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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만 우리가 따라야 하는 자기희생의 모범이 아니다/ 메이첸

by 【고동엽】 2014. 8. 1.

자유주의 신학은 구원을(‘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면) 사람에게서 찾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서 찾는다. 구원에 방법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속에 구원의 근거가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예수가 우리의 구주인 것은 그가 말한 것 때문도 아니고, 심지어 그의 존재 때문도 아니며, 오히려 그가 행한 일 때문이다. 예수가 우리의 구주인 것은, 그가 우리에게 영감을 주어 그가 살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삶을 살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죄에 따라오는 무서운 죄책을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기독교적인 개념이다.

 

그런데 이 개념이 “교묘한 속죄 이론”이라는 비웃음을 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죄인을 대신하는 속죄 이외의 다른 어떤 속죄도 알지 못한다. 그것이 신약성경이 말하는 유일한 속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원한 죽음을 당해 마땅하지만, 주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다.” 여기에는 복잡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속죄라는 교리가 아니다. 정말로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자랑을 위해 성경 교리를 제거하려는 오늘날의 정교한 노력이다.

 

현대 자유주의 설교자들도 때로 “속죄”를 말하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은 가능한 한 그것을 드물게 말한다. 그들의 마음이 십자가 그늘 밑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점에서도, 전통적 언어들이 전혀 낯선 사상들을 억지로 나타내려는 표현들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전통적 용어들을 벗겨 내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현대적인 개념의 본질이 상당히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을 향해 어떤 효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만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때로 이 인간에 대한 효과는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이해된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만 우리가 따라야 하는 자기희생의 모범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 모범의 독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적 정서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최고의 자기희생을 나타내는 간편한 상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있다. 자기 희생이라는 냉랭한 일반용어로 표현되어야 했던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는 것뿐이다.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과는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죄가 심지어 거룩한 자마저 무서운 십자가로 보내므로- 보여주기에, 하나님이 죄를 싫어하시듯이 우리도 죄를 싫어하여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나님 자신의 아들이 우리 모두를 위해 내어 준 바 된 것이다.

 

이런 현대의 “대속 이론들”이 모든 같은 평면에 놓일 수는 없다. 특히 마지막 이론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높은 관점과 결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론들은 죄책이라는 무서운 현실을 무시하고, 구원을 위해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의지를 설득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이론들이 모두 어느 정도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다. 신약성경에 분명하게 제시된다. 그러나 훨씬 큰 진리가 그것들을 다 삼켜 버린다. 바로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흠 없이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진리다. 이 중심 진리가 없다면 나머지 모두는 참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죄책을 지고 죄의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기희생의 모범이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는 절망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 희생의 근본이 되는 원인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전시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십자가가 정당한 위치를 회복하려면, 우리는 현대의 이론들을 뚫고 들어가 훨씬 깊은 곳에서 한 인물을 만나야 하는데, 그는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위해 자기를 내어 주신 분이다.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지치지도 않고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계속해서 증오와 조소를 쏟아낸다. “대속”과 같은 단어들이- 원래의 기독교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여전히 사용되기는 한다. 그들은 “대속의 죽음으로 흘려진 우리 주님의 피가 소외된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고, 돌아오는 죄인이 받아들여지게 해준다”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낸다. 그들은 온갖 풍자와 악담을 무기로 십자가 교리를 공격한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대한 현대 자유주의자들의 공격이 거꾸로 그 교리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기독교의 구원의 길이 비판받는 것은 그것이 역사에 의존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비판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각각의 그리스도인을 위해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야지, 그가 오래전에 팔레스타인에서 한 일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예봉을 피하면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비주의만 남게 된다. 신비주의는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 기독교가 되게 하는 것은 신자의 현재 경험과 예수가 세상에 존재했던 실제 역사의 연결이다.

 

역사의 분명한 어느 시기에 예수가 사람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죽지 않았다면, 우리의 종교는 포기되어야 한다. 기독교가 역사에 의존하는 것은 확실하다. 만약 종교가 역사로부터 독립한다면 복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좋은 소식”, 곧 과거에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역사로부터 독립된 복음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모순이다. 기독교 복음은 새로운 어떤 것, 곧 인류의 상태에 전혀 다른 측면을 부여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인류는 죄로 인해 절망적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상황을 변화시켰다는 말은, 그저 전부터 있던 것의 반복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이다. 옛것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새로운 어떤 소식을 전한다. 격려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오래전에 발생한 어떤 일에 대한 설명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 시기가 언제였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제든, 1세기든, 혹은 언제 발생했든지, 그것은 참된 복음 곧 진정한 소식이다.

 

뿐만 아니라, 오래전에 발생한 일이 현재의 경험에 의해 확증된다. 그리스도인은 처음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에 대한 신약성경의 설명을 받는다. 그 설명은 역사다. 만약 그 역사가 참되다면 그것은 지금 효과를 발휘하며, 그것이 참인지의 여부가 그 효과에 의해 시험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메시지를 시험해 보며, 실험에 의해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경험이 문서의 증거를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증거를 확증해 줄 수는 있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은 영혼으로 받아들여지며, 그리스도인 삶의 매일 매시간 그것이 참되다는 확증을 얻는다.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 교리는 너무 협소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는다. 이 비판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메시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배타성을 포기하게 된다. 최초에 기독교를 관찰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기독교 복음이 구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수단을 결연하게 거부한다는 사실이었다.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은 절대적으로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헌신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배타성은 당시 퍼져 있던 헬라 시대의 혼합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기독교는 이런 “영혼의 우아한 일부다처제”와 아무 관계도 없었다.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배타적인 헌신을 요구했다. 오직 한분 주님 외의 모든 다른 구원자들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말해야 한다. “오직”이라는 이 작은 단어에 온갖 공격이 가해진다. 그 단어가 없었다면 박해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를 인류에 혜택을 준 사람들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세계에 전혀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그것을 좋게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완전히 무익하다.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제거되면 영광과 능력 또한 제거된다.

 

사도 시대, 교회 활동의 기초에는 자기들에게 무서운 책임이 맡겨졌다는 의식이 있었다. 생명과 구원의 유일한 메시지가 사람에게 맡겨졌다. 그 메시지는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전파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한 기독교의 배타성 문제를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되고 직접 대면해야 한다.

 

예수의 이름은 모든 인종의 사람, 모든 종류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의 약속과 함께 모든 사람에게 예수의 이름을 전할 수 있는 풍부한 수단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 구원의 길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되지 않는다면, 이는 구원의 길 자체의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 방법을 받아 가지고 있으면서 사용하지 않은 사람들의 잘못이다.

 

어떻게 그런 엄청난 책임이 연약하고 악한 사람의 손에 맡겨질 수 있는가? 차라리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새 메시지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제공함으로 구원이 전달자의 충성에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자명하다. 기독교의 구원의 길이 사람에게 엄청난 책임을 맡기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책임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는 통상적인 일들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지는 책임과 비슷하다. 부모는 자녀의 신체뿐 아니라 영혼에도 상처를 줄 수 있는 능력을 얼마든지 가지고 있다. 이 책임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질문의 여지가 없이 존재하는 책임이다. 예수의 이름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 교회의 책임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엄청난 책임이다. 하지만 그 책임은 존재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다루는 다른 방법들과 유사하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십자가 교리에 대해 더욱 구체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을 불합리하다는 것이다. 죄책은 개인의 것이며, 만약 나의 잘못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도록 만든다고 해도 그로 인해 나의 죄책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병사가 당하는 자발적 죽음은 그것이 자기희생의 지고의 실례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자기희생에 의해 성취되는 것은 갈보리에서 성취된 것과 전혀 다르다. 전쟁에서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의 죽음은 고향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안과 보호를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죄값을 씻는 일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의의 대한 진짜 대답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자기희생을 보여주는 다른 예들 사이의 유사성이 아니라, 도리어 그 둘 사이의 심오한 차이점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도 유사성을 찾는 이유는 명백하다. 사람들이 예수의 인격의 장엄함을 볼 수 있는 눈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를 자기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자기희생의 예는 무수히 많다. 그렇다면 오래전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이 한 사건에만 관심을 쏟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은 예수를 언급하면서 “죄의 값을 지불하기에 충분한 선행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각 사람은 이제 평화 시에나 전시에 어떤 고귀한 대의를 위해 결정적 행동을 취할 만큼 용감하다면 죄의 값을 충분히 지불할 만큼 선한 것으로 간주된다.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가를 지불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까지 그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단지 사람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도덕적인 세계의 가장 중심에 있는 비밀의 주인이시다. 그는 다른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했다. 그는 우리 죄를 담당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속죄 교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기독교 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죄를 속한다는 현실은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그리스도라는 인물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심지어 교회에서 부르는 십자가 찬송도 예수라는 인물을 높게 여기는지 낮게 여기는지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될 수 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네! 나를 끌어 올리는 것이 십자가라 할지라도”. 이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 혹은 고난들이다. 분명히 복음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는 자랑하네. 시간의 잔해 위에 우뚝 솟은 십자가. 거룩한 이야기의 모든 빛이 그 장엄한 머리의 주위에 모이네.” 여기서도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충만한 기독교적 감각을 아쉬워하게 된다. 십자가가 높여지기는 하지만 이해되지는 못하고 있다. “영광의 주가 달려 죽은 놀라운 십자가를 살펴보고 나의 부요를 손실로 여기고 나의 모든 자만에 조소를 퍼붓네”. 여기서 참된 기독교적 정서의 어조가 들린다. 갈보리에서 고난당한 이가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영광의 주라는 이해에 도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과 사회의 소망을 위해 흘려진 예수의 고귀한 피 한 방울이, 역사의 전쟁터에서 흘려진 모든 피의 강보다도 더 큰 가치를 가진다고 기꺼이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에 대한 반대는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장엄한 기독교적 감각 앞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오늘날 자연주의적으로 재구성된 예수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고난당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영광의 주에게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만약 오늘날 반대자들의 말대로 대속적 죽음이라는 관념이 그렇게도 불합리하다면, 그 죽음에 근거한 기독교 경험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말해야 하는가? 현대 자유주의 교회는 경험에 호소하기를 좋아한다. 갈보리에서 오는 복된 평안에서 기독교의 경험이 발견되지 않으면, 어디에 참된 기독교적 경험이 있는가? 하나님과 관계를 바르게 가지기 위한 자기의 모든 노력,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모든 열광적인 시도가 다 무익하며, 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자기를 비난하던 모든 기록을 지웠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만이 이 평안이 온다. 이 복스러운 지식으로부터 오는 평안과 기쁨의 깊이를 누가 측량할 수 있는가? 이는 “속죄의 이론” 혹은 인간 망상의 속임인가? 아니면 참된 하나님의 진리인가?

출처 : 청 교 도 의 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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