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난에도 복음 따르는 일 주저말라 강조"
타락도 어려움도 모두 하나님 통치와 인도 안에 있으며 그 뜻대로 진행됨을 가르쳐
‘율법은 하나님 알려주는 복된 길’에 주목 … “하늘 백성 위한 하나님 선택은 자유롭다”
츠빙글리는 개혁교회 신학사상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섭리론과 예정론을 체계화시킨 인물이다. 김지훈 목사(신반포중앙교회)에게 그 내용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츠빙글리가 섭리와 예정에 대한 사상을 체계화시킨 인물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이유는.
=루터로 대표되는 독일의 종교개혁에서는 ‘섭리와 예정’이라는 주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물론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노예의지론’을 가지고 논쟁하면서 예정에 대한 사상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리는 그의 신학의 중심이 되는 주제는 아니었다. 여기에 비해서 츠빙글리로 시작된 스위스의 종교개혁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이 중요한 주제로 나타났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을 따로 주제로 분리하여 작품(Sermonis de providentia dei anamnema,1530)을 썼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그의 신학사상과 경건이 뒷받침된다. 츠빙글리의 신학에서는 세상의 창조주이며 섭리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이 전면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신학사상은 그가 1519년 흑사병에 걸려 죽음 앞에 서는 깊은 말씀의 체험(사64:8)을 통하여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츠빙글리에게서 나타난 섭리와 예정에 대한 사상은 그 후에 세워지게 될 스위스 개혁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고, 제네바 신학자들을 거쳐서 도르트 회의(1618~19)에까지 연결되었다.
김지훈 목사는 츠빙글리가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을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조명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로마가톨릭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쳤고 종교개혁가 루터는 섭리와 예정을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다루지 못하고 있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께서 섭리에 의해서 세상을 다스리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했나.
=츠빙글리의 율법관은 사람의 창조 목적과 연관되어 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 분을 경험하고 교제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 목적을 위해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고, 그 형상으로 인하여 사람은 하나님을 알며 영화롭게 할 수 있다. 여기에 율법의 자리가 있다. 하나님은 피조물인 사람에게 율법을 주셔서 그 분을 알게 하시고,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신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과 속성들이 담겨 있기에 그 분을 알려주는 계시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시는 수단이고 길이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율법관은 루터의 율법에 대한 이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루터는 율법을 다룰 때 죄인을 정죄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는 기능에 주목했다. 이에 비해서 츠빙글리는 사람이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을 알며 교제할 수 있다는 데에 주목했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율법관인 ‘율법의 제3사용’과 연결된다. 율법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복된 길이다.
▲츠빙글리는 선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타락을 허용하신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나.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께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인류에게 타락을 허용하셨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사람의 타락을 통하여 무엇이 선한 것인지 드러내시는 것이다. 죄와 불의함이 나타나야 선이 무엇인지 ‘상대적으로’ 알 수 있다. 어떤 것을 규명할 때 비교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악의 출현을 통하여 사람에게 선을 가르치려고 하셨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타락 자체도 선한 것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타락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심으로 그 분의 선하심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시면서 그 분의 구원의 지혜와 능력을 보이기로 하셨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인류의 타락을 아셨고 허용하셨다고 말한다. 타락도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츠빙글리의 이와 같은 섭리사상이 오늘날 교회에 주는 위로는.
=츠빙글리가 1529년 마부르그(Maburg)에 모인 필립 공과 귀족들에게 이 섭리사상을 설교할 때,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다. 독일과 스위스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나, 그 세력은 약하였고 로마교회는 여전히 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개신교회를 위협하였다. 그렇기에 종교개혁자들이 서로에 대한 오해를 거두고 힘을 합치기 위해서 회담을 연 것이었다. 츠빙글리는 그렇게 모인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섭리를 설교하면서 인류의 역사와 교회의 구원이 그 분의 뜻과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서도 종교개혁에 동참하며 복음을 따르는 일에 주저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이다. 악한 일 조차도 그 분의 영광과 성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권면이 될 수 있다. 세상은 강하나 교회는 약해 보인다. 복음을 따르는 성도에게는 고난과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도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 안에 있으며, 세상은 그 분의 뜻대로 진행되고 있다. 성도가 겪게 되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복음을 따르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츠빙글리는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유로 결정하셨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이전까지 로마가톨릭의 입장과 무엇이 다른건가.
=로마교회 역시 하나님의 선택을 가르쳤는데,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을 영원 전에 선택하셨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조건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믿고 거룩하게 될 사람을 택하셨다고 믿었다. 이러한 선택은 츠빙글리가 볼 때 인간적인 것이었다. 이에 반해서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선택이 ‘자유롭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를 택하실 때 모든 인간적인 조건과 배경을 뛰어 넘으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가장 악한 악인도 거룩하고 의로운 백성으로 만드실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분은 자유롭게 선택하신다.
▲믿음과 선행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바른가.
=이 문제에 대한 츠빙글리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선행으로 받는 것이 아니다. 만약 아주 적은 부분이라도 선행이 구원, 혹은 믿음의 조건이 된다고 한다면 다시 행위구원으로 돌아가는 잘못을 범하게 된다. 츠빙글리는 로마 교회의 조건적 구원에 대하여 반박하고자 했기 때문에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을 강조했다. 구원은 믿음의 영역이다. 그렇다면 선행의 자리는 없는가? 그렇지 않다. 믿음은 반드시 선행을 동반하는데, 믿음은 선행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루터와 츠빙글리, 어떤 개혁자도 선행을 등한히 한 적이 없다. 오직 선행을 믿음과 구원의 조건으로 보는 것을 반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선행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당연하며, 츠빙글리는 성도들에게 믿음 위에서 선을 추구하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여기서 목회적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선행이 잘 나타나지 않는 성도에게 구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보다는 연약한 성도가 장성하여 선행을 이루어 가도록 기다리며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영적 성장에는 시간이 요구된다.(인터뷰-김지훈 목사)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0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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