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실수 이사야39:장
*본문 사39장의 역사적 배경 주1)
히스기야는, 병들고, 앗수르의 침략의 위험 속에서는,
즉 위기와 환란 가운데서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평안하고 평탄할 때는,
승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때가 진정한 위기입니까?
환란과 위험이.. 진정한 위기입니까?
평탄과 안락이.. 진정한 위기입니까?
후자가 더 큰 위기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병도 치유함 받고, 앗수르 군대도 물리친 후에
그는 하나님께 약속했던 서원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죄와 실수를 범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내가 평탄하고 잘 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수를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의 실수를 진실 되게 고백하고
회개하여 다시 새 힘을 받아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될 때
하나님의 예비된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1절,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그 때에’
바벨론의 사절들이 히스기야 왕을 찾아온 것은, 왕의 병이 회복된 직후였습니다.
또한 앗수르를 기적적으로 물리친 직후였습니다.
‘므로닥발라단이..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은, 앗수르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두 번에 걸쳐 바벨론을 통치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주2)
병에서 회복한 왕에게 사절을 통해 선물과 축하의 서한을 보내는 것은
고대의 관례에 속한 일입니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사절들을 파송하면서, 외교적으로 내세운 명분은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그 사실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지만
(대하 32:31 참조).
진정한 속셈은 유다의 도움을 입어, 앗수르에 대항하는
연합 세력을 구축하려는 정치적 목적에 있었습니다.
▲2절,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창고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는지라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며’
히스기야의 기쁨은 사절들을 보내는 것과 같은 정중한 방식으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한 바벨론 왕의 태도에서 기인된 것이기도 하지만,
더 크게는 유다와 같은 약소국가가, 감히 바벨론의 군사 동맹 상대로
인정받고 있었다는 자부심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에게 궁중 보물.. 무기고를..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 왕이 바벨론의 사절들에게 궁중의 보물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보여준 것은
이러한 자부심의 외적 표현이며, 유다의 국력을 널리 과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남유다도 바벨론과 견줄만한 힘이 있다는 것이지요.
힘이 얼추 서로 비슷해야, 상호 협정이 성사될 것 아닙니까.
어쩌면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이 지리적으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예루살렘에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왕은 자기를 드러 내고, 자기 보물을 자랑하는 데 급급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 앞에 불신과 교만을 드러내는 짓이었습니다.
(대하32:24-25)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된고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으로 보이셨으나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저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게 되었더니”
역대하 기자는 이 장면을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신’ 것으로 봅니다.(대하32:31).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 받는 것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는 것보다, 은혜를 간직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로 내가 교만해진다면.. 차라리 은혜 안 받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나님께 병 치료함 받은 것.. 참으로 귀한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물질의 복, 건강의 복, 자녀의 복 받은 것..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하나님께 능력 받은 것..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복과 능력 때문에.. 내가 교만해 진다면.. 복과 능력 안 받는 것이 낫고,
그 병 치료함 받은 것 때문에 내가 교만해진다면.. 병 치료함 받지 않는 것이 더 귀한 것입니다.
가난한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물질의 복을 받았는데.. 내가 교만해진다면
가난한 자로 계속 사는 것이.. 더 귀한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병을 치료해 주시고,
복을 주시는 것, 내 자랑하고, 내 육을 위해 살아가라고 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나타내고 더욱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오직 예수를 위해 살아가라고 주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성경 말씀 중에서 좋아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라는
말씀입니다. 열왕기상, 하 역대상 하에 약 62번 정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나의 모습은 교만한 모습은 없는지, 불신은 없는지,
늘 살펴보시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왕은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기가 취함으로써
이 시험에 실패하였으며, 결국 이로 인해 유다의 바벨론 포로가 예고되기에 이릅니다.
▲3절,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온 것은, 바벨론 사절들이 떠난 직후였을 것입니다.
이사야라는 이름 앞에 ‘선지자’라는 직함이 언급된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으로서 공적인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히스기야 왕에게 3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1)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나이까?’
이에 대해 왕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강대국과의 동맹’에 대한 선지자의 부정적인 입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왕으로서
이 문제를 가급적이면 회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2)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이에 대해 히스기야 왕은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이 말은, 친선과 우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먼 나라에서 온 사신들을 환대하는 것은
왕으로서 마땅한 도리라는 점을 내세워, 자신의 잘못을 변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3)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
▲4절,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이사야 선지자의 세 번째 물음이 주어집니다.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왕의 대답은 매우 솔직합니다. 그러나 왕의 대답 속에 담긴 솔직함이
그 자신의 행동에 대한 참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습니다.
위에서 설명했지만, 히스기야가 보물과 무기고를 다 보여준 것은,
‘남유다’도 바벨론과 동맹을 맺을 만큼 ‘힘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 것이었고,
그런 교만과 불신앙이 하나님을 노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남유다의 힘은.. 군사적 동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서두부터, 이사야는 계속 예언했습니다.
아하스 왕 때는.. 아람과 북왕국이 연합해서 쳐들어올 때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는, 앗수르가 쳐들어올 때,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런 예언들을 다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교만해지거나 나태해졌는지..
바벨론과 동맹을 맺으려고, 자기의 국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책망이 주어집니다.↓
▲5절,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엄숙하고도 권위있는 신적인 divine 판결이 주어질 때, 전형적으로 쓰이는 표현입니다.
▲6절,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은 2가지였는데,
첫째로 예루살렘의 모든 보물이,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이 임한 것은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보다 보물(물질)을 더 의지하고
바벨론을 의지하였다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경고를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고, 뭔가 의지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옮겨버리십니다.
그것도 나의 대적에게로 옮겨버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킬 때까지.. 그 심판은 계속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히스기야 왕의 왕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환관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7)
실제로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은, 남유다의 왕족들과 귀족들과 용사들 1만 명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 숫자에 포함되지 않은 평민들도 더 많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명확하게 표현됩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미래는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옮겨지게 되니,
이사야서의 <제1부가 앗수르와 관계>했던 방식으로,
이제 본서의 <제2부는 바벨론에 관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큰 형벌(바벨론 포로)이, 히스기야의 단순한 잘못으로 기인되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큰 구속사의 작정 속에, <바벨론 포로>가 이미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서 서두에, 남유다의 잘못으로
벌써 앗수르(이방)에 포로로 잡혀갈 것이 예언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유예되어 있다가, 드디어 바벨론으로 변경되어 터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계속 범죄하면, 이방에 잡혀갈 것은,
이사야의 예언에 앞서,
신28:36, 레26:39에 벌써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7절,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바벨론으로 옮겨지는 것은, 히스기야의 보물만이 아닙니다.
장차 그에게서 날 자손 중 몇 명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서
왕궁의 환관이 될 것입니다.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이 미래형 표현을 통해서, 당시 히스기야가 아직 자손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몇 해 후에 므낫세를 낳습니다.
본 예언의 성취 여부에 대하여는 왕하24:12~16, 단 1:1~7을 보세요.
▲8절,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히스기야 왕은 선지자의 말을 듣고
‘당신의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혹은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 부정적인 의미로 이 말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히스기야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파멸 선고가
그 당대에는 임하지 아니하고, 그 후손들에게 일어날 것을 생각하며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는 말은
그러한 이기심의 절정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파멸의 선고 중에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때를 늦추어 주신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대하32:26)
이와 유사한 경우에 대하여는 왕하22:18~20을 보십시오.
따라서 히스기야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보는 많은 주석가들과 더불어
‘좋소이다’라는 말은,
1)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가 ‘옳습니다’는 사실에 대한 엄정한 인식과
2) 그리고 형벌의 때를 늦추어 주신 것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크나큰 자비로움에 대한 감사가, 복합적으로 함축된 개념으로 파악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회개의 고백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순순히 인정한 것은
자신의 행동이 정말 경솔했고 어리석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실수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히스기야 왕의 태도로 인해
성경은 그를 경건한 왕으로 인정하였고
그를 다윗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함으로써 존경을 표하였습니다.
(대하32:33) “히스기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저를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저의 죽음에 존경함을 표하였더라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1) 하나님께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함부로 가볍게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이 주신 나라의 평안과 풍요로움을 소중하게 여겨야 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다짐했던 말도, 책임질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이러한 세 가지를 모두 다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물질의 복도 자기 자랑으로 연결시켰고,
-자신의 기적적 치유도, 사람 앞에 교만으로 증거하였고,
-하나님께 다짐했던 약속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영적 무지함을 보였습니다.
히스기야처럼 병들고 어려울 때는.. 누구나 다 하나님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먹을 만하고, 살만 하니까.. 더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세상 의지하다가, 힘 있는 사람 의지하다가
악한 사탄에게 모든 물질 다 빼앗기고, 그 후손이 포로로 잡혀가는
히스기야 처럼 되지 마시고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온전히 오직 예수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이 세상사람 중에 실수를 안 하고 사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로 인해 오히려 복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실수로 인해 화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도 모두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실수가 오히려 복이 된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실수도 인해 화를 당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직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파는 실수를 범하고
하나님께 저주를 당하였습니다.
사울 왕 역시도 제사장이 행해야 하는 제사를 자신이 드리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룟 유다도 은 30에 예수를 파는 실수를 범함으로써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가하면 모세 역시도 사람을 죽이는 실수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다윗 왕도 밧세바를 간음하는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실수를 범하였지만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실수를 범하였지만
이방인의 사도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어떤 자는 죄와 실수를 범하고도, 복을 받고
어떤 자는 죄와 실수를 범하고, 저주를 받고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인간 누구나 실수를 범하고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아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인간이 실수를 범하고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은 죄와 실수를 범하고도,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를 받은 자들은
한결 같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려고 하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와 실수를 범하고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는 믿음을 보였기 때문에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사탄의 미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죄와 실수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하와야 너희들 어디 있느냐?” 이 부르심은
곧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자 부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변명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를 내려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
주1) 사39장의 역사적 배경
이사야 39장의 역사적인 배경은 히스기야 왕이 병에서 치유된 B.C. 701년 경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 제국의 위세에 눌려 큰 힘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앗수르의 왕 산헤립을 피해 엘람 지방에 거하고 있는 동안
유다의 히스기야와 동맹을 맺고자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반앗수르 정책을 택했던 왕이었기 때문에
유다와 동일한 처지에 놓여 있던 바벨론과 동반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히스기야가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지만
당시 국제 정세나 역사가의 증언을 감안하면
히스기야가 므로닥발라단과 군사적 동맹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바벨론과 맺은 동맹은 정치 외교적으로 지혜롭게 보일지 몰라도,
신앙적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히스기야의 잘못된 행실을 지적하고
그에 대한 징계를 예언하셨습니다.
1절 말씀은 ‘그 때에’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그 때’는 히스기야가 불치병에서 치유 받은 때를 의미합니다.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한 히스기야는 영적으로 매우 고양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유다와 동맹을 맺고자 했던 바벨론 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바벨론 왕이 보낸 것은 글과 예물인데
글에 해당하는 ‘쎄파림’은 동맹 체결과 관련된 외교 문서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절단을 맞은 히스기야는 사절단에게 각종 보물과 모든 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2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국가 기밀을 유출하는 엄청난 실수입니다.
국가 차원에서의 실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주변국을 의지하며
유다가 바벨론과 동맹을 체결할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애써 입증하려는 것이었기에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 위험한 실수였습니다.
한 국가의 통치자가 언제 적으로 변할지 모르는 나라에
자신의 경제 규모나 군사력을 속속들이 다 알려준다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 않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불치병에서 고침 받은 히스기야는 분별력없이
자신의 통치권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사절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주2)
맨 처음에 그는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대항하여
B.C. 721~710년까지 12년간 바벨론을 통치했습니다.
B.C. 710년에 사르곤 2세에 의해 강제로 폐위당한 뒤 재기하여
산헤립에 대항하여 다시 바벨론의 군주가 되었습니다.
여기 언급된 사건은 이중 후자의 연대(B.C. 701년 경)에 속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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