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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기독교 철학

by 【고동엽】 2007. 7. 6.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독교 철학 |

 

http://blog.daum.net/godlysalvation/166

이 글은 에드워즈 목사님이 로크의 인식론을 어떻게 수용하여 기독교 인식론으로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참고-에드워즈의 존재론은 뉴턴과 연결된다면, 인식론은 주로 로크와 캠브리지의 신플라톤주의자와 연결된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로크의 인식론을 참고하여, 인간의 신 인식론은 감각적으로 주입된 성향, 경향성이라고 증명한다.

 

로크-타블라 라사---감각---사물---단순관념(감성적 지식)---복합관념(이성)

에드워즈-인간의 마음---감각---하나님(성령의 주입) -----성향, 경향성(감성, 이성)

 

<로크와 에드워즈의 인식론 비교>

 

에드워즈는 인간 자체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물론 사변적으로 알 수 있을지 모르나, 실제적으로는 모른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계시해주셔야 하나님을 알(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 마음에 역사하신다. 로크를 참고해보자. 로크는 우리의 마음에는 본유관념이 없다. 어떤 실체를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대신 감각이 있다. 이 감각에 1차 성질이 도장처럼 찍히면 단순관념이 생기고, 이것이 복합되면 복합관념이 생긴다. 즉, 인간의 마음은 수동적이지, 능동적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드워즈는 인간은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성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역사하신다. 마음에 역사하실 때, 성향과 의지가 발생한다. 성향과 의지란, 이성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인다. 왜냐하면 성향과 의지란, 이미 이성을 넘어선 것이다.

 

에를 들어, 어떤 충격을 받았다고 하자. 먼저 감각을 통해 느끼고, 그 다음에 해석된다. 즉, 감각의 충격에 의해 이성으로 그것이 넘어간다. 그리고 그에 대한 행동이 발생한다.

 

에드워즈 목사님은 갑작스럽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 거듭남을 체험했다. 그 충격은 곧 감각을 움직였고 이성을 움직였고 의지를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에는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셨다. 따라서 성령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그의 지성과 의지를 이끌었다. 그러나 인간의 지정의가 무시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것이다.

 

이 논문을 이해하려면, 이와 같이 에드워즈의 거듭남의 경험을 알 필요가 있다. 로크의 사상이 에드워즈에게 매력을 준 것은 바로 본유관념의 없음과 인간감각의 수동성 때문이었다. 이미 에드워즈는 이런 방식으로 거듭남을 체험했기 때문에 에드워즈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로크는 하나님을 상정하지 않았기에, 그의 1차 성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고 말았다. 1차 성질을 본유관념으로 볼 것이냐, 감각으로 들어오는 외부 대상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단순관념이 어떻게 복합관념으로 나아가는지에 대한 내적 원리를 설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경향성의 개념으로 세계가 하나님의 법칙과 관계성으로 하나의 목적으로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 세계는 하나님의 경향성의 재현되는 과정이라는 것을 옳게 규명해냈다.

이 논문은 비교적 초기에 쓰여진 것 같다. 로크와 비교한 부분까지는 잘 되었지만, 에드워즈 목사님의 경향성 개념이 설명되지 않았기에, 에드워즈의 신 인식론의 설명이 부족하다(이에 관해서 이상현 교수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을 참고하면 좋다). 또한 중도언약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설명한 부분은 잘못 설명한 것 같다. 에드워즈는 중도언약을 따른 것이 아니라, 완전 언약을 따랐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독교 철학

 

이경직(천안대, 기독교 철학 전공)

 

 

I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일어났던 대각성 운동의 중심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탁월한 철학자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일반인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리용에 따르면, 그는 미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형이상학자이다. 또한 에드워즈가 식민지 상태의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고 유럽 대륙에서 태어났으면 라이프니츠(Leibniz)와 칸트(Kant)를 잇는 철학자로서 불멸의 체계를 창시했을 것이다. G. Lyon, L'Idéalisme en Angleterre au xvviiie siècle (Paris, 1888), 406면 이하.

 

에드워즈는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도 불린다. 당대에 물려받았던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새롭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의 바탕에는 예일 대학에서 공부한 데카르트주의, 존 로크의 인식론과 아이작 뉴턴의 광학, 캠브리지 플라톤 학파의 사상 등이 깔려 있었다. S. H. Daniel, The Philosophy of Jonathan Edwards. A Study of Divine Semiotics (Bloomington/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4), 68면.

 

예를 들어,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은 부족함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행동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동하시는 동기는 그렇지 않다. 그분은 충만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위는 충만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을 연상시킨다. J. Piper, The Supremacy of God in Preaching (Grand Rapids: Baker Books, 1990), 76-77면.

 

그가 대학에서 접한 청교도 플라톤주의는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와 피터 라무스(Peter Ramus)의 플라톤주의에서 나왔다. 청교도 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영적 세계만 실제로 있으며, 눈에 보이는 우주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조명을 받아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닫는데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마음을 창조하셨다. A. A. Maurer, “Edwards, Jonathan”, in: P. Edwards (ed.),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2 (New York/London: MacMillan, 1967), 460면.

 

또한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에서 사무엘 존슨(Samuel Johnson)을 통해 영국의 새로운 철학을, 특히 존 로크의 생각을 배웠다. 그는 로크의 『인간 오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을 읽고 보물을 얻은 것보다 더 큰 기쁨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이 시기는 그가 회심을 경험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종교적 진리의 척도가 가슴으로 느꼈느냐에 있다는 확신을 얻었으며, 이 확신을 로크의 인식론을 통해 설명하려 했다. Ibid., 460면; H. L. Bond, “Edwards, Jonathan (1703-1758)”, Theologische Realenzyklopädie Band IX (Berlin/New York: de Gruyter, 1982), 299면, 301면.

 

그는 관념론적인 플라톤주의를 경험론과 엮고자 했다. 그는 인간의 관념이 모두 감각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로크에게서 받아들이며, 공간이 하나님의 감각 기관(sensorium)이라는 생각을 뉴턴에게서 받아들인다. 순수한 무(無, nothing)는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존재가 없었던 때는 없다. 따라서 존재는 영원하며, 모든 곳에 있다. 그런데 공간이 없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공간은 영원히 존재하며, 결국 신적이다.

그런데 로크의 인식론에 따르면, 존재는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가 존재하려면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에 매순간 매달려야 한다. 따라서 영적인 것만 실체가 된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물질적 사물이 들어있는 공간이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여겼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자와 뉴턴의 생각을 따랐다. A. A. Maurer, op. cit., 460-461면; T. A. Schafer, “Edwards, Jonathan”, in: Encyclopaedia Britannica vol. 8 (Chicago etc.: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1970), p. 14.

 

에드워즈의 이러한 형이상학은 존 로크의 생각을 발전시킨 조지 버클리(Jeorge Berkeley)의 철학과 매우 비슷하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버클리의 저술을 읽고 그의 『존재론』(On Being)을 썼는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많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버클리의 저술을 접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각을 발전시켰던 것 같다. D. Philips, “Edwards and the New England Theology”, in: J. Hastings (ed.),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 V (New York: T.&T. Clark, 1912), 222면, 225면.

또한 칸트 이전 철학자인 라이프니츠(Leibniz)의 생각과도 매우 비슷해 보인다. 우주가 하나님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주장은 잘못 이해되는 경우 범신론으로 이해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그가 배운 일반 학문을 통해 칼빈주의 신학 전통을 재해석했다. 연구 방법과 표현 방식에서는 당시 철학자들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내용적으로는 칼빈주의를 회복시켰다. 방법론적으로는 철학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독교 신학의 내용을 이성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당대 기독교에 쏟아졌던 비난들을 물리쳤다. 이상현,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14면; 정부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75면.

 

그는 뉴턴의 우주론과 로크의 인식론을 정통 칼빈주의 신학과 연결하려 했다. H. L. Bond, op. cit., 299면, 301면.

사퍼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1)개혁 신학을 뉴턴의 세계관과 연결하고, 2)로크의 경험론을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과 연결하고, 3)기독교의 구원 계획과 역사관을 플라톤의 관념론과 신플라톤주의의 유출설과 연결했다. T. A. Schafer, op. cit., 14면.

 

이 가운데 이 글에서는 로크의 인식론과 그의 신학의 연결점에 주로 초점을 두고자 한다. 에드워즈는 위대한 설교가, 훌륭한 목회자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동시에 훌륭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펜을 항상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에게 떠오른 생각이 있으면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습관이 있었다. D. Philips, op. cit., 222면, 225면.

그는 여름에는 승마와 숲길 산책, 겨울에는 장작 쪼개기 등으로 운동을 대신했는데, 승마와 산책을 하러 갈 때 항상 펜과 잉크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으면 메모하며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기 위해서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에드워즈는 전인격적 신앙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빛나는 지성과 불타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이성을 강조하면서 감성은 평가절하하던 계몽주의 시대에 살았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두 가지 흐름이 서로 대립될 때, 차가운 이성주의와 순수 감정주의로 나타나기가 쉬웠다.

 

이성주의는 영적 대각성 운동을 감정에 치우친 광신으로 몰았다. 실제로 대각성 운동에 그러한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두 극단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자 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진정한 영성을 가짜 영성과 구분한다면, 영성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진정한 영성과 가짜 영성을 구분하는 근거는 성경에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해준다. 이 진리는 감성으로 느끼는 것만도, 이성만으로 판단하는 것만도 아니라,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 판단하고 감성을 통해 느껴야 하는 진리이다. 이를 통해 에드워즈는 이성주의자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이성을 사용하여 이성주의의 도전을 물리쳤다. 장호익, “죠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조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신앙과 정서』(서울: 지평서원, 20002), 590면.

그가 정신을 집중하고 그가 다루는 주제를 논리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강한 종교적 감정이었다. D. Philips, op. cit., 225면.

에드워즈는 영적 정서와 지성을 균형있게 조화시키고자 했다. 그에 따르면, 정서는 오성 때문에 얻는 깨달음과 실천하려는 의지 사이에 오는 것이다. 깨달음은 머리를, 감동은 가슴을, 의지는 손과 발을 요구한다. 주도홍, 『개혁교회사』(서울: 솔로몬, 1998), 253면.

신앙은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정신뿐 아니라 감정까지 포괄하는 신학적 입장을 정의하려 했다. 콘라드 체리, 주도홍 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서울: 이레서원, 2000), 15면.

 

이 글에서는 에드워즈가 마주했던 당대 문제를 먼저 짚어 보고, 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대 계몽주의 철학을, 특히 존 로크의 경험주의 철학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에드워즈가 존 로크의 인식론을 많이 활용하기 때문에, 페리 밀러와 같은 학자는 에드워즈를 로크의 계승자로 여긴다. S. H. Daniel, op. cit., viii면, 20면.

하지만 에드워즈는 로크의 입장을 수정 없이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의 출발점은 개혁주의 신학이었지 로크의 인식론이 아니었다. 이는 오늘날 철학적 신학 또는 기독교 철학이 신학과 교회에 어떻게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다’는 신학적 고백이나, ‘모든 곳에 부분적으로 진리가 있다’는 초대 교부의 말이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는 신약 성경의 권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기독교의 영성과 경건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몰던 계몽주의 철학에 대해 그 철학 자체를 전면 거부하는 길을 택하기보다, 잘못 사용되는 이성에게 ‘세례’를 주어 올바른 신학 안에서 제 역할을 하도록 자리매김했다는 점에서, 에드워즈는 균형잡힌 신앙인이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찬양 집회나 심령대부흥회와 같은 집회가 TV 등을 통해 보여질 때 비기독교인들은 거부감을 갖기 십상이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시사프로그램에서 문제로 다루는 이단 종파들의 집회 장면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CCM 콘서트와 같은 공연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기뻐하고 은혜를 받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인가? 아니면 공연자가 인위적으로 조작해내는 감정인가? 이러한 물음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이는 설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설교 말씀에 은혜받는 이유가 말씀 자체의 역사에 있는가? 아니면 설교자의 설교 기법에 있는가? 아니면 둘 다에 있는가? 이는 비약적인 성장을 경험한 한국 교회에 던져지는 질문이다. 아직 이 질문에 대해 체계적이고 정확한 대답이 주어지지 않은 것 같다. 조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13면.

 

이는 18세기 뉴잉글랜드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처했던 상황과 비슷하다. 1740년에 시작한 대각성 운동은 초기에 매우 순수했다.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 많은 사람이 뉘우치고 삶을 바로 잡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뉴잉글랜드에 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일하시게 하지 않고 일부 부흥사들이 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흥운동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했다. 정부홍, 앞의 책, 107면, 109면.

 

한국 교회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은사로 주시는 방언도 1주일 합숙훈련하면 배울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는 칼빈주의 전통의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은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통해 구원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에드워즈가 후기에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면서 알미니우스주의를 세차게 공격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알미니우스주의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대각성 운동을 왜곡하고 인간의 인위적 조작을 통해 가짜 영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II

영적 대각성 운동의 후유증 때문에 참된 영성과 가짜 영성을 구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대각성 운동 초기에는 감상적인 어투로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을 크게 인정하고 높게 여겼다. 사람들의 감성을 움직일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은 이성을 중시하던 계몽주의 시대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설교와 기도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고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교회와 일반 사회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너무 감성에 호소하는 초기 예배와 설교가 극단적이라면, 감성을 경멸하는 태도 역시 정반대의 극단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71면.

 

에드워즈는 두 극단 모두 사단의 전략에 말려들었다고 여겼다. 감성만을 중시하는 입장과 이성만을 중시하는 입장에 공통점이 있다.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열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결과 신앙이 헛된 말싸움으로 전락하게 된다.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러한 극단에 빠져 있을 때, 일반 성도는 혼란에 빠져 회의적 입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단과 불신앙과 무신론을 낳고 만다. 앞의 책, 22면.

 

그래서 목회적 관점에서 볼 때도,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일이 중요하게 된다. 목회자 에드워즈가 당대의 뛰어난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이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에드워즈는 참된 영성과 가짜 영성이 섞여 있는 당대 현실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한다. 구약의 요시야 시대에 대개혁과 신앙 부흥이 있었지만, 요시야 통치가 끝나자 마자 유다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떠났다(렘3:10; 4:3,4). 세례 요한 시대에 유대인에게 성령을 부어주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다(요5:35). 예수의 설교에 감동받은 사람은 많았지만, 시험을 이겨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약 성경에도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나온다. 사도 시대에 성령을 크게 부어주었지만 초대교회 안에 문제가 많았다. 이는 종교 개혁 시대와 이후의 대부흥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사단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허용하신다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에 속한다. 문제는 부흥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위험에 쉽게 노출되면서도 문제를 잘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의 차이를 분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앞의 책, 16-22면.

 

그런데 인간 능력 가운데 무엇을 구별할 수 있는 기능은 이성에게 있다. 이성은 원래 쪼개고(분석) 쪼갠 것을 다시 합치는(종합) 능력이기 때문이다. A와 A가 아닌 것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통해서 A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이 이성의 기능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사물의 정의(定義)를 유(類)와 종차(種差)를 합친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유는 다른 사물과 같은 점을 나타내고, 종차는 다른 사물과 다른 점을 나타낸다. ‘다름’이 확보되어야만 사물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정의를 나타내는 definition이라는 단어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define 동사는 fine(끝)을 정해준다(de)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한계선을 긋는다는 이야기이다. 한계선을 그음으로써 그것과 그것 아닌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뜻이다. fine는 헬라어 peras에서 나온 단어이다. peras는 선, 금, 한계선, 한정(限定)이라는 뜻이다. 제한을 둔다는 뜻이다. peras의 반대어인 apeiron은 무한정(無限定)을 뜻하며 따라서 시간에 적용될 때 무한 시간, 즉 영원한 지속이 되며, 공간에 적용될 때 무한 공간이 된다. 지속 안에 선을 긋게 될 때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時間)이 나타나며, 무한 공간 안에 선을 긋게 될 때, 앞, 뒤, 좌, 우, 상, 하,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십이면체 등의 형태들이 나타난다. 플라톤이 지식의 대상을 이데아(idea)로 부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데아’는 형태를 나타내는 헬라어이다. 지식의 대상이 되려면, 즉 정의가 주어지려면, 서로 다른 점을 나타내는 구분선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참된 영성과 거짓 영성을 구분하기 위해 이성에 호소하는 것은 철학사적으로, 개념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이성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뜻은 아니다. 계몽주의는 이성에게 자율성을 주었지만, 에드워즈는 이성이 특정 방향을 향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인간의 정서(affection)이며 성령께서 인간에게 거룩한 정서를 주신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앞의 책, 36-37면.

그런데 인간의 정서에는 거룩한 정서와 그렇지 못한 정서가 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정감어린 뜨거운 마음뿐 아니라 지성의 빛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곡과 쭉정이, 정금과 찌꺼기를 가려내듯이 지성의 빛을 통해 참된 정서만을 골라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참되고 거룩한 정서는 신앙의 내용을 바로 이해(understanding)하는 데서 나온다. 앞의 책, 69면, 71면.

 

에드워즈는 『신앙감정론』(Treatise Concerning Religious Affections)에서 먼저 종차를 밝히고, 이어서 유를 밝힌다. 이를 통해 그는 전통적 정의(定義) 방식에 따른다. 참된 신앙의 표식이 될 수 없는 것의 목록을 먼저 밝히고, 이어서 참된 신앙의 표식의 목록을 제시한다. 그 목록의 근거는 진리의 말씀이 담긴 성경이다. 이를 통해 그는 종교적 삶에서 의지와 지성이 모두 필요함을 밝힌다. 이를 통해 그는 보수주의 개혁신학자로서 계몽주의가 표방하는 이성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가 옹호하는 열광주의라는 두 극단을 모두 피한다. F. L. Cross/E. A. Livingstone (eds.), “Edwards, Jonatha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532면.

 

(1) 감정의 폭이 크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호산나’라고 광적으로 외쳤던 사람들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동조했기 때문이다.

(2) 몸에 반응이 일어난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마음과 몸에 오는 영향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오는 정서가 몸에 오는 정서보다 중요하며, 몸에 오는 정서에 영향을 준다.

(3) 자신의 신앙을 뜨겁고도 자신있게 말한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입과 혀는 무성한 나뭇잎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된 신앙은 열매를 통해 알 수 있다.

 

(4) 자기가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감정이 생겼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그 감정이 성령께서 주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외부 환경에 의해 유도되었을 수도 있다.

(5) 감정이 성경 내용과 연결된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성경을 남용하는 감정도 있고, 마귀가 ‘은혜받은 듯한’ 착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귀도 성경을 이용할 줄 안다.

(6) 감정 때문에 사랑을 나타낸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모조품이 더 아름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7) 여러 가지 감정이 같이 나타난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고가품일수록 가짜가 많기 때문이다. 예후는 열심을 내었지만 가짜 열심이었다(왕하 10:16).

 

(8) 감정이 순서대로 온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비참을 깨닫고 두려움을 느끼게 한 다음에 위안을 주시지만, 마귀도 두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작용은 신비로워서 도식적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9) 신앙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들이고 예배의 외적 의무에 열심을 낸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돌밭같은 사람도 말씀을 참 잘 들으면서도 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10) 입으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광을 돌린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일시적 감격과 믿음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11) 확신에 차 있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바리새인도 확신에 차 있었다. 마음의 자극을 은혜로운 계시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12) 체험 고백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해서 참된 신앙은 아니다. 나쁜 감정을 훌륭한 교리적 지식으로 위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76-176면, 225면.

 

이어서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의 표식을 제시하려 한다. 그 근거는 성경에 있다. 그러나 이 표식을 통해 약한 사람이나 불신자와 비교하여 오만하게 되어서는 안된다. 앞의 책, 178-179면.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의 표식을 제시한다.

(1) 이익을 초월하는 하나님 사랑이 참된 신앙의 표식이다. 악인도 이익이 될 때 감사하고 감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참된 신앙의 표식이다. 하나님의 거룩성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호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3) 조명을 통해 영적 이해에 도달할 때 참된 신앙이다. 지식없는 열심은 비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영적 이해는 성경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지, 새로운 의미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다. 성경과 동떨어진 체험담 등은 경계해야 한다.

 

(4) 복음의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아야 참된 신앙이다. 바리새인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이적을 보았지만 복음의 확신이 없었다.

(5) 복음적 겸손이 나타날 때 참된 신앙이다. 거룩한 지식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깨닫는다. 그래서 은혜 받을수록 하나님이 더 커 보이고 자신이 너무 작게 여겨지기 때문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밖에 없다. 겸손한 척 하면서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이나, 자기 겸손을 크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며 참된 신앙인이 아니다.

(6) 성품이 변해야 참된 신앙인이다. 신앙이 있는데 향기가 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7)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야 참된 신앙이다. 그래서 사랑과 온유, 고요함과 용서, 자비가 있어야 한다. 도장과 도장 자국은 일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8) 대칭과 균형이 아름다워야 참된 신앙이다. 따라서 사랑의 정서는 참된 정서들과 함께 나타나야 한다.

(9) 더욱 거룩해지려는 열망이 커질 때 참된 신앙이다. 미완성은 완성을 갈망하기 마련인데, 거짓 정서는 그 자체에 만족해서 안주하기 때문이다.

(10) 실천에서 열매 맺어야 참된 신앙이다. 열매 없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눅 6:44). 그래서 신앙 고백과 체험 간증은 다르다. 신앙 고백의 참된 증거는 실천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형제 사랑이 경건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앞의 책, 247-588면.

 

 

III

에드워즈는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성경에 토대를 두어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참된 영성과 거짓 영성을, 참된 정서와 거짓 정서를, 참된 경건과 거짓 경건을 구분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감정’(affection)이란 무엇인가? 이 개념은 존 로크의 인식론과 연결되며, 에드워즈 사상의 독창성을 잘 드러내는 개념이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인간의 인식 능력은 대체로 두 가지이다. 이성과 감성이다. 감성은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자극을 느끼는데서 성립하며, 그래서 항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이와는 달리 이성은 기억과 상상력, 구성력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서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이다.

 

전통 철학에서는 이성을 감성보다 우위에 두었다. 감성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항상 변할 수 있고, 따라서 불변하는 것이어야 하는 지식의 자격 요건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당대 수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눈에 보이는 도형에서 시선을 거두어 보이지 않는 이상적 도형에 눈길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눈에 보이는 도형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변하기 때문이다. 불변하는 지식을 얻으려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이상(理想) 세계를 보아야 한다. 이는 플라톤의 관념론을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현실 세계가 실제로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역시 개별 실체 외에 추상 개념을 포함하는 제2실체를 인정함으로써 지식의 대상을 역시 감성의 대상이 아닌 이성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중심 개념으로 삼는 ‘affection’은 라틴어 affectus에서 온 단어이다. affectus는 ‘어떤 일을 겪다’를 뜻하는 afficiô 동사의 과거분사로서 어떤 일을 겪는 상태 또는 겪은 결과를 나타낸다. afficiô 동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paschô이며, 과거분사는 pathêma이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부터 감정, 성향, 상태를 나타내면서 인간의 수동적 측면을 강조했다. 이성이 적극적으로 범주(category)를 갖고 바깥 사물을 인식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감각 기관은 밖에서 주어지는 자극에 의해 느낄 수만 있지 적극적일 수 없다. ‘겪는다’는 어원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전통 철학에 따르면, 이러한 성격을 지닌 정서는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에드워즈에게 학문 방법론을 제공한 존 로크의 철학은 정서에게 이전보다 높은 지위를 주었다. 존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모두 경험에서 나온다. 인간이 경험하기 이전에 타고난 관념, 즉 본유 관념(innate ideas)은 없다. 이 점에 있어서 존 로크는 플라톤에서 시작하는 이성주의 전통을 부정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태어날 때 망각(lethe)의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그저 잊어먹었을 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외부 자극을 받아들임으로써, 즉 감각을 통해서 인간이 잊어 먹은 것을 다시 일깨우는 작업이 교육이다. 교육은 새로운 것을 집어넣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진리(aletheia)가 망각(lethe)을 없애는(a-) 것이라고 해석했다. 플라톤에 따르면, 태어날 때 인간의 마음은 겉으로는 백지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 안에 모든 글이 쓰여진 종이이다. 탁본을 만들어내듯이 외부에서 자극을 가할 때, 또는 특수 잉크를 부을 때 원래 쓰여졌던 글이 나타나는 것이 교육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다르지 않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잠재성을 갖고 태어난다. 그 잠재성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자기실현이며 곧 행복이다. 때로 장애물 때문에 잠재성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 때는 실현되지 않은 만큼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현대 생물학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이미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존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백지 상태(tabula rasa)에 있다. 밖에서 오는 자극이 밀랍과 같은 마음에 도장찍듯이 흔적을 남기는데서 인간 지식이 생겨난다. F. L. Cross/E. A. Livingstone (eds.), “Locke, Joh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991면.

 

밖에서 인간의 감각 기관에 자극을 주는 것은 분명히 있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what-we-know-not)이다. 앎은 오직 감각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에, 감각과 무관하게 따로 있는 것은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존 로크의 주장을 일관되게 밀고 나간다면, 인간의 감각과 무관하게 따로 있는 것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칸트의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는 인간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 감각이 성립하려면 감각을 가능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요청 때문에 물 자체가 있는 것이다. 로크의 경우에도, 외부 사물 자체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지만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로크는 자기 이론에서 모순을 일으키는 줄 알면서도 외부 사물 자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래서 철학사가들은 그를 ‘정직한’ 철학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외부 사물이 감각에 흔적을 남길 때 감각이 백지 상태에 있다면, 달리 말하자면 감각이 수동적이어서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변형 또는 왜곡시킬 수 없다면, 감각에 남은 흔적은 외부 사물을 어떤 방식으로든 반영할 것이다. 플라톤의 『테마이테토스』(Theaitetos)에 나오는 경험주의적 설명에서처럼 로크에게서도 밀랍이라는 비유가 나타난다. 밀랍에 도장을 찍으면 밀랍에는 도장에 새겨진 것과 같은 형태가 남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의 신학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참된 영성 또는 정서의 표식을 언급할 때, 참된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수께서 우리 영혼에 인을 치시고 당신의 형상을 새겨놓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영혼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타나면 그 흔적을 남기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렇지 않으면 그 흔적을 남긴 자는 사단일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418면.

 

또한 우리 안에 있는 거룩하고 참된 정서가 우리가 임의로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만드신 것이라는 에드워즈의 주장도 로크의 백지설에 근거를 두는 셈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절대 통치를 주장하는 칼빈주의 신학을 로크의 백지설을 통해 정당화하고 있다.

 

이제 바깥에서 감각 기관에 주어지는 자극 때문에 관념이 생겨난다. 로크는 이 관념을 단순 관념(simple ideas)이라고 부른다. 단순 관념은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1) 얼음의 딱딱함과 설탕의 달콤함과 같이 한 감각에서 생기는 관념, (2) 공간이나 형태, 정지나 운동과 같은 두 감각 이상에서 생기는 관념, (3) 지각이나 생각, 의지나 자발성과 같이 반성(reflection)에서만 생기는 관념, (4) 쾌락, 즐거움, 고통과 불편함과 같이 감각과 반성 모두에서 생기는 관념. J. Locke,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2, 5; 1, p. 158; 2,6;1, p. 159; 2, 7, 1;1, p. 160.

 

이러한 관념의 공통점은 모두 수동적이라는데 있다.

하지만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수동적인데 그치지 않는다. 마음은 단순 관념을 재료로 삼아 복합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합 관념을 마치 하나의 관념인 것처럼 여겨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아름다움과 중력, 인간과 군대, 우주’가 그 예이다. Ibid., 12,1;1, p.214.

 

인식 대상의 측면에서 볼 때, 복합 관념양태(mode), 실체(substance), 관계(relation)로 나누어진다. 양태는 다시 단순 양태와 복합 양태로 나누어진다. 예를 들어, 단순 양태는 1의 관념이 반복되어 생겨난 3의 관념이다. 1의 관념과 3의 관념은 수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같기 때문에 3의 관념은 1의 관념에 대해 단순 양태(variation)이다.

복합 양태는 서로 다른 종류의 단순 관념이 모여서 이루는 관념이다. ‘아름다움’이 그 예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태에 해당하는 것이 실제 세계에 있을 수 있지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세계에 양태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해도, 예를 들어 꽃이 아름다운 시기가 짧은 반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름다움이 기억의 형태로 더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 있다. 로크에 따르면, 양태는 정서(affection)이다. F. Copleston, A History of Philosophy vol. V. Hobbes to Hume (Westminster, Maryland: The Newman Press, 1961), 82-83면.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의 생각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에드워즈는 세계를 미적 관점에서 본다. 그에 따르면, 성령께서 인간 마음에 주시는 거룩한 정서는 아름다운 정서이다. 또한 아름다움의 정서는 참된 다른 정서들과 분리되어 따로 있지 않고, 다른 정서들과 함께 결합되어 있다. 로크의 말처럼, 아름다움의 정서는 단순 양태가 아니라 복합 양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움의 정서는 현실 세계보다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더 지속적이다. 이러한 논리를 더 밀고 나간다면, 에드워즈의 생각처럼 아름다움의 정서는 유한한 인간의 마음속에서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더 지속적이며 영원할 것이다. 로크에게 있어서 세계의 모든 인식 대상이 인간 마음의 관념으로서만 존재하듯이, 에드워즈에게는 세계의 모든 인식 대상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래서 에드워즈에 따르면, 세계와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려면 하나님께 매어달려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주장하는 에드워즈의 칼빈주의 신학 사상과 일치한다.

 

그런데 로크에 따르면, 우리는 단순 관념에서 가장 먼 것처럼 보이는 복합 관념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은 분석과 종합이다. 먼저 복합 관념을 단순 관념들로 해체해야 한다. 단순 관념은 우리가 감각과 반성을 통해 직접 파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단순 관념들을 다시 모아서 하나의 복합 관념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관념도 형성할 수 있다. 복합 관념 자체를 마치 단순 관념인 것처럼 여겨 분석 작업과 종합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복합 관념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로크의 이러한 생각도 에드워즈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에드워즈는 중도언약(Half-Way Covenant)을 주장했다. 중도 언약에 따르면, 신조를 고백하지만 회심의 경험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이 은혜의 언약에 들어오는 것은 허락되지만 완전히 허락되지 않고 반만 허락된다. 또한 그러한 사람의 자녀는 세례를 통해 교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 부모는 성례에 참여할 수 없다. 이를 통해 그는 그의 외조부이면서 노스햄프턴 회중교회의 선임목사였던 솔로몬 스토다드(Solomon Stoddadd)가 완전 언약(Whole-Way Covenant)을 받아들여 신조는 고백하지만 회심의 경험은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성찬을 주는 것을 문제삼았다. 이를 계기로 에드워즈는 오랫동안 설교하고 목회했던 노스햄턴 회중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18세기 미국에서는 평판이 좋은 성도라야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는데, 에드워즈의 입장은 그들의 야망을 꺽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에드나 게르스트너, 황규일 옮김,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생활』(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13-115면; 정부홍, 앞의 책, 79면.

 

에드워즈가 불완전 언약을 주장할 수 있었던 인식론적 근거는 로크에게 있었던 것 같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로크에 따르면, 복합 관념은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주어진 단순 관념들로 해체되는 과정을 먼저 거쳐야만 참된 지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일반 성도에게 강조해서 말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나 교육을 통해 들은 것에 만족해서 증거도 없이 기독교가 진리라고 고백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335면.

 

이때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직접 체험하는데 있다.

그런데 로크는 1차 성질의 관념과 2차 성질의 관념을 구분한다. 고체성, 연장, 형태, 운동성 등처럼 대상에서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이 1차 성질이다. 예를 들어, 밀알을 쪼개도 이러한 1차 성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에 반해 2차 성질은 그렇지 못한 성질이다. 로크는 1차 성질과 2차 성질의 근본적 차이를 대상을 닮은 것(resemblances)이냐에 두었다. 1차 성질은 대상 속에 있으면서 대상을 닮은 것인데 반해, 2차 성질은 대상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인식 주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식 주관에 관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power)이다. 이러한 2차 성질 이론은 이미 갈릴레오와 데카르트, 더 나아가서 데모크리토스가 내놓은 이론이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와 허공만 인정하고, 나머지 성질은 모두 허공 속에 원자가 어떤 순서로 배열되느냐에 따라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데모크리토스는 환원론자이다. 이 점에 있어서 로크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모든 관념을 결국 단순 관념으로 환원시키려 하며, 2차 성질도 1차 성질의 관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로크는 심각한 문제에 부딪친다. 그의 경험론적 전제에 따르면, 우리 지식은 모두 감각과 반성에서 나온다. 감각은 외부 대상에 대한 감각이며, 반성은 인간 내면에 대한 감각이다. 그래서 우리 지식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관념의 형태로만 있다.

 

그런데 우리가 관념밖에 알 수 없다면, 1차 성질이 2차 성질과는 달리 외부 대상을 닮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로크는 상식적인 인과율에 호소함으로써 대답한다. 로크에 따르면, 단순 관념들이 특정 방식으로 계속 모여서 복합 관념을 이룰 때(예를 들어, 불 관념이 생기면 언제나 연기 관념이 뒤이어 생길 때) 우리는 이러한 관념의 원인이 되는 외부 사물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이 추론은 타당하다. 상식은 로크의 경험론적 전제 이상을 요구한다. 외부 대상에 대한 지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하기 때문이다. F. Copleston, op. cit., 86-90면.

 

버클리가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는 로크의 전제에 충실한다면 2차 성질뿐 아니라 1차 성질마저도 외부 대상을 닮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는 데이빗 흄(David Hume)이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하지만 버클리 주교는 신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그와는 다른 길을 간다. 1차 성질과 2차 성질 모두 관념으로서만 존재하지만(Esse est percipi), 그 관념은 인간 마음속에뿐 아니라 영원히 계시는 하나님의 마음속에도 있다. 따라서 1차 성질과 2차 성질은 일시적이거나 상대적이지 않다.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에게서도 잘 나타난다. 칼빈주의 신학은 우주의 창조주이며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인정한다. 에드워즈는 우주에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존재한다고 여기며, 하나님 없이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긴다. 대서양을 가운데 두고 에드워즈와 버클리가 비슷한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에드워즈의 신 개념과 관련해서 로크의 실체 설명이 눈길을 끈다. 에드워즈는 고전적 실체 개념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서, 실체(substance)를 성질의 담지자인 기체(基體, substratum)으로 이해하며 신을 궁극적 기체로 받아들인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개별 사물에서 우연적인 속성(accidental property)을 차례로 제거(abstraction)하면 결국 모든 속성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 즉 순수 실체를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은 이것을 수용자(hypodochê)라고 표현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이는 장소(topos) 또는 공간(chôra)라는 개념이 된다. 로크에게서도 실체는 우리 마음속에 관념을 낳는 성질이 있도록 뒷받침하는(support)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실체가 있다고 가정해야 하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점에서 로크가 따르는 데카르트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되려면 명석(clear) 판명(distinct)해야 한다. 명석 판명함이라는 개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식으로 성립하려면 그것과 그것 아닌 것 사이에 구분(distinction)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는 데는 모두 동의한다. 그런데 모든 규정들을 빼버리고 남은 것에는 구분이 하나도 남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실체는 데카르트의 순수 공간이 되고 만다.

 

외연과 내포라는 개념이 논리학에 있다. 외연은 개념이 가리키는 범위를 나타내고, 내포는 그 개념에 담긴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외연이 커질수록 내포가 작아지고, 내포가 커질수록 외연이 작아진다. 소크라테스를 예로 들어보자. ‘소크라테스’의 외연은 매우 작다. 그 말은 특정 한 사람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소크라테스’의 내포는 엄청나게 많다. 존재, 사람, 남자, 매부리코의 소유자, 크산티페의 남편, 플라톤의 스승 등과 같은 내포가 ‘소크라테스’에 들어 있다.

이와는 달리 공간의 경우, 외연이 가장 크기 때문에 내포는 전혀 없게 된다. 따라서 신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실제로 이것은 로크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간 데이빗 흄이나 칸트가 도달한 결론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간은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버클리와 에드워즈가 생각하는 신의 역할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주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신의 마음속에서 관념으로서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버클리와 에드워즈는 신을 공간과 동일시했다. 이러한 경우 신의 내재성이 강조되며, 일종의 만유재신론을 주장하는 셈이 된다. 또한 외부 대상은 신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으로서 존재하며 인간의 인식 대상이 되지만, 정작 신 자신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항상 신의 마음속에 있는 관념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상정되는 존재만 된다.

 

하지만 로크에 따르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은 성질들의 관념을 무한히 늘려서 하나로 모아서 만든 복합 관념도 신 관념이다.

 

이러한 경우 신은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있다. 무한히 많은 규정이 모여 신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신은 아무런 규정이 없는 일반적인 실체라기보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개별 실체이다.

 

신에게 순수 공간과 같이 아무런 규정이 주어지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모든 규정이 다 주어질 수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전체성이라는 규정과 유일하다는 규정이 신에게 모두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신의 마음속에 관념으로서만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신 자체에게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신은 우주 전체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주 전체를 담고 있다. 하지만 신은 유일하다. 신을 넘어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은 개체성을 갖는 개별자이다.

 

개별자인 한에서 신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많은 단순 관념들이 모여 이루는 복합관념으로 파악된다.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단자론을 주장할 때, 존재론적으로 볼 때 각 개체에 우주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개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인 우주 전체는 개별자인 한에서 우주 안에 있는 개별자와 같다.

인식론적으로 말하자면, 개별자 관념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관념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갖는 관념이다. 서양 고대철학에서부터 줄곧 내려오는 대우주와 소우주의 일치라는 생각이 여기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

 

로크는 일반적 실체와 개별 실체를 구분한다. 이 구분은 실재하는 본질과 명목상의 본질 사이의 구분과 일치한다. 공간으로 표현되는 신은 일반적 실체로서 실재하며, 좋은 규정을 모두 다 갖고 있는 신은 개별 실체로서 사실은 수많은 단순관념의 복합체에 불과하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신 관념은 일반적 실체에 대한 관념으로서 단순 관념이어야 한다.

 

그런데 로크에 따르면, 단순관념은 감각에 의해 직접 경험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에드워즈의 신학에서도 나타난다. 신은 직접 경험하고 체험해야 하는 대상이다. 일차적으로 신은 논리나 추론에 의해, 교육에 의해 배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또 다른 한편, 단순 관념들이 모여 이루어진 복합 관념인 신은 신의 속성으로 표현되는 단순 관념들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을 알려면 신의 속성을 하나 하나 떼어서 생각해보고 그 속성들을 하나로 모아서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이해(understanding)와 정서(affection)로 나누었다. 이해는 대상에 대해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에 대해서 신의 속성들을 통해 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서는 일반 개체인 신을 경험하는 것이다. 정서에는 구분하고 나누는 작용이 없다. 또한 신이라는 복합 관념을 이루는 단순 관념들도 인간 이성 또는 오성을 통해 파악될 수 있지 않다.

진정한 의미에서 볼 때, 단순 관념은 먼저 감각된 것이어야 한다. 감각은 일차적으로 수동적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신에 대해 단순 관념이 있으려면 외부에 존재하는 신이 우리 속에 단순 관념을 낳는 감각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신이 불러일으킨 정서인가 아니면 사단이 불러일으킨 정서인가가 참된 정서와 거짓 정서를 구분하는 기준 가운데 들어간다. 감각은 일차적으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수동적으로 성립한 감각을 성향(경향성)이라고 부르고, 이 성향이 외부로 드러날 때 의지라고 부른다. J. E. Smith/H. S. Stout/K. P. Minkema (ed.), A Jonathan Edwards Reader (New Haven/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5), xx면.

 

IV

그런데 정서만을 강조하고 이해를 무시해서는 안된다. 철학사적으로 존 로크는 지식의 영역과 한계를 밝히려 했다. 이를 통해 그는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되기에 적합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려 했다. 인간 정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씨름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F. Copleston, op. cit., 71-72면.

바로 이러한 태도는 계몽주의에 맞서 신앙의 감성적 요소를 옹호하려 했던 에드워즈의 눈길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편 극단으로 넘어가서 신앙의 감성적 측면만 강조할 수는 없다. 일정 한계 안에서 지식은 나름대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이성주의와 회의주의 또는 감정주의를 극복하려 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정서는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을 하려면 대상을 알아야 한다. 모르는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차 목적은 바로 사랑할 대상을 알도록 하는데 있다. 정부홍, 앞의 책, 137면.

 

또 다른 한편,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내세운 ‘냉정하고 합리적인’ 신앙관을 물리친다. 그에 따르면, 참된 신앙의 본질은 ‘거룩한 사랑’이다. “그 사랑의 순수성은 내적 성품과 실천 결과에 의해 입증된다.” 장호익, 앞의 책, 598면.

사랑의 순수성은 이성적인 추론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체험하는데서 나온다. 설교도 듣는 사람을 이성적으로 이해시키는데 그쳐서는 안된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거룩한 정서가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말씀을 온전하게 전함으로써,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도록 해야 한다.

 

설교의 목적은 듣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로 빛나고 뜨겁게 불타도록 하는데 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멋진 비유를 사용한다. 그는 이성적 이해를 빛에, 정서와 체험을 열에 비유한다. 그에 따르면, 신앙에는 가슴과 머리가, 깊은 즐거움과 깊은 교리가 함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감정을 조작해서는 안된다. 말씀을 이성적으로 잘 분석해서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우선 말씀을 명석판명(clear and distinct)하게 분석해야 하고 이를 전체적으로 종합할 수 있어야 한다. J. Piper, op. cit., 84-86면.

하나님이라는 관념은 단순 관념들이 모여 이룬 복합관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에드워즈는 설교를 할 때 제스처나 웅변 등을 사용하지 않고 거의 부동자세에서 준비해온 원고를 읽어나갔다. 정부홍, 앞의 책, 164면.

하지만 그 말씀은 듣는 사람의 영혼을 움직였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이성을 통해 말씀이 전달될 때, 성령께서는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자 하는 성향을 갖도록 하신다. 이상현, 앞의 책, 31면.

그래서 그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정서(affection)를 열정(passion)과 구분해야 한다. 정서는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둘 때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이며 성향이다. 이에 반해 열정은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두지 않는 감정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다같이 인도할 때 건전한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깨닫는 기능을 모두 사용하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감동을 주실 때 참된 신앙이 나타난다. 그래서 참된 부흥운동은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고 체험하며, 올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정서를 갖는데 있다. 참되고 거룩한 정서는 거룩한 것에로 향하려 하고 거룩하지 않은 것을 멀리하려는 경향성이다. 따라서 참된 정서가 있는 사람은 거룩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정서에서 실천이 따라 나오는지 살펴보면 그 정서가 참되고 거룩한 정서인지 알 수 있다. 앞의 책, 19면.

그래서 참된 정서에는 균형과 대칭이 있다. 『호세아』 7장 8절에서처럼 뒤집지 않아서 한 쪽이 너무 타버린 전병은 이성만을 중시하는 계몽주의와 열정만 내세우는 감정주의 모두에 해당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앞의 책, 445-447면.

 

 

V

이 글에서는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기수로 알려진 조나단 에드워즈의 기독교 철학을 살펴보려 했다. 그가 특히 존 로크의 경험론적 철학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모든 면을 다 다루지는 못했다. 먼저 에드워즈라는 인물과 그가 당시 직면했던 문제를 다루었다. 이어서 그가 『신앙감정론』에서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을 구분하기 위해 그가 내놓은 척도와 그 이유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또한 존 로크의 경험론적 인식론을 일부 소개하면서 에드워즈의 신학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드러내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참된 정서와 열정을 구분함으로써 신앙이 열정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에드워즈가 『신앙과 정서』를 썼을 때, 대각성 운동이 식어가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계몽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던 당대 지식인들이 대각성 운동을 열정주의, 비이성주의로 매도하면서 교회와 신앙을 공격하고 있었다. 또 다른 한편, 교회 안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로 이성을 비신앙적인 것으로 무시하고 신앙의 감성적 측면만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계몽주의의 중심 인물인 존 로크의 경험론을 배격하지 않고 그 경험론의 의미를 확대해서 전통적 칼빈주의 신학(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통치)을 세우는데 사용했다. 이상현, 앞의 책, 208면.

 

하지만 그가 존 로크의 철학을 모두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존 로크와 그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밀고 나간 조지 버클리와는 달리,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는 인간의 마음 속에 상대적으로 주관적으로만 있을 수밖에 없는 인식대상들을 하나님의 마음 속에 옮겨놓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자리를 찾아준다.

 

이를 통해 그는 인간의 지식이 상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또한 로크의 경험론에 바탕을 두어, 인식에 있어서 이성과 감성을 모두 강조함으로써 전인격적 신앙을 옹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이를 통해 에드워즈는 당대 교회의 문제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오늘날 한국에서 신학과 기독교 철학을 하는 사람이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 문헌

에드나 게르스트너, 황규일 옮김,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적 생활』(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이상현, 『조나단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9)

장호익, “죠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죠나단 에드워즈, 서문강 옮김, 『신앙과 정서』(서울: 지평서원, 20002),

정부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주도홍, 『개혁교회사』(서울: 솔로몬, 1998)

콘라드 체리, 주도홍 역,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서울: 이레서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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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leston, F., A History of Philosophy vol. V. Hobbes to Hume (Westminster, Maryland: The Newman Press,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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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 F. L./Livingstone, E. A. (eds.), “Locke, John”,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Oxford/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991.

Daniel, S. H., The Philosophy of Jonathan Edwards. A Study of Divine Semiotics (Bloomington/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4)

Locke, J.,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Lyon, G., L'Idéalisme en Angleterre au xvviiie siècle (Paris, 1888)

Maurer, A. A., “Edwards, Jonathan”, in: Edwards, P. (ed.),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vol. 2 (New York/London: MacMillan, 1967),

Philips, D., “Edwards and the New England Theology”, in: Hastings, J. (ed.), Encyclopaedia of Religion and Ethics vol. V (New York: T.&T. Clark, 1912), pp. 222, 225.

Piper, J., The Supremacy of God in Preaching (Grand Rapids: Baker Books, 1990)

Schafer, T. A., “Edwards, Jonathan”, in: Encyclopaedia Britannica vol. 8 (Chicago etc.: Encyclopaedia Britannica, INC., 1970), p. 14.

Smith, J. E./Stout, H. S./Minkema, K. P. (eds.), A Jonathan Edwards Reader (New Haven/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5)

 

 

* 참고자료

 

합리론

 

17C 자연과학의 괄목할만한 성장은 자연현상을 가장 정확하고 엄밀한 지식인 수학에 기초한 방법으로 다루었다는데 있다고 파악하고 철학에도 수학적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고 본 것이 바로 합리론의 시작이다. 다시 말해 명증적인 직관을 출발로 하여 그로부터 필연적인 연역적 명제들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철학적인 공리, 즉 자명한 제1원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합리론자인 데카르트는 이 철학적 제1원리를 찾는 것을 “제1철학”이라 명명하고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지식을 꼼꼼이 의심해본 뒤 절대로 의심 불가능한 지식에 도달했을 때, 바로 그것이 철학적 제1원리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을 특수한 지식, 일반적 지식, 보편적 지식의 세 범주로 구분하고 각각의 지식이 의심 가능한 것임을 증명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은 의심 가능하지만, 의심을 하고 사유를 하는 주체로서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도무지 의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분명히 있다(Cogito ergo sum). 그리고 이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말하는 철학의 제1원리이다.

 

합리론의 또 다른 방법은 이러한 수학적 방법 외에 본유관념설이 있다. 이는 플라톤의 상기설이 잘 설명해준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천상계에서 이미 참된 이데아의 세계, 즉 진정한 지식을 가진 채 육체로 들어오지만, 현상계로 내려오면서 단지 그것을 망각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상기’함으로써 참된 지식을 알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신의 관념, 혹은 데카르트가 말했던 생각하는 나의 존재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합리론은 자신의 내부에서 실을 뽑아내 집을 짓는 거미에 비유되곤 한다. 진리는 오로지 순수 사유에 의해서만 도달이 가능하다고 믿는 합리론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경험론

합리론과 그 출발은 같으나 자연과학의 성장이 사실(fact), 즉 감각적 경험에 충실한 객관적 태도를 중시했다는 점에 있다고 보는 것이 경험론이다. 이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실만을 중심으로 사고해야 하며, 사실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지식욕 때문에 경험을 넘어선 영역으로 추리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경험론의 창시자인 베이컨은 독단적인 연역론적 명상만을 되풀이 해왔다는 이유로 기존 학문의 흐름을 비판하면서 실생활과 무관한 공리공론을 타파하는 학문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는 과학적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여러 편견이나 선입견으로서의 네가지 우상(idola)을 제시한다. 인류 중심적 사고인 종족의 우상, 개개인의 차이로 빚어지는 동굴의 우상, 언어의 기호성과 실재성 간의 혼돈으로 빚어지는 시장의 우상, 그리고 권위나 전통에 따르려 하는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그는 이러한 편견들을 모두 버리고 경험적 사실의 세계에서 사고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수집된 경험적 사실들을 종합하여 원인과 법칙을 발견하는 귀납법(induction)이 참된 학문연구 방법이라고 보았다.

 

로크는 백지설을 주장한다. 인간은 어떠한 본유관념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들은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감각과 반성으로 이루어지는 경험을 통해 단순관념들이 얻어지고, 이들이 모여 복합관념, 지식을 구성한다.

우리가 얻은 단순관념들은 그 사물 자체에 내재한다고 보여진 1차 성질, 즉 부피, 크기와 같은 성질과 주관적 상태라고 보여진 2차 성질, 즉 색깔, 맛과 같은 성질로 구분된다. 여기서 말하는 주관성은 개인마다 다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종이 갖는 주관성을 의미한다. 그는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관념뿐이라고 봄으로써 외부 사물에 대한 지각 가능성을 부정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인식이란 두개의 관념의 일치 혹은 불일치에 대한 자각이며, 진리는 그 두개의 관념의 올바른 결합이나 분리를 말하는 것이다.

 

버클리는 로크가 사물에 내재하는 객관적 성질이라고 보았던 1차 성질마저도 주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며 로크를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감각적 경험을 통해 얻은 모든 지식은 2차성질, 즉 주관적 성질이다. 이것은 “존재는 지각이다(Esse est percipi)”라는 그의 명제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지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관념들뿐이고, 따라서 존재, 즉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주관적 관념으로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게 주관의 틀을 벗어난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사과’라고 부르는 저것은 빨갛고 둥글고 단단하고 등등의 여러 관념들의 묶음(bundle of ideas)일 뿐이다. 이러한 입장을 우리는 관념론이라고 부르는데, 버클리는 나의 관념과 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타인의 관념들도 모두 인정한다는 점에서 정신적 실체는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관념론은 주관적 관념론(subjective idealism), 유심론(spiritualism)이라고 불린다.

 

흄은 경험론의 입장을 극단까지 몰고가 그 한계를 드러내준다. 그는 우리의 지식이 관념의 결합에서 생겨난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관념들은 로크에서처럼 인간이 오성에 의해 능동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상호간의 인력과 같은 힘에 의해 결합되는 것이다. 이 결합은 유사, 시간과 공간의 인접, 인과의 세 가지 규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흄이 볼 때 학문의 대상은 관념 상호간의 관계와 사실 두 가지인데, 관계를 다루는 학문은 수학처럼 사실과는 동떨어진 채 오직 관념들간의 관계만을 다루므로 절대적 필연성을 갖는다. 하지만 경험적 사실은 절대적 필연성을 결여한다. 또한 경험적 사실 이상의 추리를 할 때 우리는 인과관계를 토대로 하는데, 이 인과적 지식은 얼마나 확실한지에 대해 흄은 고민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인과적 지식에 의존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불이 붙는다’와 ‘연기가 난다’라는 두개의 개별적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불이 붙고 연기가 난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우리는 수차례 불이 붙고 연기가 나는 연속적인 현상을 경험했기 때문에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날 것이라고 연상하는 습관을 갖게 되고, 이러한 습관으로 생긴 결과에 대한 기대가 여러번 충족되면서 ‘불이 붙는다’는 사실과 ‘연기가 난다’라는 사실의 결합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불이 붙으면 연기가 난다’와 같은 인과적 지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과성이란 경험적인 사실 속에 그것의 필연적 관계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토대로 하는 경험적인 신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A에 따른 결과인 B를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기대할 수 있을 뿐 ‘반드시 그러할 것이다’라고 보장할 수는 없다. 결국 엄밀히 따지면 인과성은 개연성에 불과하며, 자연적 사실에 관한 인과적 지식은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지식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경험론은 절대적 지식은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다는 회의론(Scepticism)에 빠지게 된다.

 

 

칸트 철학의 인식론적 의의

진리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인 합리론과 경험론이 각각의 한계점을 드러내자 그 난점은 극복하고 장점만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칸트 비판론의 출발점이다. 합리론은 자연과학의 괄목할만한 성장의 원인이 그 수학적 방법론에 있다고 보고 명증적 직관과 필연적 연역을 기반으로 하는 수학적 사고를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따라서 “Cogito ergo sum”이라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공리에서 출발하여 순수 사유로서 연역해낸 명제, 즉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는 절대적인 명제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고 해서 모두 진리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합리론적 진리관은 인간의 이성을 맹신한 나머지 이성에 기반한 사유와 실질적 존재를 동일시해버리는 오류를 낳게 되는데, 예를 들어 “황금으로 만들어진 산”과 같이 개념상 모순을 포함하지 않지만 실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리성을 결여하는 공허한 사유의 독단에 빠진다는 것이다. 반면에 경험론은 수학적 방법이 아닌 경험적 사실에 기반한 객관적(실질적)사유 방법이 자연과학의 성공 요인이라 보고 이를 철학의 기반으로 삼을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경험론자들은 경험만이 지식의 원천이라고 본다. 실제로 일어난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실질적 측면을 결여한다는 합리론적 진리관의 난점을 극복한다는 것은 경험론이 가지는 장점이다. 하지만 경험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이고 일회적이라는 점에서 보편타당성을 결여한다는 점은 경험론적 진리관 역시 참된 진리의 충분조건으로서 성립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경험론적 주장을 극단으로까지 진행시켜 궁극적으로는 회의론에 빠지고 말았던 흄의 사례는 경험론의 난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결국 합리론과 경험론이 주장하는 진리는 참된 진리가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밝혀내지는 못한다는 난점에 각각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각각의 장점이 갖는 타당성을 인정한 칸트는 이 두 학설의 장점만을 종합하여 진정한 진리 인식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해명코자 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인식을 감성과 오성의 결합으로 설명한다. 감성은 외부에서부터 질료로서 주어지는 미지의 대상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성의 형식을 통해 지각하는 능력이다.

 

이 지각이 감성적 지식인데, 이는 시간과 공간을 그 형식으로 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관적 측면이 다분한 지식으로서 경험론적인 진리와 유사하다. 따라서 경험론적 난점인 보편 타당성을 결여한다는 점을 극복하기 위해 칸트의 인식론은 대상을 지각하는 경험적 지식에서 멈추지 않는다. 감성의 작용을 통해 얻은 지각 자체를 질료로 삼아 12가지 범주로서의 형식을 통해 보편타당한 객관적 지식을 정립 가능하게 하는 오성의 작용은 이 경험론적 난점을 극복하게 한다. 동시에 경험을 통해 얻은 실질적인 지각을 질료로 한다는 점에서 합리론적 난점인 공허한 이성의 독단 또한 극복된다. 결국 칸트의 비판론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인간 인식 능력의 결합을 통해 합리론과 경험론이 빠졌던 난점을 모두 극복하고 참된 진리의 인식 가능성을 확립시킴으로써 그 의의를 갖는다.

 

또한 칸트의 철학은 철학사적으로도 의의를 갖는데 우리는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명명한다. 소박한 실재론인 모사설을 의심없이 기저에 놓은 채 실재하는 객관 세계로서의 대상을 탐구하고자 했던 기존의 학문의 이러한 대상 중심성에 반기를 든 최초의 철학자가 바로 칸트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인식 주관의 형식이 질료인 대상을 받아들여 오성의 형식에 의해 구성함으로써만 그 대상의 존재가 인정된다고 봄으로써 대상보다 우리의 인식능력을 우위에 놓는 발상적 혁명을 이루었다. 비록 인식이 최초로 성립하는 근거가 외부에서 주어진다는 점에서 인식주관을 넘어선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무엇, 즉 물자체를 인정하지만, 사실상 인식론적으로 그것의 실재성은 부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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