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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기 희생 / 히 9:11-14

by 【고동엽】 2021. 12. 14.

하나님의 자기 희생/히 9:11-14

 

 

저는 오늘 하나님의 자기 희생의 절정인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86장 '내 주의 보혈은' 찬송가는 우리 한국교회 믿음의 선배들이 밤낮없이 부르면서 십자가 앞에서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던 곡인데 말씀을 듣기 전에 1절 한번 불러 봅시다. 풍금도 없고 오르간도 없을 때 박자도 제대로 안 맞으면서도 그 찬송이 너무 좋아서 눈물 흘리며 부르던 우리 선배들을 마음에 떠올리면서 왜 우리는 그들만큼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고 있을까 하는 가책도 마음에 느끼면서 반주하지 말고 옛날 식으로 불러봤으면 좋겠습니다. 안이숙 사모님이 8년,9년 전에 우리 교회에서 집회하실 때 시간마다 가사를 바꾸어서 이 찬송을 불렀죠? '지금 가오니'를 '지금 왔으니'로 바꾸고, '갈보리'는 문학적인 표현이지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바꾸라고 하여 시간마다 부르면서 은혜 받은 기억이 납니다. 가사를 바꾸어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아멘

 

 

 

얼마 전 화재가 난 현장에서 소방관 6명이 아까운 목숨을 던져 순직하는 장면을 TV를 통해 지켜 보면서 우리 모두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 한 일이 있습니다.

 

방화범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정신적으로 약간 온전치 않은 사람인데 정신병원이나 기도원을 전전하면서 치료를 받은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날도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다투다가 어머니를 때리고 홧김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급히 밖으로 뛰어 나와서 소방관을 붙들고 아들이 아직 못 나오고 있으니 살려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소방관 6,7명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르르 집안으로 들어 갔다가 불더미에 힘없이 쏟아져 내리는 벽돌더미 아래 그 고귀한 생명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TV를 보면서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보니 방화범은 오히려 멀쩡하게 살아서 밖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죽어야 될 사람은 저 사람인데 너무나 아까운 사람들이, 처자가 딸린 6명이 희생을 당했구나. 저 사람이 평생 살면서 자기가 6명의 소방관의 생명을 대신해서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빚진 감정을 가지고 살까? 정말 사람이 좀 달라질까? 인간다운 존재로 바뀔 수 있을까? 자기를 위해 희생한 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던져 사람답게 살아 보려고 애를 쓸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 방화범과 저 자신을 비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사람 같지도 않은 인간이지만 6명의 생명을 희생하고 대신 살아 남았다. 너는 어떤가? 너는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덕분에 지금 살고 있지 않는가? 지금 저 사람을 속으로 욕하면서 차라리 저 사람이 죽었으면 하고 있는데, 진짜 죽어야 될 사람은 너야. 너는 얼마만큼 떳떳한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 받은 사람답게 살고 있느냐?' 그러다 보니 남을 욕 하던 것이 결국은 나를 욕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을 탓하는 사람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가까이 묵상할 때마다 이렇게 사람을 엄숙하게 만듭니다. 어떤 면에는 다시 한번 내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실존의 자아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종합해 보면 주후 30년 4월 7일 경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 되셨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아주 간결한 세 마디가 반복되는 것을 봅니다. '못박히시니라, 운명 하시니라, 장사 지내니라'

 

분명히 예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엄연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기독교가 만들어 낸 우화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정신이 이상해져서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꾸며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분명한 역사적인 사건이요, 아무도 이 사건을 거짓으로 증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만큼 불가사의한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큼 모순 투성이가 있습니까? 어떻게 의인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다 말입니까? 십자가의 죽음만큼 가공할 만한 죽음이 또 있습니까? 가장 참혹한 죽음의 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세계가 다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 죽음을 하나님의 아들이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해는 빛을 잃었고 땅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진동했습니다. 여인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을 했습니다. 십자가의 전율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감동은 아직도 식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까지 그 감동은 점점 더 진해질 것이고 그 전율은 더 강하게 흔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서 저 나라에 가면 영원토록 그 십자가의 영광은 광채를 발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 이 십자가에 대해서 그렇게 칭찬할 만한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태도를 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모른다고 하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내용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잘 모른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담겨 있는 영적인 의미와 은혜를 잘 모르고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르고 사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고 교회를 다닙니다.

 

1863년 링컨이 새해 벽두에 노예해방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그 일로 인해서 링컨은 괴한에게 피살 되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흑인들의 행복과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바친 것입니다. 흑인들은 평생 아브라함 링컨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링컨이 땅에 묻힌 뒤 수년이 지났습니다. 남부에 있는 대 농장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은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가 알라바마에 있는 어떤 흑인을 붙들고 물었답니다. "당신은 링컨을 압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링컨에 관한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를 해방시켰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링컨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리고 해방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니 이 노예들의 무식함을 농장 주인들은 최대한 이용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던지 무식한 채 내버려 둬라. 가르치지 말라. 그리고 일만 시키자.' 이것이 노예 주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기에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 안에 담겨있는 영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는 영적 지식이 부족하면 마귀 좋은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마귀는 '모르는 것이 좋다. 교회만 다녀라. 그 정도면 됐어.' 하고 우리가 십자가 앞으로 더 깊이 들어가려고 하는 문을 전부 걸어 잠궈 버립니다. 이런 잠긴 문 속에 갇힌 성도들이 교회 안에 한두 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불행입니다. 비극입니다.

 

또 한 부류가 있는데, 너무 많이 알아 가지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서 둔감해 진 사람들입니다. 모태신앙 입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 다니면서 귀가 아프도록 듣고 또 들었습니다. 성경도 꽤 많이 읽고 배웠습니다. 다 아는 것입니다. 처음 이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가슴으로 느꼈을 때는 주님 앞에 너무 감격해서 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울기도 하고, 가슴이 너무 뜨거워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열정을 보인 때도 있었고, 생각 할 때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이 너무 고마워 찬송을 부르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 버리고 지금은 덤덤해져 버렸습니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20대에 과부가 되어 아들 하나에다 소망을 걸고 평생을 고생하며 키운 엄마가 결혼한 아들을 놓고 '얘,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지 아니?' 하면서 밤이고 낮이고 계속 같은 소리를 해대면 나중에는 그 고마움이 고마움으로 전달이 안됩니다. 가슴이 무디어져서 듣는 둥 마는 둥, 들어도 그만이고 안 들어도 그만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심성입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 아무리 감격적인 이야기라도 자꾸 계속해서 듣고 반복하면 감동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을 용인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항상 십자가의 은혜를 새롭게 느끼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한두 가지 알았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습니까? 그 깊은 차원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새로운 은혜를 계속 발견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가 매일매일 새롭게 다가오게 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마음이 둔감해져서 요즘에는 은혜가 안 된다는 식의 소리는 변명이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닙니다.

 

저의 가슴 속에 뜨거운 부르짖음이 있습니다. 저를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한 부르짖음입니다. "성령이여 좀 더 강하게 좀 더 진하게 좀더 뜨겁게 우리에게 임하셔서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 눈을 밝혀서 십자가의 그 놀라운 죽음을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마음에 담을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옥 목사를 주님께서 그런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 달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사랑의교회가 커지다 보니 너무나 많은 분들이 은혜를 모르고 교회를 왔다 갔다 하고 계십니다. 사랑의교회를 오래 다닌 분은 오래 다닌 대로 그 영혼이 둔감해졌습니다. 식어 있습니다. 큰 교회가 되어서 적당히 숨을 곳이 많기 때문에 편하게 신앙생활 하려고 이 교회를 찾은 분들은, 여전히 은혜는 메말라 가슴에는 황야와 같이 타 들어 가는데도 그것이 영적인 병인 줄을 모르고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보면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두셔서는 안됩니다. 옥 목사도 이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 이야기를 너무 많이 설교하다 보니 저도 마음이 식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이대로 두시면 안됩니다. 우리 교회를 이대로 두시면 안됩니다. 성령이여 임하소서. 영혼을 깨뜨리시옵소서. 영혼을 울려 주시고 영혼을 깨워 주시옵소서." 이런 부르짖음이 저에게 있습니다.

 

십자가는 몇 마디 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그 은혜를 다 알려면 죽을 때까지 십자가 앞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도 모자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십자가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 있습니까? 그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띠를 동여매고 등불을 들고 이 놀라운 은혜를 알아 보려고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둔감해 진 사람이 있습니까? 회개하십시오. 어디에다 마음을 다 빼앗기고 십자가의 은혜 앞에 둔감해집니까? 무엇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여러분의 마음은 그렇게 있어서는 안 되는 것들로만 가득 차서 십자가가 멀리 보이게 되었습니까? 원인이 어디 있는지 찾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보시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로 선언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거침없이 이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9장 27절에 있는 말씀대로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우리 모두 다 죽습니다.

 

육신이 죽고 난 다음에 죄의 결과로 따라 오는 것이 있습니다. 심판입니다. 여러분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압니까? 여러분 법원에서 판사가 호출을 해도 가슴이 덜렁덜렁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아십니까?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으라고 하십니다. 다른 종교는 이와 같이 인간을 놓고 구원 받아야 될 존재라고 노골적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힌두교의 어느 유명한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힌두교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은 신의 자녀요, 인간은 거룩하고 성결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을 놓고 '죄인이다, 회개하라.'고 하는 것은 모독하는 것이요, 그 자체가 죄악입니다." 이거야말로 눈 감고 아웅이 아닙니까? 정말로 인간이 거룩합니까? 회개가 필요 없고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우리 양심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인간만큼 더러운 악마들이 어디 있습니까? 역사를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한번 보십시오. 인간이 정말 죄가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그런 눈 감고 아웅식의 거짓말을 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다 엉망입니다. 구원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구원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꼭 십자가에 죽으셔야 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꼭 죽어야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를 가지고 이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제사제도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그 죽음을 미리 가르쳐 주고 미리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을 읽으면서 십자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제사제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무슨 원리인 줄 아십니까? 9장 22절 보십시오. '율법을 좇아 그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것이 제사의 기본 원리 입니다. 왜 제사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짐승을 잡습니까? 왜 피를 흘리고 피를 뿌립니까? 피가 없으면 죄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죄인이 됨으로 인하여 생명을 잃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찾아 온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을 대체할 생명을 다시 회복하려면 생명의 상징인 피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입니다. 피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피를 뿌렸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짐승을 끌고 와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 짐승은 자기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는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그 짐승을 잡아 피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뿌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 지냄으로 그 사람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대제사장은 1년에 한 차례씩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자기 몸에 피를 뿌리면서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지성소로 가서 자신의 죄와 모든 백성의 죄를 하나님 앞에 용서 받고 나왔습니다. 이와 같은 속죄의 은혜는 피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구약에 모든 제도는 다 일시적인 것이고 그림자요, 불완전한 것입니다. 구약에 대제사장이 누굽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자기도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하지 못합니다. 또 구약에 드리는 모든 제사는 짐승의 피입니다. 짐승의 피이기 때문에 일시적인 효력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죄를 범할 때마다 자꾸 반복해서 짐승을 잡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제사 제도를 계속 하시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매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한 준비를 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죄가 없기 때문에 완전 무결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게 만드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분입니다. 예수님이 드린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영원한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짐승의 피가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제사는 완전한 제사요, 한번 드림으로 끝나는 제사요, 다시 반복 할 필요가 없는 제사입니다. 한번 드림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 자신의 자기 희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꼭 명심 해 두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희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아닙니다. 거기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십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인간이신 예수님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은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요, 하나님입니다. 사람이요, 하나님입니다. 완전하신 사람이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만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요, 하나님이신 분이 그곳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십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 값을 배상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배상 해야 됩니다. 범죄한 사람이 배상의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배상을 만족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할복 자살을 해도 하나님이 원하는 죄의 값을 우리가 지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희들이야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내가 받아주마.' 하고 죄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우리를 받으신다면 하나님의 거룩에 상충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순을 범할 수가 없습니다. 죄는 죄대로 처리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죄는 벌하고 죄인을 살릴 수 있는가가 하나님의 숙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죄는 벌하고 죄인은 살릴 수 있는가. 이 난제를 해결하는 방안이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의 배상을 책임지기 위해서 자신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만족하실 수 있는 배상을 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이셔야 했습니다. 배상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 사람이 되셔야 했고 배상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셔야 됐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하나님이요 사람이신 그 분이 못 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들을 주시면서 자기 자신도 주셨습니다. 아들 되는 예수님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내리는 형벌을 스스로 담당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신비한 연합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형벌을 자기가 내리면서 그 형벌을 자기가 담당하는 신비스러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외에 완벽한 대제사장과 완벽하고 완전한 제물이 될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태리의 어느 성당에 가면 큰 그림이 하나 걸려 있는데 그 그림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흔히 보는 십자가의 벽화인데, 자세히 보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예수님 뒤에 희미한 모습으로 더 큰 어떤 분이 계시는 것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못에 찔린 손바닥에는 그 뒤에 계시는 그 분의 손바닥도 함께 포개져 있고 창에 찔린 예수님의 옆구리에는 예수님과 함께 그 분의 옆구리도 함께 찔려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이거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죽으신 겁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를 희생한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이 우리 가슴에 깊이 젖어 들어와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십자가의 영적인 의미를 우리가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18절의 말씀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죽음, 십자가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소방관 6명이 그 인간 같지 않은 한 사람을 살리려고 하다가 순직을 당하니까 그 죽음이 얼마나 능력 있었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찡하게 울렸고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뽑았고 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소방관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 유족들을 위해서 자기 호주머니를 털고 아까운 줄 모르고 내 놓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얼마나 소방관의 죽음이 능력이 있었는지 사람들을 변화 시키고 국민의 정서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지난 1월 신주쿠 지하철에서 술에 만취 되어 철로에 떨어진 일본 사람을 건지려고 자기 몸을 던졌던 이수현씨의 죽음이 알려지자 전 일본 열도가 열광했고 흥분했고 애도했습니다. 얼마나 그 죽음이 능력 있었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그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고 대한민국에 대한 그들의 시각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의인의 죽음도 선한 사람의 죽음도 이처럼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능력이 없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찢어 놓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않도록 하겠습니까?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에 굴복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세상을 구원 할 능력이 있습니다. 이 능력이 오늘도 살아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주었습니다. 12절을 잘 보십시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자기 몸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물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속죄, 다시 말하면 한번 용서한 다음에는 더 이상 회개도 필요 없고 더 이상 용서도 필요 없는 완전무결하고 영원히 유효한 죄의 용서를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속죄입니다. 얼마나 능력이 큰지요.

 

그러므로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가면 씻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얼마나 그 십자가의 보혈이 능력이 있는지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이 없습니다. 씻지 못한 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무시하고 세상을 너무 오랫동안 살았습니까? 무서운 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 모든 죄를 다 도말해 주십니다. 여러분, 우상숭배를 많이 하셨습니까? 모르고 한 일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1계명, 2계명을 범한 죄 중에 죄 입니다. 그러나 우상숭배 했던 과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십자가를 붙들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우상숭배의 죄를 씻어 주십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음란합니까? 간음합니까? 남 모르게 더러운 생활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는 더러운 생각으로 날마다 들끓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못 고칩니까? 십자가 앞으로 오십시오. 십자가 앞에 와서 피 흘리시는 주님의 옷 자락을, 주님의 발목을 잡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더러운 음란한 죄라도 간음한 죄라도 다 씻어 주시고 다시는 기억치 않으십니다. 사랑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용서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불법을 사하시고 영원히 기억치 아니하신다고 약속하신 그 약속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십니다. 이것이 영원한 속죄입니다. 할렐루야. 이 속죄를 우리에게 주실 만큼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듭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지금까지는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만들고, 지금까지는 그저 아까워서 재물을 내 놓지 못하던 다 풀어 놓게 만듭니다.

 

14절을 봅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어떻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흠 없는 자기를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이 말은 죽음에 이르는 악한 행실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은혜 받으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 은혜 받으면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려 헌신하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나 같은 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죄 없는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그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 생을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요. 아까운 것이 없어요.

 

주일 날 그저 한두 시간 내어 교회 와서 예배 드리는 것도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분입니다. 헌금 몇 푼 하면서 그것 가지고 아까워 하십니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야 될 일을 빤히 보면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안하고도 마음에 가책이 없습니까? 아직도 십자가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아직도 사로 잡히지 못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에 사로 잡히면 여러분은 그렇게 머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순종하게 만듭니다. 헌신하게 만듭니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 가까이 나아간 사람의 고백이요,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고백이요, 날마다 십자가를 새롭게 체험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꽉 묶어 놓습니다. 십자가는 얼마나 대단한지.

 

필립 얀시가 말한 것처럼 십자가에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 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텅텅 비었던 가슴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차오르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을 두려워 하던 사람이 담대함을 갖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불만족에 휩쓸렸던 사람들이 날마다 찬송하고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죽음은 능력이 있어서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순종하고 헌신하게 만들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의 손에 꼭 사로 잡혀 살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릭 샤우어라고 하는 독일 학자의 말이 맞습니다. 구원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사건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부활 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고 부활은 정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승리가 있어야 정복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부활 보다 더 위대합니다. 하나님의 죽으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은 가장 위대한 복음이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 외에는 내가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성령 앞에 기도하십시오. 답답한 마음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십자가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과 은혜를 하루하루 알 수 있도록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이대로 머물지 마십시오. 그 십자가의 은혜에 우리가 붙들리기만 하면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됩니다 아무도 우리를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종일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고 우리가 종일 죽임을 당하는 자처럼 취급 받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은혜를 이번 고난 주간을 통해서 특별히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발견하고 사랑의교회가 십자가의 감격, 십자가의 능력으로 뜨거워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에 불렀던 찬송을 다시 불러 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던 은혜를 발견하게 해 주시고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아직까지도 둔감한 마음을 가지고도 태연스럽게 앉아 있는 우리가 가슴을 찢고 십자가에 그 놀라운 보혈의 피로 가득히 채우는 시간 되게 해 달라고 우리 기도하면서 이 찬송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날 오라 하심은 온전한 믿음과 /또 사랑함과 평안함 다 얻게 함일세/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큰 죄인 복 받아 빌 길을 얻었네/ 한 없이 넓고 큰 은혜 베풀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내 기도 소리 들으사 다 허락 하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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