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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이 세대의 고민 중의 가장 큰 고민은 인간이 날로 비인간화되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성이 그렇게 포악해질 수가 없고 그렇게 잔인해질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신문지상에는 매일같이 깜짝깜짝 놀랄 사건들이 보도되지만, 이제는 경악을 하기보다는 우리의 감각이 점점 무디어져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날, 자연이 파괴되고 자연 질서마저 파괴되었다고 말합니다만 그 이전에 먼저 인간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상실되어 감에 우리의 아픔이 있습니다. 비인간화가 바로 오늘의 철학의 과제요, 윤리의 초점이며, 도덕의 근본 문제입니다.
그러면,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즉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인간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비인간적인 것만 나타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흔히 말하는 "인간답다"고 하는 그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컴퓨터나 기계가 아닙니다. 생산 도구도 아니며 로보트도 아닙니다. 물론 동물도 아닙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됨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습니까? 흔히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비인간화되어 간다고 외치며 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개탄하고 있는 당신 자신의 인간됨의 현주소는 어디까지 와 있습니까? 「나」라는 존재는 얼마만큼 인간적이냐 하는 이 문제에 깊이 착안해서 잃어버린 관심을 다시 돌려야 하겠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결혼할 때, 정말 세밀하게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봅니다.
몸이 건강해야 하고 학벌도 있어야 하고 재산도 있어야 하고 지위도 있어야 하는 등 자기 주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대방에게만 이것저것 요구합니다. 저는 이런 젊은이들에게 결혼 생활 10년 이상 된 선배에게 가서 이제 다시 청춘으로 돌아가서 결혼한다면 어떤 사람을 택하겠느냐고 물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분들의 대답은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인간성 좋은 사람"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할 것입니다. 인간성이 좋은 것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돈, 지위, 명예 등이 그렇게도 대단한 것입니까? 먼저 사람다워야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만 만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돈있는 사람은 어쩐지 돈자랑하는 것 같아서 기분 좋지 않고, 권력있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왠지 그에게 종속되는 것 같아 편치 않습니다. 가장 편안한 것은 인간성이 좋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제가 잘 아는 어느 남자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요즘은 기계로 쌀에 있는 돌을 가려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별로 없습니다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일이 가정에서 쌀을 일어서 밥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가끔 밥을 먹다가 돌을 씹는 경우가 생겨 주부들이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어쩌다가 돌을 씹게 되어도, 아내에게 한번도 내색하지 않고 아내 몰래 처치하곤 했답니다. 사실 아내도 돌을 넣고 싶어 넣은 것이 아닌데, 이것으로 아내에게 야단을 치고 따진다면 얼마나 피곤한 사람입니까?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에게 가장 예민한 열등 의식을 건드리지 않고 자존심을 세워 주는 데 신경 쓰는 여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설사 돈이 떨어져도 남편에게 내색하지 않고 지혜롭게 넘어가서 다음부터는 절약하여 남편으로 하여금 열등감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 주어야 합니다. 한정된 수입 안에서 돈 없다고 해도 대책은 없지 않습니까? 서로 마음 상하지 않도록 상대방에 대해 깊은 배려를 해 주자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비인간화입니다. 비인간화가 신문의 3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 간의 대화 속에서 서로 약한 점을 건드리고 헐뜯으면 그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이 일찍 귀가하지 못하고 좌회전 우회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이란 곧 긍휼을 말합니다. 기계적인 의나 컴퓨터식의 상선벌악(賞善罰惡)도 아니며 인과보응의 날카로운 비판도 아닙니다. 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용서가 넘치는 그 곳에 인간미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미를 이야기하자면 미국 뉴욕의 시장 중 남달리 유명한 시장으로 알려진 라과디아씨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 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빵을 훔치다 체포되어 기소된 노인을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빵을 훔쳤느냐고 노인에게 묻자 울먹이면서 대답하기를 "죄송합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지나가다가 나도 모르게 손이 갔습니다"라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재판장은 "당신의 죄는 10불 벌금형에 해당합니다. 벌금 10불을 내시오." 판결을 하고서는 자기 지갑을 열어 10불을 내놓으면서 "이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처럼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그 죄로 이 벌금은 내가 내겠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나같은 죄인으로 벌금 내실 분이 있으시면 내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모자를 벗어 돌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47불을 모금해서 노인에게 주었고, 그 노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재판정을 나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이야기가 주변에 없어서 살맛이 안 납니까? 인간적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긍휼이 있는 인간들이 모여서 사는 곳이 바로 인간적인 세상입니다. "긍휼을 행치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긍휼은 윤리적인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바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기준 중의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긍휼이란 하나님의 심판에까지 영향을 주는 그런 엄청난 의미를 가진 행위입니다.
출애굽기 33:19의 말씀에 대한 응답인 로마서 9:15, 18에 보면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일방적이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격 있는 자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자를 사랑하는 바로 그 절대적 사랑이 긍휼입니다. 이것은 수직적이요 하향적입니다.
성경의 비유 중에서 설명하면 하나는 아버지요 또 하나는 목자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기대가 있습니까? 또는 무슨 자격을 논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수하고 잘못해도 아직 모르기 때문이라고 용서하고 너그럽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또한 목자는 양을 사랑합니다. 인간의 장점 중의 하나가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동물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깁니다. 양이 잘못했다고 해서 어느 목자가 양과 싸우겠습니까? 오래오래 참아 주고 그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목자의 긍휼입니다 우리는 이 긍휼에 대해서 몇 가지 깊이 생각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긍휼을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나의 의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의롭다고 한들 얼마나 의로우며 하나님께 무엇을 바친다고 한들 얼마나 드릴 수 있습니까? 본래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어떠한 선도 의도 공로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만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그것이 근본적이요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외침은 오직 긍휼을 의미하며 오직 긍휼은 오직 은혜요, 오직 은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루터의 개혁 신학 전체에 흐르는 맥락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두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이 지켜보십니다. 그 중 바리새인은 "내가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고 십일조를 바치며 이렇게 의로운 일 했습니다"라고 기도하며 덧붙이기를 "저기 저 죄인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전혀 긍휼을 구하는 자세가 아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뒤에 멀리 서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세리는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오직 한마디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크게 의롭다 함을 얻고 돌아갔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비판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부족을 탓하면서 긍휼을 구하는 마음이 인간됨의 현주소입니다. 본문에서 "심판받을 자처럼 말하고 행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언제나 심판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긍휼을 구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 긍휼을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9:13에 보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시련이나 환난이나 출세나 실패나 건강이나 혹은 질병 등 모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긍휼을 가르치십니다. 긍휼의 의미를 깨닫고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며, 나아가서 긍휼을 베풀 줄 아는 자가 되도록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철이 들었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긍휼을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내가 존재함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므로 끊임없이 그의 긍휼을 구하고 배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인간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그 순간에도 "하나님이여, 이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엄청난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것을 배운 스데반도 자신이 순교할 때, 역시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긍휼을 베풀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에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있습니다. 당연히 찍어 버려야 할 순간인데, 그 무화과나무 과원지기는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주여 1년만 참으세요, 내가 가꾸고 더 수고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열매맺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내년에는 꼭 열매를 맺을 것을 믿고 있습니다. 여기에 긍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긍휼을 끝까지 배울 자세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긍휼을 베푸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됨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미래 지향적인 사랑이고 약속을 믿는 사람의 표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부자와 부잣집 문간의 거지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죽어서 부자는 지옥으로 갔고, 거지는 하나님 앞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보아도 부자의 특별한 죄목이 없습니다. 그의 죄목은 다름이 아니라 불쌍히 여길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긍휼히 여기지 않았기에 긍휼 없는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베푸는 은혜, 긍휼히 여기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지나간 날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의 선생님을 기억하십니까? 어느 선생님이 실력이 있었고 어느 선생님이 미인이었다는 것은 거의 희미합니다. 그러나, 수업 종이 울린 것도 모르는 채 눈싸움하고 놀다가 늦게 들어가 매맞을 것을 각오한 나에게 꽁꽁 언 손을 만져 주시며 얼마나 손이 시리냐고 염려하시던 그 선생님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합니다. 즉 마지막까지 기억나는 것은 긍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마지막으로 할 기도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는 긍휼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말 외에 무슨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긍휼은 마지막 말입니다.
그리고 긍휼은 기적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환자들을 돌아보실 때도 불쌍히 여기시어 고쳐 주셨습니다. 긍휼히 여긴 그 마음 속에 하나의 능력이 작동합니다. 즉 기적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긍휼은 감격을 낳고 감격은 인간을 만듭니다. 사람은 밥을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감격을 먹고삽니다. 또한 사람은 뜨거운 사랑을 먹고삽니다. 그래야만 인간입니다.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감격을 경험하고서야 인간이 되고 이 감격을 이어가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긍휼은 율법과 심판을 이깁니다. 최후까지 남는 것은 긍휼의 마음뿐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은 죄입니다. 또한 죄를 이기는 것은 심판이며 심판을 이기는 것은 긍휼입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고 화평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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