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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갈라디아서 강해

by 【고동엽】 2011.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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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5년판 말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에 붙이는 소개의 말(지원용)

  갈라디아서는 크리스천 자유의 대헌장,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는 크리스천의 독립선언문.

우리 크리스천의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 하나님 이외의 누구에게도 구속됨이 없는 완전한 자유이다.


✦ 시대적 배경 : “의인의 교리”의 중심점이 약화되고 그 뜻이 흐려져 가고 있는 상황

✦ 두 개의 전선 : 첫 번째 전선은 “열광주의”와의 대결

                  두 번째 전선은 “스콜라주의 신학”과 “로마교주의”


강의를 시작하며

  믿음의 교리-행위의 전통과 인간의 전통과 반대되는-를 공적으로 계속 읽고 듣는 일은 매우 필요하다. 만일 이 교리가 상실되고 사라지면, 동시에 믿음, 생명, 구원의 전체적인 지식이 상실되고 사라진다. 그러나 이 교리가 번성하면, 종교, 참된 예배, 하나님의 영광, 그리고 모든 것에 관한 바른 지식과 모든 사회적 여건들에 관한 바른 지식이 번성한다.


갈라디아에 보낸 바울 서신의 논점(論点)

  바울은 신앙, 은총, 죄 사함 또는 기독교적 의에 관한 교리를 세우려 하고 있다(19).1) 이 믿음의 의는 공로 없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인정하시는 의로서, “수동적” 의이다(20).2) 우리는 이 의를 얻기 위하여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25).

  고통을 받고 있는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은총의 약속, 즉 이 믿음의 의, 이 피동적인 의, 또는 기독교적 의 밖에서는 절망과 영원한 사망에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21).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두 가지 의는 계속될 것이다. 육은 율법의 능동적인 의에 의하여 고발을 받고, 괴롭힘을 받고, 슬픔을 당하고, 무너뜨림을 당한다. 그러나 영은 수동적인 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고, 기뻐하고, 구원함을 받는다(26).

  이것이 우리의 신학이다. 능동과 피동, 이 두 가지 의 사이에 있는 정확한 구별을 우리는 이 신학으로 가르친다(24). 육은 율법에 종속되어 있으며 율법 아래 머무는 것이다. 율법은 육을 다스리는 일만 해야 한다. ~ 양심은 복음을 통하여 의와 영생의 교제와 그리스도의 왕국에 부름을 받았다. 이 양심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평화와 의의 왕, 다정한 구세주와 중보자가 다스리셔야 한다(29).

제 1 장


  이 처음 두 장에서 그는 자신의 소명, 그의 성직, 그의 복음을 제시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35).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루터는 이 구절을 “1장의 중심주제”라고 말한다(101). 곧 여기에는 바울이 자신의 소명과 그의 사도로서의 성직을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으로 확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그가 전한 복음이 참된 것임을 증거하고 있다.



소명과 성직에 관해.


1. 복음의 반대자들의 주장


  분파주의자들은 그들의 독설을 퍼부을 장소를 물색하며 공적인 교회에는 나오지 않거나 복음이 이미 뿌려진 곳에 간다(37).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사도의 제자도 아니며 복음을 설교하기 위하여 그들에 의해 보냄을 받지도 않았고 다른 길로 들어와 스스로 자의에 따라 성직에 들어온 자라고 멸시하였다(37).

  거짓 사도들은 바울의 권위를 갈라디아의 성도들 중에서 잃게 하고 그의 교리는 의심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대들은 바울 하나 때문에 그리도 많은 교회들이 속임을 당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리라 생각하는가?” 라고 주장한다.


2. 바울과 루터의 주장


  이 교리가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종들은 자신의 소명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그는 부름을 받고 보냄을 받은 자로서 복음을 설교하는 자신에게 담대히 영예를 돌려야 했다. 복음을 설교하는 자는 그의 소명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확신케 하라. 그로 하여금 바울의 예를 따르게 하고 그의 소명을 높이게 하여 사람들 중에서 신임과 권위를 얻게 하는 것은 온전히 합당한 일이다(35). ~ 이러한 자랑은 바울이나 우리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36).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다. 이 같은 자랑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36).


  성직에 대한 이러한 자랑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에, 그 다음은 우리 자신의 성직을 발전케 하는 일에, 그리고 우리 자신과 사람들의 유익에 공헌한다. ~ 우리가 드러내어 자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과 하나님 자신의 사역 가운데 있으며, 사람들이 우리의 소명에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이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임을 그들로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무익한 자부심이 아니다. 마귀와 세상에 대항하는 가장 거룩한 자부심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눈에는 참된 의미의 겸손이다(42).


  그는 그의 복음을 어떤 인간이나 사도 자신들에게서 배우지도 않았고 그들의 허락을 받지도 않았다. 그는 하늘로부터의 소명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만족하였다(120).

  왜 바울은 복음을 사람에게서 배우지 않았고, 사도들 자신에게서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을 그리 자주 하는가? 그 목적은 거짓 사도들에 의해 미혹 당한 갈라디아 교회들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심이든 극복하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임을 그들로 확신하게 하려는 것이다(122).

  구원의 임무에 머물러 있으려면, 확실하고 거룩한 소명을 받은 자들에게 흔히 임하는 수많은 심한 갈등을 견뎌내야 한다(41).


  바울의 성직이 위협을 받고 ~ 그를 선생으로 삼았던 모든 교회들이 위협 ~ 모든 교회가 건전한 교리에 보존되게 하는 일이었다. 논의되고 있는 문제는 영생과 사망의 문제였다. ~ 바울이 이 이 모든 것을 반복하는 이유는 교회를 참되고 건전한 교리 안에 지키려는 것이다(123).

  루터는 자신들의 거룩함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것이 아닌 것을 기초로 한 것이며, 능동적인 거룩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거룩함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신성하고 거룩한 그 무엇을 가졌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즉 성직으로의 부름, 복음, 세례 등등, 거룩한 것을 기초로 하여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소명하신다. 방편을 통하기도 하고 통하지 않기도 하신다. 오늘날 하나님은 간접적인 소명에 의하여 우리 모두를 말씀의 성직에로 부르신다. 방편, 즉 인간을 통하여 온 소명이다(38).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신적인 부름이다. ~ 사도 시대로부터 이것이 세상에 있어온 일반적인 소명의 방법이다. 분파주의자들은 성령이, 가르칠 것을 그들에게 강권한다고 말한다.



참된 복음의 주장에 관해.


1. 복음의 반대자들의 주장


  분파주의자들은 이 규범(“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33:20)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중보자 그리스도를 안중에 없이하여 버린다. 하나님에게만 말한다. 그분에게만 기도한다. ~ 우리 시대의 광신자들은 성령, 환상,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괴이한 것들을 자랑한다(53).

  거짓 사도들은 ‘그리도는 집짓기를 시작한 훌륭한 일꾼이다. 그러나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모세가 그것을 완성해야만 한다’고 말한다(85).

  최근 분파주의자들은 “확실히 그들(루터)은 기초를 놓았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기초로 놓았다. 그러나 시작, 중간, 그리고 끝이 함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것을 성취하는 임무를 맡기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남겨두셨다.”고 말한다.


  우리의 대적자들(교황, 추기경, 감독들, 등등)은 믿음을 통째로 빠뜨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없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여 그들이 발명한 인간의 전통과 공로를 가르쳤다. 그들은 이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표준 위에 두었을 뿐 아니라 더 높이 올려놓았다(88).

  오늘날 열광주의자들이 우리가 복음의 사업을 잘 시작하였다고 우리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불경한 교리를 무시하고 정죄하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를 옛 교황주의자들보다 두 배나 나쁜 “신 교황주의자들”이라 부른다(94).


  거짓 사도들은 인간의 교리를 가르친다. 그것은 즐겁고 이치에 맞는 것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하여 쉬운 삶을 살고 사람들의 기쁨과 박수갈채를 얻을 수 있게 되려는 것이다(99). ~ 이들이 항상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하고 사람들에게 아첨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시금 육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박해를 피하려는 것이다. ~ 평화롭고 점잖게 살기 위하여 그들은 인간의 교리들, 말하자면 불순한 교리들을 가르친다. ~ 재산을 잃지 않으려고 그리한다(99).


2. 바울과 루터의 주장


1) 중요성

  만일 우리가 의인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50).

  은혜와 평강 - 이 두 마디가 그리스도교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50). 은혜는 죄 사함, 기쁜 화평, 그리고 잔잔한 양심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평강은 죄가 먼저 사하여지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율법이 죄를 고발하며 양심을 꾸짖고 위협하기 때문이다(51).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으면 죄 사함과 양심의 평화로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으면, 죽음 자체를 포함한 모든 고난을 인내하고 극복한다(52).

  무엇을 주셨는가? “그분 자신.” 무엇을 위하여 주셨는가? “우리의 죄”를 위함이다(59). ~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시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방편으로도 제거될 수 없는 것이다(60). ~ 우리의 죄는 너무도 크고 무한하고 정복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온 세상은 그 죄의 어느 하나도 배상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60). ~ 우리는 여기서 이 죄를 위하여 무한정 큰 값이 지불되었음을 주목해야 한다(60). ~ 이것을 주의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죄”라는 이 한 단어가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와 사탄의 왕국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고 죄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61).

  이 죄들은 첫째 돌판을 범하는 죄들이다. 이에 더하여 둘째 돌판을 범하는 육의 죄들이 있다(64). 우리가 “우리의 죄”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동참하지 않는 한, 즉 이 신앙의 교리를 가진 자와 그것을 가르치고 듣고 배우고 사랑하고 믿는 무리의 일부가 되어 있지 않는 한 우리를 위한 구원은 없다(64).


2) 강조점

  우리는 의인 교리를 충분히 납득하거나 붙들 수도 없고, 지나치게 납득하거나 붙들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강력하게 권하고 깨우친다 해도 이것을 완전히 납득할 사람도 없고 심령을 다하여 믿는 사람도 없다. 그만큼 우리의 육은 약하고 성령께 불복종한다(50).

  말로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매우 잘 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논술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고난 중에 마귀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훼손시키려 하고 우리의 심령에서 말씀을 잡아 제치려 할 때에는, 우리가 알아야 할 만큼 그것들을 알고 있지는 못함을 발견하게 된다(68). ~ 마귀는 그리스도를 순수하게 정의하는 일에 자기의 독소를 섞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믿지만 사실상 어려움을 당하는 우리의 양심이 그리스도를 폭군과 괴롭히는 자로 느끼고 판단하도록 한다. 이렇게 사탄은 우리를 속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 제사장이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밝은 모습을 쉬 잃게 된다(69).

  사람이 만일 조심 있게 구별하여 복음 안에서 율법을 찾지 말고 하늘이 땅에서 먼 것 같이 복음을 율법에서 멀리 둘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 자체로 말하면 구별이 쉽고 분명하다. ~ 그러나 양심이 갈등할 때 그리고 실제적인 일에 있어서는 경험이 많은 사람들도 이것을 확실히 붙들기 어렵다(117).


  나는 이 문제를, 오늘의 많은 오류들과 여러 분파들, 아리안주의자들과 유노미안들과 기타 이단들이 일어나 간교하게 교회를 파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간곡히 여러분에게 경고한다.

  세상은 창조자보다 이 피조물들을 더 좋아한다. 마침내 이것들을 통하여 세상은 죄를 제거하려 하고 사망에서 구원받으려 하고 영생을 얻어내려 한다(32). 세상은 일반 복지, 왕국, 제국, 종교들을 파괴하는 선동적이며 잘못된 교리를 가지고 복음을 공격한다(32).

  우리 시대에 와서 복음을 항상 박해하여 왔고 힘을 가지고 계속 지금도 박해하고 있는 폭군들, 왕들, 군주들, 그리고 감독들 외에 사탄은 그의 종인 광신적 심령들(p.10-11)로써 더욱 우리의 복음을 손상시키고 있음을 우리는 한탄하고 슬퍼한다(33).

  사탄은 그의 거짓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속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무너뜨리고 철폐하는 일을 하고 있다(90).

  그렇다면 교황주의자들, 수도사들, 수녀들, 성직자들, 마호멧 교도들, 그리고 종파주의자들이 그들 자신의 전통들, 예비적 공로들, 배상들로 죄를 없이하고 극복하려 할 때 그것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부터 우리는 모든 종파주의자들을 무익하고 사악한 것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킬 뿐 아니라 아주 없이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리 자신의 영광을 들어 올려놓는다(61).

  순결, 가난, 순종을 나는 지켰다. ~ 그리고 오직 금식, 철야, 기도, 미사 같은 것들에 헌신하였다. ~ 사탄은 그런 성자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 몸과 영혼을 파괴하는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의 모든 복을 거절하는 자들을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도 대접한다(113).

  우리가 교황청 아래 있을 때 그러하였다. 참으로 바울이 그랬던 것보다 못지 않게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향해 모욕적이었으며 모독적이었다. 그리고 바울보다 더하였다(113).

  이 서신에서 그가 목적하는 바는 믿음에 의한 의를 논하여 방어하고 율법과 공로로 말미암는 의를 거부하려는 것이다(43).


3) 의인 교리의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

  참된 그리스도교 신학은, 모세의 가르침이나 다른 가르침에서와 같이 위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고 우리의 중보자요 대 제사장으로 동정녀에게 나신 그리스도를 제시한다(54).

  그리스도가 시작한 데서 시작하라. 동정녀의 몸, 그리고 그 모친의 품에서 시작하라(55). ~ 의인(義認)의 교리를 깊이 생각할 때마다, 죄인을 의롭게 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어디서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발견할 것인지 생각할 때마다 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55). ~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적 종교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자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버지 하나님과 연결시킨다. 다른 종교들처럼 위에서 시작하지 아니하고 아래에서 시작한다(56). 그러므로 구원에 관하여 생각하거나 행동할 때는 언제나 존엄에 관한 모든 사색, 공로, 전통, 그리고 철학에 관한 모든 생각, 참으로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멀리하여야 한다. 그리고 말구유와 성모의 몸으로 직접 가서 이 아기, 동정녀의 아이를 품에 안아야만 하며 그를 바라보아야만 한다. 나시고 양육을 받으시고 자라시고 인간 사회에 다니시고 가르치시고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시고 모든 하늘 위에 승천하시고 모든 것 위에 권위를 가지신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56).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참된 하나님으로 믿는 우리의 신앙의 입증이다(57). ~ 바울은 성부께서 하시는 바로 그 동일한 일 곧, 은혜, 양심의 평화, 죄 사함, 생명, 그리고 죄와 사망과 마귀와 지옥을 이기는 승리를 주시는 능력을 그리스도에게 돌린다. 만일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면 이것은 불합리적인 것이 되고 사실상 모독적인 일이 될 것이다(57). ~ 그는 신적인 사역을 수행하신다.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그리스도는 은혜와 평강을 허락하시는 바, 이것들을 주시는 일은 죄를 철폐하고 사망을 정복하고 마귀를 발아래 짓밟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악한 세대와 사탄의 왕국이 있을 따름이다(71). ~ “세상”과 “그리스도”, 또는 세상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왕국. 세상의 왕국은 죄, 죽음, 마귀, 불경, 절망, 그리고 영원한 사망의 왕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왕국은 은총, 죄 사함, 위로, 구원, 그리고 영원히 영광을 받으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가 옮겨진 영생의 왕국이다(73).

  복음의 교리는 모든 영광, 지혜, 의 등을 인간에게서 가져다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오직 한 분 창조자에게만 드리는 것이 사실이다. 나아가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 해야 보다 안전하다(107). ~ 나의 교리는 하나님만을 설교하고 예배하는 교리이다(107).


4) 가르침의 방법

  넘어진 자들을 일으키며 아버지 같은 돌봄으로 그들의 잘못에서 다시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므로, ~ 풍성한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가지고, ~ 그들이 우리의 아버지같은 열정과 어머니같은 느낌을 보도록 하고, 우리가 그들의 구원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77). 마귀와 그의 종들, 그리고 빗나가거나 종파주의의 창시자들을 말할 때에는 사도들의 예를 따라야만 한다. 성급하고 자긍하고 날카로워야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날카롭고 거칠게 그들의 속임수에 대해 모질고 무시하며 정죄하여야 한다(77).


  율법의 의가 다스리는 곳에는 은혜의 의가 다스릴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한편, 은혜의 의가 다스리는 곳에 율법의 의는 다스릴 수 없다. 둘 중의 하나는 상대방에 양보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믿는 데로 여러분 스스로 가지 못한다면, 율법의 행위 때문에 또는 여러분 자신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용서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 그 중의 하나는 거부되어야 하며 철폐되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승인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91).

  율법을 가르치거나 행위를 확증하는 일 ~ 인간의 이성이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손상을 준다. 은총의 지식을 손상시키고 애매하게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축복을 옮겨 버리고, 바울이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복음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이 엄청난 악의 원인은 우리의 육이다. 죄에 깊이 빠진 육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는 자신을 구출할 길을 찾지 못한다(91).


  나의 교리처럼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 어떤 교리든 거짓되고, 불확실하고, 악하고, 모독적이고, 저주받고, 악마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 교리를 가르치거나 받아들이는 자들도 그러하다(98).

  육은 하나님의 약속이 참되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육은 영을 저항한다. 그러므로 육은 영을 대항해 싸운다(105). ~ 신앙을 창조하듯, 하나님은 우리를 신앙 안에 보존하신다. 처음에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우리에게 주듯이, 그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믿음을 실천시키시고, 증가시키시고, 강화하시고, 완성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최고의 하나님 예배인 안식 중의 안식은 참된 경건을 실천하는 일이며, 말씀을 듣고 읽는 일이다(105).


  하나님의 아들을 계시하는 이런 종류의 교리는 ~ 첫째는 외적인 말씀에 의해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계시된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늘에서 내려오고 성령에 의해 계시되는 신적인 말씀이다(118).

 

 

 

 

갈라디아서 강해(1535)


갈라디아에 보낸 바울 서신의 논점

 

 


1. 바울은 이 서신에서 신앙, 은총, 죄사함 또는 기독교적 의에 관한 교리를 세우려한다. 그리하여 기독교적 의와 다른 모든 종류의 의에 관하여 구분할 수 있게 한다.


2. 여러 종류의 의 : 정치적인 의, 의식적인 의(전통들이 가르치는 의), 율법의 의(십계명의 의). 이런 의들은 우리의 행위로 구성된 것들이고, 순전히 자연적 재능을 가지고 성취될 수 있는 것들이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능동적인 의이다.


3. 이 모든 것들 위에 믿음의 의, 혹은 기독교적 의가 있다. 믿음의 의는 다른 의들과 철저히 구별되어야 한다. 믿음의 의는 하나님이 우리의 공로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인정하시는 가장 놀라운 의이며, 수동적인 의이다. 우리는 받기만 하고 우리 속에 누가 와서 행하도록 맡기는 것 뿐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행하시도록 맡기는 것이다.


4. 믿음의 의는 신비 속에 감추어진 의이다. 세상은 이해하지 못하는 의이다. 사실 그리스도인 자신도 합당하게 이해하지 못하며, 더구나 유혹에 빠진 상태에서는 그 뜻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의는 항상 가르쳐야 하며 계속해서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괴로운 일을 당하거나 양심에 공포를 느낄 때 이 의를 굳게 잡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견디지 못한다. 이 수동적 의만큼 튼튼하고 확실한 양심의 위로는 없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양심이 공포에 떨고 죽음으로 두려워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공적, 가치, 그리고 율법 외에 아무 것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약함이요 비극이다. “아 나는 얼마나 저주스럽게 살았는가? 내가 좀 더 오래 살 수만 있다면 내 생활은 고칠 수 있을텐데!”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능동적 의, 즉 자기 의를 쳐다보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


6. 고통을 받고 있는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은총의 약속, 즉 믿음의 의, 피동적 의, 또는 기독교적 의 밖에서는 절망과 영원한 사망에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 이 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도 아니며, 우리가 수행하는 의도 아니며, 밖으로부터 받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의 의, 그리고 성령의 의이다.


7. 만일 우리가 율법을 무시하고 마치 율법이 없는 것 같이, 은혜 외에는 없는 것 같이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마치 약속이나 은혜가 없는 것처럼 공로와 율법의 실천이 요구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고집이 세고 잘난 체하고 심령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8. 능동과 피동, 이 두가지 의 사이에 있는 정확한 구별을 우리는 가르친다. 그리하여 도덕과 신앙, 공로와 은혜, 세속 사회와 종교가 혼돈되지 않도록 하였다. 둘은 다 필요하다. 그러나 각각 자기 한계 안에 머무르도록 하여야만 한다. 기독교의 의는 새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율법의 의는 혈과 육으로 난 옛 사람에게 적용된다.


9. 율법의 의로는 우리가 많은 것을 하였을 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된다. 우리가 율법을 다 실천하였을 때에도 우리는 율법을 성취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공로나 공적 없이 우리는 기독교적 의로 먼저 의로워져야만 한다. 그는 새 세상에 있는 새 사람이다. 거기는 율법도 없고, 죄도 없고, 양심의 고통도 없고, 사망도 없고, 다만 온전한 기쁨, 의, 은혜, 평화, 생명, 구원, 그리고 영광이 있을 뿐이다.


10.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두 가지 의는 계속될 것이다. 육은 율법의 능동적인 의에 의하여 고발을 받고, 괴롭힘을 받고, 슬픔을 당하고, 무너뜨림을 당한다. 그러나 영은 수동적인 의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고, 기뻐하고, 구원함을 받는다. 영은 주님이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이다.


11. 바울은 이 서신에서 우리를 가르치고 위로하여, 가장 뛰어난 기독교적 의에 관한 온전한 지식에 머물도록 하려는 것이다. 만일 의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12. 나는 여러분에게 경고한다. 특히 양심적인 교사가 되려는 여러분 각자가 연구와 독서와 명상과 기도로 실천하여, 유혹이 올 때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양심을 가르칠 수 있게 되고 위로할 수 있게 되고 율법에서 은혜로, 능동적인 의에서 수동적인 의로, 다시 말하면 모세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13.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이심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부름 받은 일을 명랑하게 그리고 기쁘게 행할 뿐 아니라,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행정관에게 순종시키며 그들의 악한 법과 현실 생활 속에 있는 모든 것에 순종한다. 만일 필요하면, 짐스럽고 위험한 일까지 헌신한다.


 


 


갈라디아서 제2장 강해

 


1. 문제점 : 믿음 위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


 - 바울은 할례를 저주스러운 것으로 거부하지도 않았고 언어나 행동으로 유대인들에게 그만 두라고 강요하지도 않았다.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는 것이 죄 되거나 의로울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는 금식과 다른 순전한 실천들을 저주스러운 것으로 거부하지 않고, 이 실천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만을 가르친다.


2. 근본 문제는 의를 위하여 율법은 필요한가? 아니면 필요 없는가?


-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자세 : 우리는 만유의 주되시는 분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앞으로 전진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앞세우고 말씀과 기도롤 담대하게 앞으로 전진하자.


3. 교황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는 파문장에서 로마 교황의 법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을 형벌로 위협한다. 그리고 그의 모든 법을 구원에 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교황의 인격 속에서 말하고 있는 자, 또는 그와 같은 교황의 교서들 속에서 말하는 자는 마귀 자신이다.


4. 복음의 진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의는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온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에 대한 왜곡된 가르침은 ‘우리는 믿음으로 의로워졌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 없이 된 것이 아니다’ 이다. 이 믿음은 “사랑에 의하여 형식화”되지 않으면 의롭게 하지 않는다.


- 그러나 참된 복음은 이런 것이다 : 행위나 사랑은 믿음의 장식품이 아니다.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 심령에 계신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하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굳게 잡게 하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게 한다. 올바른 믿음은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 복음은 해야 한다고 나를 가르치지 아니하고-이것은 율법에 해당하는 기능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하여 해 준 일, 즉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그리고 복음은 이것을 받아 믿으라고 나에게 명령한다.


- 우리가 이 교리를 잘 알고 끊이없이 이것을 마음 속에 뿌리내리게 하는 일이 심히 필요하다. 바울이 경험하였고, 모든 성도들이 흔히 경험한 것과 같이 그것은 섬세한 것이어서 멍들기 쉽기 때문이다.


- 나무나 돌로 상을 조각하는 일이 해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예배하기 위해 세우거나, 나무, 돌, 그리고 조각상에 신성을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대신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다.

5. 사도들의 위상, 사회적 지위 등은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진리 앞에서는 타협할 수 없다. 영의 사람만 말씀과 직책을, 하나님 자신 및 그의 사역과 신적인 얼굴을 구별할 수 있다. 복음이 사도의 직임에 우선한다.


6. 우리의 소유, 우리의 이름, 우리의 생명 그리고 그밖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어도, 복음, 우리의 신앙,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뿐이다. 이 점을 양보하거나 굴종하는 그 어떤 겸손도 저주를 받아라!


7. 사랑은 양보하지만 신앙은 아무 것에도 편들지 않는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게 하라 그러나 반대로 믿음은 전연 아무 것도 참지 말게 하라. 오히려 다스리고, 명령하고, 승리하고, 모든 것을 행하게 하라.


8.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은 교만, 영광, 특권 등 교황주의자들 중에서 우리가 보는 것들이 아니다. 싸움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참 예배, 참 종교, 그리고 믿음의 의에 관한 것이다.


9. 성인들도 죄를 범한다. 교회도 죄되다. 사도들은 그들의 사도적 직임 외에 우리보다 우세한 것이 없다. 우리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은사, 즉 같은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 세례, 말씀, 죄 사함이 그것이다.


10.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그렇게도 확고히 방어한 사람이 지금은 율법이 금한 음식을 피한다. 그리고 저렇게 실수를 한다. 그는 큰 실수의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명령을 향해 공격한다.


11. 율법과 복음의 구별의 중요성


- 이성은 신앙의 적이다. 율법의 의를 의지한다. 우리의 양심이 율법에 의해 공포에 떨고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씨름할 때에 이성이나 율법에 자문받지 말고 오직 은혜와 위로의 말씀을 의지하라. 복음은 율법과 이성의 빛 위로, 그 너머로 우리를 인도한다.  


-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의 모든 선물을 가지고서도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 율법으로부터 복음을 구별하는 자가 참다운 신학자이다.


- 하나를 다른 하나에서 구별하는 방법은 복음은 하늘에 두고 율법은 땅에 두며, 복음의 의를 하늘의 것과 신의 것이라 부르고, 율법의 의를 땅의 것과 인간의 것이라 부르며, 복음의 의와 율법의 의를 하나님이 하늘과 땅, 빛과 어두움, 또 낮과 밤을 구별하시듯이 날카롭게 구별하는 일이다.


- 만일 문제가 믿음, 하늘의 의, 양심이면, 율법을 전적으로 생각 밖에 두고 땅에 남아있도록 하자. 그러나 당면한 문제가 공로일 때는 공로의 등잔과 율법의 의를 밤에 켜자. 그러므로 태양과 복음과 은혜의 광대한 빛을 낮에 비추게 하고, 율법의 등잔은 밤에 비추게 하자.


- 땅에서 우리가 분주히 순간을 보낼 때, 거기서는 나귀가 일하게 하라. 그가 받은 짐을 섬기고 짐을 지고 다니도록 하라. 이것은 몸과 지체들은 율법에 순종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에 올라갈 때, 나귀는 그 짐과 함께 땅에 두라. 왜냐하면 양심은 율법이나 공로나 땅의 의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같이 나귀는 골짜기에 남아 있다. 그러나 양심은 이삭과 함께 산 위로 올라간다. 율법이나 공로는 전연 모르고 죄 사함과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순수한 의만을 바라본다. 한편 사회에서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엄격히 요구된다. 거기에는 복음, 양심, 은혜, 죄사함, 하늘의 의, 또는 그리스도 자신에 관하여 아무 것도 알게 하지 말라. 다만 모세의 지식, 율법과 공로의 지식만 있게 하라. 율법과 복음, 이 두 주제가 이런 모양으로 분리되어 있을 때, 둘은 그들의 한계 안에 머물게 된다.  


- 율법과 복음의 구별, 이 주제에 대한 지식은 고도로 필요한 것이다. 이 지식은 모든 그리스도교 교리의 요약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말로만 아니라 느낌과 체험으로 율법을 복음에서 구별하기를 열심히 배우게 하라. 즉 심령과 양심에서 이 둘 사이를 잘 구별하게 하라. 왜냐하면 말에 관한 한, 구별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에 이르면 우리의 양심에서 복음은 희귀한 손님이고 율법이 지속적인 손님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양심은 율법과 죄의식에 익숙해 있다. 이성도 이 의식을 후원한다.


- 그러나 양심의 떠난 문제에서 외적인 임무가 수행되어야 할 때 우리가 설교자이든, 행정관이든, 남편이든, 교사이든, 학생이든, 지금은 복음을 들을 때가 아니다. 우리는 율법의 소리를 들어야 하며 우리 직업을 뒤따라 가야한다. 이와 같이 율법은 나귀와 함께 골짜기에 남아 있다. 그리고 복음은 산 위에서 이삭과 함께 남아 있다. 


- 율법은 그의 몸과 지체를 다스리도록 허락하고 양심은 다스리지 못하도록 하라. 여왕과 신부는 율법에 의해 오염되어서는 안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전하게 보호되어야만 한다.


12. 신앙의 교리는 쉬운 것이 아니다. 말하기는 쉽지만 터득하기는 어렵다. 쉽사리 애매해지고 상실된다. 그러므로 모든 정성과 겸손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 성경연구에 헌신하자. 그리고 진지한 기도를 드리자. 그리하여 복음의 진리를 잃지 않도록 하자.


- 많은 사람들이 복음은 가지고 있어도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바울은 베드로, 바나바, 그리고 그 외의 유대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걷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들이 복음을 설교하고 있었으나 그 안에서 합당하게 걷지 않았다는 것이다.


13. 캐톨릭의 잘못된 가르침 : 거룩한 규범을 실천함으로 나는 ‘재량에 의해’ 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받은 다음 적정 행위로 나를 위한 영생을 충분히 얻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주거나 팔 수 있는 공로의 보화를 모을 수 있다.


14. 그리스도교의 참된 의미는 사람이 먼저 율법을 통하여 그가 죄인임을 인정한다. 그리고 놀라고 겸손해진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로 들어가는 첫단계는 회개의 설교이며 자신을 아는 지식이다. 둘째 단계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15. 그리스도는 믿음의 대상이다. 대상일 뿐 아니라 믿음 자체 안에 형재하시는 분으로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든다. 우리의 형식적인 의는 믿음을 전달하는 사랑이 아니다. “의”는 믿음 자체이다. 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붙들고 소유하기 때문에 믿음은 의롭게 한다. 마음의 신뢰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가 현재하신다. 이것이 사람이 그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는 형식적 의이다. 그리스도는 믿음으로 포착되시는 분이며 심중에 사시는 분으로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의가 되신다.


16. 믿음, 그리스도, 받으심 또는 인정하심.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든다. 그리고 그를 현재하도록 한다.


17. 죄는 아직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의 육에 매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에 남아 있는 이 죄의 잔재를 씻어 주신다. 거기다 우리는 베드로, 다윗 등과 같이 때로는 성령의 의해 버림을 당하고 죄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죄는 가리워졌고 하나님은 그것으로 우리를 묶어 두고자 하시지 않는다는 이 교리를 항상 의지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죄도 의식하지 않게 되기까지 선을 행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궤변자들이 가르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우리 속에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죄는 항상 현재한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은 죄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무시되고 감추어져 있다.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가 가운데 서 계시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믿음이 없는 곳에서 죄사함과 죄의 가리우심이 없다.


18.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가르칠 때, 우리는 선행에 관해서도 가르친다. 우리가 그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은 그리스도를 붙들기 때문에 이제는 가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부르라. 그에게 감사를 드리라. 그를 설교하라. 그를 찬양하라. 그를 고백하라. 그대의 이웃에게 좋게 하라. 그리고 그를 섬기라. 그대의 의무를 다하라. 이런 것들은 참으로 선행이다. 이 선행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값없이 죄사함을 얻었기 때문에 심중에서 싹튼 신앙과 기쁨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19. 그리스도인은 죄가 없는 자도 아니요 죄를 느끼지 않는 자도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믿음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시는 자이다. 그는 은혜와 죄사함의 자녀이다.


20. 율법은 양심을 비난하고, 죄, 곧 율법없이는 살아있지 못하는 것인 죄를 드러내는 일 외에 하는 일이 없다. 죄의 지식을 말할 때-나는 위선자들이 말하는 사색적인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깨닫고 죽음의 참 맛을 느끼는 참 맛을 느끼는 참된 지식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런 지식은 심령을 공포에 떨게 하고 절망으로 이끌며 심령을 죽인다.


- 율법은 아직은 악한 자와 불신자를 위한 것으로 남아 있다. 또 우리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남아 있다. 우리가 믿지 않는 만큼 남아 있다.


21. 우리는 바울과 함께 율법과 행위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외롭다함을 얻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으면, 이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의와 생명이 되심을 알기 때문에 결코 게으른 자가 되지 않고 건전한 나무처럼 좋은 열매를 맺는다. 믿는 사람은 성령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령은 사람을 게으르게 버려 두시지 않고 그를 모든 일에 헌신하는 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고난을 참는 일, 기도하는 일, 감사하는 일, 그리고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의 실천을 부지런히 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행위 없는 믿음은 무가치하며, 무용한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렇게 붙잡고 율법에는 죽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입고, 사망, 마귀, 그리고 지옥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그 후에야 나는 선행을 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감사를 드리고, 이웃에 사랑을 베푼다. 그러나 믿음에 뛰따르는 이 사랑과 행위는 나의 믿음을 형성하지도 않으며 믿음을 장식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의 신앙이 사랑을 형성하고 장식한다. 


- 양심이 율법의 의와 은혜의 의를 구별하는 교리를 이해하도록 면밀히 가르쳐야 한다. 사실 나는 매일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나를 괴롭힐 수 없다.


22. 그리스도는 마귀를 대항해 싸우시는 나의 마귀이시다. 만일 마귀가 나를 치면, 나는 그를 도로 칠 더 강한 마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더 강한 마귀가 강한 마귀를 싸워 정복할 때 나는 자유함을 얻는다. 그러므로 은혜는 율법이다. 이 율법은 나를 속박하지 않기 때문에 내게는 율법이 아니다.


23. 그리스도인의 의는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사는 것에 의한 의이며, 우리 자신의 인격 안에 있는 의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를 토론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인격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 그리스도와 나의 양심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내게 고정되었고 접합되어 계시고 내 안에 항상 계시다. 내가 지금 사는 삶은 내 안에 그가 사시는 것이다. 앞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내가 지금 사는 삶이다. 그러므로 이같이 하여 그리스도와 나는 하나이다. 믿음은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매우 밀접하게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와 우리는 서로 분리할 수 없고 그에게 영원히 위촉되어 있어서 “나는 그리스도와 같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낯선 삶은 그리스도의 삶, 나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 안에서 주어진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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