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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죤스-거짓된 열심들의 특징

by 【고동엽】 2008.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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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열심들의 특징

 

열심 자체는 도덕적으로 중립적이고 참된 열심뿐만 아니라 거짓된 열심도 있기 때문에 '열심'을 검증해 보아야 하는데, 내 열심이 거짓인지 참인지 어떻게 테스트할 수 있습니까? 함께 사용되어야 할 몇 가지 시금석들 중 어느 한 가지도 그 자체만으로는 적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의 열심이 어떤 다른 사람을 보고 나온 것이고 그 다른 사람의 본을 좇아가는 형식이 되어 있다면, 항상 의문을 가지고 검증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단들의 특징은 언제나 그런 식입니다. 어떤 한 경우가 사람들에게 제시됩니다. 그러면 그 경우에 설득을 당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취합니다. 그래서 그 경우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들과 정확히 똑같이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식으로 열심이 생겨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떤 열심이 일어나서 조직적으로 견지가 된다면, 그 열심은 거짓된 열심일 가능성이 아주 다분하다는 증거를 보이는 셈입니다. 특히 그 열심을 일으키는 자극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는 경우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세 번째 시금석을 제시합니다. 이 시금석은 정말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요점입니다. 여러분이 '됨됨이' 보다도 '어떤 일을 행하는' 것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조심해야 할 표증입니다. 만일 성도가 되는 것보다 어떤 일을 하는 데 더 열심이라면, 다시 그 열심을 검증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언제나 행하는 것에 강조점을 둡니다. 어떤 존재가 되느냐 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바로 거기에 위험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시금석을 소개합니다. 거짓된 열심 속에서는 진리보다 행동이 우선합니다. 언제나 그 점이 두드러져 나타납니다. 삶의 중심에 있어서 활동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여러분이 내내 설득을 당하고 충격을 받은 한 가지 요점은 힘이 넘쳐나 보이는 다른 사람이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보다는 그런 것에 자극을 받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거짓된 열심은 언제나 일들을 지나치게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침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행동은 그 행동을 유발했던 가르침보다도 그 가르침의 증상을 보여 주는 더 큰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방식, 조직, 구조가 매우 탁월한 위치에 있다면 거짓된 열심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섯 번째 시금석으로 '육적인 것(carnality)'이라는 제목 밑에 여러 가지를 함께 놓아 표현해 보겠습니다. 제가 말하는 '육체'라는 것은 육신적인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열심에는 이러한 육신적인 요소가 상존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일종의 정신의 경박성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의 천박할 정도지요. 안타깝게도 그러한 모습이 기독교의 종교적 집회 속에서 가끔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경박함, 비상성, 명랑함의 모습이지요. 사도 바울이나 아니면 다른 사도들의 근처에서 그러한 것들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 가까이에서 감히 그러한 것들을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집회에서 우리는 그것들을 봅니다. 대단히 열심이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열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그걸 인정합니다. 그들의 광신주의적인 열심을 정말 인정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일이 지나칩니다. 그들의 열심에 이 경박한 모습이 보입니다. 실로 어떤 경우들에서는 정말 내가 이 종교적인 집회에 와 있는가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내가 그 집회에 참석해서 느낀 정신은 크리켓이나 축구팀의 정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말 세상적인 오락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진지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어린 지각이나 성결의식이나 경외심 어린 의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밝고 명랑하였고 놀랍게 조립된 큰 세력과 기운으로 넘쳐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이 진지한 열심의 표증이라기 보다는 육신적 사고의 표증들 이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거기에다 덧붙여 말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대단한 흥분이 일어날 때마다 발견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 흥분도 역시 육체성의 제목 밑에 집어 넣어야 합니다- 흥분은 보통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자신하고 확신하고 상황을 장악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의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열심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감에 넘쳐 있는 인상을 끼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정말 얼마나 진지하고 열심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저는 그 사람의 열심을 의심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어떤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것은 역시 더 나쁜 것이지요.

 

일곱 번째 시금석으로 나아가 보아야 하겠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자신을 검증하려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자신이 검증받는 것 자체를 분개합니다. "내가 열심이라는 것을 모르세요? 나는 아주 열광적입니다 나는 그것을 하기를 원해요"라고 열심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십시오. "자,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확인해 봅시다." 그러나 그 열심은 그 모든 가르침을 참아내지 못하고 일들을 계속해 나가기를 원합니다. 무엇인가를 계속하고 있어야 합니다. 검증을 계속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매우 나쁜 징표입니다.

 

여덟 번째로, '열심'이 가르침을 참아내지 못하는 양상을 때게 될 때 그 상황은 더욱 나쁜 것이지요.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바울은 그들이 지식을 원치 않고 거부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지식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가르침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짓된 열심의 정신입니다.

 

아홉 번째 시금석은 환상주의입니다! (신비주의와 거의 같은 말로 쓰이고 있음-역자주) 정말 참을성이 없습니다! 거짓된 열심은 일차적으로 그것이 선전하고 있는 것이 진리냐보다는 그것이 성공하느냐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열 번째 시금석으로, 균형의 결핍을 지적하겠습니다. 거짓된 열심에 고양된 사람들이 한 가지만 보고 있음을 여러분은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한 국면만을 보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전도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칼빈주의에만 관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알미니안주의에만 생각이 가 있습니다. 또는 예언에만 생각이 가 있습니다. 바로 이 한 가지 요점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바로 이 한 가지에만 강조점을 둡니다.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치명적인 특징입니다. 이단들이 언제나 그와 같은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그 이단들은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가지에 너무 빨려 들어간 나머지 다른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직 한 가지에만 집착하여 균형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만'은 하나의 거짓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맹목적인 열심이 되는 것입니다. 열심이 맹목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균형이 결핍되었다는 어떤 증표가 있거나, 온전한 진리가 제시되지 않거나, 하나님의 전체 뜻이 다루어지지 않거나, 오직 한 가지에만 부단히 강조하는 것만 있다면, 그것은 거짓된 열심입니다. 거짓된 열심은 학식이나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신학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로 구원받게 해야지"라는 데에만 관심있고 다른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또 그 거짓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이 주장하는 그 독특한 교리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 언제나 그 한가지 요점이 부상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 또한 거짓된 열심이요 균형을 상실한 것입니다. 물론 교리와 생활 속에 어떤 균형이 없거나, 사람들이 믿고 가르치는 바와 살아가는 삶의 방식 사이에 균형이 깨져 있는 것을 본다면, 필연적으로 그들이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하나의 적극적인 증표입니다.

 

마지막 열 한 번째 시금석은 이러합니다.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계속 활동하고 힘이 넘쳐나고 열심이 항상 들끓어 오르고 진지하기 때문에 실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그 평안을 보이기는 합니다. 병들어 어떤 일을 할 수 없으면 그들은 침체되고 불행해집니다. 그들은 그때서야 자기들이 활동에 의지해서 살아왔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하나님도 아시지만 저는 여러분에게뿐만 아니라 제 자신에게도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이 설교하는 것만 의지하여 살아가는 설교자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비극들을 보았습니다. 평생목회를 했던 노(老) 목사님들이 더 이상 설교를 못하게 되자 불행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설교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 스스로가 불행해 있었기 때문에 불행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그 진리에 의존해서 살아가지 않고 자기들의 설교사역에 의존해서 살아갔습니다. 목회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참으로 무서운 위험요소가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영역에서 활동적인 어떤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위험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활동에 의지해서 살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그러고 있다면 거짓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등의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가 끈질기고 집요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한 다음 우리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될 때 안식도 없고 상실된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면 그 모든 열심이 다 그릇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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