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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성탄절 (사61:1-3)

by 【고동엽】 2021. 10. 17.

변화의 성탄절   (사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저보고 인간에게 제일로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변화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어린이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목사도, 장로도 변화되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가치관, 목적, 습관, 다 변하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변하기가 어려운지 성령마저도 인간의 본질을 변화시키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개인이 변하기가 어렵다면 민족의 변화란 더 어려울 것입니다. 숫자적으로 말하자면, 50년 동안 살아 생긴 습관을 고치려면 50년이 걸려야 할 것이며, 5천년 동안 이루어진 민족성을 고치려면 또 5천년이 걸려야 할 것입니다.


몰라서도 변화되지 못하고 알고도 변화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몰라서 고치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알고도 못 고치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됩니다. 상담을 해 보면 자기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교만했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교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남을 속였다고 고백하고 회개하여 믿고 돈을 빌려주었더니 남의 돈을 또 떼어먹고 달아나 버리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고 거짓을 해결하지 못하고, 정욕적인 죄를 말하고 또 정욕적인 죄를 짓습니다. 돈놀이하다가 매를 맞고 간증하고 또 돈놀이하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불효를 말하며 계속해서 불효의 길을 가고, 불충성을 고백하고 여전히 불출성의 길을 갑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던 것을 회개했다고 해 놓고 또 같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과연 진정한 변화는 무엇일까요?


변화는 점직적 변화와 순간적 변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삭케오나 사울은 순간적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삭케오는 예수를 만나 즉시 그의 모든 것이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재산의 절반을 갈라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순간적으로 변화된 사람이기도 하지만, 또한 점진적 변화를 이룬 사람이기도 합니다. 얍복강 가에서 순간적으로 변화되어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 많은 고난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노년에 요셉을 따라 애굽에 갔을 때 성화된 인격의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 변화를 다 경험하게 되고 또 경험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신도 남도 선명히 느끼도록 변화됩니다. 이것은 순간적 변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나서 입맛도 변했다고 말합니다. 술맛도 변하고 담배 맛도 변했다고 합니다. 억지로 참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입맛이 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을 보면 역하고 담배 냄새를 맡으면 매스껍다고 합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도 술냄새나는 술집을 그냥 지나갈 수 없는 사람도 변해 버립니다.


처음에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을 때 큰 변화를 함께 경험하면 그 사람은 후에 고난을 적게 당합니다. 구원을 받고도 롯처럼 돈 좋아하고, 인색하고, 농담 잘 하고, 자식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하면 천하고 추하게 됩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혈서를 써도 고쳐지지 않는 나쁜 버릇이 쉽게 고쳐지고, 절제력이 없는 사람도 절제력이 생깁니다. 성령을 받으면 창조적 생각이 생기고, 영적 가치를 알게 되고, 화평을 나누게 되고,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이 되고, 영적 설득력이 생기며, 반대의견도 수용할 수 있게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게 되고, 그리고 이웃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게 됩니다. 또한 고집을 버리고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이기적인 사람이 자기의 모든 재능을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며, 강력한 인내심이 생기며, 뼈 속 깊은 미움을 품지 않고, 그리고 남을 위하여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비교적 무의식적 변화를 점진적 변화에 속하고, 의식적 변화는 순간적 변화에 속합니다. 그러나 늘 기도하고 자신과 싸우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어느덧 "아니! 내가 벌써 여기까지 왔나?" 깜짝 놀랄 만큼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없는 것이 생기고 있던 것 중에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집니다. 죽어 없어지는 죽음의 변화도 경험하고, 살아 생겨나는 창조적 변화도 경험합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에 김익두 목사님 일화는 너무나 많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 믿고 회개한 다음에 아예 자신의 부고장을 자신이 돌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못된 짓을 많이 했던지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는 김익두가 시장 바닥에 나타난 것입니다. 알고 보니 시커면 책 하나를 가지고 나타난 김익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김익두에게 물통에서 물을 퍼서 뒤집어 씌웠답니다. 그러자 김익두는 물을 툭툭 털고 그를 쳐다보면서 하는 말씀이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인해서 기뻐하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를 믿으면 죽게 됩니다.


요즈음 "총체적 위기"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듣습니다. 정말로 위기인지, 아니면 위기라고 하는 것이 위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몇몇 신문을 보노라면 1년 안에 곧 이 나라가 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얼마 전에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나는 "목사인데 이 나라에 총체적 위기가 찾아 왔다면 그 책임을 언론도 져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사실을 보도하더라도 어둔 면만 보지 말고 밝은 면도 함께 보도록 해 달라"고 주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총체적 위기", "총체적 부패"에 대하여 인간이 내린 최선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바로 "구조조정"이란 것입니다. 총체적 위기를 과연 구조조정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되는 면이 있고 되지 않는 면이 있을 터인데 되지 않는 면이 더 많을 것입니다.


위기가 극복되려면 두 가지가 함께 되어야 가능할 것입니다. 첫째는 마음이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먼저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요즈음은 닭이 울지 않고 개들은 짓지 안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닭이 울지 않는 것은 현대인들은 일어나야 할 시간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는 다 시계를 가지고 있어서 제가 일어날 시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개가 짖지 않는 것은 모두 도둑놈이라 항상 짖고 있을 수 없어서 이제 포기해 버렸다고 합니다. 이 개의 학설에 의하면 밖에 있는 놈이나 안에 있는 놈이나 다 도둑이란 말입니다. 이 개의 말이 맞다면 사정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나, 여당이나 야당이나, 부패를 주장하는 언론이이나 정부나 다 부패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습니다. 냉소주의와 불신만 가득 차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두렵습니다.


내가 먼저 내 마음에서부터 변하려고 하지 않고 변화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모든 시대의 모든 지도자들은, 비록 총과 칼로 나라를 잡았어도 개혁 내지는 정화를 외쳤습니다. 전두환씨 같은 사람도 삼청교육대라는 것을 만들어서 정화를 시도하려고 했지만 정작 그 삼청교육대에 갈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니 진정한 변화를 먼저 내가 변해야 하고 그리고 본질이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변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농부가 너무 예뻐서 한 마리를 집안으로 들여왔다고 합니다. 그는 돼지를 깨끗이 씻기고 발굽을 닦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돼지에게 향수를,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샤넬 No.5를 뿌려주고 목에 리본까지 달아 주었다고 합니다. 농부는 돼지를 안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돼지는 제법 멋있어 보였습니다. 분명히 붙임성 있는 애완동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열리자 그 돼지는 안방에서 뛰쳐나가 집 앞뜰에 있는 진흙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갔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돼지의 본성 자체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술주정뱅이, 바람둥이, 마약쟁이, 도둑놈, 살인자에게 옷을 잘 입혀서 그를 교회로 인도했다고 합시다. 그는 예배당의 앞자리에 앉아서 큰 소리로 찬송도 하고 있을 때는 거룩한 신자같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본성은 술집에 갔을 때 나타날 것입니다. 그의 인간 본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변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조조정만 힘쓸 수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길가의 창녀(娼女)들을 구해낼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기 전에 그들을 구해낼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이들에게 전도하는 사명을 가진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환경을 바꾼다고 해서 그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양이가 미남 청년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고양이의 딱한 사정을 가엾이 여긴 여신은 고양이를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어 주었고, 청년은 첫눈에 그녀에게 마음이 사로 잡혔습니다. 이들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첫날밤에 <아프로디테>신은 그 신방에 쥐 한 마리를 넣었습니다. 그러자 처녀가 된 고양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를 까맣게 잊은 채 침대에서 뛰어내려 쥐를 잡아 입에 피를 묻히며 잡아먹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신은 처녀를 본래 고양이 모습으로 되돌려 버렸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본질이 변하지 않으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이 변하면 행동은 자연이 변합니다. 행동도 변합니다. 얼굴도 변합니다. 50대 이후에 얼굴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아름다움도 화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가 나쁘고 마음이 불편한 여자들은 화장을 하면 할수록 더 흉측합니다. 외적 미(美)도 속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으면 사람의 얼굴이 변합니다. 은혜스러움도, 분노도, 미련도, 정직함도, 색(色)끼도, 다 얼굴에 나타납니다.


둘째, 내가 변해야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네가 변하면 나도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내가 변하면 남편도 변하겠다고 말하고, 남편이 변하면 아내도 변하겠다고 말합니다. 경상도가 변하면 전라도도 변하겠다고 하고, 전라도가 변하면 경상도도 변하겠다고 하고, 장로가 변하면 목사도 변하겠다고 하고, 목사가 변하면 장로도 변하겠다고 합니다.


알콜 중독자와 결혼한 한 여인의 고백입니다. "나는 내 노력으로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나는 무력감에 시달렸고 패배감에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때 저는 '주님, 저는 무능합니다.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용서해 주옵소서. 저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것이 제 결혼 생활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둘이 다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변화는 천천히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마음을 남편에게 쏟아 놓은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의 사랑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고백했습니다. 그는 진지하게 나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술을 끊을 새로운 동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한 친구가 그를 금주단체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제 그가 술을 끊은 지 7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날마다 우리가 이제 서로에 대해 갖게 된 사랑과 존경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나부터 바꾸어 놓으시고 남편도 바꾸셨습니다." 아내가 변하여 남편을 구한 경우는 참으로 많이 봅니다. 그냥 내가 변해 버리면 너는 따라서 변하게 됩니다.


화목하지 못하고 싸움이 잦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항상 불만족스러움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녀는 사소한 일로도 화를 잘 내는 갈수록 성격의 사람이 되고 있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골치 아픈 집을 떠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녀의 얼굴이 달라졌습니다.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그녀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집안에 무슨 변화가 있는 거야?" "아니야! 전과 똑같아. 단지 하나가 변했지! 내가 변했어."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바람직하지 못한 위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목사와 집사 사이에도 그런 일이 가능합니다. 그런 경우 기도를 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복수하고 싶어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 기도하는 사람은 세 가지로 기도합니다. 먼저 저 원수에게 벌을 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경우입니다. 다음으로는 그를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에는 내게 잘못이 없고 저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오래하노라면 성령님은 우리의 기도를 바꾸어 놓으십니다. "주여! 나를 먼저 변화시켜 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회개하고 변했더니 그 사람도 변하더란 것입니다.


셋째, 주님을 만나야 진정한 변화를 이룹니다.


본질적 변화는 주님을 만날 때 가능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목사와 이발사가 빈민거리를 나란히 걷고 있었습니다. 주변은 몹시 지저분하여 악취가 풍기고 있었으며, 여기 저기에 불량아처럼 생긴 사람들이 서 있어서 음산함을 느끼게 하는 거리입니다. 이발사가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계시고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에 어찌 저렇게 처참한 세상을 그대로 두고 보신다는 말입니까?"라고 이발사가 말했습니다. 그 때 옆에 히피족 남자가 지저분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지나갑니다. "저 친구를 보십니까? 저 친구는 수염도 깍지 않고 머리는 어깨를 덮으니 어찌 당신 같은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십니까?"라고 이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그야 저 친구들이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니까 그렇죠. 이발소에 들어오기만 하면 제가 멋진 신사로 만들어 줄텐데 말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하나님도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유사한 다른 예화가 있습니다. 예수를 부정하는 한 빨래비누 공장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 좋은 그의 친구를 만나면 늘 "자네는 그렇게도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왜 세상은 저렇게 점점 더 죄악이 늘어나고 부조리가 날로 심하여 가는지 설명 좀 하게."라고 말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성도는 역으로 비누 공장 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는 그렇게도 열심히 빨래비누를 많이 만드는데 왜 거리에는 아직도 저렇게 더러운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사장은 "그거야 저들이 내가 만든 빨래비누를 사다가 쓰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나?"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거야! 복음은 분명히 복음이지만 사람들이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 세상이 밝아지겠나. 내가 그렇게 전하여도 당장 자네마저도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으니까 그 모양이라네. 그러니 어떻게 이 세상에 변화가 있겠는가?"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혹 용광로 속에서 쇠가 녹지 않는 길은 있어도 성령의 불길로 녹지 않을 죄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변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 제일로 쉬운 것이 있다면 마음 뒤집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로 어려운 것이 마음 뒤집기입니다. 미움도 뒤집기만 하면 사랑입니다. 불충성도 뒤집으면 충성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그 마음을 만드신 주님을 만날 때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연세대학교 총장이었던 백낙준 박사는 그 부친이 무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무당춤을 추고 있는데 한 전도가사 지나가다가 그 꼴을 보고 "자식들 멸망할 짓 그만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너나 잘 믿고 너나 천당이든 백당이든 잘 가거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집에 돌아가서입니다. 그 무당의 마음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음성은 "자식들 망할 짓 그만 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라" 이 소리가 귀에 계속 들리는 것입니다. 점점 정신이 혼란해지기 시작했고,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는 교회를 찾았고 결국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이 바로 그 아들 백낙준을 박사로 만들고 국가와 교회에 이바지하는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어떻게 바울이 되었습니까? 바로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핍박자가 순교자로 변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창녀가 전도자로 변합니다. 방탕아가 사명자가 되기도 합니다. <선다 싱>같은 사람은 원래 기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구름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선다 싱>에게 "왜 나를 대적하느냐? 나는 너의 구세주니라. 나는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오 헨리>라는 작가의 본명은 <시드니 포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에게 신실한 크리스챤의 모습을 보이고 그에게 전도했던 <오렌 헨리>라는 간수가 있었는데 그에게 깊은 감화를 받아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드니 포터>는 자기 이름을 버리고 자기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해준 간수의 이름을 따라서 <오 헨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세계적으로 전도의 큰 열매를 맺게 한 플로리다 코랄릿지 장로교회의 <케네디 목사님>도 원래는 춤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도 라디오에서 나오는 <도널드 그레이반 하우스>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변화를 받아 이렇게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변화를 느끼고 변화를 보여주고 변화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켄 블랑카드>(Ken Blancard)라는 교수는 "사람은 선천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변화에 대한 호기심은 있으나, 즉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지식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둘째는 자세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셋째는 행동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넷째는 조직의 변화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변화를 원하면서 또 변화를 두려워하는 모순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런데 변해야 할 것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고 하셨습니다. 변화되어야 합니다. 목적도 가치관도 취미도 변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 "머리의 회심과 가슴의 회심, 돈지갑의 회심"을 주장하였습니다. 지적 변화도 일어나야 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고 했습니다. 그러면 감정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의 변화도 일어납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물질을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회심의 척도가 될 수 있습니다.


새 천년에도 성탄절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왜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억울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려고 오셨습니다.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들을 치료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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