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번씩 일곱번 (마태복음 18 : 21 - 22)
교회 밖에서 비기독교인의 입장에서, 오늘의 기독교계를 보는 지성인
들의 눈은 개화기에 있어서 한국 기독교가 개개인의 文盲(문맹)을 퇴치
시키며 근대적 사회의식을 조성시키는데 선구자적 입장을 차지한 것과
는 아주 상반되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일종의 落後思想(낙후사상)에 젖
어 있는 소극적인 존재로써 인정받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교파 중에도 모교파는 담을 높이 쌓고 우물 안의 개구리
모양으로, 베구손이 말한 동굴 안의 사람처럼 외부와의 유대를 단절하
고 타교파와의 협력을 세속적인 것으로만 인정하고 독선적인 고자세만
을 취하고 있는 것을 우리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교회 밖의
비 신자로서 교계를 비평한다고 볼 때 『대체로 진부하다』『낙후성을
띠었으며 위화감을 준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
습니다.
물론 현세대는 신앙적 견지에서 신약시대요, 은혜시대입니다.
율법시대의 고루한 구습을 벗어버려야 하는 시대요, 부정적 사고방식
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율법의 『... 하지 말라
』가 아니라 『믿으라』『하라』의, 소극적인 사고에서 적극적인 사고
로 전환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13을 보세요.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사랑은 기독교의 진수요, 고린도전서 13장을 비롯하여 요한일서등 복
음서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신서까지 성경은 얼마나 많은 『사랑』을 설
명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납득시키고자 핵심을 사랑에
다 두는 서적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말한다면 사랑은 용서하는 것을 말합
니다. 죄를 범한 형제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죄의 제도를 설립하여 세 번까지는 용서했다고 합니
다. 『부처님의 얼굴도 세번까지』라는 말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질이 매우 급했던 베드로가 주님께 『일곱번까지 용서하오리까?』
라고 했던 것은 어지간한 관용을 나타낸, 즉 『이정도면 주님도 충분하
다고 하시겠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린 것이었지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써 인간적으로 최대
한의 용서를 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만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번까지
라도』라는 말로써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용서를 요청하고 계신 것
입니다.
누가복음 17:4를 보십시오.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여기서 더 명확하게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회개가 용서의 조건
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 하고 또 하고 죄를 범하여 그 가슴을 아프게
한 우리로 하여금 어디까지나 용서함을 받고 한량없는 관용의 은택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어디까지나 용서함을 받은 자이
므로 사람을 어디까지나 용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마태복음 6:14∼15를 보세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
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
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약 200억원)의 엄청난 빚을 졌는데
왕에게 울며불며 사정하니 왕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탕감
하여 주었습니다. 이 빚을 탕감받은 이 사람은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
다. 그런데 지나가다가 보니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약 20만원)을 빚
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왜 그 빚을 갚지 않느냐고 하며 그를 감
옥에다가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분노하여 그
사람을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200억 이상의
원죄와 자범죄를 용서함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죄의 빚
을 탕감받은 우리가 거기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
지 못한다면 얼마나 주님 앞에 모순된 존재이겠습니까?
이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얼마나 형제의 허물을 용서해 주었습니까? 어떻게 용서해
주어야 옳겠습니까? 우리는 아주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검토해 보고
다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의 복받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원수를 맺는 자는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것입니
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폭탄을 안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
다.
칼 바르트의 신학의 강조점도 『화해』입니다. 로마서 12:20의 말씀
처럼 원수를 용서해 주므로 그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아야 하겠습니다.
즉 피해를 당한 측에서 먼저 그의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상대방으로 하
여금 마음의 고통을 느껴 회개하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 15장
에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입을 맞추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하므
로 그 아들을 완전히 회개시켰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엔 간음죄를 짓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주님
의 판결이 나옵니다. 변명할 여지가 없는 여인의 가련한 처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법으로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신세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살
기등등하여 손에 돌을 들고 그 여인을 향하여 던지려는 무리들로 하여
금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여 다 쫓아 버리시고 그 여인을 용서해 주셨
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살해한 공산주의 학생을 자기의
아들로 삼고 돌봐주었으므로 『사랑의 원자탄』으로 오늘도 교회 교회
에서 작렬하고 있습니다. 과연 사랑의 원자탄은 용서하는 현시대의 신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은 『일흔번씩 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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