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의 창시자는 존 녹스이다.
1) 청교도의 창시자 존 녹스의 생애와 사상을 통해서 청교도의 정신을 배우고자 한다.
그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자라났고 사제가 되었다. 한때 그는 존 녹스 경으로 알려졌다.
존 녹스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선조들 중에 귀족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도 없었고 또한 그를 추천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다. 1503년, 1504년, 1513년, 1515년?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뛰어난 천부적 재능 때문이었고 특히 그의 회심의 결과이기도 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초기에 비추어진 대단한 빛을 통해 놀라운 방법으로 회심했다. 그는 대단한 변화를 경험했고, 로마 카톨릭에 등을 돌리게 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세인트 앤드류를 점령하고 여러 사람들을 붙잡아 갔을 때, 존 녹스도 붙잡혀가 거의 2년 동안 프랑스 군함에서 노예로 일을 했다. 이것은 가장 참기 힘든 체험이었는데, 그는 이 고통을 받으면서 그러한 삶의 가혹성과 지독한 잔인성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그의 전생애에 흔적을 남겼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건강을 해쳤고, 건강 때문에 끊임없이 고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에드워드 6세가 통치할 때에 궁정 설교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에드워드 6세가 16세의 나이로 죽자 “피의 여왕” 메리 여왕이 영국 왕이 된다. 녹스와 다른 수많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제네바의 존 칼빈 밑에서 공부하기도 했다. 메리 여왕이 죽고 1558년 엘리자베스가 즉위한 다음 해에 스코틀랜드에서 위대한 일을 시작했고 1572년 그곳에서 죽기까지 계속 거기서 사역했다.
존 녹스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적대감을 받았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칼빈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성품 속에는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칼빈보다 더 있었던 것 같다. 교회가 카톨릭으로 하나가 되어 있던 당시 존 녹스와 같은 사람은 신랄한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2)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키가 작은 사람들과 작은 민족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또한 현대의 표준으로 보면 외모적으로 특출한 데가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강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육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를 추천할 만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 가지 뛰어난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눈에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의 능력이었다. 칼빈은 학자였지만 그는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서로 다른 것들을 분별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또 다른 특징은 그의 놀라운 정력이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물론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군사 지도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데모스테네스가 웅변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행동, 행동, 행동”이라고 했다.
3) 녹스는 겁이 많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여러 번 스코틀렌드에서 도망쳐 잉글랜드나 유럽대륙으로 건너가 핍박과 큰 위협을 피했기 때문이다. 그는 위대한 지혜와 주도면밀함의 원리에 따라 행동한 것이었다. 자신이 스코틀랜드에 있었으면 여지없이 사형에 처해질 것임을 그는 알았다. 조지 위샤트와 패트릭 해밀턴 등 자기보다 앞선 사람들이 그렇게 되었다. 그는 그같이 사형에 처해져 희생당하는 것은 일을 진척시키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도망쳤다.
때로는 머물러 있다가 순교자가 되는 것보다 도망치는 데 더 큰 용기를 필요할 수 있다.
4) 그는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거의 매 단계에서, 자신이 얼마나 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이상은 결코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5) 그의 용기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혼자 되는 것, 혼자 서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마르틴 루터의 영웅적인 성품을 녹스에게서도 발견한다.
그는 죽으면서 “나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6) 녹스는 매우 능력있는 설교자였다.
설교자로서 그의 위대한 특징은 열열함이었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메리 여왕은 녹스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많은 잉글랜드 군대보다도 녹스의 기도와 설교를 더 무서워했다.
신하요 대사였던 랜돌프는 녹스와 그의 설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 한사람이 한 시간 동안 하는 말은 500개의 트럼펫이 계속 귀에 불어대는 것보다
더 많은 생기를 우리에게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녹스가 한 설교로 전체 상황이 변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영주들과 다른 사람들이 놀라서 어쩔 줄 모르고 모든 사람들이 굴복할 준비가 되었을 때,
녹스는 설교단에 올라가 설교를 하여 전체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 칼 라일은 존 녹스를 “청교도주의의 대제사장이요 창시자”라고 했다.
1) 녹스는 그의 사상의 독창성과 독립성에 있어서 청교도주의의 창시자였다.
정의상 청교도란 독립적인 사람, 독자적인 사상을 구축한 사람이다.
청교도는 결코 “기성인”이 아니다. “종교의 기성화”의 차원에서 뿐 아니라 모든 면의 기성화에 대해서도 그것을 뜻한다. “기성화된 사람”으로 태어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떠한 삶의 영역에 대해서도 언제나 권위자들의 편에 서며, 이제까지 이루어진 일과 상태 편에 선다. 그들의 최고의 관심은 과거를 고수하는 것이다.
청교도는 그 본질과 정신에 있어서 결코 “기성화된 사람”이 아니다.
독립성과 독창성, 스스로 성경을 읽는 자세,
다른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것과 관계없이,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열망 때문이다.
2) 녹스는 청교도주의의 주도원리들을 명백하게 제시했기 때문에 청교도주의의 창시자이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최고 권위의 주도 원리로 삼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그 전통 및 성경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우선한다.
청교도들의 독특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 권위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녹스의 주도 원리이다. 만일 성경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않았고, 그것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3) 두 번째 주도원리는 “철저한”(뿌리와 가지) 개혁을 믿었다는 것이다.
교리의 개혁에만 멈추지 않고 개혁이 실제의 영역에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약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새로운 교회(“새로운 형성”)를 만드는 것이었다.
존 녹스는 말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 특히 성례를 집행할 때 성경에 명시된 규율을 가감 없이 지켜야 합니다. 교회는 종교 의식들을 고안하거나 그것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열납될 만한 종교를 만들거나 고안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종교를 가감 없이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신약의 성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시고 사도들이 행했던 대로 집행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덧붙여서도 빼서도 안 됩니다. 또 미사는 가증한 우상숭배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요 주의 성찬을 사악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4) 녹스는 이 원리들을 적용했다. 이론적 학문적인 청교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청교도주의를 하나의 사상으로 생각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가르침들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청교도주의를 배반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원리들을 적용하는 것은 참된 청교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녹스가 존 후퍼보다 탁월했던 부분이 이것이다.
후퍼는 자기가 믿는 것에 등을 돌리는 경향이 있었다.
후퍼는 감독으로 임명받아야 할 때, 자신은 관례적인 예복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히게 되자 굴복하고 예복을 입었다.
행동이 말보다 중요하다. 녹스는 그 당시 공식적으로 사용하던 공기도서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것에 관심을 가지라고 요청하지도 않았고 게시판에 발표하거나 자기는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5) 녹스는 신약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믿는 교회의 본질과 규례 및 의식을 양심적으로 적용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뛰어났다. 중요한 사항 한 가지는 성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는 관습에 대한 것이었다. 이것은 수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 지배하에서 해온 관행이었고 개혁된 국교도들도 지킨 관행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앉은 자세로 성찬을 받으라고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존 녹스였다. 이렇게 가르쳤을 뿐 아니라 실행에도 옮겼다.
이것이 실제의 청교도주의이다. 이것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존 녹스가 지도력을 발휘하여 행한 또 다른 혁신은 성찬 때 쓰는 면병 대신 빵을 사용한 것이다. 녹스는 그러한 일을 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6) 잉글랜드 청교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되었다. 토머스 칼라힐은 녹스가 미국 청교도주의의 창시자라고 한다. 녹스는 1776년의 미국의 독립전쟁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문을 열어놓은 사람이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16세기의 스코틀랜드나 이 나라의 여러 지역에는 유순한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강한 사람, 엄격한 사람, 용기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 사람이 바로 존 녹스이다. 마르틴 루터도 같은 기질의 사람이었다. 그 시대는 영웅적이고 거센 성격의 소유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일으키셨다.
7) 존 녹스의 마지막 임종을 그의 딸이 이렇게 기록했다.
정오쯤 되어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고린도전서 15장을 큰소리로 읽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영과 혼과 몸을 하나님께 부탁하면서 세 손가락으로 영과 혼과 몸을 표시했습니다. 오후 5시쯤 되었을 때 ‘내 처음 닻을 내렸던 곳을 찾아서 읽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요한복음 17장을 읽었습니다. 10시쯤에 저녁 기도문을 읽었을 때 의사가 기도문을 들을 수 있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당신과 모든 사람이 내가 그 기도문을 듣는 것처럼 듣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아뢰겠습니다 저 하늘의 소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짧게 ‘이제 때가 왔다’고 덧붙였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들어갈 때, 이 위대한 하나님의 용사가 들어가 그의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았을 때 하늘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음에 틀림없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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