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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고민(창세기 4장 1절~12절)

by 【고동엽】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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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고민(창세기 4장 1절~12절)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으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재난이나 질병은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도 지진이나 홍수와 같은 재난을 겪고, 또 질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재난, 똑같은 어려움이라 해도 그 의미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은 고민을 하고, 동물은 고민을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살 때 살고 죽을 때 죽더라도 동물에게는 고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고민하는 데에 사람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한다고 해서 다 같은 사람이 아니요 거기에 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고민을 하고 사느냐, 그리고 어디까지 고민하느냐 하는 고민의 한계와, 언제까지 고민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람됨을 좌우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위하여 걱정하십니까?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 6:31~32)."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대하여 걱정해야 하며 거기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고로 무엇을 위하여 고민하느냐, 이것이 문제요 한계가 문제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걱정을 해야 합니까? 걱정이 지나쳐서 병이 되고, 그것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127:2)" 했는데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나는 것인지 모를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하루 평균 6백만 개의 수면제가 팔린다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눕기만 하면 잘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잠 많다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경이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잠 못 자는 것처럼 괴로운 일도 없습니다. 잠을 못 이루면서까지 고민하는 사람은 바보스러운 사람입니다. 잠까지 손해보면서 고민하는 사람은 고민의 한계를 모르는 사람이요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또 언제까지 고민을 해야 합니까? 시간적인 한계가 중요합니다. 가끔 고민을 안고 찾아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고민이 어제 오늘의 고민만이 아닙니다. 수십 년 된 고민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월 모일까지만 고민하기로 하고 그 다음부터는 잊어버립시다" 해도 그 시간을 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고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까? 시간을 정해놓고 고민하십시오. 이를테면 이 사람과 결혼할까 저 사람과 결혼할까 고민되거든 어느 달 어느 날까지만 고민하고, 그래도 결정 나지 않을 때에는 차라리 제비라도 뽑으십시오.

언제까지 고민할 것입니까? 어느 때까지 세월을 낭비할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을 봅시다. 에덴 동쪽에서 큰 사건이 생겼습니다.

살인 사건입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가 함께 생각해봅시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로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이 살인 사건입니다. 형이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요즘 사회가 살벌하다, 끔찍한 범죄가 늘어간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애당초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놀랄 일도 아닙니다.

인간이 지은 에덴 동쪽의 살인 사건-여기에서부터 인간은 불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류 불행의 축소판이요,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오늘은 가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가인 콤플렉스(Cain complex)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가인의 고민, 이것은 점점 에스컬레이팅(escalating)됩니다. 점점 부피가 커집니다. 저도 모르게 고민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어느 사이에 커지고 커져서 급기야 살인 사건으로 폭발합니다. 마음속에서 시작된 고민의 결과가 이렇게 큰 사건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고민의 결과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병의 결과와도 같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리면 첫째,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에 이르는 병이 있습니다. 병에 걸렸다고 해서 다 죽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병이지만, 실은 유익한 병도 많습니다. 여러분, 예방주사가 무엇입니까? 건강한 사람 몸에 병균을 집어넣는 것입니다. 적당량의 병균으로 병을 일으켜 면역을 얻게 하고 강하게 하는 것이 예방주사입니다. 흔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마는 운동 선수가 어느 부분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 부분의 뼈를 부러뜨리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한번 부러졌던 뼈가 잘 붙으면 부러지기 전보다 더 튼튼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병든다고 해서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병으로 인하여 몸이 더 건강해지고, 심지어는 정신도 맑아집니다. 인격이 고상해지고 겸손해지며, 신앙이 진실해집니다. 육체가 병들면서 영성(靈性)은 오히려 살아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므로 병이라는 것을 무조건 멀리할 까닭은 없습니다. 생명에 이르는 병이 있습니다. 영생에 이르는 병도 있는 줄로 압니다.

고민도 그렇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고민도 있습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끝내는 저도 죽고 남도 죽고 다 죽어버립니다. 이와 반대로 생명에 이르는 고민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으로 진실된 고민을 하면 그로 인하여 회개하게 되고 온유하게 되고 진실하게 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고 영생에 이르게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고민-해야 할 고민이라면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그 고민의 결과는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고민은 먹는 것, 입는 것 따위에 관한 경제적인 고민이 아닙니다. 가인이 당한 고민은 지극히 지성적이요 인간적이요 인간 실존적인 고민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고민을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 번째 고민은 물질적인 고민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벌고 무엇을 지킬까-물질에 대한 욕망, 그로부터 오는 고민이 있습니다. 이것이 제1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고민입니다. 인기에 대하여, 평판에 대하여 걱정을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합니다. 나아가서는 남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고민이 있습니다.

세 번째 고민은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입니다. 이것은 아주 실존주의적인 고민입니다.

이렇게 고민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서 하이데거는 결론짓습니다. '물질적인 고민에서는 가끔 성공하는 사람이 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을 끊거나 어느 정도에 가서 멈춤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얻는 사람이 있다, 둘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세 번째 자기 자신에 대한 고민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제1단계입니까, 아니면 제2단계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종류, 어떤 수준의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바로 여러분 존재의 수준을 의미합니다. 고민의 수준이 나의 나됨을 의미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가인은 참으로 고민해야 할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를 가지고 너무 고민하였기에 마침내 오늘의 본문과 같이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가인은 동생도 자기를 멸시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기를 무시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고민해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고민이 없었습니다. 고민을 두 가지로 말해봅니다. 하나는 같아지고자 하는 평등에로의 고민입니다. 이것은 평형 의지에서 오는 고민입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높아지고자, 특별해지고자 하는 선택 의지에서 오는 귀족적인 고민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을 고민하고 있습니까?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아지려고 합니다. 남이 가진 것은 나도 가져야 하고, 남이 아는 것은 나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나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거기에 끼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남과 같아지려고 애쓰는 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같아지지 못할 때에 고민입니다. 그러나 만족을 위해서 같아지려는 것이 모순입니다.

같아지면 이제는 특별해지려고 노력합니다. 같아진 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별다르게 생각합니다. '나는 특별하다, 나는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선택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같아지려는 것과 특별해지려는 것-이 두 모순 사이에서 인생은 참으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고민은 사회주의적 고민이요 두 번째 고민은 자유주의적 고민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간혹 미국에 갈 기회가 있어 고속도로에 나가보면 물밀듯이 밀려가는 많은 차 중에서 보닛(bonnet:엔진 덮개)없는 차가 더러 보입니다. 엔진이 다 들여다보이는 차가 마구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저 차가 왜 저렇게 하고 다니지?" 하고 누구나 궁금하게 여깁니다.

그럴 때에 저는 가끔 이야기합니다. "특별해지고 싶어서 저러는 것입니다."

특별해지고 싶어서-반드시 남과 달라야 한다, 남보다 나아야 한다,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습니다. 같은 것만으로는 못 살아요, 무엇이나 특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고민합니다. 어떤 남자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땋고 해서 이상야릇한 모습으로 돌아다닙니다. 언젠가 한경직 목사님이 말씀하십디다. "남자가 저렇게 머리를 길게 기르려면 콧수염도 길러야 하겠지요?" "왜요?" 하고 제가 물으니 한목사님 대답이 참 걸작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녀를 구별하기가 힘드니까요."

아무튼 별스럽고 싶어서, 특별하고 싶어서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 고민을 가지고 있습니까? 남과 같아지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좀 특별해지고 싶은 것입니까?

히브리사람들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 남편이 제일이요, 내 아내가 제일이요, 내 자식이 제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앞에 놓고 "너는 왜 남만 못하냐?" 합니다. 이 비교 의식이 문제입니다. 요즘은 이혼도 아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조금 못마땅한 것 때문에 함부로 남편을 바꾸고 아내를 바꾸어버립니다. 서양사람들의 통계를 보면 참 재미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두 번 이상 이혼하는 사람들 중에서 다시 첫 번째 배우자와 재혼하는 비율이 75퍼센트라고 합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바꾸어 봐야 별것도 없고 결국은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특별한 것을 기대하지 맙시다. 내가 가진 바, 내가 처한 바 그대로를 가장 좋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가인의 고민을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인은 저가 아벨과 같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알고 보면 같지 못한 데 대한 고민이 아니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는 데 대한 고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형식으로 드렸습니다. 두 사람이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제사는 열납되었으나 또 한사람의 제사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당연하고도 공평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가인은 자기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태도입니까? 드리는 자의 태도가 달랐으니 그에 따른 대우도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등한 취급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동등한 대우를 구합니다. 이것이 고민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 한 분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느 회사 사장인데 어느 날 회사일로 퇴근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일에 몰두하다보니 운전기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그만 깜빡했습니다. 12시가 넘어서야 일을 마치고 나와 보니 기사가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 추운 겨울날씨였던 터라 그 집사님은 아차 싶었습니다. 차를 타면서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고 기사한테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런데 잔뜩 심통이 난 기사 양반은 처자식이 있는 몸인데 늦도록 기다리게 했다고, 내 신세가 이게 뭐냐고 툴툴거리면서 차를 난폭하게 모는 것입니다.

우회전, 좌회전, 핸들을 마구 꺾어대는 바람에 차가 들썩들썩합니다.

'이러다가 아무래도 사고 나서 저 죽고 나 죽겠다' 생각한 집사님은 이제 미안하던 마음도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선 차를 길옆으로 세우게 하고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 왜 그리 불평이 많소. 나는 남들 놀 때에 죽어라고 공부하고 애쓴 결과로 지금 이 뒷좌석에 앉은 거요. 무엇이 잘못되었소? 당신이 앞좌석에 앉은 것도 내 탓이오?" 그 다음부터 기사가 불평을 하지 않더랍니다.

여러분, 과정이 달랐으면 결과도 다른 것 아닙니까? 가인이 제사는 아벨처럼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같은 대우를 해달라고 하니, 이것이 과연 정당한 것입니까?

또한 깊이 생각해봅시다. 가인은 죄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대우를 요구하는 가인에게 오히려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7절)." 보십시오.

죄가 마치 짐승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막 물려고 하는 자세입니다. 얼마나 위험한 시간입니까? 참으로 염려해야 할 것은 자기의 마음이요 자기의 죄악성입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죄를 다스려야 할 이 절박한 시간에 가인은 쓸데없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불만 가지게 된 책임을 아벨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저 아벨만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내 제사를 받으셨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내 불행의 원인이 저 아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가끔 착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가난한 것이 저 부자 때문이라고,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일으킬 때에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부자와 지성인들을 다 죽여버려야 노동자가 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었습니다.

그러나 착각이었습니다. 부자를 없애면 내가 부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부자가 없어져도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어쩌면 더욱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다른 사람이 없어져야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심지어 가인은 아벨을 죽여버려야 자기가 살 수 있다고까지 생각했습니다. 내 문제를 남에게 돌리지 맙시다. 내가 불행한 것이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성격 나쁜 것까지 남을 탓합니다. 너 때문에 내 성격이 이렇게 변했다고 원망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불평하는 사람은 어디에 가져다놓아도 불평을 합니다. 어느 환경에서든지 불평 불만입니다. 못 가졌을 때에는 못 가졌다고 불평이요 가졌을 때에는 더 가지려고 불평입니다.

평등하지 못했을 때에는 평등하지 못해서 불만이요 평등하고 나면 특별하지 못해서 불만입니다. 모두가 그렇습니다. 자기 존재의 문제요,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어디에서든지 감사합니다. 어느 직장에서도 행복합니다.

폭력을 통해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경쟁이 없어야 평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입니다. 누구 때문에 내가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불행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가인의 경우는 특별히 형제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회개만이 문제 해결의 열쇠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시 하이데거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물질적 고민, 인간관계의 고민, 자기 자신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 있다면 어디에서부터 해결책이 올 것 같습니까? 물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결됩니다. 자기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때에 이웃의 문제, 물질의 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고민이 물질이나 환경이나 정치, 혹은 이 세상 누구와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는 것만은 일단 짚고 넘어갑시다.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고민해야 할 일에 고민하지 않으면 고민할 필요 없는 일에 고민하게 됩니다. 또한 고민에 깊이 빠져들게 되면 고민의 노예가 되고 어느새 원치 않는 엄청난 함정에 그대로 빠져들어 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들려주신 주님의 음성은 범죄한 아담을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에 아담이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하고 한마디만 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는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책임을 전가한 까닭에 그는 저주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기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6절)." 이때 가인이 한마디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제게 고민이 있습니다"-이 한마디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벨을 살해한 다음에 하나님이 또 부르십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절)." "제가 죽였습니다." 했으면 살 길이 있었을 터인데 그는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그래서 가인은 참으로 고민의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가인은 그 후손 라멕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라멕이 사냥을 나갔는데 가인이 숲속에 숨어 있는 것을 짐승인 줄 알고 화살을 쏘았다는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가인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실 때에 두 사람 다 진실한 대답을 했어야 옳았습니다.

주님의 종말론적인 마지막 음성이 들려올 때에 우리는 진실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순종할 때-마음 문을 열고 주님의 음성에 대하여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모든 원인이 제게 있습니다. 할 때에 비로소 바른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다윗을 봅시다. 그에게 엄청난 과오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내가 여호와께 죄를 점하였노라(삼하 12:13)"하고 아무에게도 책임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밧세바 때문입니다, 환경 때문입니다. 하는 불평은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모태적부터 어머니가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죄인이었습니다-이렇게 회개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직선적으로 바로 응답하는 것이 모든 고민의 바른 해결책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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