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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없으나 구별되신 하나님 (고린도후서 13:13)

by 고동엽 2026. 1. 19.

나눌 수 없으나 구별되신 하나님 (고린도후서 13:13)

하나님께서 교회 위에 복을 선포하실 때, 그 복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하늘의 질서가 땅의 심장에 내려앉는 순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는 이 축도는, 사도 바울이 긴 권면을 마무리하며 건네는 마지막 문장이지만, 사실은 교회의 삶 전체를 여는 열쇠요, 성도의 믿음을 붙드는 세 줄기 생명줄입니다. 그리고 이 축도의 중심에는 “나눌 수 없으나 구별되신 하나님” 곧 한 분이시되 삼위로 계시며, 삼위로 역사하시되 본질에 있어 하나이신, 경외로 떨며 예배할 신비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생각할 때, 머리로만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얼른 접어 두고, 손에 잡히는 쉬운 단어로만 하나님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화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멀리서만 바라보다 포기해야 할 대상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계시로 자신을 주셨고, 복음으로 자신을 나누어 주셨으며,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처를 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추상적 교리가 아니라, 구원의 실제이며, 신자의 호흡이며, 교회의 심장입니다. 이 축도는 하나님을 분해해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는 방식이 삼위로 드러난 고백입니다. 은혜로, 사랑으로, 교통으로. 각각이 분리된 선물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단일한 구원이 우리에게 닿는 세 갈래의 빛입니다.

먼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습니다. 은혜는 하나님 편에서 시작된 움직임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마음의 방향이 하나님께서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 굽어졌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었다’는 행위의 목록만으로 죄를 이해하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는 더 깊습니다. 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는 마음의 반역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미워하며, 자기 자리를 왕좌로 삼으려는 영의 질병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은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작은 도움 정도가 아닙니다. 은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창조적 능력이며,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법정적 선언이며, 원수 된 자를 자녀로 맞아들이시는 입양의 사랑이며,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십자가의 피입니다.

그 은혜의 얼굴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멀리서 ‘용서한다’고 외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죄의 무게를 자기 어깨에 얹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값싼 관용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공의의 대가가 치러진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증거가 아니라, 죄를 너무도 엄중히 여기시기에 아들의 죽음으로 처리하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감정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역사 속에 박힌 한 사건, 골고다의 피와 빈 무덤의 승리가 우리를 향해 열린 은혜의 문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이 붙드는 복음의 빛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선함이나, 어떤 결심이나, 어떤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로.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에게 주는 기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어 말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라면, 사랑은 그 행동의 심장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셔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십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는 영원부터 완전한 사랑과 기쁨과 교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 안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안의 넘침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사랑이며, 반역한 자를 기다리시는 사랑이며, 돌아온 자를 끌어안고 옷을 입히고 잔치를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코 성품 없는 감상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거룩하며, 그래서 죄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 사랑은 깊으며, 그래서 죄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둘이 함께 서는 자리에서 우리는 복음을 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이 두 길이 만나는 곳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종종 ‘내가 느끼는 사랑’만을 떠올립니다. 어떤 날은 마음이 따뜻해지고, 어떤 날은 기도가 잘 되고, 어떤 날은 찬송이 눈물로 번지고,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근거를 감정에 두면, 사랑은 날씨처럼 변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의 파도가 아니라, 언약의 바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실패한 날에도, 눈물의 밤에도, 기도가 말라붙는 때에도, 그 사랑은 후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확신은 내 마음의 온도에서 나오지 않고, 아버지의 변치 않는 약속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합니다. 내가 붙들지 못하는 날에도, 하나님이 나를 붙드신다. 내가 흔들리는 날에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신다.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 성도에게 주는 평안입니다.

이제 바울은 “성령의 교통하심”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가 생활로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은혜와 사랑이 객관적 토대라면, 교통하심은 그 토대가 내 삶에 실재로 스며드는 방식입니다. 성령은 단순히 ‘도움을 주시는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격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십자가에서 획득되었다면, 성령의 교통하심은 그 은혜를 우리 심장에 전달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영원한 뜻에서 흘러나왔다면, 성령의 교통하심은 그 사랑을 우리 안에 부어 주십니다.

“교통하심”은 단지 친교의 분위기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참여이며, 나눔이며, 실제적 결합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 그분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단순히 생각이 바뀌는 일이 아니라, 존재가 옮겨지는 일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아담 안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성령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믿음을 일으키시며, 우리 안에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은 교회 공동체를 세우십니다. 성도는 혼자 신앙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몸 안에서 신앙을 ‘살아냅니다’. 교통하심은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교제만이 아니라, 성도와 성도 사이의 교제를 포함합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곳에는 분열을 이기고 화해를 이루는 능력이 있으며, 자기 자랑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자랑만 남기는 은혜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나눌 수 없으나 구별되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나눌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구별되신다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동일한 위격이 아니라 참으로 구별되는 위격이심을 뜻합니다. 이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완전하게 포착할 수는 없으나, 성경이 밝히시는 경계 안에서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이시며, 삼위는 각각 하나님이시며, 삼위는 서로 동일하지 않으시며, 삼위는 영원히 함께 계시며, 구원 사역에서 각 위는 조화롭게 역사하십니다. 아버지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은 구원을 성취하시고, 성령은 구원을 적용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할 분담의 회사 조직도가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단일한 뜻이 삼위의 조화 속에 우리에게 닿는 구원의 서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도는 교회의 예배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예배는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는가’로만 정의되지 않습니다. 예배는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예배 가운데 은혜를 주시고, 사랑을 확증하시고, 교통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으로 우리는 찬송하고, 고백하고, 순종합니다. 삼위일체는 예배의 형식이 아니라, 예배의 실체입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기도할 때, 우리는 아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아버지의 뜻을 듣고, 아들의 복음을 듣고, 성령의 조명으로 깨닫습니다. 우리가 성찬의 떡과 잔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며, 성령의 역사로 믿음이 새로워지고, 아버지의 식탁으로 초대받은 자녀의 신분을 확인합니다. 모든 예배의 숨결 속에 삼위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신비를 입술로만 고백하고, 삶에서는 다른 신을 섬기기 쉽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만을 붙들며 아버지를 멀게 느낍니다. 마치 아들은 사랑이지만 아버지는 냉정한 심판자라는 오해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아들을 보내신 분이 아버지이십니다. 십자가는 아버지의 마음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또 어떤 이는 ‘하나님’이라는 막연한 말만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불편해합니다. 피와 대속, 심판과 공의라는 단어를 피하며, 따뜻한 종교 감정으로만 머물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은혜의 길이 아니라 자기의 의의 길입니다. 또 어떤 이는 ‘성령’의 체험만을 붙들며, 말씀과 교리를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성령은 말씀과 분리되어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에게 밝히십니다. 삼위일체를 바르게 아는 것은, 곧 복음을 바르게 누리는 길이며,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오래된 교회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떠올려 보십시오. 낮에는 햇빛이 창을 통과할 때에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밖에서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창은 그저 어두운 유리 조각의 집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빛이 비추면, 붉은 빛과 푸른 빛과 황금빛이 서로 섞이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장면을 이룹니다. 어떤 조각도 없어도 그림은 찢어지고, 어떤 색이 빠져도 장면은 무너집니다. 하나의 빛이 들어오지만 다양한 색으로 굴절되어 우리 눈에 풍성함으로 펼쳐집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도 이와 비슷합니다. 한 분 하나님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오지만, 그 빛은 은혜로, 사랑으로, 교통으로 우리 삶을 채우십니다. 우리는 색을 나눌 수는 없으나 구별할 수 있고, 구별할 수 있으나 분리할 수 없습니다. 빛이 하나이듯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빛의 풍성함이 다양하듯 하나님은 삼위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빛이 들어올 때, 어둠 속의 인생이 하나님의 그림이 되어 살아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축도가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나의 필요에 따라 조립된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계시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입니까. 조립된 하나님은 내 마음에 편안하지만, 나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계시된 하나님은 때로 내 자아를 아프게 하지만, 나를 살립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를 무너뜨립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의 고아 근성을 치유합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우리의 고독과 자폐를 깨뜨리고, 공동체의 품으로 이끕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새 사람으로 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 이 축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우리는 먼저 은혜를 입은 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어제의 성실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만이 끊어집니다. 동시에 낙심도 끊어집니다. 은혜는 교만을 꺾고, 은혜는 절망을 붙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자녀로 부르십니다. 실패가 나의 이름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죄책감이 나의 집이 되지 않게 하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회개와 순종의 길로 이끕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오늘 내 말에 절제를 주시고, 내 눈에 정결을 주시고, 내 손에 선행을 주시고,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신비한 체험만이 아니라, 성도의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는 거룩의 과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분열될 때, 해결책은 인간적인 타협만이 아닙니다. 다시 삼위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앞에서 모두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성령의 교통하심 안에서 용서와 화해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교회가 메말라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로그램을 늘리는 것으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복음이 다시 중심이 되고, 아버지의 사랑이 다시 확신이 되며, 성령의 교통하심이 다시 공동체를 따뜻하게 묶는 것으로 살아납니다. 개인의 신앙이 흔들릴 때에도, 우리는 삼위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은혜는 나를 의롭다 하시고, 사랑은 나를 자녀로 품으시고, 교통하심은 나를 끝까지 변화시키십니다. 한 분 하나님이, 전인격을 붙드는 구원의 손길로 우리를 감싸십니다.

그러니 오늘 이 축도를 단지 예배의 끝말로 흘려보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것을 예배의 시작으로, 한 주의 시작으로, 인생의 시작으로 받으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내 죄를 덮는 피로만 머물지 않고 내 삶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위로의 감정으로만 머물지 않고 거룩을 낳는 확신이 되게 하십시오. 성령의 교통하심이, 잠깐의 뜨거움으로만 머물지 않고 오래 참고 온유한 열매로 자라게 하십시오. 나눌 수 없으나 구별되신 하나님은, 우리의 지식의 장식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며, 이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이 참된 자유이며, 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교회의 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도의 끝은 사실 시작입니다. “함께 있을지어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은혜로 가까이 오셨고, 사랑으로 품으셨고, 성령으로 내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고독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버려지지 않습니다. 성도는 의미 없는 시간을 살지 않습니다.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당신의 죄를 끝내 끊어내고, 아버지의 사랑이 당신의 상처를 끝내 덮어 주며, 성령의 교통하심이 당신의 삶을 끝내 거룩으로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으십시오. 이해하지 못해도 경배하십시오. 다 설명하지 못해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신비가, 당신의 영혼을 울리고, 삶을 일으키고, 교회를 살리는 복이 되게 하십시오.


설교요약
고린도후서 13:13의 축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성도와 교회 위에 실제로 임하는 복의 선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대속과 칭의를 통해 죄인을 살리며, 아버지의 사랑은 언약적 성실하심으로 자녀 된 신분을 확증하고, 성령의 교통하심은 그 구원을 우리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 성화, 교회 공동체의 화해와 성장을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삼위로 구별되시며, 구별되시되 나뉘지 않는 신비 가운데 교회의 예배와 성도의 일상을 붙드십니다.

묵상 포인트

  • 나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내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근거로 서고 있습니까.
  • 하나님의 사랑을 감정의 기복이 아니라 언약의 확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 성령의 교통하심을 ‘체험’에만 묶지 않고, 말씀과 순종 속 성화의 열매로 살고 있습니까.
  •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있을 때, 삼위 하나님의 방식(은혜-사랑-교통)으로 풀고 있습니까.

강해
이 축도는 단순한 기원문이 아니라, 복음의 구조를 함축한 신학적 선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구원의 객관적 토대인 그리스도의 성육신, 순종,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승리를 가리킵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나 값싼 것이 아니며, 공의가 만족된 자리에서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부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언약적 성실하심을 드러냅니다. 아들을 보내신 분이 아버지이시며, 십자가는 아버지의 사랑이 거룩과 공의 안에서 역사한 자리입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개인과 교회에 적용하시는 사역으로, 거듭남과 믿음, 회개, 성화, 연합, 교회의 일치를 포함합니다. 이 세 표현은 분리된 세 복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단일한 구원이 삼위의 구별된 역사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석
고린도후서는 교회의 분열과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도전, 거룩의 문제 등 긴장 속에서 쓰였습니다. 축도는 그 긴장을 인간적 기술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서야 할 토대가 삼위 하나님의 은혜·사랑·교통임을 선포함으로 공동체를 복음의 중심으로 되돌립니다. “함께”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임재가 단지 개인의 위로가 아니라 공동체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은혜로 시작하고 사랑으로 유지되며 성령의 교통으로 자라갑니다.

원어 주석(헬라어-신약)

  • “은혜”에 해당하는 χάρις (charis) 는 호의나 친절 이상의 의미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구원의 선물과 그 능력을 포함합니다.
  • “사랑”에 해당하는 ἀγάπη (agapē) 는 감정의 강도보다 언약적 헌신과 자기 희생의 성격이 강하며, 성부 하나님의 구원 의지를 나타내는 데 자주 쓰입니다.
  • “교통(교제/나눔/참여)”에 해당하는 κοινωνία (koinōnia) 는 단순한 사교가 아니라 참여와 연합을 포함합니다. 성령과의 κοινωνία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적 나눔뿐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참여하게 되는 실재적 교제를 뜻합니다.
  • “함께 있을지어다”의 축복적 표현은 공동체 위에 임하는 지속적 동행을 시사하며, 하나님 임재의 언약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금언

  • 은혜는 죄인을 의롭게 하고, 사랑은 자녀로 품으며, 성령은 그 자녀를 거룩으로 길러 내십니다.
  • 삼위일체는 설명의 대상이기 전에 경배의 대상이며, 교리이기 전에 구원의 숨결입니다.
  • 은혜를 잃으면 교만하거나 절망하고, 사랑을 잃으면 고아처럼 살며, 교통을 잃으면 신앙이 고립됩니다.

신학적 정리

  • 삼위일체는 본질의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을 동시에 고백합니다.
  • 구원은 삼위 하나님의 단일한 뜻에서 나오며, 성부의 계획, 성자의 성취, 성령의 적용이라는 경륜적 질서 안에서 드러납니다.
  • 성도의 확신은 자기 내면의 감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와 아버지의 언약적 사랑, 성령의 내주와 인치심에 근거합니다(개혁주의적 확신의 토대).

주제별 정리

  • 구원: 은혜(칭의) → 사랑(입양) → 교통(성화와 교회)
  • 예배: 아버지께(대상) 아들의 이름으로(중보) 성령 안에서(능력과 조명)
  • 교회: 은혜 중심의 복음, 사랑 안의 가족됨, 성령의 교통 속 일치와 은사

목회적 정리

  • 성도에게: 죄책감으로 하나님을 멀리하지 말고, 은혜로 담대히 나아가며, 사랑으로 신분을 붙들고, 성령의 도움을 구체적 순종으로 연결하십시오.
  • 교회에게: 갈등의 순간마다 삼위 하나님의 방식으로 돌아가십시오. 은혜 앞에서 겸손해지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성령의 교통하심을 따라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십시오.
  • 예배 인도에: 축도를 형식이 아니라 복음 선언으로 선포하며, 회중이 “함께”의 약속을 붙들도록 목회적으로 적용하십시오.

성도들의 결단 및 적용

  •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다.
  •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의 먹구름보다 더 단단한 언약으로 붙들겠습니다.
  • 나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구하며, 말씀과 기도와 공동체 안에서 거룩의 열매를 맺겠습니다.
  • 나는 교회 안에서 내 권리를 주장하기 전에 은혜를 기억하고, 사랑으로 말하며, 성령의 화평을 힘써 지키겠습니다.

Full Source : Artificial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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