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설교, 이렇게 준비하세요 장운철 kofkings@amennews.com 여름 행사가 끝났나 싶더니 금년에도 곧바로 추석 명절이 다가왔습니다. 목회자에게 긴장의 끈을 풀 수 없는 시간이 이어집니다. 추석이 지나가면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내년을 준비해야 하는 각종 회의와 수련회도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행사들을 앞에 두고 설교를 준비하는 기쁨이 조금 더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편집자 주> ① 추수감사절(추석)의 신학적 이해 1. 감사절의 유래 한국교회에서는 그 동안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왔다. 이것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대서양을 건넌 뒤 미국이라는 새 땅에 이르른 다음,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며 어렵게 일구어 놓은 첫 번 수확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눅ㄱ교회는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이 개척한 새로운 교회였기 때문에 미국 교회 제도를 그대로 수용해 왔던 것이다. 감사절의 경우만 해도, 미개한 한국 땅에 처음 도착한 미국 교회 선교사들은 자기들 조상이 지키던 그 감사절을 그대로 느끼면서 한국교회 에서도 같은 때를 감사절로 지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1월 하순이면 계절적으로 찬서리가 내리고 들판은 썰렁하며 추수나 수확과는 거리가 먼 때다. 그래서 최근 한국의 많은 교회들은 미국의 절기를 그대로 따르기 보다는 한국 교유의 가을 추수절기인 한가위 때를 감사주일로 지키기도 한다. 한가위는 음력 절기이다. 이것은 농사와 관련된 절기이며 우리 조상은 예부터 음력과 관련된 절기에 맞추어 씨 뿌리고 김매고 수확하며 거두어들이는 일을 해왔다. 추수감사절 역시 농경 절기다. 구약성서 역시 이스라엘의 감사절은 농사와 관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애굽기 23장 14절에는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언급된 유월절과 맥추절과 초막절이 모두 원래는 농경절기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 농사를 지어야 했다. 애굽에서는 노예생활이었으니 하루 일하면 그만큼 배급을 받았을 것이고, 광야 40년 기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으니 농사를 제대로 짓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는 자유인으로서 다른 본토인들이 해오던 대로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유월절은 원래 양치는 사람들이 봄에 푸른 추원을 찾아 양들을 이동하기 전, 그 해에 양들이 새끼를 많이 낳게 해달라고 양새끼를 담아 제사드리던 절기였다. 그리고 무교절은 누룩 없이 만든 빵을 먹는 절기인데, 새 곡식을 뿌리기 전 굼안에 있던 오래된 누룩을 다 버리고 누룩 없이 빵을 해먹던 절기였다. 유월절과 무교절이 원래는 별개의 절기였으나 이스라엘에서는 이들이 합쳐 하나의 절기가 되었으며, 그뿐 아니라 여기에 역사적 의미가 가미되어 ‘애굽으로부터의 역사적인 탈출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의미도 지니게 되었다. 맥추절 또는 오순절은 유월부터 50여 일이 지난 다음에 지키는 추수절이다. 우리 월력으로는 6월이나 7월에 해당할 것이다. 이 무렵이면 밀과 보리 등 햇곡식을 거두어 드리게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맥추절을 감사절로 표기하고 있다. ‘맥추절을 지켜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23:16). 후일에는 이 날을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율법을 만든 것을 기념하는 날로 지키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름에 맥추절을 지키는 교회가 더러 있다. 물론 예전에는 보리 농사를 많이 지었고 또 춘궁기의 보리고개를 넘긴 다음 거두어 드리는 수확인 만큼 감사의 마음도 그지없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 보리 생산이 줄어들고 또 농약이 섞인 수입된 밀가루로 빵을 만들기도 하는 현실이다. 이스라엘이야 농경사회니까 맥추절 준수를 의무화했겠지만 우리네 도시에선 보리농사와 거리에 먼데 굳이 맥추절이라는 행사를 지켜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신약에서는 오순절 또는 성령감림절의 의미가 더 크게 부각된다. 따라서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초막절은 가을에 지키는 추수절이다. 이 절기의 시적은 명시되지 않았으나 우리 달력으로는 가을 중 첫과일을 거두어 드리는 때로 알려지고 있다. 포도를 많이 재배하는 지중해 연안에서 마카스 축제가 성했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에서도 여러 가지 과일을 많이 수확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막절이란 이름은 본래의 농경절기와는 먼 이름이다. 초막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를 유랑하는 동안 초막에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추수절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로는 개역성서가 ‘수장’(신 16:13), 영어로는 ‘ingathering’이란 표헌을 사용함으로써 거두어 드리는 때임을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모두 추수절이며 또 감사절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본토민의 농사절기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여기에 자리들 고유의 역사적 의미를 첨부하여 농사를 짓던, 짓지 않던 그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때로 삼고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신명기 26장에 묘사된 감사절 예배 의식을 검토하며 그 의미를 찾아보도록 할 것이다. 2. 땅에 대한 감사 모세는 신명기 26장 서두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간 다음 그곳에 정착하게 되고, 또 그 땅에서 나는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두어 드린 후에 예물을 광주리에 담아 성전에 찾아가 감사예배를 드리라고 명하고 있다. 여개의 감사절이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3대 절기 중 어느 것에 해당되는 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개역성서의 ‘맏물’(신 26:2)을 표준새번역이 ‘첫 열매’라고 번역했듯이 히브리어의 ‘프리’가 과일이란 의미도 있기 때문에 수장절에 해당될 것이다. 본문은 어느 특절 감사절을 지정하기 보다는 그 땅에서 거둔 ‘농사물의 첫 열매’가 생겼을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문맥으로는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먼 훗날에 되어질 일을 내다보며 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때에 어떻게 예배드려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모세의 가르침을 듣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소개된 것이 감사절 예배의 예배 문구라고 한다면 우리는 두 가지 신앙고백문을 발견하게 된다. 그 현재는 “내가 이 땅에 이르렀나이다”(26:1)이고, 두 번째는 “내가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26:10)라는 것이다. 감사절 예배에서는 토지 소산의 맏물에 대한 감사가 앞서야 할 것인데도 본문에서는 그것을 두 번째에다 두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에 이르게 된 것을 먼저 감사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선 “내가 이 땅에 이르렀나이다”라는 고백은 하나님의 신설성에 대한 고백이며 또 감사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품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자”(창 12:1)고 한 이래 거의 400여 년만에 이스라엘은 파란만장한 어려운 시절을 다 거치며 이제야 그 약속의 땅에 도달할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오랜 기간 암허의 생활을 겪었다. 유괴되었던 아기가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몇날간의 악몽을 되새기듯 이스라엘은 “애굼사라밍 우리를 학대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켰다”(신 26:6)고 털어 놓는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조각배로 대서양을 건너며 많은 목숨을 잃고 또 인디안들의 습격과 처녀지의 개간으로 인한 모든 어려움을 겪었듯이, 이스라엘도 풀 한 포기 나지 않고 물 한 모금 마실 것 없는 불붙는 듯한 뜨거운 광야를 40여년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땅”(26:9)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이 땅에 이르렀나이다”라는 고백은 이제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감사의 고백인 것이다. 우리 역시 인생의 한 지점에 서서 과거를 돌이켜 볼 때 “내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빈 몸으로 세상에 나와서 부모 덕에 공부하고 직장생활하며 한 가정을 이루어 한 나라의 시민으로 떳떳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땅에 이르렀나이다”라는 것은 또한 땅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내가 이 땅에 이르렀나이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내게 이 땅을 주셨습니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예배라는 그의 고백문에서 그가 이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이스라엘이 도착한 팔레스타인은 결코 그처럼 풍요한 땅이 못되어 오히려 척박한 땅이라고 말한다. 원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고난을 건너가 발붙인 곳은 중부 산악지대였다. 그곳은 신명이 11장이 말하듯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은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11:10-11)과 같은 곳이 아니었다. 애굽에서는 풍부한 나일강의 물을 얼마든지 끌어올려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나 팔레스타인에서는 산과 골짜기가 많기에 비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천수답이 많아 비가 제때에 오지 않으면 농사에 지장이 많았기에 최근에는 여러 곳에 댐과 저수지를 만들어 농업용수로 활용하게 된 것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심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신 8:14).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만 몰려드는 오늘 우리의 사회는 온 도시가 온 통 콘크리트 아파트 속으로 덮혀 어느 곳 흙 한 줌을 만져보기 힘들게 되었다. 도시의 어린이들이 흙이 가진 생명력과 신비감을 느껴볼 수 없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씨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 꽃이 되고 열매가 맺히며 또 잎이 떨어지는 자연의 이치를 접할 때 인간은 자연, 즉 토양의 생명력에서 어떤 놀라운 마술적인 힘을 느끼게 된다. 가나안의 바알 예배가 바로 이 같은 자연의 힘을 예배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연 자체가 신이 되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야훼신앙은 이를 철저히 거부하며 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인간에게 주는 선물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 교회절기프로그램,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4, p.330-334 ② 제목: 주는 감사의 근원 성구: 시편 30:1-5, 고린도후서 12:7-10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진수로서보다는 인간에 관한 진술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복음을 받은 우리 인간(서민)들이 하나님이 우리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방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한 신앙고백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정론은 미래를 예언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역사하였는가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삶을 돌이켜 볼 때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사랑해 오셨고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 있는 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 속에서 우리는 감사, 겸손, 희망 이 세 가지로 충만하게 됩니다. 칼빈이 예정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중대한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억하고 있는 성구로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생기는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피해나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차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으려면 일상의 차원을 뛰어넘는 영적 차원의 감사에까지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영적인 축복입니다. 나의 생명을 파멸하는 존재가 아니라 구원받는 존재로, 허무한 삶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인생으로 아침이슬처럼 끝내 사라져 보리는 일시적 존재가 아니라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평과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이루신 나라에서 영원토록 함께 살아가는 불멸의 존재로 만드시는 축복이 우선순위에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기반 위에서 믿음의 확고한 터전 위에서 건강한 몸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이웃을 돌보며 더불어 함께 살 수 있게 하기 위한 축복이 뒤따릅니다. 여기에 감사와 겸손과 희망이 있습니다. 청교도들의 추수감사제에 대한 새 안목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조상대대로 살아온 땅을 빼앗긴 인디언의 처지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백인들의 추수감사제가 인디언에게도 역시 축제가 되는 때, 추수감사절의 의미는 보다 아름다워지고 영원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한쪽의 축제와 감사가 다른 쪽에 비통과 저주를 안겨주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나의 감사의 조건이 이웃사람에게 고통의 조건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강대국의 농민들이 잉여농산물을 약소국가에 우격다짐으로 팔아넘겨 약소국가 농민들의 생활기반을 빼앗고 헤어날 수 없는 궁지에 몰아넣으면서 얻어진 수익을 축복으로 알고 감사하는 행위는 이미 기독교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탄적인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감사의 차원을 좀더 근원적인 데에 두어야 합니다. 아시시의 성인 프란시스의 ‘태양의 노러를 음미해 봅시다. 우리가 프란시스의 영성을 배우고 이해한다면, 오늘날 오염과 공해로 가득한 세계를 어떻게 하며 그의 참된 정신을 어떻게 실천에 옮겨야 할까요? 감사의 깊은 뜻을 위해서 우리 주변의 모든 일을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되도록 만들어가야 합니다. 자연에 대해 공해를 막아야 하겠으며, 억울한 일로 고생하는 자들을 위해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등의 분야에서 불의와 부정과 부패와 오염을 막아야 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세계로 창조해 가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견디기 힘든 악한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주님께 기도했을 때, 주님은 그 고통은 근원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바울에게 주시는 방식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은 감사에 넘쳐 “그리스도를 위해 약해지는 것으로 만족하며, 모욕과 빈곤과 박해와 곤궁을 달게 받으며, 내가 약해졌을 때에 오히려 나는 강해집니다”하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어느 때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드릴 수 있는 신앙의 차원입니다. 시편기자도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저녁에는 울음이 가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편 30:4-5)고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겸손과 희망을 잃지 않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을 본받아 어떤 경우에도 감사와 찬양으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가 됩시다. 용기를 내고 일어서서 감사로 화답합시다. 주님은 감사의 구원이십니다. * 교회절기프로그램,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1994, pp.348-350 ③ 제목: 의인 노아의 삶 성구: 창세기 6:9-22 우리 기독교의 역사관은 직선적입니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친히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준비하는 자세는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자세입니다. 마태복음 24:3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 세상에 종말이 일어날 때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고 질문하니까 여러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 구체적인 예를 들으셨는데 그중의 한 예로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무시무시한 홍수심판으로 땅위에 있는 모든 생물이 다 죽었을 때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홍수심판에서 건져 주셨습니까? 1.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삶의 중심이 하나님이었습니다. 한평생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습니다. 본문 9절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그 믿음이 얼마나 철저하고 순전한가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말입니다. 환난과 역겅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노아의 믿음은 초지일관, 일편단심 끈기 있고 지조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많은 성도들은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주일날만 신자 노릇하지 나머지 6일 동안은 불신자와 똑같이 행세하며 살아갑니다. 이제 변해야 삽니다. 노아와 같이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동행하는 불변의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노아는 끝까지 바르게 살았습니다. 11절을 보면 당시의 세상은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부정, 부패, 타락, 방종이 일상화된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노아는 여전히 의인이었고 당시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세상은 색깔로 말하면 검정색입니다. 양심이 마비되고 정직이 사라지고 죄악이 만연합니다. 루마니아 작가 게오르규는 “지금은 24시가 넘어간 25시가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교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일주일동안 신문 사회면을 보고 착한 내용들은 천국에 악하고 나쁜 일은 지옥에 스크랩북을 만들어 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일주일 후 주일예배 때 숙제를 검사한 후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요?” 아이들은 “지옥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 TV뉴스를 보면 그야말로 패괴한 세상입니다. 갤럽조사에 의하면 우리 나라 사람 중 63%는 ‘정직하게 살면 잘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65%, 아내의 41%가 외도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음주량은 세계 1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피를 토하는 듯한 경고가 생각납니다. “슬프도다. 죄를 범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 패역하느냐”(사 1:4-6) 한 나라의 멸망은 경제나, 정치나, 군사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패역에서 온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주님은 이 말세에도 의인을 찾으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노아처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걸어갑시다. 본문에 있는 ‘온전한’이라고 번역한 원문은 ‘타밈’이란 말인데 건전한, 흠 없는, 혹은 진실, 성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인 노아의 온전함을 절대적인 선이거나 신적인 완벽한 순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불완전함과 연약함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파괴적이고 불순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의도의 순수성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노아의 홍수심판이 패괴한 세상에 내려졌다면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끝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세를 두려워하지 말고, 성경하지 못한 삶을 탄식하며 회개합시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저와 여러분을 노아처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실 주로 믿습니다. 3. 노아는 끝 날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120년 열심히 일해서 드디어 방주를 완성하였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순종의 산물이었습니다. 순종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코’가 지도하는 수도원에 두 명의 지원자가 찾아왔습니다. ‘프란시스코’는 그들을 데리고 농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배추를 심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뿌리는 흙 위로 드러나게 하고 줄기는 땅속에 파묻어라’ 그러자 그중의 한 사람은 시키는 대로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말하였습니다. “원장님, 배추는 그렇게 심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듣고 ‘성 프란시스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는 우리 수도원에 적합하지 않네!” 노아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22절 말씀에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는 말씀 속에는 굉장한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비록 한 구절로 된 말씀이지만 이 짤막한 말씀 속에는 120년에 걸친 노아의 인내와 믿음과 순종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남들이 수군거려도 시기질투해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며 순종합시다. 노아의 축복은 순종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비가 내리면 노아의 방주가 생각납니다. 세상이 심상치 않습니다. 끝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홍수심판을 통과한 당세 완전한 의인 노아를 바라봅시다. * 박현모 외, 추모설교집, 청우, 2005, pp.167-171 ④ 제목: 추수꾼이 됩시다 성구: 요한복음 4:35-38 추수하는 계절인 지금 우리는 고 000씨의 무덤에 옆에 있습니다. 000씨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을 추모하고 또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 말씀으로 추수와 천국과 복음 등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오늘 성경에 추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말씀 모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성도가 구원 받는 것을 추수에 비유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면 받은 세상이고, 곡식은 사람들이고, 추수하는 일꾼들은 제자들과 전도하는 사람들이며 또 열매는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는 사람들이며, 곡식 창고는 천국이며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추수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때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죄인들이 예수님 믿고 죄용서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추수할 일꾼을 더 많이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할 일꾼이 많아지도록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때부터 추수는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뒤를 이어 또 많은 전도자들이 나타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또 그 뒤를 이어 계속하여 전도자들이 나타나 전도하였고 더욱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추수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도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 육신이 잠들어 있는 000씨도 전도하는 추수꾼들의 수고 덕분에 영혼은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알곡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큰 복이 주어지기까지 수고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죄 없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추수 때 곧 구원받는 때가 이 세상에 도래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배운 제자들이 추수꾼들이 되었습니다. 12제자와 오늘 읽은 성경의 70인의 제자들이 추수꾼들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제자들은 핍박 중에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전도로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다음에는 제자들의 제자들입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추수꾼으로 자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수고를 했고 그들은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온 세계에 복음이 전하였으며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그 복임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고, 우리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지금도 계속 전해지고 있습니다. 추수꾼들이 곳곳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추수하는 계절이 점점 지나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추운 겨울이 올 것입니다. 천국 문이 닫히고 더 이상 추수하지 않는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때에는 천국에서 추수한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잔치가 열릴 것입니다. 하나님과 성도들과 천군천사들이 함께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추수를 많이 한 일꾼에게 상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쭉정이는 불에 태워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000씨가 천국에 간 것과 또 우리도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버려져 불에 태워질 위기에 있는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이 이 추수 때에 복음을 믿지 않는다면 가장 불행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윌리엄 부스가 어느 날 술에 취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 술 취한 사람이 빈정거리며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내가 정말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것 믿는다면 당신처럼 이렇게 소극적으로 전도하지는 않겠소. 나라면 더 열정적으로 전도할 거란 말이요.”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윌리엄 부스는 그때부터 매우 적극적으로 전도하였고 1878년에 구세군을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1. 제목: 온전한 감사 성구: 하박국 3장 16절-19절 찬송: 305장 추석(중추절)의 의미는 한 해 동안 농사한 곡식과 과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감사라고 하는 단어는 생소한 단어가 아닙니다.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요, 단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감사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혹자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하여 온전한 감사가 무엇인지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에 하박국 선지자는 어떠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그 당시 상황을 보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바벨론 대 제국이 유다를 침략하는 시대입니다. 즉,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가 멸망당하는 공포와 두려운 상황 속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온전히 감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신앙인의 참 감사가 무엇인가를 역력히 보여주는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이에 비해서 우리들의 신앙체질은 너무 허약하고 미숙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뜨거운 감사가 없습니다. 행여 감사할지라도 너무 감정적이고, 조건적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박국 선지자는 고난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온전한 감사는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환난 가운데 드리는 감사 본문 16절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가올 환난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우면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으며, 내 몸의 처소가 떨린다고 고백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박국 선지자는 그런 환란을 눈 앞에 두고도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환란 가운데서 드리는 감사, 찬양, 이것이 온전한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한 소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아마비로 인해 걷지 못하고 언제나 휄체어에 의지하는 한 소녀가 늘 기쁘고 맑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밝게 살 수 있나요? 그러자 그 소녀가 말했습니다. “비록 제가 걷지는 못하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음을 감사하고,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어 감사하고, 아빠,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걷지는 못해도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비록 걷지 못하는 불구의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모습, 우리에게 도전을 주지 않습니까? 환난 가운데 찬양과 감사를 돌리는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없음에도 드리는 감사 본문 17절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먹을 것도, 양식도, 사업장도 모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철저하게 부서진 인생을 의미합니다. 가정으로 표현한다면 풍비박산된 가정이라고 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정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성공하고 풍성한 가운데는 쉽게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없는 고난 가운데 감사하며 살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감사는 비록 가진 것이 없을 지라도, 즉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 드리는 감사입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10명의 문둥병자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0명이 다 고침을 받았으나 9명은 그냥 가고 한 사람, 사마리아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께 감사했다는 내용입니다. 그중 16절을 보면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한 명의 문둥병자가 무엇을 가지고 와서 사례했겠습니까? 금은보화를 가지고 와서 사례했을까요? 아니요. 눈물과 진심으로 사례하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록 가진 것은 없지만, 아무 것도 없지만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드리는 감사가 온전한 감사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 마지막으로 온전한 감사는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며 사는 인생입니다. 18절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하박국 선지자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현실은 두려움과 무서움이지만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는 신앙으로 인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십시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그 은혜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잊고 살지는 않습니까? 한 번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길 원합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나의 힘,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보며 온전히 감사하는 가정이 되길 소원합니다. 온전한 감사는 구원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 구원을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민족 고유의 명절인 추석(중추절)을 맞이해서 풍성함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인생에 환난이 닥쳐와도, 비록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을 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며 온전한 감사를 할 수 있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제목: 감사하자 성구: 마태복음 18잘 15-20 찬송: 78장, 313장 오늘은 즐거운 민속 명절인 추석입니다. 이렇게 모여 예배하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할아버지나 할머니 등 어른들이 아이들을 버릇없이 만든다는 통설이 있지만 어른들이 계시고 가족이 있다는 것은 우리 인생에 커다란 울타리 역할을 해줍니다. 더구나 이렇게 믿음을 갖고 둘러 앉아 예배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요.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큰 은혜주시길 사모합니다. 아주 맑은 연못에 개구리들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개구리들은 늘 평범한 삶에 지루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간구했습니다. “저희들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 주세요” 하늘은 연못에 커다란 통나무를 던져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개구리들은 통나무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통나무 주변에는 애벌레, 정벌레, 지렁이들이 모여 살게 되어 맛있는 먹이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구리들은 몇 달이 지나자 시들해졌습니다. 그 동안 맛있게 먹은 벌레들에 싫증을 느낀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통나무에 대해 불만을 품고는 그래서 다시 하늘을 향해 빌었습니다. “좀더 멋있는 선물을 주세요” 그러자 하늘은 연못에 식욕이 왕성한 큰 뱀을 던져 주었습니다. 개구리들은 멋도 모르고 물뱀을 크게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물뱀은 개구리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습니다. 몇 달 후, 연못에는 단 한 마리의 개구리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 곧장 실증을 느끼고 늘 새로운 것을 찾곤 합니다. 그러나 감사가 없는 삶은 금방 싫증나고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은 교회에서 설교할 때나 기도하실 때마다 날씨를 주제로 늘 감사했답니다. 좋은 날은 당연히 감사하고 비오는 날이나 바람부는 날에도 여전히 감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는 눈보라가 마구 달려드는 악천후 기후였습니다. 그런 날은 성도들도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결석하기도 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이런 날씨에도 과연 우리 목사님이 감사기도를 하는지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그날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이런 함한 날씨는 오늘만 주시니 감사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아멘”하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어느 날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서 감사할 이유를 몇 가지 찾아보겠습니다. 첫째로 기도할 수 있음에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살다 보면 어려운 때가 꼭 있습니다. 나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때를 만날 때도 있습니다. 답답하고 막막하고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옵니다. 그럴 때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절망하거나 크게 낙심하고 술이나 마시면서 신세타령을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에게는 기도가 있습니다. 기도가 있음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경험하십니까?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18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땅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로 하나님의 역사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음을 감사합시다.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분명히 도우십니다. 늘 감사하기 바랍니다. 둘째로 함께하는 사람들 때문에 감사해야 합니다. 19절의 중요한 키워드(Key word)는 ‘합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즉,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이 이루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함께하는 가족을 주셨습니다. 함께하는 성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친구와 동역자도 주셨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을 인해 감사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께서 함께하심에 감사해야 합니다. 20절은 바로 ‘임마누엘’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사실은 주께서 함께하셨기에 그 동안 잘 지냈습니다. 때로 어려울 때는 혼자인 줄 알았지만 결국 하나님이 도우셨기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주변에 권력있는 사람, 넉넉한 부자, 무엇인가 힘 있는 사람, 어느 기과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 함께해 주는 것도 때론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원히 나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진정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이 시간 기도하게 하심에 감사합시다. 내 주변에 가족과 친구와 동역자 주셨음을 감사합시다. 임마누엘로 주님이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고 감사합시다. 좋은 멸절이 될 줄 믿습니다. 3. 제목: 노아의 예배 성구: 창세기 8장 20- 9장 2절 찬송: 278장, 34장 아프리카 밀림에서 가장 강한 동물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개미입니다. 개미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면 그 길이가 무려 2-3킬로미터나 됩니다. 밀림의 맹수들도 개미 떼를 발견하면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숲으로 도망한다고 맙니다. 물론 몸집이 가장 크다는 동물인 코끼리도 겁을 먹습니다. 그런가 하면 밀림의왕이라는 사자도 개미가 이동하는 반대 방향으로 쏜살같이 도망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개미를 무서워할까요? 잘못 걸리면 영락없이 놈들의 밥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수십만 마리의 개미가 동물의 몸에 붙어 살을 뜯어 먹으면 그것을 견딜 동물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맹수들이 개미를 두려워하는 것은 개미가 힘이 세기 때문이 아니라 개미의 무서운 협동심 때문입니다. 개미는 지극히 작은 벌레 불과하지만 수십만 마리가 힘을 합쳐 코끼리를 공격하면 단 하루만에 앙상한 뼈만 남는다고 합니다. 협동심은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하나님이 가족들을 주신 것은 가족 간에 서로 협력하여 삶의 위협적인 맹수들을 물리치라는 섭리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협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움도 이기고 고난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추석을 맞아 가족과 함께 예배드리는 이 귀한 시간 우리 모두 협력하고 도우며 살기를 결심합시다. 오늘 성경의 인물은 노아입니다. 홍수 심판을 겨우 빠져 나온 노아의 가정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택해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노아의 감사예배를 받으시고 그 가족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노아처럼 일년 동안 열심히 살다가 추석 명절을 맞아 감사하며 예배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가정처럼 복을 주실 것입니다. 첫째로 노아의 가정은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들은 방주를 만들 때도 함께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주를 다 지은 다음 가족들 모두 함께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방주에 나와서도 함께 예배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9:1에서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가족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배를 드리도록 기도합시다. 둘째로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께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전에 하던 습관대로 정성껏 제물을 드렸습니다. 노아의 가족이 홍수 심판을 견디고 나와 자신들을 위해 할 일도 많았을 것이고, 궁금한 것도 많았을 것입니다. 예전에 살던 집은 어찌 되었을까? 예전에 알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을까? 등 관심이 많았을 텐데 이들은 오직 하나님께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예배에 우선순위를 두는 가정에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마태복음 6:34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항상 예배를 먼저 드리는 가정이 되었으면 합니다. 셋째로 노아의 가정은 제물을 정성껏 드렸습니다(20절). 정성을 다해 드린 예물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그 홍수 심판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최선을 다해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 제물들을 하나님은 흠향하셨다고 합니다. 구약시대이므로 짐승으로 제무을 드린 것입니다만 오늘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즉 내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모두 드립시다. 하나님이 받으시고 복을 주실 것입니다. 넷째로 감사예배를 드린 노아의 가정에 복을 주셨습니다(9:1). 노아의 가정이 예배를 잘 드렸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는 매우 엄격했습니다. 제사를 잘못 드리다 죽은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제사장이라도 잘못 제사를 드리면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형식적으로나 외식적으로 예배를 드려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잘 드린 가정은 복을 받음을 믿고 우리 가정들은 언제나 예배를 정성껏드려 복을 받기 바랍니다. 이 추석날 모여 예배드리는 우리 가족 모두는 노아의 가정처럼 언제나 예배가 우선되기 바랍니다. 온 가족인 빠짐없이 예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정성껏 예배해야 하겠습니다. 항상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는 노아 가정처럼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4. 제목: 인생은 무엇인가? 성구: 욥기 7장 1-10절 찬송: 326, 363장 유명한 작가인 헤르만헤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이란 책을 보면, 젊은 시절에 정원을 돌보는 일은 마치 노동처럼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정원 일의 즐거움을 다시 회복한 것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보금자리였던 스위스의 몬타뇰라에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나이 오십이 넘어 다시 정원 삽과 물뿌리개를 들면서 그는 “이제부터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한가롭게 즐길 것이며, 수풀을 개간하고 곡식을 재배하기보다는 가을의 다는 장작불의 푸른 연기 곁에서 꿈꿀 것이다”라고 다짐하고 실천합니다. 헤르만헤세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 인생 경작과 같다고 합니다. 모종삽이 인생의 황폐함을 갈아주듯 인생에도 모종삽이 필요하며, 정원의 농부와 같이 느긋하게 꽃 필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하며, 즐거움으로 정원 일을 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누구든지 욥기를 읽으면 인생의 많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이 욥기를 읽고 힘을 얻습니다. 오늘 본문도 고통 중에 있는 욥의 인생고백입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성경이 가르쳐 주는 진리를 발견합시다. 첫째로 인생은 전쟁과 같다고 합니다(1절). 욥은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고 고백합니다. 정말 어떤 사람에게는 인생이 전쟁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특히 수많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날마다 출근하여 일하는 것과 사업하는 것이 정쟁과 다를 바 없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인생과 같이 사는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에베소서 6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씨름은 형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의 악한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엡6:12). 인생은 전쟁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우리는 신앙의 전신갑주로 무장을 잘 해서 인생 전쟁에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인생은 베틀의 북과 같다고 합니다(5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업이 보내는 구나”고 했습니다. 여기서 베틀의 북이란 베를 짜는 베틀에 딸린 부속품의 하나로 날의 틈으로 오가며 옷감이 짜지게 하는 도구입니다. 숙련된 아낙들은 베틀 북을 재빨리 날줄 사이에 넣고 지나게 해서 섬유를 만들어 냅니다. 욥은 인생을 마치 베틀의 북과 같이 빠르며 꽃처럼 쉽게 시들고 그림자처럼 빨리 지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인생은 베틀의 북처럼 신속하게 빨리 지나갑니다. 봄이 시작되나 싶었는데 벌써 가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 빠른 세월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렇게 빠른 인생 가운데서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아껴 쓰는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엡5:16). 셋째로 인생은 구름이 사라짐 같다고 합니다(9절).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옛 사람들은 인생을 구름에 비유해 노래했습니다. 생겼다가 곧 사라지는 구름처럼 인생이 태어나지만 곧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구름 같은 한평생을 살면서 분명한 삶의 목적을 가지지 않으면 이리저리 흔들릴 것입니다. 당장은 힘들어도 하나님이 우리 가족들을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즐겁게 인생을 삽시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은 주님만을 붙들고 믿음 안에서 삽시다. 잘 아는 것처럼 북미와 남미는 경제력에 있어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차이가 많이 납니다. 왜 북미는 세계를 호령할 정도로 부강한 나라인데 남미의 많은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까요? 이 질문에 어떤 역사학자는 흥미있는 주장을 했습니다. “북미에 도착한 청교도 선조들은 하나님(God)을 찾아왔으나 남미에 찾아온 스페인과 포루투갈 선조들은 황금(Gold)을 찾아왔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북미를 찾아온 선조들은 하나님을 찾았더니 금도 얻었는데 남미의 선조들은 금을 찾았더니 하나님도 잃고 금도 잃었다는 것이지요. 이 추석날 우리 인생을 생각해 봅시다.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 인생 모종삽인 말씀과 기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십니까? 욥이 말한 것처럼 인생이 전쟁과 같고, 베틀의 북과 같으며, 구름 같은 인생이지만 즐거움으로 인생을 사십니까? 그렇다면 나와 여러분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5. 주제: 기쁨의 잔치 성구: 신명기 16장 13절-15절 찬송: 310장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에서도 추석에 해당하는 절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초막절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단합니다. 한 해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매년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무려 7박8일에 걸쳐서 감사 절기를 지켰습니다. 좋은 집에서 편하게 지내며 감사한 게 아니라 이런 들판에서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지내며 감사했습니다. 초막절은 두 가지의 감사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조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초막생활하던 것을 기념하며 믿음의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초막 생활하듯이 나그네로 이 땅에 왔다가 영원한 집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일년 동안 거둔 곡식을 초막에 저장하며 한 해 동안 추수하게 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는 말로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향해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크게 외친 후 끝나는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성경은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감사를 표현하고 있을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구체적인 감사의 실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는 절기를 하나님 앞에서 지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고향에 계신 우리 부모님이 가장 원하는 것은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얼굴, 손자들 얼굴 바로 우리 얼굴을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 얼굴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저마다 유일한 독특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덜 감사할 것도 없고 더 감사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 모습 그대로에 만족하며 내 모습 그대로 하나님 기뻐 받아주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리도 온 가족이 모여 성묘하며 하나님께 먼저 예배하지 않습니까? 두 번째 감사의 실천은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14절 끝부분에 보면 ‘연락하되’라는 말이 나옵니다. 연락을 하라는 뜻이 아니라 잔치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잔치는 모든 이웃이 함께하여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구약의 다른 제사는 다 하나님께 온전히 태우는 제사이거나 제사한 후 얼마간은 제사장의 몫으로 돌리는 제사인데, 유독 화목제는 제사의 목적이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이 제사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지려면 해지기 전에 그 모든 음식을 나누어 먹어야 합니다. 싸 가서도 안 되고 다음 날로 남겨서도 안 됩니다. 그래야 그 제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됩니다. 소 잡고 양 잡고 해서 제사드렸는데 그 큰 동물 잡아서 남기지 않으려면 모든 이웃이 다 나와 함께 먹어야 합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받은 바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어려운 이웃들을 초대하여 함께 잔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외된 이웃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삼대 약자인 나그네와 부모 없는 아이들, 남편 잃은 여성을 반드시 이 잔치에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이제 믿음 안에서 사랑 받은 우리가 우리 가족을 넘어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계기가 되어야겠습니다. 어느 작은 마을에 국밥집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아이와 할머니가 들어와서 국밥 한 그릇을 시켰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이에게 그 국밥을 건네고는 맞은 편에 앉아 깎두기 한 개만 오물오물 드시며 손자의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흐믓하게 보셨습니다. 다 먹고 나서 할머니가 계산대로 오십니다. 옷 속 이곳저곳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는 것을 보고 주인은 안스런 마음에 돈을 안 받고 싶었는데 혹시나 마음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은 “할머니 오늘은 돈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100번째 손님에게는 공짜로 국밥을 드립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와 손자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서 그 국밥집 건너편에 차길 지나서 한 아이가 앉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바닥에 큰 원을 그리고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며칠 전 할머니와 함께 온 그 아이였습니다. 손님이 한 명씩 올 때마다 큰 원에 돌을 던져 넣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국밥을 드시게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으니까 공짜 손님으로 들어갈 걸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그날따라 손님이 많지 않아서 돌멩이가 몇 개 없었습니다. 실망한 아이의 얼굴이 멀리서 보였습니다. 국밥집 주인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서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어, 김사장, 우리 국밥집에 손님들 좀 많이 데리고 와, 내가 공짜로 먹여줄테니까. 될 수 있으면 많이 와야 해”, “박선생님, 오늘 우리 집에 오셔서 국밥 좀 드시죠. 제가 오늘 쏩니다. 친구 분들 좀 많이 모시고 오세요.” 조금 지나자 가게에 손님들이 몰려옵니다. 아이의 손이 빨라집니다. 돌멩이가 늘어납니다. 40, 50, 60, 99개가 되자 급히 할머니를 모셔왔습니다. 그리고 자신 있게 아이가 말합니다. “우리가 백번째 손님이지요?” 아이는 할머니 앞에 국밥을 놓고 자신은 깍두기를 오물오물거리며 할머니가 드시는 것을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국밥집 주인 역시 그 모습을 흐믓하게 보았습니다. 아이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도 아름답고 또 할머니를 생각하는 손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국밥집 주인의 마음입니다. 두 사람만을 위한 감동의 이벤트를 준비한 주인의 마음,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재료가 아닌 하늘의 재료로 만든 따끈한 국밥으로 나만을 위한 잔치를 준비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생명을 주시고 가장 아름다운 찬양을 들려주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때론 어려움이 있으나 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어려움 너머에 은혜와 희망을 선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우리 가정은 그 기쁨의 잔치에 초대되어 누리는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그 크신 사랑 받은 우리는 이제 아직도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어두운 곳에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절망의 커텐 너머 환히 빛나는 주님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기쁨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슬픔의 커텐을 걷고 불신의 문을 열어젖히고 우리와 함께 기쁨의 잔치를 벌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 해 동안 우리 가족과 각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앞으로 주실 은혜가 더 크고 위대하실 것이기에 미리 감사합니다. 과거뿐 아니라 미래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잔치 안에 살아가는 우리 가정이 이제 우리 가정의 울타리를 넘어서 그 사랑과 은혜를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의 부모님(돌아가신 분 - 성묘지)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값진 믿음의 유산입니다. 6. 제목: 감사의 조건 성구: 예레미야 애가 3장 22-25절 찬송: 460장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외아들을 죽이시고 대신에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구나. 이 하루도 주님 안에서 주님처럼 성실하게 살아가야지 하는 감사와 결단의 기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추석을 맞이하여 한 자리에 모인 사랑하는 우리 가족에게 하나님은 불평불만보다 감사의 조건을 찾기를 원하십니다. 먼저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부모들이여, 내 자녀가 잘 자라고 있는 것에 감사합시다. 누군가가 쓴 글처럼 10대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것은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교회 잘 다니고 몸 건강하고 늘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럼 된 것입니다. 공부를 좀 더 잘 했으면 하는 것, 뭣 조금 마음에 안 드는 것 그런 것 바라보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느 라디어 프로에서 들은 것인데 수능시험 보는 날에 한 어머니가 보낸 사연이었습니다. 작년에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이가 공부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아이에게 공부, 공부 노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동생에게는 절대 공부 압력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이가 건강한 게 중요합니다. 성적이 중요합니까? 아이가 행복한 게 중요합니까? 좋은 대학 가는 게 중요합니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마음 속에 있는 불평 불만들의 까만 먼지를 걷어내고 나면 남는 것은 감사뿐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자녀 여러분, 어늘 추석을 맞이하여 쉬는 날 집에서 게임하고 놀고 싶을 텐데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애써 나와 주어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물론 친구도 좋고 재미있는 놀이, 음악도 좋지만 좀 더 생각해 보면 결국 남는 것은 가족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질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너와 함께 있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그게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게으른 사람, 어리석은 사람은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고 현재 함께 있는 사람들보다 다른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리고 지금 만나는 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하기보다 상처를 주고 냉담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와 부모 여러분,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잇는 가족에게 감사하며 그들을 위해 따뜻한 말 한 마디, 사랑의 표현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망하고 하나님의 도시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예레미야는 오히려 감사의 노래를 부립니다. 절망 저편에 있는 너무도 큰 하나님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커다란 은혜와 긍휼하심은 믿음의 눈, 감사의 왕눈으로 보면 보이는데 불평불만의 와이셔츠 단추 구멍 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뒤돌아보며 어려움도 있었고 기쁜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모두는 각자 처한 위치와 환경에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버님(어머님)의 산소에 모여 그분이 남기신 믿음과 신앙을 되돌아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보다 더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시고 지금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에 계신 그분은 나라의 어려움 속에서도 가정의 궁핍함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시고 우리 자녀를 키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다 나은 세상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이 이만큼 살게 된 것은 그 믿음 안의 소망 때문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조상을 본받아 희망을 갖고 전진하는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아버님(어머님)의 묘 앞에서 주님이 우리 가정에 주시는 커다란 희망을 바라보고 감사하는 우리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7. 제목: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 성구: 히11:38 찬송: 158, 222장 1) 세상이 이길 수 있는 힘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1절에서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정의를 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11장을 끝맺으면서 ‘더 좋은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는 ‘보지 못하고 바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자신감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달리는 것은 모험이기 때문에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선진들이 이미 이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증인들로 서있습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수신자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 땅을 등지고 외국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곳에서도 역시 심한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산업을 빼앗기기도 하고, 직장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위험을 피해 토굴에서 숨어 살기도 하고,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서 태워지기도 하고, 처자를 죽음에 넘겨야 하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수신자들에게 이미 믿음에서 승리한 수많은 증인들을 앞세우면서 신앙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의 백성들 곁에서 돕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결코 헛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권력이나 부요함, 지식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생명을 주님께 맡기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세상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사람만큼 무서운 적수는 없습니다. 그는 죽기를 각오했기 때문에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2) 믿음으로 승리하기. 우리를 대적하는 세력들은 세상을 즐비하게 서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믿음에서 이탈하게 하기 위해 도전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정도에서 넘어질 때 그들은 잔치를 벌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이미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시고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우리의 이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합니다. 혹시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 인간의 수단에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돈을 모으면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권력을 잡으면 그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힘 있는 사람이 나에게 큰 도움이다’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좇아가는 분이 계십니까? 실망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힘은 믿음입니다. 비록 보이지 않지만, 그것을 믿는 믿음이 당신을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노라고 하면서 세상적인 방법을 택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세상 사람들은 조소를 보내고 있음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새롭게 출발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8. 제목: 부모로 인한 후손의 복 성구: 삼하 9장 7-8절 찬송: 234, 291장 1) 복의 근원 사람들은 대개 어려운 형편에 처하여 고생하다 보면 편하게 살면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기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나를 인하여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오늘 추석명절 추모예배에 참석한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분을 만나고,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숱한 고생을 당하였습니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를 피해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대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왕이 된 다윗은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원수 갚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집안을 오히려 환대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삼하9:1) 얼마나 멋있는 질문입니까? 원수를 갚아도 철저하게 갚아야 할 판국에, 다윗은 은총을 베풀기 위해 남은 가정을 찾고 있습니다. 수소문을 해서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두 발을 저는 절뚝발이였습니다(삼하4:4, 9:13). 다윗은 므비보셋을 초청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성, 궁궐로 데리고 옵니다. 영문도 모르면서 공정으로 끌려온 므비보셋은 “이제는 죽었구나. 모든 것이 끝장이다”고 생각하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윗이 “무서워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므비보셋의 할아버지 사울의 전답을 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사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으로서는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자신의 심경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조부 사울이 다윗에게 행한 악행 때문에 도망치면서 숨어살던 므비보셋,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불구자의 몸으로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살려만 줘도 감개무량한 일인데, 조부 사울의 땅을 되돌려주고, 왕의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먹고 화려한 궁중에서 왕자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므비보셋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요나단의 우정어린 충성 때문에 온 것입니다. 므비보셋에게는 이 행복을 누릴 어떠한 공적도 없습니다. 오로지 그의 아버지 요나단이 다윗에게 행했던 것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2) 생명의 길을 선택하십시오.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죄와 허물로 인해 죽어야 하는 진노의 자녀가 아닙니까? 우리는 두 발을 절어야 하는 절뚝발이가 아닙니다. 죽은 개 같은 존재가 아닙니까? 당신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면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단과 같은 예수님을 인하여 우리를 은총의 세계로 초청합니다. 그분이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았고, 그분 때문에 우리는 예루살렘 성으로 초청되었고, 왕의 상에서 잔치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당신을 사울과 요나단,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삶으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집안의 불행을 초청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집안의 행복을 초청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선택 때문에 당신의 후손이 생명의 길을 걸을 수도 있고, 당신 때문에 당신의 후손들이 증오하면서 살아야 하는 불행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추석명절 추모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나로 인하여 후손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수 있는 생명 길을 선택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9. 제목: 영화와 애통 성구: 계18:7-8 찬송: 532, 545장 1) 나의 삶은 어떠한가? 몇 년 사이에 사회에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탄탄하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잘 나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무너져서 가난뱅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영화를 꿈꾸고 살아가지만 그 영화는 쉽게 물거품이 되고 있습니다. 행복이 10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꿈꾸면서 끝없이 욕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추석명절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2)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의 말로 바벨론은 세상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큰 음녀, 큰 성’으로 불리워집니다(17:1, 18:1). 하나님의 백성들을 유혹하여 세속화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들이 부추기는 것은 달콤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거리들이 우리의 눈과 마음을 멀도록 만듭니다. 큰 성이 무너지고 ‘귀신의 처소,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습니다(2절). 그런데 이 바벨론 성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을 대상으로 치부하ㅗ 영화를 축적했던 모든 자들의 무가 일식간에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울고 애통합니다(16-17). 그들은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호언장담하였지만, ‘하루 동안’에 망하게 되었습니다(7-8절). 그들이 영화를 누리고 사치한 만큼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고 맙니다. 인간의 호언장담이 소용없게 되고, 하나님의 위력적인 심판이우리의 삶에 미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호언장담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호언장담을 무색케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은 들어야 합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4-5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여전히 관심이 있으십니다. 세상에 도취되어 음녀와 즐기고 있는 악한 자들이 망하게 되는 그 심판의 순간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거기서 나오라!” 당신이 나와야 할 것이 어디입니까?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 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불의는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인간의 불의를 결코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이 받게 될 재앙을 받지 않으려면 그들의 죄에 참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3) 후회하지 않는 삶. 많은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기에 바쁩니다. 영화와 사치를 누릴 수만 있다면 부정도 할 수 있고, 양심의 소리도 외면할 수 있으며, 믿음마저도 뒤로 제쳐 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쌓아두려는 모든 영화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고 있는 부와 사치와 영화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강하신 자의 심판이 있습니다. 아무리 호언장담할지라도, 아무리 그것을 지키기 위해 튼튼한 성곽을 쌓을 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에 도취되어 이쓴 당신을 향해 하나님은 이 시간도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당신이 심판의 장소에서 나와서 그들의 불의함에 참여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눈으로 보는 것 때문에, 귀로 듣는 것 때문에, 누리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음녀를 따라가고 있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 후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추석 명절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은 무너지는 바벨론의 심판을 기억하면서 음녀와 즐기는 장소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강한 심판을 피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제목: 유언 성구: 왕상 2장 1-3절 찬송: 158, 232장 1) 신앙의 유언 사람들은 죽음이 임박하게 되면 유언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자녀들도 노년이 된 부모님이 유언장을 만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언장을 만들어 두는 것이 자녀들 간에 일어날 수 있는 불화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살아계실 때는 불효했지만, 임종 전에 남기신 마지막 유언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말하는 ‘유언’의 개념들이 주로 무엇입니까? 재산 분배의 문제가 아닙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언이라고 할 때 상속의 문제에 치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유언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2) 후손들에게 신앙을 당부 다윗,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지만, 한편으로 멋진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용맹이 있었고, 관용이 있었고, 믿음이 패기가 있었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해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도 다윗을 추앙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죽는 날이 임박하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 역시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않으려고 합니다. 조금만이라도 더 살기를 소망합니다. 특별히 성공적이고 화려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더 고통스러워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쌓아놓은 것을 놓고 가야 하는가? 이제 좀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내가 여기서 죽어야 하는갚라고 하면서 항변합니다. 지금까지 노력하고 성공했던 것들을 포기하기가 너무 아깝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얼마나 피땀을 흘리면서 벌었던 것들이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들을 포기하고 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경은 냉정히 기록합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들어서야 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가기 싫지만 그날이 이르게 되었다고 성경은 선언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언젠가 들려질 말씀입니다. 그때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재산 분배를 거룬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아들 솔로몬을 불러놓고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지키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시편 119편이 다윗의 시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을 알고 있는 다윗으로서는 아들에게 가장 남겨주고 싶은 유언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4절에 보면 그가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는 평생토록 이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형통한 비결”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체험을 통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대장부가 되라고 유언하고 있습니다. 3) 믿음의 유산을 주라. 혹시 지금까지 모아둔 것들이 아까워서 죽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번 돈이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돌아갈지 몰라서 돈거래 장부를 꺼내들고 재산 상속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자녀들이 재산분배 때문에 싸울 것을 걱정해서 재산 분재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분이 있습니까? 다윗에게서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아무리 죽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을 향해 “죽을 날이 임박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단신은 재산분배 따위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말고, 자녀들이 영적인 세계를 붙잡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바로 서있는가, 참된 형통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를 점검하시고, 그 일을 위해서 유언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남겨주는 수많은 재산 상속이 믿음의 유산만큼 중요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녀들의 믿음을 좀먹는 좀벌레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고도서> 박현모 외, 설날, 추석, 추도 장례설교모음 추모설교집, 청우, 2005 전형준, 장례 추모예배 이렇게 준비하라, 아가페, 2005 박종순 외, 장례예식설교, 한국문서선교회, 2005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코르넬리우스 반틸의 저술 목록| (0) | 2014.07.10 |
---|---|
노회 월례회 설교전문 (0) | 2013.11.10 |
청교도 혁명의 전개 (0) | 2013.11.06 |
조직신학에서 본 청교도 사상 (0) | 2013.11.04 |
조직 신학 (0) | 2013.11.0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