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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생명력(요한복음 3장 16절~21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일컬어 '작은 복음'이라 하였습니다. 그 안에 기독교의 교리와 복음, 진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성격, 복음의 내용, 복음의 약속, 복음의 조건이 그 간단한 요절 속에 모두 나타나 있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귀한 복음이라 하겠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복음에 있습니다. 간혹 "교회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교회가 부흥하겠습니까?"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해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복음이 있으면 교회는 자연히 부흥하게 마련입니다. 교회의 성장은 비복음적인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느냐 제거하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복음 아닌 것들이 섞여 있으면 교회가 부흥하지 못합니다. 더 깨끗한, 더 순수한 복음성을 지니고 있을 때에 교회는 자연히 성장하게 됩니다. 복음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순수한 복음, 참복음으로 비로소 복음되게 하는 역사가 이루어질 때에야 교회는 생명력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시고, 이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 분명하고 깊은 뜻의 말씀입니다. 여기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이 진리를 깨닫고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감격합니다. 그리고 전파하고 실현하며 구체화해나갑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16절)"---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헬라원문의 '에가페센'이라고 하는 말은 아가페 사랑을 능동직설법으로 표현한 동사입니다. 우리말로 표현하기는 좀 어렵습니다만, 과거에 사랑했고 현재도 사랑하고 미래에도 사랑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사랑하리라가 아닙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지금도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주도적인 사랑이요 창조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할 만한 대상이 되어주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만한 대상을 찾아 헤매시는 것도 아닙니다. 몸소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십니다. 결코 사랑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사랑하셨습니다. 주도적으로 사랑하시고 결정적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미국의 영화배우 딘 마틴을 아실 것입니다. 유명한 작품 여러 편에 출연한 바 있는 명우(名優)이자 헐리우드에서 최장기간 활약한 배우로도 이름나 있습니다. 노래도 잘 불렀습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부르는 모습이 영화팬들에게 인상적입니다.
그가 부른 노래에 'You are nobody'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퍽이나 철학적입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You are nobody till somebody loves you ---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할 때까지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You are no--- body till somebody cares you---누군가가 당신을 돌보아줄 때까지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You are nobody till you love somebody---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까지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You are nobody till you care of somebody ---- 당신이 누군가를 돌보아줄 때까지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받고 있는 사랑을 몰라도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할 때까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삽니다. 밥을 먹고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알아야 사람이요, 사랑을 해야 사람입니다. 사랑 가운데 있어야 사람입니다. 사람된 존재가 사랑에 있음을 잊지 말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괴로운 것입니까? 사랑이 없어서 괴로운 것입니다. 헐벗어서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믿기지 않아서 괴로운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하나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것 같고, 사랑을 해도 받아줄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의 소통이 없음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 받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 받지 않고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 받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사랑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믿지 못해서, 몰라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사랑에 민감한지 모릅니다. 어머니의 이름을 압니까, 나이를 압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무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저를 사랑한다는 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사랑한다 ---- 사랑에 대해서는 민감합니다. 사랑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에 안심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사랑에 의심이 생기면 못 견딥니다. 잠결에도 손을 뻗어 옆에 어머니가 있는가를 확인합니다.
어머니의 몸이 손에 닿으면 안심하고 자지만 없기라도 해보십시오.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고 맙니다. 사랑의 줄을 잡고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젖을 먹고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 사랑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제 좀 자라서 동생이 태어나면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까지 저만 전적으로 받아오던 사랑의 일부가 동생한테로 옮겨갑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고통을 느낍니다.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투정을 하고 일부러 말썽을 부립니다. 저에게로 관심을 끌고자 함입니다. 사랑을 잃는 것, 얼마나 커다란 고통인지 알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는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단지 우리 인간이 미련하여 모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였을 때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서 멀리 떠나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그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죄인의 세상이요, 불법과 무질서의 세상입니다. 폭력과 혼란의 세상이요, 절망과 낙심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같은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 모든 죄악을 익히 아시면서도 사랑하십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 민족을 사랑하십니다. 남한에 있는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를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범죄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 모세가 그 백성에게 실망하여 혈기를 부렸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무섭게 책망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백성을 네가 어찌하여 미워하느냐.' 여러분, 내 기분에 맞든 안 맞든,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이기에 우리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같은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는 사랑표현의 극치입니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분명히 주셨습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의 결혼생활을 보니 문제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언뜻 보면 다 주는 것 같습니다. 몸도 주고 마음도 줍니다. 그러나 끝까지 안주는 것이 있습니다. 자존심을 주지 않습니다. 명예와 자존심만큼은 꽉 움켜쥐고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파경을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의를 주어야 합니다. 명예를 주어야 합니다.
자존심을 주어야 합니다. 남을 돕는다며 고작 몇푼 줘놓고는 신문에다 떠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와 물질, 과연 어느 쪽이 큰 것입니까? 몇 푼 던져주고 명예를 얻겠다고 합니까? 그럴 것이면 주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주겠거든 자존심도 명예도 다 주십시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당신의 전부를 주신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가운데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던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괴로워하고 마음아파하는지 친구들조차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저에게 조용히 부탁을 합니다. 다른 교회로 옮겼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아들 친구들을 보면, 그때마다 아들 생각이 나서 못 견디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 이 사실을 성경에서 수없이 읽고 전하여 왔건만, 자기 아들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독생자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합디다. 그것이 얼마나 큰사랑인지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물질이 아니라 생명과 인격을 주신 것입니다.
아가페의 계시자로서 주님은 오셨습니다. 사랑의 계시의 극치로 주님은 오셔서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부끄럽고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는 그 사건 속에 내일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이 계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의 소통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로부터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참뜻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다. 죄인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는 스스로 죄인이 되셨습니다. 사람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죽음이 아니고는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제사성(祭祀性)이 있습니다.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가 삽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우리를 자녀로 영접하기 위하여, 그 아들은 죽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창녀와 결혼을 합니다. 음란한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았지만, 그 여자 고멜은 옛버룻을 버리지 못하고 아이들을 남겨둔 채 다시 거리로 뛰쳐나갑니다. 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다시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 데려다놓고 호세아는 그녀에게 말합니다.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호 3:3)." 내가 너만을 사랑할 터이니 너도 이제부터는 나만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더럽고 추한 과거는 전혀 묻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을 죽이시면서까지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랑의 증거를 받고야 비로소 참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어떻게 해야 내 사랑을 상대방에게 알릴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우리의 모든 역사, 전쟁이니 질병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하시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간혹 우리가 병원으로 중병에 걸려 있는 사람을 문병하러 갈 때가 있습니다. 무슨 말로 위로할까 망설이며 갔는데 되레 위로를 받고 오는 수가 있습니다.
그는 병중에서 깨달았습니다. '병든 것도 사랑이요 실패한 것도 사랑이요 죽음도 사랑이다.' 저가 하나님의 뜻을 떠났을 때를 생각하면서 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병 중에서 이렇듯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볼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 이 사실을 깨달으면서 새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새로운 생을 살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남편의 사랑이, 아내의 사랑이 귀하기만 합니다. 주변사람들의 사랑도 귀합니다. 모두가 사랑으로 보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본문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6절)."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자 그 아버지는 그를 위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입니다. 형은 그런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탕자를 사랑하기 위하여 아버지는 또 하나의 탕자가 되었습니다. 그러고서 아들을 영접합니다. 이 사랑을 믿을 때에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염려 속에 제가 지난 주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해주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평양에 간다고 할 때 많은 분들이 만류를 했습니다.
초청장 한 장을 믿고 어떻게 갈 수 있느냐 했습니다.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가장 큰 문제는 불신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언제까지 믿지 못하고 살 것입니까? 누군가에서부터 어디에선가부터 믿음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믿어야 합니다. 불신하는 중에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초청장의 내용을 믿을 것입니다. 믿고 가는 것입니다" 했더니 어떤 분은 과연 괜찮을지 내기하자고까지 합디다. 여하튼 저는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믿음을 심어나가고 신뢰를 회복해나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사실 저는 많은 대접을 받고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믿어야 합니다. 더는 의심하지 마십시다. 의심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저는 대동강변도 거닐어 보고 을밀대에도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성밖교회가 있던 자리에 서서 조용히 회상해보았습니다. 40여 년 전 그때에 홀로 내려와서 고학을 하고 고생하던 것이 꿈같았습니다. 그 긴 세월 뒤에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서 있구나 생각하니, 세상에서 나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듭디다. 그동안 겪어야 했던 고생이며 역경이며 하는 것들이 모두 사랑이었습니다. 어느 한가지도 사랑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십자가의 거룩한 사랑의 계시 안에서 개인적인 사랑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품을 떠났을 때, 내가 주님을 잊었을 때에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갈 때에 길을 가로막고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때로 내 다리를 꺾어 놓으시면서 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랑을 오늘에 다시 체험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롭게 간증하면서 우리의 생은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십자가를 보라." 믿음 안에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가 '비오스(bios)'---육체적인 생명입니다. 둘째가 '푸쉬케'---정신적인 생명입니다. 셋째가 본문에서 말하는 '조엔 아이오니온(life eternal)'의 '조엔' 이라고 하는 생명입니다. 구원받은 생명, 사랑을 아는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태어나 살아갑니다. 사랑의 주님 안에서 그 생명줄을 잡고 살아가는 윤택한 생이 '조엔'입니다. 영생 ---- 종말론적 생명이면서 동시에 요한복음에서 말씀하는 현재적 생명이기도 합니다. 현재도 영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적 본능에 이끌려 살아가면 동물이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미쳐 사는 것 ---- 이것이 '조엔 아이오니온,' 곧 영생이라고 하는 생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거저 주십니다. 또 하나의 창조적 능력이 그 안에 있습니다.
구세군의 창시자 윌리엄 부스 대장에게 신문기자가 물었습니다. "다가올 미래와 말세에 어떠한 위험이 있겠습니까?" 이에 대한 부스 대장의 대답이 참 유명합니다. "중생 없는 용서를 제공하는 철학적 기독교,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 성령이 없는 종교, 하나님이 없는 정치, 지옥이 없는 천국" ---- 이것이 위험요소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 십자가의 사랑이 없는 교회가 있어서 문제입니다. 성령이 없는 교회는 생명이 없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했지만,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말세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사랑이 식어지리라"하신 말씀입니다. 가난하고 부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이 식어지리라" ---- 끝입니다. 말세입니다. 인간이 비인간화하는 것입니다. 타락하는 것입니다. 동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오늘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복음이요,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감사하고 이 사랑에 응답할 때에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를 주시는 것이요, 의롭다 하시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 신뢰가 회복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믿음이 회복되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믿음이 성립할 때에 사랑의 깊이가 더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저를 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점점 확장되어나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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