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마디의 메시지와 대 부흥/ 요나3:1-10
우리는 지금 대각성 전도집회를 앞두고 몇 주간 동안 요나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사모하고 있으며 또 함께 은혜를 나누어 왔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물고기 배속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겼던 요나가 다시 회생을 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두 번째 나타나셔서 똑 같은 명령을 내리고 계시는 것을 봅니다. 너는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들을 쳐서 내가 너에게 분부한 메시지를 전파하라. 일어나가서 전파하라.
그가 그 명령에 의거해서 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 성을 돌면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망한다는 이 단순한 메시지를 전했는데 첫날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붙들고 '정말이냐? 정말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망하느냐? 누가 그러더냐? 하나님이라는 분이, 여호와라는 분이 누구냐?' 하면서 여러가지 많은 질문을 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요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얼굴이 진지해 지더니 집으로 돌아가서 땅바닥에 앉아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하고 회개하고 금식을 하는 등 야단이 났습니다. 그 소문이 왕에게까지 들리자 왕이 왕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어 던지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입는 베옷을 입고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짐승들에게까지 금식을 선포하고 온 나라가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돌아오는 큰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40일만에 니느웨를 심판하시겠다는 애초의 마음을 바꿔서 그 성을 용서해주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절대로 의심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인 진실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됩니다.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기에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역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조작된 이야기로 생각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을 주님께서 분명히 교정시켜 주시기 위해 이 요나의 사건을 인용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장 32절에 보면, 그 당시에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도 마음을 열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대적하던 유대나라 사람들을 보고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심판 때가 되면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이 세대의 사람들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의 요나의 정죄를 받고 회개하였음이니라. 좀 쉽게 풀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내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구나. 믿지를 않는구나. 좋다. 그러면 조금 후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날이 올 텐데 그때가 되면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서 너희들을 정죄할 것이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을 요나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도 가슴을 찢고 회개해서 구원 받았다. 그런 니느웨 사람들이 나중에 심판대에 나타나서 너희들도 가슴을 찢고 회개했으면 멸망을 당하지 아니할 텐데 어찌 그렇게 회개하지 않고 고집하다가 오늘 이렇게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됐느냐고 나무랄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니느웨 사건을 인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말을 가지고 인용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진실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이 내용을 가지고 의심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거짓말 하시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거짓말하시는 것이라면 성경을 불에 던져 버리지 들고 다닐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거짓말에 속아가면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거짓말하지 못하는 진실 중의 진실입니다. 진리 중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놀라운 사건이 니느웨에 일어났구나. 이 말씀을 통해 오늘 나에게 주님이 주시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나 개인을 위해서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성령의 감동과 도우심과 깨달음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 듣는 자세요, 말씀을 전하는 저의 자세입니다.
오늘 내용을 가지고 세 가지 정도만 함께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처음 하나님이 불러서 니느웨로 가라 하셨지만 요나가 순종하지 않고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물고기 배 속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습니까? 이제 겨우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또 부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 실망을 안겨준 사람을 구차하게 왜 또 찾으십니까? 하나님에게 사람이 없습니까? 얼마든지 부를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유대 나라에 가면 요나가 아니라도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이 요나를 찾아서 또 일을 시키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점 찍으시면 포기 하지 않으십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양이나 치면서 촌놈 노릇을 했기 때문에 옛날에 왕자였다는 것은 흘러간 이야기일 뿐이고 이제는 아무런 매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이도 80이나 먹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모세를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점을 찍었잖습니까? 하나님께서 찾아가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바로를 만나라고 하시자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나는 못 갑니다. 나는 혀가 둔합니다. 말재주가 없습니다. 나 같은 것이 40년 동안 광야에 쳐박혀서 양이나 쳤는데 지금 어디를 갑니까? 못 갑니다. 몇 번을 못 가겠다고 버티어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포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결국은 그를 보내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화려한 꿈을 안고 주님을 3년 동안 따라다녔지만 결국 그는 실패자였습니다. 죄없는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제 생명 살겠다고 줄행랑 친 정말로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정도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포기했습니까? 아닙니다.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가셔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진정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여라. 나를 따르라. 하시고 그를 다시 보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너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며 너희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세상에 보낸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은 엄숙하게 우리를 불러 파송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점을 찍으셨습니다. 네가 해야 된다. 네가 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다른 사람더러 가라고 하지 마라. 네가 가야 된다. 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 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명령을 받은 소명자임을 알면서 수십 년 동안 무관심하게 세상을 보낸 분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설교 들을 때는 '아, 그래야 되나 보다.' 하고 마음에 약간의 움직임이 있지만 듣고 문 밖으로 나가면 다시 싹 잊어버리고 내 맘대로 사는 분들도 꽤 많습니다. 한 가지 꼭 기억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포기하고 천사를 시켜서 복음 전하라고 절대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또 보냅니다. 반드시 보냅니다. 보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불러들이기 위해서는 결국 세상에 보내서 할 일을 주십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이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부담이 된다고 하는 분은 아직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을 얼마나 받고 있는가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고 나 같은 것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보내시기를 원하고 결국은 보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다는 사실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내가 무엇인데 하나님이 이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이 소중한 일을 시키실까? 참 놀라운 일이다. 내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서 순종해야 될 너무나 소중한 사명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을 사귀는 일만큼 소중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생명을 위해 투자하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죽어가는 자를 불러서 살아날 수 있는 길로 인도하는 것만큼 이 세상에 정말로 해볼만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선교사들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옷도 너절하게 입고, 있고 돈이 없어 아이들 먹을 것을 사주지 못해서 날마다 안달하고,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시대도 모르는 미개인처럼 살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그 일을 하기 위해 세상에 종의 모습을 입고 오셨고 한평생 그 일을 하다가 가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 일을 위해 오셨고, 그 일을 위해 죽으셨고 그 일을 위해서 부활하셨고, 그 일을 위해서 승천하시고 오늘도 교회를 불러 자기가 하는 일을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까? 이 놀라운 사실을 가장 가슴 뜨겁게 느낀 사람들이 선교사들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아니라 할 지라도 이 세상에서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도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는 뜨거운 열정과 소명을 가지고 오늘도 가방에 전도지를 넣고 다니는 평신도들은 세상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 영원히 망할 사람을 영원히 살게 만드는 것만큼 보람 있고 해볼만하고 돈을 투자하든 시간을 투자하든 젊음을 투자하든지 투자해볼 만한 소중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의사들이 파업을 하면서 환자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의사들이 오죽 답답하면 저럴까 하고 저도 동정했고 많은 사람들이 동정했습니다. 밤낮 자지 못하면서 10년 가까이 공부하고 수련의 생활을 거치고 이제 기술을 익혀서 환자를 돌볼 정도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무언가 자기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 대우도 받아야 됩니다. 그러나 상황이 점점 어려워지자 몇 번씩 파업을 하면서 환자들을 사지로 몰고 있지 않습니까? 의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아플 때 병원에 가서 의사가 잘 진단한 처방을 받고 하루 이틀 지나면 병이 싹 떠나는 것을 체험할 때마다 얼마나 의사가 고맙습니까? 우리가 다 압니다. 할만한 일이요,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의사들이 하는 행동들을 보면 정말 그 사람들이 생명을 책임진 사람들인지 의심이 갈 정도입니다. 그 정도 했으면 협상을 하면서 환자를 돌봐야지, 도대체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 것입니까? 대우를 못 받으면 좀 어떻습니까? 환자를 위해서 희생할 정신을 가져야 하지 않습니까? 어떠한 명분을 들이대도 이제 동정 못 받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일이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놓고 무슨 반대급부를 노리면서 과격한 행동으로 처리하려고 하면 결국은 자신들의 명예가 실추되고 맙니다. 우리 교회 다니는 의사들은 너무나 가슴을 치고 아파합니다. 기독 의사회에서는 파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찬송가에도 있지 않습니까?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이 복음 전하라는 소명이 너무나 소중해서 천사들이 보고 침을 흘리고 있다 그 말입니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우리를 보고 부러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 일을 감격하면서 못하는 것입니까?
지난 주간에 제가 하루 동안 수양관에 있었습니다. 그날 마침 인터콥이라는 선교단체에서 20대 젊은이들이 모였습니다. 저는 그 선교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잘 몰랐습니다. 20대 젊은 남녀들이 600명에서 650명 정도 모여서 저녁 집회를 갖는데 제가 일부러 가서 2층에서 내려다 보았습니다. 새파란 젊은 남녀들 600명이 찬송가를 한 시간 가까이 부르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앉아서 부르지를 못 하고 전부 다 일어서서 찬양을 하는데 그 내용이 주로 예수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 복음 땅끝까지 전하자.' 하는 것입니다. 그 찬송을 부르면서 젊은이들이 가만히 있지를 못 하고 두 손을 흔들다가 나중에는 펄쩍 펄쩍 뛰기까지 합니다. 가슴에 불이 붙어 오르자 어찌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가만히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상당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저 나이 때 저런 소명을 느끼지 못했는데 정말 놀라운 일이구나.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 교회에 큰 꿈을 갖고 지금 지켜보고 계시는구나. 21세기에 전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나 보다. 그렇기 때문에 저 젊은이들이 할 일도 많은 세상인데 저렇게 모여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면서 펄펄 뛰고 야단이지.'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그 일을 우리가 하게 된다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환상 중에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때 이사야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십시오.(사6:8) 하나님이 오냐, 알았다. 내가 너를 보내마. 이렇게 해서 그 위대한 선지자가 된 것이 아닙니까?
오늘도 우리를 보시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누구를 보낼꼬'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됩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순종하십시오.
두 번째로, 말씀을 전하자마자 니느웨 성을 구원한 이 놀라운 능력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니느웨가 어느 정도 클까요?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여러 가지 자료와 연구한 글들을 보면 대단한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성벽 높이가 30미터 정도였습니다. 즉, 10층 아파트보다 높은 성벽이 둘러있는 성입니다. 그 성벽의 두께가 전차 세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 나라의 남한 산성에 있는 성곽 같은 것은 화장실 뒤에 둘러 놓은 돌담과 비슷할 정도입니다. 엄청난 규모의 성입니다. 경비병들이 파수를 보도록 성곽에 둘러가면서 세워 놓은 탑이 1500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니느웨 성은 성곽 안에 있는 도시와 성곽 밖에 있는 도시를 합해서 네 지역으로 형성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각 지역 이름은 니므루드, 코윤지크, 콜사바드, 케람레스입니다. 우리 나라로 말하면 강남구 서초구와 같은 행정 구역들이 형성이 되어 있어서 주변이 60마일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하루종일 걸으면 한 20마일을 걷는다고 하는데 성경에도 삼일 길이라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요나가 삼일 동안 돌아다녀 봐야 겨우 그 성을 한 바퀴 돌든지 했을 만큼 대단한 성입니다. 어린아이들만 12만명이니까 학자들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인구가 거의 줄잡아 100만명이 되었다고 합니다. 2800년 전에 이런 규모였다면 얼마나 대단한 성이었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초라한 요나라는 사나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 하나가 전한다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도 물고기 배속에서 삼일 동안 있다가 나왔기 때문에 얼굴도 빨갛고 머리털도 다 빠져서 대머리가 된 남자, 정말 쳐다보면 웃음부터 먼저 나올 정도의 몰골을 한 남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그 성에 들어가서 이길 저길 다니며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무너진다고 외치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구경거리밖에 더 되겠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요나가 전하자 엄청난 일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요나가 전한 말은 이 성경을 기록한 원문 히브리어에 의하면 다섯 마디밖에 안됩니다. 우리 성경에는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은 '호드 아르바힘 욤 베니네베 네파케트.' 이렇게 딱 다섯 마디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5절부터 6절까지 나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한번 보십시오. 놀라운 일입니다. 니느웨 백성이 첫째는 무엇을 했습니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요나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이라는 분을 믿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분이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믿으니까 그 말씀이 얼마나 두려운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금식을 선포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무론 남녀대소 하고 모든 사람들이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이러자 소문이 왕에게 들어갔습니다. 왕이 당장 그 왕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땅바닥에 내려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선포했습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 어린 아이까지 금식해라. 짐승까지도 금식시켜라. 그리고 8절에 보니 무엇을 하라고 명령했습니까?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이 말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잘못한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입으로만 회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지어다.' 나쁜 짓을 전부 다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말만으로 회개할 것이 아니고 실제 행동으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내용 가운데서 최대의 집단 회심이 일어난 것입니다. 1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으니 이것만큼 큰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그 회심이 철저한 회개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저 이제부터 예수 믿겠습니다. 하면서 저 과거에 죄 많이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하는 정도로 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복음은 요나가 전한 다섯 마디의 말에 비하면 너무나 은혜스럽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는 '회개 안 하면 너는 죽어.' 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냥 들으면 섬뜩하고 좋은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전해주신 복음은 어떤 것입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를 믿기만 하라. 믿기만 하면 너도 살고 너희 가족도 산다.' 그 말씀이 얼마나 은혜스럽습니까? 듣기만 해도 마음에 불안이 사라집니다. 평안이 찾아옵니다. 기쁨이 생깁니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소망이 생깁니다.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요나처럼 '너 죽는다.'는 말씀을 가지고도 이렇게 전하기만 하니까 큰 역사가 그 성에 일어나는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짜 기쁜 소식, 가난한 자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 갇힌 자, 또 눌린 자에게 전해지는 자유의 선포, 병든 자에게 전파되는 치유의 역사, 죄짐을 지고 씨름하는 자에게 사죄의 은총이 선포되는 이 복음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전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 영광스러운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어떻게 해야 짭니까? 집어 넣어야 짭니다. 또, 지뢰는 언제 터집니까? 밟아야 터집니다. 안 밟으면 안 터집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도 내가 전해야만이 생명을 구하는 역사가 일어나지, 성경 말씀 속에 담아두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그냥 배우고 머리에 담고만 있으면 복음이 아닙니다. 전해야 합니다. 전할 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파하라. 전파하기만 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 이야기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인데 어느날 자기 친구가 찾아와서 사정을 했답니다. 내가 실직을 했네. 살 길이 막연하니까 자네는 교회 안에 아는 사람 많지 않나? 누구에게 부탁해서 나 취직 좀 시켜줘 너무나 절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목사가 이제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런대로 괜찮은 사업을 하는 교인을 불러서 부탁을 했답니다. 친구가 있는데 일자리가 있으면 하나 주면 좋겠다고 그랬더니 그 교인이 그럼 사람을 한번 보내 보라고 하더랍니다. 사람을 보냈는데 괜찮은 것 같아서 취직을 시켜 줬습니다. 이제 목사는 안심을 하고 한 반년 이상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야기를 들으니까 자기 친구가 해고를 당했다는 것입니다. '너무 이상하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고는 그 사장을 불러서 왜 그렇게 됐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장이 이런 말을 하더랍니다. 그 사람은 말이죠. 성실해요. 참 정직해요. 근면해요. 그리고 판매전략을 만들어 오는 것을 보면 참 우수한 인재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그런데 왜 해고시켰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도대체 물건을 갖다 놓고 고객들에게 사라고 권할 줄을 모릅니다. 손님을 전시장으로 안내해 놓고 그 다음에 상품을 보여 주기는 잘 하지만 그 사람들이 구매할 수 있도록 말 한 마디라도 제대로 해야 되는데 그것을 못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목사님. 매상을 올리지 못하는 판매원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맡겨주셨습니다. 입을 열지 못하는 개가, 짖지 못하는 개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한 마디도 전하지 못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니느웨 성에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기만 하면 얼마나 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알려면 우리 한국 교회를 보면 됩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이제 110년이 되었습니다. 일본은 200년이 되었어도 지금 교회가 비실비실하고 맥을 못쓰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는 100년 이제 조금 넘어 가는데도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엄청난 부흥은 상식을 초월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대단하게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만주에서 선교하던 로스, 맥킨타이어와 같은 선교사들이 처음에 만주 땅을 방황하면서 그저 가난하게 살던 한국 사람들을 불러서 전도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1879년도 경입니다. 그럴 때 이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세례를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 백홍준이라는 사람이고 그 다음에 이응찬이라는 사람입니다. 별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은혜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두 사람을 통해 복음을 들은 젊은이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서 함경도로 들어와서 가난하게 사는 시골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해서 점점 복음이 퍼졌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그 당시에 100년 후에는 이 나라 국민의 1/4이 하나님을 섬기고 주일이 되면 성경 찬송을 끼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누가 상상했겠습니까?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에서 복음을 전한 것이 1885년 이후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해서 처음 예수 믿고 새문안 교회의 전신인 정동 장로교회라고 하는 우리 나라 최초의 교회를 1887년 9월 27일 저녁에 시작했습니다. 14명이 모였는데, 이 14명이 교회를 조직한 다음에 예수님의 복음을 그 당시에 그 무식하고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던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에 불과 100년이 지나지 않아서 도시 전역이면 십자가의 네온사인이 서울 장안을, 부산 장안을, 광주 장안을 환하게 비치는 놀라운 부흥이 이 땅에 일어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상상 못 합니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도 없고 빛도 없이 복음을 전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한국에 일어났지 않습니까? 전하면 능력이 나타납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입을 열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죽은 자가 살아납니다. 범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던 완악한 사람들이 가슴을 치고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복음은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왜 이런 능력이 안 일어납니까?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1초의 기회라도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찬스를 만들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이웃에 있는 아주머니가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뭐 하실래요? 날씨 참 좋네요. 그러면 오늘 뭐 하겠어요. 시장에나 좀 다녀 올 거예요.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참 중요하다고 늘 생각하는 사람은 대답이 다릅니다. 네. 오늘요? 우리 교회에서 대각성 전도집회 하거든요. 내가 꼭 전도하고 싶은 분이 계세요. 그래서 오늘은 그 분을 특별히 찾아가서 시간을 보내려고 해요. 아마 틀림없이 이번에 예수 믿게 될 거예요. 여러분, 이 말 한 마디 못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5초면 되지 않습니까? 오늘 시장 좀 다녀오고 그냥 보낼래요. 하는 말 대신에 바꾼 것입니다. 그 시간에 그 사람이 그 말 들었다고 예수 믿고 돌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마음에 꽂히는 화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나중에 그 들었던 말이 그 부인의 마음에서 떠나지를 않고 맴돌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복음을 받아 들인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주고 받는 대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그저 생각 없이 주고 받는 말 안에도 복음을 한 마디, 두 마디는 집어 넣어서 전할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전하기만 하면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전파될 때 나타나는 복음의 능력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씀드립니다. 니느웨의 부흥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수 있도록 사모하고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할 때 이 앗수르의 형편이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였지 않습니까? 신흥 국가 입니다. 바벨론이 앗수르에게 정복을 당했지만 아직도 반항 세력이 너무 많아서 완전히 정복되지를 않았습니다. 이웃에 있는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라는 현명한 왕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자 경제적인 부흥, 군사적인 부흥이 막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위협이 되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유다는 서로 결탁해서 앗수르에게 바치기로 약속한 조공을 거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북방에 있는 여러 나라는 자기들끼리 동맹을 맺고 앗수르를 지금 압박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위기를 느끼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럴 때 요나가 들어가서 40일이 지나면 이 성이 망한다고 했으니 섶에다 불을 지르는 꼴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두려워서 회개하고 돌아왔다고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틀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것, 또 제 자신이 이 말씀을 보면서 마음으로 부러워하고 사모하는 것이 있다면, 니느웨의 부흥입니다. 왜 이런 부흥이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을까요? 앗수르에게만 위기가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도 위기가 있습니다. 과거에도 수없이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이 위기는 계속 될 것입니다. 경제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정치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남북 관계 문제가 위기를 겪을 수 있습니다. 환경이 위기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도덕성이 무너져서 젊은이들이 완전히 탈선하는 무서운 타락의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예감합니다. 위기가 있습니다. '위기를 느낀 앗수르 사람들, 니느웨 사람들은 말씀을 듣자마자 회개하는 큰 부흥을 체험했는데, 오늘 우리는 이런 위기를 느끼면서도 왜 회개 하지를 않는가? 왜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까? 설교를 잘 하는 목사도 많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 전도지를 가지고 다니면서 기회만 생기면 예수를 전하려고 애를 쓰는 이 나라에서 왜 부흥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의 안타까움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부흥을 주시옵소서. 부흥을 주옵소서. 부흥이 없으면 이 나라에 소망이 없습니다. 니느웨처럼 왕이 왕복을 벗고 가슴을 치고 베옷을 입고 땅에 앉아 통곡하고 회개하듯이 우리 나라 대통령, 대법원장, 국회의장을 위시해서 모든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 지도자들과 교육 지도자들, 러브 호텔을 제 맘대로 허가해서 학교 앞에다 짓게 만드는 저 지방의 썩어 빠진 시장들,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가슴을 치며 내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옵소서. 하고 모든 죄를 다 손에서 털어 버리고 회개하는 이 부흥만이 이 나라를 다시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이 부흥만이 이 땅이 살 길이요, 이 부흥만이 우리 나라의 후손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지름길인데, 왜 이 부흥을 안 주실까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하나님이여, 사랑의교회에 이 부흥의 불을 붙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여, 내 가슴 속에 이 부흥의 불을 붙여 주옵소서. 하나님이여, 한국 교회에 이 부흥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부흥의 불길이 바람을 타고 전세계 오대양 육대주로 번져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가 가슴에서 터져 나오지 않습니까?
나 하나 구원 받는 것도 중요하고, 내 가족이 구원 받고 돌아오는 것도 중요합니다. 대각성 전도 집회를 통해서 내 친구가 구원 받고 춤을 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모해야 됩니다. 기도해야 됩니다. 주여, 니느웨 성에 일어났던 그 대부흥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의 소원입니다. 얼마나 이 나라가 썩었습니까? 얼마나 사람들이 악합니까? 얼마나 거짓됩니까? 얼마나 짐승 같습니까? 이런 상황을 목전에 두고 우리가 이 부흥을 사모하자 그 말입니다. 이 부흥을 위해 기도하자 그 말입니다. 이 부흥을 위해서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자 그 말입니다.
부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찬송이 있습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이것이 부흥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해서 지금까지 범하던 모든 죄를 다 회개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 의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는 의인들이 온 땅에 가득하되,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가득해지는 것이 부흥입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 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그 함성이 들리는 날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날이 오기를 우리는 사모합니다. 그 날이 빨리 임하기를 사모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대각성 전도집회를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이 땅에 부흥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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