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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설교편◑/김동호목사 명설교 (155편)

말씀 인도 받는 사례 시119:71

by 【고동엽】 2013. 6. 25.

말씀 인도 받는 사례                  시119:71             

 

제가 고등학생 때 한 반에 교회 다니는 학생이 한 두명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점심시간에 기도하고 밥 먹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제가 도시락을 놓고 기도하는 시간에

짓궂은 친구들이 제 도시락을 갖고 도망을 가 버리던지,

아니면 제 반찬을 빼앗아 가버리곤 했죠.

 

가끔 친한 친구들이 제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면

친구들이 제게 이런 질문을 제게 했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면서?

왼발 빠지기 전에 오른발 딛고, 그 오른발이 빠지기 전에 왼발 디디셨냐?’

 

또 ‘뭐 홍해를 갈랐다고? 어떻게 바다를 가를 수 있느냐?’

하는 예수님의 이적을 두고서 비상식적이라고

믿을 수 없다고 .. 그래서 못 믿겠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때 제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고

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야

 

야, 사람이 물 위로 걸어갔다는 게 말이되냐?

그건 거짓말이고 사기이지!

 

그런데 하나님이 물에 빠지신다면 그게 말이 되냐?

하나님이 물 위를 좀 걸으셨다는데

하나님이시니까 물 위를 걸으셨지!

야 어떻게 하나님이 물에 빠지실 수 있겠냐?

 

홍해를 갈랐다고 했는데

그 홍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홍해를 가르신 것, 왜 못하시겠냐?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게지!’

 

제가 그때 고등학생이었지만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나는, 상식과 이치에 벗어나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지만

저는 별로 고민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잖아,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게지!’

 

믿지 못할 때, 믿음이 흔들리면 사람은 자꾸 편법을 쓰려고 합니다.

돌아서 우회해서 가려고 합니다.

꾀를 부리려고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믿는 대상>으로 믿고 섬깁니다.

 

▲그런데 믿는 삶을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생기고, 앞이 캄캄한 일이 생길 때

그 누구도 내가 처한 상황에 도움이 안 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때 저는 해결방법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나름 노력합니다.

그래서 그럴 때면 정말 성경 한 권만 딱 들고

노트와 볼펜 한 자루 들고 책상 앞에 무작정 앉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암송하고 외우고 했던 말씀들이 기억이 납니다.

마치 팝콘 터지듯이 툭툭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 기억 속에 생각납니다.

 

그 말씀을 노트에 일일이 하나씩 옮겨적습니다.

한참을 옮겨적은 뒤에는,

그 적은 그 말씀들을 모두 하나씩 소리내어 찬찬히 다 읽어 내려갑니다.

 

그러면서 그 말씀들을 비슷한 유형들로 또 나눕니다.

A유형 B유형 이렇게 하다 보면

 

말씀이 주는 용기가 생기고, 마음에 담대함과 용기가 생기면서

‘이렇게 해야 되겠구나, 저렇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어떤 정신력의, 방향성의 답들이 나옵니다.

 

그렇게 답이 나오면

앞이 환해 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답을 얻었다고

일이 쉽게 다 해결되고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부터 새로운 캄캄함과 난감함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니, 말씀속에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길을 찾았는데

왜 또 다시 캄캄하고 난처해 지는 것일까요?

 

그건 ‘내가 생각했던 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길과

내가 생각하는 길이

전혀 다릅니다.

 

그것을 척 받아들이기엔 쉽지 않고, 어렵습니다.

‘이거 나보고 살라고 주시는 거야, 죽으라고 주시는거야!’

그럴 만큼 말씀을 받아도 앞 길이 캄캄합니다.

 

이때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옳으시지! 이 길이 맞아!

이 길로 가기는 싫지만, 좁은 길이지만, 험하지만

죽을 것 같지만 이 길이 생명이라 하셨어!’

 

그래서 그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 길 가기 싫고, 그 말씀 대로 하기 싫고

그럴려면 차라리 포기하고 죽고 싶으니까

그 말씀에 순종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됩니다.

맨 정신으로는 그 하나님 뜻에 순종 못 하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다 보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 원하나이다’

이런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꾸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내가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마치 새싹처럼 조금씩 조금씩 돋아나게 해 주십니다.

 

이제 그게 자라서 용기가 생기면

‘죽으면 죽으리다!’

라는 생각가지고 그 말씀대로 저지릅니다(행동합니다).

 

완전히 내가 바보되는 마음과 각오로

망하면 망하리라는 심정으로

순종하면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반전이 일어나죠.

 

그때 하늘 가는 밝은 길처럼, 사방이 환하게 됩니다.

저는 이제 칠십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난국에 부딪혔을 때, 모든 문제들을 그렇게 풀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풀은 문제들은 다 해결되었습니다.

 

해결 된 정도가 아니라 그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를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그렇습니다. 되돌아보니

고난당했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의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대로 밀고 나가서 순종했을 때

그것이 결국 나에게 복이 되고,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그런 삶을 제가 가끔씩 경험해 보면서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언제나 성경말씀은

말하기도 쉽고

듣고 은혜 받기도 쉬운데,

막상 그대로 살려면 참 어렵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그래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말씀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머리 속이 환해 지면서 순간 은혜를 받지요.

그러나 그 말씀을 실제 현실에 적용해서 사는 것은 완전 별개입니다.

아주 힘들고 괴롭고

기도없이는 그 말씀대로 살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 말씀대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기까지

20년 이상을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받은 말씀대로 현실이 이루어지지 않고,

현실은 말씀과 많은 괴리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기도하지 않으면,

그 아들 주신다는 말씀의 약속,

까마득하게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경수가 끊어진 아내를 보면서

그 믿음을 계속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르긴 해도 기도가 계속 없었더라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건 현실적으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요!

 

그런데 기도하면 이런 믿음이 생깁니다.

‘아니, 하나님이 작정하셨는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데!’

 

그래서 말씀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오늘날 아브라함의 대를 잇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믿음입니다!

 

편법 쓰지 말고, 악인의 꾀를 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정품 복’을

바라보고 사모하여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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