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에 대항한 에드워즈의 사상
리차드 로베라체
조나단 에드워즈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미국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사상가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신학적 천재성은 개혁신학과 청교도주의의 중요한 사상들을 효과적으로 진술하면서도 이것들을 단순하게 반복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중요한 문제들에 그것들을 적용시키는 그의 능력에 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칼빈주의에 그 뿌리를 둔다. 그의 많은 저서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관한 칼빈의 가르침을 쉽고도 일관되게 적용한 것들이다.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 이전의 개혁신학 전통에 근거해서 글을 쓴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사고의 출처들은 칼빈주의를 넘어서서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 그는 17세기의 다양한 사상 주류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이것들 중 일부는 캠브리지의 플라톤학파와 존 로크의 철학처럼 서로 완전히 모순되고 개혁주의 사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또한 에드워즈의 신학은 이성과 자연신학을 많이 이용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교도의 영성신학에 의해 양육된 에드워즈이기에 여러 면에서 그는 청교도주의가 퇴조됐던 당시에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강조하는 운동의 사상을 완성하고 요약한 청교도주의의 요한 세바스찬 바흐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정통주의에 대항하다
에드워즈는 18세기에 있던 두 가지 위험한 문제들과 싸우면서 그의 신학적 종합을 이룬다. 이런 위기들 가운데 하나는 청교도 회복운동 안에 있었던 영적 능력의 상실이라는 내부적 요인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서구문화의 세속적 흐름이었던 인간 이성주의가 교회 안팎으로 만연하는 분위기였다. 그의 위대한 공헌은 교회 안에 복음적 각성과 함께 인간중심적인 계몽사상에 반대하면서 위에 언급한 위기들에 대해 앞장서서 싸우는 신학을 만들어낸 것에 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각성운동의 불길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가 노샘프턴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가 담임하던 노샘프턴의 교회를 맡게 되었을 때, 그는 교회가 뉴잉글랜드의 영적 쇠퇴의 전형이던 몽유병적인 형식주의의 상황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50년부터 청교도인들이 제1세대에 특징지어졌던 “경건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그때에도 교리문답집의 물음에 대해 바른 대답들을 할 수 있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가 아니라 땅과 재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에드워즈의 교회를 위한 치료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죄를 통한 마음의 어두움과 불구됨 즉, 당시 문화를 침식하고 있던 똑같은 형태의 질병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런 고통이 17, 18세기의 지성적 지도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희망을 미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 이성의 능력 위에 두었으며, 이는 곧 빛을 위해서 어두워진 마음에 의지하므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
청교도들은 루터나 칼빈의 전적타락에 대한 견해를 경건에 대한 이해에 적용시켰다. 그들은 칼빈주의자의 정통주의라 할지라도 성격에 있어서 단지 관념적인 즉, 단순한 배움이나 검색(conditioning)의 산물이라면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정통교리는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 체험과 마음을 일깨우고 조명해주는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에 의해 동반되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머리와 가슴이 성령이 인도하는 생활 속에서 함께 작용하는 것을 기대했다.
성령의 역사에 관한 칼빈의 강조를 에드워즈가 발전시킨 것은 바로 죽은 정통주의에 대한 청교도인의 공격을 요약한 것이었다. 하나님과 초자연적 빛에 의한 성경진리의 조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있어서, 에드워즈는 존 로크의 정신철학을 신학적 자료로써 보다는 편리한 은유들의 저장고로서 이용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초월성의 영광을 향한 심성을 일깨우기 위해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각성하게 하는 힘을 수사적 감각이 아니라, 인간 이성의 표면적 확신 밑에 흐르는 성령에게 돌렸다.
계몽운동에 맞서다
에드워즈의 경건에 관한 심리학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청교도인의 강조에 의해서 풍부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계몽운동이 주창한 심리학의 지나치게 간소화된 범주들에 대해 대항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질을 정신과 의지 그리고 감정의 분리된 영역들로 나누는 것을 반대했으며, 이 모든 요소들은 인간성의 중심인 마음에 뿌리박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인간 의지의 경향에 의한 산물이며 또한 그것은 우리 마음의 욕망들의 기본적 방향으로부터 산출된다고 믿었다.
에드워즈는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우리의 욕망으로부터 유발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를 섬기며 복종하기를 추구하기도 하며, 또한 우리는 그리 선하지 못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의지의 자유」에 관한 그의 뛰어난 저서는 추상적인 칼빈주의자의 논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기에 자유롭다고 하는 생각과의 투쟁이며, 반대로 우리는 성령에 의해 심겨진 신성의 통찰력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결코 행하기 원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과의 투쟁이기도 하다.
영국의 합리주의자들은 자기이익에 근거한 윤리체계를 세우려고 했었다.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이 이런 접근방식 즉, 각 개인의 자기이익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전체 선을 향해 움직이기 때문에 깨끗한 양심과 함께 추구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영적으로 변화되어져서 하나님을 보며 그의 뜻과 사적이익보다는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마음 가운데서만 참된 미덕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합리주의적 사고와는 달리 에드워즈는 모든 행위에서 하나님을 향해 증오를 표현하면서 하나님께 거스려 반-의도적 반항(semi-conscious rebellion)에 빠져 있는 인간 본성을 본다. 에드워즈는 그들이 더욱 다루기 쉬운 신을 믿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참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적지 않은 설교 가운데서 그는 죄의식을 불러일으키고 회개에 대해 동적인 마음을 갖게 하려고 청교도인들이 반종교개혁(the counter-reformation)과 공유했던 지옥불의 웅변술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지옥불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것이 에드워즈 신학의 주된 주제는 아니었다. 우리는 단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들”을 기억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와 같은 유형의 좋은 본보기가 되기 때문이며 또한 청교도주의로부터 인간성을 변호하기 원했던 후대의 비평가들에게 그것이 유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의 우주
에드워즈가 전개하기를 선호하던 주제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은혜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의 신학처럼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우주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다. 모든 것들이 신적 아름다움과 뛰어남 가운데 영광스럽고 무한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창조물 위에 부어졌다. 그리고 그분 자신의 가치는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한 것이어서 세상을 창조하신 그의 목적만이 그의 영광을 나타내보일 수 있다. 인간공로(로마 가톨릭)든지 인간능력(알미니안적 개신교)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든 구원론들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성령의 조명에 의해서만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실제적이 된 하나님 사랑의 숭고함을 감소시킬 뿐이다.
계몽적 합리주의는 세상을 하나님의 직접적 통제로부터 단절시키려고 했다. 에드워즈는 아이작 뉴톤의 과학적 천재성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지만 그의 신학은 뉴톤주의자들이 공리로 간주했던 내재하는 자연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규칙적인 우주에 대해 맹렬히 공격했다.
에드워즈가 이런 신학적 공격을 위해 채택했던 철학적 기조는 만유내재신설(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방출된 것으로서 존재한다는 개념)의 형태였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가 이적을 행하시기로 선택하신다면 자연의 법칙들에 간섭하시고 그것들을 뒤집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지속적인 자연법칙들 아래서 움직이게 하고 위치를 정해두신 우주를 생각한다. 다른 면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섭리는 문자적으로 원자핵들을 결속시키는 힘이라고 믿었다. 즉, 하나님께서 한순간 한순간 그 존재를 붙잡아주지 않으신다면 우주는 붕괴되고 사라질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세계는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순간순간 모든 사건을 직접적으로 통제하신다.
이런 우주에 대한 견해에서 에드워즈는 어떤 점에서는 그의 시대의 선각자였다. 그의 견해는 모든 물질은 궁극적으로 에너지의 상호작용이라는 영역에서 관찰되며 이러한 것들을 지배하는 힘들은 차라리 신비적이라고 하는 20세기 후기 뉴톤주의 물리학을 예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체로 에드워즈의 견해는 그리스도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RSV) 그리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다(골 1:17)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에 근거한다. 그의 우주관처럼 에드워즈의 사고 역시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었다.
또한 에드워즈의 신학은 그리스도가 중심된 개혁신학 전통 안에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역(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과 그의 인격(그리스도의 초월성)에 관해 비할 데 없는 좋은 글들을 남겼다. 에드워즈는 그리스도가 처음에는 사자로 그 다음에는 어린양으로 표현되는 계시록 5장의 구절들을 연구하면서 “그리스도 안에 다양한 초월성의 놀라울만한 결합이 있다”는 논제를 전개한다. 이 결합은 특성상 변증법적이다. 즉, 그리스도는 무한한 영광과 가장 위대한 겸손, 위엄과 온유, 복종과 통치, 최상의 주권과 자기부정, 그리고 자기충족과 하나님을 의뢰함을 결합시킨다. 에드워즈의 전기작가 페리 밀러가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것들에 기초해서 작성한 그의 설교는 신학적 걸작이다.
비록 에드워즈가 조직신학에 대한 어떠한 개요서도 쓰지 않았으나 그는 확실히 조직신학적 사상가였다. 그의 글들 가운데 전개되는 사상에서, 그리고 특별히「의지의 자유」와「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된 목적」과 같은 저서들에서 그가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들의 발전을 추적할 수 있다. 에드워즈는 그의 전체 저서가 궁극적으로 그가 “기독교 주요교리에 대한 합리적 설명"이라고 불렀던 하나의 귀결점에 적합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물론 그는 그 ”합리적 설명"을 통하여 모든 예술들과 과학들이 완전하면 할수록 그것들은 더욱 더 신성을 표현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신학과 각성
에드워즈 신학의 힘은 그것이 16, 17세기에 채택됐던 한 노선을 반복하기보다는 차라리 당대의 여러 위기들에 맞섰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미국에서의 대각성운동이 신앙적 체험을 통한 기독교문예부흥을 낳는 것 같았을 때 기뻐했다. 그러나 그 각성운동이 문제들을 만들어 냈을 때 그는 극단적 감정과 감각주의에 대해 경고하면서 신랄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1734년 그의 교회에서 설교한 것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한 신실한 이야기"에서 그리고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구별된 표시들"에서 그 각성운동을 설명하고 변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현 뉴 잉글랜드에서의 경건운동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에서 그 부흥운동 기간에 발생했던 영적 교만과 신학적 탈선들에 대해 똑같이 비판했다. 마침내「경건의 감정들에 관한 논문」(1746)에서 그는 진실한 회심과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일반은혜' 경험들 사이를 구별한 가장 오래된 청교도의 주제들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커다란 혼란을 초래하는 육감적 광신과 마음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생각에 이르게 하고 자아도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참된 영성 사이의 차이점들을 철저히 분석했다. 이런 모든 저서들에서 에드워즈는 신앙생활에서의 감정의 역할을 인정했다. 찰스 촌시와 다른 자유주의 비평가들이 각성운동에 의해 나타난 격앙된 감정들에 조소를 보냈으나, 에드워즈는 이성과 감정 양자가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 각각의 위치를 점유한다는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확인해주었다. 에드워즈는 각성운동이 이상한 현상들을 일으켰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부흥정신이나 고양된 경건 분위기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각성운동기간 동안 에드워즈는 당대의 세기에 미국의 복음주의를 자극하고 인도했던 뛰어난 종말론적 견해를 전개했다. 이때까지 미국의 청교도들은 개혁주의자들의 무천년설보다는 고전적 전천년설을 더 선호했었다. 에드워즈는 교회에 영향을 미쳤고, 한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영적 각성의 커다란 충격을 인식하면서 다니엘 휘트비의 후천년설 견해가 성경적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의 미래에 대한 견해는 ‘구속역사'에 관한 설교들과 세계적인 영적 각성을 위한 연합 기도를 도모하려했던 “명시적 일치를 증진하기 위한 겸손한 시도”에서 피력되었다.
에드워즈가 추구하던 미래는 모든 거짓 기독교(로마니즘과 프로테스탄트 합리주의)가 사라지는 대신 유형의 교회가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하나가 되는 그런 것이었다. 교회 안에서 이런 각성운동의 결과는 변화된 문화, 우주적 평화, 세계 각 국가들 가운데 충분한 상호이해, 그리고 하나의 우호적인 사회 안에서 연합되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목표를 향한 운동은 즉각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어두움의 권세들이 쫓겨나고 온 땅이 주의 영광의 지식으로 가득 차기(합 2:14, RSV)까지 어두움의 권세들에 대한 새로운 공격들을 위해 교회에 힘을 제공하면서 일련의 기나긴 성령의 교호적인 물러섬(declines)과 나아오심(outpourings)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사무엘 홉킨스, 티모디 드위트, 리맨 비쳐와 찰스 피니처럼 이런 목표를 굳게 믿었던 사람들은 문화적 악에 대항하며, 사회의 복음화와 변화를 위해 교회를 하나되게 하도록 자극하였다.
비전을 상실하다
미국의 복음주의는 19세기 말에 미래에 대한 비관적 태도를 선택함으로해서 이러한 목표들을 포기했다. 단지 사회복음주의만이 에드워즈의 비전을 견지했는데, 그것은 성령의 특별한 임재에 의해서만이 약화되어질 수 있다는 죄의 심각성과 권세에 대한 에드워즈의 명확한 견해를 저버리고서이다. 20세기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모두 보통의 은혜들을 기대했고 일상적인 목표들을 추구했다.
한 세대 후인 오늘날 기독교 선교라는 시각에서 에드워즈 사상과의 새로운 관계가 모색되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영적 각성과 세계 복음화를 위한 기도 가운데 명시적 하나가 되도록” 초청되고 있다(1984년 로잔 기도 회의가 에드워즈를 인용한 것을 재인용함). 이와 같은 때에 기독교 운동가들이 에드워즈가 교회와 주변 문화를 변화시키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써 기대했던 영성회복의 중요성을 발견하기 위해 에드워즈를 읽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또한 세속적 사상의 기본적 원칙들에 철저히 반대했던 한 신학의 야망을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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