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감사와 헌신(시편 9편 1~11절)

by 【고동엽】 2023. 2. 5.
목차

감사와 헌신(시편 911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감사절은 1623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천신만고 끝에 첫 추수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때에 그들은 좋은 여건 하에서 감사드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추수가 풍부하였던 것도 아니었고 아메리칸 인디안들의 습격의 위험을 계속 느끼는 불안한 처지에서도 그들은 본래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낯선 땅 미지의 땅으로 이주해 왔던 것임으로 그들이 본래 바랬던 그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과 소신껏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된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감사절을 제정한 것은 우리가 선교사들의 수고와 희생으로 인하여 복음을 받게된 것을 감사하여 이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뜻으로 추수 감사절을 지켜서 여기에 바쳐지는 헌금으로 해외선교를 하기로 작정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감사할 것입니까?

지난 일년 동안에 돈을 더 벌었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사업에 큰 성공이 있었습니까?

귀한 가정과 자녀를 얻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만이 특별히 받은 바 은사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년과 달리 금년에만은 특별히 감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로 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후 9 : 15)고 하였으며 또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살전 3 : 9)라고 말하였고, 그는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면서도 오히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노라"(1 : 3)고 감사에 넘치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 같은 감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바울은 근본적으로 그를 개인적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다메섹도상에서 불림을 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부르신 그리스도"께 늘 감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 당하는 그 사실을 언제나 감사 감격해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룩한 수고와 의로운 희생과 영광된 고생, 그 자체를 감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얻은 것, 시시한 것, 오히려 적은 것은 감사하면서 정말로 큰 것과 엄청난 것은 감사도 하지 아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현재에 매여 있어서 현재의 좋은 일이 있으면 모두 좋은 것 같이 느끼고 현재에 불리한 형편에 있으면 과거의 은혜나 미래의 큰 소망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생각합니다. 또한 자기 중심적인 사상에 매여 있어서 자기 자신만 위할 뿐 보다 넓은 세계나 다른 사람의 형편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육신적 정욕에 매여 있어서 모든 것을 물질적이요, 육신적인 형편에 준해서 생각하려 합니다.

물질적 여건이 넉넉하면 큰 축복을 받은 것같이 생각하고 육신적인 고통이 좀 있으면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같이 생각합니다. 사실은 정반대일 수도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엔가 이처럼 매어 있는 바가 있어서 받은 은혜를 알지도, 깨닫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감사하지 않는 것은 큰 죄라고 지적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다.

먼저 감사란, 곧 받는 마음입니다. 즉 믿음이란 말입니다. 단순하고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는 마음입니다. 여기는 어떤 비판이나 물론 거절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 드리는 마음이 곧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감사는 깨달음입니다. 행복이란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주신 바가 사랑임을 깨달으며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담아서 주신 바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감사하게 됩니다.

나의 부족하였던 과거도 알고, 현재에 주신 바 깊은 은혜도 깨닫고, 미래에 주실 큰 약속이 있는 소망을 알게 될 때 그 아는 마음이 곧 기쁨과 감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감사는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에는 실상 눈물이 따릅니다. 큰 기쁨에는 눈물이 따르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순간 자기의 고집이나 정욕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떠나 주신 분을 중심 하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그를 불러주실 때 너무나 감사해서 토색한 것의 사배나 갚겠으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자진하여 말하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에서 자기의 부족을 뉘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감사는 드리는 마음입니다.

감사는 구체적이며 또한 행동을 동반합니다. 이로써 무엇이라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없다면 감사는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기쁠 때는 무엇으로든지 이 사실을 표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있을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죄인인 자기를 주님께서 불러주심에 감사하여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의 감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옥합의 귀한 향유를 깨뜨리어 그리스도 예수께 부었다는 사실도 그의 감사한 마음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는 곧 헌신입니다.

마음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며 나아가서는 곧 몸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은인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듣는 말이 아닙니까? 결국 참된 감사는 고마운 그 분에게 내 몸을 바치는데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 무엇, 즉 부분이 아니라 전체, 즉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이 몸을 바치며 전체를 바치는 헌신 속에 큰 기쁨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사란 곧 헌신에서 기쁨을 찾아야 감사인 것입니다. 아쉬움이나 인색한 마음이나 추호의 슬픔이나 아픈 마음이 있다면 벌써 그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헌신 그 자체에서 기쁨을 얻고 보람도 찾고 행복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야말로 그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미치는 순간입니다. 감사에 미치는 순간!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사실입니까? 이러한 감사가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깊은 은혜, 가장 큰 축복, 가장 영원한 은사에 대하여 만족한 감사를 드리십시다. 생명을 감사하고 믿음을 감사하고 구원과 영생으로 인하여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또 양식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하게 하심을 감사하며 또 주실 것을 믿으며 감사하십시다.

축복은 받았다고 축복이 아닙니다. 감사해야 비로소 축복입니다. 감사는 동시에 놀라운 힘입니다.

감사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절망을 이길 것입니다.

 

감사와 헌신(시편 9111)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열방을 책하시고 악인을 멸하시며 저희 이름을 영영히 도말하셨나이다 원수가 끊어져 영영히 멸망하였사오니 주께서 무너뜨린 성읍들을 기억할 수 없나이다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또 압제를 당하는 자의 산성이시요 환난 때의 산성이시로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 너희는 시온에 거하신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행사를 백성 중에 선포할찌어다.

 

감사절은 1623년 미국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천신만고 끝에 첫 추수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때에 그들은 좋은 여건 하에서 감사드린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들의 추수가 풍부하였던 것도 아니었고 아메리칸 인디안들의 습격의 위험을 계속 느끼는 불안한 처지에서도 그들은 본래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낯선 땅 미지의 땅으로 이주해 왔던 것임으로 그들이 본래 바랬던 그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과 소신껏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된 것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감사절을 제정한 것은 우리가 선교사들의 수고와 희생으로 인하여 복음을 받게된 것을 감사하여 이에 감사하며 보답하는 뜻으로 추수 감사절을 지켜서 여기에 바쳐지는 헌금으로 해외선교를 하기로 작정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감사할 것입니까?

지난 일년 동안에 돈을 더 벌었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의 축복을 받았습니까?

사업에 큰 성공이 있었습니까?

귀한 가정과 자녀를 얻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만이 특별히 받은 바 은사라고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년과 달리 금년에만은 특별히 감사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로 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후 9 : 15)고 하였으며 또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살전 3 : 9)라고 말하였고, 그는 감옥에 갇혀서 고생하면서도 오히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노라"(1 : 3)고 감사에 넘치는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이 같은 감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바울은 근본적으로 그를 개인적으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다메섹도상에서 불림을 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부르신 그리스도"께 늘 감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고난 당하는 그 사실을 언제나 감사 감격해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거룩한 수고와 의로운 희생과 영광된 고생, 그 자체를 감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얻은 것, 시시한 것, 오히려 적은 것은 감사하면서 정말로 큰 것과 엄청난 것은 감사도 하지 아니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현재에 매여 있어서 현재의 좋은 일이 있으면 모두 좋은 것 같이 느끼고 현재에 불리한 형편에 있으면 과거의 은혜나 미래의 큰 소망 같은 것은 아랑곳없이 생각합니다. 또한 자기 중심적인 사상에 매여 있어서 자기 자신만 위할 뿐 보다 넓은 세계나 다른 사람의 형편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육신적 정욕에 매여 있어서 모든 것을 물질적이요, 육신적인 형편에 준해서 생각하려 합니다.

물질적 여건이 넉넉하면 큰 축복을 받은 것같이 생각하고 육신적인 고통이 좀 있으면 마치 저주라도 받은 것같이 생각합니다. 사실은 정반대일 수도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엇엔가 이처럼 매어 있는 바가 있어서 받은 은혜를 알지도, 깨닫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감사하지 않는 것은 큰 죄라고 지적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깊이 생각하여 보십시다.

먼저 감사란, 곧 받는 마음입니다. 즉 믿음이란 말입니다. 단순하고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는 마음입니다. 여기는 어떤 비판이나 물론 거절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 드리는 마음이 곧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감사는 깨달음입니다. 행복이란 소유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주신 바가 사랑임을 깨달으며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담아서 주신 바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감사하게 됩니다.

나의 부족하였던 과거도 알고, 현재에 주신 바 깊은 은혜도 깨닫고, 미래에 주실 큰 약속이 있는 소망을 알게 될 때 그 아는 마음이 곧 기쁨과 감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감사는 회개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에는 실상 눈물이 따릅니다. 큰 기쁨에는 눈물이 따르는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순간 자기의 고집이나 정욕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에서 떠나 주신 분을 중심 하게 됩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그를 불러주실 때 너무나 감사해서 토색한 것의 사배나 갚겠으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자진하여 말하였습니다. 감사한 마음에서 자기의 부족을 뉘우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감사는 드리는 마음입니다.

감사는 구체적이며 또한 행동을 동반합니다. 이로써 무엇이라도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이 없다면 감사는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참으로 기쁠 때는 무엇으로든지 이 사실을 표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 있을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죄인인 자기를 주님께서 불러주심에 감사하여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그의 감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옥합의 귀한 향유를 깨뜨리어 그리스도 예수께 부었다는 사실도 그의 감사한 마음의 구체적인 표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는 곧 헌신입니다.

마음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며 나아가서는 곧 몸을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은인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듣는 말이 아닙니까? 결국 참된 감사는 고마운 그 분에게 내 몸을 바치는데 있는 것입니다. 결코 그 무엇, 즉 부분이 아니라 전체, 즉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비가 있습니다.

이 몸을 바치며 전체를 바치는 헌신 속에 큰 기쁨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사란 곧 헌신에서 기쁨을 찾아야 감사인 것입니다. 아쉬움이나 인색한 마음이나 추호의 슬픔이나 아픈 마음이 있다면 벌써 그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헌신 그 자체에서 기쁨을 얻고 보람도 찾고 행복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어도 좋다"는 마음이야말로 그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미치는 순간입니다. 감사에 미치는 순간! 이것이 얼마나 행복한 사실입니까? 이러한 감사가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깊은 은혜, 가장 큰 축복, 가장 영원한 은사에 대하여 만족한 감사를 드리십시다. 생명을 감사하고 믿음을 감사하고 구원과 영생으로 인하여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또 양식을 주셔서 하나님의 일하게 하심을 감사하며 또 주실 것을 믿으며 감사하십시다.

축복은 받았다고 축복이 아닙니다. 감사해야 비로소 축복입니다. 감사는 동시에 놀라운 힘입니다.

감사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며 절망을 이길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