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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 월례회 설교전문

by 【고동엽】 2013.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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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눅 10:25-37)

 

바다 속에 사는 문어 총각이 신부 감을 찾아 다녔습니다. 어느 날 몸이 날씬한 예스 라인의 멸치 아가씨를 만나 첫 눈에 피용 가버렸습니다. 문어총각이 그를 위해 갖가지 이벤트행사를 벌려 드디어 그에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너무나 집요하게 청혼하니까 멸치 아가씨는 부모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 복스럽게 생긴 문어 총각이 나를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문어 총각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결혼을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멸치 부모는 깜짝 놀라고 펄쩍 뛰면서 벼락 치듯이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뼈대가 있는 가문이다. 그런 뼈대 없는 집안에 너를 시집보낼 수 없다.' 얼마나 단호한지 멸치는 결혼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문어는 뼈대 없는 집안인 것을 인정하고 열등감속에 허리가 굽은 못 난 '새우 아가씨'에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거절당하고 말았습니다.
새우 아가씨의 부모는 '우리 집안은 양반 가문이다. 수염을 기르고 있다. 그런데 수염도 없는 서민의 집과 혼사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아십니까? 앞서가는 노회! 뼈대있는 수도노회 월례회에 설교할 수 있게 배려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제가 존경하는 신임 노회장님이 오늘 꼭 설교를 하셔야 되는데 저에게 한 번 기회를 주신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할/

 

유명한 신학자 '밀턴 부버'는 '참된 삶은 만남이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운명이란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두 다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에 성공한 사람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다 만남에 잘된 사람들입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 또 좋은 스승을 만나 위대한 진리를 배워서 삶을 지혜롭게 사는 사람들! 또 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출세의 길로 달려갔던 사람들로 있습니다.
이 모두가 다 만남의 잘된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성도를 만나야 교회의 성장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불행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실패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사람들을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회자는 장로를 잘못 만나 엄청 어려움을 당한 목사님도 계십니다.
우리가 인생 길을 가는 동안 좋은 사람, 형통한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배우자를 잘못 만나서 날마다 탄식과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만나서는 안 될 사람들을 만나 치명적인 손해를 본 사람들도 많습니다.
부모를 잘못 만나 술집에 팔려 가는 딸도 봤습니다. 종업원을 잘못 만나 사업에 실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착취만 당한 고용인도 있고, 위정자를 잘못 만나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들도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그러기에 인생은 잘 만나면 행복이요, 못 만나면 불행입니다. 상대를 괴롭히고 해롭게 하는 만남은 불행한 만남이요, 서로를 좋게 하는 것은 행복한 만남입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아침 우리 수도노회 동역자님들에게 좋은 만남 속에서 행복한 목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할/

오늘 본문이 그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써, 강도 만난 자의 이야깁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본문 25절에 보면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처음부터 잘못된 사람입니다.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께 접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
그 율법사의 반응에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되물으십니다.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그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때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버리고 도망갑니다. 이때 그 길을 제사장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를 보고도 못 본 척 피해갑니다. 또 레위인도 지나가는데 그를 보고도 피해 못 본 척 피해 갔습니다.
그 때 마침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을 하면서 그 길을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 주고 주막집에 데리고 가서 돌봐줍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했고 '자비'를 베풀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가리켜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릅니다.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은 두 데나리온을 주막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봐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 갚아 주겠소' 부탁을 하고 떠나갔습니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께서 율법사에게 '그대 생각에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그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너도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핵심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를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율법사는 율법을 지키는 것만이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율법사에게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비유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히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여기 이웃은 착한 일을 하는 이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을 살려주는 이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웃은 강도 만난 자가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를 살려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바로 이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 나그네길에서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혼에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한이 맺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고,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파탄되고, 인생이 비참하게 쓰러지는 슬픈 사연들을 우리가 종종 봅니다.
여러분! 강도 만난 사람을 누가 살렸습니까?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여러분! 인생 길에서 강도를 만나 어떤 형편에 있을지라도 그 형편에서 우리를 살려내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많은 학자들은 본문의 비유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을 합니다.
여기 강도 만난 한 사람은 아담, 즉 아담의 후손인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강도는 사탄과 마귀, 예루살렘은 낙원, 하늘 나라를 가리킵니다. 여리고는 세상, 내려갔다는 것은 타락으로 보았고, 그리고 제사장은 율법의 대표자 모세로, 레위인은 예언자들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시요, 기름과 포도주는 성령의 기름과 십자가의 보혈, 두 데나리온은 성부와 성령, 주막은 교회요, 주막집 주인은 목사요,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은 주님의 재림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할/

오늘 본문을 보면 세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①만나서는 안 될 사람이 있는데 이는 강도입니다. 강도는 안 만나야 합니다.
②또 만나나 마나한 사람이 있는데, 누구입니까? 제사장과 레위 인입니다. 유익도 손해도 없는 평범한 만남입니다.
③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데 누구입니까? 이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인생 길 가는데 험하여도 이런 분 만날 수만 있다면 참으로 행복하고 즐거운 인생길이 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땅에는 많은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서 건강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기고, 생명을 잃기도 하며 탄식하고 울고 있습니다.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강도를 만나고 있습니다. 선한 양심이 도적을 맞기도 하고, 행복한 가정이 강도를 만나서 울기도 합니다. 사업에 강도를 만나고, 건강하고 평안한 심령이 강도를 만나 근심 가운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여러분! 인간 누구에게나 강도를 만날 위험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인생행로 도처에 원수 마귀의 정략이 있고 계략이 있는데 걸리면 바로 강도 만난 자가 됩니다.

 

▶먼저 27절의 말씀을 한번 집고 넘어갑시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잘 묘사된 용어는 '죽도록 사랑하라'입니다. 신앙생활은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 죽도록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를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믿/
세상의 관심은 얼마나 섬김을 받느냐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우리 주님도 막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결론은 하나님 사랑하고 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신학자 '본 훼퍼'는 '예수님은 이웃을 위해 존재했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인류를 위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며, 주장할 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할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요일22: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20세기에 가장 존경받은 분은 든다면 '앨버트 슈바이처'박사입니다. 이유는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20세 때 '30세가 될 때까지는 예술과 학문에 정진하고, 30이 넘으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의 결심대로 30세 때 아프리카로 들어가 흑인들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 봉사했습니다.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손이 통나무를 잘라 병원을 짓는 손으로 변했습니다. 병든 몸을 만지던 그 손이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인술의 손이 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질 때 말이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가 말하기 때문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서 만민이 기도하는 곳이요, 말씀이 있는 곳이며, 은혜가 있는 곳이요, 축복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거기를 떠났다가 불행을 만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내려갔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사업이 내려가도 안됩니다. 건강이 내려가도 안됩니다. 신앙이 내려가면 정말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올라가야 합니다.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같이! /할/

▶성경에는 내려갔다가 불행하게 된 사건이 많이 나옵니다. 창12:10절 이하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바로에게 그의 마누라(부인)를 빼앗길 뻔했습니다.
룻1장에 보면,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립니다.
내려갔다는 말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성도는 신앙이 절대로 내려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특히 주막집 주인인 목사들은 신앙이 내려가서는 정말 아무것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내려가고, 기도 생활이, 감사 생활이, 봉사 생활이 내려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조심해야 합니다. 강도 만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두 길이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이 있고,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길 중에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인생은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사마리아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삽니다. /할/

 

▶이 세상사에는 살리는 운동이 있고, 죽이려는 운동이 있습니다.
인류가 한 일은 살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여 서로 죽이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살리러 오셨고, 마귀는 죽이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마귀는 인류를 타락케 해서 멸망으로 끌어가려고 합니다.
지금 인류는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진 채 매 맞아 거반 죽게 된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이 광경을 제사장도 보고, 레위인도 보고 지나갔습니다. 사실 이들은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들에게 살린 만한 능력이 없고, 강도 만난 자의 상처를 치료할 약이 없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율법으로는 생명을 살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사마리아인에게 있는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싸매고 돌보아 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의 보혈만이 우리가 살아날 수 있고, 주의 성령으로만이 살아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요10:10절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면서 이렇게 나쁜 사람이 있는가? 어떻게 피하여 자나갈 수 있는가? 지도자들이 그렇수가 있느냐고 몰아 세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도를 만난 자를 싸매 줄 것이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가진 것이 있었는데 곧 포도주와 기름입니다. 포도주는 주님의 보혈이요, 기름은 성령입니다. 여기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사마리아인으로 비유해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하셨고, 또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예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인류를 살리기 위해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신 일입니다. 아무도 강도 만난 자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지 못했습니다.
공자도 못했고, 석가도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이 없습니다. 피 흘려 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성령의 기름부음 만이 사망에 빠진 인류를 살려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에게 포도주를 붓고, 기름을 바르고, 싸매어서 어디로 데리고 갔습니까? 주막으로 데려갔습니다. 주막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오늘 주제입니다.

 

①여기서 주막은 오늘날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맡겨 주신 사람들을 돌보는 곳입니다. 교회는 주막집입니다. 예수님은 이 주막집에 그러니까 우리 목사님들의 교회에 사람들을 맡기셨습니다. 지금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창세전에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때가 되어 교회에 맡겨진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그런데 그 성도들이 다 강도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의 강도를 만나 주막에 왔고, 어떤 사람은 사업에 강도를 만나 다 망해 버리고 주막에 왔고,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환경에서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주막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찾아온 것이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에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성령님이 인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할/
그런데 여러분! 주막에 왔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왜? 오늘 본문에 강도 만난 자가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 주막으로 인도되어 깨끗하게 치료받고 살아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어떤 형편에서든지 강도 만났다 할지라도 오늘 이 자리가 치료받고, 해결 받고, 능력 받고, 축복 받는 자리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믿으시면 아멘!

 

②목사는 주막집의 주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하여 주막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한 것은 사마리아인이요, 주막집 주인은 그를 돌보고 있습니다. 제사장도 가고, 레위인도 사라졌습니다. 사마리아인도 떠났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인이 떠났다는 말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의미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주막집에 맡기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피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의 기름을 인류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지금 교회는 주막집에 되어 주님께서 맡기신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막집 주인은 목사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목사님들의 교회(주막)에 성도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양이 아니고 주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주막집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봐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 갚아 주겠소' 그리고 떠나셨습니다. 여러분! 기대하십시오! 맡겨준 양들을 잘 보살피면 주님의 상금이 큽니다.

③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음식을 먹고 가는 곳입니다.
옛날 주막집은 지나가는 길손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곳이요, 술을 마시기도 하고, 길을 묻어 가기도 하고, 음식을 사 먹는 곳으로 나그네들에게 꼭 필요한 곳입니다. 주막집이 현대화 된 것이 여관이요 호텔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곳에 주막집이 있습니다.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여기서 쉬어갑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치료하고 주막집에 맡기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떠나면서 이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여기 사마리아인이 떠나면서 말한 '내가 돌아올 때까지'란 어느 때입니까? 분명히 주님께선 재림하여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분이 돌아올 때까지 주막의 주인 즉 목사들이 돌보아 주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떡을 먹이는 일입니다. 교회에 찾아온 성도들을 말씀의 떡을 먹여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생명의 떡을 먹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이 떡은 먹고 죽지 않는 영생의 떡이요, 이 떡을 먹는 자마다 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떡집)에서 나셨고, 인간의 밥이 되어 주시려고 구유(밥통)에서 나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강도 만난 나그네가 와서 말씀을 먹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소생하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주막의 주인인 목사는 설교의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 유명한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몇 편 나옵니다. 그의 첫 번째 설교는 행2:14-36절에서 나오는데 그때 베드로는 크게 두 가지를 전했습니다. '성령을 증거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의 특징은 보면 ①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설교를 통해 시사평론이나 교양이나 정보를 얻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큰 착각에 빠진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TV나 신문, 잡지, 주간지, 월간지, 교양 대학'에서 찾아야 합니다. 설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구속과 복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언제나 '예수님이 주제였고, 중심이었고, 결론'이었습니다.
②설교 자체가 바로 능력이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설교를 들은 후에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고, 옷을 찢고 가슴을 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도 큰 이적이지만 베드로의 설교는 더 큰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앙(생명)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앉은뱅이에 대한 이적은 한 사람을 치료하는 이적이었지만, 베드로의 설교는 많은 심령을 치료하는 이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우리는 한국의 초대교회사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가진 손 양원 목사님을 잘 압니다. 두 아들을 죽인 공산당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는 등, 사랑을 몸소 실천했던 목사님이 바로 손 양원 목사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손 양원 목사님이 부흥회를 가면 목사님을 초청한 교회에서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먼저 키가 작은데 놀란답니다. 그 당시는 교통편이 기차였습니다. 초청한 교회에서 강사 님을 역으로 마중 나갔는데 교인들이 목사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너무 키가 작아서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눈에 띄었다 해도 설마 저렇게 작은 사람이 강사는 아니겠지? 싶어 누구도 아는 척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날 밤 강단에 서면 목소리가 큰데 놀라고, 세 번째는 그의 설교의 능력에 놀란다고 합니다. /할/

▶'설교의 바른 정의'는 무엇인가?
눅24:13-49절을 보면 '성경이 무엇인가?'를, 그리고 '설교가 무엇인가?'를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배경은 주님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고, 그 밤에 예루살렘의 열 한 사도 앞에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고 자신의 부활을 증거한 말씀입니다.
눅24:27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기의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는 '철저하게 설명하다'는 뜻으로, '번역하고 해석해서 철저하게 설명하는 설교'를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고, 해석하여 철저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에 대하여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 말씀에서 자세히 설명해 주신 것을 해석해 주셨습니다. 곧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벗어난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⑴성경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눅24:32절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여기 '풀어주다'는 말은 성경 말씀을 열어 해석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⑵영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눅24:31절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엠마오로 내려왔던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여기의 '눈이 밝아져'는 앞에 '풀어 주다'와 같은 단어로 눅24:45절에서 마음을 '열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여기서 눈은 육신의 눈이 아닌 영안의 눈을 말합니다. 두 제자의 영안이 밝아져 부활의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행9:18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여기 '다시 보게 된지라'가 영안입니다. ▶설교는 영안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⑶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눅24:45절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여기 마음을 '열어'는 앞에서 살펴본 '풀어 주다', '눈이 밝아지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을 풀어 주시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곧 영안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로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이루는 핵심적인 단어입니다.
⑷설교의 결론은 증인되게 하는 것입니다.
눅24:48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이 일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줄로 믿습니다. 사명은 크게 두 가지인데 '예배와 선교(전도)'입니다. 예배드리는 일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명이라면, 전도는 인간이 세상을 향한 두 번 째 사명입니다.

 

④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쉬어가며 안식을 얻는 곳입니다.
나그네들이 먼 길을 가다가 피곤하면 주막집을 찾아가 쉬고 갑니다. 또 비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지면 이곳에서 쉽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쉬어 가는 곳이요, 비바람을 피하는 곳입니다. 인생 나그네들이 천성을 향하여 갈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가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친정 집과 같아야 합니다. 옛날 여인들은 시집살이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그때 여인들이 친정 집에 가서 어머니 품에서 안식을 얻고 돌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주막집 주인은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 친정 어머니 같은 자비로운 어머니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돌봐주고 들어주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막집 주인은 기도가 필수입니다. 맡겨준 양들을 돌보는데 기도가 필수입니다. /아멘!/

 

⑤주막집은 나그네들이 술을 마시는 곳입니다.
교회는 신령한 주막입니다. 주막집은 술 취한 사람들이 많아야 소문이 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주막에 성령님을 보내시어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새 술에 취한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인색한 사람도 술 마시면 후해집니다.
주막집 주인은 나그네들이 주막에 와서 술 마시고 흥겹게 놀다가기를 원합니다. 목사는 여러분들이 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하기를 원합니다.
술은 새 힘을 줍니다. 술을 마시면 강하고 담대한 힘이 솟아납니다. "네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강하고 담 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 기었느니라" 이런 힘이 새 술에서 나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시기를 바랍니다.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도 안 되는 세상!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만 됩니다. 성령의 새 술에 취해야 합니다. 술은 인생을 즐겁게 합니다. 노래를 하게 하고, 춤을 추게 합니다. 술은 놀이마당을 제공해줍니다. 한마디로 술 취하면 세상 살맛이 나듯이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모든 것이 똑 소리납니다.
그래서 "성령 받아라! 성령 받아라!" 외치는 것입니다. 행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힘으로도 할 수 없고, 능으로도 할 수 없으나 오직 여호와의 신으로 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주막집 주인인 목사님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님들이 불이 있어야 성도들에게 불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교회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주막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이웃이 누군 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던 길 멈추고 주막인 교회로 데리고 와야 합니다. 세상살이 지친 자들이 교회(주막)에 와서 쉼을 얻고 용기를 얻어 새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먼저 믿는 우리가 돌보아야 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가 버렸던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두 번째 그냥 지나가 버린 사람도 레위 사람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은 당시 그 사회의 지도층이었고, 솔선해서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한편 두렵기도 하고, 한편 귀찮기도 하고 해서 그냥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기를 거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지나간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볼 때는 그렇게도 부정스럽고, 죄인 취급을 받던 사람입니다. 죽어 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안고 그냥 돌아갔다고 해서 하등 문제가 될 사람이 아니고 비난을 받을 대상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참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강도 만난 자에게 누가 참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는 참된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 강도 만난 자를 주막으로 인도한 사마리아 사람이 참된 이웃입니다. /할/아멘!/ (2009년 6월 14일 수도노회 월례회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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