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2,922편)〓/소망 설교

요이1:1-11 올바른 신앙자세

by 【고동엽】 2021. 10. 1.
목록가기
 
 

요이1:1-11 올바른 신앙자세

 

요이1:1-11 말씀으로 올바른 신앙자세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물가에 두 머슴이 물을 뜨러 왔습니다.

한 머슴은 ‘아무리 힘들게 물을 떠놓아도 다 써버리까 또 물을 뜨러 왔다’ 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머슴은 ‘우리가 물을 떠다 놓으면 주인 식구들이 다 쓰면서 얼마나 기뻐하겠냐 그러니 물을 떠서 가져갈 때마다 기분이 참 좋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똑같은 일 속에서도 전혀 다른 마음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일도 마음먹기에 달려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자세가 있고

또 하나는 행복하다 기쁘다 라고 하는 마음자세가 있습니다.

내 생각만 바꾸면 모든 것은 좋은 일이 됩니다. 불평할 일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또 다른 과정으로 건너가기 때문에 너무나 좋은 것이 되야 되거든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냐를 생각하면 원망하고 불평이 나오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라고 생각하시면,

하나님이 이걸 보시고 기뻐하실까 라고 생각하면 전혀 다른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올바른 신앙자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이 내편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는 자세를 가져야 되는데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자기를 장로로 표현을 하면서 택하신 부녀와 자녀에게 편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너희들은 택함을 입었고, 사랑받았다고 하면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원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4절에 너희 자녀중에 하나님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로 행하는 자가 있는 것을 보니 너무나 기쁘다 그래서 서로 사랑해야 되는데

그 사랑은 옛날 말씀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미혹하는 자가 있으니 절대로 넘어가지 마라. 거기에 넘어가면 절대 안된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잘 지켜서 온전한 상을 받으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얘기하면서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된자는 절대로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얘기를 하면서 요한이 간절한 마음으로 부녀에게 부탁하며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지라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알아보면

첫 번째 요이1:2-3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첫 번째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요한은 제일먼저 택하심을 입은 부녀라고 얘기하면서 참으로 사랑하는 자다.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렇게 안다는 것입니다. 그

러면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이렇게 지금 진리와 사랑가운데서 살았다고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제일먼저 인사말을 할 때 그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울서신 13책을 보면, 인사끝말이 은혜와 평강이 있을 지어다 라고 적어져 있습니다. 왜요?

그것이 가장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도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를 다 못 깨닫고 예수를 인간 예수로 보고

하나님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때를 뒤돌아 보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부녀에게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임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서 제일 먼저 시작은 은혜로 되어야 합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값이 하나도 없습니다. 댓가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은혜입니다.

신앙의 시작은 은혜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의 삶의 원천이 되어야 하고,

그것이 근원이 되어서 그 안에서 어떤 문제라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큰 문제도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설교 듣고 나면 목사님에게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은혜라는 말은 값없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잖아요.

그러니까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목사님이 하나님대신 말씀을 전하니까 그렇게 얘기하겠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 듣고 말씀을 통해서 나를 많이 돌아봤네요 라고 인사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한테 베풀어주신 호의인데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한테 일방적으로 주신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그 은혜 안에 잠기냐하는 것은

신앙의 수준입니다. 은혜가 크면 클수록 모든 문제는 적어집니다.

왜 자살합니까? 앞으로의 소망보다 현실이 크니까 자살하잖아요.

오늘 아침에도 아프칸 사건 때문에 목사님 두분하고

외대 아랍어과 교수하고 3명이 대담하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선교도 단기선교라 하지 말고 봉사라고 하자 라고 얘기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놀러가면서 단기선교간다고 하는데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선교라함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을 선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 말도 못하는데 그것이 무슨 선교입니까. 봉사죠. 왜 그렇게 얘기합니까? 어마어마하게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려는 겁니다.

아랍어과 교수가 그러는데 아랍어과 학생중에서 순교를 작정하고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고 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어마어마한 것 같지만, 순교는 내가 하고 싶다고

순교가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전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표시를 할려고 합니다.

올바른 자세로 선교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건주의, 위험한데 갔다 왔다는 것, 아랍에 가는데

청바지에 슬리퍼 신고 가는 것은 그 나라 문명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안된다는 겁니다.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의 법과 문명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전도하려할 때 그들과 똑 같이 맨발로 흙 밟고,

그들이 먹는 밥 먹고, 자고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선교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한테 무엇을 베풀어 주셨는가를 많이 깨닫는 것이

은혜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나한테 이것도 해주셨고,

 

저것도 해주셨고 하는 것을 많은 부분에서 깨달아 진 사람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커지면 커질수록 신앙 수준이 높아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신앙수준을 가지려면 제일먼저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되는데

그 중에 은혜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평강은 은혜를 깨닫고 난 이후에 생기는 결과가 평강입니다.

은혜는 시작이고 은혜를 깨달은 결과로 자연히 오는게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한테 하신 모든 것을 깨닫고 누리는 것이 평안합니다.

 

우리의 신앙자세도 세상을 누리거나, 무엇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것이 올바른 신앙자세입니다.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집합체인데 그분을 내가 얻고 그분 안에서 발견되어지고, 그분을 깨닫고, 누리고, 사는 것만큼 귀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이 주는 것보다 우리주님이 주시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세상에서 느끼는 것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서 깨달아 지는 것은 오래갑니다. 내 안에서 깨달아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은사로 하는 것이고 성도들에게 복 받을 지어다 하는 겁니다.

그래야 쉬우니까. 그러면 절대로 속으로는 못들어 갑니다.

은혜와 평강안으로 들어가 내 안에서 주님만 누리고는 못삽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제일 먼저 신앙의 올바른 자세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병을 다 고치고 난 후 히스기야가 이사야 38장에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평안 주려고 그러셨구나 하고 고백을 합니다.

히스기야에게 죽을 병든 것은 곧 평안입니다.

 

우리에게 적용해보세요. 내 앞에 큰 문제는 평안주시려 것입니다.

평안을 주시려고 문제가 앞에 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안을 다 잊어버리고 문제만 보고 어쩔줄 몰라하잖아요.

우리가 그 문제를 통과하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에게 평안이 오지 않습니다.

문제를 통과해야만 평안이 오니까 그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공부하신 분들도 여기서 공부해서 다른 곳에서 가르치려고만 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자기가 먼저 적용받고 그 말씀속에 내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오래 걸리는 겁니다.

내가 먼저 적용을 받고 말씀속에서 내가 먼저 깨달아야

히스기야 같은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어떤 조건보다도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의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요이1:5-6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두 번째 어려움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요한이 부녀여 하고 부릅니다. 이제 네게 구한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자 그랬습니다.

왜냐면 이것이 새 계명같이 쓰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 사랑이다 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사랑은 계명을 지킨 것인데 옛것이 아니라, 지금해야 할 것이다.

지금해야 새계명이다 이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뜻을 따라서 우리도 살아가려 하고,

다른 사람을 보듬으려고 하면 많은 비난도 받고, 상처도 받다보니

내가 이럴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주는 겁니다. 사랑은 받은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제일먼저 무엇을 주어야 하냐면 나를 주어야 됩니다.

특별히 부부지간에 먼저 이것이 되어야 그 다음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지간에 이것이 안 된다면 다른 사람한테 한 것은 전부 모양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공부하고 아~ 알았어 안들은 말을 듣고 안 것으로 자기가 된 것인줄 착각하고 자기가 남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어디서 드러나느냐 하면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면서 상대방이 알아버립니다.

자기는 아는 것처럼 얘기하지만 상대는 벌써 알고 거북해 합니다.

내가 들어가 보지 않은 것은 상대방이 거부합니다.

성경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속에 들어가서,

만나서 깨지고 부서지고 엎어져봐야 진짜 것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려움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자세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는 것이 쉽습니까? 받는 것이 쉽습니까? 전부 받으려고만 하잖아요.

혹시라도 누가 따뜻하게 해주면 계속 해 달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께도 달라고만 하잖아요. 그러나 한번 줘 보세요. 얼마나 기쁜지.

어제 마늘 한 박스를 노인정에 맡겨서 다 까왔어요. 예전에는 하루종일 둘이 깠었어요.

가져온 마늘을 제가 캇트기로 한다라에 고봉을 만들어 놨어요.

그것을 해 놓고 얼마나 행복했는지 압니까? 왜 제가 행복했을까요? 주고 있잖아요.

사모님 오기 전에 해 놓으려고 부지런히 했습니다. 줄 때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나는 사모님꺼니까 사모님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신앙자세라는 겁니다.

 

막12:29-31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이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이웃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옆 사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 옆 사람에게 얼마나 나를 줬습니까? 옆 사람이 나를 좋다고 합니까. 질린다고 합니까.

나를 맛있게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부부간에 사랑하고, 부모자식간에는 자연이 나오는 사랑이니까 말할 것도 없겠죠. 그리고 이웃에게 나를 줄 수 있는 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바르실래는 다윗이 마하나임으로 도망왔을 때, 그 식구들을 전부 공궤했던 사람입니다.

자기를 줬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다윗이 바르실래에게 함께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는 나이가 많아 늙었으니 자기 아들 김함을 데리고 가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김함이 가서 다윗이랑 겸상해서 밥먹었을 겁니다.

그리고는 게롯김함이라고 하는 도시 이름이 있습니다. 김함이 살았던 곳이다 라는 뜻입니다. 바르실래는 어려움에 처한 다윗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주어서 상대가 살아날 때 하나님께서 인정해 줄줄 믿습니다.

 

세 번째 요이1:7-8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세 번째 미혹당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는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져야 됩니다.

요한은 그때의 많은 잘못된 사람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순회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러 다니면 그들에게 밥도 주고, 옷도 주고, 차비도 주고 했는데, 엉터리 같은 사람들이 그런 행세를 하고 헌금해라, 기도 받아된다고 권유를 하면서

자기 사욕만 채웠던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 사람들에게 넘어가지 마라고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미혹당해서는 안된다고 얘기하면서 너희는 삼가 일한 것을 잃지 마라 하면서

미혹당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왜 미혹을 당합니까? 말씀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아랍어를 배우면서 왜 순교하려고 합니까?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가서 그렇습니다. 순교가 먼저 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순교하고 싶다고 순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되는 것입니다.

순교는 내가 하나님 편에 서서 있다 보면 순교가 되어져 가는 겁니다.

이단에 넘어가면 목숨 내놓고 합니다.

 

우리도 잘못된 길을 왜 따라 갑니까. 말씀을 모르니까 그런겁니다.

말씀안에 들어가면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말씀을 지식으로 알고 삶에서 안 살아 보면 금방넘어가 버립니다.

왜 말씀 안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서려고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까?

경험을 해야 되니까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겁니다.

그런데 어려움은 안당하고, 머리로만 배우니까 허풍을 떱니다.

미혹을 안 당하려면 말씀 안에 깊이 들어가서 실수도 해보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 절대 안 넘어 갑니다.

 

고후11:13-15

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사단은 얼마나 가장을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교묘히 가장을 하니까 수준높고 괜찮은 사람도 넘어갑니다. 하물며 말씀에 깊이 뿌리를 못 내린 사람은 얼마나 많이 넘어가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을 듣고, 관점이 바뀌어지고, 하나님의 심정이 깨달아지고,

삶속에서 우리 주님을 만나고 이해하고 느껴져서 변화가 되어지면 미혹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거짓것들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미혹당하지 않도록 말씀을 삶속에서 많이 깨닫고 그 안에 들어가려고 애를 써야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를 죽이려고 오노평지에서 만나자고 5번이나 유혹을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안 넘어 갔습니다. 왜 안 넘어 갔습니까?

느헤미야는 말씀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안넘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 안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하루아침에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달 두달에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고 삶속에까지 들어가려면 한참 걸립니다.

삶속에서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려고 애를 쓰고, 그럴 때 아픔이 같이 한다는 것도 아시고 올바른 신앙자세를 갖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올바른 신앙자세는

첫 번째 은혜와 평강을 누리면서 살아가려고 해야 됩니다. 세상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어려움에도 사랑을 실천하는 올바른 신앙자세를 가져야 되고

세 번째 미혹당하지 않도록 늘 조심하는 자세를 가져야 될 것을 말하고 있으니

우리도 날마다 은혜와 평강을 누리고, 어려움에도 손을 펴고,

미혹당하지 않도록 말씀에 굳게 서는

올바른 신앙자세를 갖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