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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조언(요3:10,11)

by 【고동엽】 2007. 6. 30.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조언(요3:10,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요 3:10-11)

 

 

 

그리스도께서는 중생 교리에 대한 니고데모의 무지와 의심을 책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책망하시면서 사용하신 논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니고데모는 이러한 교리를 알아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평범한 사람들보다 신앙의 여러 교리를 더욱 잘 알고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11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중생 교리는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강한 어조로 니고데모가 중생해야 한다고 단언하신 것은 아주 분명한 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교리) 중생 사건은 분명 있다.

 

회심 또는 중생 교리는 기독교의 가장 위대하고 기본적인 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본문과 문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이 교리를 가르치시고,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주장하시는 방식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반드시 알고 믿어야만 하는 무한히 중요한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회심 또는 중생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교리는 많은 반대를 받아 왔으며, 불신자들이 의심하기 쉬운 교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이런 회심을 체험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을 다루는 교리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교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합니다. 참된 회심이 일어날 때 영혼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중생하지 않은 자연인에게는 천국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회심 교리를 크게 의심하며, 회심 교리를 일종의 꿈같은 것으로 여겨 크게 반대합니다. 그러므로 회심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 회심에 대한 교리를 의심하는 것은 거짓이나 위선이거나, 공상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또한 회심 교리에 대해 반대하며, 니고데모처럼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저는 회심하지 못한 자연인에게 몇 가지 분명한 이유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에게 회심이 실재한다는 확신을 주고자 합니다. 여기서 저는 특히 몇 가지 명백한 사실을 함께 제시함으로써 우리가 흔히 ‘회심’이라고 부르는 사건 혹은 변화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1. 인간의 행복은 창조주와의 연합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지 물질적인 것이나 감각적인 것만으로 만족하는 짐승보다는 더 높은 행복을 누리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짐승보다 더 탁월하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짐승보다 더 뛰어난 기능이 없다면 인간이 짐승보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 만들어 졌다고 추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이 짐승보다 더 뛰어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짐승은 자신이 창조주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떤 증거도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행복은 짐승보다는 더 고차원적인 것으로 구성되며, 인간의 행복은 창조주와 연합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창조주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주에게서 소외된 상태로 있는 것이나, 창조주와 의견이 대립되고 다툼과 적대감이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얼마나 비합리적입니까?

 

 

 

2. 이성은 인간이 거룩하지 않은 본성으로는 창조주와 연합할 수도 없고 기쁨을 결코 누릴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왜냐하면 본성이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이 본성의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성이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과 연합할 수 없다는 것을 이성은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아모스 3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과 상반되는 본성을 가진 어떤 사람과 연합하거나,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기뻐하도록 허용해 주신다는 생각은 비합리적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허용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성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본성과 반대 되는 본성을 가진 자를 혐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 싫어하는 자를 하나님이 자신과 연합하게 하시고, 자신을 기뻐하도록 허용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시편 5 편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게다가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본성과 반대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을 기꺼이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도록 하려 하신다 해도 이것은 본질상 불가능합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사람을 혐오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도 하나님을 혐오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본성과 반대 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이 미워하는 것을 좋아하거나 즐거워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싫어하는 것을 가까이 하거나 연합하려는 것은 인간에게 전혀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인간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려고 합니다.

 

 

 

3. 경험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거룩하지 않은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이상 거룩하게 될 수 없습니다. 4. 이성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 창조주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면 변화할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5. 이런 변화는 틀림없이 아주 큰 변화일 것입니다. 6. 성경은 이런 큰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증언합니다. 7. 수많은 사람의 삶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 이러한 탁월한 마음의 변화가 있다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변화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변화를 경험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 변화의 결과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변화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 두세 명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 아니 수십만 명, 수백만 명이라면 이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변화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런 증거는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첫째, 악명 높은 많은 사람입니다.

둘째는 순교자들입니다.

 

 

 

첫째, 예전에 악명 높고, 방탕한 삶을 살며, 모든 종교를 경멸하고, 온갖 불경스럽고 타락한 삶을 살며, 사람이기보다는 짐승 같고 마귀같이 보였던 사람들이 놀랍게 변화되어, 헛되고 악한 삶을 사는 대신 겸손하고, 경건하고, 영적이며 천국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와 종교개혁 시대에 특히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1절이 잘 보여 주는 것처럼 사도 시대에 우상숭배, 간음, 음란, 도둑질, 탐욕, 술 취함, 욕설, 강탈 등을 일삼던 많은 사람들이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고전 6:9-11) 또한 잔인한 박해자가 성령으로 변화되어 겸손하고 온유하고 열심 있는 성도가 된 경우도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일시 동안만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온갖 어려움과 시험 속에서도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 있는 이런 놀라운 변화는 개인의 회심보다 많은 사람의 회심 속에서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놀랍게 삶이 변하는 수많은 사람을 볼 때, 마음의 변화가 있다는 큰 증거를 보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한 사람이 마음의 변화 없이도 외적인 삶과 행동이 놀랄 만큼 변한 것처럼 보이고, 탁월한 성도처럼 행동하는 듯이 보일 수는 있지만 수많은 사람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둘째, 순교자들 속에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수천의 순교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큰 증거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본성이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착한 양심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고난을 견디고, 삶에서 큰 변화를 보이며, 마음의 거룩함을 보여 주는 것은 마음이 변화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 거룩을 드러내는 것은 더 큰 변화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고통 없는 상태보다 마음에 더 큰 시험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불신자들과 회심의 실재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환경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들은 회심의 실재에 대한 가장 좋은 증거를 얻기 위해 고통스러운 환경, 즉 큰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시험당하는 것 같은 환경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해 극심한 시련을 겪은 수백만 명의 성도는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인 사랑과, 세상을 버리는 것에 대한 놀라운 증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극단적인 고통과 인간이 고안해 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고문으로 시험을 받아 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겪은 많은 고통은 아주 긴 고통이었습니다. 박해자들은 온갖 고문을 통해 순교자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하기보다는 온갖 고통을 겪으며 심지어 죽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박해자들은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순교자들의 신앙과 사랑과 용기를 꺾을 수 없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아주 침착하고 크게 기뻐하며 모든 고통을 이겨 냈습니다.

 

또한 많은 순교자가 고통 중에서도 크게 기뻐했으며,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용감하게 고통을 이겨낸 것은 소수의 사람만이 아닙니다. 모든 계층의 수많은 사람이 이런 고통을 이겨 냈습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과 용기를 가지고 지상의 가장 크고 잔인한 왕들을 이겨 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의 구주와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것보다는 기꺼이 고통당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역사를 읽는 사람은 이들이 자연적인 본성 이상의 어떤 것을 가졌다는 것 즉 사람들이 자연적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인 강력한 원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또한 한때 기독교에 대한 잔인한 박해자였다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마침내 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며 인내로 고통을 이겨 낸 많은 사람이 있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에서 순교자들이 보여 준 믿음, 견고함, 쾌활함은 기적이 계속된다는 사실과 회심의 실재를 보여 줍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을 고려한다면, 순교자들의 이런 행동은 그리스도와 사도 시대에 이루어진 기적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놀랍게 보여 줍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에서는 자신의 종교의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그러한 순교자를 많이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는 성도는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인내함으로 승리했습니다.

 

 

 

본성을 바꾸고, 본성의 힘을 능가하는 힘을 주는 원리를 주입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어떤 강력한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이 어떤 특정한 기질이나 조건을 가진, 두세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삶의 조건 속에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바꾸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습니까? 모든 고난을 견디며,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 기쁨으로 보이지 않는 대상을 사랑하려면 본성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을 강하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대상에 대해 일시적인 감정을 가질 수는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는 그렇게 강하게 마음을 밀착시킬 수 없습니다. 비록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대상이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같은 크고 가시적인 결과를 갖다 주는 사랑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신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이런 사랑을 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성의 목소리, 성경, 경험, 가장 탁월한 사람들의 증언은 회심이 반드시 있다는 것에 일치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회심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음을 이성은 많이 가르쳐 줍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자요 심판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성적인 피조물이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게도 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에 일치하지 않을 때 그들을 하나님의 임재에서 추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본성적으로 거룩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기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본성이 변해야 합니다.

 

 

 

성경은 회심의 교리를 많이 가르칩니다. 만일 우리가 회심을 부인하면 사실상 우리는 성경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회심의 필요성과 우리의 마음이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을 부인하면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회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을 부인하면, 성경의 나머지는 우리에게 전혀 의미가 없게 됩니다.

 

 

 

경험은 회심과 같은 일이 있음을 자주 가르쳐 줍니다. 수많은 성도가 자신의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도, 좋은 환경 속에서의 자신의 행동만이 아니라 큰 고난 속에서의 행동에서도 실제로 자신이 회심했음을 보여줍니다.

 

 

 

만일 이 회심 교리가 이성의 소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만일 이 회심 교리가 이성에 아주 어려운 교리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로 이 문제를 결정하는 것은 충분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당연히 하나님은 구원의 방법과 하나님께 나아오는 방법을 타락한 사람에게 계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외에 어디에서 우리가 그러한 계시를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성경이 이런 회심 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면, 하나님은 사람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계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만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수많은 시대의 경험도 회심과 같은 마음의 변화와 인간 본성의 변화가 반드시 있음을 보여 줍니다.

 

 

 

8. 자신 안에 이러한 변화를 체험했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의 증언을 거절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만일 그들이 지성적으로 아주 떨어지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증언한 것은 그들이 체험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불신자들에게는 아주 이상한 것이고 자신의 마음으로 도저히 생각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증언들은 서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아주 크게 일치합니다. 또한 그들의 증언은 본질이 같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시대가 달라도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증언을 믿는다면 그들의 체험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신적인 일들(사랑, 겸손, 복종)을 맛보는 새로운 감각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한때는 그들이 체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수시로 체험합니다.

 

 

 

반대: 많은 사람이 제기하는 가장 큰 반대는 자신이 회심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이 아주 나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답: 이런 나쁜 행동은 바르게 생각하기만 하면 오히려 성경이 우리에게 회심에 대해 말해 준 것을 확증해 줍니다.

 

 

 

(1) 성경은 불법적인 것이나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2) 성경은 사람이 종종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속인다고 가르쳐 줍니다.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시 83:2-3).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롬 2:29).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눅 11:44).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마태복음 25장 1-13절은 어리석은 처녀들도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경건한 자들도 죄와 죽음을 경험하고, 때로 나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우리는 그들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4) 많은 거짓 증언이 있다고 해서 참된 증언이 전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거짓 증언이 어떻게 참된 증언은 전혀 없다고 하는 증명이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거짓말이 많다고 해서 모든 진술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성실함이 많다고 해서 전혀 정직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금처럼 보이는 많은 것이 금이 아니기 때문에

금은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많은 것이 진짜 다이아몬드가 아니라고 해서 진짜 다이아몬드는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5)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면서 크고 강한 증거가 있는 사람들을 회심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적용)

 

이 교리에 기초해서 저는 자연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회심을 추구할 것을 권면합니다. 만일 본문이 말하는 이런 회심이 있다면, 회심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회심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며,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가장 비참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지옥 뚜껑에 매달려 있으며, 매일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이 있는 것이 틀림없듯이 회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으며, 날마다 지옥의 비참한 상황으로 떨어질 위험 가운데 있고, 지옥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만일 실제로 회심이 있다면,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에서 어떤 안식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간절히 권면합니다. 하나님께 참되고 구원 얻을 만한 방향전환을 함으로써 여러분이 처해 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추구하십시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다소 다른 방법으로 적용을 하겠습니다. 저는 먼저 여러분에게 회심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지침을 드리겠습니다. 그런 다음 이런 지침을 따르도록 여러분을 설득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회심하기 위해 따라야 하는 지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두 견해 사이에서 오랫동안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려고 하는 일에 어떤 결정을 내리십시오. 회심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면,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해 아직 아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걱정하십시오. 그것은 얼마나 비합리적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까?

 

여러분은 시간이 그렇게도 남아돕니까? 여러분의 삶을 개혁하는 것이 최선인지 아닌지에 대해, 어떻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최선의 선택인지를 결정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결정을 내리십시오. 열왕기상 18장 2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그러므로 저는 이렇게 말하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의 정욕을 좇는 것이 최선이면 정욕을 좇으십시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을 좇는 것이 최선이면 하나님을 좇으십시오.

 

 

 

(2) 미래의 유익을 바라고 미루지 마십시오.

 

벨릭스처럼 되지 마십시오. 벨릭스는 바울이 신앙에 대해 말했을 때, 바울을 내어 보내면서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바울을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행 24:25).

-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24:25)

 

여러분이 지금 젊고, 아직도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미루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했던 많은 사람이 결코 이 세상에 더 머물지 못했으며, 그들의 상태는 영원히 결정되어 그들이 결심도 하기 전에 지옥이 그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로 여러분이 여유는 더 많아지고, 유혹은 더 적게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미루지 마십시오. 또 다른 때 우리 마을에 성령이 부어지실 것을 희망하면서 미루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생애 동안 또 다른 성령의 부어지심이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만일 또 다른 성령의 부으심이 있다 해도 여러분이 그런 혜택을 받게 될 것인지는 불확실합니다. 성령이 여러분을 각성시켜, 여러분으로 하여금 구원을 추구하도록 해 주시기를 기다리며 미루지 마십시오. 이것은 가장 치명적인 추측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영향을 받는 방법은 정해진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며, 지혜의 문 옆에서 기다리며, 지혜의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8:34)

 

 

 

(3)여러분이 어렵다고 느끼는 일에 순종하십시오.

 

여러분의 부패한 본성에 아주 어렵다고 느끼는 것에 순응하기까지 여러분이 회심할 수 있는 희망적인 길에 들어섰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많은 사람이 쉽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 또는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엄청나게 공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우리의 노력을 너무 많이 쏟아 부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그 길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은 여전히 좁은 문입니다.

 

넓은 문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데 보낸 시간은 아주 무익하게 보낸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부지런히 찾다가 갑자기 지옥에 떨어지게 되면, 그들의 모든 계획과 희망은 끝장이 납니다. 구원을 얻는 데 필요한 것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어려워 보입니다. 어떤 의무들은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와 성향과는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아주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달콤하게 보이는 것과 자신이 많이 즐기는 것을 부인해야 합니다.

 

그들의 본성은 끈질기게 그런 것들을 요구하며, 그래서 그들은 끈질긴 자신의 욕구에 ‘아니오’ 라고 말하는 법을 모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해야만 하는 어떤 것들은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주 어렵게 보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은 편안함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신앙적인 일에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아주 어려워합니다. 신앙적인 것들은 평소 자신들이 해 왔던 일과는 너무 다른 새로운 것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어려움에다가 새로운 어려움을 더 추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앙에 속한 많은 것이 사람들에게 어렵게 보이는 이유는 신앙적인 것들이 그들의 기질과 아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그들의 기질에 상반되며 자신들이 행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신앙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의 자연적인 성향에 반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내성적이어서 자신의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내적인 어려움과 유혹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어려워합니다.

 

어떤 것들이 사람들에게 어려워 보이는 것은 환경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는 아주 쉬운 의무가 다른 환경에서는 아주 어렵게 보입니다. 구원받는 데 필요한 것들이 사람들에게 아주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의 교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때때로 예수 믿는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하는 신앙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을 매우 힘들어합니다. 특히 책망을 받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에게 어떤 잘못을 했을 때, 돌아와서 이웃에게 질문을 고백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어렵습니다. 또한 자신의 영적인 어려움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교만 때문에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찬식에 오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려면 자신들의 신앙 지식을 점검받아야 하는데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을 싫어하여 아예 성찬식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많은 부분은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아주 어려운 말씀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들여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해도 좋은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회심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에게 아주 어려워 보이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삶과 죽음이 여러분 앞에 있는데 왜 여러분은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습니까?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4) 죄에 속아서 여러분의 눈이 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것은 회심의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이며, 당연하게도 이것이 수많은 사람의 회심을 방해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에 대해 눈을 부릅뜨고 철저하게 여러분의 마음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악한 행동에 대해 핑계를 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이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해 속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이 그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주 나쁘고 하나님의 순수한 눈에 혐오스러운 것들을 행했습니다. 인간은 이런 일을 행할 때, 특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언제, 어떻게 계속해서 죄를 지을 때, 강한 선입관을 갖게 되어 자신들의 이전 습관을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을 합법적인 것이라 여기게 되고, 자신들의 행동이 악하거나 정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죄책감을 갖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이 악한 습관에 빠져 있으므로 사람들에게는 큰 죄책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일은 죄책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에 속아 죄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속임수를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미래의 행동에 대해 눈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 해가 없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거나 여러분의 영혼에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의 원칙을 굽히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말하자면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성향이 일치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사람들은 원칙 없이 행할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원칙 없이 행동하면 좌우로 치우치거나 넘어지거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의 지혜는 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법칙으로 삼아 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또한 삶의 원리와 실천이 일치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시도하지 않습니다. 이런 경향성이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크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자기기만은 자신에게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잠언 14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을 영원한 죽음과 멸망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장 20절에서 이런 자들에게 화를 선언합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사람들이 이처럼 하나님과 자기 양심에 대해 거짓되게 행하는 성향이 죄인들이 하나님께 참되고 철저하게 회심하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며, 아무리 경고와 조언을 받아도 소용이 없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이런 것이 회심에 반드시 필요하고 회심에 이르는 길에 큰 진보가 되는 철저한 개혁을 방해합니다.

 

히브리서 3장 12-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또한 고린도후서 1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라.”

 

 

 

(5) 어떤 죄는 짓지 않았다고 우쭐대지 마십시오.

 

만일 죄를 지었다면 죄인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종종 이러저러한 죄를 지은 것은 몰랐기 때문이라고 어리석게 변명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악한 행동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했을 때, 비록 자기가 그런 행동을 하기는 했지만 진심으로 원해서 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악한 행동입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런 행동을 하며, 전혀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행동이 구원받기 위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데 큰 방해가 됩니다.

 

 

 

(6) 의심스러운 것 즉 합법적인지 그렇지 않은지가 불분명한 것은 피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육체적 욕구를 채워 주는 어떤 것에 이끌린다면, 또는 합법적인 것인지 불법적인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은데도 물질적으로 풍족하게 해 주거나 명예롭게 해 주는 것이라면, 또는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한 것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계속 들 때, 여러분을 위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 23절에서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금지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열매는 맛보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의심스러운 일은 하지 마십시오. 단지 순간적인 쾌락을 위해서나 친구와 행동을 같이 하기 위해서나 잠시 동안 세상적인 유익이나 명예를 위해 양심을 불안하게 하거나, 여러분의 영혼을 위험에 노출하는 일은 하지 마십시오.

 

 

 

(7) 만일 여러분의 회심에 방해되는 것은 무엇이든 피하려고 한다면, 명백히 죄악 된 것만이 아니라 죄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도 피하십시오.

 

그리스도는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험 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그러므로 유혹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회심을 크게 방해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세상의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회심에 방해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여러분 안에 있는 거짓만이 아니라 세상의 유혹을 피하십시오.

 

 

그 자체로서는 악하게 볼 만한 것이 아닌 어떤 습관적인 행동이 여러분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거나, 개인 기도나 다른 신앙적인 의무를 소홀히 하게 하거나, 죄악 된 말이나 행동으로 자꾸 인도하는 등 경험적으로 여러분에게 해가 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또는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설교를 통해 이것이 죄짓도록 만드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아주 확실히 그런 행동을 피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회심으로 가는 길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피해야 합니다.

 

 

 

(8)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행하는 것만으로 회심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사람에 대한 의무도 추구하십시오. 참된 회심에 이르는 길은 철저하게 여러분의 삶을 개혁하고 십계명의 두 돌 판에 기록된 모든 의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회심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설교 듣고,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사람에 대한 공의와 자비를 행해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의무, 형제와 자매에 대한 의무, 남편과 아내와 자녀에 대한 의무, 이웃에 대한 온유와 공의와 자비의 의무를 행해야 합니다.

 

 

 

성경읽기, 기도, 예배 참석은 어떤 미덕이나 힘을 가진 회심의 수단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수단은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려고 지정하신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하는 방법으로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의무가 영적인 은혜를 받는 방법임을 성경에서 발견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이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근무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가 탁월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은 이런 일을 통해 그리스도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심으로써 백부장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고넬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 기도에 힘쓸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선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고넬료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아 구원받고 이방인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행10:4)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행11:14)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외적인 의무와 사람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비교한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후자가 더 우선적입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은 하나님이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9:13)

 

 

 

(9) 만일 여러분이 회심하기를 원한다면 사람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법칙으로 삼으십시오.

 

만일 위대한 신앙고백과 좋은 평판과 큰 체험을 한 성도가 있더라도 그런 성도들의 모든 것을 본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그들을 여러분의 법칙으로 세우시지 않았음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의 법칙으로 주신 것은 순수하고 전적으로 옳은,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좋은 본보기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법칙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보기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장점과 결점을 지나치게 관찰하며 살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내가 시험에 들어 넘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대로 산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작든지 크든지 다른 사람의 잘못은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른 사람의 삶에는 우리가 풀 수 없는 어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가 억지로 풀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재판관이나 주인으로 임명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삶의 방향에 필요한 충분하고 확실한 법칙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나쁜 행실을 보고 어떤 결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의 말씀대로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부름받았지 율법의 재판관으로 부름받지는 않았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약4:11)

 

 

 

(10) 어려운 시기에는 더욱 분발하도록 하십시오.

 

사람들이 회심을 얻는 데 유익이 되는 시간에는 많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이 크게 부어지는 시간은 회심을 얻는 복된 시기요 영광스러운 기회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크게 반대 되는 시기도 있습니다. 이 때 물결은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모든 것이 회심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는 지금이 바로 이런 때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주 많은 사람이 어려운 때에 죽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은 좋은 때만이 아니라 어려운 때에도 찾아옵니다. 죽음은 사람이 성령 충만함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은 성령이 부어지는 시기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시기에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회심하기에 어려운 때는 회심에 대한 더 많은 관심과 더 큰 노력과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악한 시대의 유혹과 나쁜 본보기들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한 물결이 거셀수록 더욱 힘을 내어 대처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2:40)

 

 

 

(11) 여러분이 구원을 추구하는 동안 마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이 회심을 추구하기 시작하면, 마귀는 이 사람에 대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마귀는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온갖 술책과 유혹을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자기 나라의 백성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많은 것을 제안합니다. 마귀는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을 자만에 빠지게 하거나 낙심에 빠뜨리려고 합니다.

 

 마귀는 회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으며, 은혜의 날은 지나갔다고 말합니다. 때로 마귀는 아주 불경한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회심하기를 원한다면 마귀의 이런 유혹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그러한 제안들은 보통 마귀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분의 적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결코 마귀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마귀의 제안을 물리치십시오. 마귀의 모든 유혹에 대항하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안전한 길로 인도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마귀의 말에 귀 기울이면, 마귀는 곧 여러분을 벼랑 끝으로 데리고 가서 구렁과 수렁에 빠뜨려 여러분의 영혼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만일 사탄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도록 하면,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은 사탄과 토론하거나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귀와 토론하려고 하지 말고, 마귀에게서 여러분의 귀를 돌리십시오. 여러분에게 더욱 유익한 것을 생각하도록 하십시오.

 

 

 

(12) 여러분의 영혼에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것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때로 모든 사람의 확신과 회심을 추구하며 행했던 것들이 이런 것들 때문에 상실됩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감정과 시간을 빼앗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려진 밭에서 씨가 자라지 못하도록 막는 가시덤불 같은 것입니다. 때로 이것은 마음을 빼앗는 어떤 즐거움입니다. 때로 이것은 어떤 세상적인 일, 새로운 사건입니다. 때로 이것은 어떤 사람의 환경 속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일입니다. 때로 이것은 공적으로 토론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이 이런 일로 너무 분주하여 영혼이 둔감하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누가복음 21장 3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13)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모든 사람이 자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가 죽기 전에 회심할 수 있을 것이며, 마침내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지혜를 자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지혜로 자신을 위한 합당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의지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많이 해 놓은 기도를 의지합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에게 유해하고 치명적인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시편 36편 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스스로 자긍하기를 자기 죄악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 자만은 회심에 필요한 각성과 위기의식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자만은 위험에서 탈출하려고 시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14) 회심을 위한 수단을 철저히 사용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고의로 그런 일을 무시했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임종의 순간에 자신이 안전하다는 아무 확증도 없을 때, 어리석게도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무시한 것 때문에 여러분이 망하게 되었다고 여러분의 양심이 여러분을 고소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십시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 9:10). 어떤 은혜의 수단도, 의무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모든 은혜 수단과 섭리와 기회와 은사를 선용하십시오.

 

 

 

(15) 여러분이 회심하는 방법을 알기 원한다면 비밀스러운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말고 계시된 것에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신명기 29장 2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뜻 특히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대한 것으로 혼란스러워하지 마십시오.

 

 사람과 천사들에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고치꼬치 물으려 하지 말며,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그 누구도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치 않은, 일곱인 으로 봉해진 책의 봉인을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이런 것들로 자신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할 때, 그들은 불행한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그런 함정을 피하고, 여러분에게 충분히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명령하신 것,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조언과 지침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전부 이런 것에 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잘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원한 비밀 계획 같은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힌다면, 여러분은 빗나간 길로 걷는 것이며 불행과 파멸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16) 여러분이 행한 것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지난 행동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즉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많은 것을 했는가, 얼마나 많이 실패했는가, 얼마나 많은 기도가 응답받지 못했는가, 얼마나 오랫동안 추구했는데도 얻지 못했는가 등을 생각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뒤에 있는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빌3:13)

 

여러분은 앞으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더 충분히 생각해야 합니다. 즉 은혜와 기회의 날이 아직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여러분이 손에 쥔 좋은 것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런 것들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마침내 성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17) 여러분이 한 것이나 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신뢰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것을 했을 때, 여러분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여러분의 가장 작은 죄라도 속죄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받을 만한 값을 지불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한 행동 중에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한 것이 있다면, 아니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천 배나 더 많이 어떤 일을 했다 할지라도 여러분이 하나님께 대한 반역자로서 행한 일이므로 하나님께 존중받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영원한 비참에서 구원해 주시거나 여러분에게 작은 은혜라도 주시거나, 여러분의 어떤 기도나 간구에 응답해 주셔야 할 정도로 여러분이 하나님께 자비를 받을 만한 가치 있는 행동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무한한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수만 시대를 기도와 고난과 깨어 있음과 수고로 채운다 해도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죄를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회심하여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기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침을 여러분에게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지침을 잘 따르기를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회심을 위해 여러분에게 제시된 지침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저는 회심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이 이런 지침을 계속 간직하고 자주 생각해서 이런 지침대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지침으로서 이제 여러분이 왜 지침을 따라야 하는지에 대해 두세 가지로 간단하게 결론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이런 지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의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잠언 4장 13절에 나오는 지혜자의 말이 여기에 잘 적용됩니다.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말고 지키라 이것이 네 생명이니라.” 제가 여러분에게 지침을 주는 것은 여러분의 영생을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삶보다는 엄청나게 더 긴 삶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여러분의 영생을 위한 것입니다. 영생은 결코 평범하거나 비천한 삶이 아닌 영광의 삶입니다. 영생은 면류관과 왕국을 소유하고 영원히 살며, 큰 영광과 행복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2)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 가운데 나이가 어리든지 많든지, 자유자이든지 종이든지, 부자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회심의 가능성에서 제외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구원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집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제공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회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회심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팔을 벌리고 여러분 모두를 영접하십니다. 잠언 8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3) 만일 여러분이 이러한 지침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회심하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잠언 2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여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인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지침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침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이런 지침을 따른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길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회심하기를 원하고 멸망에 들어가지 않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지금 회심하고 지옥에서 해방되며, 죽음을 더 잘 준비하고, 영원히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들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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