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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회 샤마니즘 수준

by 【고동엽】 2008. 8. 1.
 

     **오늘의 교회 샤마니즘 수준         
샤머니즘은 애니미즘을 배경으로 합니다. 애니미즘(animism)은 모든 물체에 정령(精靈)이 존재한다고 믿는 자연 숭배 또는 정령을 숭배하는 원시 종교입니다. 자연의 기후변화에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들의 종교적 의지와 표현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를 교회안으로 눈을 돌리면 강대상이 있는 공간 자체를 거룩한 공간으로, 성경책이란 자체를 성물로, 교회건물 자체를 신령한 공간으로, 카톨릭의 성물(聖物), 성지(聖地)신앙, 기독교의 성지순례도 바로 정령숭배의 현재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샤마니즘은 신과 인간과의 개인적 구원관계라든지 신을 향한 신앙적 결단보다도 생활상의 당면한 현실 문제를 초월적인 신의 능력에 의지하여 해결해 나가려는 것이 샤머니즘의 목적입니다. 샤마니즘은 자연의 비인격인 무생물에게 소원성취로 행복과 복을 불러들이고 액땜을 하고, 병을 고치는 등의 극히 현실적인 문제들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 방법도 정신적이라기보다는 신에게 제물을 바침으로써 그 제물의 양과 질에 비례하여 신의 응답을 기대하는 무력한 의존적 신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곳 대구에는 전국적으로 알려진 갓바위라는 돌부처가 있습니다. 평생에 한번 소원을 들어준다는 믿음으로 일년 사시사철철 발길이 �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이 무력함과 어리석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각 방송국의 주파수는 각각 다릅니다. TV 채널에 따라 제각각의 방송이 나오듯이 무당들도 제 각각의 영을 모시고 있습니다. 즉 자기가 혼주(신)을 몸주로 하며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무당은 이세상에서 힘든 일은 신령 혹은 조상귀신들의 맺힌 한을 풀어주어야 형통되고 병이 나을 수 있다 고 합니다. 그러면 굿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당을 찾는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현실의 복을 구하고 재앙을 물리치는 데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고 출세하고 자녀건강하고 잘 먹고 잘사는 현실적 생활상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목사를 무당처럼 육신의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고, 장래를 아는 신령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현상은 샤머니즘의 영향 때문이라고 봅니다. 또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를 입신(入神)혹은 엑스타시(ecstasy)라고도 합니다. 엑스타시 속에서 무당은 신령과 직접 교제하며 그 신령의 힘에 의한 길흉을 없애고 좋은 일만 있게 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무당의 푸닥꺼리가 기독교에 침투하여 노래하고, 춤추고, 북치는 굿 형식이 기도원과 부흥집회 에 성령강림현상으로 포장하고 있습니다.

샤머니즘이 한국교회에 끼친 공로는 성도들로 하여금 열심 있는 신앙 태도를 갖게 한 것이다. 한국인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지성을 드리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평소에는 어떻게 살든지 지성을 드릴 때에는 온갖 정성을 다한다. 이러한 적극적인 신앙 태도는 교회의 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새벽기도를 한다든지, 작정 기도를 한다든지, 수요 예배, 철야기도까지 하게 한 것이지요.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외형적으로 성장한 것은 샤머니즘적 기복 신앙의 공로임은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간다 는 말속에는 하나님께 잘 보여 복을 받을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만 하면 주일성수가 되어 목사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복 받는 일석이조인 셈이지요. 그래서 성도들은 혹 교회를 빠지는 날이면 혹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지 않을까 하고 찝찝한 생각을 갖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의 일치로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아하 지난주에 교회를 안 나가서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식의 적용은 일상적으로 무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무당들이 강조하는 즉 신의 노여움을 사면 벌을 받는 다는 생각이 교회안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무당의 신으로 전락시켜 신앙생활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신앙정서일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마치 불자가 절에 가서 부처에 복을 빌듯이 교회에 가서 복을 빌고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가는 것이지요.

한국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목적도 원칙적으로는 기복적인 요소를 떠나서는 예배가 될 수가 없지요. 예배는 진정과 신령으로 드리고 구원의 감격으로 우리 자신의 존재가 있게 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즉 우리의 죄인 됨과 유무형적 죄성을 회개하고 모든 소유일체를 하나님 것으로 인정하고 정성껏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 데 한국교회의 예배는 목사가 예수의 이름으로 신내림 굿을 하고 성가대가 찬양을 드리면 성도들은 그 굿판을 구경하고 감상하고 복채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 오는 것으로 일종의 의무를 다했다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복적인 설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모든 존재가 그런 복을 다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탐욕적인 복을, 사치적인 복을, 맘몬적인 복을 추구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설교하는데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켜주는 저급한 무속의 신으로 취급하고 있는 거짓 목사들이 성령을 도구로 사용하여 죄성에 포로가 된자본주의 사회가 사용하는 가치언어를 매개체로 삼아 마케팅 설교하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 선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포용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기복적 신앙이 교회성장을 시키고 목회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의식구조가 일반화됨에 따라 복음과 하나님의 공의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주석, 강해 본문설교보다는 돈 벌고, 병 낫고, 출세 성공하고 축복받는다는 주술적이고 카리스마적인 설교가 성도들로부터 더 환영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목사는 성도들로부터 설교 잘 한다고 인정을 받기 위해 기복 설교를 많이 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영적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바라는 믿음은 본질적 믿음의 개념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을 나의 성공도구로, 후원자로, 삼고 긍정적, 적극적, 창조적으로 현실을 살고 끊임없이 성공의 고지에 도전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하는 성공마케팅의 설교로 지치고낙담한 성도들에게는 희망과 비젼을 불어놓고 힘을 얻게 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지극히 부차적인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치 자신이 믿음이 적은 것으로 인식하고 잘못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또 이 정도에 이르면 이들은 더 이상 이러한 교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물질의 복을 향하여 죽기 살기로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의 결과는 거의 허탄하고 공허한 꿈만 꾸다가 오랜 세월 다 낭비해 버립니다. 그때서야 이것이 아닌데 해도 늦지만 이것이 아닌데 라고 깨닫기만 해도 다행일 것입니다.이런 부류에 속하면 대개 스스로 기복에 빠져 평생을 이런 복에 기대길 마치 로또와 같이 하므로 헤어나기 어려운 기대심으로 평생을 다 보낼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살림이 그리 넉넉치 못하여 쓸것이 귀하여 구하여도 없는 형편을 말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 안에 들면 이런 가난은 누구나 다 면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근로의 땀으로 낭비성을 적극 막기 때문입니다. 이것으로 가난은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신앙의 우리가 다 받는 물질의 복입니다.

이에서 더 이상 부를 추구한다면 문제가 발생하기를 과욕으로 치닫고 시험과 올무와 여러 어리석은 정욕에 떨어져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가난을 벗고 살림에 쓸 것이 부족치 않으면 족한 줄 알라고 교훈 합니다.(딤전6:8-9)

이 교훈에서 부는 거부가 되려고 함을 지적 합니다.한국교회는 이 처럼 물질에 관한한 복을 가르칠때 매력적인 부의 아이템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난이 미덕이 아니라 부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왜곡하여 걸교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 맘몬의 경제시스템에서는 돈이 최고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저도 돈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거부의 꿈을 믿음으로 비젼으로 긍정적 사고방식으로 끌어 당기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맘대로 움직이려는 악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우리를 향하신 그 뜻은 가난한 우리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케 하고 천국을 유업으로 잇게 하심이 그 참 목적입니다 가난한 자를 향한 복음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서머나 교회의 궁핍함을 잘 아셨습니다. 그러나 네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격려를 하십니다.하나님은 서머나 교회에 천국의 부요를 보이시고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계심으로 나타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물질의 부에 대하여 특히 구약의 아브라함 솔로몬 등 물질의 거부는 다 천국의 모형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로서 하나님은 이 거부를 주시기 위하여 선한 일에 부요하라고 격려 하십니다. 딤전6:17-19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거부의 실제는 이러할진데 오늘날 특히 구약의 물질적 거부의 복에 관한 것을 문자적 그대로 적용하도록 교훈하므로 이것이 신앙의 치명적인 악이 되어 믿음에서 떠나는 기복이 정당한 것으로 합리화 됨으로 옛 뱀의 계략은 이렇게 교회의 무수한 지도자들의 입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님의 교회로 살아 남으려면 사탄의 전략전술에 넘어가서는 안됨을 교회지도자들이 먼저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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