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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게으른 자의 변명(마태복음 25장 23절~30절)

by 【고동엽】 2023.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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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자의 변명(마태복음 25장 23절~30절)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내가 병들었을 때, 내가 내 병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병들었는데도 아픈 줄을 모를 때도 있습니다. 내가 알거나 모르거나, 아프거나 아픈 줄을 모르거나 상관없이, 일단 병이 들면 내 몸은 그 병으로 인해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내가 안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아픔을 느끼거나 못 느끼거나 간에 병이 들었으면 그 병으로 인해서 시시각각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픈 줄 모르고 아프지 않은 그런 병이 더 무서운 병입니다. 이것은 고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도 그렇습니다. 죄를 지으면 죄가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정신, 그 몸, 그 성품, 그의 판단력을 다 죽여버리고 맙니다. 똑똑하던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밝던 판단력도 흐려지고 맙니다. 몸도 병들고 맙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이러할 때에 더 무섭습니다. 죄인 줄을 모르는 죄입니다. 거침없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라고 하는 것, 이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 계속해서 그 죄에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구제불능이 됩니다.
그런가하면, 죄는 압니다. 죄인 줄로 알지마는 극구 죄가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죄의 죄됨을 스스로 부정하고 스스로 정당화하는, 이런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더욱 무서운 죄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죄는 죄를 알고 있고 죄의 결과도 알고 있지마는 원인과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남의 탓으로 돌려버립니다. "이것은 저 사람 때문이다"하고, 환경 탓이다, 세상 탓이다, 누구 탓이다 하고 죄를 타(他)에 전가하는 죄의 정당화 행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죄는 더욱 깊어집니다. 뉘우침도 없고 회개도 없습니다. 점점 더 완악해질 뿐입니다. 마침내 그 영혼이 병들고, 심리적으로 병들고, 성품도 악해지고, 마지막에는 몸까지 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타국에 나가면서 하인 세 사람에게 돈을 맡겼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납니다. 얼마후에 돌아와서 회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맡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의 이문을 남겨가지고 열 달란트를 가져왔습니다. 주인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그를 칭찬하면서 그에게 큰 은사를 더해줍니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렇게 영접해줍니다.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도 두 달란트의 이문을 남겨 네 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도 칭찬과 은혜를 베풉니다. 그러나 유독히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지고 왔습니다.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꺼내가지고 와서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본전을 내놓은 것입니다. 이 종을 보자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하고 꾸짖습니다. 저는 이 말씀에 좀 이의가 없지 않습니다. 그 종을 동정하고 싶어집니다. 물론 게으르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악한 것 같지는 않아요. 세상에는 본전까지 잘라 먹어버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하거늘 본전은 가지고 온 그 종을 보고 왜 악하다고까지 하실까? 그러나 이 성경말씀을 잘 살펴보면 그 종이 왜 악한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악하고, 그 자세가 악하고, 그 변명하는 내용이 악해요. 질적으로 악한 종인 것을 이 말씀에서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본디 게으른 자는 말이 많습니다. 실패한 자는 변명이 많습니다. 이유가 많습니다. 일하지 아니한 이유,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구차한 설명이 많습니다.
중국 명대(明代)의 유학자요 정치가인 왕양명(王陽明)이 지혜로운 말을 남겼습니다. '살아보니 나의 인생에 어려운 일이 네 가지 있더라' 했습니다. '첫째로 어려운 것은 고생스러운 것이다. 먹을 것이 없고 입을 것이 없을 때에 고생스럽더라.' 기본적인 것입니다. 배고픈 것, 헐벗는 것, 참으로 견디어내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남에게 냉대받은 것이 고통스럽더라.' 집안에서든 직장에서든 친구들에게서든,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로부터, 친구로부터 냉대받는 것, 인간 관계가 그렇게 될 때에 참으로 괴롭더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고민스러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마음 깊은 곳에 고민이 있어서 이 실존적인 고뇌와 더불어 싸울 때의 고독과 고뇌, 이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이더라고 말합니다. 그는 다시 이 세 가지의 어려움보다도 가장 더 괴로운 것은 '한가로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바쁘십니까? 그래서 불평이 있습니까? 그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정말로 한가해지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쓸모도 없고 보람도 없고 삶의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기대도 없는 것입니다. 한가한 것, 할일이 없는 것, 이는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보십시다. 분명히 할일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할일이 없어지는 것 자체가 심판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런 계약 조건 하에 산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 합니다. 모두가 공평하게 기회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기회를 한번 놓치면 어려워집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누구든간에 각자의 능력대로,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계획과 경륜대로, 우리에게 공평히 기회를 주셨습니다.
둘째는 제한적인 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제한이 있고, 능력도 건강도 재산도 지혜도 다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큰소리쳐보아도 이 한계 안에서 자유를 누릴 뿐이요 이 한계 안에서 책임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듯 제한된 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한 달란트가 한계입니다.
또한 사람이란 누구나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을 섬기고 있습니다. 주인이 맡기셨고 주인이 찾으십니다. 주인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남을 섬기며 살아갑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누구나 다 봉사를 하면서 삽니다. 이것이 본질입니다. 그런데 봉사한다고 하는 생의 본질을 모르고 스스로 사는 줄로 알아 봉사 받으려고만 하는 데에 큰 문제가 있고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모든 생은 모험입니다. 마치 장사하는 것, 농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수고를 합니다. 모험입니다. 모험 아닌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비행기를 탔습니까? 떨어질까봐 걱정됩니까? 언젠가 한번은 여기서 뉴욕까지 열세 시간을 날아갔습니다. 옆에 앉은 분을 보니 물 한모금 안마시고 잠 한숨 못자는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꼿꼿이 앉아 있어요. 가엾은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죽을까봐 그런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말해주었습니다. "같이 죽읍시다." 그리고 전도를 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 모험 아닌 일이 어디 있습니까? 생각하면 모든 일이 다 모험입니다. 모험을 걱정해서 안시키겠다고 어머니가 돌아보고 돌아보고 자꾸 따라다니며 간섭하다가 소위 '마마 보이(mamma-boy)'를 만들어놓아서 일생토록 반병신으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릇 세상 사는 것이 철저하게 모험입니다.
그런가하면, 오늘의 말씀을 보면 결산을 요구합니다. 얼마동안 기간을 주었다가 얼마를 남겼느냐 하고 결산을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일생 산 것을 결산해야 할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에 가만히 보니 충성된 자에게는 또다른 기회를 복으로 주시고, 충성되지 못한 자에게서는 기회를 박탈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주인 앞에 나와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잠언 22장 13절이나 26장 13절에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말하기를 사자가 밖에 있은즉 내가 나가면 거리에서 찢기겠다 하느니라"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게으른 자는 꼭 그렇게 변명을 합니다. 사자가 밖에 있다는 식으로, 꼭 안될 일만 생각합니다. 되는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고 안된다는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변명합니다. 만사를, 주어진 능력, 기회, 지혜를 다 부정하고, 가능성도 부정하고,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는 것만 생각하면서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게으른 자입니다.
게으른 자의 변명입니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로 가서 일생을 그곳 원주민들을 보살피는 의사로 헌신한 분입니다. 고귀한 인생을 산 사람의 귀감입니다. 그는 구십오 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모든 병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약은 그가 할일을 가졌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내가 할일을 가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병을 고칠 약은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소망을 버린 자에게는 백약(百藥)이 소용없습니다. 할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신념의 사람에게라야 약도 효력을 내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을 포기한 자는 구제불능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이 있습니다. 할 일이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대로 해야 할 일이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위탁 행위입니다. 위탁하는 의지요, 위탁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철저한 모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 하십니다.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씀에 따라 고향 땅을 등지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납니다. 어디로 가라시는 것입니까? 그 정처 없는 나그네길---참으로 커다란 모험입니다. 모세에게도 그러셨습니다. 자신 없는 그에게 백성을 구원하라고 명하십니다. 육십만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옵니다.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고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그 생활이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보스러울 정도의 모험입니다. 신앙은 이런 차원에서 엄청난 모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 '모험'입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주인 앞에 와서 책임을 전가합니다.
변명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어떻고 조건이 어떻고 그렇게 변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결과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다만 충성을 원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결과를 미리 생각한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끝까지 충성하면 그만입니다. 원래 결과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농사하는 사람이 가을의 추수를 생각합니다마는, 그 결과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씨를 뿌리고 부지런히 가꾸는 것이 내가 할 일이요, 가을에 추수가 있고 없고는 하나님 소관입니다. 나의 소관이 아닌 것입니다. 자식을 키웁니까? 내가 위해서 기도하고 가르치고 정성을 다할 뿐이지 그가 장차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은 내가 마음쓸 바 아닙니다. 동기와 과정까지가 우리의 할 일이요, 그 결과는 모험입니다. 위탁이요 신앙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그 사람은 내가 상사했다가 손해라도 보면 어떡하나, 안될 거야, 나는 약하니까, 미련하니까 잘못할 거야---이런 걱정을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하는 짓궂은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에 한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장사를 하다가 수고는 많이 했는데 홀랑 날려버렸다고 합시다. 손해를 보고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합시다. 그리고 주인 앞에 와서 엎드려 이렇게 말했다면 어떨까요. "주인이여, 다른 사람에게 다섯 달란트를 주시면서 제게 한 달란트 주신 것을 보면 애시당초 제가 신통치 않다는 것을 주인님도 아신 것 같습니다. 시원치 아니한 사람이 가지고 나가서 수고를 하기는 했는데, 신통치 않으니 수고는 남보다 몇 배는 더하고도 홀랑 날리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었더라면 주인이 뭐라고 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한 달란트를 다시 주면서 "돈은 잃어버렸지만 경험을 얻었고 손해는 봤지만 지혜를 얻었을 것이다. Try again.--다시한번 해봐라." 꼭 그랬을 것만 같습니다. 내가 믿는 좋으신 하나님은 꼭 그러셨을 것만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 미리 안될 것만 생각하고, 안될 것 같다고만 생각하고 땅에다 묻어놓았다가 그대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은사를 땅에 묻어놓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습니다. 갈 수 있었는데 가지 않았습니다. 해야 할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를 땅에 묻어놓고 그대로 일평생을 살아버렸습니다. 이 게으름의 죄, 안일의 죄, 그리고 변명만 늘어놓은 죄---얼마나 큰 죄입니까?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오늘의 이 게으른 종은 인자한 주인을 원망합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24절)"-----이렇게 나옵니다. 굳은 사람이라는 말은 인색하다는 말이요 수전노라는 말입니다. '당신은 용서가 없는 사람입니다. 굳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 두려워하여 이 돈을 땅에 묻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이런 것 같습니다.
마음씨가 이랬던 것 같습니다. '만일에 열심히 장사해서 돈을 좀 남겼다 해도 결산할 때 몽땅 가지고 오라 하면 그대로 주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더욱이나 장사를 했다가 손해를 보면 내가 변상을 해야 될 것이 아닌가,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프다, 그러니 차라리 가만히 두어서 무사한 게 제일이지'---무사안일입니다. 그래서 땅에 그냥 묻어놓았다가 본전 그대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똑똑한 것도 같은 이 사람이 실은 악한 사람이더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말씀의 행간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주인이여, 당신은 처음부터 나를 업신여겼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주면서 사람을 어떻게 보고 나에게는 한 달란트만 주었습니까?' 이런 원망입니다. 여기에 그 음성과 얼굴 표정이 나타나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 돈 한푼 그대로 달랑 내놓으면서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한푼도 건드리지 않았소이다. 받으소서'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못됐어요. 악한 종입니다.
오늘도 보면, 일 안하고 게으르고 나태하면서 불평과 원망들이 많습니다. 주로 하나님 원망입니다. 하나님이 날 이 모양으로 만들어놨으니 난 못삽니다---이런 식이지요. 아담이 범죄했습니다. 그는 죄를 압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회개는 하지 않고 '저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하고 변명합니다. '못된 아내를 주셨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이예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잘못입니다'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 때부터 시작해 서 모든 게으른 사람, 모든 나쁜 사람, 모든 악한 사람이 하나같이 남을 원망합니다.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악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구한말에 우리나라는 그만 일본사람들에게 정권을 빼앗겼습니다. 이 나라 젊은이들은 나라를 빼앗긴 울분에 젖었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나약했던 정부를 원망하고, 그리고 일본사람을 원망하고,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를 원망하고…… 원망원망 하던 끝에 술마시고 허랑방탕해졌습니다. 소위 '애국적인' 방탕입니다. '애국'을 빙자한 방탕이었습니다. 이 것을 알고 일본사람들은 한국의 마을마다 술집을 많이 만들어놓고 유곽을 만들어놓았습니다. 거기서 "이 풍진 세상을" 어떻고 하며, "노세 노세 젊어 노세"하며, 나라 잃은 설움인 양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젊음을 탕진해버렸습니다. 그 망국적인 풍속이 오늘까지 흘러왔습니다. 게으르고 나태하고 술취하여 탕진합니다. 당시 도산 안창호선생 같은 분은 올바른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우리들 모두의 책임입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데 대한 벌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죄값이라고 받아들입시다. 모두가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성실할 때에 광복의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고로 아무도 윈망하지 말 뿐더러 못배운 탓에 이렇게 된 것이니 모두들 배우십시다. 이제부터라도 배워야 삽니다. 그리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백성이 되십시다. 그리할 때에 광복의 길은 열릴 것입니다.' 그는 나라 잃은 백성들 앞에서 열심히 성실과 부지런을 가르쳤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농사를 잘하는 것이요, 나라를 사랑하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라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그 어른의 그 큰 외침이 오늘도 그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자에게 벌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다시 일할 기회를 주시지 않으심입니다. 내가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기회 있을 때에 게으르고 나태했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 그래서 있는 자에게 더 주어서 또다른 기회를 허락해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게으른 죄, 가만히 있는 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 변명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솔맨(Sallman)이라고 하는 화가가 있었습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된 젊은 나이에 그는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말해줍니다. "당신은 임파선 결핵을 앓고 있소. 앞으로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부인은 유명한 가수로, 그녀는 지금 임신 중입니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거니와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생각할 때에도 죄스럽습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가 그를 위로합니다. "3개월밖에 못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주셨다고 생각하며 감사하십니다.
아무도 원망하지 마십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천금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십시다. 그러면서 오로지 3개월이나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둘은 기뻐하며 감사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병은 씻은듯이 나았습니다. 그가 그린 그림에 유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입니다. 보통 사람은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때에 대개 자비하신 분으로, 고난 당하시는 얼굴로 그리는데, 이분은 지도력이 있고 강인한 인간성을 지닌 인물로 표현했습니다. 이 그림이 유명해서 수백만 장이나 인쇄되었고 오늘도 많은 가정에 걸려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3개월이 어딥니까? 하루가 어딥니까? 한 달란트가 어디냐 그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감사하며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악함의 반대는 착함이요, 게으름의 반대는 충성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은 믿음으로 극복하고, 환경은 착함으로 극복하고, 게으름은 충성으로 극복할 때에, 몇 달란트건 착하고 성실하게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자에게 더 큰 기회, 더 큰 은혜의 날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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