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언약 마5:31~32
31.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32.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
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언약이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혼을, 언제든 깰 수 있는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
설교를 계속 하다보면 가끔 곤란할 때가 있습니다.
한 자리에 있는 여러 회중에게 말씀 드리는 것이기에
주제에 따라서는 몇몇 분에게는 그 날 설교가 해당 안 되는 경우고 있고요
또 어떤 분께는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설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면 이혼에 관한 이 본문과 설교를 피해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되면 또 신앙에 매우 중요한 문제를 터치하지 않고
지나가게 되지요.
이럴 경우 설교자는 아주 곤혹스럽습니다.
그런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제자들의 ‘더 나은 의’에 대해 예를 들면서
예수님은 세 번째로 ‘이혼’의 문제를 거론하십니다.
산상설교의 순서를 따라서 설교를 하다보니
이 본문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는 이혼의 아픔을 겪으신 분들이 일부 계십니다.
그분들께는 매우 듣기 거북하고 불편한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런 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꽤 오래 전에 일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상담소에서 이혼을 당하고 아파하는 자매를 만나 상담했습니다.
상담을 마치고 응접실로 나오는데,
그 지역에서 꽤 존경받던 목사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상담사역자는 내담자 자매님을 위해서
그 목사님께 기도해 달라고 즉석에서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그 인자하는 모습과는 달리
아주 냉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는 이혼한 죄인을 위해서는 축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당사자 앞에서 말을 하더라는 겁니다.
그 상담사역자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제게 전화해서
‘어쩌면 그럴 수 있습니까?’며 제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저는 그 상담사역자의 말을 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픈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 면전에 대놓고 말할 수 있는지요.
▲이혼의 과정은 다양합니다.
인관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는, 언제나 얼마정도의 잘못을 서로 나누어지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경중을 따졌을 때, 이혼 당한 사람이 있고, 이혼의 사유를 만들어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쌍방을 모두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해자는 그 죄를 따져서 회개하게 해야 되겠지만
피해자는 회복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이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런 상황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죠.
마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율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신24:1절을 느슨하게 인용한 것입니다.
이 율법에서 이혼은 남편이 강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죠.
당시만 해도 아내는 이혼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한 표현 그대로
이혼은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경우에 이혼증서를 써 주라는 것이죠.
그래야만 여자가 다른 사람과 재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시 신24:1절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남녀가 결혼하고 난 다음에 남편이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하여
아내와 같이 살 마음이 없을 때는, 아내에게 이혼증서를 써 주고
그 여자를 자기 집에서 내 보낼 수 있습니다’ 신24:1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되면’입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혼은 쉽기도 하고, 어려운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혼에 관한 율법은
남성들의 욕망(새 장가)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것이죠.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거든’ 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성적인 죄’로 한정하십니다.
그 외에는 어떤 구실로도 아내를 버릴 이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음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라는 말은
‘음행을 했을 때는 언제나 (이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음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라는 조건을 없애고
그냥 ‘남편은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 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 뜻은, ‘음행을 한 경우라도
할 수만 있으면 아내를 버리지 말아라’
그런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남편이 아내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폭력은 ‘아내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혼에 대한 율법은
이혼을 허가하거나 조장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이혼할 경우에 대비해서
최소한의 (여성) 인권을 보장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성들의 이기심과 욕망은, 그 율법을
‘이혼에 대한 허락’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함부로 이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남편들이 아내들에게 행하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갑질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이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버림받는 것은
가장 심한 갑질을 당한 것입니다.
결혼은 한 여자와 한 남자가 각각 절대적인 존엄성을 가지고
연합해서 서로를 섬기며 한 몸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정에 따라서 배우자를 바꿔 쓸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얼른 보면 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내를 버리면, 아내로 하여금 간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혼 당한 여인과 결혼하면, 그 남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혼증서를 써 주면, 법적으로 결혼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인데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한 번 맺은 결혼관계를 영원한 언약으로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관계를 ‘계약 contract’라고 생각합니다.
계약은 조건에 따라서 언제든지 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은 결혼을 ‘언제나 무효화 시킬 수 있는 ‘계약 contract’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계약’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이익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신의와 관계가 더 중요하다 생각했죠.
예를 들면, 세입자가 월세를 몇 달이나 못 내도
주인은 참고 견뎠습니다.
직원이 계약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해도, 참아주고 견뎌주면서
그 직원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습니다.
직원이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래도 내 평생직장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직장에서 버텼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모두 다 자기 이익을 중심으로 행동합니다.
내게 이익이 되면 계약을 지키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언제든지 계약을 깨뜨립니다.
달세가 한 두 달만 밀려있어도
5년~10년 같이 했던 세입자를 당장 내보내는 것이 요즘의 추세입니다.
그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오래 다닌 직장이라도, 더 좋은 기회가 왔다 싶으면
뒤돌아 보지도 않고 직장을 떠나버립니다.
미국 젊은이들의 평균 이직 기간이 2년이 채 안된다고 합니다.
더 좋은 기회를 위해서 직장을 버리는 것은
성공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덕목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평생 직장’을 꿈꾸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치부됩니다.
이런 시대에 살다 보니까, 심지어는 결혼 마저도
언제든지 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혼이 다반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본문을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 특히 가진 자들의 행태(쉽게 이혼)였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결혼관계는
함부로 깨뜨려서는 안 되는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반 세상 용어에서 ‘계약’과 ‘언약’은 동의어로 쓰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 두가지 단어가 전혀 다릅니다.
‘계약’은 영어로 contract 이고,
이것은 조건에 따라 깰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언약’은 covenant 은
일방적이고 영원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깰 수 없고, 깨지지도 않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맺은 여러 ‘언약 covenant’이 나옵니다.
그 여러 언약 중에서 최고의 언약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예언되었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통해서 맺어진 ‘영원한 사랑의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사랑과 헌신을 경험한 제자라면
그런 (언약, 계약을 소중히 지키는) 태도로 모든 관계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주신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산상설교는 무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의 말씀은 ‘자연인’으로서 우리 모두가 지켜야할 지침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은혜안에서 거듭난 ‘제자’들을 위해서 제시된
높은 이상, 하나님 나라의 삶의 법칙입니다.
‘제자’가 되고 ‘제자’로 자라가고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라보고 추구해야할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인해서
구원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저 자신도, 자신이 맡고 있는 모든 관계를 ‘계약’이 아니라
‘언약’의 모델 위에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따라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세상,
그래서 계약서에 싸인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계약조항을 무효화시켜버리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혼은 물론이고
내가 맺는 모든 관계를 *직장관계, 교우관계, 친구관계 등
하나님 안에서 신의를 지키기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결혼을, <언약>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계약>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다릅니다.
계약이라고 보면, 조건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깨뜨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결혼을 언약이라고 보면,
가장 큰 위기인 외도의 경우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힘쓰고
또한 주님의 도움으로 극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부 중 한 편이 외도를 했다면
다른 한 편이 그것을 용서하고, 그 아픔을 극복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자연인의 본성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요,
제자로 살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배신한 그 배우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제 가까운 친구 중에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외도로 인해서 깨질뻔한 결혼관계가
두 사람이 진지한 영적인 노력을 통해서
다시 회복되고, 지금은 과거보다 더 행복한
부부관계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께서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한계를 아시기에, 숨구멍을 내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진짜 하고 싶은 말씀은
‘음행한 경우에라도 배우자를 버리지 않을 만큼 제자로 성장하기를 바란다’이지만
제자라고 해서 다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니까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라고 숨구멍을 조금 주신 것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다면 갈라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행을 한 경우에는
무조건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이혼해도 된다는.. 그런 뜻은 아니지요.
▲이렇게 본다면, 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혼은 어떤 경우에도 죄다, 재혼은 다 죄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예수님 말씀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명기 24:1절의 율법을 대신할만한
새로운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혼과 재혼은 죄다’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제자들이 지향해야 할
높은 기준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제자라는 사람이, 믿는다는 사람이
배우자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거나,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가정을 망가뜨리거나
혹은 외도를 해서.. 이혼의 사유를 제공했다면
제자로서 심각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성격적인 문제로 인해서, 배우자와 가족들을 지속적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면
그것도 역시 심각한 실패의 증거입니다.
배우자와 가족들 위에 군림해서
숨도 쉴 수 없을만큼 압박하고 있다면
그것도 역시 실패의 증거입니다. *이혼 사유라는 뜻
진실로 제자로 살아가려는 사람이라면
그 변화의 증거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들에게
느껴질 수 있게 해야 되는 것이지요.
▲반면에, 이혼의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은 결혼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는데,
배우자의 폭행, 중독, 외도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이혼을 당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매도하고, 정죄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입니다.
그분들은 피해자이지요.
그분들은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할 대상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른 사람들의 눈길과 수군거림으로 인해서
교회를 잘 다니다가, 교회가 (본인에게) 가장 필요한 시기에
교회를 떠나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주위 눈 때문에
배우자가 이혼의 사유를 만들어내는 경우,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제 친구처럼, 피해를 당한 쪽에서
피해를 입힌 배우자를 용서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지요.
물론 피해를 입힌 배우자쪽에서 진실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경우,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먼저 용서하고, 품고, 견디기를 힘쓸 것입니다.
피해를 입힌 배우자가 끝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차선의 악’(갈라섬)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울러 살필 것은, 이혼하지 않고 결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이혼한 사람들보다 자신들이 더 의롭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혼의 관계안에서 지옥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죠?
혹은 헤어질 수 없어서, 그냥 참고 무덤같은 삶을 사는 부부들도 많습니다.
진실하게 믿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 완전하고 영원한 언약을 모델로 삼아서
서로를 더욱 더 사랑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지금 부부사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혼을 생각해 볼 정도로 힘든 상황에 있는 분이 계십니까?
먼저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면서
성령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혼의 사유를 제공하고 있다면
성령께서 그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회개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무릎 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 한, ‘모든 잘못은 다른 사람에게 있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 라고 여깁니다.
혹시 여러분이 배우자가 만들어낸 이혼사유로 인해서
피해를 입고 있다면
배우자를 품고, 견디고, 도울 수 있는 힘을
기도로 구하기시 바랍니다.
혹시 그런 생각이 드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내 남편/아내는 더이상 저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라면, ‘과연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을 자격 있는지?’를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격에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변함없이 집요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 사랑으로 우리의 배우자를 품고, 견디고, 사랑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지금은 불가능해 보이는 화해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 모든 노력을 다 하고도, 만약 안 될 때는
그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이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차선의 악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여쭈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결혼을 하나님 앞에서 맺은 영원한 언약이라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혼을, 언제든 깰 수 있는 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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