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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설교편◑/김동호목사 명설교 (155편)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by 【고동엽】 2013. 1. 3.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2:24

 

 

►크리스천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상실된 세상

예전의 한국 크리스천들은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달랐다.

세상 사람들도 다 인정하는 크리스천의 정직함, 착함, 성실함 등이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 크리스천들은 그런 소중한 가치들을 거의 잃어버렸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교인들은 자기들보다 더 정직하고 착하다고 기대하지 않는다.

이런 크리스천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상실된 이유는?

 

►그 이유는 -- 로마서를 잘못 배웠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세상 어느 나라보다 성경공부를 많이 한다.

 

그 많은 성경공부 시간 중에서, 또 가장 많이 공부하는 성경이 “로마서”이다. 

로마서 공부에서 가장 많이 쓰는 말이 “이신득의”(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특별히 ‘이신득의’를 강조한 것은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의 앞세운 지나친 율법주의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은밀히 말하면 ‘행위’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의로움이 하나님의 ‘은혜’를 앞선 것을 비판한 것이다.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 인간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위가 앞선 것은 부정했지만, 행위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다.

 

►값싼 은혜, 값싼 복음으로 전락구원은 믿음을 통한 ‘은혜’로 받고, 

‘행위’는 믿음을 따라 가야 되는데

행함은 별로 중요치 않다고 오해하였다.

 

그렇게 성경 배우고 나니, 이것이 매우 ‘신나는 복음’이었다.  

행위 때문에 믿는 것이 힘들고 부담스럽던 사람들이 이런 ‘신나는 복음’을 열렬히 환영했다.

 

‘행위’를 ‘믿음’보다 앞세웠다. 자기 행위의 의를 믿음보다 더 드러냈다. *바리새인의 실수

‘믿음’을 ‘행위’보다 앞세웠다.

믿음을 강조하다가 지나쳐서 행위를 무가치하다고 무시했다. *오늘의 실수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믿음’에 행위가 따르지 않으면 ‘믿음’이 죽는다. ‘믿음’이 성립 안 된다

믿음과 행위는 한 짝의 신발과 같고, 한 짝의 젓가락과 같다.

한 개로 따로 떼면 불완전해진다. .

행함이 없는 믿음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말이 성립 안 된다. 

 

►1907년도의 부흥 운동

1907년도 한국 교회는 오순절 사건을 경험한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한국에서 재현되었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길선주 목사님(당시 장로)이 은혜를 받고서

자기 마음속에 있는 죄를 토설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아간과 같은 놈입니다.

친구가 세상을 떠날 때, 그래도 내가 정직한 줄 믿고 내게 재산정리를 부탁했는데

내가 아무도 모르게 일백 냥 떼먹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당장 친구 부인에게 그 빚을 갚겠습니다.” 며 울며 통회했다.

 

그 때, 온 교인들 각자의 마음에 성령이 임하셨다.

성령이 임하시니까 사람들은 죄를 견딜 수 없었다.

 

그 전에는 ‘나만 죄인인가? 남은 나 보다 더 하던데….’ 하던 사람들이

그 후에는 남의 죄를 바라보지 않고, 스스로의 죄에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한 사람씩 다 일어나서 “나도 이런 저런 죄인입니다”며 회중 앞에 고백했다.

말로만 회개한 것이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치를 것은 다 치렀다.

이것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출발해서 전국 교회로 그 불길이 확산되었다.

회개의 역사가 나타난 성령운동이었다.

 

성령 받기 전과, 성령 받은 후가 누가 봐도 달랐다.

교회 다니는 사람과,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이 누가 봐도 달랐다.

이것은 당시 한국교회에 큰 부흥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1970년대의 부흥 운동

1970년대에 한국교회는 또 한 차례의 부흥 운동을 경험하게 된다.

교인들은 기도도 많이 하면서 또 다시 성령의 체험을 하게 된다.

새벽기도회도 교회마다 뜨겁게 부흥했다.

기도원마다 사람들로 넘쳐났다.

새벽기도뿐만 아니라, 방언하고, 금식하고, 철야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때 한국교회는 또 한 번의 수 적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

십 만 명이 넘게 모인다는 교회도 생겨나게 되었다.

모든 지역 교회들이 대부분 두 배 이상 수 적으로 성장하는 기쁨을 맛 보았다.

 

►그런데 1970년대 성령운동과 1907년도 성령운동이 다른 점이 있다. 

1907년도에는 성령 받고 ‘회개’가 있었는데, 1970년도에는 성령을 받았다는데, ‘회개’가 없었다.

 

회개하고, 정직하고, 착해지고, 변하여 새사람 되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에 기복주의의 불길이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예수 믿어 복 받고, 부자 되고, 병 낫고, -- 성령운동이 이 방향으로 확산되었다. 

 

잘못된 로마서 이해 때문에

행함에 대한 부정적 생각 때문에

성령을 받았는데 행함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양선’goodness에 대해 공동번역은 ‘선한 행위’ 곧 ‘선행’으로 번역했다. 

성령의 열매 중의 한 가지는 ‘선행’ = ’선한 행위’이다.

 

배나무에 배 열리고, 사과나무에 사과 열리듯이

성도가 성령을 받으면 ‘선행’의 열매가 자동적으로 열리게 된다. 

그런 행위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성령을 받지 않은 것이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가 되어 뿌리채 말라가고 있다.

성령의 열매(행위 또는 양선)가 없기 때문이다.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믿음’은 똑 같은 믿음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 야고보서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로마서

 

위 두 말씀은 서로 충돌되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한 저자 하나님이 쓰신 통일성이 있는 말씀이다. 말 바꾸지 않으신다.

 

루터도 약간 오해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혹평했다.

그래서 로마서는 주석했지만, 야고보서는 주석하지 않았다.

 

►죽은 믿음(행함 없는 믿음)으로 구원 받을 줄로 착각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순종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행함이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결국 그것은 (온전한) 믿음도 없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나, 그것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요, = 죽은 믿음이다.

더욱이 그런 죽은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을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행위로 복음전하신 예수님, 우리도 행위로 복음에 응답해야 …..

성경은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증거한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입술로 전하지 않으셨고

몸(행위)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전해주셨다.

 

요한은 십자가 아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영감을 받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6)

 

예수님은 말씀을 입술로 아니라 몸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듯 친히 행위로 말씀을 전해주셨다.  

 

마찬가지다.

우리도 몸(행위)으로 말씀을 들어야(순종) 한다. 귀로 듣고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육신(행위)이 되신 말씀을, 육신(행위)으로 들어야(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그 은혜와 진리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될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는 그 동안 로마서 말씀을 잘못 배웠다.(마치는 말)

그런 성경 공부, 가르침과 그런 신학을 너무 좋아했다.

왜냐하면 행함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이었다. 

야고보서의 믿음과 로마서의 믿음은 똑 같은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1970년대의 잘못된 성령운동의 종지부를 찍고

1907년의 진정한 부흥이 다시 이 한국에 도래하도록 하자!

 

< 05.06.26.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 설교 발췌 요약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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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롬 10:13, 행 2:21)정말 주님의 이름만 불러도 구원받는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일점일획도 가감없이 이해하면, “아버님! 선생님!” 부르듯이“예수님! 하나님! 주님(아도나이!)”하며 부르면 à 구원을 받는그야말로 인스턴트 쉬운 방법이 아닌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13:4)

위의 창세기 말씀을 상고해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뜻은 “예배했다”이다.

 

철수와 영이를 부르듯이 단순히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1970년대 성령운동의 긍정적 측면

 

 

장로교가 말씀! 말씀! 외쳤지만, 그 말씀이 매마른 말씀이요, 생명력을 잃어갔을 때성령운동이 일어나서 매마른 심령의 ‘은혜’(정적), 상처입은 심령들에게 ‘위로’, 낙심한 자들에게 ‘소망’과 ‘새 힘’을 준 점이 있었다. 당시 주류 말씀 중심 교회들이 충분히 주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 안 된다     ← 존 칼빈의 주장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만 따로 일어나지 않는다.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를 경험하면, 반드시 성화Sanctification를 이루게 된다.

두 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이 가므로 구원받은 사람은 성화의 과정이 따라온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로만 끝나고, 성화의 과정이 따라오지 않으면 ‘치명적 위기’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성화’가 분리된 ‘칭의’만 강조해왔던 것이다. 
지금의 교회의 영적 위기 및 사회의 위기가 찾아온 것은, 그런 불충분한 신학 이해의

산물인 것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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