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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영성 교회 성장 10대 지침등(가나다순)

부패한 교회도 흥해야 하나

by 【고동엽】 2012. 11. 19.
 

부패한 교회도 흥해야 하나

 

신성남 글

 

한국교회가 많이 혼탁하다 보니 과거에는 신도들이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는가'를 진지하게 토론했는데, 요즘에는 반대로 '교회 내에 구원이 있는가'를 염려해야 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 부패와 관련하여 일부에서 흔히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가 최근에 와서 갑자기 타락했다는 인식입니다. 하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닙니다. 선교 초기에는 매우 순수했던 한국교회가 그 이후 점차 세속화하여 60년 전만 해도 이미 불순한 교권주의가 심각했었고, 30년 전 또한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한국 최대의 장로교 교단이 신도들의 의사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교권을 탐하는 목사들의 물욕적 세력 다툼으로 인해 수십 개의 교단으로 분열하여 만신창이 되었고, 룸살롱에 출입하거나 교회 여신도와 불륜을 저지른 유명 목사들이 백주에 활보하였습니다. 교회 사유화나 공금 횡령 역시 은밀하고 폭넓게 진행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한 세대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받기 십상이니 노회나 교단 총회에 가급적 참석하지 말라는 말이 그 시대에도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다만 대다수 순진한 교인들이 자세한 내막을 잘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교회 세습 역시 그때 뿌린 쭉정이 씨앗을 지금 심은 대로 거두고 있습니다.

1950년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신사참배를 하며 일본에 협력하던 교권주의 세력들이 공적인 회개나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한국교회의 기득권과 인맥을 그대로 유지하며 교권을 상속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현재처럼 상층부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욱 부패한 구조가 체질화되었습니다.

거짓된 지도자들과 맹신도

다행히 한국교회에는 아직도 순수하고 충성된 직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보면 개신교가 이미 자정 능력을 상실했다는 극평이 있을 정도로 현실은 위기 상황입니다. 직장이나 사업 등 개인적 사정으로 타지방에 이사를 해 보신 분들은 실감하실 것입니다. 새로 교회를 선택하기가 겁이 납니다.

매주 설교의 결론은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는 무속적 교회, 돈이 없으면 부끄러워 갈 수 없는 교회, 십일조를 강요하여 미자립 교회나 가난한 교인들은 대충 돕고 나머지 목돈으로 교회 증축이나 목사 자녀 유학 보내는 교회, 선교는 허울일 뿐이고 국내나 외국에 법인을 세워 돈을 빼돌리거나 부동산 장사하는 교회, 등록 교인 350명에 목사 연봉이 1억인 교회, 재정을 공개하지 않고 영수증 없이 마음대로 사용하는 교회, 겉으로는 진실한 척 성경적 설교를 구사하나 뒤로는 교회 소유 부동산을 사모 앞으로 등기한 교회, 그리고 추잡한 교회 세습을 끝까지 목회 승계라고 우기는 이런 여러 교회가 양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큰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이들 세습 목사들의 논리대로 말하자면 북한의 정권 세습도 정치 안정을 위한 탁월한 승계가 되고, 재벌들의 족벌 세습도 경영 안정을 위한 뛰어난 결단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수구 기득권 교회들은 불과 11세의 재벌가 어린아이가 453억 원의 주식을 소유하고, 5세의 대통령 외손자가 9억 원의 주식을 가진 불편한 현실을 결코 비판하지 않습니다.

최근 어느 기사에 따르면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위증이 약 430배 이상 많고, 무고는 무려 540배 이상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거짓말을 하고 살기가 힘들고, 한국에서는 거짓말을 안 하고 살기가 힘들다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면 정말 큰 충격이며 시급히 고쳐야 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설사 그런 통계를 글자 그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한국에 유난히 거짓 목사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한국교회 부패의 배후에는 항상 거짓된 지도자들과 무지한 맹신도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고귀한 것이며 예수님은 생명이신데 종교 업자들은 유다처럼 자신의 영혼을 팔아 금과 은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에서 단순한 수치적 부흥이 복음을 대체하고, 물질적 번영이 진리를 대신하는 악순환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가장 흥한 교회는 중세 교회

그러나 우리는 역사상 가장 흥한 교회가 중세 교회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황제가 교회에 출석하고 권력자들과 재력가들이 줄줄이 그 뒷자리를 채웠습니다. 교회에 힘과 돈이 넘치게 되니 큰 건물을 짓고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예수를 진심으로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사람 행세를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결정해서 안 되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교회는 심지어 세력 확장이나 경제적 필요에 의해 대규모 전쟁도 교사했습니다. 거룩한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이국땅에서 헛되이 죽거나 비참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비극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근 천 년의 기나긴 세월 동안 중세 교회는 성스러움으로 포장한 교회당 건물 속에 안주하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무수한 영혼을 어두운 지옥으로 조용히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이래도 아무 교회나 무조건 흥해야 할까요. 수많은 중세 교인들이 천국 문으로 알고 들어간 교회당이 사실은 지옥으로 안내하는 문이었습니다. 과연 성경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중세 신도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천국에 갔을까요. 큰 건물에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간판만 달면 모두 교회일까요.

중세 교회는 외부의 침공을 받아 무너진 것이 아니라, 내부의 극심한 부패와 타락으로 침몰했습니다. 성직자들은 돈과 명예를 탐하였고, 신도들은 진리에 무지하였고, 그리고 가장 순수해야 할 수도원마저 탈선하여 지하에 수많은 영아들의 사체를 버렸습니다.

이렇듯 교회가 일단 본격적으로 타락하면 수도원도 소용없고, 기도원도 못 막습니다. 새벽 기도회나 철야 기도회가 무색하고, 부흥회도 무당 굿판이 됩니다. 과연 한국교회에 예배와 기도회가 부족해서 이 모양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주일 내내 각종 예배와 기도회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회가 한국교회입니다. 오히려 너무 자주 모여 균형 있는 사회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입니다. 아마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단순히 '자주 모이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주 모이고 분주하여도 진리를 떠나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그냥 완전히 무너질 때까지 계속 썩어 갈 뿐입니다. 위선적 바리새인들은 결코 참된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역사가 가르쳐 준 교회 부패의 생생한 교훈입니다.

거짓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가 평안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모두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본래 종교 업자들과 정치 독재자들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법입니다. 조용히 포식하는 것이 최적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기만당한 우매한 백성은 언제나 독재자에게 표를 몰아주고, 무지한 신도들은 거짓된 지도자를 지지합니다. 그리고 그런 거짓 선지자는 세상에서 호사를 누리고, 참 선지자는 고난을 받습니다.

신도들을 약탈하며 속이 텅 빌 정도로 심하게 썩었어도 겉으로는 평안하고 조용했던 교회가 중세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타락한 교회가 무려 천 년이나 유지된 것은 바로 '그 조용함' 때문입니다. 물론 중간에 간간이 개혁의 목소리가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이단으로 몰려 무자비한 박해를 받고 처형당했습니다. 서슬 퍼런 교권의 칼날이 워낙 무서운 점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절대다수의 신도들이 너무 무지하였기에 내부에서의 조직적 저항이나 자체 개혁이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거짓으로 위장된 평안

우리는 중세 교회의 아픈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위장된 평안 속에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교회당은 더 이상 '예배당'이 아니라 '니골라당'입니다. 자정 능력을 상실한 교회는 부패한 교회이고, 부패한 교회는 더는 그리스도가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인 교회입니다.

그런 면에서 세습 교회는 목사가 교회의 주인 행세하는 전형적인 표본입니다. 만일 세습 목사들이 정말 충성심이 불타서 그토록 대를 이어 목회를 간절히 원한다면 좋습니다. 그렇다면 자식들을 배부른 중대형 교회가 아니라, 일꾼이 너무 부족한 농어촌 미자립 교회에 보내 거기서 평생 충성하도록 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필자의 견식이 부족한 탓인지 몰라도 그런 멋진 세습을 하는 목사님을 본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복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비만한 배를 위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동네마다 너무 많아서 차고 넘치는 것이 교회당인데 하필이면 그런 고약한 세습 교회가 흥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부패한 교회가 부흥하면 결국 중세 교회처럼 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여러 대형 교회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이런 중세적 부패와 흥행에 앞장을 서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교회의 문제가 매우 복잡한 것 같지만 그 결론과 대안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신자들이 깨어나야 합니다. 무지한 신도는 거짓된 지도자를 보위하여 결국 부패한 교회를 만듭니다. 한국교회의 문제가 외견상 직분자들의 부패인 것처럼 보이나, 정작 문제의 진짜 핵심은 신도들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은 값없이 거저 받았지만, 제자 된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안일한 자세로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신자들은 바르게 알고, 바르게 가르치고, 그리고 바르게 실천해야 합니다.

한 세기 만에 놀라운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는 이제 성숙의 문턱에서 크게 좌절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덩치가 커져 매우 기뻐했는데 어느 순간에 조로증을 거쳐 그만 치매에 든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약도 이 치매에는 별 효과가 없습니다. 신약과 구약 모두 들이대도 환자는 다 뱉어내고 엉뚱한 오물만 집어 먹습니다.

우리가 바른 교회를 다시 가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만일 자신의 교회가 치매에 들어 소통이 전혀 안 되는 교회라면 거기서 헛되이 다투지 말고 이제라도 과감하게 나오시는 것이 낫습니다. 거기서 중세적 부패와 약탈에 동참하는 것보다는 바른 교회를 찾는 것이 옳습니다. 만일 주변에 바른 교회가 없다면 소수라도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합심하여 따로 모이는 것도 좋습니다. 형편에 따라 유급 사역자가 없어도 무방하고, 있으면 더욱 좋습니다.

초기 교회나 지하교회는 유급 사역자가 없어도 잘 견디어 냈습니다. 반드시 신학 전공 사역자가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오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신학 전공자가 몇이나 있었나요. 또한,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냥 둘러앉아 성경을 함께 읽고 기도하는 단순한 공동체도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아주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동체가 점차 성숙해지면 지역사회를 위한 적절한 사역을 얼마든지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명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교회의 순결입니다. 따라서 부패한 교회보다는 차라리 가정 교회나 지하방 교회가 훨씬 낫습니다. 직분자들이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 그리하여 복음이 바르게 증거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선한 공동체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르는 공동체

이를 위해 우선 당장 몇 가지라도 구체적으로 변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는 강요적 헌금 대신에 자발적인 무기명 연보를 격려하고, 군림하는 계급적 직분 대신에 함께 대등하게 섬기고 동역하는 직분자들을 세우고, 유급 직분자는 최대한 검소하게 살고, 노회나 연회는 목회 파송제와 순환제를 적극 실천하고, 봉건영주적 담임 목회제보다는 공동 목회와 공동 사역을 추구하고, 강한 자를 대접하기보다는 약한 자를 섬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자기 구원이나 자기 수양의 종교가 아닙니다. 또한 교양 있고 품위 있는 사람들만의 공동체도 아닙니다. 우리의 공예배가 어느 서부 영화에 나오는 장면처럼 반드시 멋있게 정장을 하고 엄숙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기뻐하시는 예배는 제물을 바치고 숭배하는 구약의 수직적 예배가 아니라, 진리 안에서 친구 되신 주님과 사랑으로 교제하는 수평적 예배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예배에 '바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삯군 목사들은 차라리 구약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시었고 신도들은 이미 그 지체가 되어 신자의 삶 자체가 바침이 되었는데, 매 주일 예배마다 무엇을 그리 더 바치라는 것입니까. 연보는 본래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려운 형제와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돈이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이제 교회는 신분의 차별이나 빈부의 구별 없이 모두 사랑으로 하나 되는 담백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주 중에 열심히 일하다 지친 몸으로 다소 간편한 옷을 입고 교회에 나온들 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신데 아버지 앞에 자녀들이 항상 정장을 입어야 하나요. 아버지께서는 자녀들과 따뜻한 대화를 원하시는 것이지, 거창한 회담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가능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그 쓸데없이 높은 문턱을 제거해야 옳을 것입니다. 사정에 따라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오는 사람에게도 앉을 자리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소박한 예배보다 엄격하게 격식을 갖춘 장중한 예배가 좋은 예배라고 너무 허풍 떨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십자가 정신의 상실에 있습니다. 많은 신도가 달콤한 성장과 번영에 취해 그보다 더욱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세속적 성취가 순결, 겸손, 섬김, 절제, 희생, 배려, 검소, 그리고 나눔을 대신하고 교회 내에서 잘나고 많이 가진 자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흥해야 할 새로운 교회는 권력자와 지식인이 겸손해지고, 부자가 마음을 비우며, 가난한 자가 당당하고, 삶에 지친 사람들이 위로를 나누는 진솔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의 교회와 중세 교회는 그 큰 건물과 함께 무너져야 마땅할 교회이었습니다. 성경의 참된 가르침을 대적하고 사욕에 따라 제도와 관습을 악용한 상업적 종교인이 넘치던 교회입니다. 주님은 없고 제사장, 서기관, 교황, 주교, 사제, 그리고 귀족들이 실질적인 상전 노릇을 하던 교회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 허망하기 그지없는 세속적 복을 탐하여 거짓된 지도자들을 따르며 또 다시 그런 배도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이 시간이 매우 중요합니다. 바로 이 순간이 그냥 덧없이 살다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초라한 한 죄인이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하여 기필코 주님 십자가의 도를 따라 한번 바르게 살아 보겠다는 놀라운 결단을 하는 '진리의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샬롬!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 지리라 하시니라(막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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