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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게 하시는 하나님(창세기 17:15-22, 18:12-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머니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라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맹수 중에도 가장 포악한 맹수가 표범이라고 합니다. 사자나 범은 길들이기가 쉽지만 이 표범만은 거의 길들이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 표범을 길들여 가지고 마음대로 타고 놀기도 하고, 얼굴을 맞대고 부비기도 하는 그러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어느 아나운서가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포악한 표범을 길들여 같이 지낼 수가 있느냐고, 그는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웃음입니다." 이런 맹수도 내가 웃고 그 웃음이 저쪽에 전달될 수 있으면 이러한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웃음이란 참 위대한 것, 굉장한 능력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꽃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웃는 얼굴입니다. 깨끗한 웃는 얼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의로운 웃음은 반갑다. 악의로 웃는 웃음은 무섭다. 되는대로 웃는 웃음은 천박하다. 전혀 웃지 않는 사람은 어렵고 까다롭다." 웃음에 의해서 사람을 구분한 좋은 얘기가 되겠습니다.
웃음도 여러 가지입니다. 기뻐서 웃는 웃음, 기쁨이 가득 차서 가랑잎만 보고도 하루종일 웃는 그런 웃음 말입니다. 이것은 기쁨이 충만해서 흘러나오는 웃음, 그건 아름다운 웃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웃음도 있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웃어버리는 웃음, 허탈감에서 웃는 어이없는 웃음, 비방하는 마음으로 웃는 비웃는 웃음, 젊은 사람들이 쓴말입니다만 이런 웃음을 가리켜 "웃기네" 그럽니다.
또 억지로 웃는 웃음, 우습지도 않은데 너 왜 나를 자꾸 웃기느냐 하며 억지로 웃는 웃음도 있습니다. 사실 코미디언들이 억지로 웃기고 따라 웃어 주는 것은 피차 고생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거짓된 웃음, 간사한 유혹하는 웃음, 생각하면 웃음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는데 이것마저 오염되고 타락되었다고 생각하면 그지없이 서글픈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크신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그 축복의 상징으로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가 자식이요, 하나가 땅입니다. 자식에 대한 것은 신령한 축복이요, 그리고 땅에 대한 것은 물질적인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시간적인 축복이고 하나는 인간적인 축복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자식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도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많은 후손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복은 땅에 대한 축복입니다. 너의 고향을 떠나라.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을 보이겠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축복을 받는 그 타이밍이 문제입니다. 어느 시간에 주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축복하시는 과정과 그 방법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뜻에 차이가 납니다. 분명히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최소한도 1년 후엔 주셔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려 25년 후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만 그쳤습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땅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평생 나그네로 방황하며 살았고 실질상으로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500년 후입니다. 여기서 또 한번 지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틀림이 없고 또 약속은 지키시는데 그 시간과 그 방법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자식을 주실 것을 믿었고 또 바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내년이 때에 아들을 주마 하고 말씀하실 때에 그는 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25년 전부터 말하는 것인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믿을 수가 있나요? 오늘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면 오히려 믿을 수 있겠는데, 25년 전부터 주시마 주시마 한 말씀을 오늘에 와서 또 내년에 주신다 하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불조심하라 하는 이야기를 밤낮 듣고 삽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에 불조심 못 합니다. 늘 들어 왔기 때문에, 하도 많이 들은 얘기니까 면역이 됐습니다. 여기서 실수하게 됩니다.
또 사라로 말하면 자기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12에 보면, "이제 어찌 낙이 있으리오, 남편 나이 100세요, 내 나이 90이며, 벌써 경수가 끊겼으니 무슨 낙이 있겠느냐" 했습니다. 자기 나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2에 보면 "죽은 자와 방불하다" 했습니다. 모든 생리적 차원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년에 자식을 주신다 할 때에 주시려면 진작 주시지 이젠 다 끝났습니다 해서 믿지 못하고 웃어 버린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이 웃기시누만!" 하며 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나 권능은 믿는데 그 현실성을 못 믿었습니다.
그는 바랐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기적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준다 할 때 가서 못 믿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바랐고 믿었습니다만 미래적으로, 무한히 미래적으로 생각했고 그리고 추상화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 현실성과 실지적 의미를 못 믿었습니다. 신앙을 구체화하지 못했습니다. 'Here and now.' 여기에서 지금 내가 직면한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하여 나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못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걸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은 편법을 썼습니다. 이것이 나약한 인간의 소행입니다. 그는 방법을 좀 달리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아주 처절한 말씀이 나옵니다. 17:18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또 주신다고 그러지 말고 내가 좀 의도를 했습니다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아 남기를 바랍니다. 하는 뜻입니다. 얼마나 인간다운 얘기입니까, 이 얼마나 깨끗한 고 백입니까? 아주 인간적인 고백입니다. 인간적인 소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그는 말씀을 들은 때가 75세요, 이제 십년을 지내고 나서 85세가 되고 나니까 안 되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다고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무슨 수를 내야지 하여 부부 합의하에 소실을 얻어 편법으로 얻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더 늦기 전에 무엇인가 편법으로 얻어 보려고 하는 그 마음은 극히 인간적입니다. 그렇게 얻은 이스마엘, 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아 남기를 원합니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인간적으로 합리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7:1에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왜 휘청거리느냐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당화해 주기를 바랐으나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직선적으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했습니다.
사라가 장막 뒤에서 이 소리를 듣고 웃었습니다. "이제 무슨 낙이 있겠느냐" 해서 웃은 것입니다. 18:12을 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 어찌 낙이 있으리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오 하느냐."
이 말씀을 자세해 들어보십시다. 사라가 기가 막혀서 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왜 웃었느냐." 이에 대해서 15절에 보면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고 부정하며 하는 말이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부정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 세 마디를 연결해 보세요. "왜 웃었느냐?" "아니오,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이 아름다운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안개됨과 우리의 불과 같은 인생 됨과 영화라고 해 봐야 풀의 꽃과 같은 인간임을 아십니다. 자기의 능력 안에 제한되어 가지고 헤어나지 못하고 무상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왜 모르시겠습니까? 사라가 이것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자식을 바라면서도 웃어야 하는 그 이유를 왜 모르시겠느냐 말입니다.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으니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만일 이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왜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고 비웃느냐" 이렇게 책망을 했다면 사라는 이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못하여 웃어 버리는 이 사라를 결코 책망하시지만 않았습니다. "웃었느니라. 그러나 약속은 이루어지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변덕스러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변덕스럽게 우리를 대한다면 몇 사람 살아 남을 것 같습니까? 자식들이 부모에게 변덕스럽게 대하는 것처럼 부모가 자식에게 대한다면 어느 자식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저 어리석고 미련하고 약해서 이렇게 믿음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웃어 버리는 이 불쌍한 사라를 하나님께서 또 한번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은 네 마음을 안다. 그리고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 투성이 입니다. 체질화된 불신과 무능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까지 관계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나약성이나 불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웃었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21:1에 보면 말씀대로 행하셨으니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 했습니다. 21:6에 보면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의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그 뜻이 "웃음" 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웃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쓴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거짓된 웃음을 성실한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웃기신 것이 아니라 웃게 하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이 얼마나 소중한 복음입니까. 이 복음만을 믿어야 했습니다. 이 마지막 통첩은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믿고 순종함으로 이제 귀한 약속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주실 때에 믿고 감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기왕에 그렇지 못해서 믿지 못하고 웃어 버렸지만 그러나 "네가 웃었느니라.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이 마지막 말을 사라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해서 귀한 아들을 얻었고 웃음이 이제 진실한 웃음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갑니다. 희극과 비극은 원점에서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웃음의 뜻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쓴 웃음, 거짓된 웃음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실한 웃음, 그 마음을 충만케 하사 터져 나오는 그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웃음을 웃어갈 수 있을 때에 이 웃음으로 모든 악과 모든 거짓을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 옛날에 불신의 웃음을 했던 사라를 참된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던 주님, 우리의 웃음에 다시 그 같은 충만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제 주께서 웃게 하시는 그 웃음을 웃게 하시고, 이 밝은 얼굴로 이 세상을 보며 이 거짓된 세상을 진실하게,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믿음의 장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큰 기쁨을 주신 주님, 우리에게 이 같은 놀라운 기쁨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웃게 하시는 하나님(창세기 17:15-22, 18:12-15)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머니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이스마엘에게 이르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지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내 언약은 내가 명년 이 기한에 사라가 네게 낳을 이삭과 세우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를 떠나 올라가셨더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라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가라사대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맹수 중에도 가장 포악한 맹수가 표범이라고 합니다. 사자나 범은 길들이기가 쉽지만 이 표범만은 거의 길들이기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이 표범을 길들여 가지고 마음대로 타고 놀기도 하고, 얼굴을 맞대고 부비기도 하는 그러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어느 아나운서가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포악한 표범을 길들여 같이 지낼 수가 있느냐고, 그는 한 마디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웃음입니다." 이런 맹수도 내가 웃고 그 웃음이 저쪽에 전달될 수 있으면 이러한 아름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웃음이란 참 위대한 것, 굉장한 능력을 가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꽃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웃는 얼굴입니다. 깨끗한 웃는 얼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의로운 웃음은 반갑다. 악의로 웃는 웃음은 무섭다. 되는대로 웃는 웃음은 천박하다. 전혀 웃지 않는 사람은 어렵고 까다롭다." 웃음에 의해서 사람을 구분한 좋은 얘기가 되겠습니다.
웃음도 여러 가지입니다. 기뻐서 웃는 웃음, 기쁨이 가득 차서 가랑잎만 보고도 하루종일 웃는 그런 웃음 말입니다. 이것은 기쁨이 충만해서 흘러나오는 웃음, 그건 아름다운 웃음입니다. 그러나 이런 웃음도 있습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웃어버리는 웃음, 허탈감에서 웃는 어이없는 웃음, 비방하는 마음으로 웃는 비웃는 웃음, 젊은 사람들이 쓴말입니다만 이런 웃음을 가리켜 "웃기네" 그럽니다.
또 억지로 웃는 웃음, 우습지도 않은데 너 왜 나를 자꾸 웃기느냐 하며 억지로 웃는 웃음도 있습니다. 사실 코미디언들이 억지로 웃기고 따라 웃어 주는 것은 피차 고생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거짓된 웃음, 간사한 유혹하는 웃음, 생각하면 웃음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는데 이것마저 오염되고 타락되었다고 생각하면 그지없이 서글픈 얘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크신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그 축복의 상징으로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가 자식이요, 하나가 땅입니다. 자식에 대한 것은 신령한 축복이요, 그리고 땅에 대한 것은 물질적인 축복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시간적인 축복이고 하나는 인간적인 축복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령한 자식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도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많은 후손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복은 땅에 대한 축복입니다. 너의 고향을 떠나라.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을 보이겠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축복을 받는 그 타이밍이 문제입니다. 어느 시간에 주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축복하시는 과정과 그 방법이 문제가 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뜻에 차이가 납니다. 분명히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최소한도 1년 후엔 주셔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려 25년 후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만 그쳤습니다. 여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땅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평생 나그네로 방황하며 살았고 실질상으로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500년 후입니다. 여기서 또 한번 지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틀림이 없고 또 약속은 지키시는데 그 시간과 그 방법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자식을 주실 것을 믿었고 또 바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내년이 때에 아들을 주마 하고 말씀하실 때에 그는 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25년 전부터 말하는 것인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믿을 수가 있나요? 오늘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면 오히려 믿을 수 있겠는데, 25년 전부터 주시마 주시마 한 말씀을 오늘에 와서 또 내년에 주신다 하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불조심하라 하는 이야기를 밤낮 듣고 삽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에 불조심 못 합니다. 늘 들어 왔기 때문에, 하도 많이 들은 얘기니까 면역이 됐습니다. 여기서 실수하게 됩니다.
또 사라로 말하면 자기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12에 보면, "이제 어찌 낙이 있으리오, 남편 나이 100세요, 내 나이 90이며, 벌써 경수가 끊겼으니 무슨 낙이 있겠느냐" 했습니다. 자기 나약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12에 보면 "죽은 자와 방불하다" 했습니다. 모든 생리적 차원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년에 자식을 주신다 할 때에 주시려면 진작 주시지 이젠 다 끝났습니다 해서 믿지 못하고 웃어 버린 것입니다. "이거 하나님이 웃기시누만!" 하며 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좀더 깊이 생각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못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나 권능은 믿는데 그 현실성을 못 믿었습니다.
그는 바랐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기적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은 사실인데 준다 할 때 가서 못 믿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겁니다. 바랐고 믿었습니다만 미래적으로, 무한히 미래적으로 생각했고 그리고 추상화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 현실성과 실지적 의미를 못 믿었습니다. 신앙을 구체화하지 못했습니다. 'Here and now.' 여기에서 지금 내가 직면한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하여 나를 통해서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못 믿었다는 얘기입니다. 이걸 믿어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은 편법을 썼습니다. 이것이 나약한 인간의 소행입니다. 그는 방법을 좀 달리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아주 처절한 말씀이 나옵니다. 17:18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아들을 또 주신다고 그러지 말고 내가 좀 의도를 했습니다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아 남기를 바랍니다. 하는 뜻입니다. 얼마나 인간다운 얘기입니까, 이 얼마나 깨끗한 고 백입니까? 아주 인간적인 고백입니다. 인간적인 소원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그는 말씀을 들은 때가 75세요, 이제 십년을 지내고 나서 85세가 되고 나니까 안 되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다고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무슨 수를 내야지 하여 부부 합의하에 소실을 얻어 편법으로 얻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더 늦기 전에 무엇인가 편법으로 얻어 보려고 하는 그 마음은 극히 인간적입니다. 그렇게 얻은 이스마엘, 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아 남기를 원합니다고 했습니다. 믿음을 인간적으로 합리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7:1에 보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왜 휘청거리느냐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당화해 주기를 바랐으나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직선적으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했습니다.
사라가 장막 뒤에서 이 소리를 듣고 웃었습니다. "이제 무슨 낙이 있겠느냐" 해서 웃은 것입니다. 18:12을 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 어찌 낙이 있으리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오 하느냐."
이 말씀을 자세해 들어보십시다. 사라가 기가 막혀서 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왜 웃었느냐." 이에 대해서 15절에 보면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고 부정하며 하는 말이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부정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 세 마디를 연결해 보세요. "왜 웃었느냐?" "아니오,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이 아름다운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우리의 안개됨과 우리의 불과 같은 인생 됨과 영화라고 해 봐야 풀의 꽃과 같은 인간임을 아십니다. 자기의 능력 안에 제한되어 가지고 헤어나지 못하고 무상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왜 모르시겠습니까? 사라가 이것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자식을 바라면서도 웃어야 하는 그 이유를 왜 모르시겠느냐 말입니다.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으니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만일 이 때에 하나님께서 "네게 왜 믿음이 없어서 믿지 못하고 비웃느냐" 이렇게 책망을 했다면 사라는 이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지 못하여 웃어 버리는 이 사라를 결코 책망하시지만 않았습니다. "웃었느니라. 그러나 약속은 이루어지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변덕스러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변덕스럽게 우리를 대한다면 몇 사람 살아 남을 것 같습니까? 자식들이 부모에게 변덕스럽게 대하는 것처럼 부모가 자식에게 대한다면 어느 자식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저 어리석고 미련하고 약해서 이렇게 믿음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웃어 버리는 이 불쌍한 사라를 하나님께서 또 한번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은 네 마음을 안다. 그리고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 투성이 입니다. 체질화된 불신과 무능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까지 관계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나약성이나 불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웃었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21:1에 보면 말씀대로 행하셨으니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 했습니다. 21:6에 보면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의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그 뜻이 "웃음" 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웃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쓴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거짓된 웃음을 성실한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웃기신 것이 아니라 웃게 하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이 얼마나 소중한 복음입니까. 이 복음만을 믿어야 했습니다. 이 마지막 통첩은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믿고 순종함으로 이제 귀한 약속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주실 때에 믿고 감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기왕에 그렇지 못해서 믿지 못하고 웃어 버렸지만 그러나 "네가 웃었느니라.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이 마지막 말을 사라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해서 귀한 아들을 얻었고 웃음이 이제 진실한 웃음으로 바뀌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갑니다. 희극과 비극은 원점에서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웃음의 뜻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쓴 웃음, 거짓된 웃음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실한 웃음, 그 마음을 충만케 하사 터져 나오는 그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웃음을 웃어갈 수 있을 때에 이 웃음으로 모든 악과 모든 거짓을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 : 옛날에 불신의 웃음을 했던 사라를 참된 기쁨으로 충만케 하시던 주님, 우리의 웃음에 다시 그 같은 충만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제 주께서 웃게 하시는 그 웃음을 웃게 하시고, 이 밝은 얼굴로 이 세상을 보며 이 거짓된 세상을 진실하게,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믿음의 장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큰 기쁨을 주신 주님, 우리에게 이 같은 놀라운 기쁨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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