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시키는 능력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겔37:9 폴 워셔 목사님 설교 출처
◑1. 성령의 능력을 간구합시다.
▲아예 기도로 구하지도 않는 성도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역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주시려다가 ‘보류된’ 영적인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게 기도하면, 성경에 약속된 모든 영적인 축복과 능력을 다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에게 나타날 때, 거기엔 한계가 없습니다. 무한정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임재가 제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잘못이지, 하나님이 고갈되시거나 피곤하셔서,
그 능력과 임재를 살짝만, 조금만 보여주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영적인 파워/하나님의 임재
이런 것들을 충분히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비실비실 거리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것들을 아예 구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여러 번 구해보았으나 좌절을 경험해서 영적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서 그렇든지,
아니면 그런 것들보다, 세속적, 현실적, 물질적인 것들을 더 많이 구하고,
그런 영적인 것들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어쨌든 지금 우리는, 그런 영적인 파워들을 기도로 구하는 것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영적 축복(파워)들을 ‘받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있지요...
▲영적 체험의 세계는 깊고도 풍성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그 얼마나 풍요한 잔치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영적인 파워/하나님의 임재
이런 것들은, 풍성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제한으로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은.. 마치 큰 기쁨의 바다sea of joy를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분의 임재는 ‘무제한적’이란 뜻입니다.
성령님으로 인도 받는 것이
마치 다른 어떤 실제적인 존재로부터 인도받는 것처럼,
오늘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의 역사는, 현실적이고, 실제적입니다.
그냥 모호하고 어렴풋하게 '성령님이 동행하신다. 도와주신다'가 아닙니다.
제가 사역을 진행하지만,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마치 성령님이 제 곁에서, 실제적으로 저를 대신해서 이끌어 주신다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지금 매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저 폴 워셔는 신학자가 아닙니다만..
저는 지금 여러분들이 절실히 필요한 것들, 즉 영적인 축복들 에 대해 설교하고 있지만,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저의 이런 설교에 대해
‘신학적으로 검토해봐야 되겠다.’ 하며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 저는 조직신학자가 아닙니다. 저는 교수도 아닙니다.
신학자들이 우리 신앙의 방향을 올바로 잡아주는데 대해, 저는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신학적으로 논하는 것은 아니고)
저는 하나님이 제게 주신 은사대로, 제 신앙체험으로
지금 여러분께 이렇게 설교하고 있습니다.
▲제 연약함이, 저를 하나님께 달려가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평생토록 물질적+영적으로 가난하게 지내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평생토록 연약했고, 남들만큼 민첩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평생토록 늘 두려워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가지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 모든 제 연약함 들이
저를 그분께 달려가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It causes me to run to Him!
그리고 제가 그분께 달려갔을 때,
거기에는 큰 영광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큰 권능이 있었습니다.
풍성한 생명이 있었습니다.
◑2. 목회 행정에 만족하시면 안 됩니다.
▲‘행정가’가 아니라 ‘선지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올바른 신학/신앙적 지식’이 아닙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마치 마른 뼈들처럼 바짝 메말라 있는데,
에스겔이 마른 뼈들에게 명령했던 것과 같은 일(영적 능력)이 지금 필요합니다.
‘마른 뼈들아, 살아나라!’ 라고 외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예,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학자도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 시대에 제법 많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절실히 부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우리 현실을 보면,
목회를 마치 비즈니스를 경영하듯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조직이 커지면 그것도 필요하겠지만요..
목회자가 자기 정체성을 마치 ‘행정가, 관리인’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행정적 관리는 깔끔하게 하는데, 무슨 관공서처럼 말입니다. 물론 필요하지요.
문제는 목회자에게, 에스겔 같은 ‘선지자적 정체성’이 점점 사라지는데 있습니다.
성경에는 사도의 할 일이 ‘기도하고 말씀전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인데,
실제 일선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리인’이 행정적 일을 처리하는데 다 소진해 버립니다.
그래서 일을 다 마치고 저녁에 ‘기도하고 말씀 연구하려면’ ..
지치고 피곤해서 이내 잠들어 버리고 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삶 위에 있어야 되는데,
행정적 일에 바빠서 ... 요즘 에스겔 같은 권능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3. ‘기도의 능력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없으면, 마른 뼈들이 절대로 살아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행정적 능력만 갖고서는 안 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권능으로 임하셔야’ .. 죄인들의 영혼이 구원 받습니다.
그래야 그들이, 자기들의 죽음 가운데서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에스겔의 설교를 듣고, 죽은/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여호와의 군대가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신학자보다, 선지자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마른 뼈들이 죽음에서 일어날 때,
그들은 아직 성숙되지 않습니다.
그때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품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예, 그런 성장 시기에는 성경적 지식도 상당히 필요할 것입니다.
성경에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호4:6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신학자, 교수님들은.. 그런대로 있다고 봅니다.
그런 지식을 가르쳐 주실 분들 말입니다.
그런데 일단 먼저 ‘죽은 뼈’들이 살아나야,
그 다음부터 말씀을 가르쳐 성숙에 이르게 할 터인데..
아예 ‘마른 뼈’들이 가득한 가운데는.. 다 죽어 있는 상태에서는..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들어가 살게 하라!’ 겔37:9
라고 외칠 선지자가 급선무입니다.
사방에, ‘마른 뼈’들이 그득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영혼이) 살지도 못했는데, 뭘 가르쳐서 어떻게 영적 성숙을 시키겠습니까!
외람되지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바짓단을 걷어서, 여러분의 무릎을 좀 보여주십시오!
책상에서 공부하는 분들은 있는데,
바닥에서 무릎 꿇은 분들은..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식도 있었지만, 기도하는 중보자였지 않았습니까!
▲패배주의를 떨쳐버리십시오.
‘나는 해 봤는데 안 되더라!’
아닙니다. 당신은 아직 간절히 기도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 하나님의 능력/영적인 파워/하나님의 임재..
이런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간절히 무릎 꿇고 기도해 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마 다른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에스겔처럼,
하나님의 능력/영적인 파워/하나님의 임재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른 뼈들을 향하여 대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패배주의에 사로잡혀서,
자기 죄악에 그대로 사로잡혀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죄악된 삶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아예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기 삶이 아주 그렇게 고착(세팅)되어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죄악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십니까?
왜 무릎을 꿇고, 그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주님께 울부짖어 기도하지 않습니까!
왜 그 죄악에서 자유할 때까지,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하지 않으십니까!
▲지금 전반적으로 ‘기도’가 부족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설교하고, 설교하고, 또 설교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단 한 번이라도, ‘성령의 나타남’이 있습니까?
맞습니다. 사람들은 설교를 통해서 변화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령은, 기도를 통해서도 변화 받습니다.
제가 한 번 질문 드립니다.
당신의 기도를 통해 변화된 사람이, 지금까지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당신은, 특정한 몇몇 사람을 정해서,
그들의 변화를 위해서, 조용히, 지속적으로, 지금 당신은 기도하고 계십니까?
그런 중보기도를 위해서
무릎을 꿇어 싸우고, 또 싸우고, 몸부림치고, 또 몸부림치고 계십니까?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날 때까지, 당신은 기도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내가 중보기도 해 준 그 사람이,
그의 삶 속에서, 비록 명쾌히 설명할 수 없지만, 성숙과 빛과 생명이 나타나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능이 그에게 역사하심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기도의 사람'이 맞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얼마나 빠지지 않고 새벽기도에 나가든지.. 아직 '기도의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내 기도를 통해 저 사람이 마침내 변화되는.. 그 경지까지 반드시 나아가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은밀한 개인기도가 있으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능력의 하나님이, 여러분 가운데 거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신의 은밀한 기도 중에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약 나에게 개인적인 은밀한 기도의 시간이 없다면,
그저 회중으로 모일 때만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혼자서 골방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없다면,
나에게.. 하나님이 동거하시는 가운데 나오는 능력은.. 내가 소유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당신의 삶속에서 현실입니까?
아니면 그것이 당신에게 그저 이론적이고, 공허한 말입니까?
하나님의 임재.. 이런 표현을 여러분이 너무 못 들어보셔서,
자기 귀에 생소하게 들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 폴 워셔 목사는 너무 체험적인 신앙(임재 등)에만 치우친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집에 돌아가셔서, 오래 된 책들을 한 번 꺼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고전들을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역사의 부흥의 사람들의 설교를 한 번 읽거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 시대의 기독교는 좀 방향/강조점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능력과 권세가 필요하지, 행정이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의 지도자가 된 다는 것은..
그저 깔끔하게 행정적인 일을 잘 처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에게서 성령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야 합니다.
신학도 필요하고, 신학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성령에 감동된 신학자가 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는 그 하나님은,
너무나 크신 능력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그분을 가까이 섬기면서도, 만약 성령의 능력과 권세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건 주님을 가까이에서 (지근거리에서) 섬기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개인 경건의 시간, 개인적 경건의 삶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4. 기도의 능력자가 되기를 사모합시다.
▲기도로 ‘싸우는’ 법을 배우십시다.
당신의 삶속에 나타나는 모든 힘든 문제들
당신의 몸에 망가진 모든 것들, 질병이나 정신질환 등은,
하나님이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을 무릎 꿇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런 문제들을 안은 채로,
기도로 싸우고, 기도 가운데 갈등 하십시오.
제가 지금 이렇게 강대상에서 설교하고 있지만,
그냥 하루 종일 딴 짓하다가, 방금 강대상에 올라와서 고함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오늘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기도로 ‘싸우다가’, *영적 전쟁을 뜻함
지금 이 시간에 강대상에 올라와서, 이제는 고함지르며 ‘싸우고’ 있습니다.
기도 시간에 승리한 사람은, 기도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은,
설교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상담을 하든지.. 현실에서도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 사역의 승패는.. 이미 우리의 기도시간에 얼추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거우십니까?
찬송가에는,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 때가 가장 즐겁고, 귀하다고 했습니다.
영어 작사자는, 기도하는 그 시간이
자기에게 ‘가장 달콤한 시간sweet hour of prayer’이라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나의 가장 달콤한 시간’이 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는 작게 할수록, 기도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기도는 많이 할수록, 기도가 더욱 쉬워집니다. ‘기도의 빈익빈 부익부’ 입니다.
더 많이 기도할수록, 우리는 기도에 더욱 더 깊이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시간이 달콤해지고, 기도가 쉬워질 때까지’ 기도에 몰입해야 합니다.
우리가 자꾸 기도를 힘들게만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기도를 작게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매일 그런 경험을 할 수는 없겠지만,
종종 가끔씩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 이상하다. 잠간 기도한 것 같은데.. 벌써 1시간이/2시간이 훌쩍 지나갔네.
아무래도 시계가 잘못된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갔지?’
기도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마찬가집니다.
정말 몰입해서 연구/과업/데이트/무슨 일을 하다보면
마치고 나서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을 보고, 스스로 깜짝 놀랍니다.
기도하고 나서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을 보면, 크게 신비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정말 몰입하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기도하다 시간이 훌쩍 지나는) 경험을, 만약 일년에 한 번도 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도생활은 그야말로 초보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로, 영적인 문제들을 돌파하는 능력을 기릅시다.
기도로 뚫지 못할 걸림돌은.. 세상에 없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려는 어둠의 세력에, 우리가 너무 쉽게 항복하고 있습니다.
싸워볼 생각도, 의지도 없이.. 그냥 고지를 내어주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기도로 싸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의 주권’ 운운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세상에 만연하는 어둠의 세력과, 먼저 기도로/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당신은 이 세상이 점점 더 어두워가는 것을,
모두 하나님의 탓(주권)으로 돌리실 작정이십니까? - 안됩니다.
왜 미국이 더욱 더 어두워져만 가는 현실에
우리가 순응하고 받아들여야만 합니까?
-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우는 기도자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5. 목표는 '회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뭔가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기대’조차 하지 않는 상태가.. 지금 되어 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살펴보니.. 다들 ‘기도’가 망가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강대상에서도, 통렬한 설교를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개인기도시간에 승리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강대상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설교한 후에, 가끔 후회하고, 회개하기도 합니다.
얼마나 많은/적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얼마나 유창하게 설교를 잘 했느지/못 했는지 때문이 아니라,
그날 설교에 만약 회심자(성령의 역사로 자기 삶의 방향을 회개하고 바꾸는 사람)가
만약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는 설교한 후에도, 괴로워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회중들이 설교를 나이스하게 잘 들었다고, 그게 잘한 설교가 아닙니다.
회중들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마음에 찔림을 받고서,
자기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즉 회심한converted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와야
그래야 제대로 된 설교가 아닙니까!
우리는 ‘아무리 해도 해도 안 되네’ 하는 패배주의를 떨쳐버리십시다.
성경을 보십시오. 그런 패배주의가 약속되어 있습니까?
아닙니다. 기도하고 싸우면, 반드시 된다는.. 그런 약속들만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약속들을 전혀 믿지 않는 것입니까?
왜 ‘에스겔의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군대가 되는 환상’을.. 우리가 믿지 않으십니까?
왜 ‘저 산을 명하여 바다로 던지운다는 약속’을 믿지 않으십니까?
왜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믿지 않으십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promises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교훈 precept 이 아닙니다! 성경을 교훈 수준으로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여러분, 지금도 과학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발명은.. 연일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모든 발전과 발명과 개선보다도, 더 놀라운 일은,
바로 ‘복음에 의해, 죄인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떤 기적보다도, 어떤 과학적 진보보다도, 더 놀라운 일입니다.
지옥의 영벌에 처한 운명을 가졌던 인간이.. 돌이켜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복음의 소망’을 갖자는 것입니다.
‘과학 기술의 눈부신 진보’를 보면서, 한숨만 짓고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 전도자는, 그런 프라이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기독교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회심하고, 새롭게 변화 받는 일들이 아주 드물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원인들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우리에게 ‘기도가 부족’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능력은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로>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그 능력을 구하십시오.
죄인들을 변화시키는 능력!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능력!
그것이 바로 에스겔의 능력이요, 그가 가졌던 ‘환상’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런 능력을 나눠주기 원하시고, 성경에 약속도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구하지도 않고,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들 보란 듯이 성공하고, 크게 가시적 업적을 이뤄내는 것만 바라기 때문인가요?)
사람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사람들의 회심을 위해 씨름하십시다.
성경적인 교회의 확립을 위해 씨름하십시다.
그것은 무릎으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을 하실 것이라는,
그 믿음이 우리 각자에게 생길 것입니다.
기도를 몰입해서 안 하니까, 그 믿음이 안 생기는 것입니다.
패배주의가 아니라, 그 일(사람들의 회심)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오늘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주제별 설교 > 회심설교 19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심 P2 눅23:40~43, 눅19:9, 벧후2:21~22 (0) | 2024.12.31 |
---|---|
회심과 회개 행20:21 (0) | 2024.12.31 |
개혁자 루터와 칼빈의 회심 시편22:1~2 (0) | 2024.12.29 |
앤드류 머레이 회심일기 롬10:3 (0) | 2024.12.29 |
시(C).S. 루이스의 3번의 회심 (0) | 2024.12.29 |
댓글