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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연합의 기초 -2 / 로이드 존스
2. 요한복음 17장의 가르침
요한복음 17:21은 하나의 슬로건으로서 너무 빈번하게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구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그 말씀을 문맥과 배경에 비추어서 그 말씀을 봄으로써 해석해 나갑니다. 언제나 성경을 해석하는 주도적인 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복음적인 사람들에게 자주 퍼부어지는 비난은, 복음주의자들은 “증거본문”을 사용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향해서 그러한 비평이 가해집니다. 그 신앙고백이야말로 신앙고백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은 증거본문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일반적인 흐름과 의미를 취해야지 우리의 입장을 어떤 특별한 본문 위에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운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에 대해서 바로 그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문맥에서 완전하게 떼어내어 그것을 하나의 슬로건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데 대하여 역설합니다. 한 본문을 따로 떼어놓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해석의 제1법칙은 본문을 언제나 문맥에 비추어 생각해야 하며, 첨가하여 다른 본문들과도 비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성경해석의 규범이 중요하다면 바로 이 특별한 진술과 관련하여 그러합니다.
(1) 문맥을 분석함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요한복음 17장을 보편적으로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은 분명한 여러 대목으로 나누어집니다. 처음 다섯 구절로 이루어진 첫 번째 대목에서 우리 주님께서는 주로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대목은 6-10절까지의 내용으로, 당신이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백성들에 대한 묘사를 하고 계시며 그들을 위한 보편적인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11-12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로 보전되기를 원하는 근본적인 기도를 드리십니다. 13-16절까지에서는 특별히 본질적인 연합을 무산시키려고 언제나 벼르고 있는 악한 자의 교활한 공격에 맛서서 하나로 보전되기를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17-19절에서는 그 백성들이 거룩하게 되기 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다시 그들이 진리와 이 하나됨 안에 보전될 수 있기 위하여 말입니다. 20-23절까지에서는 11절에서 이미 기도하신 것을 들어 정교화 시켜 연합의 본질을 더 상세하게 규정해 나가십니다. 24-26절까지에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당신의 궁극적인 소원을 표현하십니다. 그들이 당신 계신 곳에 함께 있고,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셨던 영광을 보기를 원하시는 긍극적인 소원을 표현하십니다. 전체 대목에 대한 보편적인 분석이 그러합니다.
(2) 연합의 원리들
이 연합(하나됨)의 문제를 보다 더 상세하게 생각해 나감에 따라서 그 하나됨을 처음으로 특별하게 언급하시는 것은 11절임을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본문이 근본적인 본문입니다. 그 한 진술 속에 모든 진수가 되는 원리들이 설파되어 있습니다.
1) 그 본문이 제한적으로 지적하는 사람들
먼저, 주님께서는 당신이 ‘저희’라고 지칭하신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계심을 주목하게 됩니다. 저희, 저희만이 이 하나됨의 주체들입니다. ‘저희’는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7장 자체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 ‘저희’는 막바로 처음에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자들이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근본 진술입니다. 그는 그 진술을 계속 반복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셨던 사람들이요, 그들을 위해서 주님은 세상에 오셨고, 그들을 위해서 당신이 하셨던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또 다른 요점으로, 그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9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람들만을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이 요한복음 17장에는 ‘보편구원론’(Universalism)이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일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또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에 거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그 기도가 해당되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는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주님께서 세상에서 불러내신 사람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지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6-8절에서 ‘저희’로 지칭된 사람들에 대한 더욱 흥미롭고 중요한 정의를 대하게 됩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오신 것인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는 정말 중요ㅗ하기 그지없는 요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20절에서 다시 그 동일한 개념을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을 위함이 아니요 또한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인함이니.” 이 사람들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또한 세상에서 이 사람들이 말한 똑같은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믿게 될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강조점은 같습니다. 그는 25절에서 그 점을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25절 말씀은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종국적으로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삽나이다.” 이는 정말 중요한 진술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더욱 더 규정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다시 우리는 구분과 구별의 요소를 강조해야겠습니다. 우린 주님께서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주어진 바 된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기도하십니다. 실로 그는 19절에서 특별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로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물론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속죄와 화해의 사역을 위해서 죽음에 내어주실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그 일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하시는 것은 아니라고 특별히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이 사람들’만을 위해서 하십니다. 다시 이 진술은 매우 중요한 진술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됨을 이루는 이 사람들은 우연하게 어떤 나라에서 길리움 받거나 우연한 어떤 민족이나 어떤 종족이나 어떤 특별한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은’사람들이요, 주님의 교훈을 받은 사람입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누구시며,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셨고, 자기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하러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믿었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 사람들에 대한 주님 자신의 정의가 그러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하나됨(연합)은 당신의 말씀, 곧 우리가 복음의 메시지라 부르는 것을 받아드리는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2) 하나됨의 기원
주님께서 하나됨의 기원에 대해서 11절에서 설정해 놓으신 두 번째 원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전하사’라는 말씀을 쓰고 계심을 여러분은 주목하실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개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하나됨을 산출하라고 권면하거나 호소하는 말씀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연합은 이미 존재하며, 이미 실존하고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연합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대조적으로 주님과 주님의 사역에 대한 진리를 믿는 사람들의 연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을 떠나실 것과 그들이 악한 자의 공격과 죄와 악의 모든 세력에 노출될 것이라는 아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이미 존재하는 그 하나됨 안에서 그들을 보존해 주십사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한 요점입니다. 원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목표하여 도달해야 하는 어떤 것을 다루고 계시지 않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께서는 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조금이라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전도의 말씀을 통해서 이미 이 사람들 속에 존재케 된 그 하나님을 지켜 주십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 하나됨의 본질
우리 주님께서 제기하시는 세 번째 요점은 연합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말하자면 그 주제에 대한 근본적인 분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20-23절에서 그 점을 정교하게 설명하고 계시니 그 구절들을 숙고해 나가기로 합시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은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심할 여지없이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진술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진슬 하나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번에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됨(연합)의 진수적인 성격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됨에 빗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 하나됨은 주님께서 위하여 기도하는 그 백성들과 아들 자신 사이의 하나됨에도 빗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의 몇 구절 속에서 이에 대한 이해를 주는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20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다시 21절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런 다음 23절에서 이렇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 자, 우리가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의 몇 구절에 대해서 어떤 주장들을 한다 할지라도 이 진술은 마치 그 의미가 완벽하게 드러나고 명료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가볍게 취급하거나 입심 좋게 또 대충 취급될 진술이 아님은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우리 주님은 여기서 복되신 성삼위간에 본체론 쪽으로 존재하는 신비한 연합을 다루고 계십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 중 가장 고차원적인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 이 용어를 마치 그 뜻을 명백하게 알 수 있는 것처럼 마구 취급하고들 있습니다. 실로 그것이 마치 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들을 합니다. 곧 어떤 외향적인 조직적 영합을 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진술에 대한 모든 것이 그 정반대의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체의 연합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삼위일체의 전체 신비입니다. 세 인격이 존재하나 그러면서도 한 하나님이십니다. 본체는 위(位, 인격)들 간에 구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세 위(位)로 하여금 하나 되게 하는 것은 본체(진수, essence)의 연합입니다. 그 점을 배제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그에 더하여 사고방식, 사상, 목적, 서로간의 사랑, 또한 그 점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라오는 다른 모든 것의 연합이 존재합니다. 바로 그 방식을 우리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 속에 확보해 놓으신 이 하나됨을 규정하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 그 하나됨을 보전하시고 주님이 영광으로 돌아가신 다음에도 지켜주십사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으로부터 유추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일으켜야 하는 연합은 이 진수(본체), 또는 존재의 연합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가르치는 교리를 또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거듭난’ 사람이며, ‘성령으로 난’사람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는 교리입니다. 그 모든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주제가 어렵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신(神)이 되었다고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사용한 성경 어구는, 우리가 ‘신의 성품(divine nature)에 참여한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1:4).
우리 주님께서 뜻하는 바로 말하면 진리를 믿은 자들 속에서 이 새로운 성품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근본적인 작용이 없이는 연합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연합을 바꾸어 설명하여 같은 유추로 말한다면 관점, 목적, 사랑 등등의 본질성을 같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거듭난 또는 다시 난 사람들 중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연합이라는 것입니다. 규정상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결심하여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협동을 하거나, 어떤 공회를 형성하여 어떤 목적과 어떤 목표를 수행해 나가는 것 같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잘못된 어떤 것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제 관심은,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그런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우정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습니다.
그것은 가족관계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족관계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그 가족관계가 수반하는 것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한 가정에 태어납니다. 비록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 어떤 권속들과 의견이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피와 본질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연합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어떤 자원하여 의지적으로 행할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주어진 가족에 태어난 결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제들입니다. 단순히 친구들의 연합이 아닙니다.
(3) 요약
우리가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 대목의 가르침을 요약해 보면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존재케 하시고,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에 스스로 보전하셨던 그 연합이 계속될 수 있이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유다의 경우에는 특이하게 예외로 말씀하시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그 사람은 그 부류에 속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 연합에 ‘진정으로 속하지 아니한 것’을 매우 분명히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지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함이니이다.” 여러분이 그 연합에 속해 있는 것처럼 외모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새 생명, 이 새로운 탄생이 없다면 진정한 연합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그 본모습을 들어내고야 맙니다.
그와 같이 우리 주님의 진술 전체는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님을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아버지께 이미 존재하는 이 연합을 보전해 주십사고 간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연합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고, 거듭남의 역사를 통해서 성령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산출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가르침을 똑같이 믿고 받아드리는 데서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러한 특징이 모자란 ‘연합’은 그 어느 것이든지 우리 주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시는 연합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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