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영성
(The Spirituality of David Brainerd)
김영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머리말
우리는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서 하나님과 동행한 많은 신앙의 선조들(에녹,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엘리야, 엘리사, 문서 선지자 등)을 읽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역사는 규범적인 성경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기독교는 2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많은 경건의 보고를 지녀왔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교회사를 거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지상에서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미리 체험한 많은 경건한 신앙의 선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속사도시대, 교부시대와 중세교회와 근세교회를 통하여 수많은 믿음의 성현들을 만나게 된다. 속사도시대에는 폴리갑, 교부시대는 안토니, 아다나시우스, 마카리우스, 위 디오니시우스, 어거스틴, 중세시대는 프랜시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킴피스, 종교개혁시대에는 루터와 칼빈, 18세기에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요나단 에드워즈, 웨슬리 등이다.
브레이너드는 일반적으로 교회사에서 인디언 선교에 생애를 바친 미국식민지 시대의 한 선교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당시 소외 종족이었던 인디언 선교를 위하여 한 생을 바친 위대한 복음전도자요 하나님과 연합했던 경건의 사람이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데리고 가신 것 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를 빨리 이 세상에서 데리고 가셨다.
그는 29세라는 아주 짧은 생을 살았으나 그가 남긴 일기를 통하여 교회사에서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에게 영적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영적 감화를 주고 있다.
1. 생애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18세기에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의 사위로서 29세로 생을 마감한 짧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젊은 삶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자기 삶으로 산제사를 드린 하나님의 사람이다. 1740년-1743년의 뉴 잉글랜드 대각성운동 기간에 성년이 되었다. 그는 칼빈주의적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대각성운동 기간 중 개인적 구원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는 자기가 저주받은 사람들 가운데 있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반역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저주받은 자 되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년 이상을 기도와 금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매일 “거의 끊임없이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이 자기의 눈을 열어 죄악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방식을 깨닫게 하시기를 기도했다”.
그는 24세에 주님께 헌신하면서 매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숲속에서의 기도생활 가운데서는 삼위일체의 영광을 체험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그리고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지고 목회자가 되기 위해 예일대학에 진학한다. 그는 분별력이 뛰어났고 사려도 깊었다. 그의 신학부 성적은 뛰어났고 분별력도 탁월했다. 당시 예일 대학의 교수회는 대각성 운동에 별로 공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브레이너드가 2학년 때 예일대학의 학생들 사이에서 부흥의 불길이 미쳤다. 그는 가까운 친구 서너명과 조교 휘틀쎄이(Whittlesey)와 함께 강당에 가서 기도에 열중했다. 담당조교는 기도 중 항상 감상에 빠져 들곤 하였다. 브레이너드가 사사로운 대화에서 조교에 대하여 “이 걸상만큼도 은혜가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였다. 대학 학생부장은 이 말을 불손한 말로 간주하여 강당에서 공개하여 사과하고 회개하도록 요구를 하였다. 브레이너드는 이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여 이에 응하지 않았다. 대학측은 그를 퇴학시켰다.1) 복음주의 계통의 목사들이 대학으로 하여금 그 결정을 번복하도록 시도했으나 브레이너드는 이 사건을 자신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과 온유함을 배우는 계기로 삼고 세상의 명예와 학위 등에 대한 애착을 끊어버렸다. 제적된 후 브레이너드는 여러 목사들에게서 개인적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이것이 그에게는 예일대학에 다니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경건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는 “불쌍한 영혼들과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의 확장을 위하여” 중보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교도의 구원"을 위하여 선교를 해야 할 사명을 느꼈다.
1743년 그는 스코틀랜드 복음전도협회에 들어가 선교사가 되어 처음에는 뉴잉그랜드의 스톡브리지 인디언 사이에서, 나중에는 펜실바니아와 뉴저지의 델라웨어 인디언 사이에서 복음을 전했다. 처음에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전달해 주려는 그에게 별로 큰 용기를 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복음 사역은 인디언들 사이에 많은 개종자를 내는 결실을 가져왔다. 그의 일기는 영적 순례에 대한 기록으로서 그의 선교업적에 관하여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전도협회의 요청에 따라 그는 공개일지를 기록했다. 공개일지는 엄격히 그리스도 선교의 진전에 대한 보고서일 뿐 지리적 혹은 인종적 상황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예외적인 것은 그가 서스퀴한나의 인디언 마을에서 우연히 본 제사와 춤에 관한 자세한 묘사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30피트도 안되는 거리에서 성경을 들고, 가능하다면 그들의 제사를 금지시키고 지옥의 대답을 듣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모든 광경을 지켜 보았다”.
그의 일기는 복음전도의 결실로서 인디언 마술사의 회심을 소개하고 있다. 그 마술사는 인디언 사이에서 개혁자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이 마술사가 복음을 듣고 “눈물로 회개하면서 긍휼을 간구하였다”.2) 브레이너드는 이 마술사의 종교적 체험을 긍정하면서 다음같이 말한다. “그가 스스로 찾은 종교적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전통이라고 단순히 물려 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의 기준에 따라서 종교적 성질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그의 기질과 성품 가운데는 내가 지금껏 다른 이교도 사이에서 발견한 그 어느 것보다 더 진실한 종교처럼 보이는 어떤 것이 있었다”.
그러나 브레이너드는 이 마술사가 복음의 능력 앞에서 회개하고 그 마술을 버리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의 마술의 힘은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그는 줄곧 회개하며 지냈다. 나의 설교는 그의 마음 속을 예리하게 찔렀다고 한다. 그는 ..극도의 영적 번민과 격렬한 고뇌 속에 빠졌다. 상한 심령을 압박당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헤매야 했다. 이후로 그는 최상의 평정과 침착을 되찾았다”.3)
공개일기는 대부분 뉴저지주의 크로스위숭에서의 사역이다. 이곳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은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친구들을 데리고 온 일단의 여인들과 아이들로 시작된다. 2주일 후에 약 50명이 모였다. 한 여인은 하나님이 그녀의 마음을 변화 시켜달라고 기도했고 다른 여인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원한다고 말했다. 한 추장은 자기 영혼을 위하여 비통하게 울었다. 한달 후 브레이너드가 다시 왔을 때 “그들 사이에 곧 놀라운 관심이 명백해졌다”. 그들의 모든 대화는 종교적 문제로 변화된 것처럼 보였다. 저녁때 그들은 그가 저녁식사에 감사기도를 드려주기 전에는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설교했을 때, 10명중에 9명이 울며 자기 죄를 회개하였다.
브레이너드는 인디언들에게 “인간의 죄를 위하여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고,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청중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일주일 후 크로스워숭에 다시 돌아와 설교할 때 , ”하나님의 능력이 강한 폭풍처럼 회중 가운데 강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에 그들은 모두 자비를 구하며 통곡했으며,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큰 위로를 얻었다.
브레이너드는 1743년 봄에 인디언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결핵 때문에 1746년 가을에 그곳을 떠나야 했다. 그가 크로스워숭을 떠났을 때 죽음이 멀지 않았다. 그는 남은 12개월동안 사랑하는 친구들에 둘러 싸인채 침대에서 누워지냈다. 그는 1747년 10월, 29세의 나이로 매사추세츠주 노드햄프톤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심한 폐결핵을 앓았으며 또한 자주 깊은 우울증과 낙담에 빠지기도 했었다.
그는 당시 백인들의 정복의 대상이었던 인디언 선교와 인디언의 인권과 복지를 위하여 헌신하고 이들과 같이 지내면서 선교사의 삶을 살았던 보배로운 삶을 살았다. 그는 29세라는 젊은 나이로 하나님 앞에 불리워 갔지만 그에게 주어진 삶은 지극히 작은 소자들을 돌보는 옥처럼 고귀한 선교의 삶을 살므로써 하나님 앞에 산제사를 드렸다. 그는 인디언을 위한 선교의 남은 사역을 그의 동생 존에게 맡기기 까지 자기의 일에 대하여 책임있는 사역을 다한다.4)
“왜 그에게 항상 임재하신 성령의 능력이 그의 폐결핵과 그의 병들을 치유하시지 아니하셨을가?”,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경건한 자를 빨리 데리고 가셨나?” 내면적으로 질문이 제기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니 신비 속에 싸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브레이너드에게 이 일기를 쓰게함으로써 그가 남긴 이 일기는 교회사의 영성을 각성하는데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의 일기는 대각성운동의 설교가 요나단 에드워즈와 영국의 요한 웨슬리 등 영성을 추구하는 많은 신앙의 위대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 일기는 그가 생을 마친 후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널리 읽혀졌다. 그는 일찍이 이 세상의 삶을 마감했으나 그는 생을 마감한 후 더 많은 영적 깨우침의 사역을 이 일기를 통하여 하고 있다.
2. 일기
그의 일기는 세상에 발표를 위하여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쓴 것이었다. 일기의 주제는 다음같이 요약된다: 인간은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살아야 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획득된다. 그러나 누구든지 믿기 전에 모든 교만과 자기 의를 버려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칼빈주의적 청교도정신이 들어 있다. 신자는 모든 민족이 개종하도록 기도하고 힘쓰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확장될 수 있도록 간구하여야 한다.
이 일기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투쟁하는 한 영혼의 개인적 기록이다. 그는 임종 전에 일기의 출판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부했으나 그의 친구들이 설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신앙적 관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되는 내용에 한해서만 출판을 허락했다”. 이 일기는 임종 직전에 일부는 브레이너드 자신이 편집하고, 요나단 에드워즈가 일부자료를 첨가하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제목으로 1749년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장르로는 영적 자서전인 이 일기는 총 9장으로 되어 있다.
제 1장에서는 그가 코네티캇트에서 태어나서 목회수업을 하기까지를 적고 있다. 그는 9살 때 부친을 여의고 13살 때 까지는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살았다. 14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21살 때 회심을 하고 24살 때 주님께 헌신한다. 예일신학교에서 제적된 배경을 적고 있다. 제 2장에서는 목회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밀즈 목사 댁에 가서 기거하면서 설교자격을 인정받기까지의 영적 체험에 대하여 적고 있다. 제 3장에서는 설교할 자격을 얻고 나서 인디아 선교사로 임명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하여 적고 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 같이 거룩하게 되고 싶었다”, 은밀한 기도 속에서 사망을 이기신 주님을 체험하는 가운데 “사망까지도 두렵지 않다”고 적고 있다.
제4장에서는 그가 인디안 선교사로 임명되고 나서 뉴욕주의 카우나우믹에 사는 인디언들 틈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기까지의 영적 체험에 대하여 적고 있다. 제 5장에서는 카우나우믹에 사는 인디언과 함께 일년 가까이 살면서 사역하면서 겪은 영적 체험에 대하여 적고 있다. 그는 26세에 뉴아크 장로회에서 목사로서 안수를 받는다. 제 6장에서는 데라웨어 휙스와 그 근교에서 인디언 선교를 하면서 인디언이 우상숭배를 위하여 베푼 향연과 춤, 인디언 가운데 일어난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제 7장에서는 그의 인디언 통역자가 회개하고, 크로스윅숭에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에 대하여 그리고 포와우라는 인디언 마술사의 회심에 대하여 적고 있다. 제 8장에서는 크로스워숭에서 사역중 성령의 역사가 가장 현저하게 일어나 주님의 능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많은 인디언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인디언 마법사의 회심을 적고 있다. 제 9장에서는 크로스웍숭과 크랜버리에서 사역을 지속적으로 하다 건강이 쇠약해져서 부득이 인디언을 떠나게 되어 그의 동생 요한에게 선교사역을 넘겨주고 친구들을 방문하며 노드헴프톤에 사는 에드워즈 학장을 방문하고 임종 가까이 와서 보스톤에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다가 노드햄프톤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를 적고 있다.
영국의 18세기의 영적 지도자요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모든 설교자는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일기를 집필한 18세기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의 주역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책에 대하여 다음같이 서문을 쓰고 있다. “나는 경건하고 분별력이 있는 독자들이 브레이너드가 그 마음과 실천에 있어서 진정으로 뛰어난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한 모범이라고 느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진정한 종교의 정신과 경건의 능력에 자신을 일치시켜, 정녕 우리가 본받을만한 인물이 되었다. 이 일기는 주의깊은 독자들에게 여러 면에서 영적 유익을 증진시켜 줄 것이다”. 오늘날의 미국의 개혁신학자 앤드류 머레이는 다음같이 평가하였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일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의 열정적이고 능력있는 기도생활을 보여주기 위하여 나온 것이다”.
3. 영성
우리는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통하여 그의 영성의 특징을 다음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기도의 영성이다. 브레이드는 자기 생애를 기도의 능력을 힘입어 인디언 선교와 봉사의 제물로 드렸다. 회심 전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의식에 사로 잡혀 있었으나 기도생활을 통하여 그것에서 벗어났다. 21세에 회심한 후 그의 기도생활은 더욱 빛난다. 그는 한 시간의 기도 속에서 얻는 기쁨이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능가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도중에 내려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는 숲 속에서 기도하면서 산보하는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매일 금식하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는 자주 “아침 일찌기 숯 속에 들어가” 기도했다. 그리고 친구를 위해 드리는 중보기도를 하였다. 그의 영적 생활은 깊이를 더해가 자주 하루 종일 숲속에서 금식하고 기도하게 된다. 이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를 날마다 체험하였다. “주님께서는 믿음 없는 친구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중보 기도의 힘을 뜨겁게 부어주셨다. 밤이 깊어가며, 주님은 놀랍게도 기도 속에 찾아 오셨다. 내 영혼은 이전에 이런 기쁨의 극치를 누려 본적이 없었다. 나에게 보배로운 주님의 은혜로 모든 속박이 풀려 가는 것을 느꼈다”.5) “오늘은 온종일 숲속에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홀로 보냈다. 내 영혼 속에서 대단히 무시무시한 투쟁을 경험했다”.6) 그는 기도 가운데서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인디언 선교에서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며 많은 개종자들을 얻게 된다. 그는 임종의 자리에서도 기도에 맡기고 진리를 읽고 명상하라는 권면을 잊지 않았다. 그는 1747년 10월 9일 “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이러한 기도의 영성은 그의 인격적인 진실함과 경건함과 연관되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같이 말한다: “그는 경건의 능력과 참으로 생명력 있는 신앙의 소유자임을 확신하게 해준다”.7)
둘째, 삼위일체의 신비를 경험한 영성이다. 그가 21세때 어느 주일날 저녁, “어두운 숲을 걸어가면서”, 그는 그의 “영혼에 말할 수 없는 영광”의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환상이나 어떤 형상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같이 적고 있다. “어둡고 울창한 숲속을 걷고 있는 바로 그때, 시야가 확 트이는 것 같더니,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영광이 나의 심령을 사로 잡았다. ...나는 경이로움과 탄복할 수 밖에 없는 그 영광에 압도당한 채 잠잠히 서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에 비견할 만한 것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이제껏 하나님께 대해서도 성스러운 일에 대하여 내가 품어 왔던 관념과는 너무 달랐다. 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어느 인격에 대해서도 특별한 깨달음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때 본 체험은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신령한 영광처럼 느껴졌다. 이 빛나고 성스러우신 분, 하나님을 뵈온듯한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영혼 속에 넘쳤다. 나는 영원히 우리 가운데 왕노릇 하시는 분을 뵈온 듯한 만족감으로 차 있었다. 하나님의 탁월하시고 위대하시고 아름다우심, 또 완전무결하신 품에 영혼은 황홀히 안겨 있는 듯 했다. 나는 자신의 구원에 관한 생각까지 처음으로 잊어버릴 정도였다. 내가 피조물이란 사실까지도 망각하고 있었다.
온 우주의 왕으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궁극적 목적은 모든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한 몸에 받으시기 위함이로구나“ 이 내밀한 기쁨과 평화는 밤이 깊어 가도 감동깊게 가슴 속에서 부풀고 있었다”.8) 이러한 영적 체험을 통하여 브레이너드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을 완전히 깨닫게 되고 9월초에 예일신학교에 입학한다. 이 체험은 브레이너드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세째,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연합한 영성이다. 그는 일기 곳곳에서 이러한 영적 체험을 적고 있다. 다음은 신학 수학기간 적은 그가 기록한 일기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결사적인 기도를 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셨으므로, 차거운 바람이 불고, 그늘이 드리운 속에서도 온 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내 영혼은 이 땅에서 훨씬 벗어나 있었다. 나는 수많은 영혼들을 붙들고 있었다...나는 사랑하는 주님과 교제를 나누며 무한한 즐거움을 누렸다. ...아 제발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나의 하나님과 항상 함께 살았으면! 아멘 아멘”9)
“아침 일찍이 일어나 은밀한 헌신을 위해 기도하러 갔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내 영혼 깊은 곳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위로를 풍성히 부어주셨다. 얼마 동안 나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아, 나의 좋으신 주여! 당신이 아니면 누가 나를 천국으로 데려 가리이까? 이 땅에서 당신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나이다’라고 몇천이고 거듭 될뿐이었다. 만일 내가 천의 목숨을 가졌다 하여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 모든 것 즉시 버리는 것이 즐거울 것이다. 내가 한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하여 가장 영적이고 세련된 시기였다”.10) “내 영혼에 있어서는 매우 행복한 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종일 함께 하셨고, 나는 내 삶의 어느 때보다 세상을 초월해 있었다”.11) “내 마음은 온 종일 하나님께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내 영혼의 존재는 좀더 거룩함을 내포한 형태로 확대되는 듯한 인상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영혼이 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때 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진심을 다해 기도하였다”.12)
그는 하나님과 연합하는 믿음으로 당시에 불가능했던 인디언 선교를 했을 뿐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크나큰 열매를 거두었다. 그는 폐결핵에 감염된 몸으로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열악한 인디언의 처소에서 너무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회복불능에 이르게 된다.
그는 노드햄프톤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몸이 약해져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그의 마음은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누리고 있으며, 하나님께 어서 가 살기를 갈망하는 심정"을 그의 일기에 적고 있다. 그가 가졌던 폐결핵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를 괴롭혔으나 그는 내적으로는 큰 평안을 가졌다. 그가 약한 육신 가운데서도 그처럼 인디언 선교에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복음의 능력이었다. 그의 복음적 설교의 능력은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초월적인 탁월하심과 영광을 심령깊이 영접할 때 흘러 나왔다”.
네째, 병의 고통 속에서도 죽음을 극복하고 천국을 소유한 영성이다. 1743년 8월 23일자 의 시는 다음과 같다: “손짓하노니/ 죽음이여 오게나/ 자네의 끈에 입맞추리니/ 죽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 겁날 것 조금도 없어,/ 영원한 곳으로 가는 길일 뿐.”13)
1744년 10월 31일의 일기에서 다음같이 적고 있다. “썩어 부패한 이 육신에서 벗어나서 하나님만 영원토록 섬기면서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노라니 죽음이 더욱 그리워졌다. 선한 일이라곤 아무 것도 행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 처럼 생각되었다. ‘아, 짐스런 이 삶이여/ 죽음이여/ 죽음이여/ 나의 좋은 벗이여/ 이 사망의 늪에 빠진 나를 구하라/. 나로 신성하고 확기 넘치는 나라에 거하게 하라’”.14) 그는 병의 고통으로 죽을 때까지 육신적으로는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큰 평안을 소유했다. 그는 병중에서 말했다. “나는 내 마음이 이렇게 쉽사리 하나님의 진리에 빠져 본 일이 없다. 나는 지금만큼 복음의 중대한 교리를 증명할 수 있던 적이 없다. 은혜의 교리라고 바르게 이름 부쳐진 그 위대한 진리들을 명백히 깨닫는 만큼, 나는 의심없이 종교의 정수는 영혼이 하나님과의 일치로, 모든 이기심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에 그를 기쁘시게 하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지성적 피조물이 사랑하고, 공경하고, 예배하고 섬겨야 할 하나님의 무한하심과 존귀성에서 볼 때 명백한 것이다”.15)
다섯째, 칼빈주의적 영성이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택한 자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충족성에 대한 칼빈주의 교리를 의심없이 받아들였다.16) 회심이전 그는 구원을 받기 위해선 단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복음주의적 설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자주 하나님께 반항했다. “나는 나를 구원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전적으로 그가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기분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그의 모든 종교적 갈망이 자기중심적이며 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그는 드디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깊은 체험을 하기에 이르고 하나님에 의해 사로잡히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만을 높이고 “우주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하여 자신의 생활을 복종시키기에 이른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식하는 이외에도 그는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방법의 지혜와 장엄함에 새로운 인식을 가졌다. 브레이너드는 이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생애동안 고통과 흑암의 시기에도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가 카톨릭 신자였다면 의심없이 수도원에 들어 갔을 것이다. 이 세상이 그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부터 등지게 하고 그의 주의를 산만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청교도였기 때문에 목회를 지망하여 당시에는 백인들에게는 적으로 여겨진 인디언의 전도에 평생을 바치게 된다.
여섯째, 열광적이 아니라 건전한 성경적 영성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나 존 웨슬리가 영성운동을 일으키면서 열광적 감정과 건전한 정서를 구분한 것 처럼 브레이너드도 환상적이며 정서적 불안과 미혹 그리고 건전하고 올바르며 성경적인 체험을 구분했다. 그는 황홀경에 빠진 한 여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그리스도께 외치고 있었다. 브레이너드는 말한다. “나는 매우 조심스럽다. 그들이 황홀경에 빠져 큰 기쁨에 넘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바로 뿌리가 내렸는지 실질적인 증거는 없다. 그리고 그들의 준비와 참석과 결과에 대하여 그 기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증명할 근거는 없다”.17) 그는 경건한 신앙과 광신을 철두철미 구분했다. 그는 사이비 광신적 종교가 자행하는 일들을 분별하는 영적 분별의 은사를 받았다. 그리하여 “사이비종교의 거짓됨과 헛됨, 그리고 사이비신앙과 참된 영적 헌신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설명했다“.18)
일곱째, 성화의 영성이다. 도덕폐기론을 거부했다. 그는 경건한 생활을 강조하는 것 없이 믿음에 의해 구원얻는다는 극단한 의인론을 거부했다. 그는 이미 신학 수학기간에 하나님과 영적인 깊은 교제에 들어간다. 1742년 4월 28자 일기를 보면 브레이너드는 경건의 시간 속에서 “거대한 평화와 고요함을” 체험하면서 “주님은 선의 근원되심을 깨닫는다”.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학에서 제적된 것을 회개하였다. “나의 모든 불행이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을 깨달았다...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본질상 부패한 것을 깨닫게 하셨기 때문이다...제발 주님, 나의 불순한 것을 제거시켜 주시고 찌꺼기를 없게 하소서. 그리고 열번이라도 나를 깨끗케 하소서”.19) 1742년 11월 7일자 일기에는 다음같이 적고 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같이 거룩하게’ 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런 행복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서, 내 자신이 불평스럽게 느껴졌다. 정오에 이르러 나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 주님, 제발 저를 온통 주님의 것으로 삼아주소서. 제가 영원히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20)
브레이너드는 “겸손, 자신을 비움,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확신”은 “구원의 믿음”에 필수적이며, “스스로 죽지 못한 사람은 결코 진실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못하고, 멸망한다"고 주장했다.21) 브레이너드는 하나님에 의하여 사로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속의 많은 부패“를 발견했으며 ”많은 이기적인 생각들과 세상적인 목적과 영적 교만과 자신을 높이는 죄악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22)
여덟째, 완전주의를 믿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을 흠많은 죄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 임재의 깊은 경험과 복음 사역에서도 크로스위숭에서 보는 바 같이 당시에는 불가능하게 여겨진 인디언 회심의 큰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전주의에 몰입하지 않았다. 1747년 5월 17일의 일기에서 다음같이 적고 있다. “오전에는 집에서 지냈다. 공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내 자신의 추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해 주셨다. 내 마음이 온통 죄로 가득 찬 것 같았다. 내 속에는 죄와 부패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처럼 생각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영적이고 거룩한 삶은 결핍되어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나의 게으름 만이 무성했다. 내면과 생활 가운데 있는 온갖 혐오스러운 것들이 내 눈앞에서 펼쳐졌다. ‘주여, 저는 죄인이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23) 그는 깊은 폐결핵으로 고통을 받았고 “천성적으로 우울증과 낙담에 빠지기가 일수였다”.24) 그러나 그는 통찰력을 가진 자였고 명쾌한 사고력과 정확한 판단을 하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영성은 단번에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다. 서서히 성숙하여 갔다. 그와 가까이 알고 장인이기도 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평가하기를 “그는 내가 사귀어 온 우울증을 가진 사람들보다 뛰어 났다. 이는 그의 판단의 특유함 때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사실 우울한 기질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질병에 대하여 잘 알고, 그 병세가 우울증 때문이며, 우울증의 영향과 결과라고 확신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25) 그의 신앙생활 전반기에 그가 지닌 우울한 심정은 영적 황폐함 때문이나 후반기에서의 풍부한 심정은 우울증 덕택이라고 생각된다. 후반기의 우울증이란 단순한 심리적인 우울증(melancholy)이나 심령의 황폐함(spiritual desertion)이 아니라 겸손(humiliation)과 경건한 슬픔(godly sorrow)이었다.26)
아홉째, 소외된 자들에 대한 선교의 영성이다. 그는 “시온의 미래의 번영”과 목사들이 자신들을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나라의 발전을 위하여 몸바쳐야 할 것을 역설했다. 그는 이 선교를 당시 백인교회가 적으로 간주했던 인디언에 대한 복음전파로 연결시킨 위대한 정신을 소유했다. 그는 선교문제에 대해서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뉴잉그랜드 사람보다 더 열심히라고 보았다. 그는 스코틀랜드 선교회의 보냄을 받아 뉴저지의 인디언 선교를 사역했던 것이다.
4. 비판적 고찰
첫째, 그는 청교도적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육신을 너무나 돌보지 않았다. 그는 병약한 몸을 이끌고 당시 백인에 비해서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인디언 가운데서 생활하면서 마땅히 돌보아야 할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았다.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과 그가 처한 형편은 너무도 고생스럽고 피곤했지만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건강을 해칠 정도로 사역을 감당하느라고 시험을 이겨낼 굳센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건강관리에 있어서 자신에게 허점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동생에게 선교사역을 이어주면서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신신당부했다.27)
둘째, 청교도적 신앙을 가졌으나 지나친 내세주의적 신앙이었다. 1742년 4월 25일 자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잘 있거라, 헛된 세상이여/ 내 영혼은 안녕을 고할 수 있노니/ 주께서 내게 가르치는 말씀 너를 포기하라는 것/ 너의 매력이 관능적 마음이야 사로 잡으려니와/ 하나님 친히 지으신 영혼에는 속수무책/ 유혹일랑은 삼가라/ 그치는 그때, 내 영혼 외치리/ 은혜로 확정되었어라/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임을/ 주께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 나에게 보여주시는 동안/ 너의 아름다움 시들어 가고/ 네가 거할 방이 나의 마음에는 없어라”28)
1742년 7월 4일자 일기에는 다음같이 피력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지겹기만 한 내 인생길이 짧게 끝났으면 싶었다. 하늘나라 내 아버지 집으로 불러 주셨으면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때를 늦추시고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을 깨닫고 그 분의 뜻에 맡겼다”.29)
1746년 7월 22일의 일기에 다음같이 적고 있다. “온 종일 낙심천만이었다. 삶을 다 살았다면 좋겠다. 삶의 종점에 있었으면 싶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삶만이 그리웠다.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나님을 향하고 싶었다. 아 정녕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30)
그는 성령의 임재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살았다. 그는 성령의 생동적인 사역 속에서 인디언 마술사를 회개시키고 많은 인디언을 살아계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했다. 만일 브레이너드가 이 지상에서의 심령과 복음 선포를 통하여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보다 확고한 신앙을 가졌다면 그는 자기 몸의 신유를 위하여 기도했을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결핵치유에 힘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몸의 치유에 관하여 기도하지 않았고 자기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창 일해 할 나이인 29세에 별세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도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하는 일이겠지만 이러한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맺음말
브레이너드는 21세에 회심하고 24세 하나님께 헌신하여 소외된 인종인 인디언 들 가운데서 살면서 이들의 선교에 심혈을 다 바쳐다가 29세 생애를 마감했던 무명의 선교사였다.
엔드류 머레이는 브레이너드 일기에 대한 추천서에서 다음같이 브레이너드를 평가한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헨리 마틴, 두사람은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에 대한 능력있는 증거자들이었다. 그들을 뒤이은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의 본을 따라 기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깊게 하게 되었다”.31)
그는 폐결핵을 앓아 심히도 연약한 육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았다. 그의 짧은 생애는 후세에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슴과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1740년대 미국 뉴잉글랜드를 휩쓸던 대각성운동의 주도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고, 존 웨슬리의 영성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주었다. 윌리암 케리와 헨리 마틴, 짐 엘리오트 선교사의 마음을 움직여서 복음사역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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