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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성장하는 교회- 광일교회(주 특기는 농촌 목회입니다.)

by 【고동엽】 2021. 10. 6.
광일교회“주 특기는 농촌 목회입니다”소량호목사(대한신학교와 신대원)

광주를 위하여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 태전리 271-8번지 성남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한시간 가량 차로 광주읍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시 10분여쯤 외곽으로 벗어났을 때 들판에는 벼이삭이 황금물결을 이루어 출렁이고 있었다. 논밭사이로 드문드문 공장들이 보이는 것이 이곳이 시골도 도시도 아닌 어정쩡한(?) 지역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껏해야 200여 호 남짓한 마을임에도 공장들이 주위에 많은 탓인지 정류장 주변의 건물들은 깨끗한 현대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그 버스 정류장에서 몇 발자국을 더 들어가니 이곳지역 일곱교회중에서 가장 성장하고 있다는 광일 교회당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지은 성전 앞에는 '30일 작정 특별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세로로 큼지막하게 내걸려 있었다.소량호 목사, 한때 크리스천 타임즈의 기획 실장을 맡으며 교계에서 일을 맡아 선교에 헌신하던 그가 이곳 광주읍에 와서 정착한 것은 지난 91년 8월이었다.


광일교회의 시작과 성장


지난주간 금식기도 했기 때문인지 아직 피곤과 수척함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소 목사를 붙들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우선 교회의 역사와 그간의 사역을 물어 보았다."우리교회는 1988년 10월 15일 이 부근에 있는 통합측 모 교회에서 분리되어 개척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이상도 목사님과 이윤섭 장로가 주축이 되어 교회를 세웠는데 그만 시험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이었던 이상도 목사님이 교회 인근에다 새로이 교회를 개척하게 되자 다시 한번 교회는 시험과 분열이 일어난 것입니다. 양떼들은 우왕좌왕했고 말할 수 없는 혼란으로 가슴아파 했습니다. 그때 제가 부임하게 된 것이지요. 그 당시 부임해 보니 교회는 임대교회였는데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50만원을 지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퇴직한 목사님의 퇴직금 때문에 이천여 만원의 부채까지 떠 안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상처를 딛고


좁은 지역인데 가까운 곳에 이웃해서 두 교회가 반목하게 되고 새 신자들은 상처를 받아 교회를 등지게 되니 암담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와서 보니 복음을 알고 실천하려는 제직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을 통하여 위로 받고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그러면 현재의 광일교회는 얼마나 변했으며 또 얼마만큼 성장했을까?"금년 10월이면 교회가 개척된 지는 10년이 됩니다. 그러나 제가 부임한 뒤로부터 새롭게 개척한다는 각오로 사역에 임했습니다. 그게 벌써 만5년이 되었습니다. 저 작년에 연건평 210평의 성전을 완공해서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지금은 장로, 권사 그리고 안수집사 포함한 전체 제직의 숫자가 100여명이 되고 제적 성도는 400여명 정도 됩니다. 농촌교회로서는 상당히 성장한 것이지요.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실제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어디서 이만한 성도들이 모이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들 농촌이나 벽지지역은 이제 더 이상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다고들 알고 있다. 거기에다 광일교회는 개척 초기에 많은 아픔과 상처들이 있었기에 그것이 더욱 어려웠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소 목사는 오직 기도하면서 지금과 같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어 낸 것이다.


농촌을 사랑하는 일이 급선무


요즘 교회마다 교인들이 줄고 있고 개척교회가 성전건축까지 하게 되는 일이 드물어졌는데 더군다나 광일교회같은 특수 상황에서 성전을 짓고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은 쉽지가 않을 것인데 성전 건축까지의 얘기를 들어보았다."모든 것은 하나님이 해 주셔야 합니다. 아직 부흥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우리교회의 성장의 비결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전을 지으려고 하니 사단의 시험이 무겁게 도전하고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주변에 있는 교회는 성전을 건축해서 자리잡고 있는 교회들입니다. 당시 우리교회는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50만원의 임대교회였습니다. 그런데 93년 5월 어느 날 갑자기 건물 주인이 교회를 비우라는 것입니다. 93년 12월까지 교회를 비우라는 내용 증명을 보내 온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성도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죠. 추운 겨울 12월에 개척교회가 갑자기 어디로 이사를 갑니까? 땅을 빌려 천막을 치자, 내년까지 버티자는 등 각가지의 의견들이 나왔습니다만 그 어떤 것도 해답이 될 수 없었습니다.당시 우리 교회는 어렵사리 절대농지 300평을 매입해 놓고 있었는데 이 땅은 용도 변경이 불가능한 땅이었습니다. 결국 방법은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기도 중에 전교인 100일 작정 기도회를 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교회당 이전이 아닌 성전건축을 위한 100일 기도회를 시작하기로 선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00일 기도회를 선포하는 그 시간에 그만 교회소형 버스가 사고를 내고 말았습니다. 봉사하던 집사가 구속되었습니다. 그러니 또 어려움과 시험이 찾아옵니다. 교회는 숨을 죽이듯 고요해졌고 성전건축 문제를 거론 하다가 너무나 힘든 상황이 되었습니다. 특히 93년은 50년만에 찾아온 유난히도 무덥던 여름이었습니다. 1차, 2차, 3차로 나뉘어 그 여름이 꼬박 지나도록 밤마다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매일마다 설교내용과 기도 제목을 프린트해서 나누어주며 기도회를 이어나갔던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눈으로 보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전 건축에 대한 마음이 하나로 뭉쳐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코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온 성도의 동일한 체험이 중요


말을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부드러우면서도 확신 있게 말하는 소 목사에게는 무언가 느낄 수 있는 감화력과 친근감이 있었다."그 기도회 덕분에 하나님의 은혜로 대지 150평을 추가로 매입했습니다. 농지전용 허가를 받고 성전 건축 설계, 허가 그리고 시공자가 정해졌습니다. 어느 것 하나 막힘이 없이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형통케 해 주셨습니다. 건축 기초공사가 시작되자 자원하는 더 많은 심령들이 생겨났습니다. 성령께서 얼마나 강하게 역사하셨는지 금반지, 금팔지, 금목걸이들도 헌금주머니에 넣어졌습니다. 순박한 시골 여 집사님들이 돈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평생을 두고 장만한 것들을 아낌없이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건축하는 동안 성도들이 줄기는커녕 늘어났고 또 좋은 일기 가운데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건축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이사를 나가야 하는 그해 12월에 우리교회는 지하에 임시 입당을 하였고 그 다음 해 6월 24일 정식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장로 1분과 안수집사 5분을 새로 선출해서 목사위임식과 임직식을 동시에 갖기로 하였지만 좀더 교회를 성장시킨 뒤에 위임식을 하기로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잔치를 열었던 것입니다.



이제 1997년 10월 15일을 성전 헌당일로 예정하고 온 교우가 합심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도산 안창호 선생은 경찰서가 하나 늘어나는 것보다 교회당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사단이 가장 방해하는 일은 교회가 개척되지 못하게 하고 교회가 건축되지 못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의 목회사역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악한 세력들을 분별하고 기도로 이들을 결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단은 정사와 권세를 쥐고 관공서와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교회 건축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되면 모든 일이 형통케 되는 것이다.광일교회 소량호 목사 그는 참으로 기도하는 목회자였다.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강인한 믿음과 기도의 능력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광일교회가 이 지역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비결에 대해서 다시 물어 보았다."지역 특성상 전도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여기는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촌도 아닌 아주 애매한 지역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계층 어떤 사람들을 전도의 주 타켓으로 삼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대개의 부부들은 대도시로 맞벌이하기 위해 출퇴근하고 낮 시간이면 노인들밖에 집에 있지 않습니다. 대도시 같으며 노인들조차도 보기 힘들겠지만 이곳은 그래도 경로당이 여러 군데 있고 노인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선 실추된 광일교회의 위상을 높이고 좋은 이미지를 심기 위해 장년 층과 노년층들에게 집중적으로 전도했습니다. 노인정을 찾아가 세배도 하고 시설지원도 해드리고 또 70세 이상 노인은 따로 모아 매년 5월 중에 관광도 시켜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회의적이던 마을 사람들이 광일교회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차츰차츰 축호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개발로 인한 성장의 잠재력 기대


“지금도 우리교회 선교단들이 노방전도를 합니다만 요 최근에 하남시 개발로 밀려난 영세공장들이 광주로 이전해 오면서 교회주위에 사람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상대로 교역자 사모들로 구성된 편지 전도 팀을 만들었습니다. 편지 전도는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하나는 한 번이라도 교회에 출석한 사람들을 상대로 보내는 사랑의 편지이고 하나는 불신자들을 상대로 보내는 이슬비 전도 편지가 그것입니다. 그 결과 한 번이라도 광일교회를 들른 사람은 그대로 정착해서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소량호 목사는 일찍부터 문서 전도에 관심이 컸었다. 목사가 문서전도와 글쓰는 일을 즐겨 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달란트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든 교회 교육과 양육 자료들은 스스로 집필하고 출판하며 때로는 자비를 들여서 출판해서 그것을 전도와 양육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미 만들어진 책 만해도 여섯 권이고 교회 내에서 초신자 양육용으로 쓰이는 작은 소책자들도 초급에서 중급까지 손수 다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었다.중학교가 겨우 하나 있고 이제 내년이면 고등학교가 들어올 예정인 낙후된 지역에서 오직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양떼들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목회에만 전념해 왔던 결과 오늘 이렇게 성장했노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리는 다음 세대에도 분명히 큰 성장이 있을 것이란 것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었다. 광일교회의 핵심은 아무래도 양육과 선교에의 강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에 대한 것을 다시 물어 보았다.


예배를 통한 영성운동


"교회의 1차적인 목표는 예배입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드리기를 가장 강조합니다. 개척 당시에는 여 제직들이 예배에서 많이 수종 들었는데 지금은 남 제직 중심으로 예배에 봉사하게 합니다. 남자들의 권위를 세워 줌으로써 남 제직들의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찬양단과 함께 뜨거운 예배를 한 달에 한 번 이상 드리면서 예배 속의 뜨거움과 감격을 잊어버리지 않게 합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신자로 양육하는 것이 광일교회의 목표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예배자의 의식이 있을 때 이사야 6장에 나오는 헌신과 선교의 고백과 울림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감격하게 될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헌신하게 되는 것이죠. 광일교회는 앞으로 120구역을 목표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한 구역에서 한 곳씩 맡아 120개의 각종 선교사나 단체 기관들을 선교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것을 꼭 응답해 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말씀 준비하기 위해 금식하는 목사, 강단에 올라가기 전 산기도부터 하는 목사, 교회의 중요한 행사 앞에는 언제나 먼저 기도하는 목사로 인정받고 있는 것을 볼 때 광일교회는 광주군 뿐 아니라 나아가서 경기도 일원과 수도권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큰 교회로 성장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우리는 마지막으로 대담을 정리하면서 광일교회와 소목사의 비전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앞으로 한국사회는 도시로 나가서 살던 사람이 다시 도시 근교 농촌이나 전원으로 귀향할 것으로 봅니다. IMF는 이것을 촉진시키고 있습니다.



산업사회에서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자연 회귀 본능이 더 자극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볼 때 이 지역은 앞으로 많은 인구의 유입이 예상됩니다. 이미 교회 앞뒤에서 농지를 전용하여 아파트가 건설될 예정입니다. 98년도만 1500세대의 아파트 입주자들이 몰려오고 2000년대에는 이 지역 인구가 1만 명 이상으로 불어나리라고 봅니다. 태전리 라는 이 작은 마을이 조그마한 도시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지금부터 2000년대를 준비해야 된다고 봅니다. 준비된 일군들을 키우고 평신도 지도자들을 구비시켜서 이 지역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교회도 중심으로 섬기게 해야 합니다. 또 지역 주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서 교회를 개방할 뿐 아니라 깊숙이 침투해서 봉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계획입니다. 지금 현재의 성전도 2000년대를 대비해서 더 확장해야겠고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소그룹조직을 많이 만들어 각계 각층에 전도할 수 있는 전문 집단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향후 광일교회는 2000년까지 천명 성도가 모이는 교회로 성장하리라고 봅니다. 120구역에 120군데에 선교하는 교회 되도록 무릎꿇고 기도하려고 합니다"기도하겠다는 소목사의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정리한 뒤에 흙먼지가 뽀얗게 날리는 태전리 지방도로를 벗어나면서 믿음과 기도 앞에는 산도 움직여진다는 확신을 갖고 서울로 올랐다. 정확히 오후 4시였다
출처 : 주님의 시선
글쓴이 : juapos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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