼빈주의의 견해 역시 만족할만한 이론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예정하셨을 때, 택자와 유기할 자를 미리 분리하여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임의대로 구원할 자와 유기할 자를 따로 구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에 따라 사람을 지으려고 작정하셨을 때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 예정하셨다. 칼빈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유기된 자들이란 하나님의 형상 없이 아담의 형상만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들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23)
7. 결론
우리는 칼빈주의를 논하면서 적어도 세 가지 점을 유의해야 한다. 첫째, 칼빈주의가 칼빈을 맹종하는 것인 양 생각한다는 점이다. 둘째, 칼빈주의 신학사상을 완벽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는 반성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절대다수 교회들은 스스로 칼빈주의를 따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칼빈주의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칼빈주의 의미와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칼빈주의자임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엉뚱한 신앙의 길을 재촉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칼빈의 개인적인 신학사상 가운데 성경을 통해 확인해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신학사상을 맹종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한 칼빈주의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 칼빈주의 신학 역시 완전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완벽함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는 자세를 항상 견지해야 한다.
칼빈이 만일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건전하게 비판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바람직하게 볼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자들 역시 그와 동일한 자세를 보일 것이다. 단, 무분별한 비판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기초하고 성령의 음성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경우에만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정통 칼빈주의와 비교되는 하이퍼 칼빈주의와 신 칼빈주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칼빈주의 신학을 통해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분별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신 칼빈주의의 경향성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표현되는 신앙의 형태를 중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CCM, CCD 등은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시되거나 성도들의 흥미나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화된 개념이 된다.
나아가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도 성경을 통해 확인되는 하나님 자신의 뜻보다 시대적 기능을 통한 선교를 강조하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선교가 마치 유행처럼 되어 무용선교, 음악선교, 태권도 선교, 의료선교 등 신조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나이트 클럽에서 기독교 집회를 열어 예배를 보며 전도의 기회를 삼는다고 한다.24) 그렇게 해서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의 사상대로 인간은 그 자체로서 부패한 존재이다. 아무리 순수한 동기라 할지라도 부패한 인간의 의도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한다. 칼빈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시대의 이러한 종교적 풍조는 매우 위험한 단계이다.
우리 시대에 발생하는 그런 문제들은 곧 교회와 신앙의 세속화를 의미하고 있다. 현대의 대다수 한국교회는 무분별한 세속화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이상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없을 만큼 세속화되어 있는 것이다. 다수의 신학자들은 우리 시대는 교회의 담을 낮추어야 할 때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극단적으로는 아예 교회의 담을 완전히 허물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마저 다수 있다. 그러한 사상은 결국 교회로 하여금 진리를 포기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위험 속으로 몰아가게 된다.
우리시대는 진리와 비진리를 섞는 것이 마치 관용인 듯 여기는 악한 시대가 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칼빈을 답습하자는 말이 아니며 칼빈을 영웅화하자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의 참된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교회와 성도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말이다.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 거짓 신학과 싸우며 투쟁하는 것이 칼빈주의가 지향하는 신학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참된 신학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신학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교회와 진리의 보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허물어져 가는 한국교회에 진정한 칼빈신학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기다릴 따름이다.
출처 : 알파코스
글쓴이 : 푸르름 원글보기
이광호 목사
1. 서론
동일한 하나님을 믿으며 동일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고 하지만 현대 기독교인들의 믿음은 제각각이다. 문제는 제각기 다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자기의 신앙이 옳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믿음은 과연 상대적인가? 우리는 현대 기독교의 다양한 신앙의 형태들을 포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동일한 신앙이었다. 그들은 수 천년의 역사와 다양한 문화적 배경 가운데 살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서로 상이 하지 않았다.1) 그러므로 원리적으로 보아 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면 보편교회 가운데서 동질의 신앙을 가져야만 한다. 우리의 신앙은 신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선배들의 신앙과 다르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끄트머리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동일한 신앙을 소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성령의 간섭을 받아야 하며 성경에 대한 동일한 고백이 있어야만 한다. 즉 그것은 인간들의 신앙적 합의에 따른 결과 때문이 아니라 한 성령, 한 세례, 한 그리스도, 한 성경에 의한 신앙이 확립될 때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과연 지상의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신앙을 가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우리 가운데 칼빈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16세기 종교개혁 현장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이다. 당시 로마교회의 비신앙적인 행태와 다양한 이단 사상들에 대해 칼빈은 성경을 기초로 하여 맹렬한 신학적 비판을 가했다. 성경을 벗어난 주장을 하며 비성경적인 신앙활동을 하는 자들을 엄하게 책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있어서 칼빈에 대한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로마가톨릭교와 개신교의 입장은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 철저히 상반되었으며 개신교 내부에서도 그 시각차는 여전히 크다.2) 어떤 사람들은 칼빈을 매우 훌륭한 교사로 인정하는가 하면 그를 편협한 신학자로 보는 자들도 많이 있다. 물론 칼빈 역시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정을 가진 인간이었으므로 부족한 점이 많았을 것이란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인 신학사상을 완벽한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칼빈주의 신학을 확립하고 있지만 이 역시 개념상 통일성 있는 사상을 구축하고 있지는 못한 상태에다. 우리는 칼빈주의에 대한 본질적 의미와 더불어 포괄적 이해를 함으로써 교회의 뼈대가 되는 참된 신학을 구축해가기를 바란다.
2. 칼빈주의란 무엇인가?
칼빈주의란 무엇인가? 칼빈주의 신학은 칼빈의 개인적인 모든 사상을 추종하는 신학을 말하지 않는다. 칼빈의 신학사상과 칼빈주의의 신학사상이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를 오해하는 자들은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이 곧 칼빈주의라 생각한다.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그의 신학에 대해 말씀을 통한 건전한 비평(criticism)과 더불어 하나님의 뜻을 더욱 가까이 알아가고자 애쓴다. 오늘날 개혁교회 혹은 장로교회 전통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을 ‘칼빈주의자’로 일컫는다.3)
칼빈은 성경의 원리를 체계화했지만 그가 칼빈주의 신학에서 취급된 모든 사상들을 직접 정리한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역사적 개혁주의는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부터 있어왔다. 그러므로 칼빈 이전에도 위클리프, 후스, 쯔빙글리 등에 의해 성경에 의한 정통 신학이 제시되었으며 칼빈이 이를 보다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칼빈주의란 칼빈이 세운 신학체계로 인해 후대의 성도들이 붙인 이름이며 칼빈이 창안한 신학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신학사상은 성경의 직접적인 교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사적 교회 가운데 침범하는 세속적인 사상에 대한 변증과 방어체계로서 많은 학자들이 노력을 기울였다. 칼빈주의 신학사상을 지향하는 교회들은 많이 있어왔으며 지금도 세계 도처에 흩어져 보편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칼빈의 사상에 맹종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가감없이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인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말씀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며 더욱 진리에 접근해가고자 하기 때문에 칼빈의 개인적인 사상과 상충될 때가 많이 있다. 예를들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시기의 성도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지만, 칼빈의 사상에 반하는 성경적 원리를 확인하고 체계화했다. 그러므로 장로교에서 신앙고백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칼빈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성수문제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사이에 연관성이 있느냐 하는 점과 관련된다. 칼빈은 일요일을 굳이 주일로 지킬 필요는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청교도들은 주일을 매우 중시했다.4) 그러한 신학적 해석은 칼빈의 사상과 많은 차이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철저한 칼빈주의자들이었다.
3. 교회를 위한 신학으로서 칼빈주의 신학이 지향하는 사상은 무엇인가?
칼빈주의는 단순한 이론적 체계가 아니라 교회를 위한 신학적 배경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위한 실제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그것 자체로서 부여할 의미는 없는 것이다. 이제 칼빈주의 신학이 교회를 위해 지향하고 있는 몇 가지 함축된 내용들을 살펴보자. 이 의미들은 칼빈주의 교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중요한 신학적 열매들이다.
(1) 칼빈주의 신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중심 주제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 등을 중요하게 받아들인다.
오늘날 개신교회의 뿌리는 사실상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경만이 하나님의 계시이며 성경을 통해 모든 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성경을 통해 현실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시대의 눈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는데 익숙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면 성경이 세상에 대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을 위한 보조적 수단으로서 성경을 보게 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의 절대성을 신앙하는 성숙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개념 역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무능함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존재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유일한 존재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에 달려 있다. 즉 인간 자신의 멋있는 삶이나 의미있는 인생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인간의 의미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2) 칼빈주의 신학이 소유하고 있는 신앙의 기본 생활원리는 하나님 중심(God-centered), 성경중심(Scripture-centered), 교회중심(Church-centered)으로 집약될 수 있다.5) 이는 곧 인간의 삶은 인간 자기 중심이 아니며,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국가나 사회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다.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성도의 삶의 의미가 명확하게 정립되고 있다. 나중 신 칼빈주의자들이 그 의미를 확대하여 해석하고 적용함으로써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적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고 성경중심에서 인간의 이성과 경험중심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으며 교회중심에서 국가와 사회중심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현대 한국교회에서는 여전히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그 방향을 이미 세상 쪽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뛰어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 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3) 우리가 흔히 TULIP이라는 말로 일컫고 있는 칼빈주의 5대 교리6)는, 인간의 전적부패(Total depravity),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제한 속죄(Limited atonement),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을 말한다. 이는 구원론과 관계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주의 5대교리가 일컬어지는 교리는 칼빈이 직접 제시하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후 반 세기 가량 지난 후 화란에서 작성된 ‘도르트 신경’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7)
이는 하나님께서 완전하심과 그의 능력이 완벽한데 반해 범죄한 인간은 완전히 부패했으며 그 능력은 전적으로 무능함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과 관계되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처참한 형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선택하신 자기 백성에게만 은혜를 베푸시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신실한 분으로써 인간과 아무런 상의 없이 절대적인 은혜를 베푸시며, 선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천국에 이르기까지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지킴으로써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시대에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받은 자의 수를 늘이려 하고, 인간의 노력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자들과는 전혀 다른 교리이다.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인간의 의지로 믿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하게 하거나 덜하게 할 수 없다.8) 그것은 전적으로 창세전에 세워진 하나님의 뜻에 기인한 것이다.
(4) 칼빈주의 교회에서는 올바른 말씀선포, 참된 성례의 시행, 온당한 권징의 이행을 교회의 중요한 표지로 이해하고 있다. 벨직 신앙고백서에서는 이 세 가지 표지가 없으면 참된 교회가 아니라 거짓교회라 단정 짓고 있다.9)
우리는 무엇을 교회라 하는가? 십자가가 세워진 건물이 곧 교회인 것은 아니다. 나아가 목사, 장로, 집사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다. 또한 매주일 사람들이 모여 설교를 듣고 찬송가를 부르며 연보를 하면 그것 자체로서 교회인 것은 아니다.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고 열심히 전도하면 그것으로서 교회인 것도 아니다. 그러한 종교적 행위들은 거짓교회에 속한 불신자들도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참된 교회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올바른 성례가 시행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한 정당한 권징사역이 이루어져야 한다. 만일 이런 내용들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교회는 이름만 교회일 뿐 실상은 거짓교회일 따름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교회는 거의 거짓 교회화 되어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4. 하이퍼 칼빈주의와 신칼빈주의
(1) 하이퍼 칼빈주의(Hyper-Calvinism)
하이퍼 칼빈주의10)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극단적인 신학적 사고를 하고 있다. 그 중 예정론은 절대적이다.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의 예정론을 따르면서 '타락전 선택설'을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다.
칼빈은 예정론에서 ‘타락전 선택설’과 ‘타락후 선택설’에 대한 명확한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 이는 베자(Theodore Beza)가 선택과 유기에 대한 예정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사람과 하나님의 진노를 위해서 창조된 사람이 있음을 강조한 것과 비교된다. 물론 타락전 선택설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하이퍼 칼빈주의자는 아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역시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하신 뜻에 따라 자기백성을 예정하고 계심을 언급하고 있다.11)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기초를 놓기 전 곧 창세전에 이미 예정된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확증하셨는데 이는 타락전 선택과 동일한 의미이다.
우리가 유념해야할 것 중 하나는 하이퍼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와 달리 반 율법주의적 경향성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형성된 칼빈주의 신학은 변천해 가는 인간의 역사 가운데서 점차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 16세기에 기초가 놓여진 칼빈주의 신학은, 17세기의 새로운 환경 가운데서 반 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의 대립되는 신학사상이 등장하게 된다. 반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았으며 ‘타락전 선택설’을 따랐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들을 선택하셨으면 그 이후의 율법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무의미화 하였다.
그들의 핵심 신학사상은 창세전 영원한 작정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언약과 예정론을 다룬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반적인 구원의 확신에 관련된 교리를 부정한다. 즉 구원에 대한 성령의 내적인 증거와 성화의 외적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단지 사람에게 죄를 알도록 할 따름이며 믿는 자들은 이미 의롭다 칭함을 받았으므로 믿는 자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고 한다. 즉 창세전에 작정하신 하나님의 구원이외에 달리 구원받은 인간에게 있는 성령의 내적증거와 성화를 통한 외적 증거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한편, 17세기 후반에는 신율법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반 율법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신학사상이다. 신율법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작정에 따른 요구와 연관된 구원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 사람 아담에게 행위언약이 주어졌지만 그것을 어긴 결과 모든 인간이 멸망에 빠졌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뿐 아니라 신약시대에도 새로운 언약적 요구를 정하셨는데 그것이 곧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써 보여주신 모범을 따른 순종을 요구하시며 이를 믿음으로 용납하신다고 한다. 이 믿음은 회개와 선행을 반드시 동반해야 하며 이로써 칭의에 이른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칼빈주의자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그 신학사상은 정통 칼빈주의 신학과 상당한 차이가 난다. 결국 이 두 사상은 서로 대립하여 반 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 논쟁으로 이어졌는데 율법의 불필요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 자들이 우리가 말하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Hyper-Calvinists)이다.
이 하이퍼 칼빈주의 신학사상은 처음 영국에서 등장하여 점차 미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구원문제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심하게는 복음 전파 없이도 하나님께서 직접 회개와 중생 사역을 통해서 선택한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나아가 선택된 자들에게는 복음 전도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구원이 예정된 자들은 선택의 씨앗을 갖고 태어나므로 결국 구원의 열매에 이르게 되며, 유기된 자들은 저주의 씨앗을 갖고 태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멸망의 열매에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불신자들에게 진리를 선포하는 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복음을 제시하고 그들을 초청하는 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선택된 자기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이며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며 초청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일반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하여 구원에 참여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교리에 위배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칼빈주의 교리에서 말하는 제한적 속죄와 배치된 보편적 속죄와 구원을 말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2) 신 칼빈주의(Neo-Calvinism)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의 신학체계에 의한 칼빈주의를 일반적으로 ‘신 칼빈주의’로 이해한다. 물론 이러한 경향성은 어떤 형태로든 그 전부터 있어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며 신 칼빈주의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카이퍼의 신학사상을 통해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기독교 세계를 건설하고자 하여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카이퍼의 일반은총론, 하나님의 영역주권,12)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등이 신 칼빈주의의 일반적인 특성이라 볼 수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이전의 전통적 칼빈주의와 비교해 볼 때 상당히 폭넓은 신학적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전통적 칼빈주의는 교회 중심적 신학을 전개하는 특색을 띠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역시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구원론과 관련지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칼빈주의 5대 교리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 영역을 우주적 보편교회와 시대적 지역교회로 부터 국가를 비롯한 세속적 일반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교회뿐 아니라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변화시키는 세계관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는 칼빈주의의 중심사상에는 모든 피조세계의 각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교회론적 사고의 틀을 넘어 세상과 세속 국가의 모든 영역에 확장시킨 새로운 신학적 틀을 확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전인격적 신앙인으로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학적 사고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세상에 대한 공격적인 참여적 사고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우리가 여기서 결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아브라함 카이퍼 당시 네덜란드의 전반적인 사회 배경이다. 그 때의 네덜란드는 기독교 신앙이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국가였다. 따라서 당시 모든 국민들은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런 국가 사회의 분위기 가운데서 카이퍼는 하나님의 주권 문제에 관한 논의를 했던 것이다. 그런 특수한 시대와 지역적 배경 가운데서 형성된 신 칼빈주의 사상임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처럼 전형적인 세속국가에서 그 사상을 그대로 유입하여 적용하려는 것은 억지논리가 될 수 밖에 없다. 즉 카이퍼가 당시 네덜란드의 정치와 사회 등 각 분야에 관여하고자 했던 것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 기독교와 무관한 이교적 한국 정치와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 한국 교회는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면서도 그가 살던 시대와 교회적 배경을 살피지 않아 그의 진정한 신학사상을 이해하지 못한 채 한국사회에 어설프게 적용하려고 하는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국가와 사회를 향한 신 칼빈주의적 신학사상이 20세기에는 미국의 풀러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헤롤드 오켕카, 칼 헨리 등의 ‘신복음주의 운동’과 영국의 존 스타트를 중심으로 하는 로잔언약 운동 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추세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복음주의 교회들에게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경우 스스로 보수주의라 일컫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그 영향 아래 놓여 있다.13) 즉 한국교회에는 이미 전통적인 칼빈주의는 거의 사라지고 없으며, 칼빈주의라 주장하는 자들은 대개 신 칼빈주의자들이다.14)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 자체는 카이퍼의 독창적인 사상이 아니라 그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카이퍼 이전의 일반은총 개념은 세상에 대한 적극적 참여가 아니라 도리어 소극적 참여를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회를 위한 사회참여였을 뿐 세상에 대한 참여자체에 대한 값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사회 정치적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삶의 원리에 대한 성도의 일반적인 적용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카이퍼는 일반은총의 개념을 세상을 향한 적극적 개념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일반은총 개념이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에게 구분없이 허락하시는 은총 개념인데 반해, 카이퍼의 일반은총은 그 개념을 넘어선 것이다.
그는 교회의 구속적 의미를 넘어서 모든 영역에서 요구되는 일반은총의 개념을 주장했다. 다시 말하자면 신칼빈주의 사상에서는 교회가 불신자와 함께 사회정의를 위해 활동할 수 있으며 인간적인 삶을 구현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반은총론에서는, 인간은 신앙과 무관하게 세상에 존재하는 진선미를 느끼고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성도들은 불신자들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나름대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도가 세상을 변혁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신 칼빈주의자들은 전통적 칼빈주의를 이원론적이라 보며, 성속의 구별이나 영육의 차이를 지나치게 구분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기독교가 윤리적 선도를 위한 사회적 책임과 정치 경제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책임을 다해야 하며 문화적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존 스타트를 비롯한 서구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칼빈주의를 자처하는 한국의 다수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와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신 칼빈주의 사상은 결국 교회를 세속화에 빠지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변혁을 이야기하면서 도리어 세속에 동화되어 버린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의 속성에 비추어 볼 때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한편, 네덜란드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브라함 카이퍼를 중심으로 한 신학 사상에 대항하여 소위 ‘31조파’가 태동이 되고 이 교회는 나중 한국의 고신교단과 자매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에 앞장섰던 신학자는 스킬더(K.Schilder)이다. 카이퍼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한 모든 세상의 선함을 강조하여 일반 사회와 문화 속에 남아있는 일반은총을 통한 기독교 문화회복을 주장한 반면, 스킬더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만 일반은총이 가능하며 문화도 새롭게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 결과 카이퍼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일반 학문의 영역 등 각 분야에서 창조의 선함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스킬더는 카이퍼로부터 분리하여 깜펀 신학교를 설립하여 교회와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앙운동을 강조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한국의 고신교단은 스킬더의 신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교단과 자매관계에 있으면서 스킬더의 사상과는 거리가 멀고 스킬더가 대항했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사상에 대한 아무런 비판적 이해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5. 한국교회와 칼빈주의
(1) 신 칼빈주의의 영향
한국의 보수주의 교회들은 일반적으로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그들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 가담하려고 한다. 나아가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서도 신 칼빈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한 문제에 대해서는 그 자체에 대하여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는 특색을 띠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사회 변혁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칼빈주의 사상은 외견상 활발해 보이고 세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사회 참여적 활동은 성경이 교회에게 가르치고 있는 바가 아니다.15) 한국의 신 칼빈주의를 지향하는 교인들이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명선거 운동을 한다든지 일반대학에서 일부 대학생 선교단체들이 ‘컨닝추방운동’ 등을 전개함으로써 사회개혁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 내의 만연한 부정 선거나 신학교에서 있는 ‘컨닝’, 그리고 성도라 하면서 부정행위를 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대개 침묵하고 있다. 설령 간간히 음성을 낸다 할지라도 세상에 대한 관심과 비교해 볼 때 지극히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천국 메시지를 증거했는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형식적 칼빈주의
한국교회는 칼빈주의란 이름만 받아들였을 뿐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전통적 의미에서 의 참된 칼빈주의와 거리가 멀다. 즉 칼빈주의라는 형식만 가지기 원했을 따름이며 진정한 칼빈주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대다수 한국교회는 칼빈을 거의 모르고 있으며 칼빈주의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칼빈의 이름에 익숙하여 그의 신학사상에 대한 막연한 맹신만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칼빈과 칼빈주의를 항상 앞세우고 있지만 칼빈의 사상과 칼빈주의 신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지식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칼빈주의에서 이단시하는 알미니안주의를 말로 이단시하면서, 실제로는 알미니안주의 신학을 훨씬 지나쳐 있는 이상한 모순에 빠져 있다. 특히 전도와 선교의 문제에 있어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 보다도 더욱 심각한 인본주의에 함몰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다수 교회 지도자들은 스스로 칼빈주의자라고 하는 자기 인식과 특이한 종교현상에 빠져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장로교에서 주장하는 한국식 칼빈주의는 전통적 칼빈주의의 신앙고백이나 신앙적 삶과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6. 필자와 칼빈, 그리고 칼빈주의
필자는 칼빈과 신학적 입장을 달리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전히 자신을 칼빈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필자가 자신을 칼빈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칼빈주의의 건전한 신학 정신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며, 칼빈 개인의 신학사상을 말씀을 근거로 하여 비판하는 것은 교회에 속한 학자로서 마땅히 시도해야 할 정당한 학문 활동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몇 가지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1)주일문제16)
종교개혁 당시 로마가톨릭 교회의 주일성수 개념은 가히 우상숭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런 잘못된 신앙관에서 벗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주일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한 날을 절대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인식했으나 주일을 올바르게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 않았다.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 또한 주일을 거의 우상시하고 있다. 우상화된 주일을 지킨다는 것은 주일의 참된 의미를 모르면서 율법적 이해를 하며 주일을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주일날 정장 차림을 하고 교회에 츨석하여 종교적 열심과 더불어 많은 봉사를 하면 그것을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일을 올바르게 지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보냈느냐 하는 것이 본질이 아니며 얼마나 적극적인 봉사를 했느냐 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과 직접 상관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그러한 행위 자체로서 올바르게 주일을 지킨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만일 그런 식으로 주일을 잘 지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율법적이며 곧 우상 숭배적 주일성수가 된다.
주일성수를 올바르게 하기 위한 조건은 온전한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올바른 예배에 참여함에 달여 있다. 비록 정장차림을 하지 않고 많은 액수의 연보를 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르게 선포되고 올바른 성찬이 시행되며 귄징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교회에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런 본질적인 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주일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가 설교를 하고 일요일 종일토록 교회에서 시간을 보낸다 할지라도 올바른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는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의 많은 목사, 장로들은 주일성수를 강조하면서 정녕 자신들은 주일을 전혀 지키지 않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칼빈이 왜 주일을 우상화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분명히 이해해야만 한다. 그는 막연히 주일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주일을 지키지 않으면서 스스로 주일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한 날을 우상화하는 잘못된 사람들을 말씀을 통해 비판하며 경고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주일에 대한 칼빈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설령 당시의 어리거나 잘못된 교인들이 주일을 우상화하고 있었을지라도 공예배 모임을 가지는 주일 자체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안식 후 첫날이 아니라 다른 날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은 잘못이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도리어 주일을 온전히 지키는 의미에 대한 설명을 함으로써 성도들을 일깨우는 것이 더욱 중요했던 사실을 그는 간과했던 것 같다.
(2) 만인제사장 이론 문제17)
종교개혁 당시 로마교회에서는 사제 제사장설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루터는 만인제사장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1523년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점을 주장했던 것이다. 루터 이후 대다수 개혁주의자들은 그 이론을 비판없이 수용했으며 칼빈 역시 루터의 사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그 이론은 시대적 반동에 따른 것으로서 새로운 해석이 요구된다. 중세 종교개혁 시대 이전에는 모든 성도들 각 개인이 제사장이라는 보편적 이론이 교회 가운데 퍼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중세 로마교회의 주장과 시대적 정황에 따른 이론일 수 있으며 당시 잘못된 신학에 대한 반동적 이론이었던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시대와 환경을 초월한 성경 자체의 교훈으로 말미암는 순수한 신학적 해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만인제사장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제나 목사가 신약시대에 있어서 특별한 제사장이라는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필자가 이해하는 신약시대의 제사장은 지 교회(local-branch)이다. 즉 지 교회 단위에서 제사장의 직무와 기능이 이해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신약시대의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곧 제사장 기능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독립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세례와 성찬이 베풀어지며 권징사역이 이루어지는 지 교회가 곧 제사장인 점을 우리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는 교회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3) 전쟁18)과 사형19), 그리고 인위적 생명박탈20)의 문제
종교개혁 당시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다. 진리를 위해 싸운다는 명분으로 종교전쟁을 통해 사람을 죽이거나 진리에서 벗어났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생명을 박탈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더구나 당시 마녀사냥으로 인해 무고한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생명을 잃었다. 그러한 중세의 사회적 분위기가 생명에 대한 인위적 결정을 자연스럽게 했으며 인명경시 풍조를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칼빈은 전쟁의 정당성에 대한 입장을 가졌고 사형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즉 인간의 생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역시 올바른 성경 해석에 기초한 것이라기 보다 당시의 특별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는 종교 지배층에서 조직적인 측면에서 반 교회적이라 판단되는 특정인을 사탄의 앞잡이로 간주하여 심하게 탄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그런 현상이 전체적으로 빈번히 일어났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은 14,15세기에 시작되어 16,17세기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당시의 유럽은 마녀사냥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기독교 내부의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종교 지도계층은 그것을 무마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것을 최대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교 조직의 부패한 활동을 문제 삼으려 하던 세력에게 공포감을 줌으로써 지배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런 분위기가 보편화되어 가는 동안 일반 시민들은 사탄으로 인한 마법과 그것을 주도하는 마녀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당시 교회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은 조직에 불리한 문제를 야기한다고 여겨지는 반대자들을 사탄을 핑계대어 처단함으로써 종교적 정당성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이 그런 분위기에 동조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의 그런 사회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란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21)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로서 경계해야 할 인물로 생각했다. 세르베투스는 이단혐의로 인해, 1553년 후반기 제네바에서 두 달 이상의 조사와 재판을 받고 사형을 언도받아 화형을 당했다. 칼빈은 베자와 함께 그 재판을 주도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화형에 처함으로써 상당한 신학적 논쟁을 야기했으며 당시 신교도들 사이에는 칼빈을 비판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중세 유럽사회는 개인의 인권보다 전체 사회를 더욱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을 당한 자들이 많이 있었던 것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중세에 진리를 위한 투쟁이 교회를 해롭게 한 이단으로 판단되어 사형에 처해진 자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위클리프(John Wycliff), 후스(Jan Huss)와 같은 이들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투쟁했지만 당시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비참하게 처형당하게 되었다.
우리는 세르베투스에 대한 칼빈의 자세가 옳지 않았던 것으로 이해 한다. 물론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할지라도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박탈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 칼빈은 구약성경의 사형에 관한 예들과 신약성경의 예, 특히 사도행전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과 같은 말씀들을 배경으로 하여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시대적 환경에 예속된 그가 성경 말씀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발생한 문제라 볼 수 밖에 없다.
(4) 칼빈의 예정론
칼빈주의의 핵심은 예정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칼빈주의자란 예정론에 대한 신봉자를 말한다.22)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칼빈의 독자적인 신학사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통해 발견하고 있는 내용이다. 어거스틴이 이미 오래전에 동일한 주장을 했다. 그러나 칼빈은 타락전 선택과 타락후 선택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칼빈주의의 예정론은 전반적으로 미흡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예정론 자체에 있어서라면 필자는 하이퍼 칼빈주의자들의 견해가 정통 칼빈주의자들 보다 오히려 더 건전한 견해로 이해한다. 물론 하이퍼 칼빈주의의 견해 역시 만족할만한 이론은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예정하셨을 때, 택자와 유기할 자를 미리 분리하여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죄가 발생하기 전에 미리 임의대로 구원할 자와 유기할 자를 따로 구분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에 따라 사람을 지으려고 작정하셨을 때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로 예정하셨다. 칼빈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유기된 자들이란 하나님의 형상 없이 아담의 형상만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들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23)
7. 결론
우리는 칼빈주의를 논하면서 적어도 세 가지 점을 유의해야 한다. 첫째, 칼빈주의가 칼빈을 맹종하는 것인 양 생각한다는 점이다. 둘째, 칼빈주의 신학사상을 완벽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 진정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는 반성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의 절대다수 교회들은 스스로 칼빈주의를 따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칼빈주의의 의미와 내용에 대해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칼빈주의 의미와 내용을 알지 못한 채 칼빈주의자임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엉뚱한 신앙의 길을 재촉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칼빈의 개인적인 신학사상 가운데 성경을 통해 확인해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신학사상을 맹종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순수한 칼빈주의자의 자리에 설 수 있다. 칼빈주의 신학 역시 완전하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완벽함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는 자세를 항상 견지해야 한다.
칼빈이 만일 우리 시대에 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학을 건전하게 비판하는 성도들의 자세를 바람직하게 볼 것이다. 그리고 역사적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자들 역시 그와 동일한 자세를 보일 것이다. 단, 무분별한 비판이 아니라 성경말씀에 기초하고 성령의 음성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을 경우에만 그러할 것이다.
우리는 정통 칼빈주의와 비교되는 하이퍼 칼빈주의와 신 칼빈주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칼빈주의 신학을 통해 참 교회와 거짓 교회를 분별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신 칼빈주의의 경향성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표현되는 신앙의 형태를 중시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CCM, CCD 등은 대표적이다.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에서는,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시되거나 성도들의 흥미나 관심을 끌게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상화된 개념이 된다.
나아가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도 성경을 통해 확인되는 하나님 자신의 뜻보다 시대적 기능을 통한 선교를 강조하게 된다면 심각한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선교가 마치 유행처럼 되어 무용선교, 음악선교, 태권도 선교, 의료선교 등 신조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심지어는 나이트 클럽에서 기독교 집회를 열어 예배를 보며 전도의 기회를 삼는다고 한다.24) 그렇게 해서 세상에 가까이 다가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칼빈주의의 사상대로 인간은 그 자체로서 부패한 존재이다. 아무리 순수한 동기라 할지라도 부패한 인간의 의도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못한다. 칼빈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 시대의 이러한 종교적 풍조는 매우 위험한 단계이다.
우리 시대에 발생하는 그런 문제들은 곧 교회와 신앙의 세속화를 의미하고 있다. 현대의 대다수 한국교회는 무분별한 세속화에 완전히 함몰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이상 교회와 세상의 구분이 없을 만큼 세속화되어 있는 것이다. 다수의 신학자들은 우리 시대는 교회의 담을 낮추어야 할 때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극단적으로는 아예 교회의 담을 완전히 허물어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마저 다수 있다. 그러한 사상은 결국 교회로 하여금 진리를 포기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위험 속으로 몰아가게 된다.
우리시대는 진리와 비진리를 섞는 것이 마치 관용인 듯 여기는 악한 시대가 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칼빈을 답습하자는 말이 아니며 칼빈을 영웅화하자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의 참된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교회와 성도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말이다.
진리를 보수하기 위해 거짓 신학과 싸우며 투쟁하는 것이 칼빈주의가 지향하는 신학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올바르게 세우기 위해 참된 신학정신을 회복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것은 신학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교회와 진리의 보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허물어져 가는 한국교회에 진정한 칼빈신학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기다릴 따름이다.
출처 : 알파코스
글쓴이 : 푸르름 원글보기
'◑ 자료 18,185편 ◑ > 자료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오웬의 구속에 대한 삼위일체적 이해 (0) | 2021.11.02 |
---|---|
칼빈의 신앙론/박해경 교수(ACTS, 조직신학) (0) | 2021.11.02 |
칼뱅주의 신학 (0) | 2021.11.02 |
윌리암 틴데일 (0) | 2021.11.02 |
미래의 주인 (에베소서 6:4) (0) | 2021.11.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