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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3

by 【고동엽】 2009. 4. 29.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3
3. 아가페와 카리타스(慈愛) 사랑
성서언어인 그리스어 아가페가 가톨릭 사랑인 라틴어 카리타스(慈愛)로 번역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어로는 채리티(慈善 charity) 입니다. 자애(慈愛)란 아랫사람에 대한 도타운 사랑이라는 문자적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신약성서 언어인 그리스 문화권에서는 에로스와 필리아(우정) 등을 사랑 개념으로 사용하고 아가페는 신의 사랑으로서 문학 등 일상의 삶에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첫 번역한 성서(70 인역)에서 히브리어 '헤세드'가 그리스어 아가페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번역 작업을 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셔서 그들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지칭하기 위해서 아가페가 쓰였습니다.(신6:5, 레19:18)
아가페는 자기 희생적이며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사랑 입니다.
이 신의 희생적 사랑인 아가페를 인간의 윤리적 사랑으로 전환한 것이 카리타스인데, 이 카리타스는 자비 사랑으로서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사랑 입니다.
이 자비 사랑은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필요한 인류의 보편적 가치 입니다. 그러나 카리타스 즉 자비 사랑은 시혜적 성격을 띨 염려가 있어서 인간의 교만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예수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 입니다.
20 세기 초까지 기독교의 사랑 즉 이웃 사랑은 자선 행위로 알았습니다. 자선 행위란 자비 사랑(caritas, charity) 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비가 진리와 대립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창세기 1 장 26 절을 랍비들이 미드라시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했습니다. 자비가 사람을 만들어 냅시다 라고 말했습니다. 진리가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들지 맙시다. 왜냐하면 자비는 모든 것이 거짓이기 때문 입니다. 정의가 말했습니다. 사람을 만들어 냅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의로움을 행할 것 입니다. 평화는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들어 내지 맙시다. 왜냐하면 정의는 싸우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 입니다.(조철수, 창세신화 서해문집 113-114p)
그래서 시인은 그날이 오면 자비와 진리가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노래합니다.(시85:10)
니체는 동정(com - passion)을 함께 고통하는 것이라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같지 않기 때문 입니다. 그의 고통이 그에게 고유한 것처럼 나의 고통은 나에게 유일합니다.
사람은 쾌락의 충동에서도 동정을 합니다. 쾌락은 우리가 처한 상태와 전혀 다른 것을 볼 때 생기며,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에 생기고, 도와줄 경우 받게될 감사와 찬양에 생기고, 도우며 일어나는 뿌듯함에 생기지만 정작 중요한 경우는 내가 불의를 막는다는 느낌에서 생깁니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154-155p)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사디즘적 태도 즉 내가 너의 좋은 것을 줌으로 나를 따르라, 즉 지배하려는 의도에서 동정이 생깁니다.(에릭 프롬, 자유로의 도피 108-109p)
어찌 세상에 자비와 동정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프란시스 교황이 취임 설교에서 이땅에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신 말씀을 주목합니다. 필자의 글을 통해 자비를 소홀히 한 사람은 주님 앞에서 함께 해명해야 할 것 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한 가지 생각만으로 행동하지 않고 복합적 생각으로 행동합니다. 그럼에도 학자들이 한 가지 면을 강조하며 분석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를 이끌어 내기 위함 입니다.
우리가 자비사랑을 분석하는 것은 우리의 바른 윤리를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자비 사랑을 예수사랑처럼 행동한 마더 테레사의 사랑을 살펴볼 것 입니다.
그에 앞서서 이 자비 사랑(caritas)이 가톨릭의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게 한 2 사람, 아우구스티누스와 가짜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을 살펴 봅니다.
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2
아우구스티누스는 인류 정신사에서 최초로 인권 개념을 정립한 위대한 사상가 입니다. 그는 인간이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구원받을 사람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존재임을 역설했습니다.(마르틴 부버, 인간의 문제 79-80p)
그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에로스 사랑을 신봉하는 신플라톤주의 자 입니다. 그는 인간이란 선한 행위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순간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에로스 사랑이란 본래 종교 언어로서 신에게로 가는 의지를 말합니다. 이것은 플라톤의 구원 방법이고, 구원 질서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선을 통해 신에게로 가는 과정을 예수에게서 보았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그에게 사랑과 동경의 대상을 보여줄 수는 있었으나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을 보여줄 수는 없었습니다.(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 493p)
그는 예수에게서 선을 획득하는 방법을 보았습니다.
아우구스타누스는 하나님의 본질은 선(善)이라고 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후기저서들 56p)
선에 참여하고 선한 것을 넘어서, 선한 것에 참여한 선 자체를 봄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봄(vison)에 도달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후기저서들 62p)
그는 신에게로 올라가는 선이 목표 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도 신플라톤주의 안에서 이해했습니다. 그가 본 신플라톤주의의 오류는 교만(hubris) 입니다.
그는 예수에게서 겸손(humility)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만한 자신을 예수그리스도께서 은혜로 구원해 주시는데 반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그리스도의 도움을 얻어 선을 행함으로써 스스로 구원해 내려 하고 있습니다. 이때 그의 사랑은 선을 이루기 위한 사랑 입니다.
바울의 최대 관심은 화해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교만을(hubris) 허무는데 있습니다.(엡2:9)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신학
은 바울의 은혜 신학엔 턱 없이 못 미치는 신학 입니다. 결국 그는 바울의 은혜 신학을 땅에 파 묻음으서로 천 백 여년 후에 루터에 의해 발굴될 때까지 바울은 땅에 묻혀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놓지 못한 선은 결국 도덕으로서 사랑과는 같이 살 수 없는 부부 형국 입니다. 선과 도덕은 부정과 불의, 천함과 낯설음을 차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데 반하여 예수사랑은 차등 없이 용납하여 의롭다고 칭의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사랑 입니다.
기독교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신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에서는 선과 도덕을 추구하는 계몽적 설교가 흘러 넘칩니다. 교회는 재미있고, 유익하고, 교훈적인 설교가 행해지는 곳이 아닙니다. 이렇한 설교는 문학과 예술, 교육에 차고 넘칩니다. 교회는 이렇한 것들과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이렇한 설교를 들으면, 자기는 사치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며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가, 꼴 같지 않은 × 이 하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가치체계를 어떻게 뒤흔드는지가 선포되어야 하며, 자본주의 경쟁에 지쳐 있는 젊은이들에게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새로운 삶의 평화와 희망을 볼 수 있는 메시지가 선포되는 곳 입니다.
필자가 계속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지적하는 이유는 지금 기독교의 주님이 예수가 아니고 플라톤이기 때문 입니다. 이 현상은 종교개혁 이후로도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즉 당시 그 종교개혁은 정치 개혁 입니다.(김균진)
종교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계속 이어 갑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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