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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고지를 점령하자
(고후10장4-5)
<총동원 전도주일설교>
우리교회는 11월 15일을 총동원 전도주일로 지킵니다. 이번 총동원전도주일의 이름은 ‘해피데이’입니다 김목사님이 만든 해피데이 전도시스템을 도입해서 교회에 적용하려고 합니다. 해피데이 전도시스템은 지난 주일부터 적용을 시작했습니다. 진행 순서에 따라서 지난 주일에는 전도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은 ‘영적고지’에 관한 설교를 하겠습니다.
전쟁을 할 때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지를 점령하게 되면 평지를 점령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전쟁 중에는 고지 탈환을 위하여 온힘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6.25 전쟁 끝부분에 철원의 백마고지 전투가 유명합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9일간 중국 인민지원군 44,056명과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국군 제9사단 예하의 병력 2만 명이 치룬 유명한 전투입니다. 12번의 공방전 끝에 중국군은 1만여 명, 국군은 약 3,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국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심한 포격으로 고지의 모습이 백마(白馬)같다 하여 백마고지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백마고지를 놓고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백마고지를 빼앗으면 철원평야 일대를 갖게 됩니다. 두 번째는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로 군사지정학상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백마고지를 빼앗기면 백마고지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백마고지보다 더 중요한 다른 많은 것들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백마고지 전투에 패하고 울었다는 것 아닙니까!
신앙생활에도 영적인 고지가 있습니다. 그 고지를 빼앗기면 많은 것들을 잃게 됩니다. 그 고지를 지키게 되면 많은 것들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자들이 지켜야 할 영적 고지 중에 핵심은 생각의 고지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단이 만들어 놓은 견고한 진이 나옵니다. 우리는 영적인 무기를 가지고 그 견고한 진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영적 고지로서 생각이 중요한 이유는 생각이 기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 앞에 상달된다고 고백했고(시 19:14),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넘치도록 능히 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건강을 지키려면 생각을 지키십시오. 내가 건강하게 살 것인가 병약하게 살 것인가를 생각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의사인 맥스웰 박사가 30년간 환자들을 연구한 결과 “결국은 그 환자가 생각하는 방향대로 건강도 되고 인격도 되고 그 삶도 된다.”라는 발표를 했습니다. 잠 18:14에 보면 “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잠 23:7에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사람은 자기가 생각한 대로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밝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인생이 밝고, 건강이 밝고, 삶이 밝은 것입니다. 어두운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 삶이 어둡고, 건강도 어둡고, 인격도 어둡게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귀하게 보십니다. 감사를 잘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받습니다. 반대로 늘 불평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평 잘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불평을 잘하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를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감사거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불평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불평거리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감사를 잘하려면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생각을 잘못하면 불평하게 됩니다. 중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깊은 우물에 큰 두레박 두 개가 도르래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한 두레박이 물을 담으러 내려가면 다른 두레박은 물을 가득 담아 올라와서는 사람들에게 물을 제공하고 빈 두레박이 되어 물을 담으러 내려가면 다른 두레박이 물을 가득 담아 올라왔습니다.
하루는 한 두레박이 옆 두레박에게 불평을 했습니다. “정말 짜증나.” “왜 그래?” “올라올 때는 항상 물을 가득 채워 오는데 금방 다 쏟아버려야 하니 정말 짜증나고 속상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언제나 텅 빈 채로 내려가지만 물을 가득 담아서 올라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한 우물에 있는 똑같은 두레박이지만 생각을 잘하면 감사하게 되고 생각을 잘못하면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해야 하는 이유는 생각이 운명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품을 낳고, 성품은 운명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주는 의미와 같이 사람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자신의 장래와 운명이 결정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생각의 영적고지를 지키지 못해서 망한 대표적인 사람이 ‘가룟유다’입니다. 요 13:2에 보면 마귀가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가룟유다는 마귀가 준 생각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것을 받아드렸습니다. 마귀는 가룟유다의 생각에 견고한 진, 영적 고지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지를 발판으로 삼아 가룟유다 속에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결국 가룟유다는 주님을 팔고 양심에 가책을 받아 자살을 선택했고,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사단이 생각의 고지 속에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 몇 가지를 살펴보고 사단의 견고한 진을 하나님의 견고한 진으로 바꾸도록 사단의 견고한 진에 대체해야 할 하나님의 견고한 진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사단의 견고한 진을 허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견고한 진을 구축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나는 하찮은 사람이다”에서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로 바꾸라.
어느 연구단체에서 서울시내 중학교 학생 2,000명을 상대로 의식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때 제시된 질문 가운데 하나는 “당신은 지금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가?”였습니다. 그런데 조사대상 학생 명 중 긍정적인 답변을 한 학생은 불과 27%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00명 중 27명의 학생만이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나머지 73명의 학생들은 존재할 가치가 없거나 자신을 그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73%의 학생들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낮은 자존감은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씨멘즈(D. A. Seamands)박사는 <상한 감정의 치유>라는 책에서 낮은 자존감이 우리에게 미치는 네 가지 영향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잠재력을 마비시킵니다.
그 결과 자신이 가진 능력보다 못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꿈을 파괴시킵니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꿈도 버립니다. 도전하지 않기 때문에 꿈이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 낮은 자존감은 우리의 대인관계를 해칩니다.
비교의식, 열등의식으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만듭니다.
☛넷째로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됩니다.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의 일을 주저하게 합니다. 낮은 자존감의 사람은 다양한 이유를 대면서 하나님의 일을 회피합니다.
영적인 자존심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낮은 자존감의 원인 중 대표적인 것 첫째는 중요한 타인들의 영향입니다. 둘째는 사회적인 가치관입니다. 세 번째는 완전주의적 신앙입니다. 완전주의는 부모의 끊임없는 요구로 해서 소아기에 주로 형성됩니다. 완전주의적 신앙은 율법주의적인 목회자의 영향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완벽한 신앙을 계속해서 요구하는데 성도들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 때문에 생깁니다. 관계 중심보다 행위 중심이 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완전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아직도 충분치 않아’라는 의식에 지배를 받습니다. 열심히 일해 놓고도 ‘아직 충분하지 않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도 목회에 성공하고 사회생활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열매는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완전주의 신앙을 갖게 되면 절망감과 죄책감을 갖게 만들고 낮은 자존감을 형성하게끔 합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내가 비록 말씀대로 잘 살지는 못해도, 남에게 내세울 것이 없어도,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사람의 판단, 자신의 시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 진리이신 하나님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다. 성경은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런운 존재라고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존귀합니다. 왕의 아들은 왕의 아들이기 때문에 왕자인 것이지, 능력이 많거나, 인물이 좋아서 왕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왕자임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가진 다른 조건이 아니라 왕의 아들이라는 조건이 그를 왕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존귀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가진 능력이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피 값 주고 살만큼 존귀한 존재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 대신 죽어줄 만큼 존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소 한 마리를 위하여 죽어줄 수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소 100마리를 위해서도 죽어줄 수 없습니다. 소가 100만 마리가 되어도, 아니 100억 마리가 되어도 소를 대신해서 죽어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가족을 위해서는 죽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소 100억 마리보다 나의 한 명의 자녀가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런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실 만큼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높은 자존감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집이라고 같은 집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거하는 청와대와 똥개가 사는 개집이 같을 수 없듯이 악령이 집을 삼고 사는 사람들과 성령이 집을 삼고 사는 사람들이 같은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니 존귀한 존재입니다.
“나는 하찮은 사람이다”라는 사단의 견고한 진을 헐어버립시다. 그리고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라는 하나님의 견고한 진을 세웁시다. 영적고지를 점령합시다.
2. “나의 미래는 어둡다”에서 “나의 미래는 지금보다 100배 이상 좋아질 것이다.”로 바꾸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렵게 살아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믿음대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어둡다”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지금보다 100배 이상 좋아질 것이다”라고 믿는다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막 10:30에 보면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현세에는 백배를 내세에는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100배를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백배를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이 100배나 좋아질 것을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어두운 미래를 바라본다면 불신앙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졸지에 잘되게 하시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점점 잘되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악인을 멸하시는 것도 졸지에 망하게도 하시지만 많은 경우 점점 약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많은 고통을 당했지만 희한하게 사울과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갔고 다윗은 점점 강성해 갔습니다(삼하 3:1) 아마 어떤 사람은 자기의 형편은 어렵고, 자기의 능력은 미력하기 때문에 자신의 미래를 어둡게 보고 있을 것입니다. 요즘 어떤 개그맨의 유행어처럼 “그건! 니 생각이고”입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아기를 낳을 수 없었던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후에 기도하는 내용을 보면 한나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8)
여기서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신다는 말은 완전히 망한 상태에서도 높이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죽었는줄 알고 사람들이 그를 거름더미에 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가 높아진다는 것은 완전 불가능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일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시 113편을 보면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떼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지극히 낮은 자들을 높여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 113:7,8에 보면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이화여대 총장이었던 김활란 박사는 첩의 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너무 가난한 집의 딸이라 어느 부자의 첩으로 들어가서 그를 낳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가 망하여 길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가난한데다 첩의 딸이니 그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 시대에는 서자에 대한 학대가 굉장했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을 믿으며 새벽 4시만 되면 일어나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마침내 그에게 유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이화여대 총장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살 같아서 크게 빛나 한낮의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낮의 태양은 너무나 찬란하여 우리의 눈으로는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출하는 태양은 비록 눈부시기는 해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의인은 처음에는 돋는 햇살 같습니다. 일출하는 태양과 같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인의 빛은 점점 밝아져서 한낮의 광명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면 나의미래는 밝습니다. “나의 미래는 어둡다”는 사탄이 속임수를 차버리십시오. “나의 미래는 지금 보다 100 이상 좋아질 것이다”라는 하나님이 만드시는 견고한 진을 세우십시오.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영적 고지를 점령한 것입니다.
3. “나는 할 수 없다”에서 “나는 주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로 바꾸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연중 추위에 시달리는 알래스카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팔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일 년 내내 뜨거운 태양 볕이 내려 쬐는 사막국가에 눈을 치우는 제설차를 팔 수 있겠습니까? 아멘!입니까? 노멘입니까?
그런데 무엇이든지 꽁꽁 얼어버리는 알라스카 에스키모인들에게 냉장고를 음식을 얼지 않도록 보관하는 선반으로 팔고, 한평생 눈을 보지 못하는 사막의 나라에 모래 폭풍으로 고속도로를 덮는 모래를 쓸어버리는 차로 제설차를 수입하게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면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기에 도전했고 결국 이룩한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꿈을 꾸었고 그 꿈들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문제는 크고 그 문제를 풀어야 할 나는 너무나 작아 보이면서 자신감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점점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을 넘어서, 두들겨 봤음에도 불구하고 도전하지 못하는 겁쟁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약 내가 겁쟁이인 채로 살아간다면 나는 아마도 큰일은 못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은 일들만 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제 안에 믿음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믿음 안에서 제 능력을 넘어선 일에 도전해 보았습니다. 분명히 저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씀에 순종해서 도전해 보니 주 안에서 성취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저는 주 안에서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막 9:23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고, 사도 바울은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의 심리학 교수 길슨(M. Gilson)은 "슬픈 인간의 불행은 습관의 문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실험에서 얻는 결과입니다. 구멍 두 개에 두 눈을 대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상자 속에는 두 장의 그림이 나란히 있는데 오른쪽 눈으로는 오른쪽 그림을, 왼쪽 눈으로는 왼쪽 그림을 보게 하였습니다. 한 그림은 슬픈 얼굴이고, 또 하나의 그림은 기쁜 얼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슬픈 얼굴의 그림만 보더라는 것입니다. 길슨 박사는 이것을 "인식의 차단"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자기 자신과 세상을 보는 태도가 어느 쪽 그림이 눈에 들어오는지를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슬픈 얼굴의 그림이 눈에 들어왔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희망적으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기쁜 낯의 얼굴의 그림이 들어왔던 것입니다. 즉 세상을 보는 습관이 행복에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사단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을 깨고 믿음의 견고한 진을 만드십시오. 그래서 영적고지를 점령하기를 바! 랍니다.
4. “나는 전도할 수 없다”에서 “나는 전도할 수 있다”로 바꾸라.
전도에 실패한 우리의 경험들이 우리에게 부정적인 믿음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전도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경험이 성공한 경험보다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들이 우리들에게 ‘나는 전도 할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생각은 사단이 만들어놓은 견고한 진입니다. 이 영적고지를 점령해야 전도가 될 것입니다.
전도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성경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사 52:7에 보면 전도자의 발은 산을 넘는 발이라고 말합니다. 산을 넘는 일은 일반인들에게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번에 태국선교 가서 산지족 마을을 갔는데 산을 오르면서 여러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 중에는 교회 뒷산처럼 가벼운 산도 있지만 남한산성 꼭대기처럼 만만하지 않는 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히말라야를 오르는 것처럼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산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세계에서 최고 높은 산은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산도 도전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점령을 당하고 있습니다. 지구상에는 8000m급 산이 15개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엄홍길씨는 8000미터 이상급 산 15개를 다 정복한 사람입니다.
산이 높아도 도전하는 사람은 정복하듯이 아무리 전도하기 힘든 사람도 도전하면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의 산의 정복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성령님을 의지하고 계속해서 도전하면 언젠가는 정복하게 되어있습니다.
사 49:11에서 하나님은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라고 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산을 길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슥 4:6,7에 보면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큰 산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 앞에서는 평지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가 어렵고,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것 같아도 우리는 올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고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 40:9에서는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전도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명령합니다. 높은 산에 도전하는 것처럼 전도는 두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 40:9에 보면 전도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라”라고 말씀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합시다. 그러면 산을 정복하듯이 영혼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산이 평지가 되듯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 40:3,4에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전도하라 그리하면)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도전합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너무 망설이며 쭈뼛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랫동안 고민하며 망설이다가 결국 시작조차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교회의 사명인 전도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담대하게 순종합시다.
이미 운전면허를 딴 사람은 실제로 차를 몰아봐야 합니다. 운전법 책만 복습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그 사람은 운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이미 전도 면허증이 주어졌습니다. 나가서 전합시다. 전도 대상자를 정해놓고 기도하십시오. 해피데이 기간 동안 지시대로만 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열매 맺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는 사람은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이너마이트가 떨어지면 폭발하여 바위를 부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어도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롬 1:16에서 말씀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전도가 안 될 것 같아도 하면 됩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라서 견디지 못하는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큰 종이에 교회에 다니지 않는 모든 동민들의 이름을 다 적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금년에는 우리 모두 한 사람씩, 두 사람씩 책임지고 전도합시다." 장로님들로부터 모든 교인들이 한 사람 이상 전도하기로 하고, 교인들이 모든 동민을 다 맡았는데,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호랑이로 소문난 윤 노인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얼마나 무섭던지, 그분을 전도하겠다는 교인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상수라는 초등학생이 "제가 윤 노인을 책임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상수가 윤 노인을 책임지겠다고 하니,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네가 윤 노인을 전도하겠다고?" "예." 다음 날부터 상수는 학교 가기 전에 윤 노인의 집에 가서 외쳤습니다.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 "뭐? 야소 믿으라고? 이놈의 자식이!" 할아버지가 잡으러 오면 도망을 갔습니다. 할아버지가 아이를 따라잡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상수는 무사히 학교로 도망을 갔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에 또 윤 노인의 집에 가서 대문을 열고 소리쳤습니다.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 "이놈의 자식이!" 다음 날 아침에 또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하면 할아버지가 따라오고, 또 학교로 도망을 가고, 또 오후에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라고 했습니다. 며칠째 계속 그러니 할아버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놈이 나를 놀린다.'고 생각한 할아버지가 하루는 상수가 올 시간에 대문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상수가 대문을 열고 "할배요, 예수…."하는 순간에 그 무서운 윤 노인이 상수를 붙잡아 가지고 어른을 놀린다며 얼마나 사정없이 때렸는지 상수가 절뚝거리며 막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상수가 또 와서 소리쳤습니다. "할배요, 예수 믿으세요." 할아버지는 나가서 또 때리려 하다가 '아니, 예수가 뭐기에 저 아이가 매를 맞으면서도 예수를 믿으라 하나? 예수가 뭐기에 그렇게 혼나 놓고도 또 오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자기 발로 걸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지 않아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복음의 능력! 으로 전도대상자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11월 15일 해피데이가 기대됩니다. 세 사람을 작정합시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여 영적인 작업을 하고 선물을 들고 만나서 섬기고 영향을 주어서 데리고 옵시다.
영적고지를 점령합시다. 생각을 바꿉시다. 하나님을 믿고 자신감을 가집시다. 따라해 봅시다.
“나는 존귀한 사람이다”,
“나의 미래는 지금보다 100배 이상 좋아질 것이다.”,
“나는 주 안에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전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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