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신학자 밴틸(존 프레임)

by 【고동엽】 2018. 1. 8.

* 이 글은 John Frame의 Van Til the Theologian을 본 블로그지기 장양우가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서의 일부에 포함되어 출판될 수도 있으니,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혼돈을 위해 다른 사이트의 게재하더라도 번역자를 꼭 밝혀주세요.

 

신학자 밴틸

 

저자: 존 프레임(John M. Frame)

번역자: 장양우

 

 

차례

I. 체계론

II. 반체계론

III. 유비적 추론

1. 유비와 하나님

2. 유비와 계시

(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상관성

(나) 성경의 우위성

(다) 유비와 논리

맺는 말

 

 

1961년 코넬리우스 밴틸은 브레머(R. H. Bremmer)의 저서『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als Dogmaticus)1)를 서평했다. 나는 최근 밴틸의 모든 저서를 숙독하면서 우연히 이 서평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곤 '언젠가 『교의학자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 als Dogmaticus)이라고 불리는 책이 나와야하지 않을까'라고 자문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밴틸은 결국 교의학자가 아니라 변증학자다. 물론 그가 다년간 조직신학 과목을 강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이전에 그에 배웠던 학생들이 내 말에 수긍해준다면) 겉보기에 그럴 뿐 그 강의의 실제 내용은 변증학이었다. 밴틸은 신학적 쟁점을 논의하면서 주해(전통적인 의미에서)는 거의 거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가 제공한 주해는 흔히 다른 자료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의 교의학적 공식 역시 신조와, 칼뱅부터 그 이후의 위대한 개혁파 신학자들을 단순히 인용하거나 영어로 번역해서 말하곤 했다. 밴틸의 신학이 북미 사람들의 귀에 아주 생소하게 들리는 것도(일례로, 그는 윤리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의 구분을 강하게 강조했다), 십중팔구 화란의 전통에서 연원한 개념을 번역해서 말했기 때문이다(윤리적인 것과 형이상학인 것의 구분도 바빙크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앞에서 한 말을 듣고 나서, 밴틸의 신학이 흥미로울 것도 없고(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 자신의 사상의 깊이가 얕다는 것을 드러내줄 뿐이며 그 신학적 공헌이 가히 코페르니쿠스적인 인물에서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밴틸이 북미 세계에 화란 신학자들의 최상의 통찰력 중 일부를 소개해준 선에서 그친다고 해도 그 작업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의 변증학의 독특한 위상을 생각해보고 더 나아가 신학에 미치는 그 변증학적 함의를 고찰해보고 난 후에는, 밴틸의 전반적인인 접근법을 다른 이에게 설명해주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게 될 것이다.

밴틸의 변증학은 몇 가지 잘 알려진 개혁파 교리들에 대한 일단(一團)의 독창적 적용으로 묘사해도 좋을 것이다. 밴틸의 관점에서 보면 변증학과 신학(특히 조직신학)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 변증과 긍정적 진술(positive statement)은 같이 간다.”2) 오류에 대한 변증 없이는 어떤 정당한 긍정적 진술도 있을 수 없고, 그 역(逆)도 참이다. 사실 “조직신학은 다른 어떤 신학 분과보다도 변증학과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식신학 안에 우리가 변증해야 할 진리 체계가 있다.”3) 그래서 밴틸은 자신의 변증학에 대한 설명을 개혁파 조직신학의 큰 줄기를 훑어보는 작업과 함께 시작한다.4) 밴틸의 기본적 관심사 중 하나는 성경과 개혁파 교리에 일치하는 변증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애초부터 명확하다. 다른 변증학적 방법들에 대한 그의 주요 불만은 신학적 불만, 곧 그것들이 하나님의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과 전적 타락, 자연계시의 명료성,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통제 등등을 타협해서 전달한다는 것이다.

그는 비기독교인에게 호소하면서 개혁파 교리를 사용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것은 비신자가 어떤 류의 하나님이 옹호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5). 그래서 고든 루이스(Gordon R. Lewis)6)와 존 몽고메리(John W. Montgomery)7)는, 밴틸이 변증학을 조직신학과 혼동한다고 비난했다. 그 비판은 옳지 못한 것인데, 왜냐하면 밴틸이 증명이나 논증 없이 비기독교인에게 교리를 선포하는 것일 뿐이라고 암시하기 때문이다. “변증과 긍정적 진술이 같이 간다”고 할지라도, 밴틸은 그 두 가지를 분명 구별할 수 있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보완해주는 데 의식적인 관심을 두었다.8) 그러나 루이스와 몽고메리의 비판에는 밴틸의 사유 구조에 대한 참된 통찰력도 있는데,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밴틸의 입장으로서는 변증학과 조직신학을 구별하는 것이 사실 어렵기 때문이다. 밴틸이 ‘적극적 진술’을 ‘변증’으로부터 분명히 구별하고 일반적으로 그가 전자를 신학과, 후자를 변증학과 나란히 놓는다고 하더라도, 양자는 서로 불가분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학은 변증적 논박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변증학은 신학을 설명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양자의 실제적 차이는 대상이라기보다는 강조점의 차이다.

두 학문 분과를 이렇게 실제적으로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밴틸의 변증학은 개혁파 교리의 요청에 아주 긍정적으로 반응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꾸로 말해도 옳다. 즉 전통적 교리는, 밴틸이 변증적으로 사용할 때 아주 새로운 모습을 띤다. 그의 교리적 공식이 독창적이지 않더라도, 그 공식을 그가 사용하면(그것을 응용하면) 상당히 괄목할만한 모습으로 변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종교적 및 형이상학적 원리뿐만 아니라 인신론적 원리가 된다.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일자와 다자(the one and the many)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된다. 일반은총은 기독교 역사철학의 열쇠가 된다.9) 친숙한 교리가 이 같이 새롭게 응용되면 교리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확장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것은 우리가 그로 인해 그 교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인식의 자리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이해가 상당히 급진적일 때―교리 자체에 대한 새로운 공식 또는 적어도 보완적 공식을 요구할 정도로 급진적일 때―도 있다. 밴틸은, 다음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그와 같은 개정된 공식을 거의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다음에 알게 되겠지만, 그가 어떤 중요한 점에서 그렇게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밴틸에게는 앞으로의 정통 개혁파 교의학자들이 전통적인 언어를 여러모로 재고하도록, 그래서 밴틸 자신을 뛰어넘도록 요청할 만한 함의가 많이 담겨있다. 이것은 전통적 용어가 잘못되었기(일반적으로 말해서)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밴틸을 읽음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지를 고통스럽게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밴틸의 신학은―겉보기에는 고답적이고 전통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그의 변증학과 마찬가지로 그 나름의 중요성이 있다. 그가 변증학에 새로운 인식론적 자의식을 부여하였다면, 신학과 기타 기독교 사상 유형에서 그랬을 것이다. 만일 밴틸이 칸트가 비기독교 사상 분야에서 일구어 낸 것과 비견되는 업적을 기독교 사상사에 남겨서 이 분야에 그 독특한 원리의 독창성과 포괄성에 대한 혁명적인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면, 칸트처럼 그가 공헌한 '코페르니쿠스적' 급진주의(radicalism)가 인간의 사상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본 논고에서는 신학에 대한 밴틸의 공헌을, ‘명맥한’ 그리고 ‘시사적인’ 공헌 둘 다를 제시하려고 한다. 앞에서도 암시한바 그의 공헌의 중요성이 언제나 명확히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입장의 논리적 맥락은 그의 명백한 가르침을 넘어서도록, 그 자신이 말한 것 이상을 말하도록 요구할 때도 있다. 필자는 그런 경우가 드러나는 몇 부분을 제시함과 아울러 밴틸의 공식들에 대한 명확한 설명과 교정책을 제시하려고 한다(그 자신의 사상의 천재성 때문에 이와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10).

어디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할까? 이와 같은 성격의 논문에서, 한 사상가의 기본적 관심사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아니면 독특한 가르침에 천착할 것인지를 놓고 갈등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 두 가지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밴틸의 관심은 성경적 복음, 곧 하나님의 주권과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속사역의 실재 등등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사들은 다른 많은 이들―아우구스티누스, 칼뱅, 카이퍼(Kuyper), 워필드(Warfield)―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밴틸을 예컨대 ‘하나님의 주권의 신학자'로 묘사한다면, 그를 어떻게 칼뱅과 구분할 것인가? 밴틸이 칼뱅보다 하나님의 주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는가? 확실치 않다. 밴틸은 칼뱅보다 하나님의 주권을 더 공정하게 다루었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그것을 다루는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순전히 그의 관심사가 무엇인가에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 관심사는 밴틸을 읽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분명해지는 것이며 어쨌든 전체 기독교회의 일반적인 유산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밴틸이 이 관심사를 특정한 논쟁 영역에서 독특하게 해결해나간 방법을 알고 싶다. 밴틸에게 특징적인 것은 과연 무엇인가? 예컨대 그는 칼뱅이 하지 않았던 것 중에서 무엇을 했는가? 그러므로 이 논문은 밴틸의 ‘기본적 관심사'가 아니라 ‘특징적인 가르침'에 역점을 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특정한 분야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식으로든 밴틸의 체계 형태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점을 독자들은 유념해야 할 것이다. 밴틸의 사상은 추상적 개념들―통일성과 다양성, 역설과 논리, 유비(analogy), 의미론 등등―에 집중되었다는 말도 이런 취급 방법에서 비롯된 듯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그릇된 인상에 기초한 것이다. 그와 같은 ‘추상적' 관심사는 밴틸적 ‘특성들'의 목록에서 상당히 위쪽에 위치하겠지만 ‘기본적 관삼사들'의 목록에서는 상당히 아래쪽에 위치한다. 밴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증거에 충실하기 위해서만 그러한 철학적 문제들을 탐구했다. 그는 그런 추상적 개념들에 ‘집중하기'는커녕 마지못해 다루었고, 단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복음이 함의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때만 다루었다.

앞의 주의 사항에서 암시한 것처럼, 필자는 밴틸의 주요한 독특성을 신학 서론이나 ‘메타-신학'(meta-theology)―신학의 신학 또는 신학 방법과 구조의 연구―의 영역에서 찾고 있다. 이 영역은 ‘신학의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로 불리는 경우도 가끔 있는데, 이 용어는 신학이 진행되기 ‘이전에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을 지칭한다. 간혹 ‘프로레고메나'가 신학적 체계에 속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와 다른 이들은 성경론을 그들의 주된 교의학적 작업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 교리를 부록이나 서론으로 격하시키는데, 그 이유는 성경론이 신학이 아니라 ‘프로레고메나'에 속한다고 그들은 명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처리 방법을 옹호하여 뭐라 말하든 간에, ‘밴틸 학파의(Van Tillian) 신학자'라면 ‘프로레고메나'가 일종의 자율적 이성의 활동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자의 지성적 복종에 선행하는 것이라는 어떤 함의에 대해서도 강하게 방어하려고 한다. ‘프로레고메나'는 여느 신학 영역처럼 성경에 종속해야만 한다. 프로레고메나가 신학적 사유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특히 그렇다. ‘서론'이든 그 외 다른 것이든, 우리의 모든 사고는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순종해야 한다(고후 10:5). 따라서 필자는 어떤 의미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의미에서 ‘프로레고메나'는 마땅히 신학 분야에 포함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프로레고메나 혹은 신학 서론은11) 신학보다는 철학과 좀 더 관련된 많은 문제, 예컨대 인식론과 논리, 유비 등등의 문제들을 다룬다. 이 분야에서 밴틸의 사유의 특징은 신학적 유기체 안에서 다양성에 대한 통일성의 관계에 관해 총체적으로 반성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밴틸은 이 문제를 독특한 신학 방법으로 연구한 최초의 정통 기독교 사상가다. 이것은, 필자가 신학에 대한 밴틸의 가장 특징적인 공헌이라고 자주 입에 올리는 것이다. 그와 철학적 경력이 같은 사람만이 그런 문제를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의 깊은 성경적 헌신을 공유한 사람만이 그의 독특한 접근법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필자는 밴틸의 기독교 ‘진리 체계'의 개념을 논의하려고 한다. 이것을 분석하면서 여러 가지 기독교 교리 중에서 발견되는 여러 종류의 ‘통일성'과 ‘다양성'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특히 여러 교리들이 어떤 식으로 ‘상호 의존적'인지―어떤 방식으로 그것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지―를, 그리고 다른 한편 어떤 의미에서 이 교리들이 ‘역설적으로' 관계를 맺는지 물을 것이다. 논의 과정에서 이러한 방법론적인 질문에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와 더불어 밴틸의 특수한 교리적 가르침들 중 여러 가지를, 어떤 것은 지나가면서, 어떤 것은 자세하게 탐구할 것이다.

기독교 진리의 ‘체계'가 있는가? 그것이 신학, 특히 조직신학에 대한 중요한 ‘입론적'(立論的) 성찰임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논쟁을 야기하는 문제가 되어왔다. 키에르케고르와 어스(Earth)는 바로 그 교리적 ‘체계'를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나님의 계시를 지배하고 조작하는 인간적 시도라고 정죄했다. 반면, 카넬(E. J. Carnell)은 종교적 진리의 최종적 시금석으로서 ‘체계적 일관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것을 제시한다.12) 밴틸은 뭐라고 말할까? 으레 그의 대답은 그것을 분석을 진행하기 위한 요청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체계'라는 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어떤 의미에서 체계가 있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렇게 밴틸은 ‘체계'의 개념을 모호하긴 하지만 인정하는 듯 보일 때도 있고, 그 개념을 비판하는 듯한 경우도 있다.

 

 

I. 체계 찬성론

 

밴틸의 ‘체계'에 대한 인정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남김없이 이해 가능한' 분이라는 고찰과 함께 시작한다.13) 하나님의 자기 지식은 어떤 식으로든 결함이 없으며 완벽하게 정돈되어(in perfect order)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어떤 의미에 하나님의 지식은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 안에는 완전한 지식 체계가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14) 이 지식은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에 대한 지식도 포함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통제하시므로, “창조된 모든 실재는 이런 계획을 실제로 드러내준다.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본래 합리적이다.”(주 13 참고)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과 세계의 ‘체계적인’ 지식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까닭은 그 자신의 계획이 철저하고 세계가 완전히 그 계획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진리의 절대적인 신적 체계 때문에, 참된 지식을 인간이 가질 수 있다(available). 하나님은 그의 합리적인 계획에 따라 서로 작용할 수 있도록 그것들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우주에 대한 지식이 참되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아는데, 그 까닭은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주 둘 다를 만드신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주 14 참고) 하나님의 합리성은 인간의 지식을 확고하게 해준다. “적어도 어떤 참된 지식이 있으려면, 하나님 안에 절대적 지식의 체계가 있어야만 한다.”(주 14 참고) 이 인간 지식은 ‘남김 없는’ 혹은 ‘전포괄적인' 것은 아닌 바, 하나님만이 그런 식의 지식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지식은 과연 참되거나 참될 수 있다.15) 더군다나, ‘하나님의 존재와 기독교 유신론적 진리'에 관해 ‘절대적으로 확실한 증거'가 있다.16)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뿐만 아니라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명확히(clearly) 계시되어서, 그의 존재와 그의 말씀의 진리는 단지 ‘가능'하거나 ‘개연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다17). 그러므로 강력한 ‘유신론적 증거'가 있는 것이다18).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두 가지 서로 관련된 의미에서 ‘체계적'이다. 우선, 그것은 내적으로 정합적(internally coherent)이라는 의미에서 '체계적'이다.

 

그러나 나는 물론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진리의 체계로서 말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인정한다. 하나님은 성경을 그의 말씀과 동일시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내적으로 자기 정합적 존재로서 존재하신다. 인간을 향한 그의 스스로에 대한 계시는 내적으로 정합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은 그의 계획에 따라 발생하는 사건은 무엇이나 통제하신다고 가르치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발생하는 사건은 무엇이건 통제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의 말씀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19).

 

하나님의 계시에는 ‘사실상의 모순'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궁극적 의지가 죄인의 구원을 바라시면서 동시에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일 수 없다20).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계시된 뜻 간에 모순’은 전혀 있을 수 없다21). 다음의 말을 유의해보자.

 

하나님은 자기 동일성의(self-idenfied) 존재로서 그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만을 계시하실 수 있다. 인간적 논리에서의 동일률(law of identity)은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권위 있는 계시에 근거한다고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의 궁극적인 결정에 따라 결정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능하면서도 전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동일률의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합리주의다. 그 결과 비기독교적인 주관적 개체화(individuation)의 원리, 즉 우연을 정당화한다22).

 

조금은 다른 의미에서 계시를 ‘체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이 같은 내적 정합성에 관계된다. 즉 성경의 교리들은 의존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들의 ‘근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어떤 교리는 전체계의 ’근본'이다.

 

당연히, 신학의 체계와 변증학에서 신론은 근본적 중요성을 가진다. 변증학에서 그것은 항상 첫 출발점(the first point of attack) 아니면 종착점이어야 한다. 신학에서 일차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존재와 본성을 다룬다23).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자존적 선재와 인간에 대한 그분 스스로의 무오류적 계시를 전제하는 것이 모든 정통에 근본적이다24).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속성들 중에서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자존성(independence or self-existence)을 언급하는 것이다…25).

 

또 다른 ‘중심적' 교리는 아담의 역사적 타락이다. 그 타락을 역사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에만 건전한 신학이 유지될 수 있다26). ‘시간적 창조'는 ‘기독교의 존폐가 달린' 또 하나의 교리다27). 더 나아가, 워필드가 말한 것처럼 예정은 ‘종교개혁의 중심적 교리'다28). 그리고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심장'이다29). 특히나 밴틸이 다른 교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으로 제시하는 교리들이 더 있다.

 

… 다음과 같은 기독교 유신론적 개념, 곧 하나님의 절대성과 그리스도의 절대성, 성경의 절대성은 나란히 간다. 우리가 그중 어떤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다른 어떤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30).

 

자충족적인 하나님은, 스스로를 증거하는 계시를 함의한다31). 유비적 지식의 교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다32). 인간이 지식이 ‘유비적'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지식이 참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참되다33). 인간의 존재와 행위는 참으로 그 스스로의 것인데, “그 까닭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더욱 더 궁극적인 존재와 행위이기 때문이다”(또다시 ‘불구하고'가 아니다)34). 하나님의 인격성(과 그에 따른 인간의 환경의 궁극적인 인격적 특성)은 결정론자와 결정론적 개념을 피하는 열쇠가 된다35)(얼핏 보기에는 다소 놀라운 착상이지만 밴틸에 의해 설득력 있게 설명되었다). 우선, 하나님의 자충족적 거룩함을 부인하면 시간적 창조와 역사적 타락의 부인이 그 뒤를 잇는다36). 그 다음, “하나님은 그 본성의 필연성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에 자유로우시다”(주36 참고). 그러므로 “창조론을 부인하면 기독교적 신 개념도 부인하게 된다.37)”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된 인간의 창조는 ‘계시의 전제'임과 동시에 ‘절대적으로 자기 의식적인 하나님의 개념에서 나오는 귀결'이다38).

성경적 교리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밴틸의 강조는 그의 다음과 같은 추론의 실례를 통해 알 수 있다. 창조된 만물과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적 관여와 그가 모두 예정한 세상의 향방(개혁신학의 큰 특징인)은 독특하게 개혁파적인 성경관을 요청한다39).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 혹은 하나님의 통치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이다40). 칼뱅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간의 차이는 변증의 방법에서의 차이도 요청한다41). 기독교 윤리학은 이중(double) 예정을 전제한다42).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역사에서의 계시의 직접성을 부인하는 것이다43). 현대주의와 바르트주의44), 아르미우스주의는 그 구별된 가르침 때문에 성경적인 은혜론을 정당하게 다룰 수 없다45). 우주의 이차적 원인들이 참된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그것들이 하나님의 궁극적 원인(Cause)이나 계획에 따라 작동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사실 때문이다.46)” 이상을 요약 내지 일반화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참으로 개신교적 추론 방법은 기독교 유신론의 모든 측면이나 일부의 의미가 통일체로서의 기독교 유신론에 의존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를 함의한다. … 기독교 유신론의 전체적인 요구는 어떤 사실에 대한 어떤 논쟁에서도 중요하다47).

그 출발점과 방법, 결론은 항상 상호 수반하는 관계에 있다48).

 

북미 신학자 중 어떤 이도 독자들에게 이 같은 의미의 기독교 진리의 통일성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한 교리는 확언하는 것은 또 다른 교리를 확언하며 그 전체를 확언하는 것이라는 점을, 한 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다른 교리를 부인하며 그 전체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점을 수차례 반복해서 배운다. 모든 교리는 상호 의존적이다. 즉 부분은 전체에 의존하며 전체는 부분에 의존한다. 이런 강조점을 통해 밴틸은 개혁파 신학을 생각해볼 것이 많은 것으로 보여준다. 앞에서 나열한 관계들 중 어느 하나도 신학 논문의 주제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자충족적 본성이 그의 계시가 자기 증거적임을 함의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신학자라면 으레 이 점을 논의하는 데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다. 정작 밴틸 자신은 이 관계들 중 어떤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길게 논의한 적이 거의 없다. 그에게 그 관계들은 사실상 자명한(self-evident)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들에 관한 더 온전한 탐구는 교회를 굳건하게 세워준다(edification). 예를 들어서, 대체 어떻게 창조의 부인이 하나님의 부인을 함의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창조의 중요성을 새롭게 보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더욱이 밴틸의 사상에서 매우 자주 등장하는 “‘…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때문에'” 공식은 성경적 가르침에서 명백한 모순을 대하고 있다고 느끼는 신학자들 앞에 중대한 도전을 가한다. 우리 역시 성경적 교리들의 일관성을 단지 지적하는 데만 만족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성경 자체가 그 이상의 일을 하도록 요구할 때)?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의 작정에 의존하며 후자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인간의 책임이 하나님의 작성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해 오지 않았는가? 후자의 작업을 하려면 어떤 힘든 사고 과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밴틸이 암시한 곳(the ecliptical)을, 즉 그 자신의 저작에서의 상당히 축약된 논의를 넘어서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보람은 클 것이다.

밴틸의 접근법이 여기에서도 또 다른 흥미로운 결과를 낳는다. 오늘날 기독교 계시에 대한 ‘중심점'에 신학적으로 관심이 많다. 많은 신학자들은 우리에게 기독교 신앙에서 이런저런 ‘중심'을 받아들이도록 시도하는 예가 늘고 있다. 예를 들어 말씀(Word), ‘위기', 인격적 만남, 하나님의 행동, 역사, 희망, 자기이해, 축제(celebration), 언약적 율법(covenant law), 송영 등등의 신학이 그것이다. 그러나 밴틸의 강조점은 우리로 하여금 단 하나의 중심이 아니라 진리의 여러 가지 ‘중심적’ 교리들이 있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더 나아가 성경의 어떤 가르침을 중요하지 않거나 그릇된 것으로 격하시키려는 어떤 책략도 거부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에서 ‘중심적' 교리들은 다른 성경적 가르침들을 무효화함으로써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교리들은 그 이외의 교리들을 뒷받침하고 지지하고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밴틸 스스로는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신학에 대한 정통 기독교적인 ’원근법적' 접근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곧 각각의 주요 교리는 기독교 전체를 볼 수 있는 관점에서 ‘조망'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일례로 그리스도의 속죄(atonement)는 하나님의 특정한 속성들, 특정한 죄론, 일정한 구속사의 개념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구속 적(redemptive application)의 역사를 낳는다. 다른 예를 들자면, 제 칠 계명은 모든 죄에 대한 ‘조망'을 마련해준다. 우상숭배는 성경에서 간음죄의 한 형태이며 간음죄는 죄 일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죄는 간음과 비슷하다. 그리도 모든 죄는 도적질(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에 대한 도적질)이다. 그리고 모든 죄는 위증(하나님의 진리를 거짓말로 바꾸는)이다. 십계명은 각기 모든 죄에 적용되며, 따라서 모든 의로움을 정의하는 특징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주된 교리는 각기49) 기독교 진리의 전체에 대한 특정한 ‘조망'을 마련해준다. 그 모든 것이 각각 ‘중심적'일 수 있다. 적재적소에 다양한 중심을 사용하면 우리의 성경 이해가 풍부해질 수 있다.

 

II. 반체계론

 

이제까지, 필자는 기독교 교리들 간의 정확한 논리적 관계에 대해 일부러 모호하게 말해왔다. 밴틸의 언어는 현대 논리학자들이 사용할법한 정밀한 언어가 아니다. 한 교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른 교리를 ‘요청'(require)하거나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necessitate) 수 있다. 한 교리가 다른 교리 ‘때문에' 참되다고 말하는 것은 다소 모호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조차 ‘때문에'를 네 가지 의미로 인식했다. 그리고 밴틸이 ‘논리적 귀결'(corollary)과 ‘(필연적으로) 의미할 수밖에 없다'(entail)와 같은 더 전문적인 논리적 용어를 상용할 때도, 그가 그 용어들을 전문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다.

앞에서 말했던 것을 생각하며 밴틸은 기독교를 각 교리가 그 자체로 보면 논리적으로 다른 모든 교리들을 함의하는 연연적 체계로 간주한다고 결론 내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개념을 명백하게 부인한다. 기독교 교리 전체가 논리적으로 연역될 수 있는 ‘상위 개념'(master concept)은 전혀 없다50). 그러나,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자충족적 성품이 기독교에 ‘중심적'인가? 어떤 의미에서 이 교리는 성경과 그리스도 등등의 특정한 교리를 ‘요청'하는가?

기독교 교리의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밴틸의 태도는 훨씬 더 당혹스럽다. 밴틸이 기독교 체계의 ‘내적 정합성'을 확언하고 그 체계에 모순을 끌어들이는 입장을 공격한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이 정합성이 논리적 정합성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형식 논리의 법칙이, 하나님의 계시(일반 계시이건 특별 계시이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에 선행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지 않았는가?51)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히는 이해될 수 없으므로, 우리의 모든 지식에 모순으로 보이는 것으로 논의를 옮겨보려고 한다. 우리의 지식은 유비적(analogical)이며, 따라서 역설적일 수밖에 없다52).

… 우리는 실제적 모순성의 개념은 해악으로 여겨 회피하면서도, 외관상 모순적인 개념은 쌍수로 환영한다53).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외관상 모순이다54).

 

어떤 특수한 실례를 살펴보자. 삼위일체론에 관해, 밴틸은 셋이자 하나라는 역설이 ‘인격으로는 셋이지만 본질상 하나'라는 공식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다. 그보다는 “우리는 하나님, 즉 완전한 신성(Godhead)은 한 분(one person)이라고 단언한다.”55) 그러므로 밴틸의 교리는 ‘한 분이자 세 분'(One person, three persons)―외관상 모순―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과감한 신학적 변화다.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교리의 역설성을 그렇게 과감하게 표현하기를 가장 꺼려한다. 왜 밴틸은 굳이 사태를 그렇게 어렵게 만들려고 하는가? 문맥상, 그는 ‘순수 사실이라는 망령을 피하기' 위해 이 공식을 선택했다고 말한다(밴틸의 언어 습관에서, 순수 사실은 해석되지 않은 존재다). 여기에서 논점이 다소 생략되고 있지만, 모종의 숨겨진 전제를 재현한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을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하나님이 단일한 인격이라는 것을 부인한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연합은 비인격적 연합이 되고 만다. 그 경우 세 분에게 있는 다양성은 인격적 계획과 해석의 기능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 다양성은 ‘단지 우연히'(just happen)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관점은 사실상 비인격적 ‘우연'이나 비인격적 ‘숙명'을 신성의 위격들에게 부가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든 삼위가 한 인격이라고 참되게 말할 수 있도록, 삼위가 그 같은 친밀한 상호 의존성 안에서 기능해야 한다56). 이 견해가 아무리 대담하다고 해도 성경에 암시된 형이상학적 가르침에 일치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는 단순한 언어에 일치한다. 결국 성경은 하나님을 한 인격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성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구별하지만, 그러한 구별을 언급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한 인격으로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전통적 공식이 제시한바 하나님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하나이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셋이다. 신성 안에서의 ‘실제적 모순', 혼돈의 가능성을 방어하기 위해 그와 같은 언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하나라는 ‘관점'에 대립하는 것으로서(over against) 하나님이 셋이라는 ‘관점'을 명확히 상술하지는 않는다. 바꿔 말해서, 성경이 여기에서 우리를 ‘외관상의 모순'에 남겨둔다. 하나님은 하나이고 하나님은 셋이다. 그리고 밴틸의 견해는 이 문제에 관해 성경을 넘지 말라는 소중한 경고를 해주고 있다.

밴틸은 삼위일체의 문제를 다룰 때와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속성 간의 관계를 다룬다. “… 하나님 안에서의 통일성과 다양성은 서로에게 동등하게 기본적이며 상호 의존하는 것이다57).” 하나님은 하나이며 하나님은 여럿이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인 것 같다. 우리가 어떤 측면에서 정확히 하나님이 하나이면서 여럿인가 를 상술할 수 있다면 외관상의 모순은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성경을 넘어 ’순수 사실이라는 망령'을 다시 불러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 비인격주의가 다시 위협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의 자유와 그 필연성 또한 밴틸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관계된다. 하나님의 의지가 그의 지성에 의해 결정된다면, 그의 자유로운 행위(예컨대, 세상의 창조)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곧 하나님은 창조하셔야만 했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와는 반면,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들이 참으로 자유롭다면, 그의 행위들이 그의 지성과 자의성(random)과는 무관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곧 하나님은 단지 우연히 창조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중 어떤 대안도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행위에서 지성과 자유를 확신도록 요구한다. 밴틸은 두 종류의 필연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본성의 필연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자유로운 행위가 그것(필연성)에 의해 발생하는 필연성이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의 유한한 지성이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다"고 그는 부언한다58). 유한한 사고로서는 확정적이고 최종적인 해결을 볼 수 없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우리가 혹시라도 두 ‘필연성'의 정확한 차이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면 외관상의 모순은 해결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차이를 계시해주시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다.

‘외관상의 모순' 개념에 대한 밴틸의 패러다임의 경우는, 그가 칭한바 ‘가득 찬 양동이 문제’다59)(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그 자체로 영광이시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도 하며 그렇게 축원도 한다. 후자의 경우는 이미 가득 차있는 양동이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밴틸은 다음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문제를 ‘외관상의 모순’의 이론으로 설명한다―역주). 하나님은 자충족적이시다. 그는 자신 이외에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그는 지식과 사랑, 능력, 영광에서 지금의 그의 존재(He is)보다 위대하게 되실 수 없는 바, 이는 지금의 그 존재보다 더 위대한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즉 더 영광 받으시기 위해, 의미 있는 지식에 들어가기 위해(to enter into significant knowledge)―다른 방법으로는 관여할 수 없었을 사랑(과 능력)의 관계에 들어가시기 위해― 창조하셨다. 다른 말로 해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능력, 영광은 추가적인 것을 배제하지만(preclude addition), 다른 한편으로는 추가적인 것을 요구한다(demand). “역사의 과정은 하나님에게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고 중요하다. 그 전체 과정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 완전히 알려져 있을지라도 말이다60).” 제 2의 원인은 의미 있고 중요하다(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에게! 하나님은 의미를 결정하는 존재다). 하나님이라는 일차적 작인(causality)이, 발생하는 모든 것을 통제하시지만 말이다61). 그리고 세계 역사가 하나님에게 어떤 종류의 의미가 있는지 우리가 더 정확하게 결정한다면, ‘모순'은 사라질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제 2의 원인은 ‘중요한'(significant) 것이며, 다른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차이가 해결될 만한 정보를 우리에게 주기지 않기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에 악도 ‘포함'되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하나님은 악을 발생하게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악 때문에 비난받으실 수 없다. 하나님은 죄의 발생을 작정하셨지만 발생하도록 강압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유기자(遺棄者)들의 멸망을 정하셨지만, 그렇다는 사실이 그들의 책임을 면해주지 않는다62). 여기에 다시 외관상의 모순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전 경우에서와 같이 밴틸이 또한 비모순적인 공식을 인정하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개혁파 신조와 모든 개혁주의자들은 동일한 방식(eodem modo) 개념을 항상 거부했다.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author)로 만드는 것, 곧 구원 받은 자들의 복된 상태처럼 하나님은 죄인의 죽음도 똑같이 매우 기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참된 신자에게나 혐오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작정에서는 유기의 방식이 선택과 동일한 방식으로(in the same manner)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획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설립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선택과 유기를 결국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63).

 

하나님은 선을 작정하신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멸망을 작정하지 않으셨다(어떤 다른 악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 어떤 식으로든 ‘작정하다'(ordain)라는 단어는 앞의 두 경우에서처럼 동일한 종류의 하나님의 행위를 명시하지는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계획이 그 내용상 동일한 측면에서(in the same respect) 악을 ‘포함'하고 ‘제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신적 계시는 어떤 측면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악을 포함하고 어떤 측면에서 제외하는지를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역설이 남아있다. 믿음으로 하나님에게는 어떤 역설도 없다고 우리는 확신하지만 말이다. 믿음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의 지식의 구원에 토대가 된다.

다른 교리 영역에서도, 밴틸은 자신의 입장을 아주 역설적인 방식으로 공식화한다. 하나님의 형상에서 ‘넓은' 의미(인간의 인격성, 도덕적 행위자)와 ‘좁은' 의미(하나님의 지식, 의, 거룩함)의 전통적인 구별을 밴틸은 단지 ‘비교적 만족스럽게' 받아들였다64). 이 구별이 견지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인격성에 어떤 윤리적 성격도 없다는 것―역사상 종교개혁으로 인해 거부되었던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함의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논박한다65). ‘좁은' 의미의 형상은 타락 때 완전히 상실된 반면 ‘넓은' 의미의 형상은 완전히는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그는 묻는다. 밴틸이 대안을 어떤 식으로든 정확하게 내놓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말할 의향이 있었던 것 같다. 곧 형상은 상실되었지만(어떤 의미에서), 아직도 남아있다(어떤 의미에서). 엄밀한 의미가 구체화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역설의 공식 뒤에 숨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공식을 ‘역설적'이라고 부른다면 그 의미는 원리상으로는 구체화할 수 있고 하나님이 분명 그것을 구체화할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 외 밴틸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 점을 주목해 보아야한다. (1) 밴틸은 인간을 그 대표자인 아담 안에 존재하면서도 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66). (2) 일반은총과는 달리 죄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파괴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67). (3) 비중생자가 선을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68). (4) 인간 행위의 중요성은 모든 것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보증되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문제가 되기도(logically problematic) 한다69). (5) 칼케돈 신조는 외관상 모순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공식화한다70)71). 그 외 밴틸이 다음과 같이 생각한 점을 주목해 보아야한다. 이와 같은 모든 문제에 대해, 밴틸은 완전히 만족스러운 비역설적 공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하나하나를 보면(앞의 여러 문단에서 더 충분히 논의된 것처럼), ‘외관상의 모순'이 어떤 결정적인 용어의 정확한 의미에 대한 우리의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역설이 진리를 더 완전하게 또는 남김없이 아는 이에게는 해결된다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사고에서 풀릴 수 있고, 따라서 ‘실제적으로' 모순적인 것은 아니라고 가정해야만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접근 가능한 계시(밴틸의 생각으로는, 충분하지만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는 더 축적될 수 없는)를 가지고, 교리를 ‘외관상 모순적인' 방식으로 공식화할 필요성은 분명 ‘교리의 체계', 특히 밴틸 자신이 옹호한 체계(여기에서 모든 교리들은 서로 밀접하게 의존하며, 한 교리가 다른 교리를 ‘요청'한다고 자주 말한다)를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우리의 역설적인 공식화가 심지어 두 교리가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지 못할 때, 한 교리가 다른 교리를 ‘요청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외관상의 모순에 대한 그의 강조는 기독교를 비합리적 또는 비논리적으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매우 어려운 문제다. 조직신학자에게 불가능한 임무는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결국 이 강조점은 사실상 체계론과 대립하는 반체계론으로 귀결되는가?

 

III.유비적 체계

 

밴틸은 자신의 유비적 추론의 이론(doctrine)을 매개로 해서 체계론적 진술을 ‘외관상의 모순'과 조화시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하려고 한다면, 한 종류의 ‘체계' 만이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유비적 체계'(analogical system)다72). 밴틸은 ‘유비적 체계'와 ‘유비적 추론’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

이 어구를 처음 듣는 이는, 밴틸이 여기에서 기독교적 언어에 관한 이론―그러한 언어는 문자적인 것과 반대되는 ‘유비적', 은유적이라는 것―을 홍호하고 있다고 추측할 지도 모르겠다. ‘유비적'이라는 용어는 신학과 철학 문헌에서 이런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이 의미는 특히 ‘일의적'(univocal)이라는 말과 반대되는데, 밴틸도 이런 의미로 사용한 적도 있다. 그러나 밴틸의 유비 개념이 특수한 종교적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추론(인간의 삶까지 포함해서!) 일반에 관한 교리다. 그는 종교적 언어 문제를 거의(그런 경우가 있다고 쳐도) 논의한 적이 없으며. 그리고 ‘유비' 개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맥에서 그 문제에 대해서는 결코 논의하지 않는다. 그의 저서에서 유비적 추론이 어떤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c) 표현들을 정당화한다고 말하는 두 문단이 있다73). 그러나 유비에 관한 밴틸의 통상적인 설명을 고려해 보면(아래를 보라), 그 두 문단에서 ‘신인동형론적'이라는 용어는 넓은 의미에서 ‘인간적인 관점에서'를 의미하는(그 보다 좁은 의미는 아니다) 것으로서 하나님을 인간에 비유하가 위해 사용하고 있다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따라서 계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인간적 관점에서' 나타내므로 하나님을 비유적 언어로 나타낸다고 밴틸이 주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그가 결코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언어가 비유적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으며, 그의 사상에서 그런 결론을 내리도록 할 만한 전혀 것이 없다.

유비에 대한 밴틸의 관점은, 그와 같은 이론이라기보다는, 본래 이런 것이었다. 곧 유비적 추론은, 그 궁극적 기초로서 성경적 하나님의 실재와 그의 계시의 권위를 전제하는 추론이다. 이 개념을 세 가지 제목 아래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곧 유비와 하나님, 유비와 계시, 유비와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1. 유비와 하나님

 

유비적 추론의 필요성은 항상 유신론적 신 개념을 함의한다. 만일 인간이 사실이나 지식의 대상을 해석하기 위해 하나님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생각된다면, 하나님은 지식의 대상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 생각되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해서,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유일한 해석자로 생각되어야 하는 반면, 인간은 유한한 해석자로 생 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인식이 모든 사실을 궁극적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이다. 모든 유한한 사실들은 하나님의 해석 덕분에 존재하므로, 유한한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해석은 그 사실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에 의존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고통을 제외하고, 사실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을 살피지 않고서는 사실들을 살필 수 없다. 그러므로 사실들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하나님의 해석에 대한 재해석이다. 인간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에 대해 유비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74).

 

유비적 추론은, 하나님이 모든 사실의 궁극적인 원천이기도 하고 모든 사실의 궁극적 해석자라는 가정과 함께 출발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이차적인 방식으로 ‘창조적'이고 ‘해석적'일 수 있다. 그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해석된 것만을 창조하고 해석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세계의 본성과 의미를 궁극적으로 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미 하나님이 이미 구성해 놓으신 세상에 태어나며, 원하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이 규정하신 구조와 더불어 살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식은 원형적(archetypal)이고 인간의 그것은 모사적(模寫的. ectypal)이다75).” 하나님의 사고가 ‘창조적으로 구성적'(creatively constructive)임에 비해 우리의 그것은 ‘수용적으로 재구성적'(receptively reconstructive)이다76). 하나님이 ‘절대적으로 해석하는' 반면 인간은 ‘하나님의 해석에 대한 재해석자'다77).

이 구별은 사실이자 규범이다. 이것이 사실인 이유는, 인간의 사고는 필연적으로 ‘재해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사고가 신앙적이거나 비신앙적 해석일 수도 있으며, 바르거나 잘못된 재해석일 수도 있으며, 순종적으로 재해석적(admittedly reinterpretative)일 수도 불순종적으로 자율적(allegedly autonomous)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해석일 수밖에 없는데, 이는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이것은 규범이다. 우리의 사고가 건전하고 참되고 바르다면 그 사고의 성격을 재해석으로서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사고는 그 실제적 위상을 재해석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의 사고는 그런 위상을 모든 사고 과정에서 전제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의 창조된 지위의 사실은 당연히 ‘피조물답게 생각'할 의무를78),그리고 우리의 피조된 지위에 적합한 방식으로 생각할 의무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밴틸에게 유비적 추론은 재해석적인 인간의 사고일 뿐만 아니라(모든 인간의 사고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그 성격을 재해석으로서 인정하고 피조물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인간의 사고다.

그러므로 유비적 추론은 하나님께 의존하며, 게다가 자의식적으로 의존한다. 하나님은 그런 추론의 창조자이자 보존자이시며, 더군다나 그와 같은 추론에 있어서 ‘술어(predication)의 궁극적인 참조점'이시기도 하다79). 유비적 추론은 하나님을 최종적 권위로 인정하며, 참과 거짓, 바름과 그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궁극적 잣대로 인정한다. 우리의 해석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해석에 순종해야 한다80).

이 관점은 하나님의 사고와 인간의 유비적 추론의 사고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바로 그 유비적 추론의 본성은 하나님께 동의하고 하나님 자신의 사고에 순응하기 때문에 연속성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 더욱이 인간의 유비적 사고 또한 결코 신적일 수 없기 때문에 불연속성 역시 있다. 인류의 사고는 결코 궁극적 해석, 궁극적 참조점이 될 수 없다. 유비적 사고는, 바로 그러한 본성 때문에 그것의 피조성과 비신성(非神性)을 자인한다. ‘하나님의 사고를 좇아 생각하기'(thinking God's thoughts after him)라는 표어는81) 연속성과 불연속성 모두를 반영한다. 곧 우리는 하나님을 좇아(불연속성) 그의 사고를 생각한다(연속성).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동의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우리의 사고와 그분의 그것을 구별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하나도 남김없이(exhaustively) 계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맞게' 그렇게 하신 것이다82). 우리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아시는 방식과 똑같이 그를 알고 있지 않다. 그와 같은 비연속성이 없다면, 앞에서 논급한 연속성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사고와 하나님의 그것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면, 후자를 전자에 위한 권위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밴틸은 인간 스스로가 어떤 의미에서 일종의 사고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궁극적' 출발점인 반면 인간은 ‘최근접’(proximate) 출발점이다83). 하나님은 최종적 권위시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인간답게 사고하는 것을 만족스럽게 여겨야 한다.

이제까지 밴틸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진솔하고,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에게 거슬릴 만한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바) 인간과 하나님의 사고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한 밴틸의 생각은, 성경을 믿는 기독교 집단 내에서 그의 논쟁 이력 중 가장 격렬한 축에 끼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불가해성(incomprehensibility) 논쟁'인데 ‘클락 사건'(Clark case)으로도 알려져 있다84). 이 논쟁에서는 “하나님이 그 지성 안에 가지고 계신 것과 인간이 그 지성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놓고 볼 때 그 두 가지가 내용상 동일하지(identity of content)” 않다는 밴틸의 발언85)에 논점이 맞춰졌다. 내가 이해하고 있기로는, 이 발언은 앞에서 논의했던바 하나님과 인간의 사고의 ‘불연속성'을 다른 방식으로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앞에서 이미 주목했던 불연속성에 추가해 어떤 식으로든 더 발전된 불연속성이 아니라 그와 동일한 불연속성을 제시한 것이다. 밴틸에게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고에서 ‘내용의 동일성'을 부인하는 것은 사고의 영역에서 창조자와 피조물의 차이를 주장하는 것일 분이다. 예를 들자면, 장미꽃에 대한 하나님의 개념은 ‘내용상'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인데, 그 까닭은 하나님의 개념은 본원적(original)이고 우리의 그것은 파생적(derivative)이기 때문이다. 그의 개념은 그 자신에게서 정당성이 부여되는(self-justifying) 데 비해 인간의 그것은 하나님의 개념에서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알고 바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밴틸이 ‘내용의 동일성'을 부인하면서 말하고 싶었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사후약방문 격이긴 하지만) 그런 발언을 하면서 밴틸은 용어 선택에서 다소 지혜롭지 못했다는 것을 필자는 말하고 싶다. ‘내용'이 사고에 적용될 경우 아주 애매한 용어가 되어버린다. 사고의 ‘내용'은 (1) 마음의 상(象), (2) 신념, (3) 생각하고 있는 것, (4) 지식이 얻어지는 인식론적 과정(감각 경험과 직관, 이성 등등의 역할을 포함해서), (5) 언어의 의미, 즉 그 의미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적 형태가 추상화되어 생각된 것, (6) ‘마음속에 있는' 구체적(physical) 은유가 생각을 통해 적용된 어떤 것(anything at all to which the physical metaphor "contained in the mind" may conceivably apply). (2)와 (3)의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고와 인간의 사고 간에 필요한 ‘내용상의 차이'를 주장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분명 하나님과 인간이 같은 신념을 가질 수도 있고 동일한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1)과 (4)에 관해 말하자면, 성경은 하나님의 사고 과정에 관해―그 두 가지가 서로 유사하다는 가정 하에,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아셨는가, 그는 마음의 상(象)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등등에 관해― 말해주는 바가 거의 없다. 이 두 의미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전체적인 문제는 사변적인 것에 가깝다.

(5)에 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실 경우,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에 의미의 동일성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런 뜻으로 밴틸이 주장했다면 분명 옳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여느 인간의 마음 ‘안에’ 있을 수 없는 것, 즉 궁극적 권위와 창조적 능력이 있다. 인간은 그와 같은 자기 타당적인(self-validating) 자율을 갖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결코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인식론적 주권(lordship)은 하나님이 가지신 모든 사고에 귀속되지만, 여느 인간이 가진 어느 사고에도 귀속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지식의 항목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안에'(in)라는 전치사는, (6)의 의미로 쓰인 ‘내용'처럼, 은유적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모호한 은유, 즉 밴틸이 주장하려고 한 종류의 불연속성을 정확히는 구체화하지 않는 은유다. 더군다나 그것은 밴틸 자신이 그와 같이 강조한 연속성을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기 일쑤다. 인간은 하나님이 가지신 것과 동일한 견해를 가져야만 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계시에서 말씀하신 것과 동일한 문제에 관해 생각해야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그가 부여하신 것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 과정은 하나님의 사고 과정이 가지신 것과 동일한 ‘입각점'(즉, 신적 권위)을 가져야만 한다86). 이것이 밴틸이 강조한 연속성이다. 더 이상의 개념 정의 없이, 하나님의 사고와 인간의 그것의 ‘내용'상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고와 인간의 그것이 동일한 내용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를 모호하게 한다87).

그러나 결국 ‘내용'이라는 용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밴틸이 여기서 유비적 추론에 관해 말했던 기본적인 요점은 부인할 수 없다. (1) 하나님의 사고는 진리의 궁극적 표준이므로, 인간의 사고는 하나님의 사고와 순응(CONFORM)해야만 한다. (2) 인간은 자신의 사고를 하나님의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데, 이는 우리의 사고는 궁극적이지 않고, 자기 타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2. 유비와 계시

 

유비적 추론이 인간의 피조적인 사고를 하나님의 신적인 사고에 일치시키는(그러나 동일화시키지는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내가 사과와 토마토를 하나님의 마음 안에 모사된 것(duplicates)에 비교함으로써 그 두 대상을 구분하는 것처럼, 신적 사고 과정을 직접 들여다봄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88). 그런 종류의 플라톤주의는 밴틸의 입장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밴틸은 모든 개혁파 사상과 함께, 하나님이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계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확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의 자발적인 자기 계시―그의 말씀―다. 그래서 밴틸은 유비적 추론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추론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89). 이 계시는 전포괄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유비적 추론이 전포괄적 지식에 다다를 수는 없다90).

밴틸의 계시론은 대체로 표준적이면서 잘 알려진 개혁파 신학이다. 밴틸에 따르면 일반계시는, 하나님의 실재와 본성을 선포하기 위해 그리고 죄인에게 변명의 여지를 남기지 않도록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에 관해 충분히 계시하기 위해, 자연과 인간 구조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계시다(시 19: 1 이하; 롬 1-2장). 특별계시는, 역시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고 그의 계명을 나타낼 뿐더러 특히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죄가 용서된다는 규정을 반포하기 위해(to set forth His provision), 선지자들과 사도들, 성육신한 그리스도, 기록된 성경에(to) 그리고 앞에 말했던 수단들을 통해(through) 하나님이 하신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밴틸의 가르침이 범상치 않은 것은 (1)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상관성(correlativity)에 대한 강조와, (2) 이 상관성과 성경의 우선성 사이에 잡은 정교한 균형이다.

 

(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의 상관성

밴틸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유기적, 보완적 방식'으로 서로 관계된다는 것을 즐겨 강조한다91). 첫째,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떠나서 전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타락 전, 인간이 처음 존재하던 순간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언어적 말씀과(창 1:28-29; 2:16,17) 창조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 둘 다를 마주하고 있었다. 둘째,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떠나서는 전혀 작용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사실 계시와 말씀 계시는 ‘서로 필요로 한다'92). 사실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해석될 필요가 있었고”93) 말씀은 항상 하나님과 인간, 자연, 구속사에 대한 사실을 설명한다. 한 가지 빠진 다른 하나로는 이해될 수 없을 것이며 어떤 것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담은 동산의 나무들에 관한 자신의 의무를 알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었지만, 그 언어적 명령은 그 '상황'에 대한 아담의 지식을 전제한다. “자연적인 것이 그 실제로 존재하는 바에 따라 인식될 수 없다면, 초자연적인 것도 그 실제 존재에 따라 인식될 수 없을 것이다94).” 셋째, 일반계시와 자연계시 모두 ‘필요하고, 권위 있고, 분명하고, 충분하다'. 그 네 가지는 그 독특한 목적에서 보면 일반계시에 적용된다. 죄인들에게 변명의 여지가 없게 하고 특별계시가 지시하는 사실적인 대상을 제공하기 위해, 일반계시는 필요하며, 권위 있게 말하며, 분명히 말하며, 그 일을 이룰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95).

이런 종류의 강조가 화란의 문헌에 이미 있었지만 북미 신학에서는 이례적이다. 필자는 이것이 신선하고 흥미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학 작업에 주는 함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우선,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해 성경 외적 정보를 사용하는 데 대해 당혹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참으로 창조계가 어떤 식으로든 자율적이라면, 그런 자료의 사용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계시의 온전한 진리를 은폐할 수도 있다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다. 그러나 창조계는 하나님께 비의존적이지 않다96). 하나님은 그것을 통제하시며 그 모든 것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자연 아니면 성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기적 총제인 그 두 가지에 의해서 자신을 계시하기로 결정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자료를 꺼리지 않고 그리고 감사하게 사용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밴틸의 강조는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볼 수 있도록 자유하게 한다. 그 원리란, 성경이 세상에 적절하게 관련될 때만 있는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외 다른 방식을 결코 계획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성경은 그 당대의(original) 문화적 환경에 비추어서 해석되어야만 할 뿐더러 우리 자신이 속해 있는 삶과 문화―성경은 이 환경 속에 지금도 말씀하고 있다―에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련되기 이전에는,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해석의 문제와 적용의 문제는 동일한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 또는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묻는 것은 언제나 적용에 관한 물음을 던지는 것과 같다. 성경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개인적 문제―성경 말씀을 우리의 삶과 우리의 언어, 우리의 문화, 우리의 두려움, 우리의 희망에 관련시키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 다음에, 이 원리는 신학의 모든 물음에 더 투명하게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학은 사람살이의 모든 영역에 대한 성경의 적용일 뿐이다. 이 문제에 관해, 개혁파 신학 저술가들은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들은 하나님 또는 성경의 연구로서, 성경 자료의 배열작업으로서, 성경의 사실들로부터 이론을 정립하는 과정 등등으로서의 신학에 대해 말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으로 충분하다면, 왜 우리는 신학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물음에 심각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성경 안에 있는 그분 자신에 관한 진리를 우리에게 이미 말해버린 때가 언제인지를 잊은 채,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얻는 데 필요한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한 성경의 설명이 어떤 식으로든 부족하다고(그 내용, 아니면 형식면에서), 그리고 그 결함을 고치기 위해, 성경을 적합한 형식으로 진술하기 위해 신학이 필요하다고 암시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 같다. 밴틸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런 경향에 빠지지 않는다. 성경은 진리, 배열,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순수사실은 결코 인간의 해석을 위한 자료로 존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해석―하나님이 해석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신학이 필요한 것은, 성경 안에 있는 어떤 결함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결함 때문이며 성경의 분명한 계시를 우리 자신의 삶에 관련시키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 때문이다. 우리에게 신학이 필요한 것은, 성경을 기반으로 정립하거나 향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경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다97).

신약이 ‘적용'이라면, 신학은 특별계시와 더불어 일반계시도 필히 사용해야 한다. 성경을 적용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에 관해 어떤 것을 알아야만 한다. 어떻게 성경이 낙태와 생태학, 에너지 위기, 핵전쟁에 적용되는지를 알려면,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외에도 다른 것을 마음껏 사용해야만 한다. 곧 우리는 또한 이 문제들에 대한 정보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밴틸이 옳다면, 우리는 난감해하지 않고서도 그와 같은 정보를 이용할 수 있다.

 

(나) 성경의 우위성

그러나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충분성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학이 ‘난감해하지 않고서도' 일반계시를 사용할 수 있고 또 사용해야만 한다면, 그리고 일반계시가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적용하는) 데 필요하다면, 어떤 의미에서 성경은 우위성을 가지는가? 우리가 가진 성경 지식이 ‘자연적인 지식'에 어느 정도 의존한다면, 자연적인 지식에서 보다 성경에서 더 큰 확신을 가질 수 있는가? 이런 견지에서 보면, 성경 자체가 단순히 일반계시의 또 다른 형식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미, 밴틸에게는, 자연과 성경은 ‘유기적, 보완적 방식'으로 관련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각주 91번 참조). 성경은 그 자체가 해석한 그한 사실들 없이 이해될 수 없지만, 그 사실들은 그것들에 대해 하나님에 의해 말씀되고 기록된 해석과 떨어져서 이해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타락 전에도,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그의 자연 안에서의 계시보다 ‘우선권’을 갖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언어적 말씀을 궁극적으로 권위 있는 해석으로서, 다른 모든 해석이 그것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해석으로서 받아들여 한다. 하와는 뱀의 말(그리고 결국 그녀 자신의 말)을 이렇게 궁극적인 권위를 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죄를 지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어적 말씀이 여느 인간(이나 사탄)의 해석보다 더 참되다거나 권위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어적 말씀은 자연계시에 대한 여느 인간(이나 사탄)의 해석보다 더 권위 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언어적 말씀을 그들의 사고의 ’출발점'으로 삼을 의무를, 그 말씀을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모든 건전한 해석에 잣대로서 받아들일 의무를 지고 있었다.

타락 후에, 하나님의 언어적 및 기록된 말씀은 훨씬 더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 까닭은 우주를 해석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활동이 죄로 왜곡되었기 때문이다97). 타락 후에, 이 언어적 및 기록된 말씀을 인간에게 알려진 유일하고 최종적으로 권위 있는 판결문(sentences)으로서 지적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해졌다. 따라서 “성경 안에 있는 계시는 우리의 출발점이 된다. 자연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개신교적 교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개신교적 성경론에 비추어 볼 때 뿐이다98).”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래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역의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99).”

요컨대, 자연계시는 성경의 연구(=해석)에 필히 활용되어야 하며, 확정된 해석은 어떤 다른 자료에서 비롯된 가정보다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 ‘적용으로서의 신학’은 종결된, 완전한, 권위 있는 성경을 전제한다(앞의 논의를 보라). 신학은 성경의 적용이며, 그것도 성경만의 적용이다100).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 외적 정보를 활용할 때라도, 이 정보를 느슨하게―성경이 그것을 의문에 부칠 수 있도록 충분히 느슨하게―쥐고 있어야 한다. 신학에 진정한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성경 해석 방법들 자체가 성경에 의해 정결함을 받게 될 때뿐이다.

밴틸이 보기에 성경의 우위성은 전포괄적이다. 즉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예컨대 물질적 우주에 관한 가르침과는 다른 성격의 ‘신앙의 진리' 또는 ‘종교적 가르침' 만을 가르친다는 견해를 그는 분명히 거부한다101). 철학자 역시 “…성경에 직접적으로 종속된다102).”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성경이 함구하고 있는 문제란 하나도 없다103).

밴틸에게 성경이 그와 같은 우위성을 갖는다면 왜 그의 방법론은 좀 더 ‘주해적'이지 않은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어왔다. 베르카우어(G. C. Berkouwer)는 이 점에 대해 밴틸을 추궁했고 밴틸은 그런 점이 잘못되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104). 밴틸은 어떤 딱히 성경 본문을 주해한 적이 거의 없고, 그의 용어도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경우가 많다. 이런 비판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긴 하지만, 밴틸의 접근법을 옹호해서 말할 수 있는 부분도 많다. 첫째, 많은 비평가들은 밴틸의 지성에 성경의 내용이 어느 정도 배어있는가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설교와 강의는 성경의 인용, 인유, 예시로 가득하다. 무슨 까닭인지, 이렇게 두드러진 특징이 간행된 그의 저서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그 저서들은 이같이 성경에 흠뻑 젖은 정신의 성향에서 싹튼 것이다. 두 번째, 많은 비평가들은 밴틸이 가장 좋아하는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가 명석한 성경 신학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밴틸의 저서에 표면적으로는 거의 드러나지는 않지만, 밴틸에게 끼친 보스의 영향은 심대하다. 이런 사정을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보스의 영향이 어렵지 않게 감지될 수 있는 부분들이 밴틸의 저서에 나타난다105). 셋째, 밴틸은 동료 교수단과 한 마음 한 뜻을 가진 신학 기관에서 학과를 가르쳤다는 것은 그에게 이점이었다. 어떤 신학자들과는 달리, 밴틸은 주경신학을 가르친 동료들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의 주경학적 작업에 기반을 두고 학문을 세워나갔다. 동료 교수들에 대한 그의 신뢰감은 그 자신의 은사[문헌학적(philological)이라기보다는 철학적(philosophical)]에 가장 적합한 연구 분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자유를 안겨주었다. 그래서 베르카우어의 비판에 답하면서, 그는 그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존 머리(John Murray)의 주경학적 연구 결과를 단순히 언급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주해'의 일반적 개념을 재고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앞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성경의 해석과 적용이 동일한 것이라면, ‘주해'는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넓은 학문분야(discipline)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밴틸이 성경의 개념을 철학적 언어로 옮길(translates) 때 그는 ‘주해'를 하고 있지 않은 것인가106)? 성경의 개념을 철학적 용어로 번역하는 것(translating)과 헬라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 두 활동이 다른 종류의 기능을 요구하긴 하지만, 전자의 활동을 ‘주해적'이라고 묘사하고 후자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와 같은 묘사를 부정하는 것이 참으로 온당한가? 밴틸이 성경의 가르침을 철학과 변증학의 문제들에 적용할 때, 그는 ‘주해' 작업을 하고 있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런 종류의 적용과 구문론적 대응어를 찾아내는 문제에 적용하는 것 간에 실질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결국 밴틸의 작업을 아주 중요한 의미에서 참으로 ‘주해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주해'라고 불리는 그러한 문법적 및 역사적 연구에 대한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온전한(whole) 주해 작업이 특정한 한 사람에 의해, 특정한 한 가지 방법에 의해, 특정한 재능을 가진 부류에 의해(by any one set of gifts)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제안하는 것일 뿐이다.

 

다. 유비와 논리

그런데 필자는 처음부터 밴틸의 ‘유비적 추론' 개념을 고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잠시 잊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체계'에 대한 강조와 ‘역설'에 대한 열의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과연 어떻게 기독교의 교리들이 서로 의존하면서도 서로 간에 다소 긴장 관계에 있는가? 유비적 추론에 대한 앞의 논의는 이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유비적 추론이 첫 번째 종류로서 ‘하나님을 좇아 그분의 생각을 사고하기'―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일치를 추구하는 사고이면서 동시에 그것 자신의 피조물됨을 인정하는 사고 형태―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비적 추론은, 하나님의 계시 일반에 종속하고 성경의 잣대로 모든 생각을 판단하는 추론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처럼, 이 추론은 진리에 다다르지만 모든 진리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참되지만 하나도 남김없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실제로 순응하는 한 참되지만, 확보할 수 있는 진리의 분량은 (a) 추론하는 사람의 피조물적 지위, (b) 그리고 계시되어야 할 것과 감추어져 있어야 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의해 제한된다.

우리가 진리에 다다르는 한, 창조의 상관성의 의미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지혜로운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어떤 한 가지를 창조하려고 계획하지 않으셨다. 그의 계획의 모든 구성 요소는 서로 ‘꼭 들어맞는다'. 성경은 이러한 상관성을 자주 반영한다. 믿음은 율법을 굳게 세우고(롬 3:31), 선택받은 이들의 영화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반드시 필요로 하고(히 2:10), 참된 믿음은 항상 선행을 낳고(약 2:18), 혀를 통제하는 것은 몸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며(약 3:2), 율법 중 하나라도 불순종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범하는 것이다(약 2:10). 참된 성경적 신학은 이 상관성들을 반영할 것인데, 그것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지식은 우리의 피조적 지위와 계시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제한 둘 다에 의해서 제한되므로, 성경에서도 역설을 발견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우리가 모든 진리를 알지는 못하다면, 진리들 간의 상관성을 다는 알지 못한다. 앞에서 제시했던바 역설은 상관성들에 대한 무지의 결과일 뿐이다. 여러 교리 영역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어떻게 상호 관련되는지를 완전히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어떻게 ‘꼭 들어맞는'지,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를 설명해주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들이 꼭 맞아 떨어진다는 것을 아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지혜롭고 철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그것들이 어느 정도 서로 맞아 들어가는지를 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 안에 있는 공백(gaps)은 우리에게 역설적 공식으로 만족하라고 요구하기도 한다.

하나님은 선하시지만, 악한 행위를 작정하셨다. 우리는 이 진리들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데, 이것은 성경이 그 두 가지를 모두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은 스스로를 부인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어느 하나를 부인하면 나머지 하나도 부인하게 된다는 것을 알며, 그런 의미에서 두 진리가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 스스로가 과연 선하시다면 악을 작정하실 수 있는 바, 그것은 성경에서 ‘악'은 하나님의 선과 대조될 때만 ‘악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악이 과연 하나님에 의해 작정되었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선하시다. 왜냐하면 악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 선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 안에 선한 목적이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목적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 두 진리가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즉 그것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기에 역설이 있다. 참으로 이 경우에 우리는 상호의존성이 있다는 것을 알 뿐더러 상호의존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어느 정도 안다. 그러나 ‘어떻게'에 대한 충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이것에 대한 미지(未知)의 어떤 것, 즉 우리가 완전히 조화시킬 수는 없는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악을 작성 하실 수 있는가? 따라서 우리는 미지의 상황 속에 있다. 즉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논리상으로는 상호 의존적임을 보여줄 수 있는 두 명제(‘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악을 작정하셨다')가 있지만, 믿음에 호소하는 방법을 제외하고는 그것들이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는 없다! 이것은 참으로 미지의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의 진리와 우리의 피조적 지식의 한계 둘 다를 공정하게 다루려고 한다면 그리고 ‘유비적으로 추론'하려고 한다면, 그곳이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과 역설의 균형은 성경에 복종하면서 사고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을 따라야만 한다. 그것이 상호 의존성을 단언하는 데서도, 그리고 모든 교리를 우리의 만족을 위해 조화시키기를 그것이 거부하는 데서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성경으로부터 ‘타당하고 필연적인 귀결'을 도출하는 데 어느 정도까지 논리를 사용할 수 있는가? 한 교리에서 다른 교리를 연역(deduce)할 수 있는 경우는, 성경 자체가 명백하게 그렇게 할 때뿐인가? 아니면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는 것을 넘어서서 그 함축적인 메시지를 드러내도 되는가? 분명, 밴틸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그리고 어떻게?

논리에 대한 밴틸의 일반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노선을 따라간다107). 즉 논리의 법칙의 타당성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된다108). 하나님은 자신보다 더 궁극적인 어떤(논리적 또는 기타의) 가능성의 원천에 종속하지 않으신다109). 오히려 그 자신만이, 가능한 것을 궁극적으로 결정하신다110). 그러므로 인간의 논리의 능력을 인증하고 제한하는 존재는 하나님이시다. 첫째, 그는 그것을 인증하신다. 그의 계시는 어떤 논리적 모순도―어떤 ‘실제적' 모순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성경에는 외관상의 모순들이 있기는 하지만 단지 외관상 그럴 뿐이다111). 누구에게 그렇게 보이는가? 그것들은 불신자들에게는 궁극적으로 조화되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 바, 그것은 그들이 논리의 기초에 대해 그릇된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12). 그러나 ‘외관상의 모순'은 모든 사람,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인데, 이것은 그들의 유한성 때문이다113). 그렇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모순도 없으므로, 신자는 상황이야 어떻든 간에, 하나님의 계시는 그 자체로 완전히 일관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에 적용된 논리는,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가지 않을 것이다. 논리 자체는, 적합하게 사용된다면, 성경에서 실제적인 모순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째, ‘적합한 사용'은 논리적 추론 과정에서의 특정한 제한을 함의한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추론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논리의 토대라는 사실을 온전히 인식하면서 추론해야 한다114). 논리 자체는 어떤 것이 가능하거나 개연적인지 결정하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신다115)116). 논리는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철저한(exhaustive) 지식을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현재 이해능력의 관점에서 성경의 모든 교리가 완전히 일관성 있게 보일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없다117). 그러므로 밴틸은 기독교 신학의 ‘체계’가 ‘연역적' 체계가 아니며, 우리는 ‘연역적' 해석(exegesis)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118). 여기에서 밴틸은 ‘연적적'(deductive) 체계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가? 그는 그 용어를 실제로 어떤 곳에서도 정의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당연시하는 듯하다(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전반적인 입장을 놓고 판단해보면, ‘연역주의’(deductivism)에 반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도했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1) 신학은 한 가지 또는 몇 가지 교리에서 연역해서는 안 된다119). (2) 신학은, 그것이 그 모든 교리의 형식 논리적 일관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해서는 안 된다(앞의 논의를 보라). (3) 따라서 신학의 독특한 방법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처럼) 연역이 아니라 오히려 특정한 주제에 따라 성경의 모든 자료들을 취합하는 것이며, 이것들이 성경적 가르침에 의해 보장될 때에 한해 역설적 공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밴틸의 방법론에 있어서 더 모호한 공식들, 예컨대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계획의 전포괄성에 더 깊이 관여시키려고 하며120)” “그것은 직선적 방식이 아니라 나선형 방식으로 추론하는 것이다121)” 라는 공식을 바로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설명들에도 불구하고, 논리에 관한 밴틸의 가르침에 어떤 불명확성이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왜 어떤 경우에 연역법을 사용하고 다른 경우에는 그것을 거부하는지를 그가 항상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밴틸은 위에서 언급한 제한사항에도 불구하고, 신학에서 논리적 연연법의 적합한 사용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122). 예를 들어서, 루터파와 피퍼(Pieper)에 반대하면서, 밴틸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로서의 그의 본성과 일치하는 것만을 계시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123). 그리고 “하나님이 전능하기도 하고 전능하지 않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은 비합리주의라고 논박한다(각주 124 참조). 또 그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부정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구원하도록 선택하심과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능력이 있다고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한다124). 이런 경우들에서, 그는 하나의 성경적 진리로부터 그 반대의 부정을 (논리적으로! 그 외 다른 방법으로?) 연역하고 있다. 그는, 성경이 특정한 진리를 가르치므로 (논리적으로) 그 진리와 반대되는 것을 가르칠 수 없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제 개념에서 시작해서 그것으로부터 인간에게 어떤 책임도 없다는 개념을 연역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각주 125 참조). 어떤 경우에는 논리적 연역이 허용되고 요구되기도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밴틸은 그 두 경우가 어떻게 다른지 분명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연역이 형식적으로 타당하며 어떤 연역이 타당하지 않은가? 어떤 연역이 성경의 자료를 설명해주며 어떤 연역이 그렇지 않은가? 밴틸은 이것에 대해 말해주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전능하시기도 하며 전능하시지 않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은 ‘외관상' 모순적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다(만일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고 가정한다면 ‘외관상’ 모순이라는 것이다―역주). 그것은 ‘실제로 모순적'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능한’과 ‘전능하지 않은'에서 ‘전능한'을 서로 다른 의미로 썼다면 이 표면상의 모순은 성경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다른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모순이 실제적인 것(단순히 ‘외관상의' 것이 아니라)임을 우리가 알고 있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밴틸의 논의는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순이 ‘실제적'인 반면 다른 모순들은‘외관상' 그럴 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어떤 모순은 해결될 수 없는 반면 다른 모순은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그 중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

밴틸은 왜 우리가 간혹 외관상 모순적인 공식들에 만족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우리는 그러한 역설로 만족해야 하는 반면 다른 경우에는(피퍼의 경우에서처럼) 명백한 논리적 일관성을 요구해야 하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에 밴틸이 이 문제에 착수했었다고 가정한다면 어느 정도 다음과 같이 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곧 우리는 성경에 어떤 ‘실제적' 모순도 없다는 것을 믿으므로 우리의 주해는, 인간적으로 가능한 한, 성경적 가르침에 대한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해석을 해내려고 힘써야 한다. 그러나 이 목표는 일차적인 것이 아니다. 주해의 일차적인 목표는 텍스트에 대한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그것에 충실하는 것이다. 그리고 간혹 한 교리를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공식화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우리는 자신이 성경의 다른 교리와 절충하고 있는(compromising)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논리를, 본래적인 성경적 가르침을 소홀히 하거나 부인하는 상황으로 끊임없이 몰아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의 전체적인 절차―주해, 추론, 그 문제에 대해 끌어 모은 성경 외적 지식 등―를 재고해야 한다. 성경의 다른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고서는 어떤 명백한 논리적 일관성도 확보될 수 없다면, 역설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전능의 경우에, 여느 성경적 가르침과 절충하지 않고서도 투명한 논리적 일관성이 가능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가르치지 그 반대로 가르치는 않는다.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전능성을 일관성 있게 확언한다고 해서 성경의 다른 여느 가르침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교리를 확언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고수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의 경우에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여기에서는 ‘외관상의 모순'이 있다(밴틸의 생각에). 그러나 그 모순을 해소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나 인간의 책임 중 어느 하나와 절충시키는 것이다. 두 교리가 성경에서 명백하게 가르쳐져 있으므로 그래서는 안 된다. 일반적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즉 논리적 연역법이 우리에게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들에 대립하게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논리적 연연법을 자유롭게 사용해도 된다(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밴틸의 입장에 대한 적합한 분석이라면,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외관상 모순”이라는 그의 발언에 대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125)? 이 발언은 밴틸은 성경적 가르침의 ‘외관상 모순적인' 공식들(앞에서 본 바 있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므로, 상당히 이상하게 들린다. 밴틸에게 하나님의 전능성이 ‘외관상 모순적인' 교리가 아니다(또는 아닌 것 같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하나님이 전능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전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거짓이다. 더군다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밴틸은 어떤 의미에서 ‘외관상 모순적인' 다른 공식들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외관성 모순적이다”라고 그가 말할 때, 여기에서(다른 곳에서처럼; 각주 108번을 보라) 밴틸은 형식 논리와는 다른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잘못 생각할 소지가 많다. 사실 이 발언을 설명한 문단은 형식적(formal) 모순이나 심지어 형식 논리 일반에 대해 하나도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를 제시할 뿐이다. 여기서 ‘외관상의 모순'은, 하나님의 사고에 대한 인간 사고의 총체적인 복종을 나타내는 은유일 뿐인가?

은유이긴 하지만 ‘단순한' 은유는 아닌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제한하고'(limiting) ‘보완하는'(supplementative) 개념으로서의 밴틸의 교리관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 원리는 어떤 의미에서 유비적 추론에 대한 밴틸의 총괄적인 관점과 형식 논리에 대한 그의 특정한 관점을 잇는 연결 고리다. 밴틸은 신학적 개념이 ‘한계 개념'(limiting concept)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의 피조적 지위가 함의하는 바를 이끌어내고 있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의 개념 중 어떤 것도 ‘그것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의 본질'을 철저히 이해하지는 않는다126).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어느 정도까지는 정확할 수 있지만 결코 나무를 남김없이 묘사할 수 없다. 하나님과 죄, 구원 등에 대한 우리의 개념도 마찬가지다. 성경의 개념들조차도(그것들이 인간의 언어 안에 있는 것으로 제시되고, 따라서 인간의 이해에 수용되는) 그것들이 언급하는 실재들을 남김없이 묘사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을 말해주지만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념들은 특별한 의미에서 진리의 ‘근사치'(approximations)다127). 여기 주의가 필요하다. 밴틸은 예컨대 이신 칭의 교리가 부분적으로 틀리다는 의미에서 단지 ‘진리에 가깝다'(approximately true)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 교리와 다른 성경적 교리들은 완전하고 신뢰할만한 진리이지만 그것들은 해당 문제들에 대해 하나님이 아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교리가 ’철저하지는 않다'(non-exhaustive)는 사실은 여러 교리들을 서로 ’보완적인'(supplementary)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128). 성경은 하나님이 주권적이라고 분명히 가르치지만 그의 주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완전히 상세하게(남김없이) 말해주지는 않는다. ‘신적 주권'이라는 신학적 개념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모든 관계들에 관해 전포괄적이고 남김없이 이해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책임에 관해 명백히 말하는 것을 소홀히 하면서, 그 책임에 대한 관점을 오로지 신적 주권의 개념에서 도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두 개념이 서로 보완적이도록 그냥 둬야 한다. 인간의 책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신적 주권의 이해를 더 깊게 하는데, 그 역(逆)도 참이다. 그 둘이 나란히 놓는 것이 ‘외관상의 모순'을 낳는다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라. 그런데 심지어 논리적 긴장의 인식은 신자들이 두 교리의 더 심오한 논리적 통일성을 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권이, 인간의 책임성에 대한 그것의 관계를 제외해버린다면 있는 그대로―곧 그것의 온전한 역설성 안에서!―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밴틸이 두 교리를 ‘서로 필요로 하는 것'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그것들의 관계는 ‘외관상 모순적'이라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방식에서다.

그러나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 ‘한계개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성경의 모든 개념들은 앞에서 말한 의미에서 ‘상호 보완적'이다. 이신칭의 교리 역시 신적 주권의 교리를 보완하며, 후자에 의해 보완되기도 한다[여기에서 프레임이 이신칭의를 하나님의 주권과 대비하는 것은, 전자가 인간 편의 주관적 믿음을 그 도구적 원인으로 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역주). 신적 주권 교리는 어떤 류의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따라서 이신칭의 교리는 신적 주권의 역설과 협력한다(incorporates). 이신칭의 교리는―나머지 성경의 진리와의 관계에서 설명될 때―신적인 주권과 흡사하게 역설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능성조차 다른 교리와 역설적 요소를 같이 가진다. 그 역설적 요소는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능하시지 않다”는 문장으로는 적절하게(성경적으로) 공식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서는 그 역설을 거부한다. 그러나 신적 전능성에 적용한 또 다른 종류의 역설이 있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어떤 의미에서 ‘제한받는다'. ‘모든 것'이 그의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라거나, 그의 약속들에 반대되는 것이라거나, 그의 영원한 목적들에 반대되는 것들을 포함한다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할 수 없으시다. 하나님의 ‘전능'은 인간에게서 책임을 빼앗아가지 않을 것이며, 이차적 원인으로서 인간 행위의 중요성을 제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외관상의 모순'은 성경의 ‘한계적' 본성에서 결과한다. 그리고 이 ‘제한 개념들'이 ‘보완적'이므로, 어느 하나에 부속된 역설은 모든 것에 부속됨과 동시에 각 개념은 그 나머지 모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모든 역설이 단지 역설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역설들은 주해를 거쳐(exegetically) 공식화되어야 한다. 또한 모든 교리가 항상 역설적인 용어로 진술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서 발견되는 역설은 여느 온전한 신학 작업에서 담대하게 진술되어야 한며, 성경의 각 교리에 대한 이 역설들의 관계가 탐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외관상 역설적이다.” 즉 (a) 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한계개념들'이며, (b) 한계개념들은 보완적이므로, 어떤 교리에 있는 외관상의 모순은 모든 교리에서의 외관상의 모순을 낳는다.

이와 같은 주장(doctrine)은 성경을 지적으로 이해할 수 없도록 만드는가? 모든 교리가 외관상 모순적이라면 그것은 전혀 의미를 갖지 않는가? 모순들이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외관상의' 것이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외관상의 모순'은, 해결되기 이전에는, ‘실제적인 모순'과 똑같은 이해불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적용으로서의 신학'에 관해 앞에서 했던 언급으로 돌아가 보자. 해석과 적용이 동일한 것이라면, 이해가능성의 문제는 일관성 있는 방식의 적용이 가능한지의 문제가 된다. 어떤 문장은 논리적 기준에 합치해도, 특정한 반응을 독자나 청자를 향해 모호하게 진술한다면, 이해 불가능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논리의 법칙 자체는 이와 같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가능성'에 부차적이다. 논리는 그런 적용이 가능한 조건들을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그렇다고 오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오늘날의 여러 논리학자들이 간취한 것처럼 현재의 어떤 논리 체계도 그와 같은 이해가능성의 조건을 모두 기술하지는 않는다. 논리는 이 과제에서 걸음마 단계에 있을 뿐이어서, ‘모든', ‘…이라면 …이다'(if-then), ‘어떤', ‘어느 것도 …이 아니다' 등과 같은 소수의 핵심 용어에 한해 이해가능성의 조건을 기술하고 있다. 현대 논리학은 그 용어들이 나타나는, 특정하게 좁혀진 문맥에서만 그것들을 분석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성경적 교리들이 ‘실제로' 모순적이지는 않으므로 그것들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의 이해가능성은 작금의 인간 논리의 제한된 기준으로는 증명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밴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의 결과로 하나님을 형상을 잃어버렸으면서도(어떤 의미에서) 잃어버리지 않았다(또 다른 의미에서). 그 의미들은 분명히 명시될 수 없으므로 우리들에게는 외관상의 모순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므로 그것은 실제적인 모순이 없다. 이 이론(doctrine)은 명료한가? 그렇다. 성경에서 가르쳐진 것처럼 그것은 분명하게 적용된다. 사람들이 타락하기는 했지만(창 9:6; 약 3:9), 우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로 대해야 한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멸시할 권리가, 따로 떼놓고 이해된 교리에서 결과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성경에 의해 한결같이―일관성 있게―거부된 판정이다. 형상의 ‘상실'은 적합한 적용을 갖추고 있지만, 형상의 ‘지속성'의 적용에 반대되는 적용을 갖추고 있지 않다. 형상의 ‘상실'은 우리 자신의 갱신의 필요성을, ‘새 사람을 입을'(엡 4:24; 골 3:10) 필요성을 인식할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이런 두 가지의 외관상의 모순적인(contra-dictory) 원리들에 대한 전체적인 적용에서, 비일관성이란 없다. 타락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우리 자신의 갱신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 간에는 모순이 없다.

이제 밴틸의 ‘유비적 체계'의 특이한 구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것도 다른 것들의 빛에 비추지 않고서는 정당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교리는 상호 의존적이다. 어떤 것도 진리의 충만(fullness)을 남김없이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 교리의 철저하지 못한 성격은 형식 논리적 일관성을 증명할 우리 능력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모든 교리는 ‘외관상 모순적'이다. 그러나 모든 교리는 어느 정도까지는 참되며, ‘실제로' 모순적이지 않으며, 지적으로 이해가능하다. 모든 교리들은 우리의 논리 형식에 동화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명확한 지침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말이다. 기독교적 ‘체계'의 본성에 대한 이 설명은 그 중요성을 헤아리기 어려운 신학적 성취다129).

 

 

맺는 말

 

 

내 생각으로는, 밴틸의 ‘신학적 체계' 개념은 우리 대부분이 이해하기에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신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공헌이다. 필자가 이제까지 서술했던 것이 적어도 이 개념의 어떤 면을 명료하게 설명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필자는 특정한 교리들에 대한 상당히 많은 밴틸의 독특한 공식―그 각 교리들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다―을 언급했다. 또 밴틸의 일반계시관과 특별계시관, 그의 ‘하나님의 불가해성' 개념, 많은 교리적 논제(loci)에서 발견되는 ‘역설'과 다양한 종류의 ‘상호의존'에 대해 그의 여러 흥미로운 공식을 (우리의 좀 더 넓은 관심사의 맥락에서) 논의했다. 이 논의에서, 필자는 신학의 본성과 방법에 대한 그의 일반적 관점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그의 독특한 신학적 입장의 줄거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아직도 말해야 할 것이 훨씬 더 많다. 밴틸의 ‘선행적인'(earlier) 은혜로서의 ‘일반은총' 개념은 매우 중요하고 아주 심도 있는 분석이 필요하다130). 그의 인간 본성에 대한 비지성적(non-intellectualistic) 관점131), ‘윤리적'인 것으로서의 그의 죄관132), 창조주-피조물 차이의 기능으로서 칼케돈 기독론에 대한 그의 관점133), 윤리의 목적과 동기와 규범에 대해 끝없는 영감을 주는(fertile) 그의 설명134)―이 모든 것들과 그 외 다른 것들은 마땅히 더 깊은 연구와 분석, 발표를 요한다. 더욱이 밴틸의 신학을 참으로 완전히 설명하려면 비개혁주의적 사상에 대한 그의 비판―그 자체로 흥미롭기도 하지만 해당 교리들을 더 훌륭히 공식화는 데 도움을 주는 비판―도 소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예컨대, 바르트의 보편구원론(universalism)에 대한 밴틸의 비판은 지구를 파괴하는 데 대해우리에게 경고할 뿐더러 기독교에 도입된 철학적 모티프가 제한구원론과 타협하도록 이끌어가는 방법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도 유익하다. 이런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다룬 연구서가 나오기를 바란다. 편집자가 요구한 분량을 이미 넘어선 본 본고는 이제야 끝이 났다. 그러나 이 논문이 신학자에게 주는 밴틸의 저서의 막대한 중요성과 그 작업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 관련된 어떤 어려움을 보여주었다고 필자는 느낀다. 내 생각이 옳다면, 이 아주 중요한 사상가에 대한 앞으로의 연구에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정당성을 여기서 마련해준 것이리라. 『교의학자,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 als Dogmaticus)이 언젠가는 집필되어야 할 날이 올 것이라 확신한다!

 

Scanned By: Jonathan Barlow
Added to CRTA's online Resources: 2-9-97
Pagenation Retained
Quote As: Frame, John. Van Til the Theologian. Phillipsburg, New Jersey: Pilgrim Publishing Company, n.d.
Library of Congress Catalog Card Number: 75-36460
ISBN: 0-916034-02-X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