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 신약에 나타난 안식일(1) 예수의 입장 지난 호까지는 구약에서의 안식일과 바리새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번 호부터는 몇 차례에 걸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셨는지를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마태복음에서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은 12장 1∼8절의 밭에서 곡식을 먹은 사건과 12장 9∼14절의 손 마른 자를 치유하신 사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 중 먼저 첫째 본문을 2회에 걸쳐 살펴보도록 하겠다. # 밭에서 일어난 안식일 논쟁(12:1∼8) 이 안식일 논쟁 단락을 적절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 단락을 그 앞 단락인 11장 28절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본 단락과 11장 28∼30절 사이의 주제상의 연결성은 상당히 두드러진다. 28절이 언급하고 있는 그들이 시달리던 '무거운 짐'은 아마도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대한 율법주의적 해석에 의해 그들에게 지워진 짐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23:4 참조). 그에 반해 29절의 '내 멍에'는 예수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와의 인격적 관계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30절에 나타난, 역설적으로 보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는 구절은 그리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예수님의 요구와 가르침은 철저한 성격에도 불구하고(5:21∼48 참조), 자비와 겸손으로 특징 지워지는 그와의 관계(=제자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처럼 무겁지 않고 오히려 쉽고 가벼운 것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29절의 '안식'은 종말론적·메시아적 안식을 지칭하는 것이 명백하다(렘 6:16 / 신 12:9, 25:19 / 시 95:11 / 사 14:3 / 특히 히 4장 참조). 이렇게 볼 때, 11장 28∼30절은 전체적으로 뒤이어 따라오는 안식일 논쟁 단락들(12:1∼8, 9∼14)을 향한 길을 효과적으로 닦아준다. # 마태복음의 전반적 상황들(12:1) 12장 1절은 이 이야기의 전반적인 상황―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일어난 사건, 그 사건이 일어난 때와 장소와 이유―을 묘사해준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상황 설정은 마가나 누가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 첫째,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그 때에'는 본 단락을 바로 앞 단락(11:28∼30)과 보다 긴밀하게 연결시켜주는 효과를 갖는다. 둘째, 마태는 마가나 누가와는 달리 예수님을 본 단락 첫 문장의 주어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러한 변화는 특히 본 절을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과 연관해서 읽을 때 그 의의가 특별히 두드러지게 된다. '이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主)이기 때문이다'(8절). 마태는 아마도 처음 시작 문장의 구조를 바꿈으로써 일종의 '감싸기 구조'(inclusio)를 만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는 처음 시작부터 이야기의 주인공이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 자신임을 명백히 하고자 했던 것 같다. # 예수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12:2) 이제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그리고 그의 제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대적들인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난자들로 등장한다. 그들이 예수 제자들의 행동과 관련하여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를 비난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생이 그 제자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당시 통례였기 때문이다. 본 절의 내용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들에서 이삭을 꺾는 행동을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추수 행위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출 34:21 참조). 어쩌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견해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논증 초점은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견해에 반대하여 그와 그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범하지 않았음을 밝히는데 집중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안식일의 성취이기 때문에, 그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안식일 율법 자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을 논증해 나갈 것이다. # 예수님의 첫 번째 응답(12:3∼4) 바리새인들의 반발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응답은 다윗이 율법을 어긴 사건(삼상 21:1∼6)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님의 논점은 단순히 과거에 율법을 어긴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어길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학자들은 오히려 사무엘상 21장 1∼6절에 대해 예수가 호소하는 근본적인 이유로서 기독론적 주장을 주목한다. 그들은 본 응답에서의 요지가 5, 6, 8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권위라고 제안한다. 만일 위대한 왕(=모형) 다윗이 율법을 재해석할 권위를 가졌다면, 더 큰 왕·메시아(=원형) 예수는 더 높은 정도의 권위를 가지셔야 한다. 다윗 이야기에 대한 예수의 호소 배후에는 이처럼 암시적 다윗-모형론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모형론은 예수의 논점을 적절히 이해하는데 필수적이다. 이 암시적 모형론적 논점은 그 자체만으로는 예수의 메시아적 권위를 주장하기에 충분히 강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이 암시적 주장이 예수의 뒤이은 응답 가운데 나타난 명시적 성전-모형론에 의해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6절). 마태복음 단락에 나타난 예수의 논점 흐름에 있어서, 예수의 첫 번째 응답은 암시적으로 '다윗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두 번째 응답의 명시적인 성전-모형론으로의 길을 이처럼 예비해준다. 암시적 모형론은 마태복음에서 특히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마태는 예수를 다윗적 메시아로 제시하고자 하는 명백한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1∼17, 12:23, 21:9·15 참조). 더욱이 12장 41∼42절의 이중 모형론 역시 우리로 하여금 다윗 이야기에 대한 메시아적 해석을 지향하도록 해준다. 만일 마태가 예수를 구약 성경의 중요한 권위들 가운데 몇몇(즉 성전, 왕 솔로몬, 선지자 요나)에 견주고자 하였다면, 그는 예수를 또 하나의 위대한 인물인 왕 다윗에 견주려고 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예수의 첫 번째 응답과 그 다음 두 응답들의 메시아적 중요성은 8절의 결정적인 메시아적 선언('인자는 안식일의 주(主)이니라')의 기반이 될 것이다. 양용의 /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주일 문제와 관련해 양용의 교수의 글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지금 연재되는 글은 필자의 책 「예수와 안식일 그리고 주일」(이레서원 펴냄)의 내용을 <뉴스앤조이> 독자들을 위해 요약 재구성한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을 보기 원하시는 분들은 앞의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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