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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절본회퍼 /허호익 교수

by 【고동엽】 2021. 10. 27.
수난절

나는 여기에서 두 번째로 수난절을 보내고 있다. 내가 받은 편지들 가운데서 나의 '고난'에 대해 언급하는 이야기를 읽을 때 내 마음속에서는 저항이 일어난다. 나에게 이것은 마치 신성모독처럼 보인다. 이러한 일들은 드러마처럼 극화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당신보다 혹은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고난받고 있다'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의심사러운 것이다. 물론 여기(감옥)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혐오스러운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마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상황을 너무 심각하고 엄숙하게 받아들이곤 한다. 과거에 나는 카톨릭 신도들이 그러한 일들을 얼마나 조용히 견뎌내는지에 대하여 때때로 놀랐었다. 그것이 아마도 결국은 보다 큰 힘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역사를 통하여 고난과 순교가 참으로 무엇인가를 잘 알았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작은 짐들과 장애들에 대해서는 조용하다. 예컨대 나는 '고난'이 분명 신체적인 고난이나 실제적인 고통 등도 포함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너무 빨리 영적인 고난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덜어 주었어햐 했던 것이바로 이 고난이며, 나는 신약 성서에서나 초대 그리스도교의 순교자들의 이야기들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 없다.


결국 '교회가 고난받고 있는지 아닌지' 혹은 이런저런 고난의 교회의 종들 중 누군가에게 일어나는지 아닌지가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 나는 이런 점에서 많은 것들이 교정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말로 나는 얼마나 많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난에 대해 말해 왔는가에 대해 때때로 부끄러움을 고백해야 한다. 아니, 고난은 이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하며,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1944 3월 9일, 베를린 테겔 감옥에서 / 뮨나 베게트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님의 길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만국을 보이며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눅 4:5~8)


우리는 또다시 수난절을 맞이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생각을 모아야 한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이 선포로써 바울은 시작하였다. 그분이 그의 하나님이었다. 그분이 곧 처음 순교자들이 위하여 죽었던 하나님이었다. 바로 이분이 루터가 다시 발견한 하나님이었다. 또한 이분이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이해하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 더 잘 표현하면, 오늘날 새롭게 우리를 붙잡으시는 그 동일한 하나님이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숨겨진 왕궁의 숨겨진 왕이신 그리스도, 이것이 개신교 교회의 메세지이다. 드러난 왕국의 계시된 왕이신 그리스도, 이것이 카톨릭 교회의 메세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난절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은 단순히 수난 주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설교 첫날부터 시작된다. 그분은 골고다에서만 아니라 처음부터 이 세상의 왕국으로서의 왕국을 부정하셨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이야기에서 표현된 생각들이다. 예수는 세상의 통치자가 될 수도 있었다. 유대인이 꿈꿔 온 메시아로서, 그분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고 영광과 존귀로 인도할 수도 있었다.


그분의 예루살렘 입성 행렬은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왕의 행렬과 같은 것일 수 있었다. 예수는 사역을 시작하기조 전에 이 세상에 대한 통치권이 주어지신 분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가! 그리고 그분은 그 제안을 거절한다는 점에서 훨씬 더 놀랍다. 따라서 예수가 이 세상의 모든 왕들 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고 강력한 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성서적으로 위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진실 그 자체이다. 그분은 존귀를 받았을 것이다. 그분이 그 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감히 말했다면 사람들은 그분을 믿었을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조차도 그들이 그것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 황제들을 믿었다. 세상은 정말로 그리스도교적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 왔던 그분을 가졌을 것이다.


그분, 그의 능력이 모든 땅 위에 펼쳐지고 이 땅 위에 평화의 통치를 확립하신 분. 그래서 예수는 그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분은 이 순간 높은 산 위에서 잠시 동안 자신이 그들(왕국들)의 통치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그러한 통치에는 대가가, 그가 보기에 너무 큰 대가가 치러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의 복종을 잃어야만 통치는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마귀 앞에 절을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경배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노예가 되어 더 이상 자유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예수는 자신의 야망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를 그토록 열망하는 사람들이 노예.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자유한 아들로 남으시고, 자신을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마귀를 인식하신다.


예수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아신다. 그것은 낮아짐이며, 욕설이며, 핍박이다. 그것은 오해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증오와 죽음과 십자가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분은 맨 처음부터 이 길을 선택하신다. 그것은 복종의 길이며 자유의 길인바, 그것은 곧 하나님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인간들에 대한 사랑의 길이다.


그 어떤 길도_그것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즐거운 것일지라도_하나님의 길이 아니며, 그것은 인간을 향한 증오와 경멸의 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마귀를 거절하는 이유다. 그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길이기 때문에, 그분은 맨 처음부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으로서, 교회로서 그분과 함께 가고 있다. 우리는 십자가 밑의 교회, 즉 숨어 있는 교회다. 여기에서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왕국 역시 이 세상이 것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1932년 수난절, 베를린 공과대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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