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 주를 찬송/ 시편71: 5-15
며칠 전이었습니다. 저 자신이 매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주변에서 들리는 소문이나 일어나는 일들이 밝고 기쁘고 기분 좋은 것 뿐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날 따라 제 형편도 매우 안 좋은데다가 교회 안팎으로 들리는 이야기마다
다 슬프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너무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제 마음에 무거운 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저의 기분은 우울해져서 말하기도 싫고 사람 만나기도 싫고 기도마저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심하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나? 더욱이 목사라는 사람이 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나? 상황이 조금 어렵다고 해서, 들리는 소문들이 슬프고 답답하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다니, 이것이 고작 예수 믿는 사람의 수준인가? 이것이 목사의 수준인가? 세상 사람들도 다 이 정도는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시편71편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살펴 보다 그 안에 꼭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말과 행동을 거꾸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해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악한 사람들, 불의한 사람들의 함정에 빠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 그 함정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그를 대적하는 자들은 '이제 저 사람은 끝장났다. 하나님도 그를 도와주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이 틀림없다. 이제는 우리 손에서 못 빠져 나올 거야.'라면서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마구 불러 대면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장면이 바로 71편의 배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이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말을 중간 중간에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중함에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 하리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주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는 주님을 찬송하는 찬송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차고 넘칩니다.' 여러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비록 내 형편은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나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 때문에 나는 주님을 더욱더 찬송할 것입니다. 형편이 어떻게 되든 간에
상관 없이 나는 주님을 찬송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저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도 기쁨과 찬송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71편 전체를 자세히 살펴 보았는데, 역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모태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붙드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늙어서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절대로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면 비록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나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믿음이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도와 주시라고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확신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비록 형편은 어려웠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20절입니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면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이 말씀을 잘 주목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에게 심한 고난을 허락하신 주님이시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고난을 당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들도 경험하지
않는 극심한 고통을 씹으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운이 나빠서 찾아온 고통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에게 많고 심한 고난이 왔다면 이것은 주께서 배후에 계셔서 허락하신 것이다. 선하신 주님이 이것을 허락하셨다면 나를 위한 선한 뜻을 갖고 계실 것이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그 십자가가 무겁고 고달프지만 절대로 나에게 손해가 되게 하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확신을 갖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와 같은 심한 고난을 허락하신 이가 주님이시라면 반드시 나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신다는 확신이 믿음입니다.
'비록 내가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처절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그 능하신 팔로 그 수렁에서 나를 끌어 올리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절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울다가도 찬송하는 것입니다. 탄식하다가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할렐루야! 그런데 '가끔 나는 왜 이런 수준의 삶을 살지 못할까?' 하는 것이 목사로서 솔직한 고백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잘 아는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기뻐하는 것을 가지고 기뻐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더 이상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자녀가 좋은 학교 들어간 것 때문에 좋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도 다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와 같은 이유로 감사헌금을 주님께 드렸다면 별 것 아닙니다. 부처한테도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렵사리 좋은 아파트를 분양 받았다면 기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온 천하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건강이 좋아서 날마다 힘이 넘쳐 감사하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물론 믿음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 정도는 다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고작 그 정도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일까?' 여러분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이 모르는 찬송이 있고 비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왜 내가 찬송하는지 절대 모릅니다. 나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기쁨의 샘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이 잘 돌아가야 그 샘에서 기쁨이 솟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일이 잘
풀리든 풀리지 않든 상관없이 항상 끊임없이 솟는 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하고 기뻐하는 수준은 세상 사람과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수준이 높아도 한참 높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바로 시편 71편에 나오는 저자가 그런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안됩니까?
웬만한 것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까?. 제가 느끼는 마음의 가책과 부끄러움을 여러분들도 느껴야 합니다.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사람이 되었다면 어떤 점에서 세상과 다르게 된 것입니까? 물론 다른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정말 세상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이 모르는 찬송의 비밀이 생긴 것입니다. 기쁨의 샘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이것을 볼 수 있어야 '저 사람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다.'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이 기뻐하는 일에 똑같이 기뻐하고, 세상이 원망하는 일에 똑같이 원망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며칠 전에 저의 아내가 병원에 있는 사랑의교회 한 여 집사님을
심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여 집사님은 젊은 사람입니다.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유방암에 걸려서 벌써 1년이 넘도록 투병하고 있고,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 갔다가 조금 나을 만하면 일반 병동으로 옮기고, 그러다 다시 중환자실로 옮기는, 그런 고통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셋이나 딸려 있습니다. 가서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제 아내가 병원에 다녀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참 놀라와요. 어쩌면 그 집사님 얼굴이 그렇게 밝고 명랑한지.어떻게 생긋생긋 웃을 수가 있는지.' 언젠가 한 번 병원에 갔다 왔을 때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를 직접 만나 보면서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번에는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는데도 그 집사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집사님 혼자 있을 때는 틀림없이 울 것이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믿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으로 떨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그는 웃는다. 그러다가도 그는 기뻐한다. 그러다가도 그는 분명히 찬송하는 사람이다.' 교회에서 사모님이 왔기 때문에 잠깐 웃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속이지 못합니다. 내면에서 스며 나오는 기쁨, 내면에서 스며 나오는 찬송의 힘은 사람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을 의지할 것입니까? 자식을 의지할 것입니까? 부모를 의지할 것입니까?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만 쳐다봅니다.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온통 맡기고 하나님만 바라 보았더니 울다가도 웃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고쳐 주실 수도
있지만, 굳이 고쳐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축복과 기쁨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는 소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다가도 웃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모르는 찬송의 비밀이 있고, 기쁨의 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것이 있는가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지금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따져 보자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기쁨의 샘이 나에게 있는가 살펴 보자는 말입니다. 찬송의 비밀이 있는지 따져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실히 있다면
우리의 표정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가정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가 하는 말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시편71편에 나오는 저자처럼 됩시다. 그런 사람으로 삽시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받은 땅에서의 축복들은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세상 사람이면 다 누리는 것들이고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과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의 수준에서 살아도 되겠습니까? 14절을 다 함께 큰 목소리로 읽습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아멘.**
며칠 전이었습니다. 저 자신이 매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주변에서 들리는 소문이나 일어나는 일들이 밝고 기쁘고 기분 좋은 것 뿐이었으면 좋으련만, 그날 따라 제 형편도 매우 안 좋은데다가 교회 안팎으로 들리는 이야기마다
다 슬프고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야기는 너무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중, 삼중으로 제 마음에 무거운 돌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저의 기분은 우울해져서 말하기도 싫고 사람 만나기도 싫고 기도마저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심하면 죽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나? 더욱이 목사라는 사람이 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나? 상황이 조금 어렵다고 해서, 들리는 소문들이 슬프고 답답하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다니, 이것이 고작 예수 믿는 사람의 수준인가? 이것이 목사의 수준인가? 세상 사람들도 다 이 정도는 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시편71편의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본문을 살펴 보다 그 안에 꼭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말과 행동을 거꾸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인공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해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악한 사람들, 불의한 사람들의 함정에 빠졌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는 자기 힘으로 그 함정에서 빠져 나올 가능성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그를 대적하는 자들은 '이제 저 사람은 끝장났다. 하나님도 그를 도와주지 않기로 작정하신 것이 틀림없다. 이제는 우리 손에서 못 빠져 나올 거야.'라면서 희희낙락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인간의 본성이 작용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마구 불러 대면서 아우성을 치고 있는 장면이 바로 71편의 배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놀라게 한 것은 그렇게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이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소리 지르면서도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말을 중간 중간에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중함에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 하리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주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는 주님을 찬송하는 찬송이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 마음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차고 넘칩니다.' 여러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비록 내 형편은 소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나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소망 때문에 나는 주님을 더욱더 찬송할 것입니다. 형편이 어떻게 되든 간에
상관 없이 나는 주님을 찬송하기를 원합니다. 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기쁨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저에게 도전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절망 가운데서도 기쁨과 찬송을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71편 전체를 자세히 살펴 보았는데, 역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모태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붙드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늙어서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피하는 자는 절대로 영원토록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면 비록 지금은 상황이 어려워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나로 하여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믿음이 그의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도와 주시라고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확신이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 때문에 비록 형편은 어려웠지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20절입니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면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이 말씀을 잘 주목하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에게 심한 고난을 허락하신 주님이시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고난을 당합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들도 경험하지
않는 극심한 고통을 씹으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운이 나빠서 찾아온 고통이 아닙니다.
그 배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에게 많고 심한 고난이 왔다면 이것은 주께서 배후에 계셔서 허락하신 것이다. 선하신 주님이 이것을 허락하셨다면 나를 위한 선한 뜻을 갖고 계실 것이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비록 그 십자가가 무겁고 고달프지만 절대로 나에게 손해가 되게 하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확신을 갖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와 같은 심한 고난을 허락하신 이가 주님이시라면 반드시 나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신다는 확신이 믿음입니다.
'비록 내가 깊은 수렁에 빠진 사람처럼 처절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그 능하신 팔로 그 수렁에서 나를 끌어 올리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절로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울다가도 찬송하는 것입니다. 탄식하다가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할렐루야! 그런데 '가끔 나는 왜 이런 수준의 삶을 살지 못할까?' 하는 것이 목사로서 솔직한 고백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잘 아는 바와 같이 세상 사람들이 흔히 기뻐하는 것을 가지고 기뻐할 정도의 수준이라면 더 이상 신자가 아닐 것입니다. 자녀가 좋은 학교 들어간 것 때문에 좋아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도 다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와 같은 이유로 감사헌금을 주님께 드렸다면 별 것 아닙니다. 부처한테도 감사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렵사리 좋은 아파트를 분양 받았다면 기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온 천하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므로 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건강이 좋아서 날마다 힘이 넘쳐 감사하고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물론 믿음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그 정도는 다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고작 그 정도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일까?' 여러분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이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 사람이 모르는 찬송이 있고 비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은 왜 내가 찬송하는지 절대 모릅니다. 나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기쁨의 샘이 있습니다. 그들은 일이 잘 돌아가야 그 샘에서 기쁨이 솟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일이 잘
풀리든 풀리지 않든 상관없이 항상 끊임없이 솟는 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하고 기뻐하는 수준은 세상 사람과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수준이 높아도 한참 높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바로 시편 71편에 나오는 저자가 그런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안됩니까?
웬만한 것은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까?. 제가 느끼는 마음의 가책과 부끄러움을 여러분들도 느껴야 합니다. 오늘 세례 받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사람이 되었다면 어떤 점에서 세상과 다르게 된 것입니까? 물론 다른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정말 세상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이 모르는 찬송의 비밀이 생긴 것입니다. 기쁨의 샘이 생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이것을 볼 수 있어야 '저 사람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다.'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이 기뻐하는 일에 똑같이 기뻐하고, 세상이 원망하는 일에 똑같이 원망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며칠 전에 저의 아내가 병원에 있는 사랑의교회 한 여 집사님을
심방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여 집사님은 젊은 사람입니다.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유방암에 걸려서 벌써 1년이 넘도록 투병하고 있고, 상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중환자실에 들어 갔다가 조금 나을 만하면 일반 병동으로 옮기고, 그러다 다시 중환자실로 옮기는, 그런 고통을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셋이나 딸려 있습니다. 가서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제 아내가 병원에 다녀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참 놀라와요. 어쩌면 그 집사님 얼굴이 그렇게 밝고 명랑한지.어떻게 생긋생긋 웃을 수가 있는지.' 언젠가 한 번 병원에 갔다 왔을 때도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도 그를 직접 만나 보면서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번에는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는데도 그 집사님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집사님 혼자 있을 때는 틀림없이 울 것이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을 것이다. 어떤 때는 믿음이 흔들리고 두려움으로 떨 것이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그는 웃는다. 그러다가도 그는 기뻐한다. 그러다가도 그는 분명히 찬송하는 사람이다.' 교회에서 사모님이 왔기 때문에 잠깐 웃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속이지 못합니다. 내면에서 스며 나오는 기쁨, 내면에서 스며 나오는 찬송의 힘은 사람을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있는 것입니다. 남편을 의지할 것입니까? 자식을 의지할 것입니까? 부모를 의지할 것입니까?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만 쳐다봅니다.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온통 맡기고 하나님만 바라 보았더니 울다가도 웃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자기의 고통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고쳐 주실 수도
있지만, 굳이 고쳐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축복과 기쁨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는 소망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다가도 웃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모르는 찬송의 비밀이 있고, 기쁨의 샘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이것이 있는가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지금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따져 보자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기쁨의 샘이 나에게 있는가 살펴 보자는 말입니다. 찬송의 비밀이 있는지 따져 보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확실히 있다면
우리의 표정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가정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가 하는 말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의 생각과 감정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시편71편에 나오는 저자처럼 됩시다. 그런 사람으로 삽시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받은 땅에서의 축복들은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세상 사람이면 다 누리는 것들이고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과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의 수준에서 살아도 되겠습니까? 14절을 다 함께 큰 목소리로 읽습니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더욱 찬송하리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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